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땅따먹기, 배틀 로얄의 스플랫이 잠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밝은 건 벌칙 방송의 아침이었다.
▣ 197. 제가 팬이라
은우는 헬멧을 쓰고 드론 카메라를 띄웠다. 원래는 다이아박스 사옥으로 가려 했는데, 민식이랑 로건이 너무 애달프게 그를 올려다봐서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큰마음 먹고 딱 주방까지 공개하기로 했다.
─켄하~
─일찍 키셧네요
─알림뜨자마자 들왓는데 300명 실화냐
─하여간 비수들이란ㅉㅉ
─안녕하세요!
예정 시간보다 일찍 방송을 켜 두니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은우는 그들을 굳이 반겨 주지 않았다. 일단 준비가 우선이었다.
월!
은우를 따라다니는 드론 카메라에 민식이랑 로건이 흥분해서 졸졸 따라다녔다. 강아지 발바닥이 바닥 위를 노니는 소리가 토돗토돗 이어졌다. 카펫을 깔지 않아 소리가 더욱 선명했다.
─? 강아지 키움?
─헐 머야 멈머ㅠ
─입양하셧다더니ㅠㅠ
─보여주세요ㅠㅠ
─헐 꼬리 보임
─민식아아아아아
“들어오면 안 돼.”
주방이 넓긴 한데, 중대형견 두 마리와 197짜리 인간이 함께 있을 때마저 넓은 수준은 아니다. 꽉 찬다기보단 동선이 망가진다.
은우는 그들을 다정하게 몰아냈다. 애초에 그가 주방에서 나가면 따라 나왔으므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앉아.”
컹!
반대로 그가 주방에 들어오면 따라들어왔다. 슬슬 방송 시작 시간이므로, 은우는 급한 대로 두 강아지를 주방 앞에 앉혀 두었다. 인질은 간식이다.
“착하다.”
그는 두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곤 다시 일어섰다. 동시에 그의 머리는 펜스의 필요성을 재고 있다.
대형견이라서 넘고자 하면 잘 넘겠지만, 그건 뭐, 어쩔 수 없고.
─민식아ㅠㅠ로건아아ㅠㅠㅠ
─안녕하세요!
─켄하~
─앗싸 생방!
“안녕하세요. 다들 오셨습니까.”
─소매 걷은 셔츠 ㅗㅜㅑ;;
─오우쉣 팔뚝 개쩐다
─근육라인 미쳣,,,,
─퍄퍄ㅑㅑ;; 힘줄;;
─민식이랑 로건이도 잇어요?
“예. 민식이랑 로건이 있습니다.”
은우는 잠깐 카메라를 돌려 바닥에 앉아 있는 두 강아지를 비췄다. 덩치가 크고 근육질이다보니 귀여운 느낌은 적지만, 중대형견의 늠름함과 의젓함은 소형견이 따라하기 힘들다. 시청자들이 좋아라 했다.
“가만히 있어.”
그는 손 먼저 씻은 후 그들에게 개껌을 물려 주었다. 두 강아지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형이 빛의 속도로 부쳐 준 선물이다.
일이 밀려서 못 놀러 오는 게 천추의 한이라기에 사진이나 찍어 보내 줬다. 나중에 개껌 아그작 아그작 씹는 영상을 보내 줄 예정이다.
─커어 남자는 역시 팔뚝이지
─옷 은근 잘 입는듯?
─ㄴㄴ 켄 맨날 똑같게 입어
─그지 같이 입는 것보단 낫지
“안녕하세요. 아, 옷은 친구가 골라 줬습니다.”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있으면 뭘 입어도 이상하단 희수의 지적에 옷차림은 결국 셔츠다. 그 애인이 너무 단조롭다며 베스트까지 추가하긴 했지만, 덕분에 게임이랑 다를 게 없다.
은우는 목덜미 근처를 살살 긁다가 일단 앞치마부터 둘렀다. 허리부터 시작하는, 치마처럼 두르기만 하면 되는 비스트로 에이프런(검정)이다.
“오늘 방송은… 방제만 보셔도 아시겠지만, 벌칙 방송입니다.”
─쿡방~~!!
