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179화 (179/233)

179화

《해안가 이오베네 섬》

조금 낡긴 했지만, 멀쩡한 배들이 몇 척 널브러져 있는 해안가에 발을 내딛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은우는 그것을 보며 미늘창, 할버드를 들었다. 창처럼 길쭉한 자루 끝에는 큼지막한─그렇다고 무식하게 크진 않았다─도끼날이 달려 있다.

“돌아오고 싶을 땐 이 신호탄을 쏴. 그럼 내가 올 테니까. 아, 덤으로 머맨은 물려주지. 잘 가져오라고.”

어차피 퀘스트 때문에 머맨을 잡아야 하지만, 호의를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다. 돌아갈 때 잡아도 되니까.

은우는 엘프를 두고 본격적으로 이오베네 섬에 발을 내디뎠다. 목적지는 섬 한가운데 있다는 수용소다.

크르르륵?

─아ㅋㅋㅋ

─팬미팅의 현장

─혀어어어엉

─형 잘생겼어요!!

엽마꾼이 들려줬던 대로 이오베네 수용소에서 은우를 가장 먼저 반겨 준 건 구울이었다.

시퍼런 피부는 수분이 빠져서 단단하게 말랐고, 눈은 썩어서 사라졌다. 팔은 기형적으로 길어졌고 입은 귀가 있었을 자리까지 찢어졌다. 그 사이로 불규칙하게 솟아난 이빨은 사람 피부 하난 쉽게 뜯어낼 것 같다.

“안타깝게도…….”

그러나 상대는 은우였다.

“악수는 못 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호흡을 고르며 미늘창을 붕붕 돌렸다. 그리고 그 원심력을 고스란히 담아 구울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안돼 비수들 머리가!

─업계 포상 꺼억

─청자들 머리 부수는 인성;;

─혀어어엉!!

창이나 폴암 종류가 다 그렇지만, 할버드는 거리를 내주면 불리해진다. 물론 팔과 다리로도 충분히 녀석들을 처리할 수 있지만, 그래서야 할버드를 고른 이유가 없지 않나.

은우는 탁월한 거리 조절을 통해 미늘창으로만 길을 뚫었다.

뾰족한 부분으로 녀석들의 명치를 찌르고, 그 상태에서 옆으로 달려가 날을 뽑아낸 후 벽을 박차고 건너편에 착지. 직후 뒤돌며 미늘창을 휘두르면 또 하나의 구울이 머리가 쪼개지며 쓰러진다. 물론 머리가 쪼개지는 건 관념상의 표현일 뿐, 실제론 멀쩡했다.

─아 한입만

─한 번만 맞아주지

─이걸 다 죽이네

“진짜 여러분들이라면 모를까, 구울에게 몸을 내줄 순 없잖습니까.”

─ㅇ?

─??

─아ㅋㅋ 그럼 몸 내놔

─우리한텐 준다는 거임?? ㅗㅜㅑ;;

─몸 내놔

“…그것 참, 품위 넘치는 말들이십니다.”

그는 이그리트를 찾기 위해 수용소를 이 잡듯 헤집고 다녔다. 샤를로테가 지하에서 이그리트의 기운이 느껴진다 발언한 탓이다.

지하로 가는 문은 있었으나, 그 문은 잠겨 있다. 그러니 다른 길을 찾거나 그에 맞는 열쇠를 찾는 수밖에 없다.

은우는 자연스럽게 수용소를 이 잡듯 뒤졌다.

【누가… 누가 이곳의 고요를 깨는가?】

설사 둘라한과 마주친다 해도.

“보스인가 봅니다.”

아무래도 그가 온 길은 지하실로 가는 또 다른 길이었던 모양이다.

은우는 상층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의 석실과 연결된 두 개의 문을 보았다. 하나는 열쇠로 잠겨 있던 문이고, 하나는 지하로 가는 길이다. 후자의 경우 내려가는 계단이 창살 너머로 보여 확신할 수 있다.

【무엇을 찾고자 이 수용소에 왔는지는 묻지 않겠다. 그러나 이곳을 지키고 감시하는 것은 나의 사명.】

그사이 석실 중앙의 둘라한은 무기를 들었다.

“빠르게 처치하고 갑시다.”

【침입자는 용서치 않노라.】

둘라한이 다리로 땅을 박차며 폴암을 휘둘렀다. 은우는 그것을 응시하며 폴암이 내리꽂힐 지점보다 넉넉히 물러났다.

