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8화 (8/50)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08

[한성은행 서초동 기업금융지점]

박순호 지점장의 주선으로 약속을 잡고 기업금융지점에 도착한 것은 창구 업무가 끝나고 비대면 업무가 시작되는 4시 30분 경이었다.

기업금융지점이라고 해서 외형적으로는 다른 지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반적으로 하는 일도 비슷하다.

입출금부터 공과금 수납 등 창구에서 고객들을 응대하는 것도 똑같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일명 RM이라 불리는 기업금융팀이 있다.

일반 영업점들과는 다루는 기업의 규모가 다르고, 돈의 단위가 다르고, 상대하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다르다.

그런 만큼 어떤 상황에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을 만큼 민첩해야 하고, 그만큼 많이 공부해야 한다. 늘 고된 격무에 시달리고 정신적 압박도 상당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RM이 은행원의 꽃이라 불리는 것은 RM경력이 이후의 커리어에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도 있지만, 그 자체로 막강한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부 평판이 높은 RM의 경우는 그 발언권이 본점 심사역들의 결정마저 엎어버릴 정도.

즉, 개인의 판단으로 수백억의 은행 돈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하성운 대리라고?”

그렇게 내 이름을 되물으며 날 위아래로 훑어가는 눈빛이 날카롭다.

기업금융지점 부지점장 정상용.

전형적인 직장인 느낌의 박순호 지점장이나, 현재 기업 연수 중인 마냥 사람 좋은 지상준 부지점장과는 사뭇 다른 유형의 느낌이다.

“박 지점장이 하도 부탁을 하길래 수락은 하긴 했지만, 이걸 왜 보려고 하는 거지?”

정상용 부지점장이 손에 들린 서류를 슬쩍 들어보이며 묻는다.

고려제당의 대출 서류다.

게다가 이 상태로도 변동정보가 보인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판정보류]

[등급상승요건 발생]

[등급상승요건: 산영물산의 지분인수]

[기업신용평가등급 B→A 확정날짜: 202X년 5월 6일]

그런데 애매하다.

어차피 승인 처리 된 대출 건이고, 등급도 B. 그러니 한 등급 오르는 게 최대긴 하다.

하지만 사유가 고작 지분인수라니?

재정 상태가 부실한 기업의 지분을 재정 상태가 좋은 기업이 지분을 인수하게 되면 당연히 기업평가는 올라가기 마련이다.

당연히 주가 상승에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내가 예상한 폭등의 수준은 그런 정도의 호재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예상한 폭등은 최소 열다섯 배였다.

남들이 들으면 코인도 아니고 주식판에서 무슨 열다섯 배냐며 황당해 할 수도 있지만, 충분한 근거가 있다.

장한실 사장의 가계 부채와 신용상태를 고려해 계산해봤을 때, D에서 A로 단번에 등급상승이 이루어지려면 유동 자산이 최소 7억 5천이 필요하다.

즉, 그 오천만 원짜리 주식이 열다섯 배는 올라야 가능하다는 것이고, 그건 곧 고려제당의 주가가 그만큼 오를 거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과연 주식판에서 이 정도 호재로 열다섯 배나 오를 수 있을까?

“이봐. 하성운 대리. 지금 내 말 듣고 있나?”

내가 그런 생각들에 빠져있는 사이, 정상용 부지점장이 살짝 짜증을 내며 다시 묻는다.

“고려제당의 대출 서류는 왜 찾는 거냐니까?”

“그거······ 필요없습니다.”

“뭐?”

“고려제당이 아닌데 제가 회사를 좀 착각했습니다.”

필요한 건 이미 다 봤다.

그런 내 변덕에 정상용 부지점장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날 본다.

난 그런 그를 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제가 괜히 부지점장님을 귀찮게 해드렸네요. 제가 이렇게 정신머리가 없습니다. 저희 지점장님도 그래서 저만 보면 맨날 한숨이시죠. 하하.”

멋쩍게 웃으며 주저리주저리 둘러대 보지만 그다지 먹히지는 않는다.

불쾌감에 더불어서 의심만 깊어진다.

하지만 그런들 어쩌겠는가.

내가 착각을 했다는데.

게다가 정말로 서류에는 손도 안 대고 있는데.

그렇게 난 정상용 부지점장의 따가운 눈총을 뒤로하고 기업금융지점을 나왔다.

돌아가면 지점장이 한소리 하겠지만, 지금 내겐 그런 건 고민 축에도 못 든다.

“어쩐다······.”

고려제당의 기업가치를 역동적으로 바꿔줄 만한 대단한 호재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 때문에 100퍼센트였던 확신에 약간의 의심이 생겼다.