─벌칙 방송? 왜여?
─웬 벌칙?
─크....드뎌 쿡방!
모든 사람이 매일매일 생방을 챙겨 보는 건 아닌지라,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종종 나왔다. 은우는 그런 그들에게도 충분한 설명을 전달했다.
“엊그제 내기 방송에서 져서… 벌칙으로 한 끼 식사를 바치기로 했습니다.”
─대체 뭐했길래 진 거임
─켄넴은 레드바랑만 붙으면 항상 지시더라
─내기방송 ㄹㅇ 레전드ㅋㅋㅋ
─개꿀잼이엇는데ㅋㅋㅋ
“바칠 음식은 레리 님과 탄산 님이 사전에 요청해 주신 ‘집밥’입니다. 갈비찜을 두 분 다 좋아하신다길래, 그걸 메인으로 잡고 갖가지 밑반찬을 더하기로 했습니다.”
─갈비찜 싫어하긴 어렵지...
─헉 갈비찌뮤ㅠㅠ
─벌써부터 침고인다 쓰읍
─켄님 요리도 하세요?
은우는 미리 깔아 둔 재료들을 먼저 화면에 비춰 주었다. 핏물을 뺀 고기와 갖가지 재료다.
이 때문에 재료비라도 드리겠다던 레 남매와 한참 실랑이했다. 탄산이 말없이 거금을 쏴 버리는 바람에 유야무야됐지만.
“소갈비인데, 미리 핏물 빼 놨습니다.”
그는 우유에탄산이 준 돈으로 수북이 산 고기를 톡톡 쳤다. 2시간 넘게 핏물을 빼 놓은지라 그리 탁하지 않다─중간에 물을 교체했다─. 고작해 봐야 기름이 조금 뜬 정도다.
“참고로 저는 보통 한 시간 정도 빼 두는 편입니다. 이번엔 잡내 잡으려고 2시간 정도 뺐지만.”
은우는 미리 봐 둔 쿡방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냥 요리하다가 이렇게 말하면서 하려니 조금 어색하다.
가슴팍을 찌를 때 칼날을 눕혀 찔러야 갈비뼈 사이를 잘 파고드는 것처럼, 이 정도 요리는 그에게 너무 당연한 사실이 돼 버린 탓이다.
─양 개많아;;
─얼마나 손이 큰 거예요...
─와 저걸 다한다고?
─배터져 죽을 듯ㄷㄷ
“…양이 많습니까? 제가 많이 먹는 편이라고 해도 보통 메인 반찬은 이 정도 먹지 않나요?”
그의 기준으론 두 끼. 다른 사람이 그보다 적게 먹는 걸 감안해서라도 나름 과식했다 수준의 분량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뭐, 형만큼 적게 먹는 건가? 형이란 개인이 유난히 적게 먹는 게 아니라 그게 기본인 건가, 설마?
은우의 몸이 동작을 정지했다. 비록 흔들리는 동공은 보이지 않았으나, 몸이 뻣뻣해진 시점에서 당황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다.
─절대 아닌데요ㅋㅋㅋㅋㅋㅋㅋ
─진짜 덩치값 한다...
─저렇게 먹는데 살 안찐다고? 운동을 얼마나 하는 거임;;
─못 먹어요ㅋㅋㅋ
“그럴 리가 없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문화충격ㅋㅋㅋ
은우는 가벼운 샌드위치의 정의를 배웠던 날만큼의 충격을 받았다.
그런 와중에도 월계수 잎과 파, 생강을 넣은 물에 고기를 넣고 십 분 정도 데치는 건 몸에 각인된 반응과 비슷하다.
고기가 살살 뽀얗게 변했다. 명확한 색을 따지자면 회갈색이 아닌가 싶지마는, 고기니까 뽀얀 것이다.
“핏물을 뺀 고기는 데친 후 한 번 더 씻어야 합니다. 불순물이 나와서. 이렇게요.”
─오...
─꿀팁 ㄳ
─요리 좀 해본 사람들은 다 알지
─켄 님은 왤케 요리 잘하세요?
─배우셧음?
