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175화 (175/233)

175화

“저희 측 실수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상황이 파악되자 소장님께서 가장 먼저 사과를 했다. 레드바가 당황해서 손을 저었지만, 은우가 보기엔 정당한 사과였다. 자칫하면 큰일이 될 수 있는 상황 아니었던가.

하물며 탈출했던 건 핏불테리어였다. 정리된 후 들은 이야기지만, 잘못 물리면 사지 절단을 넘어서 사망까지 이를 수도 있는 견종이랬다.

“원래 맹견 애들은 따로 구분해서 두는데, 민식이는 얼마 전에 저기 있는 로건이랑 같은 곳에서 구조됐거든요. 떨어지면 짖고 막 그러다 보니 붙여 둔 건데……. 아마 봉사자님이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했나 봐요.”

여길 자주 온다는 봉사자가 안타까움에 젖은 채 민식이, 그러니까 핏불테리어에 대한 이야기를 흘렸다. 핏불테리어와 함께 개 공장에서 구출됐다는 로건은 도베르만 믹스였다.

인간이었다면 가차 없이 아웃이었을 것이나, 대상은 귀여운 강아지였다. 맹견이란 점을 감안해도 인간보단 귀엽다. 시청자들이 ‘ㅠㅠ’만 쳤다.

가장 큰 피해자인 레드바는 그 사정을 듣고 홀랑 넘어갔다. 소장님의 정중한 사과와 결과적으로 물리진 않았다는 사실이 그를 용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레드바는 원래 보호소에서 봉사하다 보면 예민한 개들에게 물릴 때가 꽤 있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었다. 대체로 밝고 순한 아이가 더 많지만, 인간에게 버려지거나 학대당해서 구출돼 온 아이들인 만큼 모든 강아지에게 그런 걸 바랄 순 없다.

견종이 문제였지 물릴 뻔한 것 자체는 새삼스럽게 뭐라 할 문제가 아닌 셈이다.

“전 정말 괜찮아요. 제가 봉사 한두 번 오나요. 상황이 그래서 그런 거지, 애들 잘못 아닌 거 알아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번 일은 단단히 주의를 주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뭐, 레드바의 용서와 별개로 문책은 있을 것 같다. 개야 잘못이 없다고 해도 철창 잠그는 걸 깜빡한 건 확실히 그네들 책임이니까.

보통 같았다면 사상자가 안 나왔다며 쉬쉬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방송으로 고스란히 송출됐으니…….

뭐, 그 문제는 이 사람들이 알아서 할 거다. 은우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다.

“다른 봉사자님께도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저도 괜찮습니다.”

사과는 은우에게도 돌아왔다. 물론 은우는 별생각 없었다. 한 대 맞았을 때 가만히 있는 유형은 아니다만, 이번 상황은 콕 집어서 누구 잘못이라고 할 수 없지 않나.

있다면 문 잠그는 걸 깜빡한 직원이 있겠으나, 굳이 화내고 싶진 않다. 온 정성을 다해 동물들을 보호하는 사람들인데 그에게 별 위협도 되지 않은 일 가지고 어떻게 화를 내겠나. 잘못한 사람이야 법이 알아서 때려 줄 것이기도 하고.

“아, 여러분. 이런 일 터졌다고 막 봉사 무서워하면 안 된다?”

그사이 레드바는 서둘러 이번 사건에 대해 변명을 던졌다. 이번 일이 봉사자를 줄어들게 만들까 봐 노심초사하는 느낌이다.

“이런 일은 진짜 적어. 아까 견사 돌아다닐 때 봤지? 애기들, 순하고 착한 애들이 더 많아. 예민한 애들은 단지 그만큼 상처를 더 받은 것뿐이야. 다들 내 얘기 뭔지 알쥐, 알쥐?”

─좆간이 미안해..ㅠㅠ

─다 인간 탓이지 뭐

─아 그래도 좀 무섭다... 잘못 물리면 죽는 거 아님?

─저게 자주 일어나겟음?

─일어날 수 잇다는게 문제인 거지

방송이 실시간으로 돌아갔던 만큼 사건의 위험성은 고스란히 전달됐다. 좋은 취지로 나온 방송이 악영향을 끼치게 된 상황에서 레드바는 필사적이었다.

다만 사건이 워낙 덮기 힘든 부류라 그런지 부정적인 여론이 톡톡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레드바의 눈매가 파르르 떨리더니 갑작스레 소장님에게 달라붙었다.

