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오랜만이군.”
은우는 그 말에 눈을 껌뻑였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열흘 전이었다. 오랜만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아마도?
“자네야 젊어서 2주 정돈 아무렇지 않겠지만, 내 나이가 나이잖나.”
그의 눈빛을 알아챈 것인지 오현이 허허롭게 웃었다. 뒤에서 졸졸 따라오는 네 제자는 여전히 눈이 반짝거리고 있다.
“…정정하시잖습니까.”
객관적으로 은우의 남은 시간보다 오현의 남은 시간이 적긴 하므로 은우는 말을 돌렸다. 오현이 껄껄 웃었다. 이 양반도 처음 봤을 때에 비해 웃음이 많이 늘었다.
아니, 웃음이 늘어난 정도가 아니라…….
“왜 그렇게 보는가?”
“제가 드려야 할 말씀 같습니다만.”
왜… 형이 그를 볼 때랑 비슷한 눈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가끔은 박기철이 그가 대박을 터트릴 때 보이는 눈 같기도 하고.
은우는 고개를 기울였다가 일단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네 사람이 따라오지 못하는 곳이다. 그래 봤자 복도에서 대기한 채 열심히 귀를 쫑긋하고 있을 것 같지만.
“요즘 고민은 없나?”
오현의 말에 은우는 고개를 슬쩍 돌렸다. 오현이 처음으로 선을 밟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에 기분 나쁘지 않은 건 지금까지 쌓아 온 인연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렇게 보지 말게.”
그리고 오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자네에게 빚 지울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잖나.”
그것은 그가 고민 상담을 담보로 검을 가르쳐 준 걸 정확히 지적하는 것이라. 허용할 수 있는 간격을 재고 너스레를 부리는 것도 다 연륜이겠지. 은우는 숨을 내뱉듯 엷게 웃었다.
“없진 않습니다.”
은우는 목검을 들었다. 기기에 접속해서 하는 대련도 좋지만, 현실을 잊어서야 쓰나. 현실에서도 최소한의 대련은 하는 편이었다.
“인간은 사색의 동물이라지. 그렇지만 너무 어렵게 생각은 말게. 성찰은 사람을 좀 더 낫게 만들지만, 과거에만 매여서는 미래를 볼 수도 없는 법이야.”
미래. 그는 그 단어에 검 자루 쥔 손에 힘을 실었다. 미래라.
“관장님께서는 왜 검을 잡으셨습니까?”
“오… 그것참 오랜만에 듣는 질문이군.”
오현은 마주 검을 잡으며 약간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렇지만 그건 곧 쓴웃음으로 변했다.
“예전에 인터뷰했을 때도 그렇지만, 이유는 딱히 없네. 단지 그런 게지. 이것의 끝을 보고 싶다 하는 갈증, 그렇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다는 망령 같은 게 들어 버린 게야.”
검을 치켜세운 오현의 표정이 은우가 아는 것으로 변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자네라면 알겠지.”
승리를, 나아가 그 이상을 추구하는 자의 눈이었다. 끝을 볼 수만 있다면 목숨 따위 아깝지 않은 눈.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다른 것은 둘러볼 수도 없는, 그런.
그렇지만 의문은 오히려 커졌다. 그 또한 한때 강해지는 것에 열망을 품었기에, 오현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에 드는 의문이었다.
그를 더 나아가게 만들 수 있는 대등한 상대 따위가 없는 세계임을 인정하고, 포기했다. 더 이상 ‘강함’은 그의 갈망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제 그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가 원하는 건 뭐지? 그가 좋아하는 건?
무엇을 해야 옳지?
전생도, 방송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다음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다 정해져 있었다. 정확힌 그가 그 순간에 선택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한정적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검을 잡고, 적을 죽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적을 섬멸한 것처럼.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타인을 따라 공부를 하거나 돈이 없어서 성공 가능성이 큰 방송을 시작했던 것처럼.
그렇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제 더 이상 그를 구속하는 건 없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거다.