“아, 어렸을 때부터 혼자 해 먹어서 그렇습니다. 맛있는 밥이 많은데 대충 때우기도 싫어서.”
거창하게 차리긴 귀찮기도 하고, 너무 눈치 보여서 대부분 한 그릇 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음식을 택하긴 했다. 그러나 그게 맛있는 걸 포기하겠단 건 아니다.
은우는 음식을 하나만 할지언정 대충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고기를 깨끗이 씻은 후, 데치는 동안 만들어 둔 양념을 꺼내 들었다. 간장에 간 배, 후추, 설탕을 섞은 양념이다.
─배 좋지
─난 사과 갈아넣는데
─배는 왜 넣음?
“배는… 그냥? 설탕 줄이려고 넣습니다.”
왜 넣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요리책 보면서 하다가 배 갈아 넣으면 좋다기에 따라 했을 뿐이다. 그게 더 맛있기도 했고.
─왤케 대충이야ㅋㅋㅋ
─형 솔직히 말해봐 컨셉이지?
“대충이라기보단 제가 전문적인 요리사는 아니니까요.”
그는 압력솥 속 양념 물에 고기를 퐁당퐁당 담았다. 갈색 물에 담긴 고기는 이제 삶아지면서 양념을 잔뜩 머금을 것이다. 그러면 번지르르한 갈색이 돌겠지.
푹 익어 야들야들한 살코기에 짭조름한 간과 특유의 향이 가미될 거란 얘기다.
은우는 한쪽 볼을 혀로 꾹 누르며 뚜껑을 닫았다. 이제 고기가 익을 동안 무와 당근 등을 깎을 차례다.
“채소랑 고기를 한 번에 끓이면 애들이 물러져서… 중간에 넣는 편입니다.”
무와 당근을 토막토막 썬 다음 가장자리를 둥그렇게 깎으면 꼭 색 있는 떡처럼 보인다.
은우는 추가로 밤과 통마늘, 파, 칼집 낸 표고버섯까지 준비했다. 채소는 많을수록 좋다.
“모서리는 안 깎아도 되고 깎아도 됩니다. 대신 깎으면 국물이 덜 탁해집니다. 제가 먹을 땐 귀찮아서 안 깎는 편입니다만.”
─ㅋㅋ귀찮음은 킹정이지
─ㅇㅈㅋㅋㅋㅋ나도 귀찮아서 안 깎음
─갈비찜은 다 맛있어~
“어차피 입에 들어가면 뭐…….”
─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국물이 탁한 것도, 탁하지 않은 것도 좋아한다. 간장 국물을 떠서 뽀얀 흰쌀밥 위에 뿌린 후, 뼈에서 분리해 낸 도톰한 살점을 올리면 어느 쪽이든 맛있기에.
은우는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소갈비 따로 더 사 두길 잘했다.
“사실 감자 넣는 걸 좋아하는데, 그러면 국물이 탁해져서 이번엔 안 넣겠습니다.”
감자가 간장 국물을 머금었을 때 얼마나 맛있는지,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젓가락으로 반 딱 잘랐을 때 보이는 포슬포슬한 단면과 그 위에 퍼 나른 국물 한 숟갈.
입에 바로 넣으면 뜨거워서 호흡만 연신 하게 되는데, 그런 순간에도 필사적으로 이를 이용해 으깨면 탄수화물 특유의 맛이 찐하게 난다.
그 맛이 어찌나 좋은지, 고기를 얹지 않은 채 밥에 으깬 감자와 국물만 넣고 비벼 먹은 적도 부지기수였다.
“…생각하니까 먹고 싶네요. 제가 해 먹을 땐 넣어 먹겠습니다.”
─ㅋㅋㅋㅋㅋ아 우리도 줘요
─벌칙 때문에 못 먹는 거 아님?
─왜 먹어 님 먹음 안 되지
─벌칙은 어디 갓나요
“벌칙 끝나고 해 먹는 건 괜찮잖습니까.”
─저걸 또한다고?
─정성 인정합니다...
─그치만 갈비찜은 할만하잖아
─맞아....
─갈비찜 맛있다.
해 먹을 능력이 없거나, 해 먹을 여건이 안 되는 자들이 울부짖었다. 은우 알 바는 아니었다.
