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13
“한정훈 차장님?”
두 명의 감사과 직원들이 물었다.
그때까지도 두 팔로 얼굴을 감싸쥔 채 그저 떡락한 주식에 괴로워하고 있던 한 차장이 의아히 고개를 든다.
“무슨······?”
“감사과에서 나왔습니다.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강압적이고 딱딱한 말투.
잠깐의 의아함 뒤 밀려드는 죄지은 자의 본능적인 공포심으로 낯빛이 창백해진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기대의 끈을 놓지 못하고 다시 묻는다.
“무, 무슨 일인데 이러는 겁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조용히······ 조용히 갑시다. 떠들어댈 일 아닌 거, 한정훈 차장 당신이 더 잘 알 거 아닙니까?”
죄지은 자를 향한 차갑고도 날카로운 목소리.
그게 무얼 뜻하는지 알아차린 한 차장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진다.
그런 한 차장을 감사과 직원들이 마치 경찰이 범인을 연행하듯 좌우에서 양 팔을 붙잡고 대부계 사무실을 나섰고, 같이 온 세 명의 감사과 직원이 한 차장의 자리를 뒤져 서류며 하드디스크며, 가져갈 수 있는 건 죄다 상자에 담았다.
대부계 직원들도, 수신계 직원들도 다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도 모른 채 그저 망연히 그 장면을 지켜본다.
물론 나는 당연히 이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한 인간이 몰락하는 순간이다.
그것도 내 손으로 몰락시키는 순간이다.
통쾌하진 않았다.
통쾌함을 느끼기엔 정말이지 너무 어이없을 정도로 바보 같은 몰락이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벌어질 일들도 새삼 걱정스럽다.
그런 마음으로 일련의 상황들을 지켜보고 있을 때, 마침 감사과 직원들의 손에 끌려 나오고 있는 한 차장과 눈이 마주쳤다.
찰나 간 스치는 굴욕감, 창피함.
그런데······ 착각일까?
거기에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하나 더 있다.
억울함.
억울하다니?
난 짜증스레 미간을 구겼다.
이 보다 더 확실할 수가 없을 만큼 명백한 범죄다.
가짜 서류, 가짜 명의, 가짜 대출······ 그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해놓고 억울이라니?
현실 부정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하긴, 세상 범죄자들 중 억울하지 않은 새끼 아무도 없지. 연쇄살인범도 천 명을 다 못 죽이고 잡힌 게 억울하다고 하는 판국이니.’
68억 밖에 못 해 먹은 게 억울하다는 걸까?
아니면, 그걸 다 못 써먹고 잡힌 게 억울하다는 걸까?
그사이 한 차장은 검은색 밴에 태워져 감사과 직원들과 함께 떠났다.
한바탕 태풍이라도 휩쓸고 간 듯한 분위기.
“하 대리님.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텔러인 강희수 주임이 놀란 가슴을 다 쓸어내리며 묻는다.
난 어깨를 으쓱하고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얼마 안 있어 알게 될 일이지만 지금은 떠들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폭탄이 터진 지점의 분위기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여전히 어수선했다.
공현수 과장부터 차례로 본점으로 불려가 취조 아닌 취조를 받아야 했고, 그렇게 상당히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오면 한바탕 전투라도 치른 것 같은 얼굴들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3일째 되던 날, 내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막상 본점에 도착하니, 나를 맞은 것은 지난 3일간 본점으로 거의 출근하다시피 했던 박순호 지점장이었다.
“하 대리! 여기!”
“어? 지점장님?”
지점장을 여기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못했다.
“감사과 가는 길이지?”
“그렇긴 한데······ 근데 굳이 마중은 왜······ 아, 혹시 오늘 조사, 지점장님이랑 같이 받는 겁니까?”
“아냐. 거긴 안 가도 돼. 자네에 대한 감사는 없는 걸로 이미 말 다 맞춰놨으니까.”
“예?”
아무리 켕기는 거 없이 당당하다고 해도, 대부계 직원들이 녹초가 된 얼굴들을 하고 돌아오는 걸 봐왔던 터라,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오는 동안 내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이었었다. 그러니 지점장의 말이 반갑긴 했다.
