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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9화 (9/50)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09

19억 2천만 원.

영끌한 돈 1억 7천을 처리하고 17억 5천이 남았다.

은행원으로 평생을 일한다고 해도 과연 만져볼 수 있을까 싶은 돈을 정확히 23일 만에 번 것이다.

처음 며칠은 이 돈으로 뭘 할까 행복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이 돈이면 한강 뷰의 아파트도 살 수 있고, 평소 꿈꾸던 독일 3사의 고급차도 살 수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로망이었던 벤츠 지바겐을 검색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점심식사를 하러 가다 발견하게 된 슈퍼카를 보며 ‘까짓 한 번 질러 버려?’ 라는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은 접었다.

이번 일로 내게만 보이는 변동정보가 큰돈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물론 기업금융지점과는 달리 장원 지점에서 다루는 기업들은 상장 기업들도 아니고, 그래서 고려제당처럼 그런 정보들이 직접 적으로 돈이 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번 경우처럼 언제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 기회가 만들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그럴 때를 대비한 종잣돈으로 15억은 따로 빼두기로 했다.

“뭐, 그렇긴 해도 쓸 때는 써야하니까.”

그래서 2억 5천은 남겼다.

동생 주은이의 학자금 대출과 아버지가 8년째 몰고 계시는 15만 킬로의 구닥다리 suv, 평생 자식들 뒷바라지만 하느라 변변한 가방 하나 없는 어머니께 드릴 명품백과 지금 수신계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있는 이 비싼 쓰벅 커피를 위해서.

“하 대리. 이거 무슨 커피야?”

심은정 차장이 의아해 한다.

“제가 쏘는 겁니다. 그동안 얻어먹기만 했잖아요.”

반응은 즉각 터졌다.

“와! 하 대리님 최고!”

“어쩜 제가 콜드브루만 마시는 건 어떻게 알고······.”

“나도 좋아하는 돌체라떼를 딱! 역시 우리 하 대리님 센스 짱!”

고작 커피 한 잔에 이렇게 반응이 뜨거우니 오히려 살짝 민망해지려고 한다.

내가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앉자 김승혜 계장이 슬쩍 물어온다.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그래보입니까?”

“예. 커피도 그래서 돌리신 거 아니에요?”

“하하. 맞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일도 있고, 그동안 얻어 마신 커피만 해도 수십 잔이라 그것도 갚을 겸 겸사겸사의 의미로다가······.”

“커피 취향들은 또 어떻게 아셨어요?”

“손이 느려 민폐만 끼치고 있는데, 여기서도 쫓겨나지 않으려면 눈치라도 빨라야 하니까요.”

“역시 이래서 애들이 하 대리님 하 대리님 하는 모양이에요.”

“예?”

“모르셨어요? 여기 텔러들 다 하 대리님 팬인 거? 모르긴 몰라도 이성으로 호감 가진 애도 있을 걸요?”

“예에?”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다.

한성은행은 텔러들을 얼굴로 뽑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모들이 뛰어난 걸로 소문이 자자하다. 그건 장원 지점이라고 다를 바 없다.

어딜 가도 눈길을 끌만 한 미모들이다.

주변에 능력 있고 잘난 남자들이 널렸을 텐데 굳이 날? 아니 왜?

대부계에서도 쫓겨나서 여기서 텔러들 수발이나 들고 있는, 심하게 말하면 사회부적격자라고도 할 수 있는 처지인데······ 한 차장 쪽 준 게 좀 먹힌 건가? 아님 그 발차기?

“모르셨구나. 하 대리님 남자로 꽤 매력있어요.”

농담이······ 아닌 것 같다.

당연히 기분은 좋다. 괜히 어깨도 좀 올라간다.

결혼 4년 차에 2살 된 딸도 있지만 여전히 상당한 미모를 자랑하는 김승혜 계장이다.

김승혜 계장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는데 기분이 안 좋을 리가 있나.

또 한편으로는 나한테 이성으로 호감 가지고 있는 텔러도 있다는 말에 괜히 텔러들을 쓰윽 둘러보게 된다.

‘재복에 이어 여복까지 터지려는 건가?’

연애.

당연히 해봤다.

대학 때 잠깐 했다가 군대 가서 헤어졌고, 취직 전에 잠깐 사귀었다가 취직 후 고된 격무로 인해 사이가 소원해져서 헤어졌다.

그러고 보면 연애가 끊긴 지 벌써 5년이다.

‘이참에 사내 연애 한 번 해봐?’

그런 내 마음이 읽혔나 보다.

“사내 연애는 결사반대예요. 우리 애들 중 사내 연애하겠다는 애 있으면 아주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말릴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김승혜 계장 부부도 사내 연애로 결혼한 커플이다.

‘아니,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건지도.’

듣기로 고작 1년 남짓의 사내 연애사가 꽤 버라이어티 했다는 것 같으니까.

난 그런 그녀를 보며 쓴웃음을 지어보였고, 김승혜 계장도 풋 실소를 흘리고는 말문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 통 한 차장님이 안 오시네요?”

“어? 그러네요?”

워낙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내다 보니 한 차장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 이후로, 그러니까 일진과 삼원 브레이크 간의 계약 소식을 알린 후, 그날 그렇게 사색이 되어 돌아간 다음부턴 단 한 번도 창구로 날 찾아온 적이 없었다.

‘그게 그렇게도 충격이었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직까지 그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슬쩍 대부계 사무실로 가 보았다.

하지만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 막내 이은섭에게 물었다.

“은섭씨.”

“아, 하 대리님.”

“차장님은?”

“차장님요? 어? 조금 전까지 있었는데······.”

이은섭이 한 차장의 비어있는 자리를 보며 의아해하는 그때, 사무실로 한 차장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 며칠 못 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몰골이 말이 아니다.

