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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208화 (208/233)

208화

후덥지근하던 여름의 가로수가 노란 빛깔로 제 머리카락을 물들였다가,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털갈이를 준비했다.

빌리를 비롯해 국제 대회에 참가했던 팀원들이 트로피를 거머쥔 채 사진을 찍은 것은, 불어오는 찬바람을 웃으며 맞이할 수 있게 해 준 작은 이벤트다.

그렇지만 그 이상으로 은우에게 가치 있는 소식은 이것이었다.

드디어 검은기사2 VR 버전이 정발되었다.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겨울날의 일이었다.

▣ 208. 그대의 길에 희망이 있기를

정발 날짜에 근접해지자 은우는 세계 게이머들의 주목을 받았다. 비록 후발 주자이긴 해도, 당시 최단 클리어 기록보다 배는 빠르게 엔딩을 보고, 아무도 잡지 못했던 히든 보스까지 잡았던 인물이니 당연하다.

심지어 카롬은 이번에도 보스 잡긴 어려울 거라며 큰소리를 땅땅 쳐 뒀다. 여기서 말하는 ‘보스’가 전작의 배신자와 같은 공들인 보스라는 건 두말할 것도 없다.

덕분에 은우가 그것을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게임 좀 한다 하는 사람이라면 죄다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PC 버전이 VR 버전보다 발매가 늦어, VR로 스토리 및 맵을 먼저 접할 수 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테다. 보통 동시 발매를 많이 하는 걸 고려하면 카롬의 이번 행보는 여러 의미로 독특하다.

『빌리 님> 히든 보스 사냥, 켄 님이라면 해내실 거라 믿습니다. 파이팅입니다.』

『레드바 님> 행넴~~! 검기사2 하신담서요~! 켄넴이라면 할 수 있다! 아자, 아자!』

『레리 님> 소식 들었습니다. 켄 님 부담이 엄청 크실…….』

『세모도 님…….』

어쨌거나, 그렇게 기대가 쏠려서 그런가. 딱히 대회 같은 게 열리는 것도 아니건만, 아는 이들에게서 응원의 문자들이 대량 날아왔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새롭게 쌓은 인연이 인연인지라 문자는 끝을 보일 기미가 없다.

안 보낸 이들도 많지만, 레드바를 축 삼아 어찌저찌 친해진 이들은 죄다 문자를 보내 왔다.

끼리끼리 만난다고, 레드바가 절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대부분 레드바만큼이나 넉살이 좋고 성향이 선한 덕이다. 물론 은우가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것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나> 응원 감사합니_』

은우는 그 문자들을 일일이 답장했다. 물론 노력 대비 짜낸 문장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여전히 투박하고 건조하다.

하지만 다들 그가 부드럽고 고운 말과 거리가 멀다는 걸 인지한 지 오래다. 아마 이해해 줄 것이다. 아마.

이번 게임이 끝나면 합방하자고 해 볼까. 은우는 몇 달 전에 비하면 일취월장한 생각을 하며 답장을 마쳤다.

민식이와 로건이의 체력을 놀이로 충분히 빼 주고 저녁까지 해치우면 어느새 방송 시간에 가까워져 있다.

─ㅋㅋㅋ유어튜브로 실시간 보는데 아래광고로 켄 얼굴 뜸ㅋㅋㅋ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더블 켄...? 퍄퍄ㅑ;;;

─ㅗㅜㅑ

─비수들은 관대하니까 광고 팍팍 봐줄게 ^^

“놀리지 마십쇼.”

게임 발매에 맞추느라 평소보다 늦은 방송 시간. 은우는 숨을 뱉었다. 그의 앞에는 검은기사2 관련 창이 딱 떠올라 있다.

구매와 다운로드는 이미 다 마쳤으나, 아직 개시가 되지 않아 게임을 시작할 수가 없다. 시작하려면 아직도 5분은 남았다. 한참을 기다린 상태인데도 그렇다.

