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10
사기, 횡령이라니?
‘이 인간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아니, 어쩌면 아직 저지른 건 아니고 저지를 예정일 수도 있다.
‘이번에 주식으로 날린 돈 메꾸려고 고객 돈을 유용하기라도 한다는 건가?’
아니 잠깐, 설마 이것도 내가 개입해서 이렇게 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난 빠지고 싶다.
아무리 한 차장이 내 눈엔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이었다고 해도, 한 사람의 인생, 아니, 한 가정의 삶을 완전히 파탄 낼 수도 있는 일에 굳이 끼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앞서 장한실 사장의 일을 겪으며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내 눈에만 보이는 이 변동정보가 내가 개입해야만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고려제당의 경우만 해도 지분인수라는 상승 요건에 내가 개입할 여지는 아예 없었다.
그런데도 변동정보 대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지금까지 내가 확인한 기업의 크고 작은 변동정보만 해도 수십 건이다.
당연하게도 그 모든 것에 다 개입할 능력도 안 되고, 고려제당처럼 아예 내가 개입할 여지조차 없는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개입이 아예 아무 의미가 없느냐하면 그건 또 아니다.
장한실 사장의 경우, 내가 만일 주식증서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과연 그걸 늦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을까?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연 정확한 타이밍에 처분해서 7억이 넘는 돈을 벌 수 있었을까?
차라리 로또에 맞을 확률이 더 높을 것 같다.
즉, 때로는 내 개입이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
어떤 기준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자’였다.
그런 기준에서 한 차장의 이 사기, 횡령 건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관여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지만, 내가 뭘 어떻게 하기에는 그 단편적인 정보가 너무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보관실을 나왔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서랍에서 찾아 꺼내들었다.
[판정보류]
[등급상승요건 발생]
[등급상승요건: 부채 비율 감소]
[기업신용평가등급 C→B 확정날짜: 202X년 6월 5일]
성우실업의 대출신청 서류.
난 그것을 들고 지점장실로 찾아갔다.
“이게 뭔가?”
박순호 지점장이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봉투를 보며 의아해한다.
“대출 서류입니다.”
“그건 나도 알아. 눈이 있으니까. 근데 부결된 거잖아?”
“재고가 필요합니다.”
“심사가 잘못되었다는 거야?”
“성우실업의 경우 무리하게 업종 변경을 하느라 당장은 부채 비율이 상당하지만, 알아보니 임현욱 사장이 동문회 쪽으로 상당한 인맥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리고 동문회 쪽에서도 성우실업을 돕겠다는 의지가 강하고. 면면을 살펴보니 재력가도 꽤 보였습니다.”
“음······ 아무리 재력가라도 내 주머니 속 돈 한 푼은 아까운 법이야. 겨우 동문회 친분으로 거액을 선뜻 내어줄 리가 없잖아?”
“겨우 동문회가 아닙니다. 시골 국민학교때부터 50년을 이어온 동창회고, 그 동문회 사이에선 서로 돕고 돕는 기조가 상당히 강합니다. 마치 씨족사회 같은 끈끈함이랄지······ 그동안은 임현욱 사장이 한사코 거절을 해서 그렇지, 분명 동문회 쪽에서 급한 자금난은 해결해줄 겁니다. 그리고 그 동문회의 지원으로 공급망도 분명 개선이 될 테고요.”
“그래서? 대출을 승인해줘야 한다?”
“좋은 거래처를 잃고 싶지 않다면요. 게다가 임현욱 사장은 은원이 확실한 사람이라 이렇게 어려울 때 우리가 손을 내밀어주면, 그 동문회 쪽과 거래를 트는데도 분명 도움을 줄 겁니다. 제 판단에 이 건은 여러모로 파이가 큰 건입니다.”
내 말에 지점장의 눈이 반짝인다.
“근데 그걸 직접 다 조사한 거야?”
“예.”
주식 대박을 터트린 후 마냥 희희낙락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지난 번 보관실에서 가장 먼저 발견했던 성우실업 건부터 확인을 시작했다.
변동정보는 부채 비율 감소.
그 키워드 하나로 이래저래 조사를 해보니 동문회란 게 있다는 걸 알았고, 동문회에 대해 알아본 끝에 부채 비율 감소가 바로 그 동문회의 지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참았어?”
“예?”
