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아, 배고프다.]
은우는 방에 들어갔다. 그렇게 크지 않은, 무언가 많은 복도였다. 돌벽에는 휘장이, 그 아래엔 갑옷 장식이, 곳곳엔 촛대와 액자가 걸려 있다.
그것 외에도 이상한 보석이 있질 않나, 꽃병 장식이 있질 않나, 무언가 다양하다. 이곳의 퍼즐은 무엇일지 아직 감도 잡히지 않는다.
“밥 안 드셨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은우는 지금 내기를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그는 레드바에게 설명을 채근하기보다 근황 토크나 시도했다.
[넹……. 시켜 먹는 것도 좀 질려서.]
“시켜 드십니까?”
[자랑할 건 아니긴 한데, 부모님이 밥해 주시거든요……. 근데 두 분 결혼기념일로 여행을 보내 드린 상태라.]
레드바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확실히 자랑할 만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은우는 그런 그가 아주 조금, 조금 부러웠다.
[집밥 먹고 싶어요오오.]
“요리 못하십니까?”
[저랑 누나 별명이 연금술사입니다. 독극물 만들어 낸다고.]
─대체 레드바가 할 수 있는게 무엇인가...
─민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짧고 묵직한 팩트의 맛
─아아...그것은 마치 팩트 깎는 장인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너흰 어떻게 요리를 그렇게 못하냐고 놀리심다.]
그렇군. 은우는 방을 두 번 더 눈으로 훑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입가에는 무전기가 머무른다.
[글고 보니 켄 님, 요리 잘하시죠? 와, 개부럽다.]
“그럭저럭 먹을 만하게 합니다. 그보다 레드바 님, 저는 지금 어떤 복도에 들어와 있습니다. 일직선상의 통로이고, 벽에는 좌우로 각각 3개씩, 총 여섯 개의 휘장이 걸려 있습니다. 휘장과 어긋나게 여덟 개의 책상이 설치되어 있고, 그 위에는 여러 종류의 물건이 있습니다. 또한 휘장 바로 앞에는 갑옷 장식이 있고요. 그쪽은 어떻습니까, 오바.”
[어… 저도 비슷한데요? 저도 휘장 있고 갑옷 조각상 있고 그렇습니다. 액자도 벽에 많고, 촛대도 있고.]
설마 같은 형태의 방인가. 은우는 고민하다가 일단 차근차근 나아가기로 했다.
“방에 무언가 힌트 같은 게 있겠죠. 설명서라든가. 그것부터 찾아봅시다.”
[넵.]
은우는 가만히 훑다가 상호작용이 되는 물건들을 찾았다. 액자나 촛대, 책상 위의 물건들을 옮길 수가 있었다.
[으엥, 배고파서 머리가 안 돌아가.]
“…배가 불렀어도 딱히 다르진 않았을 것 같은데.”
─아 이건 맞지
─ㅋㅋㅋㅋ켄 슬슬 입딜 가죠?
─팩트에 기반한 입딜;;
─무전기가 켜져있어야 했는데 ㄲㅂ
─그게 바로 팩트 폭력이다 이거야
은우는 무전기에서 입을 뗀 채 중얼거렸다. 시청자들이 자지러졌다.
[형님, 시청자들한테 제 험담 하셨어요?]
“딱히 그러진 않았습니다. 얼른 끝내야겠네요. 레드바 님 식사하시려면.”
[허어… 그러게요. 흐엉, 집밥 먹고 싶다.]
그는 이 답 없는 지렁이를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고민했다. 그러다 떠올린 건, 인간이란 존재는 보통 뭐가 걸려 있을 때 열심히 움직인다는 점이다.
“이건 어떠십니까. 제가 반찬 싸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잘난 솜씨는 아닙니다만, 먹을 만할 겁니다.”
[넹?]
“대신, 이길 때 한정입니다.”
[…….]
잠깐 무전기가 끊겼다. 은우는 제가 너무 과한 발언을 했나 싶어 무전기를 손바닥으로 톡톡 쳐 보았다.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그리고 아무리 진 판이라지만 너무 처참하게 지고 싶지 않아서 시도해 본 건데……. 잘못된 선택이었나?
