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나를 돕겠다고? 하, 더베드의 개야. 내가 지금까지 너를 내버려 둔 게 네가 쓸모 있어서라고 생각하느냐?〛
오래된 양피지에 그린 그림처럼 낡고 헤진 영상이 펼쳐졌다. 색만 정말 옅게 입혀졌을 뿐, 며칠 전 다큐에서 봤던, 100년 전 흑백 필름 영화랑 비슷하다.
〚그럴 리가. 당신이 그렇게 말랑한 남자가 아닌 건 잘 알고 있어.〛
화면에 서 있는 건 두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주제넘게 그런 발언을 한 것이냐?〛
〚그래.〛
〚어째서지?〛
냉정한 표정의 남자와 그에 맞서 싸우듯 허리를 꼿꼿이 편 여자.
〚부끄럽게도, 나의 주군보다 당신이 그린 나라가 더 옳다고 생각했으니까.〛
여성의 굽어 치는 하늘색 머리카락 뒤에는 다섯 명의 정령들이 서 있다.
〚다만 확신이 서지 않아. 과연 당신은, 그 입으로 말했던 모든 것을 지켜 줄까? 당신이 왕위에 오른다면 많은 것이 달라지고, 바뀌어 버릴 텐데?〛
〚하! 가소롭구나. 네가 내게 믿음을 줘도 부족한 상황에, 네게 신뢰를 달라 요구하다니.〛
남자가 먼저 날카롭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를 보거든 오직 이성만이 냉철하게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 난 지킬 것이다. 내가 말한 모든 것을! 그런 너는 어떻지? 더베드에 헌신하던 너야말로 정보를 캐 가기 위한 거짓 속삭임이 아니라 증명할 수 있느냐?〛
누가 먼저 서로의 신뢰를 받는가의 싸움일까. 그 속에서 한없이 불리한 입장의 여성은 씨익 웃었다.
〚당신이 정말 그런 왕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증명해 보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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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여자를 일에 끌어들이겠다고? 미쳤어?〛
다음 페이지를 택하자마자 장면이 바뀌었다. 새로 등장한 것은 찢어진 눈초리와 약간의 매부리코를 가지고 있는 사내였다. 여성은 여전히 방 한쪽에 꼿꼿이 서 있다.
〚저 여자는 더베드의 개라고! 전쟁왕 브란이 보낸 첩자!〛
〚그래. 동시에 정령사지. 자연이 선택한 고결한 영혼.〛
〚정령이라고 다 올바른 건 아니야! 너도 알잖아. 자연이란 건 무릇…….〛
〚자연이란 무릇 선악이 없고, 자비가 없으며, 다만 평등할 뿐이다. 그렇기에 재해에 대항하지 말고 준비하라. 너보단 내가 더 잘 알아. 그러니까 설교는 그만해, 그위디온.〛
아까만 해도 냉엄한 얼굴을 하던 남성은 그위디온에게만은 사뭇 부드러운 태도를 보였다. 기본적인 성격은 어디 가지 않는지 말투는 여전히 딱딱했지만 말이다.
〚나는 네 설교를 들을 이유가 없어.〛
아니, 딱딱한 게 아니었다. 그건 군주로서 응당 가져야 할 위엄이었다.
〚프러데리.〛
정황상 마소 밥 마소누이일 남자는 지금껏 찬밥 취급 하고 있던 여성을 불렀다. 그제야 방 한구석에 있던 여성이 낮추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대놓고 모욕을 당했음에도 그 눈빛에는 한 점 물러섬이 없다.
