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태양이 머리 위에 선 시간. 은우는 마당에 앉아 강아지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의 손은 양옆을 차지한 민식이와 로건이의 몸을 살살 긁어 주고 있다.
테라스 차양이 늘여 준 그늘은 그들의 다리만 제외하고 땡볕을 막아 주고 있다. 그래도 더워서 목과 등, 가슴골을 타고 땀이 흐르곤 했지만 말이다.
은우는 더위를 참으며 신상 게임 소식을 확인했다. 소재가 금방금방 동나는 이상, 신상 게임 확인은 필수였다.
<바테 파트2 스토리 개박살 났다 얘들아...>
[은은히 웃는 얼굴로 눈물 흘리는 짤]
유출좌.....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당신 덕분에 지갑을 지켰읍니다.....
─쓰....발.......
─네? 파트2요? 아직 안 나왔는데요?? 시발 아직 안 나왔다고
└특: 실제로도 아직 안 나왔다
└그럼 뭐함 시발 스토리 개좆망인 거 다 들통낫는데
└진짜,,,,내 5년의 기다림이 똥이 돼버렸어
└제작진 너희는 우리에게 똥을 줫어
─아냐 지금이라도 갈아엎어줄지 몰라 희망을 가지자
└ㅋㅋㅋ5년동안 만든 걸 갈아엎어주겠음?
└그럼 이 반응 보고도 출시하겠음?
─이게 레게노다....
<검기사2 옾베 할 거임?>
검기사1도 존나 똥꼬쇼 하면서 했는데.....
보스몹 더 어려워졌다고 자신만만해하는 거 실화냐
─얘네들 세계 각국 랭커들 모아서 데이터 수집했다던데
└ㅋㅋㅋ세계 각국 랭커 ㅇㅈㄹㅋㅋㅋㅋ 그거 솔직히 한명을 위한 말 아니냐
└‘그 왕’
─켄..... 대놓고 불려갔다고 아는데 설마사카?
└특....혜....?
└쉿! 그 단어는 안 된다
└그 사달을 기억하고도 그 단어를 언급한다? 루삥뽕
└빨리 ㄹㅇㅋㅋ만 쳐!
─켄 데이터 수집해서 보스 만든 거면 그게 게임이냐 지옥이지
└ㅋㅋㅋ한 사람만 깨라고 만든 거지
└겜 수듄;;
<특혜고 자시고 존나 보고싶다>
켄vs켄 아님;;
와 진짜 벌써부터 가슴이 웅장해진다...
─ㅅㅂ....존나....멋지겠다....
─해주겠지? 설마 '그 의혹' 걱정해서 안 하진 않겠지?
└해도 출시되고 좀 후에 할 듯
└안돼 시바 그 새끼들만 아니엇어도
└해주기만 해도 감사함
검은 기사라……. 그러고 보니 박 팀장을 통해서 연락이 오긴 왔었다. 신을 데려왔다던가.
은우는 바닥에 묻어 둔 기대가 다시금 부푸는 걸 느꼈다.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버리려 해도, 포기하고 체념하려 해도.
살아 있는 이상 사람은 다음을 꿈꾸고 만다.
월!
상념에 잠겨 손이 멈추니, 두 강아지가 한 번씩 짖었다. 더 긁어 달라는 항의다.
앞서 근방 공터까지 나가 20분 좀 넘게 놀아서 그런가, 그런 쪽으로 보채진 않는다. 지독한 더위도 한몫할 테다.
은우도 땀범벅이 된 윗옷은 벗어 버렸다. 담도 있겠다 눈치 볼 이유가 없었다.
그는 쓰다듬 기계가 된 기분으로 그들을 만지작거렸다. 털이 부드러웠기에─뻣뻣한 감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불만은 없다.
다만, 이따 빗질 좀 해 줄 필요는 있어 보인다. 은우는 단모 사이에 눈치 없이 끼어들어 간 풀들을 보았다. 어떻게 놀면 저 짧은 털에 저게 낄까.
