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187화 (187/233)

187화

병사들이 한차례 휘젓고 간 연구실 속에서 탄은 금고를 끌어 올렸다. 자료들이 전부 소실된 지금, 금고 안 내용물만이 프러데리의 유일한 유산이었다.

달칵.

소리를 듣고 금고 문을 여는 미니게임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드디어 금고 문이 열렸다.

화악, 하얗게 물드는 시야는 마지막 회상의 시작을 알린다. 약을 완성하기까지 하나만의 과정을 앞두었을 때, 그위디온이 그녀를 기어코 발견해 죽이러 온 순간이었다.

이대로라면 애써 연구한 것들이 전부 폐기될 터.

그녀는 연구실 내부에 마련해 둔, 그녀외 사람은 절대 열 수 없는 튼튼한 금고를 꺼내 들었다. 자료까지 빼돌릴 시간은 없어도, 완성 직전의 약만큼은 지켜 내야 했다.

그녀가 여길 떠난다 해서 연구실이 발각 안 되는 건 아니겠지만, 괜찮다. 저 금고는 연구실을 무너트려도 멀쩡한 재질로 만들었다. 심지어 탄의 도움을 받아 땅 깊숙한 곳에 묻기까지 했다. 발견될 가능성은 한없이 0에 수렴한다.

즉,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셈이었다.

피잉!

그러나 화살 날아가는 소리와 함께 이어진 장면은 게임 시작할 때 봤던 영상이었다. 그땐 미처 듣지 못했던 목소리들도 함께였다.

〚너희, 내 영혼을 가져가.〛

〚프러데리!〛

〚운 좋으면 일찍 깨어날 수도 있다며? 그걸 믿어야지.〛

〚그건 너무 도박성이 크다.〛

〚뭐 어때! 어차피 이대론 죽는데!〛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미쳤냐?〛

오프닝 영상에선 보이지 않던 정령들도 추가됐다. 뒤에서 날아오던 공격을 막은 건 당연히 그들이었다.

〚있지, 영혼의 절반 이상을 떼어 내 이전한다면 그건 죽는 걸까, 사는 걸까?〛

〚진심인가…….〛

〚진심이지, 그럼.〛

프러데리는 얄팍하게 웃었다. 뒤에선 화살이 계속해서 그녀를 노리고 있다.

〚프러데리, 후회하지 않아?〛

〚절대로.〛

그녀는 등에 화살이 꽂힌 순간 그 몸이 앞으로 넘어졌다. 영적으로 이어진 관계여서 그런가, 그들은 꼭 입 밖으로 소리를 내 가면서 대화를 나누진 않는다.

〚후회하려 해도 마음이 가는 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잖아.〛

〚그런가…….〛

〚씨이…….〛

영혼들이 그녀의 쪼개진 영혼을 수거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프러데리의 등에 화살이 또다시 박혔다. 희게 질린 입술이 마지막으로 뻐끔뻐끔 그리는 말은 단 하나뿐이다.

〚왕위에 오른다면, 당신은 과연 당신이 한 말을 지켜 줄까…….〛

그녀의 눈이 살짝 휘었다가 그대로 감겼다.

▣ 187. 진짜 맛있는데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라. 은우는 그 말을 중얼거리다 말고 눈을 껌뻑였다. 하얗게 번졌던 시야가 다시 돌아왔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아이템 획득을 알리는 알림 창이었다.

『불완전한 염려

프러데리가 만들어 낸 연금약액.

아직 미완성이다. 완성되려면 대상의 피가 필요하다.』

은우는 잠시 그가 획득한 연금약액을 보았다. 그냥 물약 병인데 뭐 이리 화려하게 만들었는지, 표면엔 온갖 무늬가, 뚜껑은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뚜껑도 화려한 조각이 된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 와중에 안에서 찰랑이는 건 황금빛 가루를 뿌리는 투명한 보라색 액체다. 솔직히 안 죽을 사람도 이거 먹으면 죽을 것 같다.

