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231화 (231/233)

외전 3화

미연시. 미인 연애 시뮬레이션.

20년 전까지만 해도 대개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을 지칭하던 준말은, 다양한 성적 지향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며 더 큰 범위인 ‘미인 연애 시뮬레이션’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등장인물의 성별이 더 다양해졌을 뿐, 게임의 본질적인 목표는 한결같다.

연애.

미연시는 연애가 주목적인 장르였다. 은우와는 정말, 정말 맞지 않는 장르이기도 하다.

단순히 불호인 것과는 다르다. 외려 이 장르는 호불호를 논하기 이전의 문제에 가까웠다.

아무렴, 서은우란 인간은 연정이나 성애란 게 어떤 감정인지도 몰랐다. 누군가에게 연애 감정을 느껴 본 적도 없고, 하다못해 성적 충동도 느껴 본 적이 없다. 그가 처한 환경 때문이든, 그가 자각하지 못한 지향성 문제든 뭐든 간에.

그런 사람이 연애하는 게임을 한다? 차라리 노래를 시키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은우는 그 정도로 연애란 걸 몰랐다.

하여 그는 지금껏 미연시만큼은 묵묵히 요청을 씹고 있었고…….

─ㅋㅋㅋㅋㅋㅋ

─켄 님이 미연시 해주신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게임’

─아 미쳤나봐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

─와 이 게임을??

박기철에게 제대로 당했다.

『 9일의 아_ ×│⌨

⌕ 9일의 아시아 여행

⌕ 9일의 아카데미

⌕ 9일의 아카데미 목재위키

⌕ 9일의 아카데미 공략

⌕ 9일의 아카데미 트라우마』

“…….”

은우는 잠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오랜만에 박 팀장이 게임을 추천하길래,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건만…….

“왜 연관 검색에 ‘트라우마’란 단어가 뜹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죽여주는 미연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박기철은 대체 뭘 추천해 준 걸까. 그에겐 분명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요소가 첨가된 RPG’라고 해 놓고서.

거기에 사람들은 미연시라고 떠들고 있다. 은우가 아무리 미연시란 단어에 익숙지 않아도, 그 뜻이 뭔진 안다. 그가 이건 도저히 할 자신 없어서 지금껏 빼먹었던 장르다.

하단에 자리 잡은 캠 속 그의 얼굴이 약간 심각해졌다. VR과 달리 PC 게임은 스트리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띄운 영상이다. 시청자들의 무수한 요청이 과정에 있었음은 당연하다.

“…불길한데.”

─저게...?

─트라우마 on

─띵-작

─이 남자, 연애에선 어떨까?

시작부터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 외전. 그 스트리머가 미연시RPG 하는 법

‘9일의 아카데미’의 배경이 되는 세계관은 이렇다.

일단 게이트가 생성돼서 몬스터가 지구에 쏟아지고 있다. 인간들은 그 게이트와 몬스터를 처리하기 위해 ‘나이트’라는 초인 집단을 양성하고 있으며, 아카데미는 그 일환이었다.

만 20세 이상만 입학 가능한 아카데미에 나이트가 되고자 등록한 학생들은 ‘스콰이어’라고 불리고, 주인공은 그 아카데미의 편입생이다. 나머지 등장인물은 당연히 본래부터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던 학생들이다.

마지막으로 스콰이어들은 인력 부족으로 인해 종종 ‘중앙 협회’와 협력해 몬스터 퇴치 및 게이트 공략에 동원되곤 하니.

‘9일의 아카데미’가 RPG가 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였다. ‘9일의 아카데미’에서는 학생끼리의 모의전 외 게이트 속 몬스터 처치 등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미 라비안으로 결정된 거 아닙니까?”

한데 이렇게 전투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사람들이 미연시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파트너 선정 때문이었다.

플레이어는 하루에 한 번, 다섯 명의 등장인물 중 하나를 골라 파트너를 맺어야 했다. 게임 속 명분은 ‘편입생의 적응을 도울 겸, 보조계(주인공)가 홀로 전투를 수행할 수는 없을 테니 전투원을 붙인다’였다.

그리고 이렇게 고른 캐릭터와는 하루에 한 번 이벤트를 볼 수 있다. 같이 다과를 즐긴다거나 담소를 즐긴다거나 등등.

