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콰르르르륵, 하는 물살과 기포의 소리.
첨벙첨벙, 푸합, 하고 숨을 쉬기 위해 올라왔다가 물살에 휩쓸려 다시 가라앉는 소리.
그르르륵, 물에 가라앉았을 때 먹먹히 들려오는, 아주 많은 것의 소리.
그리고.
“노아!”
남매의 목소리.
“커헉!”
노아는 숨을 트며 물을 울컥 내뱉었다. 켁켁대며 물을 좀 더 뱉으면 침을 비롯해 모래, 이상한 불순물 따위가 섞인 강물이 몇 번 더 튀어나온다.
“괜찮아요?”
“깨어났어요?”
“컥, 괜찮, 괜찮아.”
노아는 잔기침을 좀 더 내뱉은 후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너흰, 괜찮냐?”
“네, 저흰 괜찮아요.”
“그래, 그럼 다행…….”
그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노아의 시선이 닿은 곳엔 물에 젖어 말려 올라간 시안의 바지가 있다. 훤히 드러난 발목에는 선명한 잇자국이 피와 함께 존재했다.
“너…….”
그가 이루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시안을 본 순간, 시안과 사라의 시선도 노아가 보던 쪽을 따라갔다. 남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
노아가 급히 일어나고, 사라는 제 동생을 끌어안았다.
“아니에요!”
“물렸잖아!”
“이건, 설명할게요!”
“노, 노아……!”
시안과 사라가 외쳤지만, 감염자에 오래 시달린 노아는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비록 표정은 충격과 슬픔으로 가득 찼지만, 그 이상으로 독심을 띄운 채 권총을 든 것이다.
“사라, 떨어져.”
찰칵.
그는 슬라이드를 젖히고 젖은 탄환을 버렸다. 그러곤 탄창을 분리해 물기를 털었다. 그 순간에도 시안을 노려보는 눈은 독기로 가득 차 있다.
“아, 아니에요. 저 아니에요!”
“노아, 다 설명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총 내려놔요!”
“가족을 포기하기 힘든 건 알아. 그렇지만 시안은 물렸어. 떨어져.”
그는 마지막으로 격침 부분에 바람을 불어넣은 후 탄창을 결합했다. 슬라이드가 제 위치에 도달했다.
이제 방아쇠만 당기면 된다. 불발의 확률조차도 낮아졌으니, 당기기만 하면 정말로 끝이다. 권총을 든 노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에요. 노아, 노아 아니에요.”
“사라.”
“제발, 진정해요. 노아는 감염되지 않아요. 정말이─”
“사라!”
노아는 나직이 그리고 조금은 크게 그녀를 불렀다. 권총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가 곧 흔들림을 잃었다.
“부정하고 싶어? 이렇게 멀쩡한데 변할 리 없다고, 그럴 리 없다고 그런 생각이 들어?”
톡, 하고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게 아니란 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노아, 우린 면역─”
“사라, 한 번 물린 사람은 반드시 변해.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그런 이유는 통하지 않아. 물린 사람은 감염자가 된다. 단 한 명도 어김없이, 빠짐없이.”
그건 비단 젖은 머리카락에서만이 아니다.
“노아…….”
“내가 너까지 쏘게 만들지 마.”
노아의 품에 안긴 시안의 손이 꽈악 주먹을 쥐었다.
“…난 면역이에요.”
“시안, 물린 충격은 알겠지만 억지는─”
“면역 맞아요.”
소년의 손이 사라를 밀어냈다. 사라가 깜짝 놀라 저항했지만, 갑작스레 밀린 몸은 약간의 틈을 만들어 냈다.
“보고 판단해요.”
그리고 시안은 노아의 총구 앞에 떳떳히 섰다. 자켓을 벗고 셔츠 단추를 풀면서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시안…….”
“지금까지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해요. 어른들이 반드시 숨기라고 했어요. 보스턴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말하면 안 된다고.”
소년은 기어코 옷을 젖혔다. 그러자 목덜미와 왼쪽 어깨가 훤히 드러났다. 그곳엔 잇자국과 함께 피부 일부가 뜯겨 나갔던 흔적이 있다.
노아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이건 사태가 일어났을 때 물린 거예요. 그렇지만 난 아직도 멀쩡해요. 노아, 난 감염되지 않았어요.”