[켄 님.]
“네.”
[지금부터 빡집중 하겠습니다. 뭐든 시켜만 주세요.]
그건 아닌 모양이다.
▣ 191. 그런 사람들이 많이 살아남았으면 하는데
빡집중을 선언한 게 무색하게도 은우와 레드바는 결국 패배했다.
밥이 걸려서였는지, 아니면 후반부라서 퍼즐에 적응한 건지. 레드바가 갑자기 분전하긴 했지만, 초반에 시간을 너무 썼던 게 문제였다.
“누나, 왜 이겼어! 내가 이기면 집밥인데!”
합방용 대기실─이라기보단 그냥 탄산의 대기실에 모인 거였다─에 입장하자마자 레드바가 외쳤다. 그는 이제 이 게임이 자존심을 건 내기 싸움이란 것도 잊은 모양이다.
“뭔 소리야.”
“내기에서 이기면 켄 님이 반찬 싸 주신댔단 말이야!”
“……!”
─ㅋㅋㅋㅋㅋㅋ레드바 오열
─본인이 못해놓고 성하 탓하누
─ㅋㅋ이와중에 성하 깜짝 놀란거 봐
─커엽
─아 근데 켄 집밥 궁금하다;;
─ㅈㄴ 맛잇을듯
레드바의 오열 섞인 외침에 시청자들이 깔깔대며 웃고, 레리가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진짜요?”
“네… 뭐.”
“어머, 켄 님표 반찬.”
탄산까지 양쪽 눈썹을 위로 올리며 약간의 놀라움과 약간의 욕심을 표했다. 얼굴책에 정기적으로 사진이 올라가며 은우의 요리가 퍽 유명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거기서 주로 거론되는 의견은 ‘정말 저걸 혼자 다 먹는가’, ‘요리까지 잘하다니 인간인가’, ‘맛은 별로지 않을까’ 정도가 있겠다.
“켄 님 요리 실력… 궁금했는데…….”
레리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거기에 집밥이야, 누님.”
“심지어 집밥…….”
레리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러곤 오열할 것 같은 얼굴로 집밥을 연신 외쳤다.
“켄 님이 해 주시는 집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절망on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게 어찌나 서글퍼 보이는지, 은우는 제 요리가 천금의 가치가 있던 거였나? 하고 얼떨떨해졌다.
─시켜먹으면 되지 왜 저럼
─‘켄이 해주는’ 집밥이잖아;;
─시켜먹는 거랑 집밥이랑 은근 느낌이 다르긴 함
─아 켄표 집밥은 못참지
─시켜먹는 건 맛잇고 집밥은 애매하잖아
─모르겟고 나도 먹고 싶다...
슬쩍 시청자들의 반응을 돌아보면 이쪽은 비웃는 사람이 반, 나도 먹고 싶다는 의견이 반이다.
은우는 목덜미를 긁적이다가 반찬 좀 싸 주는 게 뭐가 어렵냐는 생각에 도달했다. 마침 가까운 사이에는 보통 선물을 준다기도 하니까…….
아닌가? 음식도 선물의 범주에 포함되나? 쿠키나 뭐, 그런 거 선물한다는 건 들었는데…….
“챙겨 드릴 테니까 너무 슬퍼 마시죠.”
도시락 통 하나 사서 거기에 채워 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깟 도시락 하나 싸는 데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런 생각으로 말을 한 순간, 레리와 레드바의 고개가 은우에게로 돌아왔다.
“천사……?”
“이거슨 빛……?”
“…어차피 벌칙권도 가지고 계시잖습니까.”
벌칙권으로 명령했다면 불만 없이 순응했을 테다. 은우는 그들의 반응이 납득가지 않아 뒷머리를 긁었다.
왜 저들은 명령권을 획득해 놓고서 제대로 안 쓰는지 모르겠다.
“아니, 벌칙권을 거기다 쓰기엔 좀.”
“저희도 양심이 있어서…….”
“전 괜찮습니다만…….”
은우는 탄산을 보았다. 그녀도 제법 동한다는 눈치여서다.