“이미 결정한 상태에서 다른 것을 탐낼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만.”

마음에 차는 캐릭터가 없어, 시청자 투표로 냅다 결정해 버린 스트리머는 2일 차에도 어김없이 첫날 캐릭터를 골랐다.

사람들은 다른 캐릭터도 보고 싶어 했지만, 은우가 거부했다.

아무렴, 그의 얄팍한 미연시 지식에선 선택지를 잘 골라서 한 캐릭터의 루트를 타는 것이 있었다. 은우는 그것을 ‘한 캐릭터에게 집중하라.’로 알아들었고─실제로도 틀리지 않았으며─, 그건 그의 성정과도 일치하는 면이 있었다.

유동적으로 변화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이건 한 사람을 골라 연애하는 게임이다. 한 명을 골랐다면 그 사람에게 충실해야지, 다른 캐릭터에게 눈독 들일 이유가 없다.

─그건...맞긴 한데....

─와 켄 연애하면 바람필 걱정 없을 듯

─형 되게 고지식하다....

─게임인데 뭐 상관없지 않음?

“고지식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라 생각합니다만.”

연애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 있어 상호 간의 신뢰가 두터워야 하는 법이다. 상대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 존중할 것이라는 신뢰, 피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 등.

물론 은우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으므로 기대 또한 하지 않았다. 관계에 믿음이 필요하다는 사상과는 반대되는 태도이나, 본래 사는 게 그런 법이었다.

“여러분이 라비안 루트를 고르셨으니 라비안만 공략하겠습니다.”

─조아요호호홍

─아네트 루트 보고 싶었는데 아쉽

─어차피 회차 여러번 해야해서 상관없음

─그래봤자.....

─라비안이 젤 낫지

은우는 남청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 묶고, 노출 없이 털 제복을 꽁꽁 갖춰 입은 캐릭터, ‘라비안 에드윌루아’를 골랐다.

그러자 라비안이 상냥하게 웃어 주며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넸다.

『라비안: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 구경은 하셨나요? 어제 그 일이 있어서 오후엔 못하셨을 듯한데.』

라비안은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모의전은 미뤄 두고 학교 구경을 시켜 주겠노라 제안했다.

모의전은 괜찮겠느냐 물으니, 어제는 서포터가 껴서 ‘2:2:2전’을 한 거지, 본래는 다섯이서 개인전을 해 왔다는 답을 돌려주었다.

보조계인 주인공과 달리, 나머지 다섯은 마법계 혹은 물리계 전투원이니 개인전 정도야 가능했으리라.

『라비안: 개인전은 제가 빠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다들 이해해 줄 거예요. 더구나 켄은 첫날인데도 서포트를 잘 맞춰 줬잖아요? 실력이 없다면 모를까, 실력이 좋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은우는 실력을 강조하는 라비안의 모습에 눈을 껌벅였다. 저건 그저 하는 말일까, 아니면 뼈가 있는 말일까.

“그럼 오늘 전투는 없습니까?”

─ㄴㄴ

─있어요

─하루에 반드시 한 번 이상 있음

─무조건 있습니다

“아, 전투는 반드시 한 번 이상 있는 거군요.”

은우는 기계적으로 마우스를 클릭했다. 라비안과 주인공이 학교 구경 하는 스크립트가 이어졌다.

『라비안: 이곳은 도서관이에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죠.』

구경하던 도중 도서관에 들러 책을 구경하는 CG도 나왔다. 주인공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플레이어의 몰입을 위해 디자인 자체가 없다고 알고 있다─, 책을 든 라비안이 그림을 꽉 채웠다.

『라비안: 이 도서관은 키르아텔 아카데미가 지어지기 전부터 존재했다고 해요. 심지어 언제 지어졌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죠.』

『라비안: 심지어 이곳에 일하는 분들조차 이곳의 책에 대해 전부 파악하지 못한 상태랍니다. 그 정도로 책이 많아요.』

『사서가 모른다니, 현실감이 없어. 책이 아무리 많아도 그게 가능한 건가?』

『라비안: 맞아요. 불가능하죠. 그렇지만 이 도서관에선 그 불가능이 실제로 이뤄지고 있는 거예요.』

라비안은 정말 행복하단 얼굴로 얼음꽃을 빚어냈다. 얼음 마법사라서 가능한 일이다.

