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구함에 감사드립니다, 최초의 오염된 자. 덕분에 다가오는 죽음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잔인한 학살자, 세계수를 불태우는 자. 동시에… 태양에게 버려진 고대종들의 영웅.”
“정말이지… 끔찍한 어둠이었습니다. 태양의 은혜가 사라져 천천히 메말라 가는 순간은…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다 각오는 해 뒀지만, 생각보다 더 참혹하더군요. 다신 겪고 싶지 않습니다.”
“그의 끝은 어떻게 됐을까. 궁금하지? 나도 궁금해. 그래서 그를 찾기 시작했어. 마침 묻고 싶던 것도 있었거든. 그가 살아 있을진 모르지만!”
“제 혈통이 놀라우신가요? 혹은 과거의 제 언사를 비추어 저를 조소하시는지요. 무엇이든, 제 잘못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부모님이 그리 돌아가신 후 한순간도 제 핏줄을 좋아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부정하고 싶은 것이었지요.”
“뭐, 그런 그의 유해나 무덤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해. 사자에게 물어보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거든. 물론 그는 우리와 종이 다르니까 그 방법이 통할진 모르겠지만.”
“태양에게 버려진 자의 피가 흐른다는 건, 언제나 제 걸림돌이었습니다.”
“오, 뭐가 묻고 싶은 거냐고? 키히히힛! 너무 당연한 걸 묻는군! 내가 물어볼 질문은 뻔하디 뻔한 것, 하나밖에 없잖아?”
“돌아 덮는 자의 자식들이 스스로를 유폐한 것도 전부 그 때문이 아니던가요, 최초의 오염된 자?”
“오, 멸망한 종의 마지막 왕이시여. 당신들이 진정 태양에게 버려져 멸망한 거라면, 우리도 멸망하는 과정에 있는 겁니까! 키히히힛!”
▣ 215. 잊혀진 것을 깨우지 마라
검은기사 출시 후 닷새. 은우는 드디어 마지막 지역─으로 추측되는─에 입성했다. 이곳이 마지막임을 직감하는 이유는, 과거 1편에서 보스가 나오던 외성과 비슷한 지형이기 때문이라.
“지금까지 잡은 보스가 15마리였죠.”
─ㅇㅇ
─보스 개많이 잡았다 진짜ㅋㅋㅋ
─히든보스들 너무 잘 찾으셔서 웃김
─켄: (강자의 기운이 느껴진다. 가자!)
─거의 탐지기ㅋㅋㅋㅋ
경로상 필수로 보이는 게 9마리, 숨겨져 있던 걸 찾은 게 6마리다. 한 번 잡으면 더 이상 출현하지 않는 미니 보스나 엘리트 몹까지 포함하면 50마리에 근접할 성싶다.
“그보다… 이곳은 여전하네요.”
《설원의 유적》
다른 지역은 기시감만 줄 뿐, 전체 모든 오브젝트 위치와 길의 형태가 다 달라졌었는데, 새로 개방한 설원의 유적은 좀 달랐다.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이 성에서 배신자를 찾겠다고 훈수도 받았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ㅇㅈ
─아 훈수 on?
─이번에도 훈수 가나요?
─여기서 켄보다 더 잘아는 인간 있긴 함?
─ㅋㅋㅋㅋ켄이 정보 제일 많음ㅋㅋㅋㅋ
과거보다 방대해진 맵을 헤매고 왔더니, 1편에서 보았던 지역과 똑같아 보이는 입구가 튀어나와도 그리 불쾌하지 않다. 외려 그리움과 반가움이 들 정도였다.
“뭐, 안에 들어가면 달라져 있겠죠. 길 찾기 쉽게 해 줄 양반들이 아니니.”
─고건 맞지;;
─카롬이 친절....? 하늘이 쪼개지는 게 먼저일듯
─걔네는 유저들 괴롭히는데 맛들렷어
─이 새끼들 함정 깔아둔 거 아니냐?
누군가의 말마따나, 경험을 되살려 길 찾게 해 주긴커녕 경험에 의지하다가 함정에 처 맞게 할 인성이 카롬이다. 은우는 방심하지 않고 걸음을 내디뎠다.
바스락!
바닥에 낀 성에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아.”
은우는 더운 숨을 내뱉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순간의 단말마는 하얀 수의를 껴입고 허공에 녹아든다.
─길 개어렵다
─근데 천 년 지난 것치고 보존은 잘 된듯?
