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그, 꼭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드디어 다가온 공판일. 은우는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고자 법정에 출석했다가 증인으로 나올 예정이라던 이와 마주했다.
한때 그를 핍박했고, 그에게 얻어터졌으며, 그 일로 몰락하게 된 남자다.
“사과, 그때 못 드린 것 같아서…….”
그가 이쪽 증인으로 나오게 된 이유는 모르겠다. 그때 없던 죄책감이 생겨난 것일 수도 있고, 단순히 저쪽 승패를 얕게 잡았을 수도 있다. 무엇이든 은우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너무 늦었지만, 정말 죄송했습니다.”
은우는 허리를 꾸벅 숙이는 이를 보며 목을 긁었다. 법정 안에는 슬슬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사과는 됐습니다.”
그는 담담히 고했다.
그때 일은 이미 끝났다. 저들이 착한 건 아니나, 그때의 은우도 잘한 건 아니었으니까. 사과를 해야 한다면 아마 양쪽 다 서로에게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은우는 그때 일에 대해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그러니 사과도 받지 않을 거다.
“저도 사과 안 할 거니까, 그쪽도 사과하지 마세요.”
“…네.”
은우는 고개를 돌려, 출석한 가해자들을 보았다. 그에게 수작을 걸었다기에 겁이 없나 싶더니, 다들 눈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숙인다. 죄책감보단 두려움이 더 커 보인다.
하기야 고작 3년 하고도 반이다. 기억에서 지워지기엔 이른 순간이리라. 저들의 허약하고 대책 없는 정신으로는.
은우는 갑자기 지루해져서, 지난 며칠간 닳아 헤지도록 본 편지나 확인했다. 기실 편지보단 메모에 더 가깝지만, 아무래도 좋다. 그건 볼 때마다 생경한 감각을 가져다주었다.
참고로 원본은 사진첩을 따로 사 넣어 놨고, 이건 전자 노트로 찍은 사진이다.
“야, 곧 개정한다는데.”
그사이 희수가 그의 옆자리에 다가왔다. 그에 흠칫거린건 잠시 쪼그라들었던 증인이다.
「어이, 시발. 이게 뭔 개짓거리야!」
그들이 얻어맞아 널브러지기 직전, 그 문을 콱 열어젖히고 등장했던 위인이니 당연할 것이다. 아마 희수가 없었다면 그들은 팔다리가 부러지는 걸로 끝나지 않았을 테지만, 그것에 감사를 표하기엔 무섭겠지.
“시발, 눈치 없게 왜 옆자리야.”
…아무렴 보다시피 희수는 제 사람이 아니면 성격이 좀 더러운 인물이었다.
모르는 사람이면 그래도 예의는 갖추는데, 알지만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으면─그녀가 생각하기에 저건 인간으로서 대해 줄 필요가 없다 싶으면─다소 포악해지는 면이 있었다.
“야, 옆으로 가.”
“응.”
은우는 순순히 몸을 움직였다. 희수가 증인과 은우 사이에 끼었다. 증인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한 자리 옆으로 이동한 건 당연한 맥락일 터였다.
희수가 그런 증인을 흘겨보다가, 여기서 싸워 봤자 친구에게만 안 좋다는 걸 기억하곤 시선을 회수했다.
다음으로 그녀의 눈길이 꽂힌 건 은우가 보던 쪽지다.
“그걸 몇 번째 보는 거냐. 혹시 준 사람한테 반했어?”
“얼굴만 보고 어떻게 반해.”
“아님 왜 그렇게 봐.”
“그냥.”
불특정 다수가 그를 좋아한다는 건 안다. 그러나… 그걸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체감하는 것은 달랐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직접 봤을 때마저 다가와 줄지 고민했던 언젠가처럼.
그렇지만 그때와 비슷한 심정이라 묻거든 그것도 아니었다. 이건, 이건 좀 달랐다.
“그렇게 좋냐?”
“글쎄…….”
은우는 사진을 좀 더 넘겼다. 그것 외에도 많다. 최초로 은우에게 응원의 쪽지를 전해 준 이를 기점으로, 산책을 나갈 때마다 받은 편지가 한 아름이었다.
나중에 가선 자제하자 말이 나왔는지 다이아박스 쪽을 통해서만 전달됐지만 말이다.
“좋은 것 같은데.”
“좋으면 좋은 거지, 좋은 것 같은데는 뭐야.”