그는 먼저 로건이 털에 낀 풀과 흙을 골랐다. 손이 움직이는 것을 따라 로건의 고개가 따라왔다.
은우는 그런 로건의 코를 잠깐 찌부로 만들어 봤다가 그냥 털이나 골라 줬다.
민식이가 킁킁대며 그의 다른 팔과 옆구리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조그만 발─그의 시점에서─두 개가 무릎 누르는 게 잘 느껴졌다.
좀 쉬니까 더위가 가신 모양이다.
“핥지 마.”
은우는 입을 계속 핥으려 드는 민식이를 피해 고개를 살짝 피했다. 그렇지만 나름 싫지는 않아서, 결국 입을 내줬다.
그의 하관이 곧 침 범벅이 됐다.
그는 벗어 둔 티를 주워 입을 대충 닦았다. 그러곤 요놈, 하고 민식이를 끌어안은 채 마구 비볐다. 로건이 자기 따돌리지 말라며 발로 허벅지를 싹싹 긁었다.
“너도 와.”
은우는 까만 도베르만도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 잠깐 쓰다듬 못 받는 애가 벌떡 일어나 그의 주변을 뱅뱅 돌았다. 정말 귀엽다. 진짜 귀여웠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슬금슬금 떠오르더니, 기어코 자그만 웃음소리와 함께 빵 터져 버렸다. 강아지 두 마리가 그의 뺨을 다시 핥으려 들었다.
“안 돼.”
아무리 강아지가 좋아도 침이 잔뜩 묻는 건 정중히 거절하고 싶다. 은우는 몸을 일으켰다. 민식이나 로건이도 어지간히 컸지만, 일어선 사람 키만은 못하다.
그는 햇볕으로 슬금슬금 나가 스트레칭을 했다. 강아지 두 마리가 그를 쭐래쭐래 따라오더니 마당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더운지 금세 그늘로 되돌아간 건 여담이다.
은우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테라스 한쪽에 접어 둔 물건을 꺼냈다. 커다란 수건과 강아지용 빗이다.
“이리 와.”
로건이가 가장 먼저 달려왔다. 은우는 바닥에 깔아 둔 수건을 빗으로 톡톡 쳤다. 도베르만이 그곳에 엉덩이를 붙였다. 은우는 그 반질거리는 털을 쓱쓱 빗어 주었다.
“방송하는 동안 얌전히 있어.”
여름의 태양은 땅을 후끈히 덥혀 버릴 만큼 강렬한 열기를 발하니. 해가 떨어진다고 해서 더위가 가시진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을 바깥에 두기가 싫었다. 아무렴 에어컨 잘 돌아가는 집 내버려 두고 애들을 밖에 방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알았지.”
문제는 그가 캡슐에 들어가 있는 동안 이 애들이 뭔 짓을 저지를지 모른단 것이라.
“민식이 너도 얌전히 있어야 해.”
컹!
은우는 민식이에게까지 확답을 받아 낸 후, 빗질을 해 주었다. 강아지들이 마루에 입성한 건 흙먼지 낀 발까지 뽀득뽀득 씻겨진 다음이다.
에어컨이 위잉 돌아가며 그들을 반겨 주었다.
▣ 192. 난장판의 막이 올랐다
─켄하
─첫 생방!
─ㅎㅇ
─앗싸
“안녕하세요.”
은우는 시청자들을 반겼다. 다만 그가 등지고 있는 건 평소의 대기실의 모습이라. 어제 방송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의문을 표했다. 그들이 알기로는 벌칙 방송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 캠방 아님?
─ㅇ? 캠방하기로 함??
─벌칙방송 밀렷어요
─캠방?
“아, 공지 못 보셨나 봅니다. 벌칙 방송은 시간 조율 때문에 이틀 뒤로 밀렸습니다.”
시청자라고 해서 모든 방송을 보는 사람만 있진 않다. 공지를 못 본 사람들, 내기 방송을 안 봐 벌칙도 모르는 사람들 등, 은우는 정보를 못 들은 이들에게 조곤조곤 설명했다.