과연, 갑주를 두르고 있음에도 유연하게 몸을 움직이는 둘라한은 그의 회피를 어느 정도 따라왔다. 한 걸음 차로 폴암이 바닥에 때려 박히고, 폴암을 쥔 팔이 보였다.

「‘다이가’ 님이 ‘1,000원’ 투척!

형 한 타마다 무기 바꿔 가면서 싸울 수 있음?」

은우는 들고 있던 세검으로 둘라한의 갑주 사이 이음새를 찔렀다. 그러곤 그것을 뽑으며 두 걸음 물러났다.

“그러면.”

둘라한이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폴암을 휘둘렀다. 딜레이가 거의 없는 쾌속 공격은 두 걸음 물러난 정도로 피하긴 불가능해 보인다.

“너무 빨리 끝날 텐데.”

그렇지만 세검에서 장검으로 뒤바뀐 장비는 그 공격마저 자연스럽게 흘려보냈다.

“괜찮으십니까?”

▣ 179. 그것 또한 운명

둘라한이 거대한 폴암을 좌우로 휘둘렀다. 은우는 그것을 최소한의 점프로 피하며 연이어 쏟아지는 타격기술을 부드럽게 흘렸다. 폴암을 쥐지 않은 손으로 행하는 잡기나 펀치를 밀고 쳐 낸 것이다.

연이어 틈이 나왔다 싶을 때, 은우는 유연한 신체를 이용해 다리를 위로 쫙 찢었다. 돌려 차기가 둘라한의 턱주가리를 정확히 타격했다.

그러자 무척이나 짧은, 보스를 대상으로는 아무 의미 없는 경직 시간이 생겨났다. 공격을 따로 넣기엔 너무 부족하지만, 무기를 교환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세검과 장검, 대검은 고루 사용했다. 하면 무슨 무기를 들어야 할까.

그는 고민을 너무 오래 하지 않았다. 한쪽에 띄워 둔 가방 창을 이용해 그가 꺼내든 건 2m짜리 봉이었다.

─무기 바꾸기 어렵지 않음?

─인벤토리 어케 누르냐;;

─위치 알고 누르시는 거?

─안 보고 템을 고르네....

“위치를 알고 터치하는 거라서 쉽습니다.”

봉을 짧게 쥔 손이 적의 목과 급소를 노렸다. 거리 조절을 위해 때리기보단 밀어내는 형식이었다.

은우의 봉이 둘라한의 명치를 꽉 찌르듯 밀치고, 그 반동으로 그의 몸이 뒤로 물러났다.

【가소롭다!】

둘라한이 빠르게 폴암을 쏘아 보냈다. 그렇지만 은우는 봉의 길이만큼 거리를 벌린 차다. 거기에 그의 손에 들린 무기는 어느새 츠바이헨더가 되었으니.

츠바이헨더가 둘라한의 폴암과 맞닿고, 그것을 밀어내듯 쳐 냈다. 실질적인 근력은 캐릭터의 능력이 훨씬 떨어지나, 패링 성공 판정은 그 비현실을 현실로 가져온 것이다.

힘 싸움에서 패배한 폴암이 옆으로 밀려나자 둘라한의 가슴팍이 훤히 보였다. 은우의 무기는 잠깐의 빛 끝에 메이스로 변한 채다.

까앙!

─홈런!

─소리 개찰쳐ㅋㅋㅋ

─까앙 ㅇㅈㄹㅋㅋㅋㅋ

메이스가 둘라한의 머리를 또 한 번 치고, 그는 둘라한의 무기와 둘라한의 몸 사이 틈을 이용했다. 그 구멍을 통과해 뒤로 싹 물러난 것이다.

그러나 둘라한도 완전한 바보는 아니었다. 그것은 뒤로 한 발 내디디며 허리를 급격하게 틀었다. 허리가 틀어지는 것에 맞춰 팔을 휘두르기도 했다. 강맹한 바람을 휘감은 폴암이 공기를 갈랐다.

은우의 몸이 바닥으로 쪼그려 앉듯 붙었다. 그 위로 폴암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가면, 그의 몸은 앞으로 기울어지듯 튀어 나가는 중이다.

불어온 바람이 투구 속 머리를 간지럽혔다.

사각!

메이스에서 단검으로 변경된 무기가 둘라한의 발목과 무릎을 그었다. 핏줄기가 튀었다면 완벽했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좋다.

【이 자식이!】

둘라한이 분노하여 폴암을 아래로 내리꽂으려 들었다. 마치 물속의 물고기를 작살로 사냥하는 사냥꾼의 자세다.