그도 이 마음을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데 뭐라 말하겠는가. 은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고민 중이야.”
“뭐.”
“얼굴 깔지 말지.”
그의 중얼거림에 희수는 턱을 잡고 침음을 흘렸다.
“그거야 네 마음이긴 한데, 솔직한 말론 이미 얼굴 다 털린 상태 아니냐?”
“그건 그렇지.”
그가 헬멧을 벗지 않고 실물을 공개하지 않는다 해도, 결국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할 거다. 은우도 그걸 잘 알았다.
“역시 공개하는 게 낫겠지.”
“네 편한 대로 해. 일반인으로 돌아갈 거면 솔직히 안 밝히는 게 낫긴 할 테니까.”
확실히 공공연한 비밀이라 해도 아닌 것보단 훨씬 낫긴 할 거다. 안 찾아보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까. 그렇지만 은우는 이미 결정했다.
계속할 거다. 저따위 것들이 바란 대로 도망치고 싶지 않다. 도망칠 이유가 없었다.
하물며 형까지 저렇게 나서 줬는데, 그가 여기서 관두면 형은 뭐가 되겠나.
그가 가지고 있던 일말의 불안감─사람들이 과연 그를 좋게 봐 줄까 하는─마저 이 편지로 하여금 해결이 됐다.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뭣보다 은우는 먹여 살려야 할 민식이와 로건이가 있었다.
“…밝힌다면, 어떤 타이밍이 좋을까.”
“글쎄.”
희수는 콧잔등을 찡그리더니 볼을 슬슬 긁었다.
“이왕이면 멋진 타이밍에 보여 줘. 저 개새들 때문에 공개하는 거 아니고, 네 뜻으로 공개하는 것처럼.”
아주 훌륭한 조언이었다.
▣ 220. 그가 할 말은 아니지만
2주. 꼬박 2주 만에 은우는 방송을 켰다. 앞서 녹화 영상으로 사건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 것과 예고한 것이 있어,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입장했다. 물론 그들 말까지 조심스럽진 않았다.
2주란 시간은 무언가가 잊히기 좋은 시간임과 동시에, 완전히 잊혀지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뻔뻔스럽네ㅋㅋㅋㅋ
─나는 켄 응원한다
─인생 별 거 있음? 앞으로 꽃길만 걸으셈
─한국인 냄비근성 오지죠?
─가족 팔아먹고 오니까 좋음?
─(금지된 채팅입니다)
─엄청나게 기다리고 잇엇어요ㅠㅠㅠ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런 사패니까 부모도 손 놓지ㅉㅉ
─돌아와서 기뻐요
온갖 정보와 음모가 난무하는 넷상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질투심을 포장해 음모론을 표출했다. 혹은 믿고 싶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눈을 가린 채 그가 듣고 싶었던 말을 스스로 내뱉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로, 믿어 주는 사람들도 있다. 격려하는 이들도 있다. 고생이 많았다고 하는 자들도 있었다.
은우는 알아서 올라가는 채팅을 가만히 보았다. 믿지 않는 자들의 말은 그의 예상보다 날카로웠지만, 생각보다 별 의미 없었다.
그건 그가 그를 증오하는 이들에게 감정 소모를 하지 않아서일까? 혹은 수위가 너무 심한 댓글들이 매니저에 의해 잘려서일까? 아니면 그저 텍스트에 불과해서?
그것도 맞겠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것 같았다.
「‘김기사’ 님이 ‘1,000원’ 투척!
싫어하는 사람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요~ 악플에 지지 말고 좋은 방송 꾸준히 이어가주세요」
─무슨 염치로 돌아옴?
─앞으로도 재밌는 방송 해주셨음 좋겟어요(이모티콘)
─구독 취소한다 인간도 아닌 새끼
─(금지된 채팅입니다)
─돌아와서 너무 좋아요!
「‘요플레마스’ 님이 ‘1,000원’ 투척!
형.... 형없는 날이 너무 길었어.... 앞으론 계속 같이 가줄거지?」
어떤 날에는 나서 주는 게 희수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의 편을 들어 주고자 나서는 이들이 이렇게 많았다.
슬금슬금 다가와 응원하는 이도 있는가 하면, 그를 대신해 나서서 싸워 주는 이들도 있는 거다. 단순히 ‘돕는다’의 성질을 벗어나 마치 그를 지켜 주려는 것처럼.
은우는, 그게 참 묘했다. 그는 이 일상을 유지할 수단이 이것밖에 없어 접속하길 택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감사와 애정을 표한다.
