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건우는 부드럽게 삶아진 살코기를 우물거리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위로하러 왔다가 김치 얘기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그대로 먹을 것에 넘어가 버렸다. 면목이 없다.
“자.”
컹!
그사이 동생은 향신료를 넣어 삶은 수육이 아닌, 정말 삶기만 한 고기를 로건이와 민식이 입에 넣어 주고 있다. 지방질도 적은 갈빗살이다.
어찌나 잘 먹는지, 이쪽이 배부…르진 않고 괜히 입에 침 고인다. 궁극의 먹방은 대리 만족이 아니라 보는 사람을 배고프게 만든다더니 딱 그 꼴이다.
“진짜 잘 먹는다.”
“흔히 먹는 건 아니니까.”
담당 의사 선생님께 상담해 가며 주고 있다며 부연 설명이 덧붙여진다. 입양하라 그가 은근히 꼬실 때만 해도 생각할 수 없던 모습이다. 이젠 동생이 더 진심인 것 같다.
“다 먹었어?”
“어? 아니, 아니!”
건우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지금도 평소보다 많이 먹은 상태지만, 그럼에도 더 먹고 싶다.
어쩔 수 없는 게, 그의 동생은 정말, 정말, 정말 요리를 잘했다. 안 그래도 맛없을 수 없는 조합인데, 거기에 실력까지 더해지니 술술 입에 들어가는 것이다.
일단 갓 삶아서 따끈따끈한 수육은 입에 넣어 씹기만 해도 맛있다. 잡내 하나 나지 않는 살코기는 입에서 녹아내리듯 으깨지고, 부드러운 지방질은 애초에 씹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그 위에 냉장고에서 막 끄집어낸 김치를 얹으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시원하다 못해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갑기까지 한 겉절이는 아삭아삭하고, 보쌈 무는 달콤짭짤매콤하니 기가 막힌다.
심지어 무가 이에 엉겨 씹힐 때면, 쾌감까지 드는 식감이 느껴진다. 쫄깃과 아삭 그 어딘가라고 해야 하나. 탈수도 하고 반나절 숙성시키기도 한 결과라는데,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나, 보쌈 무 좀만.”
“어.”
진짜 눈물 나게 맛있다. 얘는 왜 못하는 게… 어, 노래밖에 없지. 사람이 그럴 수 있나.
건우는 그렇게 한 그릇을 더 비웠다. 은우가 내일 먹을 것까지 미리 삶아 뒀던 고기가 동나는 순간이었다.
▣ 218. 흡사 사채꾼 같은
“진짜 더는 못 먹어…….”
그렇게 세 그릇을 비워 낸 건우는 식탁 의자에 늘어진 채 배를 문질렀다. 기분 탓인지 배가 한 두 배는 나온 기분이다. 실제로 그렇게 되더라도 탓할 수 없을 만큼 먹긴 했지만.
“너, 근데 고기가 어디서 계속 나오는 거야.”
“아니, 그냥 내일 먹을 것까지 해 놨지.”
“내가 너무 많이 먹었나……?”
“별로?”
수육을 다 먹었으면 다른 걸 해 먹으면 된다.
은우는 내일 먹을 것을 고민해 보았다. 김치가 좀 익어야 먹을 만할 테니, 오늘 담근 것들은 두고 예전에 산 김치를 먼저 먹어야겠다. 마침 남은 김치가 찌개 하나 끓이면 끝날 양이기도 하고.
“참치 넣고 김치찌개 끓여 먹음 되니까.”
“맛있겠다!”
배는 불러도 자동적 반사는 어쩔 수 없다. 건우는 참치 넣은 찌개를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떠올리며 입맛 다시긴 좀 무리다. 배가 너무 꽉 찼다.
“그보다, 형.”
“어, 어.”
“여행은 어디 갈 거야.”
“어……?”
건우는 동생의 말에 눈을 껌뻑였다. 반 박자 늦게 떠오르는 것은 저번에 나왔던 여행 이야기다.
“그, 글쎄?”
경비는 반반 부담하기로 정했지만─각자 내가 내겠니 저가 내겠니 하다가 타협 보았다─아직 여행 장소는 안 정했다. 1박 2일인데 해외로 나가긴 좀 그러니 국내로 한정한 게 다였다.
