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11
띠띠띠띠띠띠띠띠
철컥
보관실 문이 열렸다.
이 순간까지도 설마하는 마음이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미치지는 않았겠지."
반복되는 중얼거림은 차라리 기도에 가깝다.
하지만······ 한 차장이 아파트를 잡히면서까지 한 방 대박을 노려야만 했던 이유와, 변동정보에 사기 및 횡령이라 적힌 이유가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과 너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그렇게 그저 기우이길 바라며 다시 한 차장의 대출신청 서류를 찾았다.
[판정보류]
[등급하락요건 발생]
[등급하락요건: 사기 및 횡령]
[개인신용평가등급 A→D 확정날짜: 202X년 6월 20일]
낮에 보았던 것과 달라진 건 없다.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주민등록 등본, 초본, 건강보험자격 득실확인서, 재직증명서 등등······ 그중 내가 확인하려는 것은 가족관계 증명서다.
[부 한영철]
[모 이수미]
[배우자 박하인]
[자녀 한수영]
가족관계를 확인한 나는 그들의 이름으로 된 대출 서류를 찾았다.
정말 아니기를 바랐다.
이건 단지 한 차장 개인의 일탈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시간이 넘게 승인 서류들을 뒤적이던 끝에 결국 찾았다.
한 차장의 배우자 박하인이란 이름의 대출 서류를.
그리고 비슷한 시기 승인된 부친 한영철의 이름과 모친 이수미의 이름까지.
“이런 미친 새끼가 진짜······.”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부친 한영철의 서류에서 다시 가족관계 증명서를 꺼내들었고, 거기에서 한영철의 자녀들 이름을 확인했다.
[자녀 한정훈]
[자녀 한정혁]
[자녀 한성희]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역시나가 되기까지는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부친과 모친의 대출 서류 옆에 한 차장의 동생 한정혁, 한성희의 이름으로 된 대출이 아주 나란히도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은행원이라고 해도 가족들이 대출을 받는 건 전혀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과정을 거친 대출이었을 때 얘기다.
지금 내가 확인한 것만해도, 가족들이 대표로 있는 법인기업 5개와 개인사업자 명의 3개를 활용한 대출이 무려 21건이었다.
당연히 정상적인 과정의 대출이 아니다.
아파트부터 오피스텔, 연립주택 등 죄다 주거용 부동산이 담보였고, 실제 명의인이 다를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서류를 조작한 것이다.
일명 셀프대출이라 불리는 전형적인 내부자 사기 대출.
그리고 그렇게 받은 대출의 총액은······ 정말이지 황당하게도 무려 68억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 액수.
머리가 다 어질어질할 지경이다.
“이 새끼 진짜 제대로 미쳤잖아?”
그렇게까지 미쳤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건만, 내가 한 차장을 과소평가했다.
그래. 한 차장은······ 정말이지 기록적으로 미친놈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무려 68억이나 되는 돈을 훔쳐놓고 왜 아파트까지 잡히면서 주식을 했냐는 거다.
‘그 큰돈을 다 얻다가 쓰고?’
게다가 반토막이 났다고는 해도 68억이라는 돈에 비하면 푼돈 수준인데, 그 몰골은 또 뭐고?
‘아니, 그보다······ 이게 한 차장 혼자서 가능한 일이긴 해?’
한두 푼도 아니고, 한두 건도 아니고, 무려 21건에 68억이다.
더구나 빈번한 셀프대출 사고로 각 은행에서는 그에 따른 대책을 마련해 놓은 상황이고, 비교적 늦긴 했지만 한성은행도 시스템 개선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하긴,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액수가 액수다 보니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한성은행에도 상당한 타격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장원 지점은 아예 풍비박산이 날 수도 있다.
일단 충격을 최소화 하려면 지점장에게 먼저 알려야 한다.
지점장을 통해 전무라인을 타면 뭔가 대책이 생길 수도 있다.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새벽 12시가 훌쩍 넘었다.
지점장에게 전화를 할까 하다가 관뒀다.
어차피 셀프대출은 4개월 전에 이루어진 일이다.
밤사이 다른 변수가 발생할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보고를 올리기 전에 조금 더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그래서 난 보관실에서 나와 대출 담보물의 실제 명의자부터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
“하 대리님?”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김승혜 계장의 단아한 얼굴이 날 내려다 보고 있다.
“여기서 밤을 새신 거예요?”
새벽 5시가 넘어가는 걸 보긴 했는데, 깜빡 잠든 사이 출근 시간이 된 모양이다.
“아, 예. 좀 급히 처리할 게 있어서.”
“아무리 그래도 잠은 집에서 자야죠. 그러다 몸 상해요.”
난 가벼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은행에서 동료의 걱정을 듣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대부계에서도 간혹 밤을 샌 적이 있지만 들려오는 거라고는, ‘그러게 평소에 미리미리 일을 처리했어야지’ 라거나, ‘혼자서 열심인 척은’ 이라거나 하는 핀잔 뿐이었으니까. 물론 그 핀잔의 대부분은 한 차장의 것이었고.
“커피 한 잔 타드려요?”
“아닙니다. 몸이 찌뿌드드해서 몸도 좀 풀 겸 제가 계장님 것까지 내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다용도실로 가 커피를 내리고 있으니 사람들이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보자니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 사태가 어떤 식으로 번질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런 일은 겪어 본 적도 없거니와, 한성의 높으신 양반들이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할지도 전혀 감이 안 잡힌다.