『라비안: 저 안쪽 구역의 책들은 매일매일 뒤바뀌고, 갱신되고 있다 해요. 그게 책 파악을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원인이죠.』

『라비안: 소문으론, 세계의 진실이 담긴 책마저 저곳에서 나타난다 하는데… 너무 신비롭지 않나요?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신기해. 그런 게 가능한 건가?』

『라비안: 후후.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에 가능과 불가능을 논할 이유가 있을까요?』

맞는 말이었다. 이미 벌어지고 있다면, 그건 가능한 일의 범주에 있는 것이었다.

『라비안: 세실에게 연락이 왔네요. 협회에서 게이트 토벌 건으로 협력 요청이 왔다는데… 혹시 괜찮으면 같이 할래요? 긴장할 것 없어요. 어제와 똑같을 거예요.』

어쨌거나 그렇게 이벤트를 충족시키니, 스토리 진행을 위한 전투가 또 한 번 이어졌다.

“게이트가 굉장히 자주 터지는 모양입니다. 근데… 아무리 실전 경험이 중요하다지만, 스콰이어는 교육생이 아닙니까? 왜 이렇게 자주 불려 가는 겁니까?”

─글쎄요?

─교육생까지 동원하는;;

─전개를 위해서라지만 에바긴 하지

─그거 설정 따로 있지 않나?

예비 나이트라는 건 말 그대로 ‘예비’일 뿐이다. 실전이 최고의 교육이라지만, 이 경우 목숨이 걸려 있다.

능력자들이 죽지 않고 질 좋은 나이트가 되도록 하기 위한 교육이 아카데미의 목적일진대, 이렇게 실전이 많으면 아카데미의 의미가 없다. 단지 관리가 쉬워진다 외에는.

“정말 관리를 위해서인가…….”

아카데미가 공교육이라면 그나마 낫겠지만, 만약 사립이라면 입학비가 상당히 아까울 성싶다. 학생 수준에 맞는 게이트를 구해다 주는 것도 능력이긴 한데, 그건 나이트를 잃기 싫은 협회도 비슷한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은우는 혀를 차며 일단 캐릭터를 전장에 다시 밀어 넣었다. 전장에 밀어 넣어진 캐릭터는 아네트에게 구함을 받는 것으로 2일 차를 마쳤다.

* * *

3일 차. 물리계 근거리 전투원 ‘사하’가 부상이 쉽게 낫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강직한 말투를 구사하는, 무뚝뚝한 기사 캐릭터라 대사 자체는 투덜거린다는 느낌이 아니라 아쉬움을 표하는 쪽에 더 가깝다.

『사하: 보조계의 치료를 받는다면 금방 나을 것을, 협회에서 그마저도 금지하니 답답하기 짝이 없군.』

“주인공에게 HP 회복 스킬이 있는데도 왜 안 받나 싶었더니, 금지당한 거였군요. 저는 계통이 달라서 그런가 했는데.”

사하가 아쉬움에 젖은 말을 내뱉는 사이, 다른 캐릭터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었다.

『아네트: …….』

『아네트: …상처가 나아도 별로 쓸모는 없을걸.』

그중 눈에 띄는 건 암살자 캐릭터인 ‘아네트’였다. 1일 차가 끝나는 밤, 주인공(플레이어) 보고 ‘네가 싫다.’, ‘너는 우리마저 망쳐 버릴 거다. 네가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이라며 폭언을 내뱉었던 인상이 커서 그런가.

아네트는 다소 날카로운 성격일 것 같았는데, 의외로 다른 캐릭터들과는 잘 대화했다. 그냥 주인공만 싫어하는 것 같다.

─쟨 왜이리 띠껍냐

─누나아아아아 나죽어

─아네트 진짜 성격 개띠꺼운듯

─츤데레도 아니고 걍 츤;;

─후후......

아무도─일부 시청자 외─그 이유를 모르지만.

어쨌거나 캐릭터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 후, 어김없이 모의전을 치렀다. 은우의 선택은 당연히 라비안이었다.

오늘은 게이트 공략에 나서지 않을 심산인지, 첫날 한 대전 형식 모의전이 아니라 가상 게이트 공략 모의전을 시도했다.

─켄 님 게임 재밌어요?

─게임 어떰?