“그럼 나도 주는 거예요?”
“벌칙이라면 싸 드려야겠지요.”
“호오.”
─와 탄산님 부럽
─노인공경은 킹정이지
─나도 줘요
─지금 구울들은 버리는 거임?
─킹직히 구울들도 줘야지;;
시청자들이 부러움에 아우성쳤다. 그리고 탄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 그래. 그럴 거면 차라리 벌칙으로 쿡방은 어때요?”
“네?”
“왜, 벌칙 하는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여 드려야 하니까. 쿡방은 헬멧 안 벗어도 가능하잖아요. 만든 반찬은 켄 님이 못 먹고 저희에게 주는 거니까… 나름 벌칙 같지 않을까? 집에서 하기 어려우면 다박 사옥에서 할 수도 있을 거예요.”
…괜찮은데?
은우는 어찌어찌 공수해 오곤 있지만, 항상 골머리를 앓고 있는 방송 소재를 떠올렸다.
이거면 하루는 때울 수 있다. 심지어 반응이 좋으면 이후에 쿡방을 시도해 봐도 되고.
먹방은 무리여도 쿡방은 할 만하니까 말이다. 해 볼 생각을 별로 안 해 봐서 그렇지.
“전 좋습니다.”
“커어. 진짜 해 주시는 거예요? 대박, 대박.”
“너무 좋아…….”
은우의 동의로 그의 벌칙이 정해졌다. 벌칙 방송이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요리한 본인은 못 먹는 데다가 전달까지 해야 하니 마냥 이득도 아니었다.
“아니, 근데 켄 님 벌칙은 왜 항상 일반적인 벌칙과 동떨어지는 기분이지?”
“이게 다 켄 님이 너무 잘나서 그래요.”
“음, 별로입니까?”
“아뇨.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레리가 넙죽 허리를 굽혔다. 레드바도 옆에서 굽히는 게 어지간히 집밥을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근데 켄 님은 레드바랑 엮여서 맨날 벌칙 받으시네요.”
그렇게 어영부영 은우의 벌칙이 정해지자, 잠시 눈 돌아갔던 레리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퍽 안쓰럽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는데, 레드바가 그녀의 동생인 만큼 대리 죄책감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물론 나이와 함께 방송물을 먹을 대로 먹은 우유에탄산은 낄낄 웃었다.
“어휴, 그래도 난 그래도 켄 님이 레드바 님이랑 붙어 있을 때가 좋더라. 이럴 때 아니면 켄 님을 언제 이겨 보겠어요.”
“아, 그건 그래요.”
─ㅇㅈ
─레드바=페널티 취급 실화냐
─켄 특화 저격무기;;
─켄이어서 이 정도지 다른 사람이면....
─우리 레드바한테 왜그래욧! 레드바 울어욧!
─정수리부터 박으라 그래
레리와 우유에탄산이 의견의 일치를 보이곤 레드바 쪽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상당히 음흉하다.
은우의 옆에 서 있던 레드바가 흠칫거리더니 갑작스레 은우에 앞에 섰다.
“크읏, 형님! 형님 몫까지 제가 전부 받겠습니다! 형님은 사셔야 합니다!”
“네?”
정말 뜬금없는 외침이었다.
“잔악무도한 사람들……. 와라! 내가 전부 감당하겠다!”
“……?”
은우의 얼이 잠깐 빠진 사이, 레리는 대폭소하고 탄산은 레드바의 상황극에 맞춰 움직였다.
“후, 설마 레드바 님이 다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녀는 항상 자신이 늙었다며 젊은 사람들끼리 놀아라 하지만, 꼈을 때 가장 잘 노는 건 탄산이 아닐까 싶다. 정작 20살인 은우는 낄 엄두가 안 나는데.
“후, 맞아. 너 따위가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냥 신의 심판이나 받아라!”
“그.아.아.앗! 적어도 시간 벌이만은……!”
그사이 레리와 레드바의 열연이 이어졌다. 레드바의 새빨간 머리가 확 돌아가며 은우와 시선을 마주했다.
“가세요, 형님!”
“어…….”
─켄: ???