축 늘어진 어깨, 광대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눈은 움푹 들어가 퀭했고, 홀쭉 들어간 볼은 그새 한 5킬로는 빠진 것 같다.

‘뭐야? 왜 산송장이 다 됐어?’

거기다 잠시 담배를 피고 온 것 같은데, 얼마나 줄담배 질을 한 것인지 담배 냄새가 아주 코를 찌르고, 대부계로는 얼씬도 말라던 사람이 날 보고도 눈길만 한 번 쓱 주고는 자신의 자리로 가서 털썩 쓰러지듯 의자에 몸을 묻어 버린다.

난 따로 조용히 이은섭을 사무실 밖으로 불러내 물었다.

“차장님 왜 저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니면 접때 일진기업 회생 후부터 줄곧 저런 상태인 거야?”

“그때도 좀 문제가 있어 보이긴 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럼?”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건 3일 전부터였던 것 같은데······.”

“3일 전?”

“예. 근데······ 이런 말씀을 드려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요 며칠 주식을 하시는 것 같더라구요.”

“주식? 그걸 은섭씨가 어떻게 알아?”

“몇 번 우연히 차장님 개인 노트북에 주식 창이 떠있는 걸 봤거든요.”

“뭐?”

황당했다.

은행원이 주식을 하는 건 문제가 안 된다. 정보력 면에서 타 직업군보다 유리한 부분이 분명 있긴 하지만 법적으로도 아무 문제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은행은 일과시간 내 은행 안에서 주식을 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워낙에 유혹이 많은 직군이고, 또 그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는 직업이라 관련 사고가 수시로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한성은행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도 고려제당 주식을 매입할 때는 반차까지 써가면서 했었다.

그런데 은행 내에서 일과시간에 버젓이 주식창을 보고 있다니?

이론의 여지가 없는 징계감이다.

‘이 인간이 완전 정신줄을 놓은 건가?’

“혹시 무슨 주식을 보고 있었는지는 봤어?”

“예. 고려제당이라고 아세요? 그, 요즘 한창 뜨거웠던 종목인데.”

“고려제당?”

여기서 고려제당의 이름을 듣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설마 거길 들어간 거야?”

“예. 그런 것 같더라구요. 주식 창에도 그 종목이 떠 있었고, 차장님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지신 것도 폭락 직후부터였거든요.”

“얼마나 들어갔는데?”

“그건 저도 잘······ 근데······.”

이은섭이 뭔가 말을 하려다 만다.

“왜? 뭔데?”

“그게······ 일주일 전쯤에 차장님께서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으신 게 있어서······.”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타행에서도 대출을 알아보시는 것 같았고. 물론 주식과 관계가 없을 수도 있지만······.”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아까 그 모습을 보면 분명 관계가 있어도 오지게 있다.

‘일주일 전이라고?’

일주일 전이면 한창 피크를 칠 때다.

토론방이며 증권가 찌라시며 합병이니 뭐니 희망회로 오지게 돌리고 있을 때다.

그때 들어갔다면······ 20만원은 훌쩍 넘겼을 테고, 지금 주가는 98,000원이다.

‘아주 꼭대기에서 물렸구만.’

그야말로 반토막.

나락이다.

더 최악인 것은 거기에 물린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손절도 못한 채 혹시 모를 합병만 기다리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아니, 확실하다.

한 차장의 분위기만 보아도 어떤 상황인지 명확히 그림이 그려진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인 거지?’

내가 아는 한 차장은 주식에 크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요행수에 인생 한 방 노리고 베팅할 만큼 무모하지도, 배포가 큰 인간도 아니었다.

오히려 쪼잔하다면 쪼잔하고 소심하다면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까지 받았다?

심지어 그 돈으로 주식을 했다고?

납득이 안 된다.

나처럼 확신을 가질 만한 이능력이 생긴 것도 아닐 테고.

‘그랬다면 이 지경이 되지도 않았겠지.’

당장 급하게 무슨 큰 돈이라도 필요했던 것일까?

아니, 직장인이 아파트를 담보 잡으면서까지 크게 한 방을 노려야 할 만큼의 큰 돈이 필요한 일이라는 게 대체 뭐란 말인가?

‘가만······.’

“대출을 받았다면 여기서 받은 거야?”

이런 상황이면 등급변동 정보가 생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그 정보라면 좀 더 구체적인 사정을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 제가 직접 서류를 챙겼거든요.”

“그럼 그 서류······ 보관실에 있겠네?”

“뭐, 그렇죠. 가져다 드릴까요?”

“아냐. 내가 직접 가서 찾아볼게.”

“근데 그건 왜 보시려는 건지······?”

“그냥 좀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아, 그리고······ 한 차장님 말이야. 잘 지켜봐.”

“왜요?”

“왜긴! 한강은 몰라도 옥상으로는 못 가게 막아야지!”

합병 소식은 없을 테니 주가는 더 떨어질 게 분명하고, 그럼 상상하기 싫은 최악의 상황이 만들어 질 수도 있다.

한 차장의 모습은 그만큼 위태로워 보였다.

※※※

그렇게 당부를 주고는 곧장 보관실로 향했다.

대출 중인 서류들이 아무리 많아도 승인 날짜만 알면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가계담보대출 항목에서 금방 한정훈이란 이름을 찾았다.

서류를 꺼내들자 바로 등급변동 정보가 떴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판정보류]

[등급하락요건 발생]

[등급하락요건: 사기 및 횡령]

[개인신용평가등급 A→D 확정날짜: 202X년 6월 20일]

순간 내 미간은 더 찌푸려질수가 없을 만큼 찌푸려졌다.

‘사기······ 횡령······ 이라고?’

정말이지 이건 상상도 못했다.

< 정말이지 이건 상상도 못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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