엉뚱한 방향으로 불똥이 튀지나 않을지, 그 엉뚱한 불똥에 혹시 장원 지점 직원들까지도 큰 화를 입게 되지나 않을지······.
‘내가 걱정한들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이 엄청난 일을 그냥 묻고 갈 수도 없는 노릇.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커피 두 잔이 다 내려졌다.
김승혜 계장 앞에 한 잔을 내려놓자 김승혜 계장이 살포시 웃으며 고갯짓을 까딱한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아, 그리고 방금 지점장님한테서 전화 왔었어요.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으셔서 출근이 두 시간 정도 늦어질 거라고.”
순간 난 미간을 찌푸렸다.
한시라도 빨리 보고를 올려서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뿐인데, 그걸 두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제나 저제나 지점장이 출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야! 하 대리! 어제 지점장님한테 고자질한 거 너지?”
한 차장이 찾아왔다.
“너 때문에 내가 어제 지점장실에 불려가서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알아? 내가 주식을 하든 뭘 하든 네까짓 게 뭔 상관인데 고자질이야 고자질은!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씩씩대며 노발대발 욕을 퍼붓는 한 차장을 보며 난 의아했다.
‘어제만 해도 산송장이나 다름 없더니······.’
기가 살아났다.
얼굴에도 생기가 돈다.
무엇보다 날 향해 버럭버럭할 정도로 기운이 넘친다.
‘주식이라도 오른 건가?’
아무래도 고려제당의 주식이 반등을 좀 한 모양이다.
그래서 다시 희망회로 오지게 돌리고 있나 보다.
하지만 그래봤자 기술적 반등일 뿐이다.
세력들의 흔한 설거지 패턴.
그런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쳐놓고 고작 주식 좀 오른 거에 신나서 날뛰는 걸 보니 정말이지 죽여버리고 싶다.
“뭐야? 눈깔이 왜 그래? 또 치게? 쳐봐 새끼야! 이번엔 진짜 확 짤라버릴 테니까!”
더 어이없는 건 지금 객장 안에 손님이 꽤 있는데도 저 지랄이라는 것.
그 추태에 객장 손님들이 당혹스러워 하자, 도무지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는지 급기야 경비원들이 한 차장을 말리며 객장 뒤로 끌고 갔다,
대놓고 주식을 하질 않나, 객장까지 나와서 손님들 다 보는 앞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저런 진상 짓을 하질 않나······ 정신적으로 뭔가 끊어져 버린 건지, 이젠 스스로가 아예 통제가 안 되는 것 같다.
“한 차장님 정말 미쳤나봐.”
“요즘 상태가 안 좋아보이긴 했지만, 정말 왜 저래?”
수신계 직원들도 손님들 보기 민망한지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불현듯 어떤 불안감이 스친다.
‘잠깐만, 설마 그 68억까지 주식에 꼬라박은 건 아니겠지?’
그거야 말로 최악이다.
은행의 습성상 손해만 입지 않으면 어떻게든 무마가 된다. 하지만 만일 그 68억이 반토막이 되어버렸다면, 책임자 징계는 물론이고 장원 지점은 폐점까지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지점 통폐합이다 뭐다 말이 많은 요즘인데······.'
그래도 가능성은 극히 낮다.
셀프대출을 받은 게 이미 4개월이나 되었고, 그 정도 돈을 주식에 태울 정도면 따로 담보 대출을 받을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온갖 잡생각이 다 들고 있을 무렵이었다.
마침내 지점장이 출근했다.
※※※
“후우······.”
지점장실 문 앞에 서서 난 긴 숨을 토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워낙에 엄청난 사건이라 이런 보고를 올려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주저하게 된다.
‘한 차장 일에는 진짜 관여하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한 차장 목숨줄을 내 손으로 끊게 되네.’
결국 그 변동 정보도 이런 내 개입으로 완성되는 거였나보다.
똑똑
노크를 했다.
“지점장님. 저 하성운 대리입니다.”
“어. 들어와.”
앞으로 다가올 충격과 공포의 미래를 모른 채 마냥 밝은 목소리로 날 부른다.
“후우······.”
난 한 번 더 숨을 길게 내쉰 후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지점장이 천진무구한 얼굴로 나를 반기며 묻는다.
“무슨 일이야?”
“급히 보고를 드릴 게 있습니다. 지점장님께서 가장 먼저 아셔야 할 일입니다.”
박순호 지점장 개인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지점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그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
이 엄청난 사실을 지점장이 직접 밝혀낸 형식으로 윗선에 이어져야 공이 과를 조금이라도 상쇄할 수 있고, 그래야 장원 지점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할 수 있다.
그제야 내 표정에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지점장이 목소리에 불안을 담는다.
“뭐야?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인데 그렇게 심각해?”
“한 차장이 셀프대출을 한 정황이 발견되었습니다.”
“뭐? 셀프대출?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난 지금까지 내가 밝혀낸 사실들을 조금의 가감도 없이 차분히, 또한 냉정하게, 그리고 빠짐없이 조목조목 지점장에게 보고했다.
내 생각이 끼어들 판이 아니다.
지금부터 모든 판단은 지점장의 몫이다.
은행원으로 20년을 버텨 온 사람이다.
조금 못 미더운 구석이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은행은 정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다.
이 위중한 상황에 어떻게 해야 자신이 살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판단할 것이다.
내 보고가 이어지는 동안 지점장의 낯빛도 점점 새파랗게 질려간다.
그리해 길었던 보고가 끝이 나자, 지점장이 반쯤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다.
“68억······ 이라고?”
< 기록적으로 미친놈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