이게 바로 디자인인가. 그는 고개를 살짝 젓곤 다섯 정령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이제 그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십 년이나 지난 후에 네가 깨어난 시점에서 그녀의 바람은 전부 어그러졌단다. 애초에 그녀가 원했던 건 그 남자를 치료함으로써 전쟁을 막는 거였으니까. 그렇지만 그 남자는 아직 살아 있고, 전쟁은 터져서 두 나라와 땅을 갉아먹고 있지. 프러데리의 연구는 대체 무엇을 위했던 걸까?】

선택에 앞서 샤를로테가 조용히 읊조렸다. 다음은 이그리트였다.

눈을 가린 수도사는 촛대 지팡이를 쥔 채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그 남자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남자가 다른 방법을 찾은 걸지도 모르고, 혹은 그위디온의 수작일지도 모르지. 다만 확실한 것은 저 성으로 직접 가 네 두 눈으로 보지 않는 한 그 사실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합류 순으로 발언하는 듯 세 번째는 나이안이었다. 소년의 형태를 한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빽 소리를 질렀다.

【다 집어치우고 그냥 떠나! 그위디온, 그 개자식이 수작을 부린 것이건, 마스 머저리가 변절한 것이건 뭔 상관인데? 해 볼 만한 건 다 해 봤고, 그 끝이 실패였어. 그거면 됐잖아! 그러니까아, 제발 저딴 나라 따위 신경 쓰지 말고 자유롭게 살자. 응?】

목소리는 마지막으로 갈수록 간절해졌다. 나이안이 얼마나 프러데리를 아꼈는지 알 수 있는 지점이었다.

【…….】

네 번째로 마나카가 나섰다. 생머리처럼 매끄럽게 내려오다가 어느 순간부터 부드럽게 물결치는 머리카락과, 그 사이를 뚫고 나온 물고기 지느러미 형태의 귀는 그녀만의 특징이다.

【…무엇이든.】

물로 곱게 빚어진 속눈썹이 살그머니 올라갔다. 죄다 파란색이라 특별히 눈동자가 존재하진 않는 자위는 어쩐지 그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과묵하고 가호도 별 쓸모가 없지만, 얼굴만큼은 가장 아름다운지라 시청자들이 괜히 감탄했다.

【그게 너의 선택이라면.】

그사이 드물게 들려온 목소리는 마치 물거품이 꺼지는 것 같다. 작고 덧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속삭이는 말만큼은 그 무엇보다도 단단한 지지대였다.

【…나는, 그… 잘 모르겠어…….】

마지막은 탄이었다. 소심한 흙의 정령은 손을 끊임없이 꼼지락거렸다.

【그녀는… 전쟁을 막고자 했지만… 이제 와선 무의미해진 일이니까……. 그렇지? 그렇지……. 그런데… 무의미해졌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지는 않잖아…….】

그러나 소심한 태도라고 해서 사건의 핵심을 꿰뚫지 못할 건 없다.

【…그래, 탄의 말대로야. 우리의 힘을 빌리면 너는 저 왕성쯤은 뚫고 지나갈 수 있어. 십 년 전, 프러데리를 마지막으로 정령사가 전부 사라져 버린 상황이니까 아무도 너를 막아서지 못할 거야.】

우물쭈물하는 탄을 대신해 샤를로테가 말뜻을 풀어 주었다. 탄의 늘어지는 발음이 설명에 적합하지 않다는 걸 고려하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넌 저 안으로 들어가 마스 왕을 죽일 수 있다는 의미야. 프러데리, 너의 영혼의 원형을 죽인 그위디온도 마찬가지고.】

【그냥 신경 끄고 자유를 누릴 수도 있어! 알았어?】

【…나이안.】

【흥!】

언제나 투닥거리는 대화 속에서 샤를로테가 살짝 웃다 말고 바로 얼굴을 굳혔다. 그러자 나머지 정령들이 입을 다물었다.