“소장님, 제가 알기로 이렇게 강아지들이 무는 게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맞죠?”

부정적인 부분을 갑자기 부각시키는 레드바의 행위에 소장님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으…렇죠?”

“와, 그럼 평상시에 물릴 거 각오하시고 이 일을 하시는 거네요?”

“그으렇죠.”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는 거예요?”

레드바는 특유의 싹싹한 태도로 친근하게 물었다. 그러자 소장님도 긴장이 덜어진 듯 그 부분에 대해 자세히 말하기 시작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다칠 때가 자주 있어요. 물리는 것 외에도 할큄당할 때가 있어서. 그렇지만 저 애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그녀는 푸근한 얼굴로 ‘몸은 고되어도 인간의 욕심으로 이곳에 오게 된 유기 동물들을 끝까지 책임질 것이다.’란 말을 길게 풀어 말했다.

물릴 수 있다는 위험성이 단숨에 숭고한 일 사이에 껴 있는 고난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와, 님들도 들었지? 진짜 동물 보호소라는 게 쉬운 게 아니야. 그러니까 동물 키우는 사람들, 진짜 책임감 빡 쥐어. 그리고 여유 있으면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은우는 그런 힘겨운 일을 업으로 삼은 소장님의 신념에 감탄하고, 여론을 다시 좋은 쪽으로 돌려 버린 레드바의 말재주에 감탄했다.

저런 언변은 단순히 똑똑하다고 나오는 게 아니다. 지혜롭고 현명하다. 레드바가 스트리머로서 꾸준히 인기를 끌 수 있는 동력원을 엿본 기분이었다.

“여러분도…….”

은우는 입을 슬쩍 열었다. 레드바 같이 솜씨 좋은 말솜씨는 없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배경이 말한다

─조각상이 말한다

─인형이 말한다

─고영탈 진짜ㅋㅋㅋ

다만 옆에서 나름 맞장구를 치긴 쳤어도 특유의 말투 덕에 침묵을 더 많이 지켰더니 그거 가지고 득달같이 놀린다.

그는 손가락으로 드론을 톡 쳤다.

“여러분도 동물 키우시거나 키우실 예정이라면 책임감을 가지고 대해 주십쇼.”

─협-박

─동물 버리는 새끼 켄한테 목 따일 듯;;

─와,,,,,,,,

─저,,절대 그러지 않겟읍니다,,,

놀림 때문에 목소리를 좀 낮췄더니 그거 가지고 또 뭐라 한다. 애초에 동물을 책임감 있게 대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은우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사람을 봐도 단단히 잘못 보신 모양인데…….”

사람들이 협박으로 놀리겠다면, 그는 한술 더 뜨면 된다.

“제가 협박을… 할 것 같습니까?”

은우는 방송하면서 배운 시청자 대응법을 이행했다. 뉘앙스를 달리한 덕에 ‘협박을 왜 하냐’가 아닌 ‘협박만 하겠냐’의 느낌이 문장에서 묻어난다.

─ㅇㄴ

─이건....‘진짜’다.....

─다들 들엇냐?

─ㄹㅇㅋㅋ만 쳐!

─ㄹㅇㅋㅋㅋ

─ㄹㅇㄷㄷ

“버리지 말고 애정을 가지고 키워 주세요. 반려동물 아닙니까.”

은우는 그렇게 말하며 힐끗 견사 안에 있는 민식이를 보았다. 집중 치료실이나 그런 데로 옮기자니 이미 다른 아이들로 가득 차 있어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기실 옮긴다고 해서 당장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조련사가 한 명 있긴 하지만, 그녀가 나선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지 않나.

오랜 시간을 들여 아이를 바꿀 순 있어도, 마법 봉처럼 단번에 뿅 바꾸는 건 무리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견사로 다가갔다. 민식이가 꼬리를 좌우로 한 번 흔들었다. 짙은 회갈색 털은 반들반들했다.

─아우 이쁜거 봐ㅠ

─생긴게 믹스인가 본데?

─아까 사람한테 덤비던 걸 봐서 그런가 좀 무섭다...

─지금은 일케 얌전해ㅠ

지금은 참 얌전한 게, 아까의 공격성을 찾아볼 수 없다. 정말 친구 때문에 이를 드러낸 게 맞나 보다.

“…어, 뭐 하세요?”

“그냥, 좀. 지금도 시선을 안 피하는 게 신기해서요.”

