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증명하라.”
본디 제한된 신체 능력을 가지고 보여 줄 수 있는 묘기는 대체로 한정적이다.
카롬 소프트웨어의 미친 개발자들은 그 제한된 신체 능력을 가지고도 상대에게 대응할 수 있도록 밸런스가 잘 짜 놨지만, 그게 그렇다 해서 멋있게 대적할 수 있는 의미는 아니지 않은가.
검은기사는 플레이어의 훌륭한 반사 신경과 빠른 판단을 요구한다. 막을 수 있는 공격은 막고, 막을 수 없는 공격은 반드시 피하기를 유도하며 피를 조금씩 깎아 내기를 강요한단 이야기다.
다르게 말하면, 게임 자체가 회피&공격을 반복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가끔 괴랄한 피지컬의 소유자들이 튕겨 내기나 흘리기, 맞상대를 추가하긴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은우의 싸움도 그중 가장 격렬하고 화려하다 할 뿐이지, ‘대등하게 맞서 싸운다’란 의미가 되긴 힘들었다. 종종 날 듯이 싸우는 상대도 체격 차를 이용한 것이지, 동등한 싸움은 역시 아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달랐다. 다르다.
“패배를 이어 나갈 자격을.”
은우의 손에 얽힌 금빛 뿌리가 더없이 찬란한 빛을 머금으며 은우와 보스를 연결했다. 동시에 그의 몸과 보스의 몸에서 수증기와 비슷한 연기 그리고 금빛 가루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버프, 혹은 디버프 특유의 이펙트다. 대저 무기나 방패, 신체 일부에서만 흘러나오고, 만일 신체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면 특별한 색을 품는데, 이것은 그중 그 무엇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 색은, 형태는 최초였다.
“너는 시대에 굴복하기 위해 현재에 현혹되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은 단순히 이펙트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검은기사의 근간을 뒤흔들 효과를 가져왔으니.
은우는 미세하게 몸을 움츠렸다. 감각이 다르다. 더 빨라졌다.
─ㅇ니 미차이 ㅣ바시바리
─미친 거 아님?? 2페를 이렇게 넣는다고?
─왜 다음페이즈 안 나오나 했더니
─체력바 2줄????
─카롬 미쳤나봐
“묘한데…….”
자비 없는 난이도의 보스가 체력 바를 2개나 가지고 있다는 점에 분노하던─혹은 1%의 아쉬움에 찝찝해하던─시청자들이 다급히 귀를 기울였다. 변화를 쉽게 체감하는 건 결국 스트리머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하나 은우는 그것에 친절히 답하는 대신 앞에서 치고 들어오는 이부터 막아섰다.
깡!
출렁이는 도신 위로 우악스럽게 직검이 내리꽂혔다. 먼저 자세를 취해 둔 게 아닌 이상, 굴러야만 피할 수 있는 공격이 막혀 버리는 순간이었다. 아주, 손쉽게.
─??
─왜 막음?
─?
─뭐야? 뭐가 달라진 거임?
─우리도 좀 알려줘요
은우는 눈살을 가늘게 좁혔다.
감각이 미세하게 다르다 했더니, 지금까지 조작해 온 몸보다 훨씬 가볍고, 훨씬 움직이기 수월하다. 이 정도면 보스랑 비슷할지도 모른다. 아니, 비슷하다 못해 동일할 수도 있다.
아까를 기준으로 한다면 결코 아니나, 2페이즈에 돌입한 후 보스의 달리기는 약간이나마 느려진 상태이므로.
아니면 보스가 페이크를 시도하고자 실력을 숨기려는 걸까? 그러나 이미 빠른 속도를 선보인 상태다. 구태여 느리게 달려들 이유가 없다.
은우는 플랑베르주와 맞닿아 있는 검날과, 플랑베르주를 쥔 자신의 손, 손목을 보았다.
어쩌면 손목의 이 줄기는 정말로 보스와 그의 능력을 동등하게 맞추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하나 그것을 확신하자니 도통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1페이즈를 넘길 실력자에게 보스와 같은 신체 능력을 준다? 추모자는 더 맥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압도하던게 신체 능력이니까.