【…아니면, 만약의 만약을 더해… 정말로 마스 왕이 그위디온의 조종을 받는 거라면, 너는 그 약을 이용해 그를 구할 수도 있어. 오래전 그녀가 하려 했던 대로. 물론 무엇을 택하든 그들을 외면할 게 아니라면 저 성안에 숨어들어 갈 필요가 있겠지만.】

언뜻 엄숙하기까지 한 분위기 속에서 낭랑히 울려 퍼지는 건 샤를로테의 목소리였다.

【자, 어떻게 하겠니? 무엇을 하든 우리는 너의 선택을 존중한단다.】

『“안에서 기다리는 게 무엇이든 나는 봐야겠어.”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잘 모르겠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선택지가 은우의 눈앞에 떠올랐다. 엔딩을 보거나, 엔딩 보기 전에 좀더 돌아다니거나 하는 걸 결정하는 선택지다.

─엔딩이네

─어김없이 사흘 컷이쥬?

─프러데리 존나 헌신이네,,,하,,,,

─이해 안 가서 별로임

─별로라는 자식 너 나 좀 보자

─감히 프러데리를 욕해?

─싸크리트들 급발진하누;;

“음.”

엔딩은 봐야 하니까 선택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그의 입을 가로막은 건 미련할 정도의 헌신을 보이는 주인공이었다. 거기에 경우에 따라 참 답 없어지는 결말까지.

“일단… 게임이니까 아무래도 그위디온이 수작 부리는 쪽일 것 같긴 합니다만, 만약 마스 왕이 변절한 거라면 상당히 애매해지네요.”

은우는 전자에 대해 이야기하기 보다 후자를 먼저 거론했다. 무의식적인 기피였다.

─프러데리 욕하는 놈들 디엘씨 처먹어봐야

─그땐 죽여야할 듯

─맞다 켄님 디엘씨 해주실?

─죽이는게 미래다

“죽이는 게 한 방법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일단 평화나 종전을 희망하는 거잖습니까? 아, 디엘씨는 안 할 겁니다.”

소규모 교전만 이어지는 걸 보아 지금 두 나라의 각축이 거의 끝물에 달했음은 알 수 있다. 그러나 휴전과 종전이 다르듯, 싸움이 끝나 가는 것과 끝난 것은 차이가 크다.

“이 상황에서 왕이 죽으면 전쟁은 다시 이어질 겁니다. 전쟁이란 건 웃대가리가 죽었다고 꼭 끝나는 게 아니니까요.”

마스 왕과 그위디온이 죽으면 당장은 주춤해질 거다. 그러나 왕이 암살당했을 때, 그 용의자는 누가 되겠는가?

현대라면 진위를 밝히기 전까지 섣부른 판단은 금하겠으나, 이런 시대는 조금 다르다. 하물며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게 귀네드라면야.

더베드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알더라도 강행할 가능성 또한 얕볼 수 없다. 외교 문제란 그렇다.

─? 왜 안 끝남?

─왕 죽으면 끝 아님?

─ㅉㅉ 정치알못들;;

“다음 대 왕이 정비를 한 후 재침공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명분만 있다면 전쟁은 어렵지 않다. 암살이 벌어진 지 바로 다음 벌이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선대를 죽인 ~~의 죄를 묻는다.’ 같은 발언은 꽤 많지 않은가.

비록 전생의 경우, 선대의 복수 운운할 정도로 여유 있던 자들은 별로 없었지만.

─ㅇㅎ

─근데 겜이잖아ㅋㅋㅋ

─ㅋㅋㅋ마법의 단어 ‘게임’

“뭐… 여러분들 말대로 게임이니까 그렇게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긴 하겠습니다. 만약 마스 왕이 변절했다고 해도 주인공 성격상 꼭 죽이진 않을 테니까요.”

