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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6화 (6/50)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06

보관실 앞.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처음이 아니다.

이관우로부터 삼원이 인수 경쟁에서 밀려났다는 정보를 듣고, 어쩌면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단지 헛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날에도 난 지금처럼 이 보관실 앞에 서 있었다.

다른 기업의, 다른 사람의 서류에서도 같은 게 보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땐 차마 보관실 문을 열지 못했다.

확인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내 그런 행동들이 혹시라도 나쁜 영향을 끼칠까, 권영섭 사장의 염원으로 만들어진 그 기적 같은 일에 부정이라도 타게 하는 건 아닐까, 다른 서류들을 확인하게 되면 상식의 현실 앞에 그 비현실의 현상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덜컥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해결된 지금은 거리낄 게 없다.

띠띠띠띠띠띠띠띠

여덟 자리의 비밀번호를 누르자, 철컥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갔다.

겹겹이 늘어서 있는 철제 선반들과 그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각종 서류철과 서류함들이 보였다.

환기가 잘 되도록 설계가 되어있어 안 공기는 쾌적하다.

내가 향하는 곳은 보관실 가장 깊은 곳, 대부 항목 쪽이다.

그곳은 두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었다.

상환이 완료될 때까지 보관을 하게 되는 대출 진행 중인 서류들과, 한성은행의 매뉴얼에 따라 일주일 내로 파기해야 하는 대출 부결 서류들.

당연히 대출 진행 중인 서류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기업 대출, 주택자금대출, 학자금대출, 개인신용대출 등등 품목별로 잘 정리가 되어 있는데도 뭐부터 봐야 할지 막막한 느낌. 심지어 날짜도 십 년을 훌쩍 넘긴 것도 있었다.

퇴근 전에 다 보기란 불가능.

그에 반해 부결 서류들은 날짜별로만 나누어 놓았을 뿐, 그야말로 종류 상관없이 서류함 박스에 다 때려 박았다.

게다가 그 박스조차 몇 개 되지도 않는다.

두어 시간이면 충분히 다 확인할 수 있는 양.

난 부결 서류들 중에서도 당장 오늘이 지나면 파기될 4월 9일이라 적힌 서류함부터 꺼냈다.

서류에 적힌 등급은 전부 C와 D.

부결 사유로는, 기업의 경우는 일진기업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기업의 전망이 어둡거나 부도율이 높아서.

가계 대출이나 신용대출의 경우는 기존 대출금이 자산 대비 지나치게 많거나, 연체 이력이 있거나, 그로 인한 신용상태가 나쁘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채무이행 능력이 없다 판단한 경우들이다.

기대와는 달리 처음 몇 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런데, ‘그냥 일진기업 한정이었던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될 무렵이었다.

정확히는 열세 번째 서류를 꺼내 들었을 때였다.

C라는 등급표식 옆으로 또다시 글자들이 타이핑 되기 시작했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판정보류]

[등급상승요건 발생]

[등급상승요건: 부채 비율 감소]

[기업신용평가등급 C→B 확정날짜: 202X년 6월 5일]

성우실업이다.

내 담당이 아니라서 환경필터 제조회사라는 것 말고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중요한 건 이 능력이 1회성이 아니었다는 것.

나한테 정말로 그런 능력이 생겨버린 것이다.

정수리에서부터 등허리를 타고 발뒤꿈치까지, 전율이 흐른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털이 곤두선다.

어찌할 수 없는 격정이 피를 뜨겁게 달군다.

‘이러다 심장마비 오겠네.’

“후우······.”

길게 숨을 내쉬어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준비해온 수첩을 펼쳐 지금 눈에 보이는 글자들을 옮겨적었다.

사진으로 찍을 수 있으면야 편하겠지만 당연하게도 내게만 보이는 이 글자들은 카메라에도 안 찍힌다.

일일이 손으로 옮겨적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성우실업의 등급변동 정보를 적고 나니 문득 드는 의문이 있다.

‘일진기업처럼 드라마틱한 변화가 아니어도 이런 문구가 보인다는 건데······ 그럼 등급변동 정보의 유효일은 언제까지지?’

기업이든 개인이든 신용은 변하기 마련이다.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고, 5년 후, 10년 후가 될 수도 있다.

그럼 십 년 후의 변동 정보까지도 나오는 것일까?

‘그건 아닌가?’

그랬다면 앞서 지나친 열두 개의 서류 전부 아무것도 안 보일 리가 없다.