“고기가 익었나 간 좀 보겠습니다.”
─안 먹는다매
─꼼작마라 어디서 밑장빼기냐!
─님 먹음 안 되지
─아까부터 슬쩍슬쩍 먹는다?
“벌칙이래도 간은 봐야 하지 않습니까. 우선순위가 레리 님과 탄산 님께 맛있는 밥을 대접해 드리는 건데.”
─아 이걸 이렇게 빠져나가네
─사만 명의 비수들이 눈치켜뜨고 보고 잇다
─와 요리하는 걸 무슨 사만명이나 보냐ㅋㅋ
─외국인들 지금 갈비찜 보고 자와자와하는 거 봐라
─한국 갈비찜이 좀 기똥차지
그는 적당한 시간이 흐른 후, 압력솥을 잠깐 개봉했다. 간을 봐야지 넣을 채소 양을 분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 굴 까 얼 굴 까
─얼공???
─얼굴 드뎌 공개하나요
─어서 까요 현기증 날 것 같애
─드뎌 얼공!!
“뭘 깝니까.”
당연하지만 카메라를 돌린 채 헬멧을 벗었다. 은우는 국자로 작은 접시에 국물을 던 후, 호롭 마셔 보았다. 짭조름한 게 딱 좋게 됐다. 맛있다.
월!
그때, 밥 냄새 맡고 두 강아지가 주방에 침범했다. 개껌까지 줬건만, 갈비찜 냄새는 못 참나 보다.
돌진한 민식이가 그의 등과 옆구리에 매달렸다. 피하려다가 애 다칠까 봐 그냥 받아 들었다. 반사적으로 균형을 잡은 상태라 몸이 흔들리진 않았다.
그가 미처 예상치 못한 문제는 그다음이었지만.
컹!
─으잉?
─엌ㅋㅋㅋㅋ
─로건앜! 이건 안돼!
─무는 거 아니야!
로건이 공중에 떠 있던 카메라를 보고 깡총 뛰었다. 이런 종류의 위협이 들이닥칠 때 자동으로 회피하도록 설정이 되어 있는 드론이 옆으로 살짝 이동했다.
다만 그 조금의 이동이, 은우의 얼굴 옆면을 찍어 낼 수준이었다.
─헐
─로건아!!! 민식아!!!
─백안!!
─좀만 더! 좀만 더!
─얼공?!
시청자들이 환호하고 은우는 다급히 손을 올렸다. 급하게 올린 상태라 손가락 사이 좁게 난 틈으로 그의 눈매가 가늘게 드론을 보았다. 찍혔을까, 안 찍혔을까?
─아 못봄!!
─ㄲㅂ
─클림 일단 따놓음
─와 반사신경 봐라
─안 찍힌 것 같은디
“…잠시만요.”
그는 일단 접시를 싱크대에 내려놓고 헬멧부터 뒤집어썼다. 로건이는 아직도 드론을 보고 있고, 민식이는 여전히 허리에 매달려 있다.
“너희, 이럴 거야?”
찍히고 자시고 간에 일단 두 강아지부터 검거했다. 애들이 난리 치다가 뭘 엎을 수 있으므로 당연한 선택이었다.
민식이는 그를 잘 따라왔으므로 은우는 로건이만 안아 올려 거실로 내보냈다. 그렇지만 둘 다 잘 따라오다가도 계속 냄새 맡고 주방으로 유턴했다. 로건이의 경우는 소리 없이 그를 따라오는 드론이 탐나는 것 같다.
“나가 있자.”
이럴 때 쓰라고 힘이 있는 거다. 은우는 차근차근 두 강아지를 마당으로 내보냈다. 드론이 그를 따라오느라 거실까지 공개됐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귀여운 두 범죄자가 마당으로 내쫓겼다.
끼잉.
바깥으로 내쫓긴 두 강아지가 낑낑거리며 닫혀 버린 유리문을 벅벅 긁었다. 열어 달란 신호다.
“안 돼, 못 들어와.”
은우는 단호히 선언했다. 그러나 민식이와 로건이는 그 한 마디를 듣고 물러날 아이들이 아니었다.