전쟁이 벌어지기 전, 평화를 가져올 수단으로 마스왕 치료를 고른 건 본인의 사심이라 하자. 그렇지만 그 사심을 제외해도 기본적으로 프러데리는 평화를 지향하는 이였다. 그런 사람이 저런 위험성을 두고도 복수를 우선할 것 같진 않다.

물론 알멩이는 생판 타인은 플레이어므로─영혼을 쪼개면 성격이 바뀔 수도 있다 했고─확신할 순 없다.

“갑시다.”

은우는 생각하느라 잠시 미뤄 뒀던 선택지를 골랐다.

“안에서 기다리는 게 무엇이든 직접 봐야겠습니다.”

그의 발언과 동시에 샤를로테가 다시 물었다.

【아까 네가 원하면 얼마든지 된다고 말했지만, 사실 한 나라의 왕성을 침입한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야.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어. 그래도 후회하지 않겠니?】

플레이어에겐 그다지 두려울 것 없는 말이었다. 그들에겐 세이브&로드, 심지어 자동 저장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상관없어.”

【그래… 그게 네 선택이라면.】

샤를로테는 두 번 묻지 않았다. 시스템 또한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임무 획득!

소망의 끝

귀네드의 왕성으로 들어가자』

마지막 퀘스트가 고개를 쳐들었다.

* * *

귀네드의 왕성은 감히 천혜의 요새라 칭할 만했다. 서쪽 제도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이 왕성을 휘감고 흘러가는 탓이다.

오메가(Ω) 형태로 강이 흐르는 탓에 그들은 꼭 해자를 두른 것 같은 효과를 보였다. 심지어 왕성이 위치한 지대의 높이가 높아, 내륙과 연결된 면을 통하지 않고선 침입이 어려웠다.

정말이지, 자연이 대놓고 성 지으라 만든 수준이었다.

“수영으로 갔다간 스태미나가 다 떨어지겠습니다.”

달리기에도 다는 스태미나가 수영이라고 안 달 리 없다. 물론 스태미나 회복 아이템이 게임 내에 존재하므로 물량 싸움으로 간다면 또 모른다.

─물량 싸움으로 가실?

─스태미너 물약 만들어서 가죠

─도핑으로 가즈아ㅏㅏㅏ

“글쎄요. 그러려면 최소 30개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그의 최대 스태미나와 강의 폭, 절벽의 높이, 성벽 높이까지 고려했을 때 대충 그 정도다. 혹시 모를 변수까지 생각하면 대략 40개는 챙겨야 하지 않을까.

“재료도 없거니와, 그랬다간 10분 동안 헤엄치고 10분 동안 등반만 할 것 같네요.”

─20분간 철인 2종경기;;

─말만 들어도 지루하다

─다른 걸로 가죠

─여장 또 나오면 레전드

“다른 쪽으로 갑시다.”

쉬운 길보다 어려운 길이 좀 더 마음에 들지만, 그건 대게 후자가 재밌어서다. 한데 그게 지루한 장면뿐이다? 방송인으로서 도전할 이유가 없다.

“마침 정상적인 루트도 제공되니까요.”

은우는 고개를 틀어 주황색 느낌표를 띄우고 있는 샤를로테를 보았다. 슬쩍 그녀가 두른 띠를 밟으면 당연하게도 말이 이어진다.

【귀네드의 왕성은 침투하기 어렵기로 유명하지……. 혹시 네게 별다른 계획이 없다면 이건 어떠니?】

그녀는 왕성과 이어지는 유일한 외길을 가리켰다. 그곳엔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검문받고 있는 상인이 있다.

【짐마차에 숨어 저곳을 통과하자꾸나.】

『“괜찮은 계획이야.”

“내겐 다른 계획이 있어.”』

꼭 이 방법으로 가지 않아도 되지만, 은우가 보기엔 이게 제일 나을 것 같았다. 다른 기상천외한 침입 방법은 시청자들의 몫이다.

“괜찮은 계획이네요.”

─여장 아니네 ㄲㅂ

─이새끼들 왜 시꺼먼 남정네가 여장하는 거 좋아하는데ㅋㅋㅋ

─켄이니까

─그래서 더 좋은 거다!