─캐릭터들 얼굴 넘 이쁘다

“아뇨……. 제 취향은 아닙니다. 특별히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것도, 머리를 써야 하는 것도 없어서.”

유랑화가 같은 추리 게임은 진상을 알아 가는 쏠쏠함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9일의 아카데미는 5명의 캐릭터 중 하나를 택하고 대사들을 보면 끝이다.

사람들이야 중간중간 나오는 CG로 눈요기를 한다지만, 은우는 외형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나마 있는 전투도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전형적인 턴제 전투여서다. 여실전화처럼 반쪽짜리가 아닌, PC라서 완벽한 턴제. 역시 취향은 아니다.

“그래도 새로운 장르라서 색다른 느낌은 있네요.”

그가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요소라던 박기철의 말은 결국 맞았다. 별로 재미있진 않지만.

─형 떨떠름한게 너무 잘 보여ㅋㅋㅋ

─이분은,,,,,연애랑 담 쌓은 것인가...?

─역시 구울왕!

─우리 비수들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 믿어^^

“연애랑 담쌓진 않았습니다.”

아무리 봐도 담쌓은 자의 말이었다.

그사이 그들은 모의전을 시작했다. 게이트 내부가 배경으로 보이고, 아네트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아네트: …….』

『라비안: 아네트?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네요. 왜 그래요?』

『세실: 맞아요! 아네트, 무슨 문제가 있나요? 머리가 아픈가요?』

『아델라이드: 밤에 뜨거운 짓이라도 하느라 잠을 못 잤니?』

『사하: 아델라이드.』

『아델라이드: 흥.』

그들이 투닥거리는 동안에도 왼편에 고정으로 떠올라 있던 아네트는 대답 한 번이 없었다. 이미지 속 아네트의 시선은 꼭 플레이어를 보는 것 같아, 더욱 섬뜩하다.

『아네트: …아무것도 아니야.』

『아델라이드: 싱겁긴.』

“아네트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굳어 있었다. 모의전이 걱정되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 그렇다고 보긴 힘들다. 아네트의 안색은 아침부터 좋지 않았다…….”

─어케 아는겨

─주인공도 웃기는 새끼네 아네트가 극혐하는데 안색 알아볼 정도로 유심히 지켜봤다는게

─변태....?

─사실 그런 취급 받는 걸...읍읍!

“여섯 명만 등교하고 있는 상황으로 아는데, 그 정도면 기색 정도는 읽어 낼 만하지 않습니까?”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그들은 기본적으로 묶여 움직이는 사이다. 등교하는 학생이 없으니, 모의전이라도 치르려면 합동할 수밖에 없는 탓이다.

그런 점에서, 같이 활동할 팀원의 컨디션을 확인하는 건 중요하다. 팀원이 컨디션 난조로 실수하거나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면, 피해를 입는 건 그 자신이므로.

“그보다, 총 플레이 타임이 15시간짜리라 들었는데, 이대로라면 3시간도 안 돼서 끝나겠네요. 다회 차를 봐야 진 엔딩을 보는 구조라서 그런 겁니까?”

은우는 달칵거리며 모의전을 치렀다. 지금까지의 전투가 그랬듯, 이번에도 어렵지 않았다. 아카데미에 마련된 장치로 가상 공간에 접속해 플레이하는 개념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그렇다기엔 실전도 아래로 레벨 20 차이 나는 던전 도는 것처럼 쉬웠지만.

─그게 다회차라서 그런게 맞긴 한데....

─님도 1회차 엔딩 보면 홀린듯 2회차 가실듯

─2회차가 2회차가 아님;;

─스토리가 달라져서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루트를 달리 타서 달라지는 겁니까?”

─ㅋㅋㅋ

─말하면 스포임

─아 머임 궁금해

─지금을 즐겨라 뉴비들..!

“흠.”

은우는 사람들의 말에 알쏭달쏭해하며, 일단 게임을 마저 했다. 전투가 끝나면 3일 차 이벤트가 이어진다.

모의전이 끝난 후 라비안이 아카데미 주변 빵집에서 디저트를 사 주는 이벤트였다. 명목은 보조하느라 수고해서다.

사 줄 거면 다섯 명 다 사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뭐, 친해지자는 의도로 알아들었다.

그 말을 들은 시청자들이 ‘연애랑 정말 담쌓았구나’라고 판단한 건 당연지사였다.