─상황파악 못하고 멀뚱거리는 거 커엽누
─아 근데 켄 이미 벌칙 정해졌잖아ㅋㅋㅋ
─아 켄 저럴 때마다 괴롭히고 싶네;;
─진짜 저런 상황에서만 눈새인 거 실화냐
─뭐 어때 켄은 사회성 대신 실력이라고 있잖아 우린 없는데
─(쥬륵)
197짜리 거구가 170 좀 넘는 레드바의 눈치를 보며 이도 저도 못 하자, 채팅방에 불이 붙었다. 은우의 눈이 팽팽 돌아갔다.
“그, 레드바 님이 절 지키는 것보단 제가 레드바 님을 지키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지……?”
“으핰!”
나름 폼 잡고 있던 레리가 다시 빵 터지고, 탄산도 시원하게 웃어젖혔다. 레드바도 푸흡 하는 소리를 내며 은우를 불러 재꼈다.
“아, 형님!”
“어… 제가 잘못했습니까?”
“푸흐흐흡, 그, 그건 아닌데으흐흐흨.”
원래 상황극이 오갈 때 한 사람이 따라잡지 못하고 진지하게 굴면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리는 법이다. 싸해지거나, 완전 웃음바다가 되거나.
박장대소하던 세 사람은 한참 후에야 겨우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아휴, 켄 님은 이런 거에 약해서 어떻게 한대요.”
“켄 님은 대신 실력이 압도적이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네.”
─ㅋㅋㅋㅋㅋㅇㅈ
─켄은 실력으로 다했지
─갠찮아 형 우리가 있잖아
─영원한 비수들의 친구 켄
─우리랑만 놀자^^7
그들의 말에 은우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말수가 없는 걸 넘어서 말주변이 없고, 농담에 약하다는 건 항상 잘 깨닫고 있다. 이게 스트리머로서 얼마나 안 좋은 점인지도.
“재밌어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단.”
“…아, 세상에.”
레리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탄산은 아주 흐뭇한 얼굴이다.
“켄 님은 딱히 안 재밌어지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레리는 눈물 닦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레드바도 동의표를 던지는 게, 대체 어디서 긍정할 점을 찾았는지 모르겠다.
─솔찌키 지금 커엽잖어ㅋㅋㅋ
─여기서 사회성까지 좋아진다? 좀 에반데
─그치그치 이걸로 켄은 충분하지
─켄만 빨지 말고 사람 좀 만나고 그래라;;
─만날 사람이 있었으면 비수가 됏겟음?
─아앗...앗....
시청자들이 동의하는 이유는 더 모르겠다.
“하… 재밌었다. 자, 그럼 레드바 벌칙을 정할까요? 벌칙을 뭘로 할까요?”
“그러게요. 뭘로 하는 게 좋을까요? 레리 님, 따로 의견 있어요?”
“글쎄요……. 아가씨 분장?”
“제발 선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분장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레드바가 90도로 허리를 굽히고, 레리가 그 앞에서 콧대를 세웠다. 은우는 그걸 가만히 보다가 헬멧을 살짝 긁었다.
“반찬 벌칙이 훨씬 낫네요.”
─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ㄲㅂ
─아가씨 분장 했어야 했는데;;
변장 자체는 별생각은 없는데, 사람들 놀릴 게 훤해서 하고 싶지가 않다. 아가씨 분장 하면 으레 입는 치마 자체도 치렁치렁한 게 다리에 휘감겨서 불편하고.
“저, 진짜 아가씨 분장 해요?”
“네.”
“응.”
그사이 레드바가 세상 잃은 얼굴을 했다. 알기로는 아가씨 분장 꽤 많이 해 본 걸로 아는데, 당할 때마다 저런 반응이다.
하기야 사람들의 인식과 별개로 성 정체성 확고한 남성이 치마 입기는 고역일 것이다. 그, 나풀거리는 것 특유의 감각이 조금 불편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렇다.
레드바야 저래 놓고 정작 입으면 신나게 놀 테지만.
“거기에 누님은 대천재이시고 저는 바보였습니다, 열 번 복창하기 추가.”
“아, 왜애.”