그러나 은우는 담담했다. 면을 공격하는 휘두름보다 한 점에 집중되는 찌르기가 위력이 강한 건 맞으나, 그것도 맞았을 때야 성립되는 이야기기 때문이다.

“얼마나 깎았죠.”

몸을 굴리듯 옆으로 대피한 은우의 옆으로 폴암이 박혔다.

─반 넘게 깎으심

─와 벌써 삼분의 이 넘게 까엿네

─난,,,,,3트해서 겨우 잡앗는데....ㅎㅎㅎ....

─박자 개그지 같아서;;

자칫하면 그의 몸에 내리꽂혔을 것임에도, 그는 일말의 동요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대신 은우는 겹쳐졌던 손 사이를 벌렸다.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활대가 구부러졌다. 그 사이로 튀어나온 강철 촉은 그의 위를 향한다.

“아, 벌써 2/3 넘게 까였네요. 조금 실망인데.”

팍!

둘라한의 머리를 꿰뚫은 채로 화살은 정지했다.

그는 둘라한이 발을 드는 걸 보며 무기를 바꿔 들었다. 편이었다.

촤악!

둘라한이 든 다리가 채찍에 얽혔다. 은우는 그 상태에서 채찍을 당겼다. 둘라한이 휘청이며 균형을 잡기 위해 무릎을 살짝 접을 때엔, 그 허벅지를 밟고 뛰어올랐다.

어느새 단검에서 활로, 활에서 채찍으로, 채찍에서 기어코 은을 바른 쌍검으로 바뀐 무기가 하늘을 향해 치켜세워졌다.

교차하는 은빛 날은 석실 내 광원, 횃불의 빛을 받아 추락하는 태양의 색을 번들거리고 있다.

“숨 쉬시라고 말할 타이밍도 안 나오네.”

은우의 몸이 허공에서 회전했다. 검날은 그 회전을 따라서 허공과 둘라한의 어깨를 갈랐다. 등에서 가슴 쪽으로 두 갈래의 공격을 명확히 넣은 것이다.

탁.

발이 땅과 닿았다가 다시 떨어졌다. 은우의 몸은 옆으로 틀어진 채 둘라한의 등을 향해서 칼날을 세우고 있다.

또 한 번 갈아 치워진 무기는 츠바이헨더와 비슷한 클레이모어다.

푸욱!

둘라한이 달리 반응하기도 전에 은우는 그것과 밀접한 거리를 차지했다. 클레이모어의 칼날이 그것의 겨드랑이부터 반대쪽 어깨를 이었다.

“마지막을 장식할 무기는 뭐가 좋습니까?”

「‘이걸기다렸다’ 님이 ‘1,000원’ 투척!

마법!」

─쌍검이요

「‘존버충’ 님이 ‘1,000원’ 투척!

활 해주세요」

─채찍

─마법!

─존버충들 보소,,,,

─ㅇㄴ 놓쳣어ㅠ

예상외의 답변이었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렇게 이상한 답은 아니었다. 평소의 그는 마법을 잘 안 썼으니까.

“알겠습니다.”

둘라한의 창날이 그를 향해 떨어지고, 은우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스텝을 밟았다. 간발의 차로 그 바로 옆에 폴암이 처박혔다.

은우의 가죽 장화가 그것을 지그시 밟는 건 그 이후의 일이었다.

“파이어스톰.”

주황색 마법진이 둘라한의 바로 아래 나타나더니 불꽃으로 만들어진 용오름을 토해 냈다. 마나를 절반 정도 잡아먹는 이 스킬은 둘라한의 피를 순식간에 곤두박질치도록 만든다.

─??

─마법 시전속도 실화냐?

─시전 개빨러....

─캐스팅이 있었는데 없습니다

본래 ‘네 개의 가지’에서 마법을 발동하려면 캐스팅이라는 중간 작업이 필요하다. 머릿속으로 원하는 스킬을 선택하고, 마법이 발사될 방향이나 목표를 결정짓는 작업이었다.

후자의 경우 시선 처리로도 목표 지점을 옮길 수 있고, 발사됐을 때의 도착 지점이 하얗게 표시되므로 그렇게 어려운 작업은 아니다.

그러나 그게 어렵지 않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즉발적인 경우는 드물다.

─싸가지 고인물들은 저거 기본임

─늅 기준이 캐스팅 1초 컷이잖;;

─고인물들 수듄ㄷㄷ

─굇굇들은 켄님만큼 빠름

그나마 은우만 쓸 수 있는 수준의 신기는 아니었기에, 마법에 대한 경악은 금세 흩어졌다.

