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근데 왜 이그리트는 불 못 붙임?
─맞아 이그리트 왜 노냐
─불타입 주제에 횃불 역할도 못하잖어
─백수쉑;;
“물리적으로 간섭을 못하게 제약이 걸려 있다든가 하는 게 아닐까요.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은우는 횃불을 든 채 설산을 올랐다. 최북단이라서 그런지 강맹한 추위가 몰아쳐서 횃불을 들 수밖에 없었다.
“횃불을 드니 체온이 떨어지지 않는 게 현실적이라 해야 할지… 횃불 하나로 이 추위를 버티는 게 비현실적이라 해야 할지.”
─ㅋㅋㅋㅋㅋ팩-트
─그래도 이 정도면 현실적인 거지
─ㅇㅈ 옷만 껴입고 버티는 것보단 낫다
─이 높이면 솔직히 고산증도 잇어야...
“그건 그렇네요.”
설산 바로 아래에 있는 바랑인 마을에서 털옷을 구매하긴 했다. 그러나 기본 털옷에 붙은 추위 내성으로는 설산 중반까지만 효과를 보기 때문에, 설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려면 강화를 통해 추위 무효 옵션을 붙여야만 했다.
아르라우네는 당연하지만 꼭대기에 있고 말이다.
문제는 강화에 돈만 드는게 아니라 재료도 든다는 점이라. 이 게임에서도 룩덕질을 하고자 한 시청자 때문에 재료란 재료는 죄다 팔아 버린 후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포션 재료까지 팔아 버린 건 조금 아쉽습니다.”
오픈 월드 게임답게 빠른 이동이야 가능했지만, 은우는 재료 노가다를 뛰느니 그냥 맨땅에 헤딩하길 택했다. 포션을 마시거나 추가로 횃불만 들면 되기에 결정한 사항이었다.
아쉬운 건, 지금 한 말마따나 포션 재료도 얼마 없었단 점이지만.
“뭐, 횃불만 들면 되니까요.”
전투가 벌어지거든 횃불이 꺼지겠지만, 후딱 해치우고 마법으로 다시 불붙이면 그만이다. 은우는 자신 있었다.
캬르르륵!
“지금 생각난 건데, 횃불로 때리는 것도 가능합니까?”
은우는 눈 속에서 튀어나온 설인을 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푹푹 파이는 눈 때문에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지만, 마침 은우의─전생─출신은 북쪽이었다.
참고로 그쪽은 가을만 돼도 강화도만큼 눈이 온다. 그런고로, 눈밭 위 전투라면 이골이 났다.
─횃불로ㅋㅋㅋㅋㅋ
─횃불은 무기가 아닌데요ㅋㅋㅋ
─그거 무기 아니에요,,,,
“괜찮지 않습니까?”
부츠 위에 털가죽으로 종아리를 한 겹 덧댄 다리가 눈을 뽀득 밟았다. 동시에 손가락이 횃불을 뱅글 돌린 후, 불이 붙은 부분으로 설인의 머리를 가격했다. 동시에 캐스팅이 시작되며 설인에게 마법이 작렬했다.
얼음, 정확히는 수 속성 녀석들에게 2배로 들어가는 라이트닝볼트였다.
“화상 상태 이상은 안 들어가려나.”
라이트닝볼트 덕에 절반으로 줄어든 설인의 머리통을 은우는 다시 후려쳤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최하위 마법인 라이트닝 볼트로 피르 절반이나 깎은 건, 당연하지만 레벨발이다.
아무렴 은우는 지금까지 대다수의 재능을 마법에 투자했다. 동일 레벨 플레이어가 골고루 투자하는 걸 생각하면 이 정도 대미지는 당연히 나와야 했다.
─대미지 미쳤다;;;
─와 댐지 실화?
─마법 재능 몰빵하면 이렇게 되는 구나...
─개오진다 쫙 깎이네ㅋㅋ
“음, 마법을 너무 올려 둔 모양이네요.”
쓸데없이 마나 통과 마법 공격력만 높다. 설산처럼 횃불 외 무기를 들기 힘든 지역에선 자연히 마법을 사용하게 되는데, 덕분에 무기를 들었을 때보다 쉬운 플레이가 되고 있다.
『❂ 적응도 상승!』
설인이 죽자 레벨이 올랐다.
─지력검사엿던 거임;;
─미쳣냐고ㅠㅠ
─하는 짓은 힘법사인데 실상은 지력검사ㅋㅋ
은우는 사람들의 웃음을 들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재능을 투자하기 위해 재능 창을 열어보면 지금까지 그가 무지막지하게 올려 둔 마법 재능들이 보인다.