그리고 4일 차.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새까만 어둠이 덮쳐 왔다. 서술되는 주인공의 시선을 빌리자면, ‘칠흑에 잡아먹힌, 아니 그 자체가 칠흑인 것’이었다.

“공허하게 비었기에 다만 모든 것을 포용하고, 동시에 모든 것을 마치 없던 것처럼 존재치 않게 만든다. 어떻게 이런 ‘완벽한’ 어둠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에게서 차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떼 내는 순간, 그 어둠이 내 존재마저 잡아먹을 것 같았다.”

─머임?

─?? 머머머지

─이벤트?

─브금 왜이래

“그리고, 그 속에서 무언가가 솟아났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그렇지만 시선에 담겨 있지 않았던 이가.”

『아네트: 무서워?』

아네트는 대화 창의 이미지에서만 보였다. 여전히 배경은 새까맸다.

『아네트: 이 어둠이 무서워?』

녹음된 목소리는 한겨울에 내뱉는 숨소리처럼 건조하고, 차가웠다. 아네트의 폐에는 온기가 없어서 숨을 내뱉어도 입김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아네트: 너는, 우리를 이보다 더한 곳에 처박을 텐데.』

아네트는 음울한 얼굴로 속삭였다. 그리고 오른편에 치우쳐 있던 대화 창 위 캐릭터 이미지가 사라졌다.

“보통 한 사람하고만 대화할 땐 이미지가 가운데에 있는데, 왜 오른편에 치우치게 해 놨나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군요.”

캐릭터 이미지가 빠진 자리에는 또 다른 아네트의 그림이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검은색 일색이었던 배경은 어느새 아네트의 측면 모습을 담고 있다. 지금껏 대화 창 전용 일러스트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모습이다.

─오 연출 좋다

─크....2D감성

─2D는 이런 맛으로 하는듯

─오진다 연출....

절묘한 연출에 사람들이 감탄하는 사이, 아네트가 말을 이었다.

『아네트: …걱정 마. 난 널 죽이지 않아.』

『아네트: 아니, ‘죽일 수 없다’가 맞겠지.』

“대사가 자동으로 넘어가네요.”

보통은 은우가 마우스 클릭을 해야 넘어갔는데, 지금은 자동 진행이다. 그가 설정하지도 않았거니와, 수동 진행으로 변경하려 해도 불가능했다. 이 또한 연출임이 분명하다.

배경 속 아네트가 바라보고 있는 지점, 은우에겐 화면 왼쪽 부분에 새로운 배경이 서서히 떠오른다.

『아네트: 네가 죽으면, 네가 죽인 이들은 전부 개죽음을 당한 셈이 될지도 모르니까.』

새롭게 겹쳐지는 배경은 교실의 벽면이었다. 열린 교실 문과 열린 문 사이로 비치는 희미한 그림자는, 복도에서 누군가가 아네트를 마주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아마 주인공일 것이다.

『아네트: …….』

『아네트: …….』

『아네트: …네가.』

『아네트: …켄, 네가.』

어둠이 온전히 걷히고, 멀쩡한 교실이 비쳤다. 그리고 나서야 아네트의 이미지가 대사 창 위로 다시 떠올랐다.

『아네트: 네가 없었으면 좋겠어.』

아네트는 그 말을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이후 4일 차에선 등장인물 선택지가 쥐어지지 않았다.

대신 급격히 상승한 난이도의 게이트가 그들을 반겼다. 깰 수는 있었지만, 다들 피가 절반 안 되게 닳아 버렸다. 이전 전투에선 피가 닳은 적도 거의 없었는데.

그렇게 5일 차가 되었다.

『아네트: 만약 세상이 멸망한다면, 너흰 어떻게 할 거지?』

아네트의 말에 주인공 포함, 다섯 명의 스콰이어는 의문을 표했다.

『사하: 멸망을 막으려 노력해야겠지.』

『라비안: 멸망의 형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것에 맞는 행동을 취해야겠죠. 방비라거나, 막을 수 없다면 대비를 한다든가…….』

『아델라이드: 멸망이라. 그럼 실컷 놀아야지! 어차피 망할 거라면!』

『세실: 허엉. 멸망한다니, 너무 슬퍼요. 전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은데.』

그래도 각자 성격에 맞는 대답을 내놓았는데, 아네트는 주인공의 대답만 듣지 않은 채 냅다 다른 질문을 추가했다.