“열쇠 나왔네요.”

역시 둘라한이 열쇠를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은우는 그것이 드랍한 아이템들을 수집한 후, 가장 먼저 잠긴 문으로 향했다.

『열쇠를 사용해서 문을 엽니다.』

잠긴 문은 역시나 숏컷이었다. 은우는 그것을 훤히 열어 둔 채 이제 그의 진정한 목적지로 향했다.

끼이익-

쇠창살 문이 소름 끼치는 쇳소리와 함께 열렸다. 이우는 순간에도 춤을 추는 불들은 쇠창살 너머 계단을 옅게 비춘다.

“대체 누가 봉인했는지는 몰라도, 제대로 봉인했습니다.”

─ㅇㅈ...

─진짜 어쩌다 일케 봉인 됏냐

─귀네드가 한 거 아님?

은우는 계단 아래로 걸음을 차근차근 옮겼다. 그러자 어느 순간, 발에서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기운은 아니었다.

이건 마치 물에 빠진 것 같은…….

─으 지하수로 극혐

─나 여기 개싫어

─너무 어두워서 몹 잡기 힘들지.. 여기

더 이상 내려갈 계단이 없다 싶을 때, 무릎까지 차오른 지하 수로의 물이 찰랑거렸다.

은우는 그 상태에서 스윽 스윽 걸었다. 다리에 저항감이 들었지만, 밀고 넘어가면 물들이 양쪽으로 밀려나며 전진을 허락한다.

다행히 스태미나가 달진 않았지만, 대신 이동 속도에 페널티가 붙을 성싶다. 실제로 걷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화면 너무 어두운데

─켄님 안 보여요ㅠ

─암 것도 안 보여유

─밝기 높혀야 하나?

“아, 여러분께는 그냥 검정색 화면으로 보이시겠네요. 포션은 시야가 부예서 좀 그렇고… 불을 켜 드리겠습니다.”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답게 ‘네 개의 가지: 마비노기’에는 포션이 존재한다.

포션의 종류는 매우 다양해서 회복용, 도핑용을 넘어 어두운 공간에 들어갔을 때 시야를 밝혀 주는 것도 있다.

그러나 포션을 단시간에 많이 마시면 ‘상태 이상: 포션 중독’에 걸릴 수 있는지라, 포션 외 다른 방법도 마련되어 있다.

화륵-

“마법 배워 두길 잘한 것 같습니다.”

그건 바로 횃불 밝히기다.

시야 전체를 밝혀주는 야간 시야 포션과 달리, 횃불 밝히기는 횃불 주변만 밝아지기에 각각 장단점이 있다. 마법을 안 배웠다면 부싯돌─개당 5회 사용 가능─을 소모해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은우는 후자를 선호했다. 시청자들이 포션의 효과가 궁금하대서 한번 먹어 봤는데, 시야가 너무 보얗던 탓이다. 마법을 안 배웠어도 횃불에 의존했을 터다.

“마법이란 거, 상당히 편하네요.”

─마법 대만-족

─재능낭비는 면했누

─ㅋㅋㅋ재능낭비 돌앗ㅋㅋㅋ

─마법 근데 진짜 편하긴 할듯

하긴 하나의 원소만을 다룰 수 있던 전생에서도 마법은 편리하기 그지없었다. 다양한 원소를 다룰 수 있는 이 게임은 더 편할 수밖에 없다. 불, 바람, 물(얼음), 흙, 전기 이렇게 5속성밖에 없긴 하지만.

은우는 벽에 마련된 횃불마다 불을 붙이며 나아갔다. 횃대에 주홍빛 불꽃이 피어오를 때마다 어둠은 한 걸음씩 물러난다.

파스스슥.

퐁당.

문득 벽에서 돌가루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아주 얕은 퐁당 소리가 났다. 뒤쪽에 불붙여 둔 횃불의 반경과 어둠 사이에 걸쳐선 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나둘, 옵니다.”

캬아아악!

─으악

─머임 머임

─ㅅㅂ ㅈㄴ 놀랏네 뭐임

─ㅇㄴ

─깜짝아

은우는 몸을 비틀었다. 무언가가 그의 앞에 떨어졌다. 부딪치진 않았으나 공기의 유영 따위가 명백히 그의 앞에 무언가가 있음을 말해 준다. 횃불의 얕은 빛에 살그머니 드러난 뼛조각도 또 하나의 증거다.

