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213화 (213/233)

213화

“여행?”

은우는 형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정작 그 형은 강아지 두 마리와 얼굴을 비비느라 여념이 없지만 말이다.

“워크숍이 여행은 아니지… 않지 않나?”

“아니야?”

“아니지?”

건우는 동생의 말을 들으며 투덜거렸다.

“가도 가족이나 애인, 아니면 친구랑 가야 즐겁지. 상사나 직장 동료랑 가면 뭔 재미겠냐. 그냥 외근으로 하는 연장 근무지.”

컹!

그는 손을 멈추자 짖는 강아지들을 보며 구겼던 얼굴을 헤실헤실 풀었다.

“어휴. 네네, 긁어 드리겠습니다.”

전용 등긁개가 되어 버렸지만,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다.

서건우는 헤벌쭉한 얼굴로 강아지들을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거주 여건상 반려동물 기르는 건 어림도 없던지라, 이런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민식이랑 로건이 너무 귀여워.”

“귀엽지.”

“오구, 오구.”

그는 얼굴이 침 범벅 되는 것도 괘념치 않은 채 녀석들을 비볐다. 그것을 가만히 보던 은우가 손을 흔들었다.

“앗.”

두 강아지는 단번에 손님을 배신하고 주인에게로 향했다. 물론 정말 주인이 좋았던 것인지, 주인이 손에 든 간식이 좋았던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건 반칙이지.”

“왜.”

은우는 자못 당당하게 되물었다. 그의 손은 강아지들 식사와 간식 일정을 적어 둔 일정표를 가리킨다. 확실히 간식 시간은 맞았다.

“나도 간식 줄래.”

결국 할 말 없어진 건우는 궁상맞게 동생 옆에 쪼그려 앉았다. 손에 든 스낵이 아이들 입이 챱챱거리는 것에 맞춰 흔들렸다.

“형.”

“응?”

“가족이랑 여행가는 건 괜찮아?”

큰 개가 쪼그마한 간식을 날름날름 먹는 걸 보며 잇몸 만개 하도록 웃던 건우는 엉겁결에 ‘엉, 응, 엥?’ 따위의 소리를 냈다.

그러곤 그의 고개가 돌아가 동생의 반듯한 옆얼굴을 보았다. 평소처럼 뚱했다. 데굴데굴 구르는 눈동자는 설핏 눈치 본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괜찮지?”

그는 거기까지 대답한 후 동생의 물음에 대한 본의를 깨달았다.

“언제, 여행 갈까?”

“…응.”

정답이었다. 그는 슬슬 구분할 수 있게 된 동생의 표정을 보며 안도했다. 저건 기대하는 거다. 검은기사 2란 게임이 발매되기 일주일 전부터 저런 얼굴을 했다.

“그래, 그럼. 아, 이왕 이야기 나온 김에 후딱 해치울까? 더 추워지기 전에.”

동생이 가지지 못한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추억을 그가 다 채워 줄 순 없겠지. 그렇지만 이런 소소한 일상이 그때를 일부라도 묻을 수 있다면 좋을 테다.

건우는 부러 밝게 물었다. 동생은 아는 듯 모르는 듯, 고개만 여상적으로 주억인다.

“그래.”

“적어도 이번 게임은 끝나고 가야겠지? 언제 끝날 것 같아?”

“…글쎄. 이틀? 사흘?”

“그럼 그냥 다음 주 주말에 가면 되겠네.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어?”

모쪼록 이번 게임도 아무 탈 없이 끝나면 좋겠다. 건우는 동생을 채근해 여행 계획을 짜며 생각했다. 평소와 같은 하루였다.

▣ 213. 걔네들, 다 죽이고 왔는데

은우는 그다음 날 방송에서 ‘레우브리온의 고성’이란 지역과 거기서 이어지는 ‘죄의 서고’라는 지역을 찾아냈다.

침묵하는 숲에서 고성으로, 고성에서 서고로 가는 루트였다.

한데, 놀랍게도 죄의 서고는 성당과 숏컷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태양의 기사를 잡고 나서 발견했던 그 잠긴 문이었다.