『아네트: 만약 한 사람의 희생으로 그 멸망을 미룰 수 있다면?』

『사하: …그건 어려운 질문이군. 희생 대상은 선택이 가능한가?』

『아네트: 그래.』

『사하: 아무리 발악해도 멸망을 피할 길이 없다면… 희생해야겠지. 어차피 우리는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우리의 죽음을 바치는 나이트가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홈페이지에 떠 있던 사하의 캐릭터 소개가 ‘본인을 희생하겠다’였죠.”

─? 그랬나?

─그걸 또 기억하셧네

─희생하겠다는 아니지 않았음?

─보고 옴

“모두를 구할 수 없을 때 스스로를 가장 먼저 버리겠다는 건,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죽어야 할 대상에 자신을 가장 먼저 넣겠다는 의미가 되잖습니까.”

은우는 사하의 고결함을 나름 인정하고 존중하며, 마우스를 눌렀다.

『아델라이드: 흐응, 나도 찬성. 어차피 죽어야 할 운명인데, 그중 한 명 먼저 보내 버리면 나머진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잖아? 나만 아니면 돼.』

─ㅋㅋㅋㅋㅋ진짜 냉정하다

─아델라이드는 은근 이성적인 그런게 많은듯

─누나 나 죽어어어어

─지가 대상이 돼봐야지 뭐...

─저런 애들인 지만 아니면 된다 생각하는 거임

아델라이드는 이기적인 면모를 살짝 보였다.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아델라이드는 쾌락주의자로서 본인 안위와 재미만 추구하는 편임이 지금껏 잘 드러났었다.

『라비안: 전 반대예요. 미룬다는 건 근본적인 해결이 못 되니까요.』

『세실: 저도 반대예요. 한 사람의 희생으로 연명하는 세계에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찬성 둘, 반대 둘. 그것을 보며 아네트는 ‘그런가.’ 하며 수긍했다. 그러곤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아네트: 그래. 그럼 넌 어떻게 생각하지?』

그건, 지금껏 무시하던 주인공에게도 대답의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희생해야 한다』

『희생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도덕심을 두고 흔히 던져지는 물음이 다가오고 말았다.

“투표 받겠습니다.”

─가즈아아아ㅏ

─잉 그냥 선택하셔도 될 것 같은데

─인성 털릴까봐 안 고르시는 거?

“아, 선택하기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이미 마음에 둔 선택지는 있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의견도 궁금해서요.”

이번에도 그는 심판의 기로에서 살짝 뒷걸음질 쳤다. 사람들의 도덕심이 궁금했다.

─22222222

─희생해야지 한 사람만 희생하면 되는 거 아님?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미루는 건데 무슨 의미가 있음

─111111

─크 철학싸움 시작됐구연

사람들은 투표를 위해 숫자를 외치면서도 희생 여부를 두고 왈가왈부했다. 철학에 관심 있다 하면 으레 접하곤 하는 문제이니, 곧바로 토론하는 것이다.

“제 선택지요. 저는 희생하는 걸 택합니다.”

만약 희생의 대상으로 형이나 희수가 걸린다면 뒤집어엎어서라도 바꾸겠지만, 기본 선택은 그렇다.

그는 그와 그가 소중히 여기는 이들의 안전이 확보되면 남들의 생명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한 사람을 죽여 이 삶을 좀 더 누릴 수 있다면, 그까짓 거 하나 못할까.

물론 형이 싫어할 것 같으니 직접 나서진 않을 거다. 미움 받긴 싫다.

“어차피 산다는 건 다른 생명의 희생을 요구하는 거잖습니까.”

─ㅋㅋㅋㅋㅋ그건 그렇지

─진짜 애매한 문제긴 하다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를 살릴 것인가... 소수라도 중요하다인가...

─소수라도 멋대로 희생하면 안 되는 거 아님?

─근데 한 사람이니까....

“생각이란 다를 수 있는 거니까요. 의견을 내는 건 좋습니다만, 다투지는 마세요. 밴할 겁니다.”

─아앗! 밴만은...!

─싸운 놈들 어서 ㄹㅇㅋㅋ만 쳐!