두 강아지가 한 바퀴 뱅글 돌더니 유리창을 또 긁었다.
“사고 칠 뻔했잖아.”
그는 유리창을 두고 쪼그려 앉아 강아지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자 민식이와 로건이도 엉덩이를 착 붙이고 앉아 꼬리만 살랑거렸다.
“…안 돼.”
은우는 그 시점에서 마음이 약해졌다. 까만 눈망울이 어찌나 순둥순둥한지, 저 눈만 보면 마음이 약해진다.
강아지들이 슬쩍 열어 달란 의미로 창을 긁었다. 은우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안 된다니까.”
─아놔ㅠㅠㅠ 귀여워ㅠㅠㅠ
─아 덩치 큰 놈들끼리 뭐하는데ㅋㅋㅋ
─존나 귀여어ㅜㅠㅠㅠㅠ
─ㅈㄴ 하찬아ㅋㅋㅋ
그런 대형견 두 마리와 대형 인간 하나를 드론 카메라는 전부 찍고 있었으니. 시청자들만 오열했다.
* * *
클립을 돌려 본 결과, 얼굴은 공개되지 않았다. 비록 손이 가리지 못한 하관이나 손가락 사이 눈매가 설핏 드러나긴 했지만, 그 정도면 양반이었다.
하여간 그런 우여곡절 끝에 요리가 다 끝났다.
은우는 준비한 보온 도시락통에 갈비찜 먼저 우르르 담았다.
아직도 뜨끈뜨끈한 고기가 먼저 담기고, 그 사이사이에 채소가 쏙쏙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 다음 소스를 쭈욱 부으면 고기에 닿은 양념이 사방으로 갈라지며 흘러내린다.
부드러운 육질 사이로 스며드는 갈색 양념은 희미하게 백열등을 반사하며 반질반질 빛나니.
아마 입에 넣어 씹거든 이에 엉기며 결대로 찢어지고 분해될 것이다. 그러면서 양념과 뒤섞인 육즙을 잔뜩 뿜어낼 테고.
고기만 그런가? 갈색으로 물들여진 무는 푹 찌르면 젓가락을 쑤욱 받아들일 거다. 젓가락을 칼 삼아 자르면 손쉽게 잘리겠지.
그렇게 자른 것을 입에 넣으면 열기에 숨 한 번 내뱉다가도 살살 녹아내리는 무를 이리 굴렸다, 저리 굴렸다 하게 될 거다.
다른 채소들도 마찬가지다.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너무 무르지 않은. 그런 식감들을 구사할 테다. 버섯은 쫄깃한 와중에 고유의 향을 화악 풍길 거고.
익숙한 비주얼이지만, 외려 그렇기에 맛 또한 잘 상상이 간다. 화면을 응시하던 사람들이 침샘과 함께 울었다.
「‘강남건물주’ 님이 ‘100,000원’ 투척!
맛있겠다....」
─아놔 배고파
「‘너로정했다’ 님이 ‘1,000원’ 투척!
오늘 저녁은 갈비찜이다」
「‘заявление об отставке’ 님이 ‘43,080원’ 투척!
한입만.」
─ㅋㅋㅋㅋㅋㅋ
─나도 한입만....
─맛있겠다ㅠㅠ
“그러게요. 맛있겠습니다.”
중간에 간 볼 때, 고기가 익었는지 확인할 때 외에는 맛본 적이 없는 은우 역시 입맛을 다셨다. 그렇지만 벌칙이니까 완성본을 맛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참깨와 쫑쫑 썬 쪽파를 부린 후 뚜껑을 닫았다. 이걸로 메인 반찬은 끝났다. 그는 두 번째 도시락 통을 열었다. 구역이 구분된 통이다.
“다음은 더덕구이…….”
새빨간 양념을 바른 더덕구이를 가장 큰 칸에 집어넣었다. 입에 담으면 결대로 찢어지며 매콤한 양념과 함께 더덕 특유의 향을 탁 터트릴 것이다.
“달걀말이.”