서고가 왜 성당과 연결되어 있는가. 그것에 대해선 시청자들의 추측 여럿 나왔다. 은우가 보기에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은 성당과 고성의 주인이 협력해 서고에서 무언가를 연구했다는 것이다.

아무렴 지역 이름이 ‘죄의 서고’인 것도 그렇고, 출현 몬스터가 무언가의 연구 결과인 것도 이상했다.

참고로 후자는 서고 앞에서 알짱거리던 이안이 알려 주었다. 이곳은 ‘그’와 ‘태양에게 버려진 자’들을 벤치마킹해 오염을 이겨 낼 방도를 연구한 곳이라던가.

그는 그 시점에서 중앙 거점으로 한 번 돌아왔다. 그리고 그런 그가 본 것은…….

“이상한 로브인이 카일라니를 죽인 게 분명해!”

퉁명스럽지만 할 거 다 해 줬던 카일라니가 사망한 광경이다. 옷에는 이리저리 싸움의 흔적이 있고, 입에는 피가 얕게 묻어 있다.

─시발?

─예?

─아니 이 무슨

─??

─왜 죽음??

─그가 왜 죽어있습니까?

은우에게 있어 카일라니는 그렇게 필요한 NPC는 아니다. 기껏해야 세계관, 숨겨진 설정 파악하는 데 쓰일 뿐이니까.

그러나 장차 이 게임을 하게 될 게이머들에겐 아니다. 레벨 업 담당인 카일라니의 죽음은 굉장히 불유쾌하고 중대한 문제였다.

“카롬이 뭐… 그렇지 않습니까.”

은우는 불합리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으레 대곤 하는 변명을 지껄였다. 놀랍도록 잘 먹혀들었다. 게임의 제작진, 게임 입장으로 보면 그들이 신인 셈이니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중요한 건 대체 누가 카일라니를 죽였냐는 건데.”

─진짜 누가 죽인 거임?

─재수없는 쉑 잘 죽었다

─저거 니 레벨업 챙기는 놈이다

─재수없는 쉑 왜 죽었냐

「‘заявление об отставке’ 님이 ‘14,620원’ 투척!

이건 중대한 사안이다. 그러니까 범인은 꼭 플랑베르주로 죽여줘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은우는 가장 먼저 쓰러진 채로 방치된 카일라니의 시신을 확인했다. 카롬 제작진 같은 변태들이라면 사인도 제대로 알려 주었을 것이므로, 당연한 판단이다.

성법이나 마법 같은 변수가 있다 해도 괜찮다. 사람의 사인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남지 않는 것조차 단서다. 보통은 모르지만.

“머리의 둔상, 몸 이곳저곳에 가벼운 열상. 베인 형태를 보니까 칼을 쓴 모양인데, 실력이 제법 좋은 것 같습니다. 치명상은 하나도 없어요.”

두피가 살짝 찢어져 피가 흘렀고, 몸에 난 열상도 마찬가지다. 깊은 상처는 없다. 언뜻 보기에 있어 그는 ‘죽을 상처’가 없었다.

“머리는… 돌로 친 것 같네요. 여기 굴러다니는 이 돌.”

은우는 피가 묻은 돌 하나를 톡톡 쳤다. 대놓고 존재해서 알아보기 쉬웠다.

─어케 알아봤냐;;

─킹직히 의료종사자 아니면 특수부대라니까

─사람 좀 죽여보셧나봐요

그의 입장에서만 그랬다.

“보이지 않습니까?”

─안 보이는데요

─보임

─현직 백수입니다 안 보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 은우는 그러려니 하며 입가에 묻은 피도 확인했다. 내장이 조각 나거나 파열되어 토혈한 것이 아니라, 입안이 찢어져서 흐른 피다.

그는 손가락을 카일라니의 입에 넣고 벌려, 찢어진 상처까지 손수 확인했다. 역시 내상은 아니다. 그렇지만…….

“딱히 ‘이것 때문에 죽었다.’라고 정의할 만한 상처는 없네요. 독살이나 성법, 마법이라면 또 모를까. 다만, 애초에 죽은 건 맞나 싶습니다.”

카일라니를 가지고 논 흔적이 있다는 건 카일라니보다 실력이 윗줄이라는 것. 그런데도 굳이 카일라니를 돌로 내려쳐 기절시키는 걸 택했다.

