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05
“그럼 저희 쪽도 여유가 없는 상황이라 일정에 차질 없이 납품 부탁드립니다.”
“예. 물론이죠. 저희 일진은 20년 간 단 한 번도 납품일을 맞추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십시오.”
“예. 그게 삼원이 일진을 택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죠. 아, 그리고 말씀하신 계약금과 선대금은 오늘 중으로 입금될 것이니, 모쪼록 앞으로 좋은 인연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군요. 혹시라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기탄없이 제게 연락을 주십시오. 이젠 한 식구니까요.”
삼원 강선우 본부장이 악수를 청하자, 권오종 부사장이 두 손으로 그 손을 맞잡으며 허리를 굽힌다.
“암요. 이젠 식구죠. 이젠 한 식구입니다. 하하하하.”
‘그렇게 저자세일 필요는 없다니까.’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맺어지는 동등한 관계의 계약이고 거래다.
계약 진행 전에 몇 번이고 말했건만, 벼랑 끝까지 내몰렸다가 겨우 구사일생하게 된 감격과 고마움을 도무지 감출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랬다.
이로써 일진기업은 살아났다.
그것도 무려 전 세계 공급망을 확보하고 있는 삼원 브레이크의 파트너 기업이 되어서.
그렇게 계약을 무사히 마치고 강선우 본부장이 회사를 떠나자,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권오종 부사장이 망연한 눈으로 계약서를 보며 중얼거린다.
“이게······ 정말 현실이야?”
계약 전에는 그렇게도 신나서 싱글벙글하더니 막상 계약을 마치고 나니 오히려 급격하게 불안감이 몰려오나 보다.
“어머니. 이거 정말 꿈은 아닌 거죠?”
옆에서 내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계약 상황을 지켜보던 손명숙 여사다. 하지만 손명숙 여사도 아직 마음을 놓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 대리······ 이 계약 정말 아무 문제 없는 거지?”
옆에 법률 자문인 박영창 변호사도 있고 내가 급히 데리고 온 회계사도 있건만, 불안으로 한없이 떨리는 눈은 하염없이 내 얼굴만 보고 있다.
전날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그 세상을 달관한 듯한 눈이 아니다.
삶마저도 체념한 것 같았던 생기 없던 눈에는 희망이 서렸고 간절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난 손명숙 여사의 마르고 주름진 손을 힘주어 잡았다.
“예. 아무 문제 없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길 시에는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안전장치도 충분히 되어 있는 계약입니다. 사모님. 오늘부로 일진기업은······ 회생했습니다!”
순간, 손명숙 여사의 메말랐던 눈에 물기가 고인다.
긴장이 풀리고, 온몸에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지 힘없이 풀썩 주저앉는다.
“됐네. 됐어. 이제 된 거야. 그렇지 하 대리?”
“예. 이제 다 해결 됐습니다.”
끝내 눈물이 쏟아진다.
쏟아지는 눈물이 깊게 팬 주름을 타고 흘러내린다.
듣기로는 발인을 마친 다음 날에도 사람들이 들이닥쳐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조금만 더 버텨달라는 내 말에 간신히 붙들고 있던 애처로운 생의 끈.
얼마나 힘드셨을지 알기에, 끝없이 이어지는 절망감이 얼마나 막막했을지 알기에 그 마음에 전이되어 나도 울컥 목이 멘다.
그러니 아들인 권오종 부사장은 오죽할까.
“어머니이이이이!”
그때부턴 아주 통곡이다.
단지 부도 위기를 넘겼다는 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루 아침에 남편을 잃었고 부친을 잃었다.
그런데도 제대로 슬퍼할 겨를도 없이 죄인이 되었다.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조차 죄스러워 목놓아 울지도 못하던 사람들이다.
그 울분이, 그 서러움이 지금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제야 사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권영섭 사장의 사진을, 소탈하게 웃고 있는 그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있었다.
그런 내게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하 대리. 고마워. 일진은 내 손으로 지키려고 했는데, 그만 죽어버렸지 뭔가. 허허허허.
그러게요.
이럴 때 소주 한 잔 같이 해야 하는데, 그렇게 죽어버리면 전 이제 누구랑 같이 술을 마십니까?
※※※
그렇게 한바탕의 울음바다가 끝이 난 후, 난 손명숙 여사로부터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었다.
“은행을 옮기지 않겠다구요?”
주거래 은행을 계속 한성으로 두겠다고 한다.
“저희 때문에 그런 곤란을 겪게 되셨는데 왜······?”
이해가 안 된다.