“지점장님이 힘써주신 겁니까?”
“내가? 그럴 리가······ 나한테 그럴 힘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긴 하다.
“그럼 누가······?”
“김강철 전무님이 손 쓴 거야. 그리고 지금 자네가 뵈러 가야 할 분도 김강철 전무님이시고. 전무님께서 하 대리를 한번 보고 싶어 하셔.”
“예?”
김강철 전무면 박순호 지점장이 붙들고 있는 뒷배다.
“김강철 전무님이 절 왜요?”
“뻔한 거 아냐? 자기 사람 얼굴 정도는 익혀 두시려는 거지.”
“제가······ 김강철 전무 사람입니까?”
“내 사람이면 당연히 김강철 전무 사람이지. 너, 내 사람 아냐?”
누구 사람이니 누구 사람이니 하는 거 좀 오글거리긴 하지만, 굳이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지금 내 선택은 박순호 지점장이긴 했다.
“물론 내 사람이라고 다 전무님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 하물며 일개 대리 따위를? 그런데도 자네를 보자고 하시는 건 아주 이례적인 일인 거지. 그만큼 자네가 마음에 드셨다는 뜻이야.”
잘 이해가 안 된다.
날 마음에 들어 하고 말고 할 건덕지가 있긴 한가?
날 얼마나 안다고?
“바쁘신 양반 기다리게 하면 안 되니까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따라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지점장이 그렇게 재촉을 하며 내 손을 잡아끄는 바람에 얼떨결에 같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난 슬쩍 박순호 지점장을 살폈다.
수염은 까칠까칠하고 머리는 더벅머리다.
피부도 푸석하고 행색도 초췌하다.
3일 동안 고생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때,
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김강철 전무의 전무실 앞에 도착하자 노크를 하기 전 지점장이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누차 은행은 정치라고 했지만, 사실 그 정치란 거 별거 없어. 누군가 손을 내밀면, 그 손이 강하고 튼튼한 동아줄이라면, 그냥 잡으면 돼. 정치는 거기서부터 시작이거든.”
“······.”
아마도 나는 지금 그 정치란 것에 입문하려는 모양이다.
※※※
꽉
힘 있게 잡아 오는 손이 크고 두껍다.
180은 됨직한 키에 100키로는 나갈 듯한 체구.
체격만 보면 거의 강호동인데 얼굴은 그저 동네 인상 좋은 아저씨다.
김강철 전무.
금융가 집안에 엘리트 코스만 밟아온 조성환 상무와는 달리, 평사원으로 출발해 30년을 현장에서 영업을 뛰며 이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하성운 대리라고 했지?”
인상 좋은 아저씨 얼굴인데도 슬쩍 훑어가는 시선에 몸이 긴장을 한다.
그건 단지 몸에 밴 직장인의 습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예. 장원 지점 대리 하성운입니다.”
“일단 앉지.”
소파에 앉았다.
“근래 들어 여기 박 지점장이 아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네 칭찬을 하더구만.”
김강철 전무의 말에 난 슬쩍 마주 앉아 있는 박지점장을 보았다.
별거 아니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래서 따로 자네에 대해서 좀 알아봤는데, 실적이 꽤 좋더구만. 특히 일진기업 건은 나도 탄복했어. 영업이라는 게 사실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사람 마음을 얻는 거거든. 근데 그게 참 어렵단 말이지. 한 번 어긋난 마음을 되돌리는 건 더더욱 어렵고. 따지고 보면 남일 뿐인데, 그렇게까지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나는 어땠었나 돌아보게도 되고······ 박 지점장이 왜 그토록 자네 칭찬을 했는지 이해가 됐어.”
“······.”
“무엇보다 이번에 아주 큰일을 하기도 했고 말이지.”
“······?”
“박 지점장에게 들었네. 이번 셀프대출 건, 하성운 대리 자네가 밝혀낸 거라며?”
순간 난 다시 박순호 지점장을 보았다.
예상치 못했다.