〚솔직히 난 널 믿을 수 없다. 거사에 너를 끼워 넣기엔 너무 위험성이 높아.〛
〚알아.〛
〚그러니 증명해 봐라. 네가 뭘 할 수 있을지, 내가 너에게 무엇을 시켜야 할지.〛
프러데리. 이름이 밝혀진 여성이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난, 당신을 살릴 수 있어.〛
자연의 사랑을 받는 고결함이 그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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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이곳에서 시작하는 거야.〛
〚…괜찮은 거야?〛
〚흠. 본성의 연구실만은 못하군.〛
〚하, 그 남자가 뭐라고!〛
〚왜 여기까지…….〛
다음으로 넘어가자 또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지금 보이는 것은 프러데리와 다섯 명의 정령이었다.
〚본성까지 가면 의심받을 거 아냐. 하지만 라보르자 산맥은 달라. 라보르자 산맥도 더베드의 땅이긴 하지만, 실질적인 영향력은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거기에 라보르자 산맥에는 온갖 영초들이 있어. 달리 말하면 저주를 해주하기 위해 필요한 온갖 재료들이.〛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 남자라면 여기도 충분히 의심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만.〛
〚맞아. 그렇지만 라보르자 산맥의 헤라 봉우리는 천공섬에서 관측이 가능하잖아?〛
〚아, 그래서 깃발을…….〛
〚12시간에 한 번씩 정상의 깃발을 갈아 끼우려면 본성으로 가는 건 턱도 없어.〛
프러데리가 정령들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슬쩍 비치는 주변 광경은 회상에 잠기기 전 봤던 연구실과 비슷하게 생겼다. 단지 물건이 적을 뿐.
〚뭐, 꼼수를 쓰자면 얼마든지 쓸 수 있긴 한데……. 자연에 맹세까지 했잖아? 믿어 줄 거야, 아마도. 안 믿더라도 증명하면 그만이고.〛
그 대책 없음에 다섯 정령은 머리만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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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나는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어쩌다 영혼을 쪼개는 방법까지 개발해 낸 거야?〛
〚아니, 그냥……. 그 저주가 영혼에 관련되어 있기에… 그 부분만 도려내 보는 건 어떨까 했지…….〛
이번에 바뀐 장면은 시간이 꽤 흐른 듯 연구실에는 물건들이 많이 쌓여 있다.
〚멍청아, 영혼을 쪼개면 문제가 생긴다고.〛
〚그런가? 어떤 문제가 생기는데?〛
〚일단… 도려내진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아주 오랜 시간 잠들게 될 거야.〛
〚실제로 옛 인간들 중 그런 자들이 있었지.〛
〚지금도 많이 존재한단다. 너희들이 깊은 잠이라 부르는 그것, 그것의 일부는 영혼이 쪼개져서 벌어진 일이니까.〛
〚뭐? 진짜?〛
다섯 정령의 말에 프러데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에 이그리트와 샤를로테가 부드럽게 웃고, 나이안은 ‘흥흥’거렸다. 마나카는 저 때도 과묵했는지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중이다.
〚하나… 아니, 둘 더 있어…….〛
다섯 정령 중 유일하게 모르는 얼굴, 아마 지금 찾고 있는 흙의 정령이 손을 들었다.
〚오, 탄. 뭔데?〛
〚영혼은… 기억과 성향을 결정하는 존재니까… 영혼을 도려내면… 아마 도려내기 전과… 많이 달라질 거야…….〛
탄의 그 말은 제법 경악스러운 것이라.
〚아, 맞아. 그런 것도 있었지?〛
〚음, 그 점을 잊고 있었군. 좋은 지적이었다, 탄.〛
〚그게 더 심각하잖아!〛
〚그래애! 그러니까 시도할 생각은 하지도 마! 알았냐, 프러데리!〛
〚…….〛
재잘재잘 떠드는 정령들을 곁에 둔 채 프러데리는 머리를 헤집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나… 더 있는데…….〛
〚아참, 두 개라 그랬지? 나머지 하나는 뭔데?〛
〚그… 쪼갠다는 건… 본질적으로 나뉘는 거니까…….〛
〚에잇, 답답해 죽겠네. 영혼이 둘이 된단 소리야, 저건.〛
〚영혼이 둘?〛
〚응…….〛
〚그래, 둘.〛
탄의 설명을 빼앗은 나이안이 으스댔다. 탄은 그의 말을 빼앗겼음에도 설명이 전달된 것에 만족하는 눈치다.