“제가 그분들 집까지 갈 순 없으니까 사옥에서 뵙기로 했습니다.”
벌칙 방송을 하거든 완성된 음식을 전달해야 한다. 그렇지만 은우가 그들 집까지 일일이 찾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알 사람은 다 안다지만 방송에서 대놓고 보여 줄 이유는 없다.
하여 그들은 개방된 다이아박스 사옥으로 모이기로 했다. 레리와 탄산이 사옥에 동시에 나올 수 있는 시간대를 고르고 나니 그게 이틀 뒤였고.
“보통 스토리 게임은 사나흘 안에 끝내는데…….”
─사흘이겠지
─사흘 아님?
─3일천하다 이 말이야
─나흘 겜 있긴 함?
“이틀이면 결말 부분을 앞두고 끊기게 되는 셈이니까, 스토리 게임 말고 다른 거 들고 왔습니다.”
은우는 자연스럽게 팩트를 무시했다. 다른 사람들은 최장 일주일까지 우려먹는─1트에 성공을 못 해서─데, 그는 죄다 사흘 안에 갈아 버린다는 서글픔을 외면하기 위해서다.
“개인적으로 여러분들이 굉장히 좋아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은우는 자연스럽게 게임 구매 페이지로 넘어갔다. 그러자 온몸에 잉크를 얼룩덜룩 묻히고 있는 소년 소녀들이 로고와 함께 서 있는 사진이 작게 떠올랐다.
“오늘할 게임은 ‘SPlAT’입니다.”
─스플!!
─ㅁㅊ 서펄은 못 참지
─당장 키러감
─시참임?
─켄이랑 한판 뜰 기회다!!
─서버 터져욧
장르하야 온라인 배틀 로얄 겸 땅따먹기 게임, 스플랫.
“오늘 하루 온전히 랜덤 매칭만 할 예정입니다. 시청자 여러분의 참여를 막지는 않겠습니다만, 방플은 지양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플 밴
─인간적으로 저격은 하지말자;;
─랭크 낮아서 저격 ㅈㄴ 잘 들어올듯
─근데 저격해봤자...
─구-울
─켄이 인간에게 지겠음?
유구한 솔플러가 오랜만에 저격이 가능한 게임을 꺼내 들었다.
* * *
스플랫은 슈팅 게임을 기반으로 크게 배틀 로얄과 땅따먹기 장르, 두 개를 다 잡은 게임이다. 무려 배틀 로얄 장르를 끼고 있음에도 전체 이용가를 잡아낸 게임이기도 하다.
어떻게 배틀 로얄이 전체 이용가를 잡아냈느냐. 그건 게임 캐릭터의 디자인과 게임 설정을 보면 알 수 있다.
“VR 게임에서 제대로 된 카툰 랜더링을 본 건 처음이네요.”
─ㅇㅈ
─스플은 이 아기자기함이 조음....
─만화속으로 들어온 기분ㅋㅋ
오늘날 어지간한 VR 게임은 현실적인 비현실을 구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게임에 접속했을 때 플레이어가 최대한 이질감을 덜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스플랫의 제작사, 난텐도는 이질감 따위 알아서 하라는 듯 맵, 캐릭터, 이펙트 등 모든 것을 만화틱하게 표현했다. 많은 이가 우려를 표했지만, 그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서버가 죄다 미어터지는데…….”
도박은 대성공으로 돌아왔다.
다른 게임에서도 스리슬쩍 따라 하려 했지만, 대부분은 실패. 카툰 랜더링 기법을 사용하고도 성공한 VR 게임을 꼽으라 하면 스플랫이 독보적이었다.
왜 스플랫만 독보적으로 성공했는가? 이에 대해서 사람들이 입을 모아 외치는 건 게임성에 있었다.
난텐도는 아동용 게임을 전문으로 제작했고, 스플랫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때문에 스플랫 제작진은 슈팅 게임에서 피나 살점이 난무하지 않도록 머리를 짜내야 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잉크 탄환. 페인트볼 서바이벌 게임장에서 착안했다는 이것은 스플랫을 전체 이용가로 만들어 준 1등 공신이다.