예전의 삶처럼 그가 직접적으로 그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입장이라면 그래도 이해하겠거늘, 이번 삶은 그마저도 아닌데 그랬다.
왜, 왜 사람들은 그를 좋아해 줄까. 그가 뭐라고? 그저 불쌍해서? 가여워서?
그는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 고작 그런 마음으로 그를 옹호할 수 있나?
차라리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레드바나 무언가 얽혀 있는 빌리가 더 이해될 판이다. 은우가 저들에게 지금껏 보여 준 건, 그의 무력과 그 무력을 기반으로 둔 오만과 닮은 자신감 따위밖에 없었으니 당연하다.
은우는 저들의 순수한 사랑이 익숙지 않았다. 언제나 익숙하지 못했다.
익숙지 못해서…….
“제가 와서 좋습니까?”
그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채팅창이 잠깐 느려졌다가 곧바로 빠르게 변했다.
─형 그걸 말이라고 해?
─켄님 가지 마유ㅠㅠㅠㅠ
─폭력범 새끼 쉴드 치는 또라이들ㅉㅉ
─켄 응원함
─구울들 눈물이 지금 한강 채운 거 안 보여?
─(금지된 채팅입니다)
「‘заявление об отставке’ 님이 ‘146,200원’ 투척!
나는 당신을 기다렸다. 당신이 돌아와줘서 감사하다.」
─오실 줄 알앗어요!!
─흑우들 수준 보소
─ㅠㅠ고생 많으셨어요ㅠㅜㅜ
─늘 행복해라....
은우는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시청자들이 좀 더 모였다 싶을 때 말문을 텄다.
“…실수로 인사를 깜빡했네요.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늘은… 예고했지만, 드릴 말씀과 해결할 일이 있어서 온 겁니다.”
─이야기?
─(금지된 채팅입니다)
─설마 그만두는 거 아니지?
─형ㅠㅠㅠ가지마ㅠㅠㅠ
─ㅋㅋ이참에 그만둬라
─채팅창 개 더럽네ㅡㅡ 진은검 어디감
─(금지된 채팅입니다)
─휴가는 봐줘도 은퇴는 안 봐줘
격려에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그들의 위로에 고마움을 표해야 할까,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할까, 가지 말란 말에 대답부터 해야 할까.
은우는 고민하고 다시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사실 처음부터 결정은 내려져 있었다.
“본래라면 대화가 우선돼야겠지만… 그 부분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잠깐 미루고자 합니다.”
그는 이번 사건에 대해 한 번은 입을 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지금 당장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는 뒤를 남겨 둔 채 말하기 싫었다.
─??
─(금지된 채팅입니다)
─머하게?
─오빠ㅠㅠㅠ기다렷어요ㅠㅠ
─구독 취소한다 ㅂㅂ
─응, 꺼져
은우는 시청자들의 반응을 외면한 채 손을 휘저었다. 빛무리가 희부옇게 흰 손끝에 맺혔다.
“남겨 둔 일이 있으니까요.”
그 손짓에 세계가 부서지고, 다시 부서지고, 끝내 무너져서 멸망해 가는 땅으로 내려앉는다.
그리고, 모든 빛가루가 별의 잔재로서 하나의 세계를 구성했을 때.
은우는 맨발에 가까운 상태로 그 대지를 디뎠다. 옛날에는 붉은색이었을 낡고 헤진 천이 그의 발바닥과 발목을 감싸고, 천을 기워 만든 바지가 너덜너덜 이어진다.
─아 설마?
─잡고 은퇴할라고?
─가오충 새끼 실패할 듯ㅋㅋㅋ
─아ㅠㅠㅠ존나 사랑해 혀유ㅠㅠ
─쉴드러들 사람 함 죽어봐야 정신 차리지
─ㅠㅠㅠ기다렸던 순간인데 왜이렇게 불안하냐ㅠ
─간다는 이야기면 안 듣는다
─(금지된 채팅입니다)
─악플은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해!
은우는 투구를 쓴 채 그 주위를 살짝 훑었다.
금 간 문과 그를 기점으로 뻗어 나간 석조 벽, 조각된 기둥 따위가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깨끗했던 바닥엔 협력 룬으로 새긴 사인이 가득하고 천장에서 내려온 밧줄은 여전히 시체들을 내걸고 있다.