─변태쉑들 쳐내!

“…훨씬 괜찮은 계획으로 정정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빠 예뻐용~~ (덜렁덜렁)

─빠른 정정ㅋㅋㅋㅋ

긍정해 주자 샤를로테가 햇살을 만지는 아기처럼 보드랍게 웃었다. 동시에 허공에 시간 제한이 떠올랐다.

【저들이 나누는 대화로 보건대, 곧 출발할 것 같아. 그전에 얼른 숨어들렴!】

주어진 시간은 그다지 넉넉하지 않다. 은우는 시작 지점인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파쿠르하듯 통통 뛰어 내려가면 거리로 내려오는 건 금방이다.

그는 소리 파장에 유의하며 조심스레 짐마차로 다가갔다. 주변에 서 있는 NPC들이야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잠입이 메인인 게임이 아닌지라 판정이 넉넉한 덕이다.

설사 눈이 마주쳐도 자리만 슬쩍 피하면 대충 넘어가 줄 정도니 짐마차에 숨어드는 건 더없이 쉽다.

은우의 거대한 덩치가 천막이 달린 짐마차 안으로 슬그머니 빨려들어 갔다.

“이 나라… 이대로 괜찮은 걸까요.”

─절대 안 괜찮아보임

─와 경비 상태 실화냐ㅋㅋㅋ

─이걸 못봐?

─이 악물고 모른 척 하는 듯

「‘Hr’ 님이 ‘1,000원’ 투척!

고개 돌려 어서 돌려」

물론 귀네드의 경비 상태에 대한 회의감은 쉬운 난이도에 반비례했다.

은우는 쌓여 있는 짐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중 초록색으로 빛나는 상자는 그가 몸을 숨기기에 적합하단 의미다.

“…….”

─이쯤 되면 게임 회사들 키큰 놈들 미워하는 게 분명함

─ㅋㅋㅋㅋㅋ사심 담은 원한이냐고ㅋㅋㅋ

적합하다 해서 은우 같은 덩치가 들어가기 좋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겠지만 말이다.

은우는 안에 있던 물건들을 추가로 바깥으로 빼내어 공간을 넓혔다. 그래야 겨우 뚜껑이 닫혔다.

“키 커서 좋을 거 없습니다.”

─아 ㅅㅂ 기만질;; 윗공기 맑냐 새끼야?

─그럼 키 좀 내놔보라고ㅠㅠㅠ

─아 다들 왜 그래 비수들 다 무릎 접고다녀서 그렇지 2m는 다 넘잖아?

─그치그치 무릎 접고다니는 거지

─ㅈㄹㄴ

“흠… 여기도 별문제 없는 것 같고.”

그들이 떠드는 사이, 상인과 병사들이 그가 있던 마차를 점검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바깥으로 빼놓은 물건을 눈치채지 못했다.

마차가 따각 소리를 내며 이동하는 게 느껴졌다.

“엄청 덜컹거리네요. 들어온 게 비단 상자라서 다행입니다.”

─비단 다 망가진다아ㅏ

─ㅋㅋㅋ이따 꺼내보면서 띠용할듯

─근데 확실히 푹신하긴 해?

짐마차가 덜컹거림에 따라 고정된 상자들도 약간씩 요동쳤지만, 엉덩이가 아프진 않았다. 깔고 앉은 게 비단이라서 그런 건지, 단순히 게임 보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1문이 보이는구나. 1문만 넘으면 왕성 내부란다. 그 후엔 짐마차에서 내려도 좋고, 좀 더 숨어 있어도 좋겠지. 네 마음대로 하렴.】

샤를로테가 슬쩍 정보를 찔러주었다. 해석하자면 성안에 들어왔으니 네 마음대로 움직이란 소리였다.

“어떻게 하길 바라십니까?”

─싸크리트 어서 뭐가 좋은지 말해봐

─두 개가 뭔 차이임?