은우는 진정한 상태에서도 그를 보고 주춤거리지 않는 강아지를 가만히 보았다. 여기 보호소에 와서 유일하게 그를 보고 기죽지 않는 강아지다.

인간 입장에서야 위험해 보이지, 친구를 위해 나선 용감한 강아지이기도 하다.

─그러네?

─구울왕 보고 겁 안 먹다니,,,,

“다들 제가 무슨 병기라도 되는 양 말씀하시는군요.”

─맞잖아요

─님 병기 아녓음?

─....변기...?

─미친놈아 변기말고 병기

─혼자서 다 썰고 다니는 분이 병기가 아니면 무엇이죠?

반박할 말이 없어서 조금 열받는다. 실제로도 저 강아지보단 은우가 더 위험했다.

은우는 벌칙으로 그의 옆에 동동 떠 있는 촬영용 드론을 손가락으로 쓱 밀었다. 카메라 부분이 빙글 돌아갔다.

─?

─왜 돌려요

─???

“왜 돌리겠습니까?”

은우는 손가락으로 탈 안면부를 잡고 벗었다. 참고로 카메라에는 벗는 모습이 가장자리에 삐져나도록 보일 거다. 벗고 난 후의 얼굴은 뒤통수의 삐쭉한 머리카락이 다겠지만.

─머임??

─탈 벗은 거임???

─보여줘요!

「‘뚠뚠’ 님이 ‘1,000원’ 투척!

뭐야 보여줘요」

─얼굴깜???

갑자기 벗은 것에 별 이유는 없었다. 시청자들에게 복수할 겸 그냥 저 민식이랑 눈을 맞추고 싶었다. 덥기도 더웠고.

“…안녕.”

탈을 벗으니 시원한 공기가 폐부를 파고들었다. 은우는 숨을 몇 번 들이쉰 후 강아지를 물끄러미 보았다. 눈을 마주치니 민식이가 꼬리를 한 번 더 흔들었다. 까만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이 개는 어떻게 됩니까?”

“글쎄요……. 솔직히 이런 일은 처음이라……. 직원이야 다들 이해하고 넘어가는 편인데, 봉사자들은 또 다르니까요.”

─물렸으면 안락사하나?

─ㅇㅇ...우리나라는 아직도 안락사 가능해서

─아니 그래서 왜 돌려!

─핏불은 솔직히 수입 금지 시켜야함;; 왜 아직도 법제정 안 하냐?

「‘핑핑’ 님이 ‘1,000원’ 투척!

얼 굴 까! 얼 굴 까!」

─국회가 일하는 거 봄?

─헬멧 벗엇으뮤ㅠㅠㅠㅠ

시청자들이 절규하는 사이 은우는 상념에 잠겼다.

안락사 자체에는 별생각 없다. 맹견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분하는 건 본인들의 무능을 부각시키는 일이나, 처분 자체는 탓할 수 없지 않나.

상대에게 지성이 있어 타협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야생에 풀어 줄 수는 더더욱 없다.

인간의 관리 실패로 죽게 생긴 짐승이 불쌍할지언정 미안하진 않다. 과거 인간을 대변해 괴수를 찢어 죽이던 사람의 가차 없는 생각이었다.

“기회는 줘도 될 것 같은데.”

다만, 그래. 은우, 그가 한 번의 기회를 받았듯, 강아지에게도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단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 학생들을 죽였다면 피해자였다 한들 그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을까? 같은 맥락에서 이 강아지가 레드바의 목숨을 앗아갔다면 이런 대우라도 받을 수 있었을까?

다른 말로, 학생들을 죽이지 않아서 그가 이런 기회를 받았듯, 레드바에게 해치지 못한 강아지에게도 그런 기회가 내려져야 되는 거 아닐까?

“안락사는 성급한 결정 같네요.”

“그렇죠?”

민식이를 앞에 두고 중얼거리고 있자니 히죽히죽 웃는 얼굴의 레드바가 다가왔다.

그도 드론을 붙잡고 카메라 방향을 돌리고 있는 게 배려 하난 확실하다. 저쪽도 채팅 창이 아마 난리 났을 것 같지만.

“행님.”

“…네.”

근데 표정이 왜 저래. 은우의 눈이 묘해질 무렵, 레드바가 슬쩍 물었다.

“털 알레르기 있으세요?”

“아뇨.”

“개 싫어하세요?”

“그랬다면 봉사를 안 왔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네. 그럼 집 넓으시죠. 저번에 넓다고 하신 것 같은데.”

“…넓기야 넓습니다만.”