전체 이용가가 된 덕에 미성년자의 접근이 용이해졌을뿐더러, 탄환이 잉크란 점을 이용해 땅따먹기라는 장르도 덧붙일 수 있게 됐다.
일반 FPS 게임 하면 떠오르는 잔인함은 덜해도, 이 정도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다.
“11섭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1섭이란다 얘들아!
─서버 터지는 거 아님?
─아 5섭 예상했는데
─11섭? ㅇㅋ 간다
─딱.대.
─땅먹기랑 배틀로얄 둘다 뛰실거?
“아뇨, 오늘은 땅따먹기만 할 겁니다. 내일은 배틀 로얄.”
─아 왜앵
─뱉랼이 더 재밌는데
─땅따먹기가 개꿀잼이지
─랭도 돌리실 거?
“랭 아마 돌리지 않을까요. 일단 캐릭터부터 만들겠습니다.”
은우는 가장 먼저 서버를 고른 후, 정해진 절차대로 캐릭터를 생성했다.
그러자 주변이 방으로 바뀌었다. 좁진 않은데 뭔가 많아서 운신할 공간은 적은 방이다. 엄청 높은 침대와 옷장, 화장대, 전신 거울이 사방에서 그를 반겼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실제가 아닙니다. 상대의 눈에 비치는 형상입니다.』
은우가 가장 먼저 본 건 전신 거울이었다.
거울에는 그의 모습이 비쳤는데, 그 또한 어김없이 카툰 랜더링을 당한 상태다. 색 조합 때문인지 유난히 만화 캐릭터 같아 보인다.
심지어 그 느낌을 살리기 위해 몸 전체가 가늘어지고 발과 손은 커졌다. 코는 일반적인 코가 아니라 동그란 타원형 구체를 붙인 것 같았는데, 앞으로 튀어나오게 붙여서 코가 유난히 톡 튀어나온 형태가 됐다.
“이거 신기하네요.”
실제로 그의 몸이 바뀐 건 아니다. 단지 이렇게 나갈 경우, 상대 눈에는 이런 형태로 보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피격 판정은 어떻게 됩니까?”
─상체요
─버튼 눌러보세요!
─거울 버튼
─버튼이요
은우는 시청자의 말에 따라 거울에 붙은 버튼을 눌러 보았다. 그러자 거울 속 캐릭터의 복부 부근에 빨간색 직육면체가 떠올랐다. 히트 박스다.
배틀 로얄의 경우 저게 다 칠해지면 탈락이다. 땅따먹기의 경우도 부활 시간 동안 손톱만 물고 있어야 할 테고.
─저러면 덩치큰 사람은 불리하지 않음?
─ㄴㄴ 힛박 크기는 다 똑같
─힛박 다 똑같을 텐디
─명치에 맞춰 히트박스 생성되는 거라 높이는 다른데 크기 자체는 동일해용
─켄한테 그 정도 페널티는 있어야.....
“딱히 덩치가 크다고 불리한 거 아니고, 작다고 유리한 건 아니군요.”
히트 박스의 높낮이만 다를 뿐, 히트 박스 크기가 다 동일하다면 문제 될 게 없다. 명치 중심으로 위치한다니 체격이 달라도 타격 장소를 헷갈릴 이유 또한 없다. 죽어라 상체만 쏴 갈기면 되니까.
쉽고 합리적인 시스템이다.
“화장대에 앉으면 따로 얼굴 커스터마이징을 할 수 있는 모양입니다. 뭐, 저는 그냥 그대로 가겠습니다.”
─금발태닝양아치는 국룰이지
─아 설마 옷도?
─기본옷에 헬멧 없지 않나
─ㄴㄴ 과금하면 잇음
─ㅅㅂㅋㅋㅋㅋㅋ
외모는 그대로, 초보자용 복장만 변경했다. 추가로 DLC를 과금을 해 둔 덕인가. 착용할 수 있는 옷이 굉장히 다양했다.