그걸 모를 제작진이 아닌데, 그럼에도 그들은 이 방식을 택했다. 그건 대체 왜일까?
“아.”
몸에 흐르는 금빛이 섬찟한 은빛으로 뒤바뀌고, 은우의 몸에 제동이 걸렸다. 아니, 제동보다는 부하에 가까울 것 같다. 몸이 느려졌다.
심지어 그건, 한 발 물러섰다가 도로 달려드는 추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마치 그들의 신체가, 혹은 그들을 감싼 시간의 축이 느리게 흐르듯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은빛 가루가 얼어붙은 시간의 잔재처럼 우아하게 휘날렸다.
─왜 느려짐???
─아깐 빨라지더니 왜 지금은 느려졌냐?
─머임?? 대체 머임??
─카롬 ㅅㅂ 뭘 만든 거야;;
─나만 지금 켄 느리게 보이는 거 아니지?
─????
─이펙트 색 바뀐 걸 보니까 버그는 아닌 듯...?
시청자들이 반응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이건 진짜로 시간이 느려져서 그런 게 아니었다.
따지자면 그가 짊어질 수 있는 무게를 초과한 상태로 걷는 느낌에 가깝다. 몸에 모래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면 자동으로 움직임이 굼떠지지 않는가. 딱 그 짝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부하가 풀렸다. 은빛이 다른 빛깔로 빛나고, 느리던 움직임이 빨라지며 추모자의 직검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플랑베르주 같은 대검은 본래 직검보다 느릴 수밖에 없으므로, 은우는 그것을 맞서 쳐 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순식간에 풀린 속도 제한과 그가 본래 기억하고 있던 신체적 유연함을 극단적으로 이용했다.
은우의 허리가 뒤로 꺾이고, 그 위를 직검이 지나쳤다. 용암이 흐르는 검은 마치 녹슨 것처럼 먼지가 내려앉아, 은우의 얼굴을 반사하지 못했다. 코끝에 재 냄새가 났다.
그의 다리가 추모자의 방패를 걷어찼다. 그 반동을 이용해 추모자가 아주 느릿하게 물러나고, 은우는 강제로 느긋하게 태세를 복구했다. 제멋대로 폭주하듯 달라지는 신체는 일말의 행위조차 퍽 까다롭게 만든다.
공기 중의 빛 가루들이 세상을 퍽 몽환적인 형태로 포장했다.
“음, 파악했습니다.”
─???
─빨리 말해줘
─왜 시간이 왔다갓다해;;
─진자 뭐야??
─2페 모임?
─보스도 느려졋다 빨라졋다하는데?
“2페이즈는, 신체 능력이 들쭉날쭉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입은 부하에 구애받지 않아서 다행이다.
은우는 플랑베르주를 천천히 대각선으로 꼬아 쥐었다. 어느새 그는 시청자들에게 평소처럼 대화를 건다는 자각조차 없다. 어쩔 수 없다. 이미, 뿌리를 내렸다.
─스탯?
─스탯 바꾸면 쌉에반데...
─그 얘긴 아닌듯
─신체 능력??
“스탯이 변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스탯과 관계없이 움직일 때 걸리는 속도가 있잖습니까. 그게 초 단위로 바뀝니다. 가루 색 바뀌는 걸로 판단하시면 편하겠네요. 가루 색 바뀌는 속도가 반 박자 늦어서 플레이할 땐 저걸로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몸에서 빛 가루가 흘러나오는 찰나는 속도의 변경 지점과 같을 것이다. 다만 그게 공기 중으로 퍼지는 데까지 시간이 걸려서 그것을 토대로 판단하면 늦다.
하니 차라리 감각을 토대로 판단하는 게 더 빠를 거다. 지금처럼.
은우는 순간 부하가 사라진 걸 파악하고 다급히 검을 들었다. 그렇지만 시대의 추모자는 덤벼드는 대신 무기를 갈아 끼웠다.