〚다만 그건 이론상으로 가능한 말이다. 보통은 쪼개진 것 중 작은 쪽 영혼이 먼저 무너질 거다.〛
〚왜, 벽면 하나가 허물어졌다고 집이 아닌 건 아니지만, 벽 하나만 남아 있을 때마저 집으로 부르진 않잖니.〛
〚거기에 필연적으로, 영혼이 두 개로 나뉘면 그중 하나는 육체에 담길 수가 없는 법이다.〛
〚새로운 육체를 찾기 전에 영혼이 무너질 거야.〛
이그리트와 샤를로테가 덧붙인 설명은 프러데리를 완벽히 설득했다. 프러데리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아, 씨… 그럼 이 방법은 폐기해야겠네. 기껏 치료해 내도 통치할 왕이 잠들거나 변해 버리면 뭔 소용이야?〛
〚그래. 좀 더 좋은 방법을 찾아보자.〛
〚프러데리, 넌 할 수 있다.〛
〚칫, 그딴 건 버리고 그냥 나랑 놀아 주지.〛
〚할 수… 있어…….〛
그런 그들의 장면이 점차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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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하… 그래, 그랬지. 내겐 그럴 시간도, 자격도 없었지. 빌어먹을, 나는 세상을 바꿀 수 없어. 내가 말한 모든 것은 그저 몽상에 불과했다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회상에서든 이성을 유지하던 이가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위디온,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잊어. 아니, 잊지 마! 너라도 이어 나가야 해. 알았어?〛
〚마스…….〛
〚반드시 그래야 해. 이 나라는 바뀌어야 한다고. 이 나라는, 이 나라는… 젠장!〛
마스 밥 마소누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날뛰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마스, 괜찮아. 내가,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젠장, 젠장, 젠장!〛
날뛰던 이가 지쳤는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의 다리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더니 이내 1인용 소파 위로 넘어진다.
〚그 여자가… 프러데리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그 여자를 믿어?〛
〚내겐 시간이 없어……. 이 저주를 풀어 주겠다고 한, 풀어 줄 수 있는 능력을 사람은 그 여자가 유일하고…….〛
〚…이만 자는 게 좋겠어. 향을 피워 줄게.〛
〚…그래.〛
그위디온은 방 한쪽에 있던 향을 피웠다. 수면에 관련된 것인지 마스는 금세 잠들었다.
〚빌어먹을, 거의 다 됐는데…….〛
그 위로 비치는 건 악귀처럼 일그러진 그위디온의 얼굴이다.
〚저주 진행 속도를 좀 더 늦춰야겠군.〛
그위디온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마소 밥 마소누이의 코 쪽에 뿌렸다. 그러자 잠든 남자의 얼굴이 다소 편안해졌다.
〚빌어먹을, 이 짓도 못 해 먹겠군. 내 아들 하나 왕위에 올리자고 대체 뭔 짓거리인지…….〛
그는 그걸 보며 회한이 섞인 한탄을 하다가 이내 마스에게 속삭였다.
〚마스, 친애하는 나의 사촌……. 넌 아직 무너지면 안 돼. 왕이 되고, 남은 왕족을 다 처리해 줘야 한다고. 그래야만 내가 계승권에 가까워질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전까진 절대 무너지지 말자고, 우리.〛
그위디온은 잠든 마스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더니 방을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다.
〚누구냐!〛
빠르게 방을 가로지른 팔이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 상체는 창밖으로 뻗어져 나와 맹렬한 기세로 사방을 살펴보았는데, 그 눈동자가 꼭 범의 그것과 같았다.
〚방금 누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위디온의 손에는 마법의 잔흔이 남아 반짝였다. 그것을 의아하게 내려다보던 그위디온은 곧 창문을 닫고 도로 돌아갔다.
