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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12화 (12/50)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12

“68억······ 68억이란 말이지?”

허탈한 웃음마저 토한다.

“확실······ 한 거지?”

“예. 몇 번이고 확인한 사실입니다.”

“대체······ 한정훈 이 자식은······ 이 새끼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거리를 벌인 거야!”

결국 터졌다.

성질대로 했다면 당장 달려가서 멱살잡이라도 했을 것 같다.

하지만 꼬리가 밟혔다는 걸 한 차장이 알아서는 안 된다. 가능하면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진행해야 하는 일이다.

괜한 변수가 끼어들 여지를 줘서는 안 된다는 걸 박순호 지점장이 모를 리 없다.

“68억, 그거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아시겠지만 셀프대출의 경우 용도는 대부분 세 가지 중 하나입니다. 좋은 주식 정보가 있어 주식에 투자하기 위함이거나, 아니면 부동산에 투자해서 안정적인 수익을 얻기 위함이거나. 그도 아니면 한탕 땡겨서 해외로 튀려는 것이거나.”

“······.”

듣다 보니 기가 찬지 지점장이 잠시 말문을 잃는다.

그러다 다시 물었다.

“하 대리가 생각하기엔 어느 쪽인 거 같은데?”

“해외로 튀려는 건 아닐 겁니다. 그럴 계획이었으면 이미 4개월 전에 튀었겠죠. 주식도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그럼 결국 부동산인가?”

지점장의 얼굴에 옅은 안도가 스친다.

부동산이라면 손실이 크지도 않을 것이고 환수도 수월할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런 지점장의 기대에 호응하지 않았다.

“부동산도 그다지 가능성이 높진 않습니다. 부동산이라면 상가든 주택이든 월세나 전세 수익이 상당할 텐데, 그럼 이번에 무리하게 담보대출까지 받으면서 주식을 한 게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 그게 설명이 될 만한 이유가 뭘 거 같은데?

“결국 둘 중 하나겠죠. 생각지 않게 어딘가에 갑자기 돈이 묶여 버렸거나, 아니면 사기를 당했거나.”

“······.”

“사기를 당했다면 당한 대로 큰돈이 필요하고, 돈이 묶여 버린 거라면 그건 그것대로 당장 융통할 자금이 필요하죠. 거치형 대출로 당분간 원금 제외하고 이자만 낸다고 해도 월 2천만 원이 넘으니까요.”

“그러니까 지금은 사기를 당한 건 아니기만을 빌어야 한다는 건가? 하!”

지점장이 기가 막혀한다.

나 또한 밤을 지새며 이런 결론을 내리기까지 여러 번 기가 막혔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본점으로 가서 보고부터 올려야지.”

지점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슈트를 걸친다.

“지점장님께도 피해가 있을까요?”

“횡령한 돈을 모두 환수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징계 수위가 정해지긴 하겠지만, 부하 관리를 못한 책임은 분명 나한테도 있는 거니까. 은행으로서는 워낙 심각한 사고라 어쩌면 본보기식 처벌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도······.”

잠시 말을 끊은 지점장이 괜찮다는 듯 내 어깨를 툭툭 두들긴 후 말을 잇는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 내가 누차 말했지만 은행은 정치야. 이 바닥 20년 정치 인생 이럴 때 제대로 정치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어? 하 대리 자네가 이걸 늦지 않게 발견해준 덕분에 비벼볼 언덕도 생겼고.”

그렇게 말을 맺고는 지점장실을 나선다.

지점장이 내 뒷배가 되어 준 것도 있지만 그동안 알게 모르게 마음이 좀 쌓였나보다.

지점장실을 나서는 지점장의 뒷모습이 왠지 짠하면서도 걱정이 된다.

“지점장님!”

지점장을 불러세웠다.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외쳤다.

“화이팅입니다!”

※※※

그런 와중에도 나를 따라 ‘화이팅’을 외쳐주며 싱겁게 웃어준 지점장이 본점으로 달려가고, 난 이 사태의 주범인 한 차장이 어쩌고 있나 보러 갔다.