활. 현 상황에서 최악이 될 수도 있는 무기다.
은우보다 작은 체구가 장궁의 시위를 당겼다.
“…변하는 건 역시 저쪽 마음 같고.”
은우는 호흡을 삼켰다. 어느새 그의 몸은 긴장이라는 이름의 뱀이 기어 다니는 놀이터가 되었다. 혈관에 피 대신 뱀이 주입한 독이 돌아다닌다.
손끝, 발끝이 찌릿찌릿하고, 손바닥에선 땀이 나는 것 같다. 현실이었다면 제법 흥건했을 것이다.
“이건, 또 새로운데.”
그렇지만 그것이 절망과 좌절로 인한 것인가?
“재밌네요.”
그럴 리가. 투구 속 눈동자가 빛을 뜯어 먹으며 검게 웃었다.
▣ 222. 절반밖에 안 남았다
“만약 켄이 클리어하지 못하면 어쩌죠?”
다크서클에 찌든 직원이 물었다. 그 직원이 보는 화면에는 실시간으로 스트리밍되고 있는 추모자 레이드가 떠올라 있다.
마야 플로이드는 그 질문에 대해 살짝 고심하다가 결국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하향 패치 해야지 뭐.”
아니면 1편의 배신자 때처럼 언젠가는 깨는 인간이 나오겠거니 하며 내버려 둘 수도 있겠다.
엔딩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고, 잡지 않는다고 게임 진행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추모자는 어디까지나 선택형 보스였다.
더군다나 추모자는 한 플레이어의 업적이 경이로워, 그를 본 따 만들어진 보스이기도 하다. 쉽게 깨져서야, 그 업적을 일구어 낸 이에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결과물을 보니… 조금 과했나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마야 플로이드는 화면을 힐끗 보았다.
“게이머란 종이 언제 물러나는 거 봤어? 특히 한국 게이머가?”
화면 속에선 답지 않게 새하얀 손을 가진 이가 화살을 피하지 못하고 어깨를 내주는, 그러나 그 스스로도 상대에게 화살을 쏘아 버리는 모습이 비치고 있다.
“그러니까 DLC나 열심히 만들자. 호갱님들 털어먹어야지.”
“그렇죠…….”
직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거무죽죽해졌다.
* * *
고백하지만 은우는 ─시절, 단 한 번도 그의 감각과 몸의 성능이 통제에서 벗어나게 한 적이 없었다.
일종의, 운동선수가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조건으로 싸움에 임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으니, 그것을 피하고자 항상 오차 범위 내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외부적 요소로 변화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로 분 단위 이상이었고, 변한 상태를 한 번 파악하면 그 상태로 쭉 이어 나가면 됐다.
그러니까, 적이 중력을 강화해 움직임이 무거워지면 그냥 그것에 익숙해진 채로 싸우면 됐고, 전장에 고립되어 일주일을 굶주린 채라면 힘이 덜 날 걸 고려하면서 전투를 지속하면 됐다 이거다.
더구나 그때의 은우에겐 ‘기’라는 미지의 에너지가 있었다. ‘기’를 통해 부족한 부분은 보충하면 됐으니, 그의 신체 성능이 뒤변덕스럽게 변하는 상황은 결코 온 적이 없다. 특히 초 단위로 널뛰기하듯 달라지는 건 더더욱!
한데, 지금은 어떤가?
팅!
느릿한 검로가 초속으로 쏟아져 나온 화살을 겨우 튕겨 내고, 그 직후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적을 상대하고자 검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이후 느려진 세계는 방패 뒤에 숨은 칼날이 그를 향해 전진함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은우는 그 경로를 예측, 몸을 빼고자 했다.
그리고 속도가 본래로 돌아왔을 때, 달라진 경로가 은우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빨라진 몸을 이용해 경로를 틀어, 그의 머리를 노린 것이다.
은우는 그것을 보았으나, 부하가 풀릴 때의 순간을 놓쳐 반응이 살짝 늦었다. 목을 스치고 간 검날이 어쩌면 뜨겁게까지 느껴진다.