“켄 님 반찬은 나만 먹는 걸로…….”
“누님은 대천재고 저는 바보였습니다악!”
레드바의 선택은 빨랐다. 남매의 우애 좋은 모습에 탄산이 깔깔 웃었다. 은우도 아주 얕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굳이 막지 않았다.
“누님은 대천재고 저는 바보였습니다악!”
레드바의 발악에 그 소리가 묻혔다.
* * *
“저, 잠시만.”
은우는 방송을 끄고 탄산이 나가기 전에 그녀를 불렀다. 레리와 레드바는 둘이서 나눌 대화가 있거니 하며 작별 인사와 함께 빠져 주었다.
“할 말 있어요?”
“그…….”
그는 탄산을 불러 놓고서도 잠깐 고민했다. 물을까, 말까.
타인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긴 역시 거부감이 든다. 오현 관장처럼 유일한 거래가 가능하다면 모를까, 상대가 그에게서 바라는 것이 없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지만 이 사람만큼 좋은 조언자도 없다. 또, 이 사람만큼 거래하기 깔끔한 성격도 없고.
그는 예의를 차리기 위해 헬멧을 벗고 대화를 시작했다.
“방송에 관한 질문입니다.”
“어머, 켄 님이 나한테요?”
운을 떼자마자 탄산이 흐뭇하게 웃었다. 은우는 그녀에게 해 줄 뇌물용 반찬거리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최대한 개인적인 사정은 잘라 내 가며 말을 고르면 그럭저럭 어떻게 대화를 이을 수는 있을 것 같다.
“제가, 방송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음?”
은우는 최대한 간략히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가 방송에 꿈을 가진 건 아니란 것. 생활이 안정되니 이대로 괜찮은지 끊임없이 고민이 든다는 것. 일단 계속하기로 결단은 내렸으니 방송인으로서 기본적인 자세 같은 건 지키고 싶다는 것 등.
객관적 정보 나열이라면 모를까, 주관적 정보 나열엔 레드바만큼이나 자신 없는 그인지라 말은 상당히 고르지 못했다.
그는 탄산의 해석력에 모든 걸 맡긴 채 조금 뜨끈거리는 볼을 쓸었다. 이야기를 들은 탄산은 상당히 묘한 표정이다.
“아니…….”
무슨 말을 할까. 은우는 잠자코 기다렸다.
탄산의 입술이 곧 완전히 개방됐다.
“켄 님, 이렇게 귀여운 남자였어요?”
“…네?”
은우의 눈이 멀뚱멀뚱해졌다. 귀엽다는 말은 이 몸뚱이를 가진 이후로 정말 처음 들어본다. 물론 종종 시청자들이 그렇게 놀리긴 하는데, 적어도 대면한 상태로는 처음이었다.
“세상에. 켄 님, 너무…….”
탄산이 ‘어머, 어머’란 추임새를 연발하더니, 기어코 그런 말까지 꺼냈다.
“머리 좀 쓰다듬어 봐도 돼요?”
“네? 상관은 없습니다만…….”
“세상에…….”
허락을 받자마자 탄산은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물론 그녀의 키가 작았으므로 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은우는 엉거주춤 머리를 낮춰야 했다.
그러자 약간 그가 민식이와 로건 쓰다듬을 때의 느낌이 들었다. 입장은 반대가 되었지만.
“진짜 장하다, 장해. 켄 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실해요.”
“……?”
은우는 얼떨떨한 얼굴로 탄산을 보았다. 왜… 저런 반응일까. 약간 형이랑 표정이 비슷한 것 같긴 한데. 마치 ‘이걸 어떻게 해야 한담’의 긍정적인 반응?
“내가 결혼해서 애 일찍 낳았으면 켄 님 나이였을 텐데. 아이고, 이런 말 하니까 더 귀엽네.”
탄산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갈 것 같다. 그는 탄산의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목덜미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뭔지 모르겠다. 나쁜 것 같진 않은데…….
“일단, 말하자면 켄 님은 잘하고 있어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켄 님은 솔직히 여기서 유지만 해도 반은 가. 실력을 내세우는 방송은 많아도, 켄 님쯤 되는 피지컬은 전 세계를 뒤져도 없거든.”