설마 그 모두가 10년 후, 20년 후까지도 신용이 개선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하물며 개인회생제도가 잘 구비되어 있는 이 나라에서.

그럼 분기일까? 아니면 6개월?

‘하긴, 미리 고민할 필요는 없지.’

지금 이렇게 변동 정보를 옮겨적는 데에는 그런 데이터를 뽑고자 하는 이유도 있으니까.

성우실업의 등급변동 정보를 옮겨 적은 나는 이내 다음 서류를 꺼냈다. 그렇게 다시 여덟 개의 서류를 지나쳐 하나를 더 발견했고, 세 번째는 4월 10일자의 서류함에서 찾았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하나 찾아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던 어느 순간이었다.

“어?”

예상치 못했던 이름을 발견했다.

[가람필방 장한실]

아는 분이다.

내가 거래를 트려고 참 뻔질나게도 드나들었던 붓가게 사장님이다.

내가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든 이유는 당연하게도 주변 소상공인들에 대한 방문 영업의 일환이었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람필방은 무려 4대째 이어오는 붓 가게였고, 장한실 사장은 50년 째 붓을 만들어온 붓 장인이다.

장인정신이랄지, 인품이랄지, 장한실 사장과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깨닫게 되는 것도 많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도 있었다.

‘실적도 같이 올려주셨으면 참 좋았겠지만······.’

오래 거래를 해온 은행이 있었다.

가람필방이 어려울 때 도움을 많이 받았던 은행이라며, 절대로 옮길 일이 없는데 내가 자꾸 드나드는 게 괜히 나한테도 미안하고 그쪽 은행한테도 죄 짓는 기분이라며 그만 오라고 하셨다.

그렇게 발길을 끊은지 2년 정도 된 것 같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오래 거래해온 은행을 두고 왜 여기에다 대출신청을 하신 것일까?

그것도 신용등급이 D라니?

‘크게 돈은 못 벌어도 단골 고객들이 많아서 생활이 부족하진 않으셨는데······.’

그때였다.

타닥 타닥 타닥······.

등급변경 정보가 뜬다.

[판정보류]

[등급상승요건 발생]

[등급상승요건: 유동 자산 증가]

[개인신용평가등급 D→A 확정날짜: 202X년 5월 13일]

‘D에서 A라고?’

지금까지 여기서 찾은 변동 정보는 6건, 여섯 건 중에서 1단계 상승은 네 건, 2단계 상승은 두 건이다. 일진기업과 같은 3단계 상승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는데, 심지어 존경하는 분의 일이니 지금 내 심정이 오죽할까.

“근데······ 유동 자산 증가라고?”

유동 자산이라고 하면 예금, 당좌, 주식, 채권, 재고 물품 등, 비교적 가치가 안정되어 있으면서도 당장 현금으로 만들 수 있는 유가증권을 말한다.

즉, 곧 돈이 생긴다는 뜻이다.

그것도 신용등급을 단숨에 3단계나 올려버릴 만큼의 큰 돈.

‘설마 로또라도 되시는 건가?’

아무래도 장한실 사장님을 한 번 찾아뵈어야 할 것 같다.

그 사이 어떻게 이렇게 상황이 어려워지셨는지도 궁금하고, 또 유동 자산 증가라는 게 무얼 말하는 건지도 궁금하다.

※※※

“어? 퇴근한 거 아니었어요?”

옆자리의 김승혜 계장이 의아해하며 묻는다.

“퇴근요?

부결 서류들을 모두 확인한 후 보관실에서 나온 시각은 4시 40분이었다.

영업시간은 끝이 났지만 아직 퇴근 시간은 아니었다.

“월차 내셨잖아요. 전 그냥 잠시 볼일 보고 다시 가신 줄 알았죠.”

“아닙니다. 확인할 게 있어서 보관실에 좀 다녀오는 길입니다.”

“이런······ 어쩌죠? 아까 지점장님께서 찾으셨는데 저는 하 대리님이 가신 줄 알고 그렇게 말씀드렸거든요.”

“지점장님이 저를요? 무슨 일로······?”

“그건 잘 모르겠는데 되게 급한 일이신 것 같았는데······.”

김승혜 계장이 곱고 반듯한 이마에 가는 주름을 만들며 난감해 한다.

그런 김승혜에게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웃어주며 물었다.

“지점장님은요?”

“아직 지점장실에 계실 거예요.”

무슨 일인지는 대강 짐작이 된다.

아마도 한 차장에게 일진기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나를 급히 찾는 이유도 뻔하다.

일진기업의 회생은 지점장에게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니까.