─넘 기대됨

─오픈 베타때 해보니까 전작이랑 분위기 많이 달라졋던데

─난 솔찍히 딴 겜인줄

─ㅇㅇ 걍 신작이던데?

“그렇습니까?”

오픈 베타가 열렸던 건 알았지만,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 정도로 그는 이 게임을 한 번에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하나도 안 찾아봤습니다. 제대로 즐기고 싶어서.”

─ㄹㅇ?

─켄 피지컬이면 나라도 안 찾아봄

─정보? 아 필요 없다고~

─캬아....저 자신감 너무 부럽다

─게임을 게임으로만 즐기는,,,,,

자랑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선물상자를 앞에 둔 아이처럼 기대하게 되고 간절해지는 건.

하물며 그는 기다리는 사람 중 유일하게 선물의 이름마저 아는 사람이었다. 당시 제작진이 보였던 자신감마저도 알았다.

이런 걸 특혜라고 부를 순 있겠냐마는, 적어도 마음이 부풀긴 좋다.

─실력파들 불러다 모션 캡쳐 떳다던데

─켄님도 가셧음?

─켄 아 일빠로 불려갔잔어~

─근데 그거 넣을 시간 있을까? 몇 달 안 됐잖아

─사람 갈면 다 되든 게 이바닥임

─제작진: 그,, 그만,,,,!

“네네. 참여했습니다. 아마 유어튜브에도 영상이 남아 있을 겁니다.”

검은기사2 이야기가 나오니, 그가 예전에 카롬사에 불려 갔던 이야기가 끌려 나왔다. 전 세계를 통틀어 최초로 엔딩을 볼 가능성이 높은 이라 그런가, 그의 방송을 시청하는 이들은 평소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채팅 창이 우르르 상승했다.

─머하셧어요?

─혹시 그때 클베 한 거 아님?

─설마사카

─ㅋㅋㅋ켄이? 베타테스트 안 해도 쪔쪄먹을 인간인데?

“특별한 건 없고, 데이터 수집을 위해 실컷 싸웠습니다.”

─이번에도 배신자 버금가는 보스 뽑혓다던데 걔한테 적용됐을 듯

─난이도 개극혐된 거 아니냐

─켄 데이터 적용한 보스 깨지 말라 만든게 학계의 정설

─보스 수듄;;;

─아니 어려운 게임을 만들랬지 못 깨는 게임을 만들어오면 어떡해욧!

─보스 누군지 앎?

“배신자 버금가는 보스가 뽑혔다는 말은 저도 들었는데… 어떤 보스에 적용됐는진 저도 모릅니다. 클로즈 베타든 오픈 베타든 둘 다 안 해 봤으니까요. 개인적인 바람으론 전체에 다 적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보스 전체에 적용되면 우린 어케 깨라고요;;

─켄 1n~2n이랑 싸워야한다? 루삥뽕

─켄 짭이니까 그나마 나을 듯

─1편에서 켄짭 아닌 놈들한테도 뒤졋는데 켄짭에겐 비빌 수 있다 생각함?

─앗, 아앗,,,,,,

“그렇습니까.”

은우는 시청자들의 불만에 귀 뒤만 살짝 긁었다. 그는 1편보다 난이도가 높아져 있기를 바라는데.

─배신자 버금가는 보스를 스토리에 넣어놨겠음?

─개발 시간 생각하면 애초에 무리인 일정이지

─유명 스트리머들 몇명 더 데이터 수집에 참가했단 건 다들 생각도 안 하누;;

─켄 두고 걔네를 반영하겠음?

─아 ㅇㅋㅇㅋ

안다, 그도 안다. 모든 보스에게 그의 데이터를 적용했다면 개발 기간은 더 늘었을 거다. 난이도도 너무 올라갔을 테고.

