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04
“이게 무슨······.”
그 깡촌에서 새벽녘에 돌아와 대강 씻고 정리를 마친 후, 아침 출근 전에 다시 장례식장에 들른 길이었다.
그런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들은 참담했다.
식탁들은 보기 흉하게 엎어져 있고 집기들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쏟아진 밥과 국물, 반찬들······.
한바탕 태풍이라도 휩쓸고 간 듯한 모습이다.
일을 도와주고 있는 두 명의 장례식장 직원들은 어디서부터 치워야 할지 막막하다는 듯 한숨만 푹푹 내쉰다.
그리고······ 한쪽 구석 벽에 기댄 채 초점 잃은 눈으로 넋을 놓고 있는 노부인과, 마찬가지로 그 옆에서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세상 다 잃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40대 후반의 중년인.
권영섭 사장의 부인 손명숙 여사와 그녀의 아들인 권오종 부사장이다.
장례식장 직원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어휴! 말도 마요. 빚쟁이인지 뭔지, 사람들이 새벽같이 몰려와서는 난리 난리 그런 난리가 없었다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발인이나 마치고 그러든지, 사람들 참······.”
직원이 혀를 끌끌 차며 하는 말에 바로 대강의 상황을 파악했다. 일진기업의 부도 시에 손해를 입게 될 하청업체들 중 한 곳일 것이다.
예견된 일이지만 그래도 막상 이 참사를 보고 나니 마음은 더 절박해 진다.
“사모님. 저 왔습니다.”
내 인사에 그제야 손명숙 여사의 눈에 초점이 잡힌다.
“아, 하 대리 왔어? 바쁜 사람이 뭐하러 또 왔어. 안 그래도 되는데······.”
이런 와중에도 살갑게 맞아주는 손명숙 여사와는 달리, 옆에서 고개를 들어 날 올려다보는 권오종 부사장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하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낫다. 어제는 날 보자마자 대뜸 멱살을 잡으며 쌍욕부터 퍼부었었으니까.
“괜찮으세요?”
내 걱정에 손 여사가 주름 가득한 얼굴에 쓴 웃음을 지어 보인다.
“나야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정말 안 괜찮은 사람은 우리 때문에 힘들어진 사람들이지. 그 사람들 심정이 오죽했으면 여길 다 찾아와서 이랬겠어? 어휴······ 저 양반만 저리 가지 않았어도······.”
손 여사가 원망 담긴 눈으로 제단 위 영정 사진을 본다.
권영섭 사장의 사람 좋은 얼굴이 거기에 있다.
어제도, 오늘도 나는 차마 그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사모님. 제가 오늘 이렇게 찾아뵌 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긴히 드릴 말씀?”
“예. 상속에 관한 일입니다.”
순간, 옆에서 듣고 있던 권오중 부사장이 버럭 화를 냈다.
“야! 하 대리! 너도 상속 포기하지 말라고 협박하러 온 거야? 왜? 한성은행에서 우리한테 뜯어 먹을 게 아직도 더 남았대? 우리가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아무래도 이 난리를 친 하청업체 사람들이 유족들에게 상속 포기하지 말고 남은 빚 다 갚으라고 협박이라도 하고 간 모양이다.
“지금도 이 난리인데, 최종 부도 처리되면 어떨 거 같아? 그걸······ 우리한테 다 감당하라고? 우리 어머니가 그런 수모를 당하게 그냥 냅두라고?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러 여길 와!”
“그게 아닙니다. 상속 포기를 서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러 온 건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회사에 회생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회생가능성······ 이라니?”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알게 되면 어떤 식으로 반응하게 될지 예측할 수 없고, 그들의 격한 대응이 자칫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악화시켜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일주일이면 결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일주일이면 됩니다. 그때까지만 저를 믿고 기다려주십시오.”
“자세한 건 말할 수 없다고? 그러면서 널 믿으라고? 너 같으면 지금 널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일진이 이렇게 된 데에는 너도······”
“그러겠네. 그렇게 해. 어차피 며칠 미룬다고 더 나빠질 것도 없을 테고.”
처연히 권 부사장의 말을 막은 사람은 손 여사다.
하지만 그 표정에는 별반 기대가 없다.
그저 세상을 달관한 듯한······ 그런 손 여사의 얼굴을 보자니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내려앉는다.
‘어쩌면······.’
이번 일이 잘못되면 손 여사마저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
난 손 여사의 주름진 손을 힘주어 잡았다.
“일주일입니다. 제가 약속합니다. 일주일이면 분명 모든 일이 다 좋아질 겁니다. 그러니까······ 버텨주세요. 사모님.”
차마 힘내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권영섭 사장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 ‘힘내십시오’ 였으니까.
※※※
난 출근하자마자 일진기업의 심사 서류를 꺼내 내게만 보이는 문구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처음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4월 16일자로 기업평가등급이 D에서 A로 변경된다고 적혀 있다.
‘부디······.’
손 여사를 보고 오니 그 마음이 더 간절해 진다.
그때였다.
“아주 애틋해서 못 봐주겠네. 누가 보면 지 회사가 망한 줄 알겠네.”