작은 의심이 망설임을 만든다.

이미 영혼까지 끌어모으고 있었다.

그렇게 최대로 끌어모을 수 있는 돈이 1억 7천.

일개 은행원인 내 입장에선 자칫 잘못되면 그야말로 인생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돈이다.

100%의 확신이라고 해도 쫄리는 액수인데, 그 100%마저 깨졌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100%에 가까운 확률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두고두고 이불킥 각이겠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미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멈출 수도, 뛰어내릴 수도 없다.

그런데······ 삼일 후, 대출 승인 소식과 함께 통장에 꽂힌 1억 7천을 두 눈 질끈 감고 고려제당에 모조리 태워버린 다음날이었다.

그 사이 조금씩 조금씩 오르던 주가가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상한가를 쳐버렸다.

※※※

“하 대리······ 이게 꿈인지 생신지······ 요즘 심장 떨려서 나 잠도 못 자.”

퇴근을 하고 집에 막 들어온 참이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장한실 사장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린다.

잠을 못자고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첫 상한가를 친 후, 오늘로 7거래일 연속 상한가였다.

정말이지 미친 듯이 올랐다.

처음엔 다들 전쟁 수혜로 곡물주라서 오르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3연상을 넘어가자 작전주라는 말이 나왔고, 5연상이 되어서야 산영물산이 고려제당의 지분을 인수할 거라는 정보들이 토론방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7거래일 연속 상한가를 친 지금은 그것이 완전히 기정사실화 되었음은 물론이고, 그것 말고도 다른 게 더 있을 거라는 여러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덕분에 주당 21,300원에 들어갔던 것이 지금은 무려 132,500원.

1억 7천이 단 10일 만에 여섯 배가 넘게 오른 10억이 된 것이다.

아무리 예상했던 일이라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마음은 산만하고 정신은 어질어질, 하루 업무를 어떻게 봤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내가 그런데 장한실 사장이야 오죽할까.

“이것만 해도 난 그냥 너무 고맙고 감사한데······ 그만 처분할까?”

목소리에서 불안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만족과 안도도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먼지만 쌓이고 있던 유품함 속 증서가 지금은 무려 4억에 가까운 돈이 되어 있는 것이다.

“며칠 만 더 기다려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내일은 거래정지니까, 이참에 마음도 좀 추스르시고 잠도 푹 주무세요.”

투자위험종목 지정으로 벌써 두 번째 거래정지.

그러나 아직이다.

목표가는 주당 28만원.

등급변동 정보대로라면 앞으로 6일 후인 5월 6일이 지분인수 공시일이다.

‘공시까지 나면 목표가 정도는 가뿐히 찍겠지.’

하지만,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데도 마음은 불안하다.

어떻게든 좋은 생각만 하려는데도 자꾸만 불안이 엄습한다.

하필이면 이럴 때 그 변동정보가 틀려버리는 거나 아닌지, 아직 변동정보에 대한 데이터가 부실하기 그지없는데 그걸 너무 믿고 있는 거나 아닌지······ 그 생각을 하면 타는 갈증에 몇 번이고 냉장고 문을 열어 찬물을 들이켜게 된다.

거기다가 목표가까지 가는 길도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다.

정지가 풀린 첫 거래일······ 하락했다.

주말을 지나 두 번째 거래일도 연속으로 하락.

심지어 13만원이었던 주가가 2거래일 만에 9만원까지 곤두박질 칠 정도로 떡락 수준.

그 바람에 토론방은 아주 난장판이다.

-아! 쳐 물렸네

-병신들, 내가 계속 말했잖아. 고점이라고.

-재료 소멸. 목숨 소멸. 난 이만 개꿀 빨고 갑니다. 호구님들 덕분에 잘 먹었어요.

-조정인가?

└ 조정? 세력 설거지 중인 거 딱 보면 몰라?

-탈출은 지능 순.

-폭탄 돌리기네. 이런 날 매수하는 개돼지들 꼭 있음.

-주담 전화 안 받음. 이런 개 같은 회사.

-님들. 여기 12층인데 구조대 올까요?

└ 12층? 한강 물 아직 차니까 핫팩 챙겨 가세요ㅋㅋㅋㅋ

-이거 상장폐지 각인가요?

아마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이런 악담들을 보았다면 멘탈이 꽤 털리지 않았을까?

당장 내일모레면 공시가 뜬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그런 글들을 보고 있자니 울컥한다.

‘하여튼 주식쟁이들, 사람 염장 지르는 데는 아주 도가 텄다니까.’