그러니 아마 케네스라 이름 붙었을 그 보스에게만 그의 데이터가 사용되었을 거다. 수십 마리의 보스를 고치는 것보단 한 명의 보스에 집중하는 게 더 쉬웠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아쉬울 것 같아서요.”

심지어 배신자만 해도 그 빼고 다 못 잡았다. 그런 걸 스토리에 넣어 버리면 사람들이 엔딩을 어떻게 보겠는가. 한 사람만 엔딩을 볼 수 있는 게임은 게임이 아니다.

그러니 한 보스에게만 적용됐을 거라는 건 참 당연한 일인데…….

“히든 보스들 기대해 봅니다.”

─ㅇㅈ

─하,,,벌써부터 가슴이 웅장해진다,,,,,

─켄vs켄? 이건 전설이다....

─켄 데이터를 적용한 보스 싸워보고 싶습니다wwww

─네 다음 1초컷

그래도 가능하면 좀 더 다양하게 나와 주었으면 한다. 기다린 보람이 있게. 그가 버린 기대감을 다시 주워 든 가치가 있도록.

“아, 지금 생각났는데, 제 방송은 스토리 위주가 아닌 모든 보스 섬멸로 할 예정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근빳다죠ㅋㅋㅋㅋㅋㅋㅋㅋ

─벌써부터 심장이 뛴다

“엔딩을 보기 위해 달리는 게 아니라서 진도가 더딜 수 있습니다. 시청에 참고 바랍니다.”

─ㅋㅋㅋㅋ켄은 엔딩 안 노리고 달려도 제일 빠를 듯

─ㄹㅇㅍㅌ ㅂㅂㅂㄱ

─하, 오늘은 치킨이다

─며칠 동안 치킨집 미어터질 듯

─나 치킨집 알바생인데 벌써 치킨 50마리 넘게 주문왔다;;

사람들이 와글와글 토해 내는 말을, 은우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시청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그의 경고를 들었음에도 나가는 이들이 거의 없다.

그리고, 카운트다운이 드디어 1분 안 수준으로 접어들었다.

00:06

00:05

00:04…….

“이제 시작합니다.”

많은 게이머가 심장을 삼키는 그때, 은우는 차분한 손길로 게임을 준비했다. ‘00:00’이라는 숫자가 완성되는 순간, 세계는 무너지고 다시금 구축된다.

잿가루가, 혹은 행성의 살점이 희미한 빛과 함께 나선으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뜻이 없되 분명 노래일 여성의 목소리가 그 속으로 희미하게 섞여 든다.

〚투쟁의 역사 끝에 하나의 시대가 열리고…….〛

장을 여는 건 검은기사답지 않은 밝은 톤의 영상이었다. 귀가 뾰족한 인간들이 괴물들에 맞서 싸우는 광경이 슬로모션으로 슥 지나간다.

이후 디졸브 기법으로 대신 떠오르는 것은 거목을 뒤에 두고 환호하는 존재들이었다.

〚승리한 자들은 거목의 가호 아래 평화를 이어 가니…….〛

그러나 그들의 환호가 무색하게 거목은 잿빛으로 퇴색되어 갔다. 그 나뭇잎은 바닥으로 추락하고, 가지는 시들어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승리는 영원하지 않기에, 투쟁은 다시 시작되리라.〛

귀가 뾰족한 인간들 사이에서 목에 검은 줄이 생긴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너무 선명해서, 마치 초커를 찬 것처럼 보이는 검은 줄이었다.

일부는 그 줄이 아래로 점차 내려가, 상반신 전체가 검어진 자도 있었다.

〚그대의 목에 걸린 검은 고리는 투쟁을 알리는 저주의 증거.〛

고리가 생긴 자 중 일부는 잎사귀를 피운 채 주변을 공격했다. 그에 대해 기존 인간들이 내린 판결은 간단했다.

