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형> 야, 선물을 적당한 걸 줘야지 명품을 주면 어떡해』
『형> 너무 과해』
『형> 상품권만 받을게. 시계는 다시 받아 가라』
방송을 끄고 노트를 켜자마자 보인 문자였다. 아무래도 오늘 집에 와서 선물을 까 본 모양인지, 문자 도착 시간은 7시다.
『나> 마음에 들어?』
지금 시간은 새벽 2시다. 내일 확인하겠거니 하며 은우는 채팅을 껐다. 물론 시계를 다시 받아 올 생각은 좁쌀만큼도 없다.
어차피 구매자는 그라서 함부로 환불도 못 한다. 돌려주는 것도 안 받으면 그만이다. 디자인이야 박기철이 ‘형제에겐 이런 걸 줘야죠!’라고 자신하면서 골라 준 거니까 괜찮을 거라 믿는다.
그는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했다. 박기철의 기준이 일반인이 아니라 상류층의 기준일 거라고는 차마 생각도 못 한 이의 헛된 믿음이었다. 알았더라도 ‘이 정도야 뭐.’ 하며 넘어갔겠지만.
은우는 적적한 집안을 슬금슬금 돌아다녔다. 옛날엔 어두운 게 좋았는데, 이 집에 적응하고 나니 너무 어두운 것도 좀 별로였다.
그는 무드 등이나 스탠드 조명을 켜며 냉장고를 뒤졌다. 그냥 자기엔 조금 아쉬운 느낌이 있어서였다. 너른 침대에 누워 봤자 잠이 바로 안 올 거라는 직감도 있고.
다행히 과거의 그는 냉장고에 간식거리를 꽤 갖다 두었다. 은우는 양갱을 입에 물고 거실로 나왔다. 창문을 열어 둔 덕택에 거실은 기분 좋게 습습하다.
그는 그러다 문득 통유리 너머 나무 테라스를 보았다. 널널한 난간 사이로는 당연히 마당이 보인다. 집 안 불이 흘러나간 덕에 약간의 윤곽은 보이는, 잔디가 무성하게 자란 마당.
개들 뛰어다니긴 좋겠네. 은우는 양갱을 베어 물며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눈살을 구겼다.
키울 것도 아니건만, 쓸데없는 생각이다. 진짜로 쓸데없다. 정말 쓸데없는 생각인데…….
은우는 산책 나가서 애교 부리던 민식이와 로건을 정확히 네 번 더 떠올렸다.
이게 다 키우고 싶다는 욕망을 표출한 형 때문이다. 형의 욕망과 그의 생각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지만, 아무튼 형 때문이었다.
먜우!
은우는 형의 열망이 얼마나 강해 보였으면 그가 대신 고양이 환청까지 듣나 고민했다.
근데 형이 키우고 싶어했던 건 개지 고양이가 아닌데.
먉!
“……?”
그는 제 감각이 둔해졌음을 나무라며 소리가 들리는 바깥으로 나갔다. 전자 노트로 불빛을 비추니 마당에 고양이 네 마리가 있었다. 어미로 보이는 성체 하나, 미성숙 개체 셋.
귀엽다.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고양이들이 도망쳤다. 경계심이 강한 건지 단순히 그가 싫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은우는 고양이가 도망친 자리를 보며 목을 쓸었다. 요 동네에 사는 길고양이려나. 직접 본 건 처음이다.
다만 문제는… 돌아다니는 거야 별로 상관없는데, 집 마당에 들어왔다가 개들에게 물리진 않겠, 에베베벱.
그는 마지막 남은 양갱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 후 문댄 뺨은 열기로 뜨끈했다. 저 달과 별마저 여름이 남긴 열흔을 미처 지우지 못한 모양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다른 고민을 하자. 그의 생각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주제의 고민을.
가령 그가 앞으로 하고 싶은 거라든가, 이제 세워야 할 방송의 방향성이라든가, 단모종은 추위 많이 탄… 이게 아니고.
이제 시작이니까 좀 더 천천히 고뇌해도 된다던가,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던가.
그 사람이라던가.
화제 돌리기는 탁월한 성공을 보였다. 너무 탁월한 게 흠이라면 흠일 정도로.