은우가 그중 고른 것은 헬멧과 라이더 재킷&가죽 바지라는 심플한 조합이었다. 없는 패션 센스에 의지하거나, 다 벗고 다니라는 시청자들의 의견에 기대느니 흔한 게 제일 낫다.
─기어코 헬멧을 쓰시네...
─이걸 해냅니다
─헬멧이 본체라서 그래
“어차피 그래픽 때문에 근육도 안 보이지 않습니까?”
─근육 때문에 좋아하는 건 줄 앎?
─뭘 모르네ㅉㅉ
─노출도와 방어력 반비례하는 거 모르냐
─그러니까 얼 굴 까 얼 굴 까
은우는 굉장히 떨떠름하고 굉장히 이상한 것을 보는 눈동자를 잠시간 했다. 헬멧 덕에 가려져서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설정을 마치고 나면 방 바깥으로 나가면 됐다. 일자로 된 골목길이 그를 반겼다. 현대풍이었다.
『*총을 드세요!』
“튜토리얼입니까? 시작 무기는 물총이네요.”
허공에는 만화적 빛 표현과 함께 물총이 동동 떠 있었다. 은우는 그것을 쥐었다. 그의 체구에 맞게 크기가 조정된 물총이 든든히 잡혔다.
『*표적에게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세요!』
집 앞 골목길에 과녁판들이 덜컹덜컹 일어섰다. 인간 형태의 과녁판은 상체 부분에 빨간색으로 히트 박스 부분이 표현되어 있다.
“음.”
─와 겜 귀엽다
─서펄,,, 게임값, 온라인값, 기계값의 괴물....
─킹직히 VR방 가서 하는 게 더 이득이지
─호스 해라 호스.
─호스충 ㄲㅈ
그는 물총을 손에서 돌려 보다가 몸을 콩콩 뛰었다.
가볍게 측정해 본 신체 능력은 유연하고 재빠르다. 그렇지만 특별히 힘이 강력하거나 하진 않다. 애초에 힘자랑할 일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바로 가겠습니다.”
은우는 물총의 방아쇠를 당겨 과녁판을 빨갛게 물들였다. 한 각도에서만 쐈음에도 여러 번 적중하자 히트 박스 전체가 물들었다. 과녁판이 그제야 산산조각 났다. 바닥에는 잉크가 흥건하다.
다음 과녁판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지고, 알림 창이 떠올랐다.
『*잉크 위에선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
은우는 미끄러진다는 게 무슨 소린가 하며 발을 움직여 보았다. 직후 몸이 주욱 나아갔다. 이 감각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이거, 적응하기 조금 까다롭겠습니다.”
─인라인 스케이트 타는 느낌이지...ㅇㅇ
─적응하면 개잼임
─저거 벽타기도 가능해서 진자 개존잼ㅋㅋ
─저거 잘 해야 고수 되잖어~
시청자들 말로는 일단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느낌이랑 비슷하단다. 그는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은우는 다음 표적을 날려 버릴 겸 잉크 탄환을 발사해서 길을 개척했다. 잉크를 밟은 몸이 쭉쭉 나아갔다.
“잉크가 엄청 넓게 퍼지네요.”
─넹
─땅따먹기가 기본이라서ㅋㅋ
─뭐래 스플랫은 뱉랼이 기본이지
─머래 땅따먹기임ㅡㅡ
─싸워라 (짝) 싸워라 (짝)
─그리고 사이좋게 밴-
“히트 박스는 보통 몇 대 때려야 다 칠해집니까?”
─무기마다 다름
─그거 무기에 따라 달라용
─호스 해라.
─러시아좌 호스 영업하는 것보소ㅋㅋㅋ
─호스.
─물총은 한 4-5대?
“생각보다 많이 때려야 하는 모양입니다.”
은우는 튜토리얼용 골목을 휙휙 지나갔다. 그러다 덜컥, 하고 총이 멈췄다. 발사할 잉크 탄환이 다 떨어진 것이다.