【오! 힘이 다시 차올랐어! 다시 달릴 수 있겠는데!】
그때, 뒤에서 따라오던 나이안이 활기차게 외쳤다. 소년의 형상인 그는 평민 소년과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머플러와 망토 사이 어딘가의 망토를 목에 두른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전기 속성이라서 온몸이 금색이라거나 정전기를 튄다는 건 여담이다.
“쿨탐 돌아왔네요.”
─캬 택시 충전
─나이안 가호가 제일 좋아
─싸가지 고인물들은 저거 보스전할 때 쓴다며...
─와 개미쳣다
─영상 보면 슈슈슉 함
“어지러움 주의 바랍니다.”
은우는 횃불을 든 채 나이안의 가호를 발휘했다. 나이안이 활짝 웃으며 그의 몸에 깃들었다.
【크힛! 좋아, 가자고!】
은우의 몸이 전기로 화하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러자 시야가 탁 트였는데, 시선이 닿는 곳을 따라 반투명한 노란색 원이 움직였다.
그는 빠르게 사방을 확인하곤 한 지점을 결정했다. 그러자 몸이 노란색 원이 있던 자리로 쾅, 박혔다.
【짜릿할 거야!】
이게 바로 ‘나이안의 가호: 섬광’이었다. 빛이 되어 하늘로 치솟은 후, 착지 지점을 결정해서 그곳으로 이동하는 것.
시야에 땅이 닿기만 하면 사용이 가능한지라 엄청난 거리도 단번에 이동이 가능하다. 연속해서 3번 쓸 수 있고, 쿨타임이 30분이나 되지만 말이다.
─어우
─번쩍번쩍 하니까 어지럽네
─몬가,,,,몬가 벌어졋음,,,,
─금빛 두 번 번쩍이니까 위치가 바뀌네ㅋ
쿨타임 외 단점이라면 시청자들이 토로하는 어지럼증이 있겠다.
보통의 사람은 착지 지점을 결정하는 데 꽤 시간을 요하지만, 은우는 1초 내에 결정을 내리고 쓰다 보니 체감상 쾅! 쾅! 하면 이동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 왔습니다.”
은우는 사람들을 보며 옅게 웃곤 도착한 목적지로 고개를 돌렸다.
펄럭펄럭-
헤라 봉우리 정상에 꽂힌 깃발이 그를 반기듯 휘날렸다.
“도착은 도착인데…….”
─이게 뭐꼬
─암것도 없는디?
─눈사태 나서 싹 쓸려간 거 아니냐
─아ㅋㅋ그럼 헛수고
다만 정상에는 깃발과 눈, 바위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혹시 깃발이 힌트인가 싶어 보면, 그것이 낡디낡아 무늬는커녕 천조차 거의 찢겨져 나간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자연히 은우의 고개가 샤를로테에게 돌아갔다.
【서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렴.】
샤를로테의 말에 따라 은우는 고개를 돌려 보았다. 눈이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도 무언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저 빛이 비추는 곳에 입구가 있단다.】
“저 빛이 비추는 곳이라…….”
은우의 시선이 돌아갔다. 거대하게 자라난 바위에 가려져 있어 정확한 지점을 알아내긴 힘들지만, 각도는 확인했다.
나이안의 가호면 쉽게 갈 수 있다.
“다시 갑니다. 어지러운 거 싫은 분들은…….”
─온다
─그시간이다
─눈감아!
─다들 준비해!
“잠깐 눈 감고 있어.”
약간의 웃음소리와 함께 시야가 금색으로 물들었다. 나이안의 깔깔거림이 설산을 타고 흘러내렸다.
▣ 183. 10년이나 지나서
“서비스는 원래 자주 주면 안 된다 들었습니다.”
─아 왜
─뭘 모르네 서비스 팍팍 줘야 장사 잘 되는 거임
─누가 그랬냐 다른 건 몰라도 단골한텐 서비스 줘야지
─장알못이네 ㅉㅉ
애초에 그 말이 왜 서비스인지도 모른다. 은우는 이동한 장소를 살폈다. 과연 동굴이 하나 있었다.
“흐음.”
자연적으로 탄생한 동굴은 아니라는 듯, 그것은 꼭 무언가의 입처럼 보였다. 기형적으로 자라난 고드름이 위아래로 맺혀 맹수의 이빨처럼 보이는 탓도 있을 것이다.
