소설리스트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14화 (14/50)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14

“하 대리. 그게 무슨 말이야? 조 상무를 조사하다니?”

박순호 지점장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렇게 묻는다.

애초에 인수처가 KG로 내정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거기에 조성환 상무가 관련되어 있을 거란 것도 당연히 모를 밖에.

다만, 김강철 전무와는 제법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데도 정작 이런 중요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는 게 조금 의외일 뿐.

‘개인적인 유대는 강해도 공적으로는 그렇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건가?’

아니면 차기 행장 자리를 두고 경쟁 중인 조성환 상무의 일이기에, 김강철 전무가 이번 사건을 그만큼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난 지점장의 물음에는 잠시 대답을 미룬 채 김강철 전무의 말을 기다렸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나?”

박순호 지점장도 알지 못하는 정보를 내가 알고 있으니 놀랄 법도 하다.

날카롭게 쏘아져 들어오는 시선에 긴장이 된다. 아마 예전의 나였다면 기에 눌려 사고는 정지되고 입은 얼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 앞에서도 할 말은 할 수 있을 정도로 내 심장은 단단해져 있었다.

“일진기업 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중에 우연히 얻게 된 정보입니다.”

“우연히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아니지. 생각보다 귀도 밝고 발도 넓은 게로군.”

김강철 전무가 알려고만 한다면 나와 이관우의 연결고리 쯤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불러올려 자기 사람이라고 도장까지 콱 찍었다. 이런 일로 문제를 삼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슬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던져오는 시선은 분명 경계가 아니라 호감이다.

“조 상무에 대한 조사는······ 없네.”

김강철 전무의 대답.

“어째서입니까?”

“이런 일에 흔적을 남길 사람이 아니거든. 무엇보다 한정훈 차장이 자신이 혼자 저지른 일이라고 극구 주장하고 있기도 하고.”

“한 차장이 말입니까?”

선뜻 이해가 안 된다.

그간의 상황을 놓고 추론을 해보자면, 일진기업의 일이 틀어지자 조 상무 측에선 68억에 대한 모든 뒤처리를 한 차장에게 떠넘긴 채 바로 발을 뺀 게 틀림없다.

하지만 급하게 사 모은 지분을 손실 없이 제 값 받고 되파는 게 쉬울 리가 있나.

지지부진 인수자는 나오지가 않고, 그러는 사이 다달이 이자 처리는 버거워지고, 급기야 담보 대출까지 받아서 주식까지 하게 되었다는 게 내 결론이다.

그렇다면 한 차장 입장에서는 조 상무에 대한 원망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원수나 다름없는 사람을 위해 독박까지 쓰려고 한다.

“혼자 다 떠안고 가는 조건으로 꽤 매력적인 제안을 받았나 보군요.”

“그렇지. 어차피 어떻게 해도 지옥이니까. 그 지옥으로 조 상무를 끌고 들어가봤자, 그래봤자 지옥이지. 더구나 조 상무를 끌고 들어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테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조 상무와의 딜을 선택한 거군요. 기댈 거라고는 결국 조 상무 밖에 없으니.”

“조 상무 측에서도 그에 합당한 조건을 제시했겠지. 차기 행장 인선 얘기까지 나오는 시기에 괜한 구설에 휘말리고 싶진 않을 테니까.”

“은행 입장에서도 개인의 일탈 정도로 마무리 짓고 싶은 걸 테구요.”

고위직 임원까지 낀 판이라고 하면 은행 이미지는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

“곧 사기, 횡령 등으로 은행 측에서 한 차장에게 고소가 들어갈 거야. 최대한 조용하고 신속하게 검찰 조사도 진행이 될 테고.”

“결국 이번 일은 그 정도 선에서 마무리가 되겠군요.”

빠른 사태 파악에 내가 꽤 영민해 보였나 보다.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날 보는 김강철 전무의 눈에는 아까보다도 조금 더 호감이 짙어져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김강철 전무 입장에선 정적을 쳐낼 수 있는 기회라면 기회다.

왜 저렇게 태평하게 남의 집 불구경하듯 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말대로 조 상무가 흔적을 남겼을 것 같지 않아서?