그녀는 낄낄 웃으며 몇 가지를 더 꼽았다.
“거기에 말실수도 거의 없지, 시청자들 무시하지 않지, 목소리 좋지, 요리도 잘하지. 얼굴 공개까지 하면 더 좋겠지만, 그거야 꼭 필요한 건 아니고. 마지막으로, 지금처럼 계속 배우려 하고 있잖아요. 솔직히 켄 님 위치쯤 되면 안주하는 사람이 더 많거든.”
그게 중요한 거라며 탄산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건 퍽, 그에게 안도를 가져다주었다.
탄산이 완벽한 선인은 아니겠으나, 나쁜 사람 또한 아니므로. 그녀의 조언은 분명 사실에 기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젊으니까 피지컬 떨어질 걱정은 좀 미뤄 둬도 될 거고……. 아, 그렇지만 방송을 오래 하고 싶은 거라면 찬찬히 다른 방송도 시도해 보는 게 좋긴 할 거예요. 켄 님 피지컬은 인정하는데 나이란 게 진짜 무시할 순 없거든. 30대, 40대까지 방송할 거면 미리미리 살길 터 두는 것도 좋지.”
“그렇군요……. 그래서 아까 쿡방을 벌칙으로 주신 겁니까?”
“나야 켄 님이 어떤 지향점을 잡고 있는지 모르니까, 꼭 그걸 노리고 했다고 하긴 어렵죠. 단지 켄 님에게 그런 것도 있다는 걸 말해 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타이밍이 좋긴 했지만.”
은우는 탄산의 너스레에 눈동자를 잠깐 옆으로 굴렸다가 도로 되돌렸다.
정말이지, 구렁이 백 마리는 삶아 먹었을 사람이다. 이번 건 딱히 그를 이용해 먹기 위해서 제의한 게 아니니 기분이 나쁘진 않지만. 애초에 조언을 구한 시점에서 한 번쯤은 당해 줄 용의도 있고.
“좋은 타이밍이었네요.”
그의 긍정에 탄산의 얼굴에 푸근한 미소가 어렸다.
“난 솔직히 켄 님이 날 안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근데 나름 상담까지 부탁할 정도면 그렇게 싫어하진 않나 봐요?”
“…딱히 싫어한 적은 없습니다.”
“좋아하지도 않는 거죠?”
은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호와 불호로 딱 나누라 한다면 호라고 생각합니다. 나쁜 분은 아니니까요.”
“으음. 그래요?”
그렇지만 극호가 되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녀는 사람을 다루는 쪽에 위치한 사람이니까.
물론 선인이라거나 악인이라거나 이분법으로 나누는 건 아니다. 이용당한다고 해서 항상 피해를 입는 건 아니지 않은가.
“세상은 적과 아군으로만 이뤄진 게 아니잖습니까.”
단지, 그냥 은우는 그 감각이 싫을 뿐이었다. 그가 바라지 않는데도 체스 말로 사용되는 그 감각이.
“맞아요. 아군이라고 꼭 사이좋을 필요도 없고, 적이라고 해서 꼭 사이 나쁠 필요도 없는 것처럼 그 중간 또한 있는 거죠.”
그리고 그 사실을 은우도, 탄산도 이제 안다.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었으니까.
“켄 님은 참, 한없이 어려 보이다가도 이런 건 잘 안단 말이지. 그게 참 신기해요. 이 당연한 사실을 은근 모르는 사람이 많거든.”
탄산의 감탄에 은우는 뺨만 쓸었다. 전쟁터에서 십 년 구르다 보면 아군을 만들진 않아도 적 또한 만들지 않는 요령이 생긴다. 그냥, 그는 그런 경험 때문에 알 뿐이다.
좋은 이유는 아니다.
“그런 김에 충고 하나 더 할게요. 괜찮죠?”
“경청하겠습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해요.”
무슨 의미일까. 은우가 시선을 정확히 주자 탄산은 어깨를 으쓱였다.