“이미 부결된 건까지 물고 늘어질 만큼 대부계 일이 그렇게 좋으면서 그동안 근질거려서 어떻게 참았냐고. 이런 걸 다 조사하려면 시간도 꽤 걸렸을 테고, 대부계가 아니니 외근도 나갈 수 없어서 퇴근 후에나 발품을 팔았을 텐데······.”
딱히 대부계 일이 좋아서 한 일은 아니지만, 퇴근 후 빨빨거리며 열심히 발품을 판 건 사실이다. 부채 비율 감소라는 키워드 하나를 단서로 이래저래 조사를 하며 퍼즐을 맞춰가는 재미도 꽤 있었다.
“한 차장과는 좀 풀었어?”
불쑥 던져오는 질문.
“······.”
“아직 그대로인가 보군. 그러지 말고 잘 좀 풀어봐. 대부계 뱅커가 언제까지 창구에서 텔러들이나 돕고 있을 수는 없잖아? 너무 오래 그러고 있으면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돈은 두 배로 받으면서 일은 절반밖에 못하니 그야말로 월급 도둑.
어느 정도까지야 지점장의 재량으로 커버칠 수 있겠지만, 지점장의 말마따나 오래 지속되면 충분히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노력은 해보겠습니다만······ 당장은 풀고 싶어도 풀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한 차장 상태가 풀고 말고 할 그런 상태가 아닌 것 같아서······.”
“하긴, 요 며칠 한 차장이 좀 이상하긴 하더군. 뭐 짚이는 거라도 있어?”
난 잠시 망설였다.
한 차장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점의 관리자인 지점장은 알아야 할 권리가 있고, 난 그걸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한 차장이 주식을 하는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지점장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자.
“주식? 주식이야 뭐······.”
주식을 하는 거야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일과 시간에 사무실에서 주식 창을 여는 걸 은섭씨가 몇 번이나 봤다고 합니다.”
“사무실에서, 그것도 일과 시간에 주식을 했다는 거야?”
“예. 그리고······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까지 받아서 진행한 거 같은데, 돈을 꽤 잃은 모양입니다.”
“하!”
어이없다는 듯, 놀랐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린다.
거기까지다. 내가 보고를 올릴 수 있는 건.
사기니 횡령이니 하는 건 지금은 말할 단계가 아니다.
“알았어. 일단 나가봐. 나가는 대로 한 차장 좀 오라 그러고. 그리고 성우실업 대출 건은 내가 전결로 승인 처리할 테니까, 하 대리가 직접 가서 생색 좀 내고 와.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알고 있다.
자금 문제가 없는 기업에게 은행원은 잡상인이지만, 그렇지 못한 기업에게 은행원은 신이다.
전화 한 통, 문자 하나 달랑 보내고 마는 거랑 신이 직접 강림하여 내미는 손은 그 임팩트가 다른 것이다.
“지금부터 성우실업 담당은 하 대리가 맡아.”
“하지만 원래 담당은 서후남 대리입니다만······.”
“됐어. 하 대리가 맡아. 그리고 일이 잘 풀려서 그 동문횐지 뭔지도 끌어올 수 있으면 끌어오고. 공과는 전부 다 하 대리한테로 돌릴 거니까. 가만, 일진기업에 이번 건까지 잘 되면······ 올해의 우수행원상은 하 대리가 먹을지도 모르겠는데?”
이젠 대놓고 자기 새끼 챙기기까지 한다.
전폭적으로 밀어주는 느낌.
딱히 그게 싫을 이유는 없다.
‘근데 올해의 우수행원상이라고?’
입행 초기 때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단어.
나와는 별개의 일이고, 어느 순간부터는 딱히 관심도 안 생겼고, 남들이 타는 모습을 봐도 그저 요식행위 같아서 감흥을 잃은 지 오래.
그런데 막상 지점장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난다.
‘그래. 모름지기 은행원이 되었으면 프로필에 올해의 우수행원상 정도는 박아주는 게 국룰이긴 하지.’
※※※
“무슨 일이야?”
동생 주은이 의아히 나를 본다.
“무슨 일이긴, 밥 사준다니까.”
“그러니까 웬일로?”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아도 서로 바빠서 얼굴 볼일이 잘 없다.
더구나 주말도 아니고 평일에 녀석의 직장 앞까지 찾아와 밥을 사준다고 하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걱정부터 되는 모양이다.
“그냥 오빠가 고생하는 동생 밥 한 끼 사주러 온 것 뿐이니까 그런 눈으로 볼 거 없거든? 얼른 먹고 싶은 거나 말해. 나 요즘 주머니 진짜 빵빵하니까 엄청 비싼 걸로다가.”