그러나 무엇이든 할 수 있기에 오히려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더욱 어렵다.
행했을 때 기쁘게 웃을 수 있는 일이 그에게 존재는 할까? 그는 그런 것을 만들 수 있을까?
그의 미래는 대체 어떤 형상이지?
은우의 눈이 질끈 감겼다.
잘, 모르겠다.
▣ 172. 우리 애 구하러
우여곡절 끝에 보스턴 인근에 도달했다. 중간에 정부 측 인사와 접촉하는 데도 성공했다. 버려진 병원 안에서 기다리면 정부가 군을 보내어 호송하겠다는 확답도 받아 낸 상태였다.
그러나 사건은 언제나 예기치 못하게 벌어지는 법이니.
“정부군인가……?”
그들은 들려오는 헬기 소리와 자동차 소리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 결과 마주한 것은 P.C의 마크를 딱 박아 넣은 이동 수단들이었다.
─여윽시ㅋㅋ 엔딩 멀었죠? 정부군 절대 안 오죠?
─어디든 정부들은 맨날 늦장인듯
‘엔딩이 이렇게 쉽게 다가올 리 없다.’라며 메타적 예측을 했던 시청자들이 ‘그럼 그렇지.’ 하는 반응을 보였다.
은우도 해당 추측을 했던 사람으로서 고개만 주억였다. 비록 컷신이라서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어떻게 하죠? 이대로는 다 죽을 거예요!”
“다 죽기는, 나만 죽겠지.”
노아는 시큰둥한 얼굴로 사라의 말에 반박했다. 비아냥임과 동시에 자조이고, 상황을 악화시키기보단 환기시키기 위한 농담이었다.
사라도 그것을 알기에 분노보다는 슬픔에 얼굴을 붉혔다. 미묘한 차이였지만, 제작진이 워낙 표정 디테일을 잘 살려서 구분하기는 쉬웠다.
“그런 농담 말아요, 진짜.”
“노아.”
“뭐, 인마.”
그들은 무거운 상황에서도 나름 시시덕거렸다. 분위기가 조금은 나아졌다.
“가자, 꼬맹이들아. 순순히 뒈질 순 없잖냐.”
“…네!”
“우리, 꼭 살아남아요.”
노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총을 장전했다. 컷신이 풀렸다.
『목표│병원 탈출하기』
“정부군이 빨리 와야 할 텐데.”
“…괜찮을 거야, 누나.”
“그래. 괜찮을 거야…….”
그가 몸을 낮추니 사라와 시안도 알아서 몸을 낮췄다. 어차피 그들이 뭘 하든 안 걸리겠지만, 그래도 나름 귀엽다.
“적이 엄청 많네요.”
지금껏 저 둘을 염두에 두고 움직인 적 없는 은우는 이번에도 신경을 껐다. 무적에다가 저들 공격에 그가 맞지도 않으니 굳이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오히려 은우의 관심을 가져가는 건 병원 건물에 우르르 들어오는 P.C의 정예병이었다. 2인 1조로 여러 팀이 수색을 시작하는 게 너무 잘 보인다.
“소리를 들어 보니 위에서도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헬기 소리가 괜히 들린 게 아니었네요.”
─와 양동작전;;
─킹치만 켄이 상대라면?
─어림도 없지! 다 죽여버리기!
─(그에게 주어지는 합격 목걸이)
과연, 가장 난이도가 어렵기로 유명한 챕터다웠다. 은우는 몸을 낮춘 채 서둘러 복도를 거닐었다.
투두두두두!
캬르르륵!
병원 곳곳에 남아 있던 감염자들이 P.C 소속 병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말로는 당연히 벌집이 되어 시체의 생을 마치는 것이다.
“저 소리 덕에 위치 특정은 쉬워졌는데…….”
은우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벽에 몸을 붙였다. 그리고 막 튀어나오는 감염자를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마침 장비하고 있던 무기가 도끼였던지라, 감염자가 한 방에 사망했다.