─우리나라 문화재도 천년 지낫는데 잘 있잔아
─아 그러네
─이왕이면 길도 그대로 보존해주지...
─너무 달라져서 못 알아보겟음
“하긴, 엄청 무너졌네요.”
그는 나선의 계단을 타고 저벅저벅 내려갔다. 세월은 못 이겼는지, 붕괴되거나 눈과 얼음이 쌓여 막히는 등 길이 배배 꼬여 있는 게 보인다. 예전에 갔던 길을 되걷기는 어림도 없다.
─아 좀 비슷하게 만들어주지
─길 다 바뀌엇다고 보면 될 듯
─ㄲㅂ 날먹 실패
─하...저긴 언제 또 가냐
“똑같았으면 우려먹기라고 하셨을 거면서.”
─ㅇ;; 들켯음?
─켄 비수를 너무 잘 알게 됏는데
─킹직히 여긴 우려먹어도 됨;; 난이도가 쉽헐이라서...
─맞어 여긴 우려먹어도 봐줫다
날로 먹고 싶은 이들이 채팅 창에 넘실거리는 와중에, 은우는 해당 지역의 첫 몬스터와 만났다. 이성을 잃은 채 이 북녘까지 흘러든 것인지 오염된 자가 몇 있다.
그러나 그런 그들보다 더 눈에 띄는 건 반투명한 형상으로 돌아다니는 이형의 괴물들이었다.
그것을 인간이라 봐야 할지, 괴물이라 봐야 할지. 희고 투명한 천들을 흩날리며 사족 보행을 하는 그것들은, 생긴 것 자체는 인간과 닮았다. 단지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길고, 그런 몸뚱이를 기듯 사족 보행 할 뿐이다.
몸통은 선으로 찍찍 그은 인간 그림 마냥 홀쭉하다.
“정상적으로 발달한 괴물은 아니네요. 뭐, 몬스터들이 본래 그렇긴 합니다만.”
─진화론 on
─솔직히 몬스터 중에서 진화론 챙긴 애들이 얼마나 잇겟냐
─그치만 저렇게 디자인하는 것도 너무하잔아욧
─쟤넨 대체 뭐임? 유령?
은우는 너무 깊은 감상 대신 바로 전투를 준비했다. 괴물들이 그를 인식하자마자 시린 천들을 흩날리며 덤벼들었다.
기어 다니는 상황임에도 속도가 빠르고, 눈높이가 은우보다 높다. 신장이 최소 4m, 5m는 되는 듯하다.
캬아아아악!
그것은 괴악한 소리를 내며 곡검을 휘둘렀다. 기어 다니기 수월하도록 한 손은 바닥을 짚고 있어, 대체로 내려찍는 공격이 전부다. 그 속도가 제법 위협적이었지만, 사거리를 정확히 재고 피하면 위험할 것도 없다.
은우는 녀석이 검을 거둬들일 타이밍에 맞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제작진에서 미리 상정해 둔 것인지, 괴물이 땅을 짚던 손을 들었다.
그를 낚아채고자 휘저어지는 손은 꼭 가희의 것처럼 느긋하게 우아하고, 유연하게 빠르다. 투명한 천까지 나풀나풀 움직이니, 진정 아름다움만으로도 시선을 뺏기 충분할 지경이다.
─머임?
─개이쁘다
─ㄹㅇ;; 엄청 우아한데....
─근데 어려워보인다
─느린데 빠름....
─피할 타이밍이 안 보이는데?
사람들은 그 고운 몸짓에 한 번 놀라고, 은근히 피하기 어려운 변칙성에 또 한 번 놀랐다.
은우는 상체를 굽히며 바닥을 굴러 빠져나왔다. 손만 정확히 피한 뒤, 그의 발은 다시 도약한다. 은우의 직검이 녀석의 목을 찔렀다.
“느린데 피하기 어려워 보이는 건 가속 타이밍 때문에 그렇습니다.”
회전을 넣거나 방향을 꺾을 때 자체는 속도가 느리지만, 직선형 움직임을 보일 땐 빠르다. 무의식적으로 꺾을 때의 속력에 익숙해지면, 그 뒤에 가속이 붙은 검로에 당하게 되는 것이다.
“가속 타이밍 자체에 익숙해지면 피하기 쉬우실 겁니다.”
느긋한 부분 동작 덕에 예측이 쉬우니 헷갈리지만 않으면 된다. 은우는 가볍게 설명해 주었다.