어디까지나 지점장의 공으로 돌려 최대한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던 것이고, 당연히 지점장도 자신의 공으로 돌려 보신을 할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내가 사정이 급하다고 해도, 아무렴 내 사람 공까지 가로챌 수야 있나.”
'이 양반아. 내 사람 공을 가로채서라도 일단 살아남고 보는 게 정치라고.'
아무튼 그래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나 보다.
이번 일에 대한 치하의 의미로.
“하지만······.”
내 말을 김강철 전무가 끊었다.
“박 지점장의 거취라면 걱정할 거 없네. 그 부분은 내가 손을 쓰고 있으니까. 감봉 정도로 마무리가 될 거야.”
음······ 조금 의외다.
김강철 전무 라인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끈끈한 줄은 아닐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김강철 전무의 태도를 보니 생각보다 깊고 튼튼한 느낌이다.
둘 사이에 어떤 남모를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감봉 정도라고?
그 말은 68억이 거의 손실 없이 환수 가능하다는 뜻이고, 그건 곧 그 68억이 어떻게 쓰였는지도 밝혀냈다는 뜻이다.
“혹시······ 한 차장이 그 돈을 어디다 유용한 건지 알 수 있습니까?”
궁금했다.
한 차장이 그렇게 주식에 목매야 했던 이유.
그리고 3일 전 그 눈에서 보았던 억울함의 정체.
어디다 썼는지만 알면 그 의문들에 대한 답을 알 수 있지 않을까?
내 질문에 김강철 전무에게서 망설임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자네라면 들을 권리가 있으니까. 68억 전액 KG 브레이크의 지분을 사들이는데 썼다는군.”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되물었다.
“KG 브레이크라구요?”
KG 브레이크라니?
일진기업이 부도시 제 1 인수처로 급부상했던 기업이다.
여기서 왜 그 이름이 나온단 말인가?
‘이거 뭐지?’
일진기업을 등급하락 시킨 것은 한정훈 차장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차장을 사주해서 일진기업을 KG 브레이크에 가져다 바치려 한 것은 조성환 상무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일들이 있기 전에 한 차장이 셀프 대출로 땡긴 68억으로 KG 브레이크의 지분을 사들였다.
그 각각의 일들이 따로국밥일 리 없다.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KG 브레이크를 상장이라도 시키려고 했던 거야?’
일진기업 하나로 될 일은 아니겠지만, 다수의 경쟁력 있는 특허를 보유한 일진기업의 기술력이면 일정 부분 상장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삼원에 비해 늘 기술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KG 브레이크였으니까.
‘이건······ 너무 큰 판이잖아?’
운이 좋으면 68억을 천억 대로 만들 수도 있는 터무니 없는 도박판.
당연히 한 차장 혼자서 이런 계획을 꾸몄을 리 없다.
기업 하나를 상장 시키려는 계획이 어디 일개 차장 급에서 할 수 있는 생각인가.
‘조성환 상무의 큰 그림이라는 건가?’
그럼 그 68억 셀프대출의 뒤에도 어쩌면 조성환 상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거라면 전날 보았던 한 차장의 억울함까지도 설명이 된다.
“왜······ 그러는가?”
내 격한 반응에 김강철 전무와 박순호 지점장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본다.
문득 떠오르는 의문.
김강철 전무는 과연 모르고 있을까?
일진기업의 인수처가 KG 브레이크로 내정되었다는 사실, 그 뒤에 조성환 상무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사실······.
‘모를 리가 없지.’
아무리 내가 편법으로 그런 정보들을 습득했다고 해도, 내 귀에도 어렵지 않게 들어올 수 있는 정보가 김강철 전무의 귀에 닿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조성환 상무에 대한 의심 또한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질문을 가릴 필요가 없다.
“이번 사건, 한 차장의 단독범으로 결정이 난 겁니까? 아니면 혹시, 조성환 상무에 대한 조사까지 같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입니까?”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던진 질문이었다.
내 그 돌발적이고도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김강철 전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고, 박순호 지점장은 세상 천진무구한 얼굴로 이게 다 뭔 소리냐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 이건 너무 큰판이잖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