도끼가 끈적한 핏물과 함께 뒤통수에서 빠져나왔다. 죽은 감염자는 예전에 환자였는지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역시 좋지만은 않습니다.”
대놓고 소리를 내는 P.C 사병에게 감염자 떼거리가 향하는 건 좋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고래 사이에 낀 새우가 될 수 있는 게 그들이었다.
“녀석들이 감염자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게 확정된 점은 다행입니다만…….”
특수 감염자들을 하나도 응원하지 않았거니와, 한때 감염자들을 조종해 그들을 습격까지 했던 자들이 감염자들을 죽이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통제권을 잃은 게 확실하다.
은우는 서둘러 복도를 이동했다. 중간에 빨리 올라온 P.C병과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들 전부 목이 꺾여 돌아가거나 두개골이 반으로 갈렸다.
땡그랑-
은우는 도끼를 바닥에 내던졌다. 내구도가 다해서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
“건물 안에 반드시 있을 거다.”
“무전기로 수색 상황을 보고하도록.”
“다 죽이기엔 너무 많네요. 탈출을 우선하겠습니다.”
─아 형 왜 약한 척임
─왜 다 안 죽이시고...?
─ㅋㅋㅋ구울쉑들 다 죽이는 걸 전제로 두는 것보소
─하치만...! 상대는 켄인걸...!
은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 죽일 순 있는데, 병원 전체를 샅샅이 훑긴 귀찮습니다.”
총을 함부로 쐈다간 위치가 발각될 수 있으니, 어지간하면 암살 플레이를 해야 한다. 노아의 신체 능력이 좀 뛰어난 일반인에 불과한 이상 선택 사항이 아니라 거의 강제였다.
그러나 그럴 경우, 뿔뿔이 흩어진 적을 일일이 그가 다 찾아야 한다. 너무 귀찮은 일이었다.
─퍄퍄ㅑㅑ;;
─ㅋㅋㅋㅋㅋㅋㅋㅋ
─???: 다 죽일 순 있는데 귀찮습니다
─아ㅋㅋㅋㅋㅋㅋ
─자신감 미쳐ㅋㅋㅋㅋ
아니나 다를까, 그의 답변에 시청자들이 웃음보를 터트렸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한다는 답변을 참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탕! 탕!
그사이 총소리가 가까워졌다. 한쪽으로 치우쳐서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좌표는 일치하는 것 같은데, 상대가 보이질 않으니 층이 다르단 걸 알 수 있다.
은우는 총소리가 들리는 것에 맞춰 움직였다. 넓디넓은 병원 복도는 넘어진 스트레처 카stretcher cart와 깨진 유리문, 링거 거치대, 핏물 따위로 더럽혀진 채다.
“근접 무기가 없는 게 아쉽습니다.”
그는 평소와 같은 덤덤한 목소리로 총을 들었다. 소음기를 장착해 생각보다는 소리가 덜 나는 상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퓨슉, 수준은 아니지만, 다른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묻힐 정도는 됐다.
“2층 클리어. 3층으로 이동하겠다.”
그는 리볼버를 들고 막 계단을 올라오는 적들을 노렸다. 두 사람이고 머리에 방탄모를 쓰고 있기 때문에 헤드 샷을 노려도 각각 2발은 맞춰야 한다. 첫 발로 방탄모를 벗기고, 두 번째 사격으로 죽이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은 대부분 암살을 시도할 테지만, 은우는 과감히 총격전을 택했다.
복도와 연결된 문 너머로 계단을 올라오는 적 머리통이 보였다.
“3층 수색…….”
은우는 매그넘 리볼버가 첫 번째 적의 방탄모를 날리고, 두 번째 적의 방탄모를 노렸다. 한 놈을 연속으로 쏴 봤자 방탄모 벗겨지는 시간 때문에 안 통한다는 걸 학습해 둔 덕이다.
깡!
방탄모가 벗겨지고, 그 충격으로 적이 휘청거렸다. 재빨리 자세를 되찾으려 한 모양이지만, 은우가 리볼버 공이를 당기고 방아쇠를 누르는 게 더 빨랐다.