그쯤 되니 은우도 감 잡혔다.

“키울 자신 없습니다.”

“에이, 누가 당장 생각하래요? 애초에 입양 그거, 함부로 못 합니다? 특히 맹견은 규제가 심해서 교육도 따로 받아야 하고……. 그냥 저랑 자주 봉사 좀 오자, 그런 뜻이었어요.”

아무리 봐도 그런 뜻이었는데. 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물론 철면피 레드바는 그런 것에 굴하지 않았다.

“자주 오실 거죠? 그쵸?”

“그렇긴 할 건데…….”

“흐.”

─아ㅋㅋㅋ반려동물 딱대ㅋㅋㅋ

─대형견이 대형견을 키우누ㅋㅋㅋㅋ

─애벌레 건수 꽉 물엇네ㅋㅋㅋ

시청자들은 자기 일 아니라고 낄낄대며 웃고 있다. 과연 끝에 웃는 자가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전 고양이가 더…….”

월!

철창 사이로 코가 살짝 튀어나왔다. 주변 살이 꾹 눌린 게 조금 귀여웠다. 아니, 조금은 아니고 좀? 좀보단 많이?

은우는 무의식적으로 사고 회로를 돌리다 말고 직감했다. 끝에 웃는 사람이 누구든, 일단 그는 아닐 것 같다.

“엇, 맞다. 민식이? 민식이도 산책 갔다 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방금 전 일이 있어서… 위험해요.”

“애초에 활동량 못 채우면 더 위험해지지 않아요? 그렇다고 대형견들 산책 기회가 쉽게 오는 것도 아니고…….”

“그건 그런데…….”

“입마개 다시 하고… 켄 님만 괜찮으시면 켄 님이 산책시켜 주시면 딱일 것 같은데.”

레드바는 정말 한술 뜨는 수준이 아니라 한 삽을 펐다. 반박하거나 거부할 거리가 없는 게 악질이었다.

레리는 레드바보고 말 못한다며 놀렸는데, 저게 어딜 봐서 말 못하는 사람인지.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핏불테리어 정도의 힘을 버틸 사람도, 흥분했을 때 제압할 만한 사람도 그밖에 없다. 은우는 결국 탈을 재차 쓰고 산책 제안을 받아들였다.

월!

다만 문제는 민식이가 로건, 즉 친구인 도베르만의 견사 앞에 가서 뱅글뱅글 돌더니 문을 벅벅 긁은 점이라.

“…쟤까지 같이 가도 괜찮겠습니까?”

“어머, 괜찮으시겠어요?”

“네.”

강아지가 바라는데 인간이 안 들어줄 순 없었다.

은우는 그날 두 대형견과 그 주변 도로를 뺑뺑 돌아다녔다.

▣ 175. 안녕, 아가?

─켄하

─개 키우신다면서요ㅋ

─ㅎㅇㅎㅇ

─켄님 개 키우신다던데

─안녕하세요!

“아닙니다.”

은우는 사람들의 놀림을 듣고 채팅 창을 흘겨보았다.

“저도 저를 모르는데 어떻게 함부로 다른 생명을 책임지겠습니까.”

아직 그가 그리는 후일에는 선 하나 그어져 있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강아지 두 마리를 그려 넣고 싶진 않다. 그에게 안 좋기 보단 강아지들에게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아님?

─ㄲㅂ

─멈머ㅠ

“네. 그러니까 섣불리 이야기 꺼내진 않을 겁니다. 여러분도 농담 삼아 얘기하는 것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은우는 거기까지 말한 후 한 호흡을 뛰고 다시 발언했다.

“오늘 방송할 게임은, 이겁니다.”

─?

─싸가지다!

─헐 싸가지

─생방!!!!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그는 속속들이 들어오는 이들을 추가로 반겨 주며 게임을 구매했다.

“시간은 아직 안 됐지만… 미리 다운로드하겠습니다.”

보통은 10분 정도 사람들이 모일 시간을 준 후, 게임 구매와 다운로드 과정을 인증한다. 그렇지만 이번 게임에 대해선 과감히 먼저 다운로드를 시작했다.

이번에 고른 게임이 MMORPG를 목표로 했다가 제작사의 내부 사정으로 RPG에 그쳐 버린 게임이기 때문이다.

MMORPG에서 RPG로 전환하게 된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한때 MMO를 노렸던 만큼 해당 게임은 맵이 더럽게 컸다. 다른 말로는 용량이 크다.