─싸크리트 소환!

「‘싸뉴비등판’ 님이 ‘1,000원’ 투척!

이거 계속 타고 가면 3문까진 통과할 수 있음 3문 넘으면 발각 1문 직후에 내리면 귀한 템 먹을 수 잇고 3문에서 내리면 엔딩 빨리 볼 수 잇음」

─싸뉴비ㅋㅋㅋ아ㅋㅋㅋ 저건 진짜다ㅋㅋㅋ

─굇굇이 어디서;; 커여운 뉴비행세를;;

“음.”

은우는 시청자의 설명을 보며 눈을 굴렸다. 슬쩍 뚜껑을 열고 고개를 내밀면 덜컹거리는 짐마차 내부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

“뭐가 좋으십니까?”

─뭘 물어?

─형 알잖아ㅋ

─족온 1문이지

수영과 등반은 보기 지루하니 봐줬을 뿐, 시청자들은 역시나 그가 쉽게 가는 꼴을 보지 않았다.

결국 은우는 1문 통과 직후 짐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샤를로테의 신호에 맞춰 점프하면 수풀 사이에 그의 몸이 쏙 빨려들어 간다.

“이걸 못 보네.”

─대놓고 뛰었는데 본 인간이 없는 게 레전드

─몸은 눈보다 빠르다;;

─뭔가 이상한데

─죽어도 모른척 하라 이말이야

─특) 모른 척 안 하면 실제로 죽음

“검문도 대충 하는 이들에게 뭘 바라십니까.”

솔직히 이 정도로 대충하는 왕성이 있다면 거기 왕족들은 하룻밤 내에 전부 살해당할 거다. 왕족뿐인가? 왕성에 기거하는 귀한 핏줄이란 귀한 핏줄은 다 죽일 자신도 있다.

은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목덜미를 쓸었다. 이제 그가 숨어들어 가야 할 곳은 1문과 2문 사이에 존재하는 병사 숙소 겸 지하 감옥이다.

파밍 생각은 별로 없으나, 그곳에 중간 보스가 있다는 말을 듣고도 무시할 순 없었다.

“왕 보러 왔다가 마물도 아닌 일반 병사들이랑 싸우게 생겼네요.”

─앗...아앗....

─병사들 일하다가 갑자기 재해 맞딱뜨리기

「‘귀네드 병사’ 님이 ‘1,000원’ 투척!

그냥 일하고 있었을 뿐인데...」

은우는 병사들 몰래 숙소가 있는 탑 벽을 넘었다. 창가가 뻥 뚫려 있어 등반을 통해 쏙 들어가면 잘 걸리지 않았다.

─다 주기죵

─저 새끼ㅋㅋ사탄이냐ㅋㅋㅋ

─킹치만 그냥 가면 학살좌 위명이 우는 걸?

─병사들 불쌍....

“쟤네가 평민을 괴롭히고 있다면 모를까, 가만히 쉬고 있는 애들 죽이기는 저도 좀.”

물론 그는 그래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다. 단지 잠입한 입장에서 싸우다 걸리면 사망 확률이 상승하므로, 그걸 회피하고자 한 말이었다.

이유가 없으면 불만을 가질 테고, 그렇다고 그가 생각한 이유를 대면 대놓고 싸우라 할 거 같다. 못 할 건 없지만, 솔직히 귀찮다. 너무 오래 걸렸다.

“보스만 죽이고 옵시다.”

─ㅋㅋㅋㅋㅋㅋㅋ보스는 뭔죄임ㅋㅋㅋ

─보스! 어서 도망쳐!

「‘아왜오!’ 님이 ‘1,000원’ 투척!

왜 나만 주겨오!」

─빨리 휴가라도 끊어!

─보스: 이러려고 왕성에 취업했나...

“…뭐, 반대급부로 이런 위협에 시달리는 대신 평상시 권력을 누렸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ㅋㅋ

─x를 눌러 보스에게 조의를 표하시오..