“어, 근데… 괜찮겠어?”
이대로 나가도 괜찮은 걸까.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진 않을까. 기자들이 붙진 않을까. 얼굴도 공개한 마당에 알아보는 사람도 많을 텐데.
그런 걱정에서 발언하니, 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생각보다 동생의 답은 빨랐다. 아니, 사실 처음부터 빨랐다. 평소처럼.
그래서 정말 괜찮은 건지 안 괜찮은 건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건우는 동생의 사소한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모든 걸 눈치챌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형제가 그럴 거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뼈아픈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2주 정도 쉬기로 해서.”
“아… 스트리머 일, 계속하는 거야 그럼?”
“그건 고민 중이야.”
건우는 순간 손가락을 움츠렸다. 스트리머 일을 하지 않는 동생이 상상 가지 않다가도, 이런 일이 터졌는데 계속하는 건 더 싫었다.
그는 은우가 좀 더 편하기를 바랐다. 어렸을 때 받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이번 일로… 상처 많이 받아서?”
“아니. 그것보단 복귀가 가능할지 자체가 의문인 거라.”
무던한 얼굴로 담담히 고백하는 모양새가 정말이지 일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아니, 사람보다는 어떤 현상의, 혹은 자연경관의 일부 같았다.
마치 이번 일이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달칵-
거미 다리처럼 기다란 손가락이 냉장고 손잡이를 얽었다. 곧 열린 냉장고에서 찬 바람이 새어 나왔다. 다른 손에 의해 꺼내진 건 파란색 캔이었다.
건우의 시선이 순간 그 안쪽을 파고들었다. 한 칸을 가득 채운 파란색, 파란색.
한 칸 가득?
“콜라가 많네.”
“…….”
무의식적으로 의견을 제기하니 은우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그것에 잠시 주제가 돌아갔다.
한 칸 가득 채운 콜라. 콜라. 각설탕 9개짜리 설탕물.
“은우야?”
“…그래도 하루에 한 캔만 마시는데.”
“하루에? 한 캔이나?”
건우의 눈매가 예리해졌다.
그에 은우는 한참 형의 눈총을 받다가, 문득 반격거리를 하나 떠올렸다.
“형은 운동해?”
“그 얘긴 왜 꺼내.”
“형, 체력 안 좋잖아.”
“아니, 그래도 난…….”
“적어도 1시간 운동해서 멀쩡할 수 있어?”
“1시간은 좀 에바다.”
“뭐가 에바야.”
저도 모르게 준 눈치는 본전도 못 찾는 주제로 돌아왔다. 건우가 항변했지만, 실질적 건강은 동생의 압도적 승이었다.
그러다 ‘저스트 댄싱’이나 ‘피트니스 어드벤처’라도 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을 무렵, 그는 다급히 화제를 도로 돌렸다.
“그, 스트리머, 그래서 진짜 어떻게 할 거야?”
“가능하면 복귀하고 싶긴 한데… 잘 모르겠어. 일단 추이를 봐야겠지.”
“그래…….”
다급히 돌린 화제이나, 건우의 심신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서늘하기보다는 마음이 마구 요동치지 않게 되는 쪽에 더 가깝다. 이번 사건의 분노와 별개로 이성을 잡을 수 있다고 해야 하나.
“그렇지만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해.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까. 남은 건 결과뿐이지.”
“…화나지 않아?”
“별로. 하필 이 타이밍에 터져서 히든 보스를 잡지 못한 건 좀 아쉽지만, 나머진 괜찮아.”
“얼굴도 알려졌는데.”
“언젠간 벌어질 일이었어. 드러내는 게 최선이기도 했고. 오롯이 내 의지로만 밝힌 셈은 아니라서 조금 불쾌하긴 한데, 그건 어쩔 수 없지. 내 대비가 부족했으니까.”
그건 아마 시종일관 담담한 동생 때문일 것이다.
괜찮지 않음에도 괜찮은 척 아닌가 걱정이 되다가도, ‘정말 괜찮은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저 침착하기만 동생이라서. 이 일이 정말 의미 없는 것처럼 여겨져서.
그래서 덩달아 난리 치고 싶은 마음이 사그라든다.