“요즘 켄 님 주가가 주가잖아요. 개인 정보 보호법이 있다고 해도 파는 사람이 없진 않으니까. 물론 박 팀장님이 하는 거 보면 과거 문제는 없을 테니까… 앞으로의 행실을 조심하란 거예요. 방송 안 할 때도 마찬가지고.”
“…들으신 게 있으십니까?”
“들은 게 있는 건 아니에요. 단지 내가 이 판에 산 기간이 기간이잖아요. 빌리가 흔들릴 정도면 말 다한 거지.”
빌리?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빌리가 최근 방송분에서 힘들어한단 건 알고 있다. 얼마 전엔 몇 주 휴방 선언까지 했고.
그런 그가 그를 어떻게 하려는 건가? 아니면 예시? 빌리를 향한 중상일 것 같진 않은데.
“아, 빌리가 그런단 건 아니고. 그만큼 켄 님의 존재가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내 말은.”
은우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건지 탄산이 손을 흔들었다.
“물론 켄 님이 특별히 한 일은 없지만… 워낙 압도적이잖아요. 실력을 내걸던 스트리머라면 타격이 꽤 클걸? 시청자 풀이 겹치니까. 그렇게 시청자 한둘씩 뺏기다 보면 음해하려는 사람이 꼭 나오더라.”
“그렇습니까?”
은우는 그제야 탄산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을 깨달았다.
“초반이야 반짝 스타처럼 여기고 어떻게 견뎌 보려는 사람이 많았겠지. 그렇지만 지금 켄 님은 완벽히 정착했잖아요. 반년이면 슬슬 작업 들어올 시기야. 사실 반년도 채 안 돼서 들어오는 경우도 더 많고. 켄 님 정도면 운이 좋았지.”
그녀는 말 그대로 충고를 하고 있었다.
“다이아박스가 든든한 원군인 건 맞는데, 사람 일 처리라는 게 완벽할 수가 없잖아요. 솔직히 이 시대에 정보란 게 완전히 숨겨지긴 해? 고소 먹기 싫어서 잠자코 있는 거지, 알음알음 정보 많이 퍼졌을걸요.”
은우는 그녀를 통해 새삼스러운 사실을 자각했다.
우유에탄산처럼 신상을 어느 정도 드러낸 사람들의 사진은 곧잘 돌아다니지만─사생활 침해 수준은 당연히 안 된다─, 그처럼 신상을 완전히 숨긴 이들은 우연히 발견해 찍은 사진마저 고소감이다.
그렇기에 대놓고 행적 및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그가 곧잘 다니는 곳의 사람들은 드문드문 그의 정체를 짐작할 터였다.
내색 못 하는 건 글쎄.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197cm 거구한테 다가갈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해했습니다.”
사실 완전히 모르던 건 아니었다. 법이 제정되어 있다고 해서 모두가 그걸 실천할 리는 없다는 건 그가 제일 잘 아니까.
하나 변명거리가 없진 않다.
아무렴 반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다. 기억 자각 이후, 전생과 전혀 다른 기술력 앞에, 그러니까 정보가 정말 빠르게 도는 세상을 보며 제법 거리감을 느끼던 차였고.
그뿐인가? 일상이 안정되나 싶으니 가족과의 일이 터지고, 그 후엔 형과의 거리감에 우물쭈물하고. 신경 쓸 겨를 자체가 없었다.
때문에 그의 정보가 퍼질 수 있다는 건 막상 생각하지 못했다. 박기철이 일을 잘한 건지, 그냥 그의 외형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운이 좋았던 건지. 그간 사적인 접근이 없었던 것도 그것에 일조했다.
“제가 생각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변명은 그저 자기합리화를 위한 핑곗거리에 불과하다. 그저 그가 어리석고, 아둔했던 거였다.
은우는 빠르게 그의 태만을 인정했다.
그는 좀 더 빨리 이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이 정보화 시대에 그 같이 특정하기 쉬운 조건의 사람이 안 알려지는 건 그가 5살짜리 아기한테 죽임당하는 것보다 어려움을.
“부족할 것까지야.”
“아뇨……. 제가 너무 태평했습니다.”