돌아보니, 한 차장이 서 있다.
코를 붕대로 칭칭 감은 모습으로.
죽일 듯이 사나운 눈초리를 하고.
“그런 미친 짓을 하고도 아직 회사에 남아 있는 건 뻔뻔한 거야, 아니면 개념이 없는 거야? 지점장님이 하도 사정을 해서 어제 일은 없던 일로 넘어가기로 했으니 고마운 줄이나 알아.”
지점장이 사정을 해서가 아니겠지.
자기 출셋길 막힐까 봐 고소를 못 하는 거면서 생색 질은······ 같잖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도 난 너 같은 미친 새끼를 부하직원으로 둘 생각 전혀 없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가 여기 장원 지점에 있는 한 넌 대부계에는 발도 못 붙일 거라는 거야. 오늘 바로 본사에도 인원 충원 요청을 할 거고, 인원이 충원되는 대로 네가 맡았던 일들 싹 다 인수인계 들어갈 거니까, 밥벌이라도 하고 싶으면 수신계 업무나 열심히 배워보든가.”
화가 난다.
이죽거리는 면상에 정말이지 정권을 꽂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일진기업의 신용등급을 하락시켜서 이 사달을 만든 게 KG브레이크와 조성환 상무 간의 짬짜미였다는 걸 알고 나니, 그 하수인인 한 차장이 이젠 아예 사람 새끼로 보이지도 않는다.
“하여튼 요즘 젊은 것들은 참을 성도 없고, 세상 저 혼자 사는 줄만 알지. 나 때는 말이야······.”
면상도 목소리도 더 보고 있기가 구역질 나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어제의 일이 기억에 남아서인지, 한 차장이 하던 말을 멈추고 ‘으힉’ 놀라며 뒤로 물러선다.
그 모습에 어디선가 ‘킥’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순간 민망함과 창피함에 얼굴이 시뻘게진 한 차장이 웃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눈을 부라린다.
그런 한 차장에게 내가 말했다.
“그만 대부계로 돌아가시죠? 차장님 말씀대로 밥벌이라도 하려면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수신계 일을 배워야 해서 말입니다. 근데 여기서 이러시면 제 밥벌이에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뭐?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너 진짜 밥줄 놓고 싶어?”
“새끼 새끼 하지 마시죠? 차장님 새끼도 아닌데. 이젠 저 대부계도 아니라면서요? 근데 왜 남의 밥줄 걱정은 자꾸 하는 겁니까? 누가 들으면 우리집 우렁각시인줄.”
내 말이 좀 웃겼나 보다.
‘킥킥’ 거리는 웃음소리가 더 늘어났다.
아니, 한 차장이 열 받아 하는 게 그저 재미있는 걸지도.
그런 거라면 이 한 몸 불살라서 열심히 웃겨줄 자신이 있긴 하다.
“이······.”
부글부글 부들부들
머리가 다 새하얘질 정도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을 상상도 못했는지 당혹감에 말문이 다 막혀서는 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뻐끔거린다.
‘지 앞에서 설설 길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만······.’
욱하는 마음에 저질러버리고는 은행에서 잘릴까 전전긍긍하며 죄인처럼 벌벌 떨고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지만, 착각도 유분수다.
한성은행이 내 유일한 밥줄이고, 내 유일한 생명줄이며, 내 성공의 유일한 동아줄이라는, 지난 6년의 뿌리 깊은 세뇌는 어제 사직서를 던진 순간 마치 마법처럼 풀렸다.
대신 용기가 생겼다.
‘어디 간들 입에 거미줄이야 칠까’ 라는 여유와 달관하는 마음도 생겼다.
그러니 이 재수 없는 면상 앞에 설설 길 생각도 벌벌 떨 이유도 없다.
나는 그렇게 한 차장을 무시하고는 어깨빵 하듯 거칠게 툭 밀친 후 한 차장을 지나쳤다.
그제야 버럭한다.
“야! 하성운!”
“왜요! 한 차장님! 화장실까지 따라오실 겁니까? 영업시간 다 됐는데 업무준비 안 해요? 대부계는 아주 한가한가 봅니다.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나 때라고 해봤자 바로 어제다.
그게 또 누군가에게는 웃음 포인트였는지 어디선가 끅끅 웃음 참는 소리가 들린다.
이 정도면 올해의 웃긴 사원에 도전해봐도 될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수신계 직원들에게 잠깐의 즐거움을 선사한 나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이런 게 살기란 건가 싶을 정도로 뒤통수에서 한 차장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더는 한 차장 따위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일진기업 일만 생각하기에도 머릿속이 너무 번잡하다.
그렇게 화장실로 가 볼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지이이이이잉~
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리스크 관리팀의 이관우다.
“왜?
“야! 하씨! 너 벌써 무슨 일 저지른 건 아니지?”
다짜고짜 따지듯 던져오는 질문.
“무슨 말이야?”
“삼원 강선우 본부장이 출근도 하기 전에 우리 팀장한테 연락을 해왔다잖아. 일진기업 인수건 어떻게 진행되고 있냐고.”
“그래?”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빠르다.