그들은 검은 고리가 생긴 자들을 모조리 잡아다 열사의 사막으로 보냈다. 내뱉는 숨결마저 바짝 말라 버릴 정도로 뜨거운 땅은, 절규하는 이들을 담은 채 고요한 위용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니… 다시 무기를 들라.〛

그리고 카메라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창밖으로 흘러드는 빛은 낮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밤의 것으로 바뀐다.

와중에 점차 빠르게 움직이는 시점은, 수용소의 사암 복도와 계단을 타고 올라가 기어코 한 감옥을 비춘다.

한 사람만을 가두고 있는, 첨탑 최상층의 감옥이었다.

〚시대는 그대의 손에 달려 있으리…….〛

구구구-

전체적으로 퇴색된 빛깔의 세계에서, 새하얀 매가 조그만 창가로 날아들었다.

그런 매를 본 이가 목각 인형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키니. 창가에 앉았던 새가 날개를 푸득거렸다. 그 좁은 창가 사이를 통과해 감금된 이의 손으로 내려앉는 것이다.

딸랑.

매 다리에 묶인 열쇠는 열기에 살짝 일그러지고 녹도 슬어 있다.

그 시점에서 영상이 새까매지며 종료를 선언했다.

“아.”

언제나 그렇듯, 까맸던 시야는 곧장 돌아왔다.

은우는 눈을 껌뻑였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영상 속에서 봤던 감옥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다만 아까와 다른 것은, 바라보는 시점이었다.

그는 이 감옥에 감금된 이가 되어 있었다.

《얼어 불타는 감옥》

『첨탑 감옥 열쇠 1』

차례로 그가 있는 장소와 얻은 아이템 창이 떠올랐다. 두웅, 하고 미묘한 북소리가 울리는 것 제법 그리운 소리다.

“오래간만입니다, 검은기사 특유의 퇴색된 느낌은.”

─ㅇㅈ

─1편보다 더 잿빛인데?

─하,,,,전설의 시작

─진짜 그래픽 ㅈㄴ 발전했다

─그래픽 아닌듯 계속 성장하는 게 ㄹㅈㄷ

은우는 통통 튀며 몸을 풀었다. 일단 검은기사1 때와 크게 달라지진 않은 듯하다. 그간 온갖 게임을 해 온 까닭에 기억이 조금 아리송하긴 하지만.

“오픈 베타에선 이 파트를 안 풀었나 봅니다.”

─ㅇㅇ

─여기 아녓음

─아 감옥방 나갈 때까지 숨참음 흡!

─너무 좋다.

─시청자 수 실화냐?

─ㅋㅋㅋ외국 애들 다 빨려온 거 봐

“그럼 기본적으로 맨땅에 헤딩한다 여겨야겠네요. 마음에 듭니다. 바로 갈까요.”

게임이야 으레 그 장소를 나가는 것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은우는 얻은 열쇠로 감옥 문을 열고 통로를 빠져나갔다.

1편에서도 감옥에서 시작했던지라 흡사 그리움마저 들었다.

“영상 보니까 목에 고리가 걸리면 수용소에 박아 버리는 것 같던데, 1편 주인공도 그렇고, 이 친구도 기구한 팔자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

─ㅇㅈ 왜 다 감옥에서 시작이냐

“그보다 영상만 보면 스토리는 연결되는 느낌이 아니던데……. 아무래도 게임사에서 채택한 엔딩은 왕을 죽이는 게 아닌가 봅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요.”

─하,,,,,,진짜 1편 엔딩....

─2편 앞두고 1편 정주행 안한 흑우들 없제?

─안 그래도 켄이 올린 1편 시리즈 재생수 확 뛰었던데ㅋㅋㅋ

─제일 짧아서 그럼ㅋㅋㅋ정주행하기 좋아ㅋㅋㅋ

은우는 그 당시 왕을 죽임으로써 인류의 멸망을 막았다. 그러나 그 일로 진정 인류가 살아남았다면, 지금 그의 귀가 뾰족할 리 없다.