“하.”
은우는 그것을 뒤늦게 쳐 내며 설핏 웃었다.
차라리 극단적으로 빨랐다면, 혹은 느렸다면. 시야가 극단적으로 팽팽 돌아가거나 아예 한곳으로 고정되었다면. 몸이 무겁고, 가볍고, 감각이 비틀어져 있고, 오감이 반대로 돌아가는 식이라면.
그는 쉽게 받아들였을 테다.
아무렴 그런 건 그저 적응하면 될 문제였다. 변경된 신체에 따라 이성도 통제를 달리하면 끝난다. ‘기’ 같은 게 있었다면 아마 신체를 본래 상태로 돌리기라도 했겠지.
그렇지만 이 게임은 아니다. 적은 무차별적으로 이랬다저랬다 했으며, 그것에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적응할 틈은커녕 예고조차 하지 않고 바뀌는 몸을 어떻게든 써 먹어야 할 뿐.
하여 은우는 날뛰는 감각을 두고 생각했다.
1페이즈에서 했던 말은 취소야. 실망? 아주 섣부르고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칼을 갈았네.”
그는, 지금이 마음에 들었다. 미치도록 마음에 들었다.
고정값을 없애 버림으로써 변수만이 가득하게 된 이 싸움이, 난생처음으로 겪어 보는 혼란스러운 상태가.
신체와 감각의 통제권을 두고 한계까지 시험하는 이 돌아 버린 난이도가.
감히 기대했던 게 만족스러울 정도로 좋다.
그의 인내는 보답받았다.
그그극!
적의 무기가 또 한 번 바뀌고, 그의 투구를 시미터가 긁고 지나갔다. 직격타는 아닐지언정 꽤나 피가 깎였을 것이다. 그의 방어력은 정말 형편없으니까.
굳이 머리만 노리는 건 글쎄. 은우를 본 따 만든 녀석이니 참수 성향이 짙은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은우의 머리통이 추수하기 좋은 위치에 있는지도 모르고.
경험상 심장이 더 낫지, 머리는 좀 힘든 편임을 알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죽어 줄 것인가?
은우는 얼마 절반 정도 남은 체력과 다 떨어진 회복 약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런 것에 신경 쓰며 싸우면 이길 싸움도 진다.
죽으면 죽는 거고, 살면 사는 것이니. 집중할 것은 단 하나.
카앙!
적의 공격뿐이다.
은우는 눈앞으로 치고 들어온 검을 겨우 회피했다. 또 반의반의 반 박자 반응이 느렸다. 몸의 제한이 풀릴 타이밍에 맞춰 반응할 수 없으니 의미 없던 공격도 의미 있게 변한다.
그는 그가 원해서 아슬아슬하게 아니라, 그의 부족으로 벼랑 끝에 서게 된 셈이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어렵네.”
그렇지만 그게 싫지는 않다. 은우는 한때 지긋지긋하게 여겼고, 잃어버린 후로는 절실하게 바랐던 언젠가의 벽이 떠올렸다.
그는 그것을 부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그것을 부쉈을 때의 쾌감이 어떤지 잘 알았다.
“그러니까…….”
그러니 어쩔 도리가 있나? 은우는 차라리 희열을 느꼈다. 아무렴 아직도 나아갈 부분이 존재함을 알았는데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무학의 깨달음을 넘어서 제한된 것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지점이 아직 존재함을 알아 버렸는데.
오랜만에 칼끝에 선 자가 날카롭게 웃었다. 어느 순간 베일지도 모르는 목은 기대감에 휩싸여 졸리는 느낌마저 든다. 아픔 대신 열락만이 낙인처럼 남는다.
즐겁다.
“어서 끝내고 이야기할까요.”
반드시 저걸 죽인다. 저것의 잿가루를 뒤집어쓸 것이다. 싸움이 미친 인간이 들뜬 채 욕망을 표출했다. 그의 눈자위는 더없이 희다.