아니면,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건가?

묻기에도 애매하고, 또 윗사람들 권력 싸움 따위에는 굳이 관여하고 싶지 않아서 이내 생각을 머릿속에서 털어냈다.

어쨌든 이로써 궁금했던 건 대부분 해소가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오늘 김강철 전무와의 만남은 의미가 있었다.

“오늘 반가웠네. 이렇게까지 말이 통하는 친구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말이야. 마음 같아서는 당장 본점으로 올려서 옆에 두고 싶군. 물론 자네는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예. 아직은 현장에서 발로 뛰는 게 더 좋습니다.”

“알지 알아. 나도 그래서 평생을 현장에서 떠돌았으니까. 더구나 요즘은 시대가 변해서 성과급도 빵빵하게 나오잖나. 자네 정도의 실적이면 본점 책상머리 근무보다야 연봉도 훨씬 두둑할 테지.”

뭐, 그것보다는 지금의 내 능력을 활용하는데 영업점이 훨씬 낫기 때문이긴 하지만.

김강철 전무가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우리, 잘해봄세.”

순간 난 그 내민 손을 보며 지점장의 말을 떠올렸다.

-누군가 손을 내밀면, 그 손이 강하고 튼튼한 동아줄이라면, 그냥 잡으면 돼. 정치는 거기서부터 시작이거든.

이게 내 은행 정치의 시작이든 뭐든, 이 손이 강하고 튼튼한 동아줄이란 건 분명하다.

난 김강철 전무의 손을 잡았다.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까.

나중에 영 아니다 싶으면 다시 놓아버리면 되지 뭐.

그렇게 본점에서의 일은 끝이 났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한성은행은 한정훈 차장을 사기, 횡령 등의 혐의로 형사 고소하는 것으로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최소 5년 이상의 형량이 떨어질 거라고 한다.

한성은행 초유의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어수선했던 장원 지점도 빠르게 제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나는······ 대부계로 복귀했다.

※※※

“오빠. 이 차 뭐야?”

동생 주은이 내가 몰고 온 빨간색 대형 픽업트럭을 보며 신기해한다.

“샀어? 차 바꾼 거야? 오빠, 이런 취향이었어?”

“얼른 타. 지금 출발해도 늦어. 점심 같이하자고 하셨는데, 늦잠이나 쳐자고. 두 분 기다리신다고.”

“뭐 내가 일부러 그랬나. 어제도 그 개과장이 일 끝내기 전에는 퇴근할 생각도 말래서 새벽까지 회사에 붙들려 있었단 말이야. 지금도 내 눈 봐. 눈꺼풀이 반쯤 내려가서 안 올라가고 있잖아. 와! 이 주근깨 봐. 얜 또 언제 생겼데?”

차에 올라 화장 거울로 눈가를 이리저리 확인하던 주은이 입술을 잔뜩 내밀며 그렇게 구시렁거린다.

그 모습이 조금 귀엽긴 하다.

“근데 정말 차 바꾼 거야? 이거 무슨 차야? 되게 크다! 돈 많이 벌었다더니 진짜였나 봐. 나 진짜 그날 그 기사 보고 완전 심장 내려앉는 줄 알았다니까. 오빠가 갑자기 그런 큰돈을 주고 나서 그런 기사가 터지니까 안 놀랠 수가 있냐고.”

아닌 게 아니라, 한 차장의 셀프대출 횡령 기사가 난 후 집까지 찾아와서는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거기에 엮여 있었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벌써 쇠고랑 찼지. 그리고 그거, 내가 밝힌 거야.”

“뭐? 오빠가?”

“한 차장 그 인간이 원래 좀 밥맛이었거든. 밥맛인 놈이 이상한 짓거리를 해대길래 좀 파봤더니 그게 나온 거지.”

“와! 부러워!”

“부러워?”

“우리 개과장도 그런 비리 좀 안 저지르나? 그럼 내가 낱낱이 까발려서 아주 사회에서 매장시켜 버릴 텐데.”

“······.”

얘가 원래는 이렇게 과격한 애가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사회생활이 많이 힘든가 보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주은이와 함께 양평에 있는 부모님 댁으로 차를 몰았다.