두 인간의 뇌에 붉은 꽃이 피어나며 그 몸이 뒤로 넘어갔다.
─크으...
─진자 저거 어케 하는 거임?ㄷㄷ
─실제로 저거 할 수 있긴 함...
─그래서 어케 하는 거냐고
─몰라 시벌 알앗음 내가 햇지
“후…….”
“다행히 처리된 것 같아요.”
소년 소녀는 긴장된다는 듯 호흡을 다시 하며 총들을 고쳐 쥐었다. 스토리 진행 중에 사람을 기어코 죽여 봐서 그런가, 그들은 이제 든든한 아군이었다. 좋은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키들은 160, 170을 훌쩍 넘기지만, 지금껏 스토리를 진행하며 봐 온 게 있어서 그런지 정말 아이처럼 느껴져 조금 애처롭기도 했다.
“빨리 갑시다.”
은우는 그들을 뒤에 달고 쪼르륵 움직였다. 한 팀의 무전이 끊겨서 그런가 일부 팀이 이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저기 창문이 깨졌네요.”
은우는 그들이 층계참으로 오기 전에 서둘러 밖으로 빠졌다.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 쓸 만한 테라스였다. 테라스치고 굉장히 넓어서 길로 사용해도 될 것 같았다.
그는 몸을 낮춘 채 오리걸음으로 살금살금 이동했다. 총에 플래시를 단 팀 하나가 테라스와 연결된 복도를 걸었다.
“온다…….”
시안이 작게 속삭였다. 복도와 연결된 테라스 출입구가 문 없이 뻥 뚫려 있어서 불안한 모양이다.
“3층으로 이동하겠다.”
그들은 플래시로 이곳저곳을 비추며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테라스와 연결된 두 개의 입구 중 하나를 지나쳤다.
은우는 그런 적들을 슬쩍 살피다가 적들이 지나친 문으로 슬그머니 나아갔다.
“원래 뒤도 봐야 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이쯤 되면 오해 즐기고 있다 진짜
─ㅋㅋㅋㅋㅋㅇㅈㅋㅋㅋㅋ
하긴 뭐, 그렇게 치면 다른 게임들도 지적해야 할 부분이 산더미다. 은우는 저것들의 뒤통수를 칠까, 말까 하다가 무전 듣고 또 올 적들을 고려해 포기했다. 세 쌍의 걸음이 조용히 병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 * *
“어떻게든 막아!”
“시안, 달려!”
“어!”
어떻게든 P.C 사병들을 피해 건물을 탈출하나 싶더니, 건물을 나가자마자 발각됐다. 그가 실수한 건 아닌 것 같고, 스토리 전개상 반드시 발각되는 부분으로 보였다.
─저거 다 죽이고 나와도 이부분에선 꼭 걸리드라
─ㄹㅇ?
─다른 곳에서 다 시도해봣는데 무조건 걸림
─근데 저 쪽수 뎃고 와서 못 발견하는게 에바긴 함
─ㅇㅈㅋㅋㅋㅋㅋㅋㅋㅋ
절대 그가 걸릴 리 없다 자만하는 게 아니라, 시청자들 반응으로 안 사실이었다.
『정부가 오기로 한 약속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다만 문제는 저 녀석들이 변종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건데……. 빌어먹을, 그 머저리들을 기다리느니 그냥 내 발로 보스턴까지 기어가는 게 더 빠르겠군!』
노아는 특유의 촌철살인 화법으로 신랄하게 정부군을 비판한 뒤,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그가 택한 도주로는 지하철이었다.
퇴로가 막히기 쉽다는 단점이 있으나, 어차피 P.C가 파견한 병력은 그들을 단단히 포위하고 있었다. 앞뒤로 총알이 빗발치냐, 사방에서 빗발치냐의 차이인 셈이다.