한 차장은 아침에 본 것과 또 달라져 있었다.

객장 창구까지 달려와서 그 지랄을 떨만큼 넘치던 기운은 온데간데없고, 자신의 노트북 앞에 머리를 처박고는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잠깐의 기술적 반등이 끝나고 다시 하염없이 바닥으로 내다 꽂았나 보다.

‘지금 주식이 문제가 아니라고 이 양반아. 당신 인생이 나락으로 내다 꽂히고 있는 판국이라고.’

이젠 화도 안 난다.

그 한심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저 짜증만 날 뿐.

아니, 차라리 잘됐다.

덕분에 저 구역질 나는 면상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까.

난 걸음을 돌려 다시 예금 창구로 돌아왔다. 그런데, 분위기가 묘하다.

수신계 텔러들의 왠지 모를 따가운 눈총.

“하 대리님. 아까부터 손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김승혜 계장의 손짓에 따라 눈을 돌리니 단정한 옷차림에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미모의 여성이 서 있었다.

모르는 여성이다.

그 여성이 내 창구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하성운 대리님이세요?”

“예. 제가 하성운입니다만······?”

“전 장서연이라고 해요. 가람필방 장한실 사장님이 제 부친 되세요.”

“아!”

순간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졌다.

로스쿨 다닌다는 무남독녀 딸인 모양이다. 한때 가람필방에 뻔질나게 드나들었지만 좀처럼 그녀와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오늘 처음 본다.

“장 사장님 따님이시군요. 근데 여긴 무슨 일로? 장 사장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아니면 혹시 사모님께······.”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하 대리님께 따로 전해드릴 게 있어서······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세요?”

내가 고개를 갸웃한 후 심은정 차장을 보자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심 차장이 다녀오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난 김승혜 계장에게도 대신 업무를 부탁한 후 장서연과 함께 근처의 커피숍으로 향했다.

캐쥬얼 하면서도 날티 나지 않는 단정한 옷차림.

반듯하면서도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오다가다 거리에서 마주쳐도 절로 눈길이 갈만한 보기 드문 미인.

키도 170정도에 전체적으로 늘씬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로스쿨이라는 타이틀로 인한 선입견일까?

어딘지 모르게 지적인 아우라까지 느껴진다.

그렇게 내가 어쩔 수 없는 남자의 본능으로 장서연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장서연이 내 앞으로 봉투 하나를 내민다.

“이게 뭡니까?”

“사례금이에요.”

예상치 못한 말.

“사례금이라뇨?”

“아버지한테 주식증서일 말씀 들었어요. 하 대리님 덕분에 찾은 거라고. 게다가 팔지 말고 계속 가지고 있으라 하신 덕분에 엄청난 수익도 보게 되었다고.”

“······.”

“아버지도 어떤 식으로든 사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하 대리님이 아니었다면 주식증서가 있는지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을 테고, 그래서 분실물 습득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맞는 사례금을 준비한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만 또 듣고 보니 말이 되긴 한다.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봉투 속을 확인했다.

그리고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봉투 안에는 1억짜리 수표 한 장과 천만 원권 수표 네 장, 모두 합쳐서 무려 1억 4천만 원이나 되는 돈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게······ 이건 너무 많은데요?”

“사실 아버지는 절반을 드려도 괜찮다고 하셨지만, 분실물 습득 사례금도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거라······ 20%가 상한이거든요. 법 공부하는 사람이 법을 어길 순 없잖아요.”

농담기를 살짝 담아 살포시 눈웃음을 짓는다.

지금까지의 약간은 차갑고 딱딱했던 이미지가 그 순간 싹 걷히면서 환해지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잠시 넋을 놓았다.

“사실은 그건 다 핑계구요.”

곧바로 그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면 침까지 흘릴 뻔 했다.

“저희 가게 상황이 별로 좋지 못해서 그 이상 드리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어요.”