아무튼 그렇게 어린이날이 지나고, 5월 6일 대망의 공시일이 밝았다.

그리고 아주 다행스럽게도, 한 치의 틀림도 없이 공시가 떴다.

[산영물산, 고려제당의 지분 30.25% 인수]

※※※

-거 봐! 내가 그랬지? 이거 뭐 있다니까.

-씨바. 또 상이야? 개 부럽네.

-내일 무조건 전 고점 돌파 각이네.

-이 주식 완전 미쳤는데?

-지분 인수 정도로 이 지랄이 난다고?

-매수잔량이 산처럼 쌓였어! 이거 또 연상 각?

-상만 대체 몇 번째냐고! 주가 조작 아냐?

-아 씨바! 9만원에 팔았는데······ 지금이라도 타야 되나······.

└ 9만원? 개 똥손이네. 주식 접어 새꺄.

-근데 진짜 어떻게 이렇게 오르지? 작전인가?

└ 작전은 개뿔! 딱 통밥 안 나오냐? 산영물산에서 우회 상장 노리고 합병 추진하고 있는 거잖아. 그거 때문에 세력들이 냄새 맡고 미친 듯이 달려든 거고.

└ 합병? 뭐야? 그럼 더 태워야 되나?

└당연하지! 완전 땅에 굴러다니는 돈 거저 줍기 급인데, 이럴 때 영끌하지 않으면 언제 해?

누군가에게서 합병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때부턴 마치 들불처럼 너나 할 것 없이 합병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합병이 예상된다는 증권가 찌라시까지 연이어 이어졌다.

그 바람에 다시 2연상 후 거래정지가 걸렸고, 정지가 풀리자마자 또 쩜상을 찍으며 장을 마감했다. 다음날도 엄청난 매도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20% 상승.

그렇게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후 주가는 종가 기준 241,000원이었다.

내 총자산은 1,928,000,000원.

19억.

현실감 없는 숫자.

소파에 앉아 가만히 보고 있자니 히죽히죽 나도 모르고 자꾸 웃음이 난다.

역시 사람은 주머니가 든든해야 하나 보다.

앱에 찍혀 있는 평가액만 보고 있어도 세상 못할 것이 없게 느껴진다.

그렇게 참 길기도 한 숫자들을 보며 흐믓해 하고 있을 때였다.

지이이이잉~

날 귀찮게 하는 거라 생각했는지 주가가 떨어질 때도, 다시 치고 올라왔을 때도 연락 한 번 없던 장한실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리고 하는 말,

“나······ 주식 다 팔았어.”

“······?”

순간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달력부터 확인했다.

5월 12일이다.

변동정보에 적혀있던 날짜는 5월 13일.

하루가 빠르다.

이유는 금방 알아차렸다.

아직 돈이 주식계좌에 남아 있는 것이다. 아마도 변동성이 다분한 주식계좌의 돈은 유동 자산으로 인식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도무지 이대로는 내가 살 수가 있어야 말이지. 집사람이 자기보다 내가 더 환자 같대.”

“잘하셨습니다. 돈보다는 건강이 먼저죠.”

그렇다고 해도 7억 2천이다.

그 정도면 D에서 A라는 등급상승 정보도 틀리지 않은 셈이다.

“고마워. 이게 다 하 대리 덕분이야. 진짜······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나 몰라. 하 대리가 우리 가족을 살렸어.”

목소리에서 울먹임이 느껴진다.

그 울먹임에 담긴 숱한 감정들이 하나하나 고스란히 다 느껴져, 나까지 괜히 코끝이 찡해온다.

“다음에 또 김밥이랑 국물어묵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요즘 소주가 고픈데, 술친구 좀 해주세요.”

“그래. 그럼세. 언제든 찾아와. 내가 술은 잘 못 마시지만 친구는 되어 줄 테니까.”

전화를 끊었다.

19억이라는 금액에 들떴던 마음이 장한실 사장과 통화를 하고 나니 신기할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후우······ 그럼 이제 나도 정리해야겠지?”

욕심도 쉽게 내려놓아 진다.

난 미련 없이 주식을 다 처분했다.

애초에 인수합병 정보, 1도 믿지 않는다.

만일 지분인수부터 인수합병까지 하나로 이어지는 수순이었다면, 변동정보에 지분인수가 아니라 인수합병이라 떴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이틀 후, 산영물산 이신호 대표의 공식 해명이 있었다.

“산영물산의 고려제당 지분인수는 인수합병과는 전혀 무관하며, 어디까지나 순수한 투자의 목적임을 분명히 밝히는 바입니다.”

물론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발표 이후 고려제당 주가는 급격히 폭락했다.

<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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