『목표│지하철로 도망치기』
목표가 변경되며 경로가 완전히 확정되었다. 은우는 아이들을 데리고 지하철역으로 와다다 내려갔다. 뒤에서 그들이 역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아이들은 쏘면 안 된다!”
─구울왕도 쏘면 안 됨
─이악물고 빗겨쏴라
─켄 정도면 총알이 알아서 피해갈듯
─그거다!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
은우는 반복되는 패턴의 대화를 나누며 역 안을 빠르게 훑었다. 감염자 안 보이고 P.C 사병도 아직은 안 보인다.
선로를 슬쩍 보면 한쪽은 천장이 무너져서 매몰된 상태라 갈 길은 한 방향밖에 없다. 건너편 역으로 가는 것 역시 그쪽에서 들려오는 소란으로 보아 적과 마주치는 행위 그 이상이 될 것 같진 않다.
“결국 직선 길이네요.”
여기서부턴 들키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은우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탓탓탓 하는 달리기 소리가 메아리치며 동굴 내에 울려 퍼졌다.
“저기 있다!”
“아이들은 사살하면 안 된다!”
“노아, 앞에서 달려요! 저희는 못 쏘니까 노아가 맞을 일도 적을 거예요!”
“으악, 따라온다!”
뒤에서 플래시가 이곳저곳 줄을 그었다. 워낙 어둡다 보니 손전등 특유의 뻗어 나가는 불빛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은우와 아이들이 켠 것도 마찬가지였다. 동그란 원형의 불빛이 흔들리는 몸에 맞춰 사방팔방 춤을 추었다. 어둠 속에서 플래시가 밝히는 건 지하철 한가운데의 기둥과 선로뿐이다.
탕! 탕탕!
저치들은 애들을 못 쏘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사라와 시안은 달리는 와중에도 허리를 틀어 총을 쏘았다.
은우가 쏜 것만큼의 명중률과 위력─파트너가 쏜 총알은 대미지가 적게 들어가도록 설정되어 있다─은 안 나와도, 제법 견제는 되었다.
“이대로 달리기만 하면 됩니까?”
이렇게 쉽고, 재미없고, 반복되는 구간이 다음 역까지 이어질 리는 없는데.
은우가 눈살을 찌푸린 순간, 손전등이 새로운 무언가를 비췄다. 무너진 천장과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지하철이었다.
뒷문은 들어가라는 듯 열려 있되, 안에서는 감염자들이 튀어나오고 있다. 수면 상태에서 풀려난 감염자들이 분명하다.
“굳이 죽여 봤자 뒤에 따라오는 녀석들만 좋아할 일이니 그냥 무시하겠습니다.”
─그러다 잡혀용
─잡히실 텐데?
글쎄, 그쯤이야 무빙으로 피하면 그만이다. 은우는 그에게 달려드는 감염자의 손을 능숙히 피하며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러곤 뒤이어 달려드는 녀석의 발을 걷어차 넘어트렸다.
“으악!”
중간에 시안이 감염자에게 잡히며 도움 마크를 띄우긴 했지만, 그땐 그냥 총으로 쏴서 구출해 주었다.
지하철 안으로 세 사람이 입성했다.
“조심해.”
천장이 무너져 깔린 상태라 그런지 지하철은 그렇게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지붕 하나는 거의 반까지 내려앉아서 기어가듯 돌파해야 하기도 했다.
뒤쪽에서 P.C 사병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오는 건 무시했다. 망설이지 않고 나아가기만 한다면 쉽게 잡힐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끝내 지하철 맨 앞 칸까지 도달했을 때, 컷신이 시작되었다.
“으아악!”
“녀석이 폭주하고 있다!”
“빌어먹을! 쏴! 쏘라고!”
바깥으로 나가자 보인 건 P.C 사병들을 몽땅 때려죽이고 있는 팬저였다. 다만 첫 번째나 두 번째 만남 때완 상당히 모습이 달라진 상태였다.
일단 리퍼처럼 뼈가 기이한 형태로 돌출되었고, 덩치는 더 커졌다. 피부가 번들거리는 건 덤이었다.