어떤 엔딩과 이어지건, 일단 1편의 인류는 멸망하고 신인류가 세상을 차지한 게 분명하다. 보아하니 그 인류 또한 멸망하게 생긴 모양이다마는.

“벽에 시스템 설명을 적어 놨습니다. 이번에는 설명을 놓치진 않겠네요.”

1편에서 설명 비석을 놓쳤다가 시청자들에게 한소리를 얼마나 들었는지. 은우는 튕겨 내기, 뒤 잡기 등의 설명을 읽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콘솔처럼 버튼 눌러야 행동을 하는 식이 아니기에, 설명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다.

“쟤넨 어떻게 나온 건지 모르겠습니다.”

계단을 내려와 복도에 진입하니, 복도를 배회하는 인간들이 보였다. 죄수복을 차려입고 있으나, 그것이 모든 피부를 가리진 못했으니. 드러난 살갗은 까맣기 그지없다.

아메리카 흑인 하면 떠올리는 고동색 빛깔 피부도 아니요, 흑진주 같은 아프리카 흑인들의 피부는 더더욱 아니다.

그건, 말하자면 두꺼운 까만색 타이츠를 겹겹이 껴입은 것에 가까웠다. 광택이 거의 없이 검다.

─카롬 웬일이냐?

─이번 몬스터 디자인 ㄱㅊ은듯?

─안도하지 마라! 상대는 카롬이다!

─후,,,,다행이다ㅠ

시청자들의 반응이 그러하듯이, 이것만 보면 1편에 비해 디자인이 제법 볼만해졌다 싶다. 이질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혐오스럽진 않지 않나.

그러나 그것은 영상에서 보였던 단서를 무시한 추측이었다.

녀석들은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우드득 소리를 내며 기형적으로 온몸을 꺾었다. 그것만으로도 기괴하기 짝이 없건만, 이어진 건 피부를 뚫고 나온 무언가가 순식간에 자라나는 광경이다.

─으아ㅏㅏㅏㅏㅏ

─개징그럽

─여윽시 이래야 카롬이지!

─어우 소리;;

겨우살이 같은 것들은 옷을 포함해 그 몸 전체를 뒤덮었다. 뿌리는 마치 혈관처럼 피부를 얽고, 중간중간 뻗은 가지는 마치 뿔처럼 보였으며, 수북이 자라난 잎사귀는 여간 불길해 보이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뿌리 일부는 나무껍질처럼 몸을 뒤덮었는데, 그게 꼭 갑주 같았다. 나무 갑주 사이로 겨우 보이는 눈은 자위가 노란색에 검은 동공이 3개다.

─이번 디자인도 ㅆㅌㅊ다...

─아니 ㅅㅂ 곰보겜 하냐

─특) 검기사는 원래 이런 겜이다

─이 와중에 아무도 안 튕겨나감ㅋㅋ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1편의 좀비나 미라 같은 시체들이냐, 식물과 결합인 인간들이냐. 사람들은 역시 카롬이라며 치를 떨었다. 태평한 건 오직 은우뿐이었다.

“잡몹이 이런데, 보스몹은 어떻겠습니까.”

그는 다리를 들어 적을 돌려 찼다. 무기가 따로 주어지지 않는 설정으로 시작한 덕에, 손과 발이 그의 유일한 무기다.

콰직!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말이다.

한겨울 측백나무의 가지와 잎사귀 뭉치를 발로 찬 듯한 감각이 그의 촉각에 닿았다. 가지와 잎이 구별되지 않은 채로 수북하게 자란 그것을 치거든 사방에서 포위하듯 피부를 감싸 안는 기분이 드는데, 딱 그런 느낌이었다.

“이번엔 동족이 적인 모양입니다. 아까 영상도 그렇고, 검은 고리가 온몸을 덮으면 저렇게 식물이 자라나 보네요.”