『잊혀진 것을 깨우지 마라』
피로 적힌 경고문은 여전히 그 형태를 발한다.
은우는 혹시 몰라 뒤를 돌아보았다. 침하된 지반은 경사로를 만들어 냈으니. 그것을 지하에서 올려다보면, 꼭 오래된 유적지와 자연이 맞물려 만들어진 동굴이 보인다.
짙게 낀 이끼와 종유석, 뚫린 천장 사이로 희미하게 스며드는 햇빛. 돌가루가 빛을 머금고 만들어 낸 뿌연 안개. 먼지구름.
그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 죽여야 했던 것들의 시신.
그는 잠시 뒤를 보았던 몸을 되돌렸다. 그리고 그때 미처 내딛지 못한 한 발을 내걸었다. 그때와는 다르게 아무런 방해도 오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사람들은 떠들었지만, 그들의 외침은 큰 의미가 되지 못하니. 그들의 외침은 적어도 그가 이 일을 해치운 후에야 닿을 것이다.
투구 속 눈동자가 영롱히 반짝였다.
“제가 그동안 이쪽 소식을 접하지 않아서……. 누구, 죽인 사람 있습니까?”
「‘Karom’ 님이 ‘1,088,500원’ 투척!
아무도.」
탁.
은우의 손이 문에 얹어졌다. 무게를 덜기 위해 장갑 대신 두른 헤진 천 사이로는 비교적 하얀 손가락이 곧게 뻗어 있다. 굳은살이 투박하게 박혀 있고, 손톱은 손가락보다 더 튀어나와 있지 않다.
─시발 후원;;
─?
─어?
─흑우 수준....
─저거 ㄹㅇ 카롬 아니지?
─??
─나 지금 왔는데 상황설명 좀;;
던져진 거액에 사람들이 시선을 빼앗긴 사이, 은우는 손에 힘을 주었다.
“잘됐네요.”
그릉-
문이 공기를 거칠게 헤집으며 울었다. 오랫동안 열리지 않은 듯 문틈 사이로는 하얗게 먼지구름이 인다.
그렇게, 석조 짐승의 울부짖음 사이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들었다. 그것은 바깥에서 온 것이기도 하고, 안에서 온 것이기도 하다. 드문드문 뚫린 천장 사이로 얼음 조각들이 부서져 흩날렸다. 어쩌면 누군가의 뼛가루인지도 모른다.
컷신이 잠시간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부서진 석재 바닥 사이로는 웅덩이가 얕게 고여, 흘러든 빛들을, 벽에 걸린 촛대의 희미한 불꽃을. 그리고 각자의 욕망을 좇아 모여든 자들의 덧없는 혈화를 뭉근히 피워 낸다.
그것은 붉은색이었다. 혹은 금빛이었다. 퇴색된 세계가 아주 작은 불의 홀씨들로 인해 가장 다정하고, 가장 잔인한 빛깔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푸른 얼음 조각들이 공기 중을 떠돌며 빛을 갈라냈다.
“하아…….”
그리고 그 속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걸어 나왔다. 철창이 위로 말려 올라간 출입구는 그저 어둡기만 하여, 그곳에서 걸어 나온 존재는 꼭 칠흑에서 잉태된 것처럼 보인다.
달그락.
휘감긴 갑주는 일부가 파손되고 망가진 채로 금속음을 냈다. 갑주를 가리듯 그 위를 덮으며 흩날리는 얇은 천은 물에 떨어트린 잉크를 끄집어낸 것처럼 너울거린다.
스릉-
그 존재는 바닥에 꽂혀 있던 하나의 검을 잡아 들었다. 그의 다른 손은 허리 뒤에 꽂아 놨던 단도를 뽑아 든다.
그리고 장검은 앞으로, 단도는 가드를 위해 교차하듯 들며 자세를 잡았다. 갑주와 붕대에 휘감긴 팔뚝 사이로 보이는 살결은 썩어 문드러져 있다.
찰칵.
희미하게 들려오는 금속음과 거대한 종소리는 컷신의 종료를 알린다.
숭고하나 웅장한 BGM이 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처음이 되고 싶었던지라.”
《은둔한 추모자 케네스》
낡은 천 자락처럼 흔들리는 체력 바가 뚜렷하게 그 형태를 띄웠다.
─광탈 사망각이죠?
─클립 딱 대
─악플 새끼들 좀 꺼지라고ㅡㅡ
─스포) 켄이 추모자 사냥하고 다 질질 짜서 사과함
─게임 잘한다고 범죄이력이 묻힘?