성법이든, 마법이든, 독살이든. 그런 걸로 죽일 거라면 차라리 상대를 가지고 놀 정도로 압도적인 무술로 승부 보는 게 더 간단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기절을 시킨 건 결국 카일라니를 죽일 의도가 없었던 게 아닐까.

─정체를 밝혀라

─사실 블랙요원인 거 아님?

─블랙요원이 왜 방송을 하는데ㅋㅋㅋ

─됐고 카롬도 변태고 켄도 변태임

“제가 뭘 했다고 그럽니까.”

추리 게임에서도 한때 보여 줬던 능력이건만, VR이라 사람들의 충격이 큰 모양이다.

은우는 장난 삼아 그를 음해하려는 사람들을 보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당연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는 건 그만 아는 비밀이다.

─사후 경직 없는 것도 그런 듯ㅇㅇ

─ㄹㅇ 크게 다친 부분이 없긴 해

─카롬 쉑들이라면 킹능성 있다

그사이, 일부 시청자들은 그의 의견에 찬동했다.

“아, 사후 경직은…….”

음. 그것도 단서가 될 수 있긴 하겠지만, 그것까진 좀 애매하지 않나 싶다. 플레이어가 언제 올지 어떻게 알고 카일라니의 시신에 사후 경직을 걸어 두겠나. 아마 캐릭터의 입장을 기점으로 이런 이벤트가 벌어지도록 설정해 둔 게 아닌가 싶은데.

나중에 와서 카일라니의 몸이 딱딱해져 있다면야 사건이 발생 시점에 대해 추론이 가능해지긴 하겠다. 그것을 이용해 가까운 위치에 있던 자들을 용의자로 특정할 수 있을 테고.

그러나 카롬이 아무리 완벽주의자라도 이걸 반영하긴 어렵다고 본다. 이게 추리 게임도 아니거니와, 플레이어란 자고로 농땡이를 엄청 치는 존재들 아닌가. 미뤄 두고 안 할 가능성이 더 높다. 카일라니를 살릴 수 있다면 또 몰라도.

카일라니를 살릴 수 있다면.

“카롬에서 정말 카일라니를 죽였을까요?”

─?

─어....

─일단 지금 죽었지 않음?

─킹쎄요?

“레벨 업을 위한 필수 캐릭터를 계속 죽게 내버려 두진 않을 거 아닙니까. 레벨 업이 막히면 불편해할 플레이어가 한둘이 아닐 텐데.”

─그건...그렇지?

─그럼 부활방법이 따로 있겠네

─아 그러네

─커어 역시 뇌지컬

─뇌가 섹시한 남자

“가사 상태라든가, 나중에 부활을 시킬 수 있다든가……. 어쨌든 완전히 죽은 건 아닐 거 같습니다. 설정 변태들이 개연성 없는 부활을 만들 리도 없으니까.”

그렇다면 적이 구태여 카일라니를 기절시킨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적은 카일라니를 죽인 게 아닐지도 모른다. 위해를 가한 것 자체는 맞지만.

“일단 찾으러 갑시다. 어차피 보스 찾으러 구석까지 싹싹 훑어야 하는 입장 아닙니까.”

은우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갈 장소는 ‘파도치는 시계탑’ 지역이다. 갈 지역이 추가로 개방되긴 했는데, 여기도 슬슬 가 볼 타이밍이 됐다.

그는 가장 가까운 맥의 지팡이로 이동했다. 안개가 그를 감쌌다가 주위 풍경을 뒤바꿔 버린 채 사라졌다.

─근데 안드레스 어디갓냐

─누님이 범죄자인 거 아님?ㅋㅋ

─난 이안 건다

─이안은 왜 갑자기 머리채가 잡히냐

─이안 신전 빡대가리라고 햇잔아

“그러게요.”

사실 은우는 중앙 거점에서 만날 거라 생각했다. 찾기 가장 쉬운 장소니까. 물론 중앙 거점도 이래저래 복잡하긴 하다만은.

─먹튀 했나?

─이 새끼 보답하기 싫어서 튄 거 아님?