─ㅠㅠㅠㅠ내 심장ㅠㅠ

─진짜 갑자기 튀어나와서 놀랏다....

─뭐임? 뭐 나타낫음?

그르르륵, 딸깍.

“말도 해 드렸는데 왜 놀랍니까. 스켈레톤입니다.”

은우는 은을 도금한 검으로 두개골이 있을 법한 자리를 그대로 찍었다. 어둠에 반쯤 묻혀 있는 스켈레톤이었지만, 그의 엄청난 경험치는 어림짐작의 손길을 옳게 만들었다.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두개골이 부서졌다.

“스켈레톤은 두개골 부수기가 쉬워서 좋습니다.”

팔다리를 자르면 금세 붙어서 별 소용이 없다. 은을 덧바른 검으로 머리통을 부수어야만 죽었다.

얼핏 보면 까다로운 마물이나, 내구력이 형편없어서 익숙해지면 상대하기 쉽다.

─난 제일 까다롭던데...

─두개골 맞추기가 너무 어려웜...

─마법으로 상대하면 좀 편함

─굇굇이면 눈감고도 때려야지

“아닙니까?”

은우는 검을 집어넣고 창을 꺼내 들었다. 폴암보다는 일본식 창, 야리やり에 가까운 창이다. 전체 길이가 2m를 좀 넘기는데, 그중 날 길이가 70cm가 넘는다.

좁은 지하수로에서 쓰기엔 창은 너무 긴 무기지만, 그래도 통로 폭이 3m에 높이는 4m가 넘는 지하 수로였다.

“전 물고기 잡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합니다만.”

콱!

마음껏 휘두르진 못해도 물속에 숨어 있던 적을 내려찍긴 좋다. 작살 대용이었다.

─ㅇㄴ

─아 저새끼 개극혐!

─와 이걸 바로 알아채시네

“하긴, 얘도 다가올 때 물이 흔들려서 알기 쉽긴 하죠.”

─?

─??

─ㅋㅋㅋㅋ

─벌써 고이셧누,,,,

─굇굇;;

은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목덜미를 쓸었다. 어렵다면 뭐, 어쩔 수 없고.

그는 손가락을 튕겨 불꽃을 일으켰다. 건너편 횃불에 불이 붙었다.

딸깍딸깍.

그때, 어둠 저편에서 푸른 귀화를 눈구멍에 담고 있는 스켈레톤들이 다가왔다. 횃불의 반경에 들어왔을 땐 도금한 것처럼 주홍빛을 어른어른 뼈에 머금고 있다.

은우는 그것을 보며 이번엔 편을 들었다. 흑장미 가시넝쿨과 야수의 피를 재료 삼아 마녀가 만든 채찍이다.

은우의 편이 해골의 두개골을 휘감고 그대로 당겼다. 해골이 그대로 질질 끌려오더니 그의 바로 앞에서 넘어졌다.

촤악!

스켈레톤이 넘어지면서 물이 순간 넘실거리고, 은우는 물에 잠긴 그것의 두개골을 발로 짓밟았다. 발로 찍어도 대미지가 들어가도록 패시브를 찍어 둔지라 스켈레톤의 두개골은 단번에 박살 났다.

“그보다 갈랫길이 많네요. 샤를로테가 아니었으면 오래 걸렸겠습니다.”

─개극혐

─PC겜 미로도 빡치는데 VR 미로는 진짜...

─길치는 죽음 뿐

─샤를로테,,, 그저 빛,,,,,

지도는 없으나, 샤를로테가 만들어 준 나침반─이그리트가 봉인된 방향을 가르쳐 준다─이 있어서 길 찾기는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다.

은우는 횃불로 밝혀진 3개의 길을 살폈다. 물론 검은 물 위로 주홍빛 반경이 물결치는 것밖에 보이는 게 없다. 기껏 추가해 봐야 이끼 낀 돌벽 정도?

새삼스럽게 샤를로테의 나침반이 다행으로 느껴진다.

“찾았습니다.”

대략 15분의 수색 끝에 은우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녹슨 철창문이 열리고 계단이 나타났다. 안쪽에 횃불이 걸려 있는지 계단은 제법 밝았다.

은우는 그곳을 차근차근 올랐다. 대략 1m 정도 되는 높이의 짧은 계단이 끝나면 불이 밝혀진 석실이 나타난다.

그 중심에는 붉은 돌을 곱게 올린 제단이 있다.