─ㄹㅇㅋㅋ

─ㄹㅇㅋㅋㅋㅋ

─ㄹㅇㄷㄷ

어쨌거나 투표 결과는 오래 걸리지 않아서 나왔다. 비등비등했는데, 근소한 차로 ‘희생하지 않는다’가 우세했다.

은우의 마우스가 그것을 꾹 눌렀다.

“나는 희생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희생해 가며 연장해 봤자 언젠가는 끝이 올 테니까.”

그가 고른 의견은 적절한 근거가 붙어 주장이 되었다. 교실 배경이 아네트 단독 CG로 변경되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니도록 일그러진 표정의 아네트였다.

『아네트: 그것 참, 재밌는 이야기네.』

아네트의 목소리는 무언가를 겹겹이 쌓아 버린 채로 무너져 가고 있다.

『사하: 아네트, 정말 무슨 일이라도…….』

그리고 사하가 아네트를 부른 순간, 화면이 쿠르르릉 흔들렸다. 사하가 나올 때 잠깐 교실로 변했던 배경이 또 하나의 CG로 바뀌었다.

그건, 아카데미 상공을 새까맣게 물들이는 검은 게이트였다.

『아네트: 우리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건데 말이야.』

그 대사 이후, 검은 게이트 그림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것이 추가되었다.

『아네트: 이번엔 누구일까?』

『아네트: 누가 멸망을 연장시킬 제물이 될까?』

『사하: 아네트. 너, 이번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라비안: 아네트……?』

『아델라이드: 뭔데, 뭐야?』

『세실: 아네트……?』

『아네트: 누가 되어도 상관은 없지만, 차라리 나였으면 좋겠네.』

검은 게이트가 토해 낸 몬스터가 기어코 그들 있는 자리까지 당도했다.

『아네트: 멸망한 세계의 그림자를 읽는 건, 이제 질렸어.』

외부 방어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라비안: 켄, 도망, 도망쳐…….』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캐릭터가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 가운데 위치하여 가장 크게 그려진 라비안은 피를 줄줄 흘리며 플레이어에게 겨우겨우 마지막 말을 건네고 있다.

그러다 문득,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깐 화면이 바뀌었다.

라비안을 제한 배경이 회색으로 변하고, 라비안은 피 흘리는 얼굴만이 부각된 채 마지막 말을 한 음절, 한 음절 내뱉다가.

『라비안: 아.』

그 목이 또각, 옆으로 기울었다. 그림 구도 탓에 그것은 꼭, 숨이 멎은 이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뒤편에 희미한 글자가 도배되듯 비쳐 보였다.

─.....

─으아아ㅏㅏㅏㅏㅏ

─ㄷㄷㄷㄷ

─아ㅠㅠㅠㅠ

─미쳤나봐 ㅠㅠㅠ

─심리적 공포가 이래서 붙은 거냐고

─ㅁㅊ....

─이 게임 뭐야

─망했다....

“…아직 9일 아닌데?”

은우의 어이가 가출하는 순간이었다.

『음.』

하나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안 됐네?』

BGM이 완전히 사라져 정적만이 감도는 라비안 사망 CG 속에서, 검은 테두리의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한 번에 다 떠오르는 구조가 아니라, 타이핑을 하듯 한 글자씩 타닥 소리를 내며 떠오르는 형식이었다.

『괜찮아. 다시 할 수 있으니까.』

전 문장을 지우고 다시 타이핑이 떠올랐다.

『한 사람만 희생한다면.』

그 문장이 완성되는 즉시 모니터 화면이 깨지고 노이즈가 꼈다. 속도가 너무 빨라, 조금만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어도 못 봤을 것이다.

『END』

1회 차 엔딩이었다. 심지어 강제로 시작 메뉴로 돌아가기까지 했는데, 그 이후가 더 가관이었다.

『새 게임

게임 불러오기

설정

도움말

종료』

본래 시작 메뉴엔 글자들 옆에 다섯 명의 등장인물 일러스트가 있었으니.

지금은 네 명의 캐릭터 일러스트가 서 있었다. 다섯 명이 아니라 네 명이.

“…아네트, 어디 갔습니까?”

─?????

─미국갔어...

─헐 머임

─아네트 미국갔어...

─진짜 죽은 거임?

─얼렐레

캠 속 은우의 얼굴이 형용할 수 없는 형태를 띠었다.

참고로 이 게임은 은우의 생애 첫 미연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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