은우의 표정이 바짝 섰다. 이미 과거가 된 일, 고민해 봐야 뭐가 달라지겠냐마는… 형이 찝찝해 하니까 그도 덩달아 찝찝해졌다.
자신을 거부한 사람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신을 보인 캐릭터 역시의 그의 찝찝함을 더했다.
그는 집 안 거실로 복귀해 소파에 앉았다. 희미한 빛을 동반자 삼아 밤에 침잠되면, 어느 순간 남는 건 고즈넉한 정적뿐이다.
일단 형 말대로 그의 환생에는 그 사람이 개입한 게 분명하다. 태생신을 죽도록 싫어하는 놈들이 그에게 기회를 줬을 리 없지 않나. 그 사람이 이름을 대가로 그에게 기회를 주도록 한 게 분명하다.
단지, 그래. 그 이유로 도통 짐작 가는 게 없다. 그는 그 사람에게 해 준 게 없기 때문이다.
물론 꼭 해 주지 않더라도 퍼 주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긴 할 거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그 정도까지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프러데리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아니, 프러데리는 최소한 평화라는 대의라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사람은.
그냥 그를 이용해 먹을 생각뿐이지 않았나? 그를 태생신으로 만들어 본인의 죽음을 부를 생각이 아니었나.
꼭 태생신이어야만 죽을 수 있다는 건 대충 감이 잡힌다. 그렇게나 많은 신을 품고 있는데─죽기 전에서야 알아차린 거지만, 어쨌든─보통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리가.
그리고 그렇게 많은 신을 품고 있던 건…….
은우는 손가락으로 소파를 톡톡 두드렸다. 그래, 그랬지.
「세상엔 쐐기란 게 있다네.」
시체교주에게 들은 적 있다. 만신을 이 세계에 고정하는 제물이 있다고. 그걸 쐐기라고 부른다고.
새로운 쐐기의 그릇이 나타날 때까지 그것은 꾸역꾸역 살게 된다 했던가. 그거라면 ──가 했던 말의 전반적인 부분이 설명된다.
그 사람이 정말 쐐기라면, 그리고 그가 태생신이 됐다면, ──가 부탁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를 죽였을 거다. 만신을 이 세계에 고정한다는 건 그것만 죽이면 그 고정이 풀린단 소리므로. 태생신이라면 가장 먼저 노려야 할 대상이었다. 이계신들을 약화시킬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신들 사정 따위 알 바 아닌 그로선 아무래도 좋다. 처음부터 대놓고 말했어도 들어줄까 말까 한 판에, 꿍꿍이속을 숨기고 이용해 먹으려 한 사람 따위 구원해 줄 이유는 없다. 없는데…….
왜 그 사람은 이름까지 바쳐 가며 그에게 기회를 준 거지? 애당초 쐐기가 이름을 빼앗기면 어떻게 되는 건데?
뭐, 거기 망하나?
은우는 숨을 후 뱉었다.
설마 망하진 않았을 거다. 그 세상이 망하면 손해 보는 건 이계신들이니까. 그러니 이름을 빼앗긴다는 건 그냥… 그냥 빼앗긴 본인의 문제에서 끝나겠지. 그게 어떤 형식일지는 몰라도.
그렇지만… 왜? 어째서 본인이 페널티를 받아 가면서 그에게 기회를 주었을까? 대체 왜? 우리가 무슨 사이였는데?
그는 쐐기나 이름 그리고 그 사람이 그렇게 군 이유에 관해 고민해 보았다. 물론 그가 알아내는 일은 오지 않았다.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
형에게 말했듯 그건 이미 끝난 일이었으므로.
그러나…….
프러데리가 마소 밥 마소누이를 위했던 이유가 밝혀지면 그 사람이 그랬던 이유도 조금은 알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정말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은우는 자못 게임의 뒤가 궁금해졌다.
밤이 지나면 스러질 정도로 사소하고 옅은 마음이었다.
▣ 185. 경비를 굳이 세워 둔 채 지키고 있는
충격적인 비사가 밝혀지긴 했지만, 일단 본래 목적이었던 아르라우네는 확보했다. 스카이 캐슬로 올라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셈이다.