─본인 일인칭인데 촉감 개극혐이다

─삼인칭 코인 탑승각

─쟤네는 뭐라 불러야하냐

─고인물들 이제 혈시에서 귀쟁이들로 바꿔야할 판

공식 명칭은 아직 나오지 않아서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구매 페이지의, 게임에 대한 설명에서도 ‘더욱 악랄하고 위험해진 적들과 환경’이라고만 했고.

개발자의 파랑새에서 ‘Contaminated’란 단어가 나오긴 했는데… 정식 번역은 아직이다.

그렇지만 그게 중요한가?

은우는 식물 인간의 온몸을 두들겨 팼다. 그 감촉이 좋은 편은 아니나, 체력 바가 깎인다면 그걸로 좋다.

퍼억!

체력이 0으로 변한 적이 벽에 등을 대었다. 그런 상태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몸은 녀석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과 진배없다.

『넥타르 20』

노란빛 가루가 그에게로 스며들었다. 은우는 그 창을 껐다.

“혈석이 아니네.”

─진짜 다른 작품 아니냐?

─이름만 검은기사 가져온 거 아님?

─너무 생뚱맞은데;;

─대미지 계산은 어때요?

“대미지 계산 방식은 1편이랑 같습니다. 머리 친다고 특별히 더 들어가지 않는 걸 보면.”

넥타르도 이름만 달라졌을 뿐, 화폐로 쓰일 테다. 아직까지 달라진 시스템은 없어 보인다.

“계속 가죠.”

은우는 감각에 완전히 길들여진 몸을 움직였다. 일직선 통로와 계단을 비롯해 아직 나아갈 길이 남았다.

크에에엑!

중간중간 한 마리씩 있는 괴인들이 덤벼들었다. 여럿이서 덤비지 않은 건, 튜토리얼 구간이랍시고 제작진이 나름 배려한 것일 테다.

“전작보다 움직임이 훨씬 나아졌네요.”

─움직임이 나아졌네요=더 어려워졌네요

─다른 집들 다 곡소리 내는데 켄님만 좋아함ㅋㅋㅋ

─마 인간이랑 구울왕이랑 비교하지 말라 이거야!

─근데 진짜 반응 개잘하는데?

─뒤잡기 이제 못할듯.....

어지간히 조용히 걷는 게 아니면 쉽게 눈치채는 것도 그렇다. 은우는 느긋한 심정으로 적을 처치했다. 찔끔찔끔 떨어지는 넥타르는 이제 겨우 100이다.

“이러면 보스도 기대가 되는데.”

정확히 이르면, 그를 토대로 만들어진 보스가 기대된다. 카롬사는 구설수에 시달리게 하기 싫다며 조금의 정보도 주지 않았지만.

─앗 맥의 지팡이

─‘희망’

─근-본

─이 게임의 시작이자 끝

1편과 달리 특정 NPC와 만나기도 전에 맥의 지팡이가 먼저 나왔다. 바닥에는 『맥의 지팡이: 회복』이라는 짤막한 글자가 적혀 있다.

단순히 회복뿐 아니라 저장 및 부활, 아이템 충전 지점까지 포함한다는 정보는 죄다 스킵이다. 심지어 이곳에서 쉬면 적들도 리젠되는데.

1편에서 지독하게 시달린 고인물이라면 모를까, 이번 편부터 새로 유입된 일급수들은 제법 치를 떨 것이다.

“하여간 불친절합니다.”

─ㅋㅋㅇㅈ

─최소한 리젠된다고는 적어줘ㅠ

─리젠 되는 거 알면 회복 안하게?

─그래도 마음의 준비라는게....

「‘사탄’ 님이 ‘1,000원’ 투척!

오늘도 사탄이 한 수 배워갑니다」

은우는 목덜미를 쓸다가, 불이 꺼진 지팡이에 손을 대었다. 나뭇결이 살아 있는 지팡이의 끝, 붉은 구슬이 빛을 머금었다.