미리 만들어 두어 적당히 식은 달걀말이가 칼에 썰렸다. 포슬포슬한 계란 안에 날치알을 섞어 뒀으니 톡! 터지는 식감이 종종 날 거다.
“멸치볶음.”
밥상에서 흔히 보이는 반찬이지만, 그만큼 준수한 맛을 자랑하는 게 멸치볶음이다.
레드바랑 레리는 고추를 안 먹는다길래 멸치만 볶았고, 우유에탄산은 잘 먹는다길래 청양고추를 추가로 넣어 볶았다.
숨이 죽어 쪼글쪼글해진 고추가 멸치와 함께 우르르 떨어졌다. 늦게 넣었을 때의 아삭함은 덜하겠지만, 대신 멸치와 함께 씹으면 매콤한 향이 훅 올라올 것이다.
레 남매 쪽 것은 올리고당을 넣어 윤기가 번지르르하다. 설탕 역시 비율 맞춰 넣었으니 너무 무르지 않고 제법 바삭할 거다.
짜고 달고 크리스피한 멸치볶음. 매콤한 향은 없어도 이 또한 맛있다.
“나물 무침…….”
청경채, 비름나물, 쑥갓 등 각종 나물 무침도 젓가락으로 집어 정갈하게 담았다. 여기에 흰쌀밥을 넣고 참기름만 둘러도 기가 막히게 맛있을 거다. 취향에 따라 고추장을 추가해도 좋다.
“마지막으로 모둠 전.”
그는 마지막 도시락 통에 새빨간 김치전과 노른자, 흰자 따로 입혀 구운 2가지 색의 동태전, 깻잎전, 호박전, 버섯전. 이렇게 다섯 가지를 담았다.
다들 기름에 한 번 튀겨졌다는 걸 자랑이라도 하듯 반들반들 빛났고, 입혀진 계란 옷이 제각기 투둘투둘했다. 그 가운데 약간 탄 듯 노릇노릇 구워진 부분들이 보이면 더욱 군침이 돈다.
“마지막으로 흰밥까지.”
살짝 설익은 밥을 좋아한다는 레 남매의 밥과, 진밥을 좋아한다는 탄산의 밥까지 꾹꾹 담았다.
생각보다 반찬의 부피가 더 커져 밥 들어갈 자리가 적어졌지만, 어쩔 수 없다. 반찬을 뺄 수는 없었다.
은우는 살짝 고민했다. 다른 통에 밥을 더 담아 가야 할까?
“밥이… 부족할까요?
─와 진짜 개잘한다,,,
─저게?
─절대 안 부족할 듯
─개맛있겠다ㅠ
“안 부족할 것 같습니까?”
─충분한 것 같아요
─저거면 될 것 같은디
─ㅇㅇ 그래도 될듯
─집에도 밥 있을 테니가 ㄱㅊ을 듯
─진짜 정갈하다...
─우리집에도 도시락 좀 싸주세요ㅠ
이게 정말 안 부족할까. 은우는 그가 한 끼로 먹는 밥양의 4분의 1도 안 되는 도시락 밥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뭐, 시청자들이 괜찮다니 괜찮을 거라 믿는다. 그가 많이 먹는 편이란 건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으니까. 설마 이렇게까지 차이 날 거라곤 생각 못 했지만.
은우는 도시락 뚜껑을 닫고 그것들을 착착착 합쳤다. 층이 쌓이거든 이제 마련된 보자기에 담기만 하면 된다.
“사옥에서 전달해 드리기로 한지라, 이제부턴 거기로 이동할 겁니다. 이동하는 동안 화면은 끄겠습니다.”
─아 왜애
─ㅇㅋ
─비수들 바깥 구경도 해야하는데...
─언제 야방도 해주세요
─야방 좋다
그는 그 시점에서 헬멧 속 입술을 삐뚜름하게 늘였다. 드디어 희윤이한테 받은 그림을 자랑할 때가 왔다.
컹!
“아, 애들이 붙잡겠네…….”
─강아지들한테 꽉잡혀사는 것봐
─ㅈㄴ 귀여워ㅠㅠㅠ
─입양 안 한다던 분 어디갓어요ㅋㅋㅋ
─형 애들한테 지는 거야?