스르르륵-
조용히 담을 타고 내려온 것은 두 손으로 입을 막은 프러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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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릴 방법을 가져오랬더니 이런 모함이나 하고 있는가!〛
시작부터 노성이 터져 나왔다. 마스였다.
〚믿기 힘든 건 알지만, 진짜야. 이건 다 당신을 위한……!〛
〚그위디온은 나의 충실한 신하이자 내 편을 들어 준 유일한 혈육이다. 그런 그가 나를 죽이려 한다니, 그게 모함이 아니라면 무엇이냔 말이냐!〛
프러데리가 그위디온의 행위에 대해 고했던 것일까.
그러나 마스 밥 마소누이는 그녀를 믿지 않았다. 그만큼 그위디온에 대한 마스의 신뢰는 탄탄했다.
아니, 꼭 그것만은 아닐 터였다.
한쪽은 충성을 맹세했으나 맹세의 연유조차 불확실한 적국의 첩자, 한쪽은 오랫동안 함께해 온 혈육.
치료제를 약속했으나 그것을 믿을 수 있는 증거는 없고, 그 상황에서 유일하게 편 들어 줬던 혈육을 배신자라 칭했다.
프러데리의 마음은 충성의 발로였으나, 마스 왕이 들고 있던 조각들만 짜 맞추면 모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왜냐면, 마스 왕의 입장에서 프러데리를 규명하는 단어는 믿을 수 있는 동료가 아니라 시험해 보고 있는 첩자에 불과할 것이므로.
〚네가 가져온 약을 통해 호전된 바가 있으니 네 목을 이 자리에서 치진 않겠다. 그러나 그 죄, 용납하지도 않는다! 당장 이곳에서 나가라!〛
그리고 그 시험이 끝나기 전에, 프러데리는 일을 쳐 버렸다. 그것이 그녀의 패착이었다.
〚다신 이 땅을 밟아선 안 될 것이다!〛
프러데리는 그녀의 실수를 인정하고, 설득이 통하지 않으리란 것을 확신했다.
그녀는 곧 자세를 똑바로 하더니, 마소 밥 마소누이에게 마지막 예를 갖췄다.
〚부디 강녕하시길.〛
추방령을 받고 그 방을 빠져나오는 그녀의 눈동자는 신뢰받지 못했음에 대한 배신감 대신 다른 감정으로 빛나고 있다.
그리고.
시야가 점점 어두워졌다. 곧 칠흑만이 세계를 가득 메우면, 그 적막 속에서 문자 하나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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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이게 끝이었다.
▣ 184. 이 일에 개입하지 않길
은우는 살짝 멍해지려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은 마법과 진배없다는 말이 있다는데, 그 말이 새삼 뼈저리게 다가왔다.
이런 식의 회상은 때때로 환상진에 빠진 듯한 착각을 준다. 대상자에게 관련 없는 기억을 보여 줘 혼을 빼낸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도 않을 거다.
이젠 퍽 익숙해져서 괜찮지만 말이다.
“일단, 먼저 플레이 캐릭터가 보통 인간이 아니란 게 밝혀졌습니다.”
─이건 너무 뻔했지
─프러데리는 대체 왜 마스왕 살리는 거임?
─정령인가?
─영혼 쪼개 만든 건 확실하다
─마스왕쉑 본인 동앗줄 본인이 걷어찻네;;
짚어야 할 포인트가 다양하게 쏟아져 나왔지만, 은우는 성급하게 굴지 않았다. 정보가 여러 개 쏟아진다면 우선되는 것부터 빠르게 가다듬고 넘어가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이해가 쉽다.
“제 생각엔 프러데리란 인물이 자신의 영혼을 쪼개 만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인공이 보통 인간이 아니란 단서는 이미 많이 나왔다. 레벨 업이라고 표기하는 게 아니라 적응도 상승이라 하는 것. 많은 이가 인간 같지 않다고 입을 모으는 것 따위가 그렇다.