은빛, 금빛, 은빛, 은빛. 금속질의 반짝임이 투구 속 눈동자에 매끄럽게 반사된다.
─시발 이게 게임이냐...
─와,,,,카롬도 미쳣고 켄도 미쳤음
─그냥 인외들의 싸움인듯....
─아아! 크툴루시여!!
─ㅠㅠ제발 깼음 조켓다ㅠ
─은퇴만 하지마 이런거 보여주고 은퇴하면 나죽어어
─진짜 자신감 봐ㅠㅠㅠ가슴 떨린다ㅠ
─내가 진짜 응우너해ㅠㅠ
까앙!
화살의 경우, 느려지는 그들과 달리 아무런 제한이 없다. 쏘아 보내지기만 하면 속도가 초마다 달라지는 은우의 목숨을 노리기 충분한 비수가 된다.
하여 은우는 그것을 타이밍 맞춰 튕겨 내려 들지 않았다. 대신 그가 피하던 순간에 느려지더라도 화살만큼은 무기에 가드될 수 있도록 각도를 잡았다.
그건 그가 이 변수값에 대항하고자 본능적으로 학습한 첫 번째 파훼법이다.
이후 화살과 검이 부딪쳤을 때, 불티가 튐과 동시에 또 하나의 화살이 보였다. 검이 살짝 휘고, 아슬아슬하게 검날에 석궁이 쏘아 보낸 화살이 튕겨 나간다.
직후 몸이 빨라졌다. 옆으로 구르려던 몸이 그의 생각보다 더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발이 시체에 걸려 물컹한 감각에 시달린다.
그렇지만 그 시체에게 관심을 팔아 죽음을 살 수는 없다. 수지가 맞지 않는다.
은우는 고개를 들며 빠르게 덤벼드는 추모자를 보았다. 창을 든 그것은 공중으로 점프해 그대로 낙하하고자 한다.
묵색 창이 금빛 잔흔을 남기며 허공에서 그대로 내리꽂혔다. 은우는 그것을 흘려 내고자 검을 치켜 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의 몸은 느려지고 만다.
끼이이익!
간신히 검신이 창의 일점을 막아 내고, 창은 검신을 긁어 내며 미끄러진다.
『에스토크에 금이 간 것 같다.』
직후 다시 가속. 추모자의 창이 검신을 넘어 바닥에 꽂혔다. 은우는 바닥을 한 손으로 짚고 몸을 틀며 다른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찰나간 속도가 느려졌다가 빨라졌다가. 추모자의 몸이 느려진 타이밍을 이용해 은우의 검로를 확인, 빨라졌을 때 다급히 굴렀다. 은우가 벤 것은 그저 옷깃뿐이었다.
추모자의 움직임에 맞춰 허공에 남는 노을 진 눈송이가 몽롱한 색채를 띠었다.
「‘강승환’ 님이 ‘1,000원’ 투척!
아니 게임을;;; 이따위로 만들면;;」
시청자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은우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방법은 언제나 있다. 적의 피가 무한대인 것도 아니고, 레벨 1이라고 타격을 입을 무언가가 있지도 않았다. 하물며 은우가 느려질 때 저것이 빨라지는 식으로 균형을 무너트리지도 않았다.
무기에 금빛 불꽃이 서렸지만, 여전히 광역기나 근접형 스킬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러하므로.
“왜 못 이깁니까?”
그는 그저 극복하면 된다. 바뀌는 간극을, 찰나의 변화를.
은우는 치고 들어오는 녀석의 낫을 피해 가볍게 뛰었다. 그리고 아주 느긋하게 착지한 순간, 왼손의 낫을 빠르게 휘두르는 녀석을 보았다.
아니, 본 게 아니었다. 착지한 순간 감각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그건 몸의 가벼움이던가? 아니, 그 또한 아니다. 그런 경중의 감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따지자면 확신. 그리고 예측. 혹은 직감. 이성의 설계에 따른 판단.