─싸가지!

─싸가지 ㅁㅊㅋㅋㅋ

─싸크리트들 온다 와

“…틀린 말은 아닌데, 약칭 볼 때마다 기분이 참 묘합니다.”

─ㅋㅋㅋㅋㅋㅋ

─왜 싸가지임?

─이름이 ‘네’ 개의 가지잖

─네가지ㅋㅋㅋ

게임의 정식 명칭은 ‘네 개의 가지: 마비노기’로, 웨일스의 산문집 《마비노기온》에서 따온 이름이라 들었다.

물론 한국인들은 사정 따위 봐주지 않고 네 개의 가지를 싸가지라 줄여 불렀다. 약칭이 어찌나 도드라지는지, 게임 안 해 본 사람은 많아도 이 게임을 모르는 사람은 한국에 없을 수준이었다.

아직 완결이 안 난 장수 만화, ‘명탐정 코X’을 안 본 사람은 많아도 ‘코X’은 아는 것처럼.

“다운로드 다 됐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ㄱㄱ

─가즈아!!

─ㅠㅠ켄님이 싸가지를 해주시다니ㅠ

그는 눈을 감고 게임 시작을 눌렀다. 그러자 대지가 무너지며 검은 구멍을 보이고, 그 아래서 굵직한 넝쿨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잭과 콩나무에 나오는 콩나무 같다.

그렇게 나무들이 시야를 가려 버릴 무렵, 피잉! 하고 화살 발사되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줄기에 가려졌다가 위부터 서서히 드러나는 광경은 어떤 숲이다. 햇빛이 노랗게 빛을 내려 단순한 녹색에 온화함을 더한 숲.

파스스.

그리고 시점에 걸쳐져 있는 나무줄기를 누군가가 밟고 넘어갔다. 거리가 벌어짐에 따라 대상의 형상이 전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헉, 헉.”

‘헉’보다는 ‘허’에 가까운 숨소리가 들리며 시점이 그 여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화살 소리가 들려왔다.

화르륵!

여인의 손에서 불이 일고 그녀의 허리가 틀어졌다.

그녀는 막 땅을 내딛던 발을 틀어 몸을 뒤로 돌렸다. 날아오던 화살이 형성된 불의 막에 타올라 사라졌다. 슬로우 모션으로 비춰 준 덕에 그것이 생생히 보였다.

타닥.

화살이 다 타올랐을 때, 여인의 몸이 마저 회전하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날아오는 화살은 지금 태운 것 말고도 더 많이 존재했다.

땅이 치솟고 바람이 불어 공격을 막았다. 숲이 갑작스레 얼어붙거나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심심치 않았다.

푸욱!

그렇지만 여인의 등에 결국 화살이 박히고, 그 몸이 앞으로 넘어졌다. 어떻게든 나아가야겠다는 듯 그녀는 손을 앞으로 뻗었지만, 소용없었다.

또 하나의 화살이 등에 박혔다.

“───.”

효과음 외 사람의 목소리를 제거한 영상이었기에, 은우로선 뻐끔거리는 입밖에 볼 수 없었다.

여인의 떨리는 손에서 빛이 어리더니 무언가를 건네듯 뻗어졌다. 그러자 아주 희미한 오색 빛이 그것을 휘감고 흩어졌다.

여인의 눈이 살짝 휘었다가 그대로 감겼다.

사박사박.

곧 풀 밟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엎어진 여인의 옆으로 걸어왔다. 고정된 시점 때문에 아무리 눈을 굴려도 발과 종아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이는 한쪽 무릎을 꿇고 죽인 여성의 몸을 뒤집었다. 상체를 낮춘 상태지만, 땅에 반 걸쳐진 시야 덕에 손과 허리 즈음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품에서 단도를 꺼내 죽은 이의 머리를 잘랐다. 그것을 허리춤에 걸고 천천히 일어서면, 시점은 남의 머리를 자르고 뒤돌아 걷는 이를 따라 돌아간다.

뒷모습만 보이는 이가 손을 까닥였다. 철수하자는 제스처 같다.

그사이 시야는 다시 바뀌어 이번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되었다. 머리를 잃은 시체가 시야 중심에 있고, 그 아래로 여인을 죽인 이들의 정수리가 걸어갔다.

죽은 여성의 피가 둥그렇게 퍼지기 시작했다. 그 위로 서서히 겹치는 이미지는 누군가의 감은 눈이다.

둥!