하물며 방금 나온 회상은 또 어떤가? 영혼을 쪼갠다는 방법을 대놓고 알려 주었다. 오래 잠들어 있거나, 기억이 상실되고 성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부작용까지.
“부작용이 일치하는 걸로 보아, 높은 확률로 맞겠죠.”
─ㅇㅇ 부작용 빼박이지
─대놓고 주인공 만든 거라 퍼먹여주는 수듄
─프러데리 호구임? 왜 살리려고 함?;;
─진짜 충성해야하는 왕은 얘다 싶엇나 보지
─근데 진짜 애매하긴 하다ㅋㅋㅋ하필 첩자 출신이라서...
이거라면 정령들이 쉽게─감상이 어떠하든─수긍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은우는 턱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살살 긁었다.
“이제 남은 건 프러데리가 어쩌다 죽었는지인데.”
아니, ‘프러데리는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란 의문도 남아 있다. 플레이어가 알아서 이해해야 할,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은우는 아직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몸을 틀었다. 그를 사방에서 포위하듯 감싸고 있던 정령들이 흠칫 몸을 물렸다.
유일하게 물러나지 않는 건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해 온 샤를로테뿐이다.
【프러데리… 그녀는 브란 왕의 신하이자 현 더베드의 지고왕, 마나워딘의 친우였던 사람이란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그녀의 동료였고.】
시야에 방해되지 않도록 항상 공중에 떠 있던 샤를로테가 그의 눈높이 쪽으로 내려왔다. 은근슬쩍 눈앞에 떠오르는 건 질문을 강제하는 알림 창이었다.
“그 사람과 나의 관계.”
【켄, 너는… 그 일기장의 주인이 자신의 영혼을 쪼개 만든 존재란다.】
그녀는 그의 뺨을 조용히 쓸었다.
【그녀의 쪼개진 영혼과 우리 다섯 정령의 힘을 담아 만든 육체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인간과 정령 그 사이의 존재지.】
샤를로테가 고백하는 사실은 그들이 방금 떠올린 추측거리와 동일하니. 은우는 덤덤히 다음 질문을 읊었다.
“왜 만들어졌습니까?”
【그녀는 더베드와 귀네드 사이를 중재하고자 했단다. 오랜 세월 앙금이 쌓인 두 나라를 화해시킬 방법은 오직 마스 밥 마소누이를 살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지. 그렇지만… 그 일은 그곳에 적혀 있다시피 성공하지 못했단다. 너는 그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만들어졌어.】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솔직히 네가 이 일에 개입하지 않길 바란단다. 프러데리와 너는 더 이상 같은 존재도 아니고, 귀네드 때문에 프러데리가 죽었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후, 샤를로테는 눈매를 서글프게 접었다. 뒤쪽에 서 있던 세 정령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렇지만 너는 동시에 그녀의 마지막 의지였어. 우리가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던, 길을 찾은 고결한 영혼의 순수한 의지. 그렇기에 차마 네 행동을 막을 수가 없구나. 네가 바라지 않는다면 몰라도.】
그녀는 고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방에서도 부드럽게 나부끼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뺨을 휘감았다.
【…아직 너의 기억은 완전치 않지. 그렇지만 남은 기억도 얼마 되지 않아. 아마 곧 떠오를 것 같은데… 이왕이면 모든 걸 떠올린 후에 결정하는 건 어떠니?】
은우로선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의였다. 원래 이런 건 섣불리 받아들이기보단 숨겨진 사정을 다 알고 결정해야 하는 법이다.
【좋아. 그럼 탄부터 먼저 찾도록 하자.】
잠시 땅에 내려왔던 몸은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간다.
【참고로 아르라우네는 저쪽 선반에 있단다. 이미 찾은 듯하지만.】
그건 조금 늦된 힌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