─?
─네?
─ㅖ?
─??
물론 언제나처럼 안 먹히는 경향이 더 크다.
“슬슬 무기 바꿀 때가 됐네요.”
「‘이때만을기다렷다’ 님이 ‘1,000원’ 투척!
대나아아아앗!」
─직검!
─단창!
「‘내가고른다!’ 님이 ‘1,000원’ 투척!
채찍!」
이미 생각해 둔 무기가 있다. 은우는 사람들이 후원 날리기 전에 미리 만류했다. 물론 타자가 뭐 이리 빠른지, 십여 명 정도는 후원을 날린 상태다.
“미리 쳐 두시는 겁니까?”
─예
─ㅖ
─ㄲㅂ 놓침
─ㅖ
은우는 대낫을 손에 단단히 쥐었다. 단창 정도 되는 길이의 손잡이와 그것의 삼분지 일만 한 낫날이 두 개. 오른쪽이 길고 왼쪽은 조금 짧다.
양손 무기이기에 방패 착용은 쓸모가 없고, 스탯 때문에 장비도 여전히 허름하다. 그럼에도 분위기란 게 있어 거지꼴은 면했지만 말이다.
“다음에 써 드리겠습니다, 채찍은.”
그는 후원을 날린 시청자들을 달래며 부서진 돌길을 걸었다. 아마 정원이나 산책로로 쓰는 길 같은데, 얼어붙고 눈도 소복이 쌓여 원 형태를 알아보기는 힘들다.
은우는 부서지고 깨진 돌판 사이로 하얗게 낀 눈들을 사박사박 밟았다.
중간중간 오염된 자들이 뛰쳐나오거나 조각상들이 움직이는 등 갖가지 몬스터가 나왔다. 아까 잡았던, 천을 휘날리는 몬스터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오염된 자 이상으로 수가 많았다. 개체당 강함을 고려한 것인지 전체 수가 많진 않았지만, 적어도 해당 지역 잡몹이라고 보긴 충분하다.
과연 마지막 지역답다.
탕!
한참 진행하고 있자니, 멀리서 대형 화살이 날아왔다. 창살이나 작살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길고 굵직한 화살이었다.
그러나 은우는 낫을 휘둘러 그것을 튕겨 냈다. 심지어 그의 낫은 화살을 튕긴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은우는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온 앞에 있는 적의 방패를 때렸다. 앞서 발차기로 자세를 무너트리는 상태라, 적의 방패가 저리 치워졌다.
그의 몸이 한 보 나아가며 허리를 비틀고, 그것에 맞춰 몸을 돌리듯 두 보를 디뎠다. 낫날은 비록 은우의 등 쪽으로 향해 적을 타격하기엔 너무 멀어졌지만, 자고로 날로만 상대를 공격하란 법은 없다.
퍼억!
낫자루의 뭉툭한 끝이 적의 턱주가리를 올려 쳤다. 은우는 이후 사뿐한 걸음으로 뒤로 물러나, 다른 쪽에서 날아온 대궁시를 회피했다. 건너편 다리에서 저격을 하고 있는 것이라, 어쩔 수 없이 피해 가며 싸워야 한다.
─저것들 엄청 거슬리네;;
─진짜 개극혐 구역이다....
─쟤네 해치워야하는데
─어케 살아남아 여기서ㅋㅋ
“다 잡고 잡죠.”
은우는 낫의 손잡이를 고쳐 쥔 후 힘을 모아 낫을 크게 휘둘렀다. 자루의 끄트머리를 잡다시피 한 덕에 거리는 충분하다.
아직 방패를 회수 못 한 적의 몸이 낫에 갈렸다. 허공에는 하얗게 궤적이 남아, 방금 휘둘렀던 공격에 얼마나 커다란 힘이 실렸는지를 알려 준다.
“아래서도 옵니다.”
은우는 몸을 낮춰 저격을 피한 후 낫을 내려찍었다. 막 다리 위로 기어오르려던 적의 머리가 낫 손잡이에 찍혔다.
키에엑!
그것은 떨어지는 대신 악착같이 다리에 붙어 고함을 질렀다. 은우의 눈살이 살짝 좁아졌다.
“자폭병이네요.”
─ㅇㄴ
─쟤네 진자 싫어
─여드름맨;;
─진짜 여긴 히트앤런이 답이다
온몸에 여드름 같은 종기를 달고 있는 게, 저걸 터트려서 동귀어진하는 종류의 오염된 자다.