그런 이유에서 은우는 서둘러 복귀한 후 거상을 찾아갔다. 필드를 돌아다니다 보면 밤낮이 바뀌긴 하지만, 게임상으론 시간이 흐르지 않는 취급이라 거상은 그를 금방 반겨 주었다.
“일찍 돌아오셨군요!”
거상은 어떻게 이리 빨리 약초를 구했냐며 온갖 호들갑을 떨었다. 그에 대해 장황한 캐릭터의 답변이 있었지만, 은우는 적절히 끊어 가며 대사를 따라 했다.
그러자 어느새 그는 천공섬, 스카이 캐슬 공중에 있는 상태였다.
【이곳은 대지와 떨어져 있으니… 아마 흙으로 이뤄진 것들에게 달라붙어 걷는 능력은 상실됐을 거야. 그걸 염두에 두렴.】
샤를로테의 설명대로 벽을 따라 걷는 능력은 사라졌다. 원래 자주 쓰던 기능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능력 뺏어가다니 선 넘네...
─아 길치들 어쩌라고
─지도 보면서 움직이라 이말이야
─파쿠르 이제 안 되나?
─와 근데 도시 존나 이쁘다
─스팀펑크 풍 같은디?
“그러게요.”
어쨌거나, 그의 능력 하나를 빼앗아 간 천공섬은 상당히 스팀펑크의 냄새가 났다. 다 마법 덕분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사방에서 돌아다니는 가공삭도와 부유선 같은 걸 보면 신기할 수밖에 없다.
“저 부유선은 다른 도시에선 못 본 것 같은데…….”
【저 부유선들은 이곳에서밖에 작동하지 않는단다. 부유선을 만드는 데 쓰인 부유석이 오직 천공섬에서만 떠오르기 때문이지.】
“부유석?”
부유선이란 단어가 키워드를 건드렸는지 샤를로테가 때마침 설명을 내놓았다. 은우는 그녀의 설명을 토대로 또 다른 단어를 꼬집어 올렸다.
【부유석은 이 땅이 떠오를 수 있게 해 주는 돌이란다. 인간들은 그렇게 총칭하고 있지. 그렇지만… 우리 정령들에게 있어 부유석은 정령계의 파편이란다.】
【부유석뿐 아니야. 천공섬 자체가 정령계의 산물이다. 일반 물리법칙을 따르지 않는 게 그 증거지. 물질계에 어쩌다 흘러들어 왔는지는 모르겠다마는.】
【부유석이 떠오를 수 있는 건 그것들에게 바람이 농축되어 있어서야. 물론 이곳은 물질계이니 영원토록 부유석에 머물러있진 않겠지. 몇 백 년 후엔 이 땅도 물질계에 완전히 편입되어 저 대지에 일부가 되지 않을까 싶구나.】
은우는 그들의 설명을 들으며 눈매를 살짝 좁혔다.
“언젠가 이 땅이 추락할 거란 걸 쉽게 말하는군요.”
─샤를로테 너무 태평하게 말하는데ㅋㅋ
─ㅋㅋㅋ내 일 아니다 이 말이야
─천공섬 떡락-
─??: 아 몇백 후에 추락한다고~~
“하긴 몇 백 년 후면 어렵게 말할 까닭도 없겠습니다만.”
─땅 투기한 놈들 울듯
─빨리 천공섬 코인 빼!
─투기꾼들 천벌받겟누ㅋㅋ
은우는 N백 년 후에 추락 예정인 땅을 총총 돌아다녔다.
떠 있는 섬에 지은 도시라 그런지 가운데 천공성을 중심으로 뻗어 나간 도시는 계획도시의 느낌이 물씬 났다. 깨끗하게 깔린 도로라든가 사치스러운 광장, 벽돌집 따위가 그런 분위기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다른 도시에 비해 상태가 나아 보입니다.”
상태가 나아 보이는 수준이 아니라 질 자체가 다르다.
은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건 꼭 북부에서 수도로 내려왔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다만 그곳은 조금이라도 자중했건만…….
여긴 정말 대놓고 사치한다. 전쟁이 진행되어도 자신들은 안전하다는 점이 이 분수에 넘치는 행동들을 만들었을 거다.