지점장실로 향했다.

“지점장님. 저 하성운 대리입니다.”

“어? 하 대리? 어서 들어와!”

아주 똥줄이 타고 있었는지 지점장실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다급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지점장실 안으로 들어서자 다짜고짜 그렇게 물어온다.

“뭐가 말씀입니까?”

“일진기업 말이야! 대체 삼원이 왜? 일진기입이 부도 처리되면 1순위 인수처였는데 굳이 왜 그런 계약을 맺어?”

음······ 이건 좀 의외다.

이미 1순위 인수처가 KG로 내정되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

명색이 전무 라인인데도 정보가 너무 어둡다.

‘은행은 정치라며 입버릇처럼 말하던 양반이······.’

정작 자신은 정치를 제대로 하고 있진 못한 것 같다.

“1순위 인수처가 삼원에서 KG로 바뀐 것 같더라구요.”

“뭐? KG? 그럴 리가······ KG랑 삼원은 체급부터가 다른데······.”

하긴, 그만큼 일이 은밀하게 진행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도 이관우에게 직접 듣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일이니까.

오히려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난 더 안심이 된다.

적어도 조상무가 하려던 짓거리에 같이 발을 담그진 않았다는 뜻이니까. 그건 곧 김강철 전무까지 뛰어든 판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보관실에서 등급변동 정보를 확인하며 결심한 것이 있다.

앞으로 내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지점장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것.

지금도 날 자기 새끼로 여기고는 있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내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맹목적인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렇게 내 든든한 뒷배가 되어줘야 할 사람이 뭔지 모를 어떤 찝찝한 일에 가담했다고 하면 내 결심을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든 KG로 내정되었다는 정보를 삼원이 알게 된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서둘러 계약을 진행한 것이구요.”

“그러니까 정말 삼원이 일진이랑 계약을 했다는 말이지?”

“예. 거의 파트너십에 준하는 계약 조건입니다.”

“늦지 않게 어음도 처리 할 거고?”

“예. 아마 오늘 중으로 처리가 될 겁니다.”

순간, 내게로 한껏 기울였던 상체를 뒤로 젖히며 의자에 깊이 몸을 묻는다.

“후우······ 난리났구만. 난리가 났어. 멀쩡한 기업을 부도 처리하려고 했으니······ 대체 손실이 얼마나 되는 거야? 삼원이랑 파트너십에 준하는 계약조건이라면 그 기대 수익은 또 얼마나 되고? 하아······ 정말 난리가 났네.”

암담할 수밖에 없다.

등급 하향을 주장한 한 차장도 책임이 크긴 하지만, 결정권자인 지점장의 책임이 훨씬 무겁다.

자칫하면 좌천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조금 더 극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그 실의와 절망감이 더 깊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툭 던지듯 말했다.

“손실은 없을 겁니다.”

“뭐? 손실이 없을 거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당장 우리쪽 대출금부터 정리하려고 들텐데······.”

“그거 정리 안 하기로 했습니다.”

“뭐?”

“기 대출금 그대로 우리에게 맡기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순간, 박 지점장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되묻는다.

“그거 진짜야?”

“예. 차후 천천히 대출금 비중을 줄여나가기로 했지만, 그 문제는 전적으로 저한테 일임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대출금을 줄여나가는 만큼 예금 등으로 자산을 돌리면 기대 수익도 어느 정도는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거······ 진짜지?”

“예.

“하하······.”

살았다는 안도의 웃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다 있나······ 이런 고마울 때가 다 있냔 말이지. 아니,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건 하 대리 자네로군. 그동안 일진기업 일에 그렇게 신경을 쓰더니, 결국 그 보답을 받게 된 거잖아? 그러네. 하 대리가 날 살린 거네! 하 대리 덕에 우리가 산 거라고! 하하하하!”

생색 좀 내려고 했었다.

이게 다 내 덕분이란 걸 팍팍 인식시켜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박 지점장의 이 격한 반응을 보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긴, 은행원에게 좌천만큼 무서운 것도 없지.’

좌천의 위기를 벗어나게 해준만큼 나에 대한 고마움도 당연히 클 수밖에 없다.

그 덕분에 팥으로 메주 쑤기가 크게 한 걸음 진척이 된 것 같아서 나도 아주 흡족하다.

그러고 보면 기적으로 점철된 하루다.

기적을 확인했고 다시 기적을 만났다. 그리고 이렇게 또 다른 기적을 위해 나는 한 걸음 나아가고 있었다.

< 설마 로또라도 되시는 건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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