떠진 눈동자가 퍼진 피와 세로로 쓰러진 여성와 겹쳐졌을 때, 시야는 검게 물들었다.

다행히 시야는 오랫동안 검정색을 유지하지 않았다. 금방 오른쪽 상단에는 ‘네 개의 가지: 마비노기’란 글자가 큼지막하게 떠오른 것이다. 그 아래엔 ‘Four Branches of the Mabinogi’란 영문 제목이 폭에 맞춰서 작은 크기로 적혀 있다.

배경은 전장을 앞둔 성채가 비춰졌다. 흔들리는 깃발과 BGM이 웅장한 느낌을 전해 주었다. 왼쪽에는 새 게임, 게임 불러오기 등 메뉴가 하얗게 떠올라 있다.

“그래픽이 좀 떨어진다 들었는데, 오프닝 영상은 잘 만들었네요.”

─인겜 그래픽이 좀 글킨 하지

─대신 맵 ㅈㄴ 넓잖아;;

─글케 떨어짐?

─엑헌 수준을 기대함 안 됨

은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새 게임을 눌렀다. 그러자 난이도 설정이 떠올랐다.

쉬움, 보통, 어려움, 혼란, 악몽. 혼란이 가장 어려운 난이도이고, 악몽은 혼란과 같되 한 번 죽으면 끝인 모드였다. 다만 악몽 모드는 잠겨 있었다. 2회 차에 열리는 게 아닐까 싶다.

“음. 악몽이 잠겨 있어서 어쩔 수 없네요.”

─ㅋㄱㅋㅋㄱㅋㅋ

─ㄲㅂ 악몽모드에서 죽어야 꿀잼인디

─켄이 죽는다? 루삥뽕

─절대 안 죽지ㅋㅋㅋㅋㅋ

그는 어쩔 수 없이 혼란 모드를 골랐다. 잠깐의 경고문이 떠오르더니 본격적으로 게임의 막을 올렸다.

【눈을… 눈을 뜨렴…….】

까만 배경 속에서 한 점의 빛이 커지기 시작했다.

【눈을 뜨려무나, 아이야.】

목소리가 보다 선명해지고 보다 커졌을 때, 빛은 시야 전체를 잡아먹었다. 그러자 ‘눈을 뜬다’라는 감각이 들었다. 눈을 뜨든 안 뜨든 언제나 시야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채팅 창은 알아서들 떠들며 채팅을 빠르게 올리고 있다.

“어째 데자뷔가 있습니다만.”

─‘그 기사’

─유다희양이 반겨주는 그 게임...

「‘킹갓제너럴켄’ 님이 ‘5,000원’ 투척!

이번에도 맨손클 하실?」

─ㅋㅋㅋㅋㅋㅋㅋㅋ

─이 겜 맨손하려면 재능 찍어야하잖아ㅋㅋ

“맨손은 나중에 시도해 보겠습니다. 그나마 관짝에 갇힌 상태는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누워 있는 채로 시작한 건지 가장 먼저 보인 건 천장이었다. 어두워서 그 재질을 쉬이 측정할 순 없지만, 아무래도 돌로 만든 것 같았다.

은우는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은 어두웠지만, 곳곳에 형광색으로 옅게 빛나는 것들이 있어 사위 분간에는 어려움이 없다. 하나 여전히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뭐 하는 곳일까요, 여긴.”

그는 제단에서 몸을 내렸다. 관짝만 아닐 뿐이지 동굴에서 시작하는 건 검은기사를 떠올리게 한다.

“맨몸이네요.”

바지라고 해야 할지, 팬티라 해야 할지. 어쩌면 무릎까지 오는 수영복에 더 가까울지 모르겠다. 은우는 맨발로 동굴의 찬기 도는 바닥을 밟았다.

채팅 창은 반라를 보고 미쳐 날뛰는 자들이 절반이다.

“도를 넘는 성희롱은 밴입니다.”

은우는 헬멧이 쓰여 있지 않은 머리를 헤집으며 동굴을 가로질렀다. 사방이 막혀있지만, 그나마 정면에는 문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있던 탓이다.

“문이… 열렸습니다.”

다행히 닫혀 있던 문은 접근하니 열렸다. 은우는 그 길로 나아갔다. 한가운데 상자 같은 것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안에는 너를 위해 준비한 옷이 있단다.】

불쑥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은우는 고개를 차분히 돌렸다.

【안녕, 아가?】

녹빛을 옅게 띠는, 흰 선으로만 이루어진 무언가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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