─저 아래는 굶어죽고 있는데;;
─선 씨게 넘네
─완전 천상계 아녀
─아몰랑 다 죽여버리죠 구울왕님
“빨리 찾고 나갑시다.”
은우는 네 정령을 돌아보았다. 샤를로테가 어김없이 내비게이션이 되어 주었다.
【탄의 기운이 느껴져.】
【이곳인 것 같은데.】
네 정령은 그들의 하나 남은 동료를 맹렬히 찾아 댔다. 그게, 비유가 좀 그렇지만, 꼭 땅에 코를 박고 수색에 나선 개들 같았다. 실제로 코 박고 수색한 건 아닌데 대충 느낌이 그랬다.
“민식이랑 로건 닮았네요.”
─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이쯤 되면 그냥 키우라고ㅋㅋㅋ
─? 그게 누구임?
─개 이름임ㅋㅋㅋ
─레드바: 흡-족
은우는 산책할 때 낑낑거리며 나무를 긁던 민식이를 떠올리며 나무 문을 두고 여기라며 소리치는 정령들을 보았다. 무의식적으로 말한 거였는데 말하고 보니 진짜 닮았다.
“…….”
그는 그의 발치에 앉아 꼬리를 살랑대던 강아지 두 마리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겁 안 내는 게 신기해서 그냥 떠오르는 거다. 그런 거다.
“저 나무 문은…….”
은우는 대신 정령들이 가리킨 나무문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병사들과 나무 문이 연결된 성벽을 보았다.
『새로운 임무 획득!
하늘로 퍼 올려진 대지
본성 안으로 들어갈 방도를 찾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에다가.”
─잠입 on
─성까지 오시오 용사여...
─쉬운 곳 어림 없지!
이놈의 정령들은 어째 쉬운 곳에 있는 법이 없다. 은우는 깊게 숨을 뱉었다.
* * *
성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3가지로 나뉘었다.
상인으로 변장해서 들어가든가, 하인으로 변장해서 들어가든가, 병사로 변장해서 들어가든가.
어디든지 평지처럼 걷고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을 빼앗겨서 어쩔 수 없었다.
단, 세 가지 중 무엇을 택하든 생김새로는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겉보기에 아무리 이상하고, 이걸 변장이라고 하냐 싶은 심정이어도 외형으로는 안 걸렸다.
단지 주어지는 상황에 맞춰 잘 행동하거나, 일반 잠입 게임처럼 시선을 피하는 게 중요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쳣나봐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ㅋㅋㅋㅋ옷 터지는 거 아니냐고ㅋㅋㅋ
그런 느낌에서 은우가 하인으로 잠입하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누가 하인 쪽 잠입을 하면 여장을 해야 한다는 정보를 물어 온 탓이다.
“왜들 웃으십니까.”
은우는 ‘ㅋ’로만 가득 찬 채팅 창을 보며 살랑살랑 걸었다. 그가 원해서 그렇게 걷는 게 아니라, 치렁치렁한 치마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얀 튜닉 위에 입은 칙칙한 원피스는 땅을 아슬아슬하게 스치지 않을 정도로 길다. 심지어 머리엔 두건을 써 머리카락을 꼼꼼히 올리기까지 했다.
배경상 흔히들 아는 빅토리아풍 메이드 복장 따윈 어림도 없다. 만약 그걸 입었더라도 남성 특유의 골격과 단단한 체격이 가려지진 않았겠지만.
─진짜 미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팔뚝이랑 가슴 터지겟다ㅋㅋㅋㅋㅋㅋ
─여장 레전드ㅋㅋㅋ
─진짜 안 어울려ㅋㅋㅋㅋ
─ㅈㄴ 이게 안 걸린다곸ㅋㅋ???ㅋㅋㅋㅋ
“저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압니다.”
알지만 뭐 어쩌란 말인가? 하인을 고른 건 다름 아닌 시청자들이었다. 위화감이 엄청나도 선택지만 잘 고르면 안 걸린다는 설명충의 조언에 홀라당 넘어간 건 저들이란 말이다.
─아ㅋㅋ 수출하러 간다ㅋㅋㅋ
─무조건 클립각
─이거 유어튜브 박제해야함ㅋㅋㅋㅋ
─흑역사 딱 대
“여러분들이 시켜 놓고…….”