은우는 통로를 슬쩍 고개를 넣어 보았다. 아래로 경사가 져 있었다. 입구가 꼭대기에 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한 사람이 들어가면 넉넉하고, 두 사람이 서면 좀 좁게 붙어야 나란히 설 수 있을 거다.
그는 동굴 너비를 재며 횃불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딱 횃불의 반경까지만 은은히 밝혀졌다.
“여길 지금까지 발견 못 했다는 게 신기한 수준인데.”
─ㅋㅋㅋㅋㅋ
─무-능
─귀네드 울어욧!
─팩트가 빗발친다!
“갑시다.”
─ㄱㄱ
─설마 퀘템만 주진 않겟지
─전설템 잇나? 있나??
─(은은한 웃음)
‘나이안의 가호: 섬광’은 사용하지 않는다. 어둠 때문에 시야가 안 닿을뿐더러 그곳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 만에 하나 착지 지점에 함정이 있으면 큰일이지 않은가.
그는 발을 안으로 들이밀었다. 그러자 그림자가 그를 집어삼키기 위해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그것을 물린 건 은우의 뺨과 콧잔등을 희게 물들인 자그만 불꽃이다.
‘후우으응’ 하며 동굴 속으로 들이치는 바람이 그의 망토를 흔들었다. 두꺼운 천에 검은 곰 가죽과 갈색 여우 가죽을 덧댄 망토가 안쪽으로 밀리며 그의 다리를 휘감았다.
【조심하렴. 이곳엔… 함정이 있으니까.】
【상당수의 함정은 아마 발동하지 않을 거다. 너를 알아볼 테니까. 어쩌면 귀네드에서… 박살 냈을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하거라.】
함정이 있다는 말은 정말인 듯, 중간중간 함정에 빠져 죽은 이들이 보였다. 이제 보니 이곳을 발견 못 한 게 아니라, 발견은 했는데 진입에 애먹은 모양이다.
은우는 불과 방패를 든 채 조심조심 발을 내디뎠다. 시스템상 횃불과 주무기를 같이 들 순 없어도, 횃불과 방패를 같이 드는 건 가능해서다.
방패 대신 보조용 무기를 들 수도 있지만, 이런 공간에선 방패가 좀 더 좋은 선택이다. 이 게임이 허락한 보조용 무기는 죄다 단검 정도의 크기로 그쳤으니까.
“안에 들어오니까 따뜻하네요. 시야 때문에 집어넣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어우야,,,, 너무 어둡다
─성냥! 성냥 가져와!
─갑분 공포
「‘강남건물주’ 님이 ‘10,000원’ 투척!
안 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쫄보 on
─아 공포겜 에반데;; 다음 무서움?
─안 무서움
그래도 앞으론 여차하면 바닥에 횃불을 내던지고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이 게임 특징이, 횃불에 불을 붙인 채 버리면 계속 불이 붙어 있다는 거니까.
물론 물속이나 비 내릴 때 버리면 꺼진다. 애당초 후자는 들고 있어도 꺼지지만.
그사이 경사졌던 통로가 점차 완만해지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 탁 트이면서 제법 커다란 홀 같은 게 나왔는데, 은우가 발을 내디딘 순간 돌멩이가 날아왔다.
은우는 부드럽게 발을 물렸다.
─ㅅㅂ 머임
─아 또 뭔데
─이 겜은 왤케 어두운 거 좋아해ㅠ
─아씨 방 불 켜고 자야겟다
【마물?】
【아무래도 동굴 안으로 기어 들어와 새끼를 깐 모양인데.】
정령들은 알아서 저들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사전으로선 제법 편리하다. 문제는 알면서도 안 알려 주는 게 있다는 거지만.
“돌 던지는 몹은 얼마 없는데.”
휙-
됐고, 적들 처지가 먼저다. 은우는 가장 먼저 횃불을 던졌다. 사방에 울리는 소리로 하여금 공간을 적당히 셈해서 중간쯤으로 던진 건데,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어찌 됐건, 덕분에 몰려 있던 것들의 형태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렘린이군요.”
─휴,,,
─안-도
─그렘린 보고 누가 쪼냐ㅎㅎ
─ㅋㅋ맞아 누가 쪼냐ㅎㅎ 아 근데 나 팬티 좀
─아ㅋㅋㅋㅋㅋㅋ
어린아이 크기 정도의 체구, 커다랗고 넓적한 귀, 보송보송 털이 돋은 피부. 이 3가지를 충족하는 마물은 그렘린밖에 없다.