거기에 거머리인지 촉수인지 모를 게 피부 위를 돌아다니며 기생하기 시작했고, 입가는 꽃처럼 다섯 갈래로 피어나 게 앞발 같은 이들을 드러냈다.
뼈가 도드라진 꼬리도 생겨났는데, 문제는 그게 세 개라서 사방을 쓸고 다녔다. 꼬리 끝, 꼬챙이 같은 부분에 꼬치가 돼 버린 P.C 사병이 벌써 넷이었다.
“이런 미친…….”
“저건 또 뭐야…….”
그 괴수의 위용에 세 사람은 달려 나가는 것도 잊었다. 뒤에서 또 다른 나쁜 놈이 쫓아온다는 것을 미처 깜빡하고 만 거다.
그게 그들의 실수였다.
탕!
“큽.”
“무슨!”
“흡!”
지하철 출구가 한 사람이 살짝 움츠려서 지나가야 할 만큼 좁았다는 건 과연 다행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출구 뒤에서 빠져나온 손이 소년의 입을 틀어막고, 소년의 옆구리와 출구 사이에서 삐죽 튀어나온 총알은 노아의 어깨를 강타했다.
그 이상 총알을 맞지 않은 건 순전히 노아의 본능 덕이었다.
노아의 손이 사라를 휘감아 소녀를 총의 반경에서 밀어냈다. 사라의 몸이 바닥에 철퍼덕 엎어지고 노아가 그 위를 덮듯이 막아섰다. 그들이 방금까지 서 있던 허공은 총알이 몇 발이고 지나치고 있다.
“소년 확보! 후퇴! 후퇴한다!”
“시안? 시안!”
“읍, 읍!”
“이 개새끼들이!”
그들은 길을 막기라도 해야 했다. 그새 넘어온 적들이 시안의 입을 틀어막고 그대로 아이를 끌고 가기 전에 말이다.
“안 돼, 시안!”
“저 시발 새끼들이!”
하필 시안을 방패막이 삼아 뒤로 후퇴하고 있어 함부로 발포할 수도 없었다. 노아는 처음 P.C 사병이 쏜 총에 맞은 어깨를 쥔 채 지하철 쪽으로 달려갔다.
탕탕!
“젠장, 시안!”
비록 쏟아지는 총알 세례에 옆으로 피해야 했지만 말이다.
─아놔;;
─안대!!!
─시안아아ㅏㅏㅏ
─아니 미쳣나봐;;
─아니아니 아ㅏ
─미친,,, 왜 잡혀감??
─머임? 머임??
탕! 탕!
총알의 견제로 주춤하는 사이 시안이 끌려갔다.
심지어 그 새끼들은 천장을 향해 총을 발사해 지하철 천장이 무너지도록 했다. 자기들은 안 깔릴 자신이 있다는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빌어먹을, 시안!”
“시안, 안 돼!”
“누나, 노아!”
─진짜 잡혀간다고??
─이걸? 이렇게??
─ㅇㄴ 미쳣나
─파트2 떡밥 오지게 뿌리네
─와,,,,,ㅅㅂ,,,,,,
쾅!
그들이 지나왔던 열차가 막혔다. 어렴풋이 ‘누나, 노아!’라고 울부짖는 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면 깔리진 않은 모양이다. 그마저도 멀어지는 게 착실히 끌려가는 것 같지만.
크르르르르-
문제는 그게 아니다. 열차가 무너지며 낸 소음은 P.C 사병들을 열심히 학살하던 팬저의 관심을 끌었다.
“시안! 안 돼, 시안……!”
“시발… 좆까. 우리 애 구하러 가야 하거든?”
사라가 무너진 입구에서 절망하는 사이, 노아는 탄창을 갈았다. 시안이 잡혀갔다는 사실에 냉정을 잃기에는 그가 마주한 재앙이 너무 커다랬다.
크아아아앙!
예상컨대, 최종 보스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