그렇게 번잡한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로 접어드니, 늘 그렇듯 한산하다.

6월의 문턱.

따가운 햇살에 차 안 공기가 금세 후덥지근해졌다.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틀었다.

그때까지 망연히 창밖을 보고 있던 주은이 아까의 높은 텐션과는 사뭇 달라진 말투로 툭 내뱉듯 말했다.

“오빠. 고마워.”

“뭐가?”

“학자금대출. 오빠가 준 돈으로 다 갚았어.”

“그거 갚으라고 준 건데 뭘.”

“나 사실 그거 때문에 꽤 힘들었거든. 경력이고 뭐고 지금 회사 그만두고 좀 더 페이 높은 데로 옮길까 생각도 했고.”

짐작은 했다.

대학 4년, 거기에 대학원까지······ 남들보다 대출금액이 클 수밖에 없다.

빠듯한 박봉으로 앞으로 4년을 더 갚아야 했으니 그 갑갑함이 오죽했을까.

“히! 나 진짜 오빠 덕 보는 날이 올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좀 울컥하는지 주은이 코끝을 매만진다.

“나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우리 동생이 워낙에 잘났어야지.”

가문의 자랑을 넘어 동네의 자랑쯤은 되었었다.

그런 동생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돈 준 보람이 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잘 해.”

“내가 언제 오빠한테 못한 적 있나?”

“더 잘하란 말이야. 돈 준 보람 팍팍 더 느껴지게.”

“내 참 치사해서. 내가 나중에 그 돈 두 배로 갚아줄 테니까 생색 좀 그만 내시죠?”

“어? 그 말 진짜지? 은행원이랑 돈 약속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지? 여기 블박에 다 녹화되어 있으니까 나중에 딴소리하면 얄짤없이 바로 추심이야.”

“······ 오빠는 직업을 잘못 선택한 거 같애.”

“직업?”

“은행원을 할 게 아니라 사채꾼을 했어야 해. 그럼 아마 큰 부자 됐을 걸?”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나 지금도 충분히 큰 부자 될 수 있거든?”

그렇게 조금은 어색했던 분위기를 실없는 농담으로 채워가다 보니 어느새 부모님 댁에 도착했다.

작은 공장에서 평생을 일하신 아버지, 그리고 그 박봉에도 크게 모자람 없이 살뜰히 우리 남매를 키우신 어머니.

주은이가 대학을 졸업하던 3년 전, 두 분은 평소 염원대로 귀농을 하셨다.

처음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이젠 하우스 딸기 농장도 제법 자리가 잡혔다.

우리가 도착하자,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부모님들이 의아해한다.

“이거 무슨 차니? 차 바꿨니? 근데 뭘 이렇게 큰 차를······.”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 어머니는 거대한 차체에 눈을 휘둥그레 뜨셨고, 고개를 쭉 내밀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살피던 아버지는 ‘이야! 차 좋다 야!’ 라며 연신 감탄을 하신다.

“아버지. 이거.”

난 아버지 손에 차 키를 쥐여주었다.

아버지가 의아히 날 본다.

“아버지 차예요.”

“······?”

“차 바꾸실 때 됐잖아요. SUV보다는 픽업트럭이 일하시는데 더 좋을 거 같아서 이걸로 샀는데, 괜찮죠?”

어머니는 놀란 눈으로 ‘네가 이럴 돈이 어딨다고?’라며 걱정부터 하셨고, 이 차가 아버지 선물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던 주은이도 날 보며 놀란 눈을 깜빡인다. 그리고 연신 나와 차를 번갈아 보시던 아버지의 눈에도 어느새 몽글몽글한 물기가 맺혔다.

이깟 게 뭐라고 참.

평생 자식들을 위해 헌신해온 것에 비하면 정말이지 작디작은 선물일 뿐인데.

아버지의 저 눈물을 보니 괜히 나까지 몽글몽글해진다,

기분이 썩 괜찮다.

뿌듯함이랄까······ 뭔가 벅찬 느낌.

역시 돈은 이렇게 써야 하나 보다.

< 돈은 이렇게 써야 하나 보다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