“…그게 왜 네 부족이 돼.”
그렇지만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어, 울어?”
“잘못한 건 쟤네들인데, 왜 네가 부족한 게 돼…….”
이곳에 오기 전, 퍼진 영상을 봤을 때 머리가 멍해졌었다.
괜찮다. 다치지 않았다. 동생이 그렇게 축약했던 사건은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함유하고 있었다.
5분. 5분 동안 이어진 영상에서 동생은 작고 여린 어린애였고, 폭력을 이행하는 다섯 명은 동생보다 더 우람하고 거대했다.
가장 슬픈 건, 그곳에서 동생을 도와줄 이가 하나도 없었단 것이다. 구경꾼은 설핏 보였으나, 도와주는 이도, 말리는 이도 없었다.
영상에선 나오지 않았으나, 동생이 직접 나서서 저항할 때까지 구원은 없었을 것이다.
그게 서건우는 제일 서글프고 절망스러웠다. 이후 불려 왔을 부모님조차 네 편이 아니었을 것임을 알아 버린 후였으므로.
“트라우마는, 그런 건 괜찮아?”
“트라우마라고 할 것도 없는데…….”
“괜찮다고 말해서 정말 괜찮아지는 건 아니잖아.”
동생이 강한 사람임은 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어리고 미숙함을 안다.
건우는 그래서 걱정이었다. 동생은 너무 단단해서, 그 스스로도 그 안쪽이 아픈지 아프지 않은지도 알지 못했다.
“괜찮다는 말이 나쁘단 게 아니야. 근데… 난 가끔 모르겠어. 네가 정말 괜찮은 건지,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하는 건지.”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스트리머 같은 직업은 호사가의 입에 오르기 쉽고 온갖 루머가 판치기 좋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이런 식의 상처는 받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왜, 왜? 왜 하필?
왜, 이제 겨우 잘하던 애한테. 이제 나아가고 있는 애한테.
이 땅에서 죄지은 것 하나 없는데.
죄지은 건 다른 사람인데.
“그 개자식들, 만나면 죽여 버릴 거야…….”
“형, 사람 죽이면 안 된다며.”
“몰라……. 그 자식들은 죽어도 싸.”
그는 아직도 은우와 터놓고 얘기하기 전 시절만 떠올리면 손발이 차가워졌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미안했고, 가끔은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과 함께 도저히 고개 들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래.
“…걔넨 사지가 부러졌는데.”
“지금 걔네 편들어?”
“아니.”
건우는 냉큼 대답하는 동생을 보며 소매로 눈물을 욱여 닦았다.
눈물 많은 것도 고쳐야 하는데, 잘 고쳐지지가 않는다. 적어도 동생이 기대고 싶을 때 기댈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는 아직 먼 모양이다.
“…걔네들, 처벌받는 거 맞지?”
“아마. 그땐 나이 때문에 검사가 구형을 취소했댔나……. 근데 이 경우엔 재기소가 가능하다 들었거든.”
그사이 은우는 더듬더듬 설명해 주었다. 기저에 깔린 법률 자체를 외우지 못해서 그로서도 이번 사건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박기철이나 담당 변호사가 자신 있어 하는 모습을 보면 잘 처리될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 확신에 건우는 더 서글퍼졌다. 그는, 정말로,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매번 깨닫는 사실이지만 역시 웃을 수 없다.
“내가, 도와줄 만한 건 없어?”
“글쎄. 형이 나설 건 딱히 없는 것 같은데. 굳이 나서서 얼굴 팔릴 이유 있어?”
“그렇지만…….”
“괜찮아.”
단호한 동생의 답에, 건우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차라리 이번 일에 대해 전면에 나서서 도울 수 있었다면, 그래도 자괴감은 덜 들었을 텐데. 그는 그마저도 불가능한가 보다.
증인으로 나서기에는 혈연이라서 공신력이 떨어지기 때문이겠지. 그때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동생과의 접점이 거의 없었다는 점 역시.
“엄마랑 아빠가…….”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거론하려 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나서고 싶은데 나설 자격이 없는 그와 달리, 나설 수 있음에도 나서지 않을 그들임을 알아서다.
은우의 눈이 까맣게 빛을 흘렸다.