“혹시 기 대출금 때문에 걱정되셔서 그런 거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곧 어음도 처리가 될 테고, 삼원 브레이크와 공급 계약을 맺은 이상 기업 가치도 올라갔습니다. 어느 은행이라도 기꺼이 대환을 해줄 겁니다. 그것도 지금보다 더 저금리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은행을 옮기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이제 은행이란 것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말한 것은 권오종 부사장이었다.
“물론 한성에는 화가 나. 아주 불이라도 싸지르고 싶을 심정이니까. 근데 어차피 은행이란 것들 하는 짓이야 다 거기서 거기잖아? 싹 다 도둑놈들이지.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라면 그냥 하 대리에게 맡기려고.”
“······.”
“그냥 하 대리가 맡아줘. 저번에는 내가 말을 좀 함부로 하긴 했지만, 하 대리랑은 4년을 봐왔는데, 하 대리가 우리 일진을 위해 그 동안 얼마나 애썼는지 나라고 어찌 모르겠어? 이번 일만 해도 하 대리가 말리지 않았으면 진즉에 상속 포기 신청을 했을 테고, 그럼 지금처럼 웃을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잖아. 고마워. 어머니도, 나도, 우리 일진도 모두 하 대리 덕분에 산 거야.”
“아닙니다. 일진의 기술력이 일진을 살린 것뿐입니다. 그런데 정말······ 저한테 맡겨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내가 재차 물으며 손명숙 여사를 보자 손명숙 여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어머니와는 어제 다 끝낸 이야기야. 어머니가 먼저 말씀하신 일이고. 대신, 이번 일을 겪고 나니까 은행 빚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뼈저리게 느꼈단 말이지.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대출 빚을 최대한 갚아나갈 생각인데, 하 대리가 좀 도와줘야겠어.”
“예. 변제 계획서를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리고 금리도 조정할 수 있으면 최대한 조정해보겠습니다.”
“그래 주면 우리야 고맙고.”
그렇게 일진에서의 모든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
마음이 벅차다.
감사하다.
분명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도 나에 대한 믿음 하나로 어려운 결정을 해주셨다.
물론 은행으로서도 다행한 일이다.
일진 기업 정도 되는 체격의 회사가, 더구나 이제 삼원이라는 날개까지 단 기업이 다른 경쟁 은행으로 옮기게 되면 당장의 수익이 끊기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기대 수익마저 잃게 된다.
지점 실적에 큰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더구나 이렇게 회생 가능했던 회사를 회생 불능으로 오판해서 은행에 피해를 준 책임 또한 무겁다.
지점장은 물론이고 부지점장, 대부계 차장과 과장. 그뿐만 아니라 본점의 관련된 부서들까지 책임을 물을 수를 있다.
두 사람의 결정은 그 많은 사람들을 크고 작은 징계로부터 구한 것이었다.
물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두 사람이 내게 보여준 그 믿음이 그저 가슴 벅차도록 고맙고, 또한 그런 믿음을 심어줄 수 있었던 나 스스로가 눈물 나도록 뿌듯하다.
그래. 이런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몇 번 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업체와 첫 거래를 트게 되었을 때.
내가 기획한 금융 상품이 채택 되어 그 팜플렛이 매장에 깔렸을 때.
그리고 소소하게는 카드 혜택 문제로 공항 라운지에서 곤란을 겪고 있는 고객의 문제를 해결해 주자, ‘거 봐. 내가 하 대리한테 연락하면 다 해결 된다고 했잖아.’ 라며 일행에게 자랑스럽게 말하는 걸 들었을 때.
그 모든 순간이 내겐 힘든 은행 생활을 달래주는 청량제였고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 감정은 그런 것들과는 조금 다르다.
정말이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애써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당혹스럽지만,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을 휘도는 감정은 ‘은행원이어서 다행이다’였다.
“······ 드디어 내가 미친 거지.”
아무리 두 사람이 보여준 신뢰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고 해도, 그래서 더 감격스러웠다고 해도 은행원이어서 다행이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이게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생각이냐고.”
그런데 왜 나는 지금 지점으로 차를 몰고 있는 것일까?
월차도 냈는데.
이미 2시가 넘어서 반차로 바꿀 수도 없는데.
가봤자 또 한 차장의 재수 없는 면상이나 보게 될 텐데.
그런데도 한시라도 빨리 지점으로 가서 일진기업의 변제 계획서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아주 모범사원 다 됐구만.’
※※※
“뭐야? 월차 낸 거 아니었어?”
아니나 다를까, 한 차장이 내 늦은 출근을 반긴다.