─먹튀 ㄷㄷ

“그럴 가능성도 있겠죠. 카일라니 같은 중요 NPC도 죽는 마당에.”

─ㅅㅂㅋㅋㅋㅋㅋ

─아ㅋㅋㅋ고건 맞지

─NPC도 죽이는 마당에 보답 먹튀? 루삥뽕

실력 외 부분에서도 시청자들을 멕이는 데 퍽 익숙해진 은우는 그대로 걸어 나갔다. 전작에선 항구로 가던 길이었는데, 지금은 지반이 침하되거나 위로 솟아 올라왔는지, 길이 그때와 전혀 다르다.

“저 시계탑에는 보스가 있겠죠.”

─보스 딱 대

─모가지 씻어두고 기다려라ㅋㅋ

─보스: 아 한번만 봐주자 한번만 봐주자

─거기 딱 기다려

그렇지만 시계탑이라는 기준선을 두고 움직이는 것이라 길이 그렇게까진 어렵지 않았다. 막혔을 때만 돌아가면 됐다.

“오, 오. 귀공, 귀공은 절 구해 주신 그분이 아닙니까?”

그렇게 길을 나아가길 한참. 시계탑 입구에서 시청자들 사이에서 먹튀 논란을 일으켰던 존재가 발견됐다. 안드레스였다.

“잘 만났습니다. 귀공을 찾던 중이었거든요.”

그녀는 품에서 무언갈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때의 은혜를 비로소 갚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용서하시길.”

『광신의 충성 반지 1』

다소 좋지 않은 이름의 반지였다.

“그것은 태양을 진실로 따르는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반지입니다. ‘순수한’ 태양의 종이라면 이 반지를 꼈을 때 그분의 가호를 느낄 수 있죠. 귀공께 어울릴 겁니다.”

─말투 뭔가 쎄하다?

─? ㄹㅇ 안드레스가 범인인 거 아님?

─에이 설마

─돚거....?

─안드레스 도적인가?

확실히, 말투가 묘하긴 했다. 그러나 말을 더 걸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그녀는 ‘보상을 더 필요로 하는 건 아니겠죠? 태양께선 욕심 많은 자를 용인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렇다고 싸움을 걸기도 애매했다. 그녀가 어떤 이벤트를 벌여 줄 줄 알고 벌써 죽인단 말인가.

“…일단 갑시다.”

은우는 안드레스의 허리춤에 매달려있는 단검과 주머니를 확인했다. 그가 알기로, 독은 저 주머니에 넣는다.

* * *

시계탑에는 마탑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마법이 혐오받고 천대당하는 시대상임을 감안하면 이곳이 마법사들의 마지막 보루인지 모른다.

그러나 마법사들의 마지막 보루도, 그 탑의 주인이 이성을 잃어버림으로써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그나마 저주에 걸리지 않은 자들은 도망칠 수라도 있었지, 고리를 품고 있던 자들은 수장의 폭주에 휘말려 같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시계탑에서 출현하는 몬스터들이었다. 그들이 동물이나 몬스터를 가지고 한 실험체들도 있긴 했지만.

보스는 당연히 시계탑의 주인, 폭주한 마법사의 수장이었다. 번개를 이곳저곳에 내려찍는 것이 어지간히 귀찮은 게 아니었다. 파괴력도 엄청났고.

다만 오로스처럼 다재다능한 게 아니라, 마법 기술 단일 보스라 재미는 좀 덜했다.

─아....이번 보스 뒤숭숭하네

─쩝......

─좀 죽이기 찝찝했음 ㅇㅈ?

─그러게 왜 켄한테 선빵을 쳐서...

그렇게 수장을 죽이고 난 후, 사람들은 시원함과 언짢음을 같이 토로했다. 아무래도 돌아다니다 밝혀진 설정 때문인 듯하다.

아무렴 종교에 의해 벼랑 끝까지 내몰린 이들을 죽이는 것도 불쾌한데, 심지어 그들은 오염에 대한 치료법까지 찾고 있었다. 타락한 사제들이 인체 실험 같은 비윤리적 방식을 동원한 것과 다르게, 굉장히 깨끗한 방식으로.