『DEPRIVE ROOT OF LIFE』

은우는 영어를 물끄러미 보았다. 게임사에서 번역을 제공해 주지 않으면 모른다. 거듭 말하지만, 그는 지식이 그다지 많은 사람이 아니다.

“예전엔 맥의 지팡이를 활성화해도 메시지가 따로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추가됐네요.”

─삶의 근원을 빼앗다인가?

─뿌리로부터 생명을 빼앗다?

─생명의 근원을 박탈하다?

은우는 시청자들의 해석을 은근히 뇌에 담아 두며 지팡이를 한 번 더 만졌다. 결계가 생겨나며 세상을 흐리게 만드는 건 역시나 1편이랑 같다.

“계속 갑시다.”

그는 찢어지고 해진 죄수복만을 입은 채 앞으로 계속 걸었다. 함정과 괴인이 중간중간 기다리는 통로가 그를 집어삼켰다.

* * *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내려온 감옥소의 작은 방. 간수들이 쉴 법한 그곳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역시나 뾰족한 귀를 가지고 있다.

“오염된 자들(Contaminated)은 아무리 느려도 10년이면 이성을 잃는다 하니까요.”

주인공을 기다렸던 걸까. 일국의 왕녀 따위를 연상시키는 백금발의 여성은 불꽃을 쬐고 있었다.

다만 불꽃 사이에는 형태가 사뭇 달라진 맥의 지팡이가 꽂혀 있다. 지팡이를 휘감은 채 타오르는 불꽃은 비록 그것에 그을림 하나 남기지 못했지만 말이다.

“구백구십구 년 만에 나온 바깥은 어떤가요, 최초의 오염된 자?”

그녀는 마지막 물음에서야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뺨에는 화톳불이 만든 작은 노을이 있다.

특별히 선택지 같은 게 뜨지 않았으므로, 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웃음은 설핏 흘렸다. 10년이면 이성을 잃는데, 무려 999년이라.

─?

─시발 놀리나

─뭐? 999년?

─머임? 머임??

“귀도 그렇고, 근 천 년을 사는 것도 그렇고. 일반적인 인간과는 거리감이 큽니다. 엘프쯤 되려나.”

─아 귀쟁이 에반데

─인간의 대영웅이었던 나,,,, 이번엔 엘프 영웅?!

─저 짭 새끼 쳐내!

─(읍읍)

은우는 그의 귀와 목덜미를 매만졌다. 뾰족한 귀와 특별한 감촉은 없지만, 검게 물들었을 목은 그의 비인간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거기에 최초의 오염된 자라……. 사정이 궁금해지네요.”

그다지 기분 좋진 않다. 게임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는 여성에게로 다가갔다. 일정 거리 안으로 접어들자 여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최초의 오염된 자, 스스로를 이 땅에 가두실 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저주는 이제부터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딱히 타인에 의해 가둬진 건 아닌 모양입니다.”

“그 말씀대로, 세계수들은 전부 오염되었습니다. 저주를 피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그 무엇도 오염을 멈출 수 없더군요.”

그녀는 불꽃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불꽃은 그녀의 손을 태우는 대신 그녀의 손 위로 올라갔다.

노랗고 붉게 빛나는 알갱이들이 모인 게, 꼭 불꽃보단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는 듯하다.

“최초의 오염된 자, 따스한 비정에서 피어난 가목, 오염된 구도자시여. 부디 세계에 구원을, 멈춰 버린 생사의 순환에 새로운 숨을.”

그녀는 그 불꽃의 낱알들을 손에 담은 채 무릎을 꿇었다.

“망가진 거목들을 불태우고 그 강인한 생명을 거두어 새로운 세계수가 되어 주십시오. 다른, 많은 세계수의 후보가 그러하듯.”

그것은 아마 이번 시리즈의 스토리를 관통하는 문장일 것이다. 은우의 손이 절로 움직이며 불꽃을 받아들였다.