은우는 허리춤에 매어 뒀던 한 손 도끼를 쥐었다. 지금 입은 복장이 바이킹 전사하면 떠오르는 형식─슬리브 튜닉─인지라 깔 맞춤 겸해서 고른 무기다.
꺅꺅꺅꺅!
고블린과 비슷하지만 명백히 따른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그렘린들이 본격적으로 덤비는 소리다.
─얘네 다굴빵 개 귀찮은데..
─설산보다 시야각 더 안나오네
─광역딜 각?
─불좀 밝혀주세요ㅠ
“네.”
은우는 그가 막 빠져나온 통로 쪽 벽으로 마법을 던졌다. 양쪽에 달려있던 횃대에 불이 붙으며 시야가 화악 밝아졌다.
동시에 방패를 쥔 손은 그의 전면을 막았다. 돌진하던 그렘린이 방패에 쿵 부딪쳤다.
퍼억!
도끼를 쥔 손은 다른 쪽에서 달려들던 그렘린을 후려쳤다. 관련 재능을 안 찍은 까닭에 줄어드는 체력은 정말 적다.
꺅꺅!
고블린과 달리 생겼지만 패턴은 비슷하다. 돌진, 돌 던지기, 점프해서 덮치기. 단지 다른 건 고블린은 숲에서 나오고 그렘린은 눈 덮인 지역에서 나온단 것이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그렘린이 더 까다롭다. 하얀 털로 눈 속에 파묻혀 있는 그렘린만큼 찾기 힘든 건 없으니까.
퍼억!
그렇지만 이곳은 눈밭이 아니고, 눈밭이었어도 은우에겐 거기서 거기였다. 한 손 도끼가 그렘린들의 뇌수를 쪼개기 위해 종횡무진 노닐기 시작했다.
도끼날에 번쩍번쩍 반사되는 빛은 마치 바다에 빠지려는 태양처럼 보인다.
“횃대가 여기만 되게 많네요.”
─캬, 시청자 복지 좋구연
─오지는 마공 두고 근접공격으로 상대하는 켄,,,,
─광역딜 어따 팔아먹엇누;;
─광역스킬 두고 근접으로 싸우는 켄이야말로 도덕책...
─시야 밝혀지니 시원ㅡ
간간이 불 켜 주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공터 절반 넘는 구역이 노을의 빛깔로 물들어 갔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물들지 않은 채로 너울너울 춤추는 것은 새까만 망토였다.
콰직!
곧 마지막 그렘린의 머리에 도끼날이 박혔다.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뽑아내면 사방에서 아이템을 뜻하는 빛들이 반짝인다.
【병사들이 함정을 망가트려 놓으니, 그 길을 통해 내려온 모양이다. 어쩌면 안쪽에 더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아 병사 오긴 왓네
─함정을 얼마나 대충 만들어둔겨
시청자들이 동굴의 경계에 대해 삐죽거렸다.
은우는 어깨만 으쓱이며 그가 던져둔 횃불이나 회수했다. 횃불을 머리께까지 들어 올림에 따라 움푹 파인 눈두덩이엔 음영이 졌지만, 그 눈만은 별똥별이 남긴 꼬리만큼의 빛을 일렁이고 있다.
* * *
그르르릉-
온갖 함정을 돌파한 끝에 그는 마녀의 연구실에 도달했다.
병사들을 낚기 위해 존재하는 가짜 연구실을 넘어, 그냥 벽이 아닌가 싶은 곳을 건드리면 또 하나의 방이 드러난다.
야광석들이 사방을 밝히고 있는, 귀네드가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떠난 진짜 연구실이다.
〚한때 정령들에게 물으니, 그들이 나를 사랑하는 이유는 나의 영혼이 고결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나 나는 내 영혼이 고결하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정의롭지도 않고 진리를 깨우치지도 못한 한낱 영혼이 어떻게 고결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껏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튀어나왔던 중음이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정령을 뒤에 둔 이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책장의 길을 거닐었다.
〚고결한 영혼이 진실로 존재한다면, 나는 감히 마소 밥 마소누이가 그런 존재라 말하리라.〛
길쭉한 손가락이 책장과 책장에 빽빽이 꽂힌 책의 책등을 쓸었다. 얕게 쌓인 먼지가 손가락 사이에 짙게 묻어났다.