“…스트리머 일은, 계속할 수 있겠어?”
“못 할 것도 없지. 이번 일로 그만두게 된다고 해도 크게 아쉬울 건 없겠지만, 그래도 이것만큼 잘할 자신이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건우는 은우의 말을 들으며 눈물을 닦았다. 그가 쓸모없는 인간이란 건 이미 아는 사실 아니던가. 그러니 그만 울어야 했다.
이번 사건을 벌인 이들에겐 아직도 화가 나지만, 동생이 저렇게까지 하는데 그가 더 울 순 없었다.
“그래…….”
사실 그만했으면 좋겠다. 한 번 터진 일은 영원히 동생을 따라다닐 테고, 이번으로 끝이 될 거란 보장도 없으니까. 그렇지만 무슨 자격으로 왈가왈부할까.
무엇보다 건우는, 성인으로서 직업이란 게 쉬이 바꿀 수 있는 게 아님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현실적으로도 어려움이 많다. 섣불리 그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었다.
“너라면, 뭐든 잘할 거야.”
그러나 어떻게 결론이 나든 은우라면 잘 해내리라.
아무렴, 그는 이런 일이 들이닥치면 겁도 나고, 억울해서 화도 나고, 이리저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할 터. 반면 은우는 정리를 다 끝낸 듯 시간마저 알차게 쓰고 있지 않은가.
그 의연함에 속이 타다가도, 어쩔 수 없이 신뢰를 느끼고 만다. 강인함 뒤에 어림이 있다는 말은, 반대로 어림 앞에 강인함이 있다는 뜻이므로.
아마 그… 전생의 삶이 많은 영향을 끼쳤을 테지만, 그래서 더더욱 대단하다. 사람은 오래 산다고 해서 현명해지지 않고, 거친 삶을 산다 해서 모두가 굳세고 단단한 심성을 가지진 못하니까.
결국 은우가 저럴 수 있는 건, 본래부터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 어떤 것을 이뤄 낼 수 있을 사람.
가끔은 그래서 더 답답하지만, 뭐 어쩔 수 있나. 그건 그가 어떻게 하는 수밖에.
“빈말 아니고, 정말 잘될 거야.”
건우는 결국 위로 대신 응원과 지지를 보냈다.
이 말이 부디 동생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는 은우가 잘하지 못한다 해도 좋을 것이므로.
물론 동생이 못하길 빌거나 그걸 반기는 건 아니다. 단지, 은우는 아직 나아가는 단계임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은우가 실패한다 해도 은우를 믿을 것이고, 성공한다면 당연히 기뻐해 줄 것이다.
“응.”
그 마음은 과연 전해졌을지.
은우의 얼굴이 해사하게 풀어졌다. 건우의 마음 한구석은 그 미소에 되레 따끔따끔해졌지만, 그가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그래서 형, 운동은?”
“여행! 여행 이야기나 마저 할까!”
흡사 사채꾼 같은 집요함도 마찬가지였다.
* * *
컹!
은우는 조용히 짖는 강아지들을 보며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령, 가족사라든가?」
그의 귓가에는 사갈 같은 이가 남기고 간 전언이 울려 퍼지고 있다.
「무슨 의미입니까?」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의견을 묻는 거니까요.」
은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이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음, 그러니까 일종의 동정론을 이끌어 내자는 거죠. 이번 사건이 애매한 건 사실이니까요.」
「동정론?」
「아차, 동정이란 단어는 별로 마음에 안 드실까요? 그럼 이미지 메이킹이라고 하죠.」
싫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은우도 그렇게 떳떳한 인간은 아니었다. 이길 수 있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은우 씨 가족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잖습니까? 물론 형님분과는 친하신 것 같은데… 나머진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요. 관심이 있다면 당시 사건을 ‘그런 식’으로 처리하진 않으셨겠죠. 그렇죠?」
「글쎄요. 사건이 애매하니까 ‘그렇게’ 처리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편들어 주시는 겁니까, 아니면 연관되기 귀찮으신 겁니까? 뭐, 은우 씨 말대로 그럴 수도 있죠. 그렇지만… 제가 부모님 분을 외따로 찾아가 보기도 했던지라.」
「…왜 굳이?」
「당시 합의 과정에 대해 알아야 했거든요. 그쪽까진 기록이 남지 않아서. 당시 어렸던 은우 씨가 알 것 같진 않고, 그렇다고 가해자 쪽 설명에만 의지할 순 없으니까 직접 찾아가 봤죠. 썩 보편적인 반응은 아니시더랍니다.」
그러므로 박기철이 약점을 찔러 오는 일 따윈 새삼스러울 뿐이었다. 이미 전적도 있지 않던가.