─근데 왜 남자 복장은 없음?
─그러게
─성별 따라가기 애매해서 그런듯
“복장이야 플레이어의 성별에 따라가도록 설정하긴 힘들어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게임 시작할 때 성별 조사 나오는 것도 아니고, 세상엔 남자나 여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게임 속 배경이야 인권의 ‘인’ 자도 발달하지 않은 상태이니 남자와 여자, 둘로만 구분한다지만, 오히려 그래서 플레이어 성별을 따라갈 때 문제가 생긴다.
아무렴 제3의 성별의 경우 둘 중 어디에 포함할지 정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럴 바에야 하나로 콱 고정해 놓는 게 편하긴 할 터였다. 심지어 이 시대 땐 성별에 따라 할 일을 구분 지어 놓기까지 했다. 즉, 나머지도 만들려면 경로와 선택지를 또 새로 만들어야 했다.
─ㅋㅋㅋㅋㅋㅋ
─아ㅋㅋㅋ싸가지 레전드ㅋㅋㅋ
─오늘부로 웃음버튼
은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샤를로테가 바닥에 표기해 주는 선을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자칫했다가 치맛자락을 밟을 수 있으므로 보폭을 좁게 할 수밖에 없다.
『커튼 뒤로 숨기 5』
그때, 처음으로 선택지와 맞닥뜨렸다. 은우는 그 문자 창이 떠오르자마자 빠르게 옆에 있던 커튼 안으로 몸을 숨겼다.
물론 커튼 뒤에만 숨어 있으면 커튼이 볼록 튀어나올 것이므로, 커튼 뒤 창가를 밟고 올라서기까지 했다. 옛 성 특유의 두꺼운 벽은 그가 올라서도 충분한 폭을 자랑한다.
“요즘 수도 분위기가 흉흉하다던데.”
“마스 왕께서 또 무언갈 하시려는 모양이야. 듣기로는 고착된 전선이 마음에 안 드신다더군.”
“허, 전쟁이 겨우 끝나나 했더니 다시 시작할 심산이신가?”
그사이 작은 발걸음 소리와 대화 소리가 돌바닥 위를 타박타박 기어 다녔다. 대화 내용을 듣다 보면 눈이 가늘어지는 건 막을 수 없다.
“보통 잠입 게임보단 편하네요.”
보통은 그냥 그가 보고 알아서 피해야 할 텐데, 이 게임은 친절하게 피할 방법까지 주지 않는가.
은우는 발소리가 지나간 후 슬그머니 커튼 뒤에서 나왔다. 그렇게 좀 더 걷다 보면 상대와 눈이 마주하지 않도록 머리 숙여 걷기, 청소하는 척 하기 등 다양한 선택지가 스쳐 지나간다.
“음.”
그렇게 천천히 나아가던 어느 순간, 선이 창밖과 연결됐다. 창가로 나가라는 의미 같다.
“항상 생각하지만, 치마 굉장히 불편한 것 같습니다.”
─잉? 편한데..
─평소 편하다 불편하다가 아니라 치마 입고 담 넘긴 좀 그렇지
─그건 글타ㅋㅋㅋ
─그래도 여름엔 다리 시원해서 좋음
─여청자들 겁나 많누;;
전생에 잠입을 위해서 몇 번 입어 보기도 했다마는, 역시 불편하다. 긴 치마는 움직일 때 제약이 은근 많다.
─근데... 항상...?
─어...?
─그건,,, 입어봤단 소리?
─엥, 그럴 수도 있지 않냐
은우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키를 이용해 엉덩이를 창가에 먼저 붙인 후, 다리를 들어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치마를 걷어 올린 후 뛰어넘어도 괜찮겠지만, 시청자들한텐 왠지 맨다리 보여 주기가 싫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저들이 지독하게 물고 뜯을 걸 알아서다.
─왤케 조신해ㅋㅋㅋ
─ㅋㅋㅋ다소곳이 넘어가는 거 개웃기네
“뭘 해도 여러분이 놀릴 것 같아서.”
─구잘알 비잘알
─청자들 다 파악 됐누ㅋㅋㅋ
─아 구울이들 너무 놀려서 켄 삐졌잖아ㅡㅡ
─그래서 안 놀릴 거임?