강아지들이 현관 밖,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어떻게 해결했다. 물론 그 해결의 과정에 최대한 빨리 다녀오겠다며 달래는 것이 포함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강아지들한테 왤케 약해욬ㅋㅋ
─진짜 완전 개집사다
─너무 져줘도 안 되는데
“귀여워서… 좀 냉정히 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이면 그냥 가차 없이 밀어내고 할 텐데, 말이 안 통하는 강아지라 그런가. 속절없이 휘말린다. 화내기엔 너무 사랑스러운 녀석들이었다.
은우는 헬멧을 긁적이며 화면을 돌렸다. 그가 PC로 접속할 때, 게임을 틀기 전 보여 주는 화면이다.
─? 화면 그림 왜 저럼?
─그림 머임??
─설마 본인이 그린 거?
─아ㅋㅋㅋ저번에 자랑했던ㅋㅋㅋ
은우는 잡담 때 송출되는 대기 화면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본래 외주받은 그림 반, 채팅 창 반이 보였어야 할 화면은 그림 부분만 살짝 바뀌어 있으니.
“귀엽지 않습니까?”
해당 그림은 선이 삐뚤삐뚤하고 색은 원색만 쓰인 것이었다. 심지어 오토바이 헬멧도 머리에 안 쓰고 옆구리에 끼고 있다.
「‘ㅅㅂ’ 님이 ‘1,000원’ 투척!
얼굴 정면 첫공갠데 알아볼 수가 없네」
─빅픽쳐ㅋㅋㅋ
─저거 그린 애기는 켄 얼굴 봣겟네?
─완전 발로 그린 것 같은데
“희윤이가 그려 준 겁니다.”
「‘나의이름은’ 님이 ‘1,000원’ 투척!
아무렴 미술의 신께서는 발로 그려도 최상의 작품이 나오는 법 아니겠습니까 감히 인간의 눈으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는 저 아름다움! 탄복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탈룰라ㅋㅋㅋㅋ
─희윤이가 누구임?
─재빠른 사과
─현-명
희윤이를 알고 있는 모양인지, 시청자가 바로 석고대죄했다. 이동하면서 잡담하는 게 다라 지루할 걸 걱정했는데, 벌써부터 큰 웃음거리가 나왔다.
「‘개불은어깨위’ 님이 ‘10,000원’ 투척!
방금 발로 그린 것 같다고 한 새끼 나오라고 하려 그랬는데 사과 빠르네 봐줌」
─감사합니다 행님
─아ㅋㅋㅋㅋㅋㅋㅋ
─아부지 등판ㅋㅋㅋ
─개불 딸 잇었음?
─ㅇㅇㅋㅋㅋㅋㅋㅋ
“아. 개불 님, 안녕하십니까. 보고 계셨군요.”
「‘개불은어깨위’ 님이 ‘10,000원’ 투척!
켄님 ㅎㅇㅎㅇ 탄산이랑 같이 잇습니다ㅎㅎ 같이 방송보다가 울 딸램 그림 나와서 기분좋게 웃었네 조심해서 와요^^」
─팔불출ㅋㅋㅋ
─아~ 딸그림은 못참지~~!!
─희윤이 사진 더 올려주세요ㅠ
─귀여운거+귀여운거 = 사랑
심지어 개불까지 등장하며 웃음을 추가로 얹어 주었다. 은우는 목덜미를 쓸며 미리 잡아 둔 택시에 탑승했다.
야간의 경우 자동 운전이지만, 낮은 또 아니라. 택시 기사분이 그를 반겨 주었다.
─택시?
─머임 택시 탄 거임?
─택시 소리 들리는데
─면허 없어요?
“제가 운전면허가 없어서.”
은우는 기사분께 짧게 양해를 구했다. 기사분은 다행히도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그, 내릴 때 사인 하나 해 주실 수 있나요?”
“……?”
“제가 팬이라…….”
─아 성덕!!
─우리도 싸인 받을 수 있는데!
─아 빨리 야방해;;
─야방 마렵네...
─기사님 부럽다ㅠㅠㅠ
택시 기사가 그의 사인을 받아 간 건 여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