은우는 다급히 백 스텝을 여러 번 밟고 굴렀다. 화살이 다발적으로 그가 지나온 자리에 흔적을 남기는 사이, 오염된 자가 두 팔을 벌린 채 그를 향해서 달려왔다. 그의 달리기 속도와 비슷해서, 열심히 뛰기만 하면 휘말릴 일은 없다.
퍼엉!
샛노란, 아니 그보단 주홍빛을 띠는 종기가 기어코 폭발하고 말았다. 샛노란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범위는 반경 1.5m. 정확히 따진다면 2m에 가까우나, 1.5m 이내가 아니면 대미지는 크지 않다.
─진짜 끔찍해....
─여드름은 다른데 가서 짜주세요
─자폭ㄷㄷ
─저 지금 왔는데 뭔 상황임?
─카롬은 진짜 괴물 만드는데 탁월한듯...
온몸에 혈관 같은 뿌리가 돋아난 것도 모자라, 직경 30cm짜리 종기가 자란 괴물이다. 심지어 몸체 색은 새까만 검정색.
혐오에 대한 내성이 적은 이들이 울부짖었다.
“뭐…….”
은우는 그런 그들을 어르고 달래기 위해 말을 고르며, 낫을 휘둘렀다. 대각선 베기 한 번, 무기의 무게를 이용해 균형을 맞추며 앞으로 발차기.
반발력으로 되돌아오는 다리는 축이 되어 버티던 다리와 교차하듯 대지를 디디고, 자동으로 틀어진 골반에 맞춰 몸을 돌리면 등과 수평 되게 검격이 지나간다.
“그래도 알아서 죽으니 다행 아닙니까?”
─다행....인가?
─튀기만 하면 알아서 죽으니까 뭐...
─근데 너무 끔찍하잔아
─시각테러
“저걸 직접 터트리는 것보다야 나을 것 같은데.”
─으아아악!!
─알아서 죽어줘서 감사합니다...
─진짜 상상만 해도 극혐
체액 튀는 것도 끔찍해하는 양반들이 고름을 좋아할 리가 없지. 그는 예상한 반응이 나오는 걸 보고 그의 타이름이 잘 먹혔음을 확인했다.
여러 가지로 글러 먹은 사고방식이지만, 아무도 그걸 몰랐다.
팅!
또 한 번 화살이 낫에 맞아 튕겨 나간다. 은우는 마지막 몬스터의 목을 참수하듯 둥글게 베어 죽이며 건너편 다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것들을 죽이려면 지금 있는 다리를 건너 복도를 빙 돌아가거나, 여기서 화살로 잡는 방법밖에 없다.
「‘울렁꿀렁’ 님이 ‘1,000원’ 투척!
활도 보여주세여ㅠㅠㅠ」
“활? 오래 걸릴 텐데, 괜찮으시다면야.”
애초에 화살이 충분한지도 모르겠다. 은우는 무기의 장비 자체를 풀어 버리고 대궁을 들었다. 요구 스탯을 준수하지 못해서 페널티가 걸리긴 하지만, 다른 무기는 뭐 안 그랬던가.
그는 적의 화살이 날아오는 걸 피해 한 발짝 옆으로 움직였다. 직후 작살시가 옆에 꽂혔다. 은우가 무겁기 그지없는 시위를 튕긴 것도 그때였다.
마찬가지로 두껍고 긴 화살이 허공을 유영하고, 그것은 정확히 적군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러나 은우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자리를 옮겼다. 애초에 맞을 걸 확신하고 있으니 확인할 이유가 없기도 하거니와, 다른 녀석들이 화살을 쏘고 있어서 어쩔 수 없다.
─진짜 명궁 오졋다
─활 에임보정 개구진데....ㄷㄷ
─구울왕은 못하는 거 없다 이거야
─그 활솜씨라도 나눠조.....
“익숙해지면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활을 걸고 조준할 필요는 없다. 시위를 걸며 활대를 들어 올린 시점에서 조준은 이미 되어 있기에.
다만 필요한 것은 찰나의 호흡과, 그 호흡으로 말미암아 달라질 미세한 조정이다.
그는 두 번째 화살도 정확히 적의 머리에 박아 넣었다. 그러나 스탯 미달로 공격력 하락에 장비 자체도 좋지 않아 대미지는 미미하다.
“대궁용 화살이 몇 개 없네요.”