투구 속 눈동자가 세계를 머금은 채 낫의 경로에 검을 끼었다. 간발의 차로 낫이 그 검을 머금은 채 은우를 휘감았다. 그 상태로 당겨지면 사이에 끼인 검에 의해 몸은 베이지 않고, 다만 두 사람의 거리만 좁아진다.
『에스토크가 부러질 것 같다.』
푸욱!
추모자와 은우의 투구가 서로 맞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가벼운 파육음이 하나. 은우는 고개를 아래로 꺾어 그보다 작은 것의 얼굴을 오롯이 보았다.
촤악!
망고슈가 그 옆구리를 찔렀음에도 액체 튀기는 이펙트 외엔 별일 없다.
피가 일정량 깎인 추모자가 빠져나가고자 발을 뒤로 뺐다. 그렇지만 어떻게 만든 조건인데, 보내 줄 생각은 없었다. 은우의 검이 낫에 흡착되듯 달라붙었다.
추모자에게 이것을 떨쳐 낼 방법은 이제 두 개다. 그와 비슷한 경지로서 맞상대한 후 떨쳐 내거나.
댕그랑!
낫을 포기하거나.
사각!
평상시보다 더 빨라진 속도로 추모자는 물러났다. 그것을 예지하다 싶이 한 은우 역시 녀석을 향해 망고슈를 휘둘렀다. 이번엔 녀석의 손목에서 피가 튀었다.
─싸움이 성립되는 게 너무,,,너무 대단함,,,,
─와,,,,가슴이 웅장해진다...
─사람이 이쯤 되야,,,암 것도 못 배운 상태에서 글케 저항할 수 있구나....
─알아서 슬로모션 넣어주고 하니까 존나 영화같음..
은우는 더 이상 채팅을 눈에 담지 않았다. 대신 그가 방금 해낸 것에 대한 감각을 되새겼다. 어째서 그는 그때 그런 판단을 내렸을까. 왜 그런 직감이 들었을까?
쩌엉!
대낫과 에스토크가 부딪치며 금속음을 쩌렁쩌렁 울렸다.
물을 것도 없다. 경험과 재능에 의한 직관에는 이유가 없다. 단지 결과만이 있을 뿐.
시대의 추모자가 버렸던 석궁을 재차 들었다.
거리가 가깝다. 맞는다. 은우의 세상이 느려지고, 한 점처럼 보이는 은빛 시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사각!
목에서 핏줄기가 튀었다. 이제 남은 체력은 한 방이면 사라진다. 암브로시아도 없다. 은우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렇지만 적의 체력도 이제 반절. 그 정도면 아직 희망은 있다. 아니, 희망은 언제나 있었다.
그가 멈추지 않는 이상.
은우의 눈꼬리가 곱게 휘었다. 에스토크가 대낫에 맞서 싸우며 기는 소리를 내었다.
『에스토크가 부러졌다.』
에스토크가 가루로 변했다. 부서진 무기에 맞춰 시대의 추모자가 그의 품으로 파고든다. 대낫은 에스토크가 가로막던 길을 마저 지나치느라 은우와 추모자 사이에 대각선으로 끼어 있으나, 큰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일 테다.
어차피 석궁을 들고 있으니까. 이쪽도 공격 수단이 하나밖에 없고, 그쪽도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까만 눈의 사냥꾼은 입술을 느슨하게 올렸다.
그리고 망고슈가 석궁의 출사구에 박히듯 섰다. 까앙! 들리는 소리는 아주 청명한 금속음이다.
『망고슈에 금이 간 것 같다.』
동시에 은우의 손이 추모자의 가는 목을 움켜쥐었다. 맨손 전투도 그의 장기 중 하나임을, 이 잊혀진 시대의 것은 모른다.
은우의 발이 대낫을 밟아 움직임을 봉하고, 손은 녀석의 목을 움켜쥔 채 그대로 메쳤다. 비명 대신 숨 들이켜는 소리가 귓가에, 현혹하는 금빛이 눈동자에 아로새겨졌다.
이제, 절반밖에 안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