설정만 보면 여러모로 죽이기 묘한 존재들인 것이다. 자아를 잃지만 않았다면 굉장히 훌륭한 사람들이었을 테니까.

“여러모로 찝찝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도덕 윤리를 여전히 갖추지 못한 은우는 다른 부분에서 시원찮음을 느꼈다.

“마법사들이라 손맛도 덜하고.”

그는 단순히 상대하기 재미없었단 점에서 개운치 못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성 터졌죠?

─ㅋㅋㅋㅋㅋㅋ이럴 줄 알았어ㅋㅋㅋ

─이번 보스들 근데 좀 다들 원거리긴 해?

시청자들이 바로 웃었다.

“다음 지역이나 바로 갑시다. 아직 범인도 안 나왔고.”

은우는 보스가 죽을 때 무너트리고 간 시계 구멍─바깥에서 봤을 때 시계가 있을 그 자리─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시계 수리를 위한 것인지 계단이 있던 덕분이다.

《그을린 해변가》

드문드문 불이 붙어 있고, 전체적으로 잿가루가 뒤덮여 있는 땅이 보였다.

─어 지팡이?

─근-본

─희망이다!

─지팡이는 못 참지

“맥의 지팡이부터 찍고 가죠.”

은우는 서둘러 지팡이에게로 다가갔다. 다만 그곳에는 선객이 있었다.

“오… 친애하는 비이-마버업-혐오자 군이 왔군. 시계탑의 마법사들이 널 쉽게 보내 주지 않았을 텐데, 용케도 왔어.”

상처를 입은 듯 옆구리를 손으로 감싸고 있는 이안이었다. 그의 옷은 이곳저곳 베여 있어 예전에 비하면 거의 걸레짝 수준이다.

은우는 눈을 껌뻑였다.

─우리 걔네들 다 죽이고 왔는데;;

─오 갓 뎀

─ㅇㄴ.....

─이안이랑 한 판 뜨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잘해 준 이에게 빅 엿을 전해 주게 생겼다.

“오, 오… 그들이 전부 죽었단 말이지……. 애초에 오래 갈 수 없는 운명인 건 알았지만, 조금은 서글픈 소식이야. 그들은 내 가족과도 같았던 존재였으니까……. 아까 들렸던 굉음은 이성을 잃은 탑주를 막는 소리였겠지?”

다행히 이안은 부고를 전해 듣고도 적의를 표하지 않았다. 단지 슬픈 유감을 표할 뿐이었다.

“이 소리가 들리고 네가 찾아왔으니, 그들을 막아 준 건 너겠지? 고마워. 이성과 지성을 찬미하는 마법사로서, 자아를 잃은 채 존재하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일은 없거든.”

그는 그리 말하며 선물을 주었다.

『위대한 마법사의 세검 1』

“탑주는 오염의 고리에 걸린 지 9년째였어……. 그래서일까? 그가 지금껏 써 온 검을 내게 쥐어 주더라고. 이것처럼 잘 만들어진 검은 없으니 그런 거겠지. 하지만… 난 이걸 역시 쓰지 못할 것 같아. 그 사람이 계속 떠오를 것 같아서. 마법사답지 않은 일이지? 키히히힛…….”

─ㅠㅠㅠㅠㅠㅠㅠ

─와 난 이안이랑 한 판 뜰 줄 알았는데....

─이래놓고 이안이 카일라니 죽인 거면 레전드

─좆간이 미안해ㅠㅠㅠ

─특) 이안도 인간이다

─의심한 게 미안해지게....

비난하거나 원망할 법한 상황인데, 되레 감사를 표하고 선물까지 주는 그의 태도에 사람들이 찬양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은우가 봐도 그는 배포가 큰 인간이었다. 보통은 저러지 못한다.

“묵혀 둘 바에야 너라도 써 줬으면 좋겠어. 그들을 어리석음에서 구해 준 답례이기도 하고…….”

이안은 그 말을 끝으로 대화를 끝냈다. 보통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나, 교단에 당한 것이 있어서 그런가. 그는 책을 덮고 지팡이를 그러쥐었다. 지팡이의 끝에서 빛이 자그맣게 흘러나왔다.