『*장전은 탄창을 분리한 시점부터 시작됩니다. 자동 장전입니다.』
그는 알림 창에 따라 탄창을 분리했다. 그의 손이 자동으로 움직이며 허리춤 뒤편에 매달려 있던 통에서 새로운 탄창을 꺼내 들었다. 교체에는 대략 2초 정도 걸렸다.
“벽도 칠해지네요.”
은우는 장전하는 와중에도 다리와 시선은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이용해, 그가 지나온 길을 살폈다.
─벽도 칠하는 구간임
─칠할 수 없는 거 빼고 죄다 땅따먹기에 반영해요 사물도 칠해지면 포함됨
─근데 땅따먹기 칠하는 것보다 싸워서 죽이는 쪽이 점수 더 얻기 좋지 않냐ㅋㅋ
─그건 맞는데... 하위구간은 걍 칠하는게 이득이지
─잘하는 놈들이 싸워서 땅 사수하고 못하는 놈들은 칠하잖어~
“아, 반영하는 게 꽤 많나 보네요.”
은우는 장전을 완료한 물총의 방아쇠를 다시 당겼다. 길이 개척됐다.
『*잉크가 칠해진 벽은 타고 오를 수 있습니다.』
“이건 싸가지 생각나네요.”
─ㅋㅋㅋㅋㅋㅋ
─이거 빠르게 달려서 올라가면 꿀잼임
─내려올 때도 개꿀잼 아니냐
은우는 중력을 무시한 채 3m에 달하는 벽을 밟고 뛰어넘었다. 발이 벽에 착 달라붙어서 빠르게 뛰면 금세 올라갈 수 있었다.
『*적의 잉크 위에서는 속도가 느려집니다. 덧칠하세요!』
은우의 보라색 잉크가 아닌 노란색 잉크가 나왔다. 밟는 순간 찐득찐득하게 신발 밑창으로 달라붙는 것이, 속도가 느려진다는 걸 곧바로 체감하게 해 준다.
그는 그 위로 탄환을 쏘아 잉크를 덧붙였다.
『*수류탄을 던지세요!』
은우는 알림 창이 화살표로 알려 준 것을 따라 허리춤의 폭탄을 집어 들었다. 터지면 그 주변을 잉크로 물들이는 수류탄이었다.
특수 무기인 듯, 사용하자 쿨타임이 돌았다. 튜토리얼은 그게 끝이었다.
“오늘은 땅따먹기만 할 거니까 그쪽만 보겠습니다. 배틀 종류는 일반 배틀, 랭크 배틀, 리그 배틀. 이렇게 3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은우는 그것들의 설명을 슬쩍 보았다. 일반 배틀은 말 그대로 일반 배틀이고, 랭크 배틀은 랭킹 전용 배틀, 리그 배틀은 랭크 배틀에서 일정 이상 성적을 거둔 이들만 싸울 수 있는 것 같다.
즉, 은우는 일반만 뛸 수 있다.
“무기는… 아직 구매가 불가능한 것 같네요. 레벨도 안 되고 돈도 없네.”
몇 판 뛰고 와야지 다른 무기를 써 볼 수 있을 것 같다. 은우는 상점에서 파는 무기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가 쓰는 하나짜리 물총부터 쌍물총, 호스, 스프레이 등 뭔가 많다.
“이런 게임은 직접 뛰어 보는 게 제일 빠르겠죠. 바로 일반 돌리겠습니다.”
─가즈아아아아
─켄이랑 한 판 뜰 수 있는 기회다!!
─제발 매칭되게 해주세요
─매칭! 매칭!!
─저격 간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랜덤 매칭이기에 시청자들과 맞부딪칠 확률은 적다. 그러나 같은 서버라면 일단 매칭될 가능성이 있는 것도 사실.
은우와 파티를 먹기 위해 시청자들이 출동했다. 그들이 단순히 팬심일지, 트롤링을 위한 저격일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거지 같은 매칭 시스템 덕에 레벨 한 자릿수와 레벨 세 자릿수가 붙기도 하는 일반 매칭, 아니 난장판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