다른 남매들은 남매 간에 일상다반사로 싸운다지만 주은이와는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 7살의 나이 차도 나이 차지만 둘 다 성격이 좀 데면데면한 편이라 딱히 부딪힐 일이 없었다.
“빵빵해봤자 은행원이지. 이 옆에 싸고 괜찮은 한정식집 있으니까 글루 가.”
“아니 진짜 비싼 것도 괜찮다니까.”
“알았어. 오빠 돈 많아. 근데 난 거기 한식집이 좋아. 오빠도 가 보면 마음에 들걸?”
그렇게 주은이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도착한 한정식집은 주은이의 말대로 의외로 꽤 괜찮은 곳이었다.
음식들은 정갈하고, 통나무들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가게 안 분위기도 차분하고 좋았다.
1인당 만오천 원인데도 맛까지 만족스럽다.
주은이가 자신 있게 날 데려올 만했다.
“여기 괜찮지?”
“괜찮네.”
“거 봐. 괜찮다니까.”
내가 더덕무침을 한입 베어 물며 흡족한 표정을 하자 주은이 뭔가 뿌듯한 웃음을 짓는다.
그런 동생을 보며 물었다.
“요즘 일은 안 힘들어?”
“힘들지! 아주 죽을 지경이야. 요즘은 내가 이러려고 그렇게 죽어라 공부를 했나, 현타가 다 온다니까.”
주은이 다니는 곳은 수 구조연구소라는 곳이었다.
건설 관련 토목구조설계부터 안전진단, 공법 연구 등을 하는 곳으로, 예전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의 직업이기도 했다.
주은은 어중간한 성적으로 어중간한 대학을 나온 나와는 달리, 서울대에 대학원까지 마친 재원이다.
그런 학력에 비하면 수 구조연구소는 그야말로 박봉.
돈을 벌기 위한 곳이 아니라 경력을 쌓기 위해 잠시 머무는 곳이다.
서로 뜨내기들인 걸 아는데 직장 내 분위기인들 좋을 리가 있나.
그 스트레스가 어떠한지 잘 알기에 푸념을 늘어놓는 동생이 그저 짠하다.
그렇게 이런저런 푸념들을 들어주는 사이 식사가 끝이 나고, 작은 종지 그릇에 수정과가 담겨 나왔을 때, 난 동생의 앞으로 통장을 내밀었다.
“이거 뭐야?”
“봐.”
통장 안을 확인하던 주은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통장에 4천만 원이 찍혀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게 뭐야?”
“그거면 학자금 대출 갚고 소형차 정도는 살 수 있을 거야. 가뜩이나 힘든 직장생활, 이제 지옥철은 졸업해야지.”
“그러니까······ 이게 뭔데?”
“뭐긴, 이 오라버니가 주는 선물이지.”
“오빠가 이런 큰돈이 어디서 나서? 요즘 은행원들 셀프대출이니 뭐니 사건 기사 많던데, 막 내 명의로 4억 땡겨다가 꼴랑 이거 주는 거 아냐?”
농담 반 걱정 반.
“네 명의로 4억이 땡겨지기나 하고?”
“안 되나?”
“반의반도 힘들지.”
“쳇! 나 완전 헐값이네. 근데 진짜 이거 무슨 돈이야?”
“정당하게 번 돈이니까 그냥 편하게 쓰면 돼.”
“이 큰돈을 어떻게 편하게 써? 어떻게 생긴 건지도 모르는데. 정말 은행에서 사고 친 거 아니지?”
“사고는 뭐 아무나 치냐. 감시하는 눈이 몇 갠데. 사고도 최소 차장급 정도의 관리직은 되어야······.”
순간 난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정지했다.
그러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그래? 뭐야 무섭게?”
“미안. 급하게 확인할 게 있어서 은행 좀 가봐야겠어.”
“이 시간에? 왜? 무슨 일인데?”
“별일 아니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 암튼 내일 바로 학자금부터 갚아. 차는······ 다음에 시간 내서 같이 가서 보든가 하고. 아, 다음주 주말에 본가 내려갈 건데 시간 돼?”
“따로 약속은 없긴 한데······.”
“그래. 그럼 그때 보자.”
난 한식집을 나와 바로 은행으로 향했다.
한 차장 일에는 별로 관여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에이, 아니겠지? 아무렴 설마 그렇게까지 미쳤을라고.’
< 설마 그렇게까지 미쳤을라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