방송에서 조금씩 늘어놓은 개인 정보들이 뼈아프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이걸로 들키진 않겠지 하며 말한 것들이 꽤 되는데.
그렇지만 그가 자초한 일이다. 그의 멍청함이 불러온 방심.
은우의 눈이 언짢음으로 물들었다.
“뭐… 켄 님이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 수 없고.”
탄산은 굳이 은우를 위로하지 않았다. 본인이 부족하다 여기면 그런 거였다. 기를 쓰고 자존감 북돋아 줄 만한 주제도 아니었고.
“실력파를 내거는 스트리머 중 팬덤이 가장 큰 건 빌리인데… 거긴 아마 괜찮을 거예요. 팬덤이 워낙 단단해서 입지가 흔들리진 않았을 거거든. 본인 멘탈은 좀 흔들린 모양이지만.”
그녀는 대신, 주려던 정보나 마저 주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빌리는 영리한 사람이니까 그 상태에서 섣불리 움직이진 않을 거예요. 누구처럼 멍청한 짓을 시도했다가 역풍 맞기 무서워서라도.”
누구처럼의 그 누구는 개수작을 부리려다 역으로 털린 반반마니를 뜻할 테다.
은우는 오랜만에 떠올린 이름에 손가락을 까딱였다.
“지지 기반이 클수록 시도할 마음이 더 커질 수도 있죠.”
“그건 맞는 말이에요. 그렇지만 그쪽이 딱히 그런 성격은 아니라서……. 뭐, 내가 사람 잘못 봤을 수도 있는 노릇이니 확신할 순 없네요. 팬덤 쪽에서 저지를 확률도 있고.”
탄산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너무 걱정은 마요. 켄 님은 어지간한 수작질로 꼬꾸라질 위치가 아니니까. 웬만한 루머론 끄덕도 없을걸요?”
“글쎄요. 저라도 주춧돌을 빼 버리면 무너질 겁니다만.”
“그렇지만 쉽게 빼앗길 사람도 아니잖아요.”
그녀는 확신한다는 듯 단언하며 웃었다. 은우는 그것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빌리를 나쁘게 생각하진 말아 줘요. 이 판이 원래 ‘영원한 인기는 없다’를 기반으로 깔고 들어가긴 하는데, 켄 님은 너무 자연재해처럼 치고 들어온 느낌이 있어서. 내 말 알죠?”
“네.”
방향성이 다를지언정 최정상에 자리매김했던 스트리머로서의 동질감이라도 있는 것인지.
탄산의 말에 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에서 뭔가를 하지만 않는다면 그로서도 딱히 적대할 이유가 없다. 받아들일 수 있는 부탁이었다.
“오늘 일은 너무 감사드립니다. 제가 뭐라도 해 드릴 게 있을까요.”
빚을 남기는 건 별로 좋은 버릇이 아니다. 가능하면 이 자리에서 털고 가고 싶은데, 그건 역시 무리겠지.
은우는 생각보다 더 쌓여 버린 빚에 눈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주름진 탄산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켄 님은… 참 사람이 좋아. 사람이 우직한데 건실하고, 눈치가 빨라서 현실적이면서도 그렇게 때 묻은 건 아니고……. 그런데도 정말 중요한 부분은 챙기는 게.”
그 미소가 조금 흐트러진다 싶으면, 약간의 후회와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 슬픔 따위가 그 눈동자를 타고 흐른다.
“딱히 뭘 바라고 말해 준 건 아니니까 굳이 빚으로 생각할 필요 없어요. 난 그냥 켄 님이 오래오래 버텨 주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아.”
적갈빛 머리카락 위로 대기실의 백열등이 미끄러졌다. 천장이 나무임에도 전체적으로 회색빛이 도는 듯한 느낌은, 아마 빛의 잘못이 아니라 빛을 받는 객체의 탓이 클 것이다.
“스트리밍 판에서 살아오면서 켄 님처럼 괜찮은 사람 만나기가 쉽지가 않거든. 난 가능하면 그런 사람들이 많이 살아남았으면 하는데 말이야.”
전쟁터에서 혼자 살아남은 노장들은 으레 닳고 닳은 잿빛의 향을 풍겼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