필드에서 루팅한 것도 있고, 그가 따로 구매한 것도 있다. 하나, 문제는 한 번에 들고 다닐 수 있는 수량 제한이었다.
소형 화살은 99발까지 들고 다닐 수 있는 반면, 대궁에 쓰이는 대형 화살은 30발이 최대다. 이걸론 활 쏘는 몬스터 하나 잡고 하나 반피 깎는 정도에 그친다.
“다 맞추고 건너가서 죽이겠습니다.”
─ㅋㅋㅋㅋ안 죽이는 루트는 없음
─대궁용 화살에 맞아 죽는 것보다 낙사가 더 빠를 각
─캬 이래서 이분이 좋아
─가는 동안 화살 ㅈㄴ 날아오겟네;;
은우는 활을 고쳐 잡았다. 이제 스물여덟 발 남았다.
* * *
“이 길은…….”
무너진 땅 일부를 슬쩍 들여다보면 지하가 보인다. 마침 땅도 경사지게 무너진 상태라, 그 지하에 들어갈 수 있는 상태였다.
“제 기억이 맞다면, 배신자의 방이 지하에 있었던 것 같은데.”
─와 미쳣다 배신자 방에 히든보스 잇는 거임?
─배신자 죽엇는데?
─맞음 배신자 방 가는 길임 ㅇㅇ
─지금 돌아덮는 자가 배신자라는 해석이 나왓음
─돌아덮는 자의 자식들 이랫으니까 그중 하나인가?
─난 전작 주인공 기대햇는데....
─다 모르겟고 이번 보스 무조건 켄 본뜬 놈이다
─하....벌써부터 가슴이 웅장해진다....
역시 그곳이다. 은우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감지했다. 금세 평소의 박동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순간 불쑥 치고 들어온 직감은 여전히 그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다.
무기의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곳에 있겠네요.”
아니, 저곳에 있다. 반드시 있다.
배신자가 있던 그 방에, 그를 기대하게 만든 카롬의 걸작이 있다.
감히 그의 이름을 본 따 만들어진 작품이.
“갑시다.”
은우는 혀로 윗입술을 살짝 핥곤 발을 내디뎠다. 한 보, 한 보 힘이 더 들어갔지만, 아직 소리는 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그의 기준에 미달되는 적들만 상대하느라 무뎌진 감각들이 슨 녹을 떨치는 걸음이고, 싸움에 미친 사냥꾼이 숨겨 두었던 칼날을 들어 올리는 몸짓이다.
무너지고 침하되어 내려앉은 지반이 만들어 낸 어설픈 길을 따라, 은우는 평온하되 기쁜 마음으로 걸었다.
그 길에도 물론 몬스터들이 있었으나, 여태껏 걸어온 길과 다르게 아주 약했다. 솔직한 평으로는 튜토리얼 지역의 오염된 자들 수준이었다.
─약해서 더 소름 끼친다...
─아니 카롬이 이럴 애들이 아닌데??
─배신자 때도 가는 길 조낸 어려웟는데...
─미쳣다 진짜 얼마나 자주 와리가리하란 거임
사람들은 그 약한 문지기들을 보며 외려 공포에 떨었다. 문지기들이 약한 건 드나들 때를 위한 배려이고, 그것으로 미루어 이곳을 얼마나 자주 들락날락하게 될 것인지 알려 주는 셈이니 당연하다.
본래 불친절한 게임이 갑자기 친절해지면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붕괴된 유적지 끝에서 아주 익숙한 문이 나왔다. 협력자를 부를 수 있는 룬은 없으나, 효수된 시체와 경고문은 있다.
『잊혀진 것을 깨우지 마라』
그 경고문은 이미 각오한 자에겐 되레 달콤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은우는 시선으로 문을 훑고, 경고문을 살핀 뒤 한 발 전진했다. 이제 한 걸음만 더 걸으면 손이 문에 닿을 수 있다.
『박 팀장님> 켄 님. 정말 죄송합니다만,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닿을 수 있었다.
『박 팀장님> 사건이 하나 터졌는데, 빨리 대처하지 않으면 문제가 커질 것 같습니다. 아니, 커집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제가 가서…….』
긴급 문자로 설정된 메시지는 그가 보고 싶지 않아도 경종을 울리며 상단에 떠오른다. 시청자들의 시야엔 블라인드 처리 되겠지만, 그게 그의 눈에도 가려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은우의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