가람필방의 사정이야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안다.

이 1억 4천도 가람필방 입장에선 상당히 무리를 한 것이었다.

그러니 처음 생각처럼 선뜻 받아챙길 수가 없다.

“이 돈은 사례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큽니다. 차라리 이걸로 적금 구좌나 하나 열어주시면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아니에요. 받아주세요. 그래야 저희도 마음이 편해요.”

몇 번 더 사양을 했지만 장서연의 태도가 너무 완강했다.

결국 마지못해 챙겨넣었다.

“이거 참······ 그럼 고맙게 잘 받겠습니다.”

생각하니 좀 어이가 없다.

1억이 넘는 돈인데 마지 못해라니?

예전 같았으면 1억짜리 한 장이면 심장이 다 덜컹거렸을 텐데.

역시 통장에 잠들어 있는 15억 때문일까?

“아, 그리고 사모님 병세는 좀 어떠세요?”

며칠 전에 병문안을 가 보긴 했다.

그때도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어서 나온 장서연의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다음달에 수술 일정이 잡혔어요.”

“수술 일정이라면······ 이식 말입니까?”

“예.”

“공여자가 나타난 겁니까? 아니, 이렇게 빨리 나타날 리가······ 아, 혹시 서연씨가······?”

“예.”

“하지만 아직 학기가 남았잖아요?”

“휴학하기로 했어요. 겨우 한 학기 남았는데요 뭐.”

오히려 한 학기밖에 안 남았기에 어려운 결정이다.

이젠 학비 걱정도 없어진 마당인데.

“괜히 미루다가 평생 후회하는 일이 생기면 안 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큰 결정 하셨습니다.”

“당연한 일인 걸요.”

수술에 대한 공포, 고운 몸에 새겨지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

그 당연한 일이 많은 사람들에겐 또한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장서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는 내게 깊이 허리를 숙인다.

“하 대리님 덕분에 우리 가족 모두, 엄마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올리는 장서연의 눈에는 옅은 물기가 맺혀 있었다.

※※※

그렇게 장서연과 헤어져 은행으로 돌아오는 길.

장서연의 마지막 그 말이, 그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내내 가슴 속을 먹먹하게 한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분히 흐르고 있는 한 덩이의 구름이 왠지 죽은 권영섭 사장의 얼굴처럼 보인다.

“그렇게 얼굴 들이밀지 않아도 이게 다 사장님 덕분인 거 잘 압니다.”

난 내 이능력이 권영섭 사장의 선물이라 확신하고 있다.

‘어때? 쓸만하지?’

“예. 쓸만합니다. 덕분에 이렇게 돈도 두둑하게 생겼잖습니까? 하하.”

웃고 있는데도 오히려 먹먹함만 커진다.

꺾어 올린 고개를 내렸다.

그대로 더 보고 있다가는 왈칵 눈물이라도 쏟아낼 것 같았다.

그런 기분도 떨쳐버릴 겸 걸음을 서둘러 지점으로 돌아왔다.

지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텔러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모아졌기 때문이다.

‘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

‘하 대리님 여자 있었어요?’

‘뭐, 그렇게 예쁘지도 않더만. 하 대리님 눈 좀 저렴한 듯.’

‘아, 당 떨어져. 오늘 점심은 뭘 먹지?’

딱히 독심술을 배운 것도 아닌데, 어쩐 일인지 마음들이 다 읽힌다.

아무래도 모두가 내 팬이라는 김승혜 계장의 말이 과장은 아니었나 보다.

마지막에 엉뚱한 게 하나 껴 있긴 했지만.

그렇게 난 모두의 따가운 환대 속에서 다시 바쁜 일과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창구 업무가 모두 끝이 나고 비대면 업무가 시작될 무렵, 예견되었던 일이지만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나락이 한 차장을 찾아왔다.

검은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지점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본점 감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다들 협조 부탁드립니다. 한정훈 차장, 지금 어디 있습니까?”

< 고맙게 잘 받겠습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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