─(금지된 채팅입니다)
─피해자한테 2차 가해 존나 오지죠?
─인성 터진 새끼들ㅉㅉ
은우는 느릿한 호흡과 함께 서서히 다가오는 그것을 보았다. 그 존재가 쓴 투구는 뒤통수를 가리지 않고 앞면과 정수리만 간신히 가리는 재질이었으며, 그것에는 눈구멍이나 숨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엿볼 수 있는 건 가면의 화려한 조각과 아주 조금 드러난 가는 턱선뿐이었다.
그마저도 머플러를 두른 듯한 뭉친 로브 자락에 가려졌지만.
잘그락-
첫 감상은 ‘제법 잘 베꼈다.’라고 해 둘까. 은우는 그것의 걸음걸이를 보며 설핏 웃었다. 갑주를 두른 것과 다르게, 참 조용조용한 보행이 아닌가.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걷는 꼴이 고양잇과 맹수와 퍽 비슷하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건, 제작진이 우연히 맞춘 그 체형이었다.
─아 쓰발 존나 무섭네
─응원합니다
─(금지된 채팅입니다)
─다시는 떠나지 마요ㅠㅠㅠ
─복귀 선물로 추모자 사냥인 거야?
─근데 추모자 개어려운디....
그것은 작았다. 은우보다 작았다. 최단신 보스라 생각했던 오로스보다도 작았다.
170 어림의 키. 갑주를 포함해도 가느다란 팔다리. 우연이라면 놀랍고, 필연이라면 덧없다.
은우는 쌍도를 들었다. 동시에 은둔한 추모자의 발뒤꿈치가 좀 더 들렸다. 도약과 함께 짓쳐 든 그 몸이 나비처럼 부드럽게 날개를 펼쳤다. 아니. 날개가 아니었다. 천이었다.
허리춤의 장식끈에 매달린 목각 인형이 순간 팔다리를 펼쳤다.
깡─!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며 우악스러운 소리를 내다가도, 연달아 이어지는 소리는 이슬이 부서지며 내는 가냘픈 소리만 못하다.
소리 없이 미끄러진 두 개의 검이 교차하며 허공에 투명한 궤적을 남겼다. 다른 손에 들린 검은 서로의 반응을 떠보고자 경박하게 움직이다가 이내 거둬들여진다.
위협에 반응함을 눈치채고 간 보기를 그만둔 것이다.
잘그락-
상대가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물러났다. 과도한 거리는 아니다. 딱 필요한 만큼, 상대를 경계하되 언제든 노릴 수 있는 올바른 거리.
은우는 검을 빙그르르 돌렸다. 시작을 진심 대신 재 보기 위한 얄팍한 검로로 시작하다니. 제작진 중 누가 골라 설정했는지는 몰라도 성격이 나쁘다.
똑같이 재 보기용 검로를 뻗은 그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들은 서로를 경계하듯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원을 그리며 사뿐사뿐 걷다가, 끝내 먼저 덤빈 건 추모자였다.
은우보다 더 빠른 움직임에 집중하면 순간 거리 감각이 마비된다.
서걱!
어깨를, 아니 그 발을, 몸의 뒤틀림을 확인하는 순간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은우는 그것에 순응했다. 그것이 그를 살렸다.
장검은 어느새 대낫이 되어 사거리를 무위로 돌렸다. 거대한 낫날이 허공에 흰 꼬리를 남겼다.
팅─!
적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것은 그것이 버린 장검이다. 검이 맑은 금속음과 함께 바닥에 널브러졌다.
─씨이이이발...
─무기 스위칭 시발 놈.....
─벌써부터 전설 각이죠?
─추모자는 1트 어려울 것 같은데
─켄 2주 쉬었다고 의심하는 놈들 나오는 것 보소ㅋㅋ
─어휴,,, 쉴드 새끼들 극혐
채팅 창은 보지 않았으나, 은우는 은둔한 추모자에 대해 하나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존재는, 모든 무기를 쓸 것이다. 정확히는, 그가 제공했던 데이터 내의 무기라면 전부 사용할 것이다.
한 손엔 대낫을, 한 손엔 단검을 든 추모자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단검을 얽고 있던 손가락 중 하나가 그것에서 떨어져 나와 허공에 닿았다.
까닥까닥.
느릿한 휘저음은 명백한 도발이니. 은우의 입술이 비뚜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