─뭐래 무조건 놀려야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은우는 사박사박 소리를 내며 정원을 가로질렀다. 햇빛이 드리운 정원은 곳곳에 조각상이 놓여 있음으로써 사치의 극한을 보여 주고 있다.
─저 아래엔 사람들이 굶어죽는데...ㅉㅉ
─나라꼴 봐라 봐
─어휴,,,진짜 나라 잘 돌아간다
대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마스 왕이 진정 회까닥이라도 한 건지, 아니면 그위디온이 뭔 짓을 하고 있는 건지.
“그러고 보니 마스 왕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건 그위디온이 그를 지금까지 살려 뒀단 거겠죠.”
─어... 그러네?
─? 마스왕 살아잇는데 이꼴임?
─마스쉑 뭐하냐
『조각상 뒤로 숨기 5』
은우는 걷던 걸음 그대로 자연스럽게 조각상으로 향했다. 그러곤 잠깐 멈춰 경비의 시선을 피한 후에야 다시 움직임을 재개했다.
“왜 아직까지 살려 놨는지 모르겠습니다. 10년이면 왕족 처리도 끝났을 텐데.”
─맞말추
─아니 왜이렇게 무미건조해요ㅋㅋ
─냉-정
─맞는 말이긴 한데...ㅋㅋㅋㅋ
“제 왕은 아니잖습니까.”
─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아니면, 마스 왕은 목숨만 간신히 붙여 두고 그위디온이 섭정 노릇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회상으로 본 마스 왕은 배신감에 치를 떨지언정 프러데리 때문에 전쟁을 일으킬 것 같진 않았으니까.”
─섭정각 날카롭네
─근데 그러면 귀찮지 않나? 왜 복잡하게 그러지?
─? 더베드가 먼저 하지 않앗음?
“아뇨, 귀네드가 먼저 시작했습니다. 애당초 에린과의 싸움으로 국력이 약해졌을 더베드가 먼저 전쟁을 거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은우는 다시 조각상 사이에 숨었다.
“실패를 만회하기 만들어진 부분도 궁금합니다. 마스 왕이나 그위디온을 죽이란 의미일까요?”
─어....그러네
─실패가 전쟁 터지는 걸 말하나?
─정령쉑들 진짜 왜 말 안하냐
─알면서 말 안해주는 거 ㄹㅇ 속터짐
“그러게 말입니다. 그냥 속 시원히 말해 줘도 될 텐데.”
은우는 정령들을 힐끔 보다가 마지막 지시에 맞춰 수풀 사이에 숨었다. 그가 숨기엔 수풀이 살짝 작았으나, 다행히 게임은 그것마저 숨음 판정을 내 주었다.
“높으신 분들은 좋겠군.”
“으으, 차라리 연회장 안 경비를 맡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경비들의 푸념이 얕게 지나갔다. 은우는 냉큼 몸을 일으키며 다시 나아갔다.
옷자락에 묻은 풀잎은 손으로 탁탁 털어 내면 그만이다.
“뭐, 이 물음들도 이제 다 해결되겠죠.”
은우는 샤를로테가 가리킨 마지막 돌탑에 앞에 섰다.
본성과 거리를 둔 채 덩그러니 지어져 어떤 쓰임새로 쓰고자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석탑이다. 버려져서 먼지가 잔뜩 끼어 버렸음에도 경비를 굳이 세워 둔 채 지키고 있는, 용도 불명의 돌탑.
【저 탑에서 소심쟁이의 기운이 진하게 묻어 나오는데.】
【…저곳이군.】
【부득이하게도 저 경비들은 처리할 수밖에 없겠구나.】
그렇지만 그 석탑의 꼭대기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자들도 있었다.
“음.”
은우는 검을 꺼내 드는 대신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손을 치켜올렸다.
“누구냐!”
“이곳으로의 접근은 불허한다!”
“더 이상 다가오면……!”
“가호.”
딱, 하고 손가락 튕기는 모션을 보이면 이그리트의 몸이 하얀 불꽃으로 뒤바뀐다.
새하얀 불꽃이 석탑 앞 병사들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