“정말 사람 좋네요. 웃음소리로 차별하던 여러분께 편견 가지면 안 된다고 뼈저리는 충고를 주는 캐릭터인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걸 이렇게?

─마 사람 차별하면 안 된다

─아 님도 했잖아

“전 차별 안 했습니다.”

은우는 적당히 사람들의 볼멘소리를 넘겼다.

“…다시 말 걸어 보겠습니다.”

그는 대화하기를 택했다. 무시할 거라 생각했으나, 생각 외로 이안은 대답을 주었다.

“오… 이건 마법사들만의 추모 방식이야. 아름답지? 교단의 기도보다는 훨씬 나아.”

그는 추가 대사를 듣고자 다시 한번 대화하기를 눌렀다. 이안이 지팡이의 빛을 거두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너덜너덜해진 그의 몸이 더 잘 보였다.

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상처가 난 형태. 익숙하다.

“이 해변가, 왜 그을렸는지 알려 줄까?”

그사이 이안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법이 이단이 되기 전, 아직은 탐탁지 않은 정도에 그쳤을 때. 항구의 사람들은 마법사들을 배척하지 않고 거주를 승인했지. 외려 먹을 것도 종종 나눠 주곤 했어. 마법사들은 그들과 교류해 주는 항구의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었고.”

─어....

─아, 좀 불안한데;;

─손수건 준비하러 감

─잠깐 성전 있엇댔잖아

“그런데… 마법이 이단으로 지목되고 성전이 벌어진 거야. 교단 녀석들은 본보기로 항구를 전부 불태웠지.”

이안은 빛이 나는 지팡이를 해안가 쪽으로 기울였다.

“아흐레 동안 불타올랐어. 열아흐레 동안 그 잿가루가 하늘을 뒤덮었고. 그리고… 지금까지 잿더미만이 남아 이 해안가를 물들이고 있지.”

─헐 쉽헐....

─아 신파극 질색인데 그래서 휴지 어딨다고?

─아흐레가 머임

─아흐레-9일 열아흐레-19일

─와......맵에 이런 뒷이야기까지?

“마법사들은 희생된 이들을 기리고자 시계탑을 재건했지만… 이젠 그것마저 무너지고 말았네.”

이안의 대사는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다시 한번 말을 걸어도 같은 대사다. 너무 긴 건 아는지, 맨 마지막 부분만 반복이었지만.

─ㅠㅠㅠ마법사들 불쌍해ㅠㅠ

─너무 슬픈데

─이래서 전쟁은...!

─그 시계탑 켄이 부쉈죠?

잔인한 듯 감성 넘치는 비수들은 마법사들의 불행에 슬퍼해 주었다. 물론 은우는 그런 것 없었다. 바로 키워드 대사를 시도했다.

“습격자, 카일라니, 독, 기습, 상처.”

정확히 어떤 단어가 키워드가 될지 모르므로, 비슷한 단어 여러 개를 한 번에 내뱉었다.

─아니 이걸 여기서?

─ㅋㅋㅋㅋ진짜 빠꾸없다

─감성 0

─이분은 ㄹㅇ 기계였던 거임....

시청자들이 갑작스러운 키워드에 당황하거나 적당히 납득하거나, 왜 하필 이 키워드를 골랐는지 눈치채는 등 갖가지 반응을 보였다.

“오, 오. 카일라니가 죽었다고? 음. 그것 참 비극적인 소식이야. 그는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사제였는데. 누가 죽였지? 오, 모른다고? 그것 참 이상한걸. 야만적인 약탈자조차도 태양교의 사제는 웬만해선 건드리지 않거든. 혹시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

은우는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건만, 이안은 알아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음… 누군지 알 것 같은데! 네가 설명한 그 상처는 어쩐지 나를 습격한 마법 혐오자와 비슷하거든! 마법 혐오자가 사제를 습격할 이유는 없지만, 그가 순혈주의까지 동반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지. 일단 카일라니의 시신부터 봐야겠어. 어쩌면 살릴 수도 있을지 몰라.”

순혈주의. 스토리 진행엔 별 쓸모 없으나, 설정 놀음에 관심 많은 자들에겐 참 향기로운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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