【저거야! 저게 이그리트가 봉인된 돌이 분명해!】

샤를로테가 흥분해서 석실을 한 바퀴 돌았다. 은우는 그 사이를 유유히 걸어 제단으로 다가갔다. 특별히 컷신이나 함정 같은 건 마련되지 않은 모양이다.

“이게 이그리트가 봉인된 돌인가 봅니다.”

─ㅈㄴ 이쁘다

─근데 저거 엘프 갖다줘야하는 거 아님?

─맞음

─그럼 어케 되는겨

은우는 제단 위 홍옥을 내려다보았다. 세공을 하지 않은 듯, 그것의 단면은 불규칙한 크기로 제멋대로 이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웠다.

레드 다이아몬드, 루비, 가넷……. 어떤 붉은색 보석을 가져와도 보석 안에서 불꽃이 살아 움직이는 이 돌을 이길 순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해당 아이템에서 정령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아이템을 부숩니까? 부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부순다 / 부수지 않는다』

그것을 잡아 올리니 그런 창이 떠올랐다. 은우는 그걸 보며 일단 ‘부수지 않는다’를 택해 보았다. 그러자 보석을 잡았던 손이 강제로 보석을 내려놓았다.

다시 들고 가려 하면 같은 창을 마주해야 했다.

“구조상 애초에 부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어 있네요.”

─엘프: 브라더다메요!!

─ㅋㅋㅋ엘아치 쉑ㅋㅋㅋ잘됏다ㅋㅋ

─다 부숴!

「‘제작진’ 님이 ‘1,000원’ 투척!

부수라 이 말이야~」

제작진이 그렇게 만들었다면 따라 주는 수밖에.

은우는 보석을 부쉈다. 100캐럿을 훌쩍 넘길 크기의 홍옥에 금이 빠직빠직 가더니 기어코 산산조각 났다.

〚군주의 덕목은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동요하지 않고, 어떤 순간에도 절대 다수를 고를 수 있어야 함이라.〛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빛으로 쨍한 시야 사이로 어렴풋하게 누군가가 보였다. 지금까지는 흐릿한 이목구비나 뒷모습 정도였다면, 지금은 조금이나마 더 선명했다.

〚어질고 자애로운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대체 어떤 모습일까?〛

그건 새파란 머리카락을 휘날린 채 다섯 명의 정령을 곁에 둔 사람이었다.

『새로운 기억 획득!』

【후우…….】

그사이, 비산하는 보석 파편 사이로 불꽃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장작 더미도 없건만 알아서들 불어나더니, 어떤 형상을 매끄럽게 형성하는 것이다.

눌러쓴 고깔 모양 후드와 허리에 휘감은 천, 치렁치렁한 옷. 손에는 촛대가 달린 지팡이를, 눈은 가림천으로 질끈 가렸다. 실로 종교에 귀의한 사람을 보는 듯하다.

불로 구성되어 있되 채도가 달라 피부와 머리카락, 옷가지를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와...정령 진짜 개잘만들엇다

─수도사임?

─존예보스

─ㅈㄴ 신비롭게 잘 만든듯

─남캐임?

글쎄. 은우로선 신비함보다는 ‘공격하기 어렵겠다.’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일반 물리 공격으로는 타격을 안 입을 테니까.

그는 불로 빚어진 이가 고개 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일반적인 화염이 그러하듯, 그것은 완벽한 형상을 유지하기보다 그 가장자리를 소실하고 새롭게 채우길 반복하고 있다.

【넌… 아아, 결국 깨어난 건가.】

【참고로, 기억이 완벽하지 않아. 이름도 달라졌고.】

【그렇군……. 그래, 그것 또한 운명인 거겠지.】

이그리트는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샤를로테만큼 다정하진 못해도 온후하고 점잖았다.

【나는 이그리트. 깨워 줘서 고맙구나.】

이그리트는 공중에서 바닥으로 내려와 허리를 굽혔다. 불꽃이 은우를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렸다. 불의 세기가 약해, 위협보다는 어떤 의식의 느낌이 들었다.

【불은 파괴와 재앙의 상징. 그렇지만 현명한 자는 불로 겨울을 나고 어둠과 짐승을 쫓으며 스스로를 보호한다.】

허리를 굽혔던 이그리트가 천천히 몸을 곧추세웠다.

【네가 나의 힘을 어찌 다룰지, 기대하겠다.】

『불의 정령, 이그리트

가호: 정화. 파괴는 때론 정화와 같음이라.

모든 것을 불사르는 불꽃을 소환한다.』

새로운 스킬이 추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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