“설마 반차로 퉁 칠 생각은 아니지? 지금이 몇 신데······ 아예 꿈도 꾸지 마.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대부계에서 쫓겨난지 얼마나 됐다고 월차야 월차는. 아주 팔자가 늘어졌어요. 아니, 어차피 회사에서 짤리고 나면 노상 놀 텐데 월차가 웬 말이냐고. 내가 오늘은 진짜 지점장님과 담판을 짓고 만다! 대부계에서 사람을 뺐으면 인원 충원 요청부터 해야 할 거 아냐!”
직원 출입구를 통해 창구까지 오는 동안,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샌가 나타나서는 졸졸 따라오며 구시렁구시렁 댄다.
뭐랄까······ 이 정도면 인정을 해야 하나?
부하직원한테 얼굴을 걷어차인 것은 물론이고 그 숱한 조롱과 면박에도 이렇게까지 꿋꿋할 수 있다니······ 보통의 사람이라면 쪽팔려서라도 나랑 얼굴 마주치길 꺼려할 텐데, 오히려 더 뻔질나게 찾아와서는 이렇게 구시렁댄다.
그 끈질김과 뻔뻔함이 이젠 아예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
경외감이랄까, 신기함이랄까······.
‘확실히 정상적인 범위의 인간은 아냐.’
그렇다고 그대로 두면 수신계 직원들에게 미안한 노릇.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한 차장을 만나면 해줄 말이 있었다.
“한 차장님. 혹시 그거 아십니까?”
“혹시 그거?”
한 차장이 내 말에 살짝 의심의 눈빛을 드러낸다.
또 자신을 조롱하려는 건 아닌지 경계부터 하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경계하실 것 없습니다. 그저 정보 하나 드리려는 거니까.”
“정보?”
“일진기업 말입니다. 오늘 삼원 브레이크와 밸브 공급 계약 맺었습니다.”
“······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롭니다. 오늘 삼원 브레이크와 계약 체결했습니다. 오늘 제가 월차를 낸 것도 그것 때문이었구요. 아마 지금쯤이면 계약금이랑 선대금도 들어왔을 걸요?”
“그, 그거 정말이야?”
“예. 일진기업, 이제 부도 안 납니다. 부도가 다 뭐야, 예전에 한 차장님 말씀대로 이런 기세면 상장까지 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이햐! 그러고 보면 한 차장님 선견지명은 정말 제가 감히 따라갈 수가 없네요. 하하하하.”
처음에는 불신이었다.
하지만 내 놀림이 이어질수록 한 차장의 얼굴은 점점 사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난 그런 한 차장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지나친 반응이다.
단지 자신이 추진한 일이 어그러진 것 때문이라고 하기에도 과하고, 조성환 상무의 계획이 틀어진 것 때문이라고 하기에도 과하다.
‘뭔가 더 있는데?’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던 것일까?
게다가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그렇게 격한 동요를 보이던 한 차장이 한 번 더 진위 여부를 확인하듯 날 뚫어지라 노려보더니 이내 몸을 돌려서는 어디론가 달려간다.
‘조 상무한테 연락하러 가는 건가?’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이내 신경 껐다.
일진기업도 살아났으니 그들이 뭔 짓을 벌였든 간에 이제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당장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난 서랍 속 서류 봉투를 확인했다.
‘사라졌다.’
기적처럼 내게 보였던 판정보류 문구들이.
놀라지는 않았다.
이럴지도 모른다는 짐작 정도는 하고 있었다.
이게 정말 죽은 권영섭 사장의 간절한 염원이 만든 기적이라면 일진기업이 회생한 이상 그 문구들이 더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리고 이게 정말 죽은 권영섭 사장의 간절한 염원이 만든 기적이 맞다면 하나 더 확인할 것이 있다.
내내 머릿속에 맴돌던 권영섭 사장의 말.
―이참에 내가 신에게 부탁이라도 좀 해줘? 자네에게 시대의 변덕까지도 맞출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그래서 항상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래서 우리 착한 하 대리가 그만 좀 괴로워하게 해 달라고. 내가 이래 봬도 기도빨이 좀 먹히는 사람이거든.
시대의 변덕까지도 맞힐 수 있는 능력.
그게 혹시 이 기적은 아니었을까?
정말로 권영섭 사장의 기도빨이 먹힌 거라면······ 만일 그런 거라면, 이 기적이 1회성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나한테 정말 그런 걸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버린 거라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해 내가 향하는 곳은 지하 1층의 보관실이었다.
거기에는 한성은행 장원지점의 모든 대출 심사 서류가 보관되어 있었다.
< 보관 창고엔 보물이 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