「그래서 은우 씨께 제안하는 겁니다. 집에 별 애정도 없으신 것 같고… 애정 가질 집안도 아닌 것 같고……. 그럴 거라면 이용해 먹는 게 좋잖아요?」
「…….」
「집에서 방치된 채 외로움을 타던 와중에 선배들이 폭력을 저질러서 그에 저항했을 뿐인데, 3년이 지나서 갑자기 가해자로 몰리게 된. 부모님도 편을 들어 주지 않는. 벌써부터 감 오지 않나요?」
박기철은 좋은 사업적 파트너고 훌륭한 협력자지, 정서적 교감을 나눌 대상은 못 된다.
「장담하건대, 단순히 진실된 사건만 밝혀내는 것보다 훨씬 나은 반응이 나올 겁니다. 사람은 상대보다 자기가 더 우월하다는 걸 알 때 마음이 너그러워지거든요. 하물며 이 사건 전까지의 은우 씨는 얼마나 완벽했습니까? 범접할 수 없을 것 같던 인물이 사실은 나보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질 나쁘지만, 사람은 그 간극에서 쾌락을 느낍니다. 안 넘어오곤 못 배기죠.」
그의 팬심은 그의 이익보다 아래에 존재하고, 그를 향한 은우의 신뢰도 상호 협력 간의 이익보다 아래에 존재하므로.
「은우 씨가 기분이 나쁘실 수 있다는 점과 가족분들이 조금 욕을 들을 수 있다는 큰 단점이긴 한데……. 불편하시면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저도 상도덕은 아는 놈이거든요. 2차 가해는 나쁘죠.」
「지금도 충분히 2차 가해에 포함되지 않습니까?」
「상처 받으셨습니까?」
「아니요.」
「그럴 줄 알아서 꺼낸 말입니다.」
그러니 은우는 그의 제안에 사감을 느끼지 않았다. 대신 이 제안이 불러올 미래를, 그리고 그것의 구체적인 형태를 그려 보았다.
「그거, 안 하면 반드시 망합니까?」
「아뇨? 이건 그냥 일종의… 보조적인 느낌이라. 잘사는 놈이 잘못 한 번 하면 실컷 욕해도, 과거 불쌍했던 놈이 잘못 한 번 하면 ‘아, 좀 봐줄까?’ 하는 마음이 들잖습니까. 그런 걸 이끌려는 겁니다, 이 제안은.」
「됐습니다, 그럼.」
그가 욕먹는 건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제 와 그의 부모가 비난받는다 해서 그가 상처받지도 않을 거다. 엄밀히 따져서 그들은 그런 일을 당해도 쌌다.
「가족이랑은 거리가 멀어도, 말씀하신 것처럼 형이랑은 친해서.」
그렇지만 그 비난의 칼날이 형에게 향한다면, 그래서 형이 상처를 받는다면. 그건 싫었다.
「아… 형님분이 마음에 걸리셔서? 그럼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은우는 그것들로부터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지만, 멘탈 약한 형은 아닐 테니까. 가능하면, 굳이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다.
‘잘못한 건 쟤네들인데, 왜 네가 부족한 게 돼…….’
이미 우는 사람이 더 울지 말았으면 한다. 대신 흘려 주는 눈물은 기껍지만,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번에 들어간 비용은…….」
「아, 그에 대해선…….」
컹!
은우의 회상을 깨고, 민식이가 손등에 얼굴을 비볐다. 손을 멈추지 말란 의미이리라. 그는 그런 이에게 가볍게 키스해 주며 손을 마저 움직였다.
“거절하길 잘했지.”
끼잉?
그는 목을 매만졌다. 더 이상 간지럽지 않았다.
밤이, 겨울이 짙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