“세계수의 열매, 암브로시아. 당신의 여정을 도울 것입니다.”

『암브로시아 5』

은우는 불꽃이 스며든 손바닥을 쥐었다가 폈다. 열매 같이 생기진 않았으니, 아마 개념적으로 열매라 부르는 게 아닌가 싶다.

“이것 또한 가져가십시오. 필요하실 것입니다.”

『감옥 남문 열쇠 1』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아마 감옥 탈출에 필요한 아이템이 아닌가 싶다. 은우는 그 아이템까지 갈무리했다.

“아이템 설명으로 보아 회복의 룬이 암브로시아로 바뀐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바꼇냐

─걍 신작 내놓고 검기사라 붙인 느낌

─내가 바란 검기사2는 이런게 아니엇어!

─쓰읍

“명칭이 너무 달라져서 얼떨떨하긴 하네요.”

솔직히 시스템만 같고 세계관은 다른 게임을 하는 기분이다. 그렇진 않겠지만.

“하아.”

그사이, 여성이 하얀 호흡을 내뱉었다. 불이 꺼져서 그런가. 그녀는 아까보다 힘들어 보였다. 하기야 사막의 밤은 그 낮과 비할 수 없이 춥다. 저런 옷으로는 버티기 힘들 것이다.

“부디 그대의 길에 희망이 있기를…….”

그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었다. 물론 가까이 다가가면 대화하기 창이 떠올랐다.

“부디 그대의 길에 희망이 있기를…….”

혹시나 해서 여성에게 다시 말을 걸어 봤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토해 내지 않았다. 단지 축복만이 반복될 뿐이었다.

─머임 레벨업 설명 왜 안 함

─? 레벨업 아직 안 되는 거 실화?

─모애오 레벨업 하게 해주새오

“글쎄요.”

전편에선 이 타이밍에 레벨 업의 매개체인 탑주를 만났던가. 그래서 그녀가 탑주와 비슷한 역할일 거라 예상하는 것일 뿐, 실제론 아닐지도 모른다.

“일단 키워드 대화라도 시도해 볼까요.”

가능성을 확인해 보기 위해, 그는 키워드로 추가 대사 듣기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녀 자신에 대한 정보 몇 가지가 더 나왔을 뿐, 레벨 업이라든가 그런 것은 없었다.

“쓸 만한 정보가 없는 걸로 보아, 저를 풀어 주는 것만 이분의 역할인가 봅니다. 마침 목에 고리도 있고.”

─어 그러네

─오염된 자였음?

─와 저걸 어케 봣누

드레스 위로 덧입은 로브와 어두운 방이 숨겨 둔 그녀의 목에는, 은우와 마찬가지로 오염의 고리가 걸려 있다. 이 감옥에 온 것도 저 고리 때문일지 모른다.

은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 방을 나섰다. 그가 들어온 문 외에 하나 더 있는 문이다.

차르륵, 철컹!

─?

─?

문을 나가자 꽤 넓은 홀이 보였다. 동시에 그가 빠져나온 문은 철창이 내려오며 막혔다. 즉, 그는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다.

─아 쓰읍

─이거 좀 선 넘었는데

─벌써 보스라고??

─안이;;;;

─미쳣나봐 진짜 보스임?

“…옵니다.”

은우는 여성을 만나기 전에 주웠던, 부러진 검을 들었다.

검신이 부러져 단도 수준으로 짧은 검은 그의 손가락에 걸려 뱅글뱅글 돌아가니.

“채찍이 없어서 아쉽네요.”

쿵!

2층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한쪽 눈엔 악취미 한 꽃이 피어나 있고, 팔 하나가 기괴하게 커다란, 조금 크기가 큰 오염된 자였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

《추락한 간수》란 글자와 함께 체력 바가 거대한 허공에 떠올랐다. 상당히 그리운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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