〚나라를 통치하고자 하면서 평화를 논하는 어리석은 그 남자를, 전쟁으로 약해진 타국을 침략하는 대신 오랜 악연을 청산하고 친교를 청하는 그 우둔한 남자를 감히 고결하다 말하리라.〛
그는 손가락을 책장에서 떼 내고 엄지로 쓱쓱 문질렀다. 책장과 책장 사이에는 촛불이 없어 그림자에 삼켜진 채이지만, 책장 칸의 높이보다 작은 책들은 주홍빛 줄들을 몸에 쩍쩍 그어 주었다.
〚하여 그를 살리기로 결정했다. 그의 고결함이 나의 왕과 고국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하며.〛
걸음을 내딛는 동안 먼지가 조금씩 조금씩 떨어졌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기 위해선 그의 저주를 풀어야 한다. 그가 왕이 될 수 없도록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이자, 그가 시간을 구걸하게 만드는 저주를. 이 연구실은 그것을 위한 단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책장의 길이 끝났다.
〚부디, 이 선택이 틀리지 않기를.〛
드러난 건 오래된 나무 책상과 그 위에 고이 놓인 책 한 권이다.
후우-
그는 입바람으로 책 위에 쌓인 먼지를 불었다. 먼지가 소리 없이 날아가고, 손이 그 위를 한 번 더 털었다.
Pryderi
책 표지에 적힌 이름 하나가 주홍색 불빛을 머금고 음울히 춤을 추었다.
【그 책을 읽으면 너는 너에 대한 의문을 일부 풀 수 있을 거야.】
『프러데리의 일기장
프러데리가 작성한 일기장.』
『읽는다 / 읽지 않는다』
“…후.”
은우는 그 시점에서 몸의 자유를 되찾았다. 손에 들린 두꺼운 책─양장본이었다─은 여전히 먼지 낀 상태다. 너무 오래돼서 단순히 터는 걸로는 제거할 수 없다.
그는 흘러나온 숨을 굳이 삼키지 않고 내뱉었다. 동시에 고개를 돌려 사방을 살폈다. 선택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한 발자국 정도의 반경은 움직일 수 있는 덕이다.
“연구실이라서 그런지 책이 엄청 많습니다.”
─어우,,,,, 책 너무 많다
─10년이나 빛 받게 둔 거임?? 책 삭앗겟다
─책 모으는 사람은 이해할 수가 없음
─그러니까 비수인 거지
─너 천재냐?
은우는 일단 책을 내려놓았다. 아직 서재 겸 연구실 수색을 하지 않았다. 저걸 다 읽었을 때 이 장소에서 내쫓길지도 모르는 일이니, 수색은 미리미리 해 둠이 옳다.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많은 책장과 서랍 몇 개, 열리지 않도록 설정된 문 2개, 책이 너저분하게 얹어진 책상이나 플라스크 같은 도구가 진열된 장식장이 다다. 샤를로테의 능력으로 수색해 봐도 습득 가능한 물건은 없었다.
『아르라우네 ●●●●●●●
보라색 꽃과 과실을 피우는 식물. 뿌리 부분이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뽑힐 위기에 처하면 비명을 지른다.
달여 먹으면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소문이 있다.』
체력은 레벨 1당 ¼칸씩 늘어나니, 은우의 현재 체력 칸이 정확히 원 10개임을 고려하면 7칸이나 회복시켜 주는 아르라우네는 뛰어난 회복 아이템이었다. 비록 시중엔 10칸짜리 회복 포션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만드라고라 아님?
─어 그러네?
─비명 지르는 거까지 딱 만드라고라인데
─존나 인삼처럼 생겼다
─인삼 ㅅㅂㅋㅋㅋ
은우는 유리통에 담긴 아르라우네를 살펴보았다. 인삼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인삼의 가장 굵은 몸통 부위에 얼굴 조각을 하면 이거랑 비슷할 것 같다.
그는 습득 버튼을 눌렀다.
【아르라우네를 찾았구나. 이걸 가져다주면 될 거야.】
『새로운 임무 획득!
하늘로 퍼 올려진 대지
거상에게 아르라우네를 가져다주자』
이제 돌아가면 된다.
“달리 얻을 게 없어 보이니 일지까지만 읽고 갑시다.”
─어케 포션 하나 없냐
─ㅋㅋㅋ10년이나 지나서 다 썩어버린듯
─진짜 아르라우네만 준다고?
─연구실 수듄....
은우는 컷신이 집어 들었던 책 앞으로 돌아갔다. 그러곤 일기장을 들어 올렸다.
『프러데리의 일기장
프러데리가 작성한 일기장.』
『첫 페이지
마지막 페이지
읽지 않는다 ◀』
당연히 첫 페이지를 눌렀다.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