─x

─우리 연대장도 좀 죽어줬으면...

─X....

─이제 연대장이 켄 방송 보고 있으면 레전드

─ㅁㅊㅋㅋㅋㅋㅋㅋ

원래 가진 권력만큼 암살 따위의 위협에 시달리는 법이다. 그것을 두고 지탄할 이유도, 한탄할 이유도 없다.

“근데… 내부 병사가 너무 적네요. 일부로 적게 만든 건지, 뭐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와중에 그는 다른 점을 두고 의문에 빠졌다. 최대한 싸움을 피해 다니고 있다 해도 병사가 너무 안 보이는 탓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없을 수 있나? 은우는 미간을 좁히며 보스를 찾아 복도를 돌아다녔다. 병사를 마주칠 걱정은 하지 않았다.

땅과 연결되어 있기만 하면 천장도 기어 다닐 수 있는 게 주인공이었으니. 스태미나만 적절히 조절해 주면 절대 들키지 않았다.

─거의 바선생;;

─아 미친.... 상상해버림

─구울왕에게 뭘 갖다대는 거임;;

“바퀴벌레 좋죠.”

은우는 사람들의 채팅을 보며 이유 없이 고개를 살짝 주억였다.

참고로, 참 놀라운 사실이지만, 그의 전생에서도 바퀴벌레는 존재했다. 이름이야 달라도 생긴 건 비슷했으니 아마 맞을 거다.

“맛있는데.”

은우는 바퀴벌레를 잡아다 구워 먹었던 때를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다른 벌레면 몰라도 바퀴벌레는 진짜 별미다.

바싹 구우면 안 그래도 단단한 껍질이 더욱 딱딱해져서 씹을 때 바삭! 하고 부서지고, 속살은 즙을 가득 배고 있어 이빨로 으깨면 육즙이 입안을 가득 적시기 때문이다.

찾기도, 잡기도 힘든 게 문제일 뿐, 어지간한 헌터들은 그 맛을 알고 있다. 대충 다른 벌레는 식량이 없어서 먹었다면 바퀴벌레만큼은 있어도 찾아다닐 정도라고 할까.

─??

─?

─예?

─ㅖ?

“……?”

은우는 입맛을 다시다 말고 사람들 반응에 아차 했다. 잠깐 깜빡했는데, 이 세계 사람들은 벌레 먹는 걸 싫어했다.

그는 서둘러 변명했다.

“진짜 맛있습니다.”

─아니 그걸,,, 먹어봣어,,,,?

─왜 먹엇어,,,?

─????

─진짜 먹어봄??

─미쳣나봐 오빠 퉤해요 퉤

─그걸 왜 먹엌ㅋㅋ...

“…맛있으니까?”

안 그러면 그걸 왜 찾아 먹겠나. 쪼끄매서 배도 안 차고 재빨라서 잡기도 귀찮은 걸.

“혐오스러워서 그렇지, 맛은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대체식품이 유행하던 시절에도 바퀴벌레는;; 유행 안 햇는데;;;

─ㅅㅂ,,,,

─아니 님아;;; 바퀴는 좀;;;

“진짠데…….”

이 세계 바퀴벌레는 안 먹어 봐서 모르지만, 저쪽은 진짜 맛있는데.

은우는 억울해졌다. 차마 토로하지 못할 억울함이었다.

“야. 너, 그거 들었냐?”

“뭐?”

“그위디온 재상께서 말씀하시길, 마스 왕께서 또 실험에 나섰다는 거.”

“아, 들었지. 근데 그게 왜? 자주 있는 일이잖아.”

“그건 그런데 이번은 좀 달라. 며칠 동안 차출된 병사들… 다 그 실험장에 끌려갔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참 다행스러운 건, 때마침 지나가던 병사들이 화제를 돌려 주었단 것이라.

그렇게 켄의 ‘바퀴벌레는 맛있다’ 발언은 유야무야 뭉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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