“그래? 라니? 뭐야 그 의미? 왜 반가워하는 것 같지?”
“반가워하긴 뭘······ 별로 뭔 짓 안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굳이 내가 간밤에 깡촌 마을까지 내려가서 강선우 본부장에게 전화를 한 것까지 이관우가 알 필요는 없다. 이럴 때는 모르는 게 약이다.
“그 거짓말 진짜야?”
“진짜라니까. 아니, 인수 의사가 있는 기업이 진행 상황 묻는 게 뭐 대수라고 이렇게 호들갑이야.”
“그건 그렇지만······.”
“그래서, 너네 팀장은 뭐라고 했다는데?”
“뭐랄 게 뭐 있어. 아직 심사 중이라고, 결과 나오면 알려주겠다고만 한 거지.”
“그럼 아무 문제 없잖아?”
“그야 그렇긴 하지만······.”
하지만 삼원의 법무 본부장쯤 되는 사람이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정말 넌 상관 없는 거지?”
“그렇다니까. 아무렴 내가 너 밥줄 끊어 놓을 짓을 하겠냐? 아직 우려먹을 것도 많은데?”
“음······ 그건 좀 설득력이 있긴 하네.”
오늘 참 그놈의 밥줄 얘기 많이도 한다.
어쨌든 희소식이다.
강선우 본부장이 리스크 관리팀 팀장에게 연락을 했다는 것은 어제의 내 제보를 장난 전화로 치부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그건 곧 삼원 측에서 다른 대안을 찾으려 들 가능성이 커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차장 때문에 잡쳤던 기분이 덕분에 상당히 개운해졌다.
‘그건 그렇고······.’
그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내 자리에 가득 쌓여 있는 이 커피들은 또 뭐지?
심지어 어제보다 한 잔이 더 늘어난 7잔에, 추가로 마카롱까지.
어제보다 더 맹렬해진 엄지척은 덤이다.
‘이런 걸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는 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코뼈를 부러뜨리는 것보다 보이는 곳에서 몇 마디 깐죽댄 게 효과가 더 큰 것 같다.
이런 기세면 올해의 인기 사원도 될 수 있겠다.
‘이거 참, 오늘도 잠은 다 잤네. 이러다 없던 불면증도 생기겠는데?’
※※※
하루하루 조마조마한 시간이 지나갔다.
매분 매초가 그야말로 피가 마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예정된 4월 16일에서 하루를 남겨두고, 권오종 부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하 대리······ 이게 참······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는지······ 삼원에서 계약 제의가 왔어!”
목소리가 떨려 나온다.
“자네 말대로 우리 일진, 살 길이 열렸단 말이야. 꼭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아서······ 하 대리가 말했던 회생 가능성이란 게 이거였어? 우리 회사······ 정말 살아난 거 맞아? 이게 정말······ 현실이 맞냔 말이야!”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어 흘러나오고, 어느 순간부턴 아예 울먹임이 된다.
그리고 느껴지는 간절함.
며칠 전만 해도 너 같으면 널 믿겠냐며 버럭 화를 내던 권오종 부사장이 지금은 이렇게 간절하게 내 대답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러지 저러니 해도 지금 믿고 의지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처럼.
순간 난, 마치 2002 한일 월드컵 때 홍명보 선수가 마지막 승부차기를 성공하고 4강을 확정지었을 때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우아아아아아아!”
그야말로 감정의 폭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함성까지 질러 대는 날 보며 수신계 행원들은 물론이고 일을 보러온 고객들까지 황당한 표정을 한다.
당연히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그래서요? 삼원 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내일 계약 진행하자고는 하는데······ 이거 정말 믿어도 되는 거야? 혹시 사기 아냐? 조건도 너무 좋고······ 당장 급한 불을 끌 수 있게 계약금이랑 선대금도 바로 지급해준다고 하고······.”
“사기 아닙니다. 돈을 달라는 게 아니고 준다는 데 사기일 리 있습니까? 그리고 삼원이 자선사업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당장 일진기업의 밸브가 삼원에도 필요한 상황이라 계약을 하자는 겁니다. 그러니까 급하다고 하자는 대로 다 해주지 마세요. 충분히 좋은 조건 끌어낼 수 있습니다. 아니, 제가 내일 박 변호사님과 같이 찾아뵙겠습니다. 약속 시각이 몇 시입니까?”
“후우······.”
나는 늘어지듯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마치 뜨거운 욕탕에 몸을 뉘인 듯 그동안의 긴장이 빠져나간다.
“됐어. 정말로 된 거야.”
몇 번이고 반복되는 중얼거림.
영혼이라도 빠져나간 듯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서랍에 넣어둔 대출심사 서류를 꺼냈다.
[판정보류]
[등급상승요건 발생]
[등급상승요건: 새로운 고정거래처 확보. 삼원 브레이크]
[기업신용평가등급 D→A 확정날짜: 202X년 4월 16일]
새로운 고정거래처가 삼원인 거야 그렇다 쳐도 내일 계약을 하게 되면 날짜까지 정확히 들어맞는다.
‘우연도 아니고,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 기적은 분명한 현실이다.
< 올해의 웃긴 사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