“…저도예요. 노아, 저도 증명할게요.”
동생의 용기에 본인도 용기가 난 것인가. 사라도 소매를 젖혔다. 팔꿈치보다 좀 더 위, 어깨는 아닌 그 부분에 물린 자국이 선명했다.
“우리 둘은 면역이에요.”
멀리서 동이 텄다.
▣ 171. 오롯이 그의 욕망과 바람 따위에 의거한
“후, 시발.”
“…우리, 산 건가요?”
“글쎄. 일단 그런 것 같은데.”
사라와 시안이 면역이란 비밀을 밝힌 직후, 놀랍게도 무장 병력이 들이닥치며 그들을 노렸다. 제대로 된 설명도 아직 못한 상황에서 튀어나온 위협이었지만, 오히려 좋은 효과도 있었다.
고민할 시간 자체가 주어지지 않다 보니 홧김에 믿는 쪽으로 노아가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협력해 가며 무장 병력의 포위망을 탈출했다. 그 과정에서 차와 보급품을 획득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무려 무장 병력이 가져온 험비를 탈취했다.
“그래서, 설명해 봐.”
챕터가 넘어가는 상황, 컷신 속에서 사라는 미처 말하지 못한 사정을 토설했다. 남매는 면역이며, 지금 가고 있는 보스턴엔 백신 개발 중인 연구소가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게일은 그들의 진짜 삼촌이 아니라 부모와 헤어지고 나서 마주친 남자란다.
직업은 소방관. 아이를 잃어버린 후 절망하고 있던 그는 다른 사람이라도 구하러 다니다가 남매를 만났다고 한다. 남매가 백신인 걸 알고는 남매를 보스턴까지 데려다주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라 생각했고.
구하지 못한 제 아이를 남매에게 겹쳐 본 걸 제외하더라도, 그의 희생엔 직업 의식이 남아 있던 셈이다.
“SOF(Special Operation Forces)에 소속되어 있던 부모님께선 명령에 따라 한 기업을 조사하고 계셨고… 곧 그 기업에서 끔찍한 테러가 자행될 것을 알아내는 데 성공하셨죠. 그 일을 막는 건 실패해 버렸지만요.”
‘끔찍한 테러’라는 단어에서 노아의 눈썹이 헝클어졌다. 지금까지 겪어 본 바, 노아는 꽤 똑똑한 편이었으므로 그 단어 하나로 숨겨진 바를 짐작해 낸 게 분명하다.
“설마?”
“네. 그 기업, 파라솔Parasol이 이번 감염 사태를 만들어 냈어요. 헌터, 팬저, 리퍼라고 부르는 그 변종들도 마찬가지예요.”
노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사라는 그런 노아의 혼란을 잠재워 줄 생각이 별로 없는 듯 꾸준히 말을 이었다.
“부모님은 저흴 데리고 도망치려 하셨어요. 그 과정에서 어머니를 비롯한 저희 남매에게 면역 인자가 있다는 게 밝혀졌고요. 그때부터 파라솔의 추적이 심해졌어요. 그래서…….”
다음 이야긴 들을 필요도 없었다. 추적을 따돌리는 과정에서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게일 삼촌과 겨우 도망쳤다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리고 게일 삼촌의 죽음부터는 다 같이 겪은 부분이었다.
사라의 말이 끝나고, 한 손의 손가락을 다 접는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노아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도로가 뻥 뚫려 있는 너른 평야라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퍽 위험할 자세였다.
“이해가 잘 안 돼. 본인들이 개발한 바이러스면 치료제도 있을 거 아냐. 왜 아직도 이렇게 내버려 두고 있는데? 구매자가 다 뒈져 버리면 어쩌려고?”
“그, 치료제 같은 건 없다고 해요. 애당초 이번 사태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고 했어요.”
사라는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파라솔은 본래 백신 및 치료제 개발에 성공한 뒤 일을 터트리려고 했단다. 그것도 미국 본토가 아니라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중동 쪽이나 개발도상국 쪽에.
그렇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사건은 터져 버렸고, 백신과 치료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변종은 조종할 수 있는 게 웃기지만 말이다.
“별 미친놈들이…….”
노아는 후드 아래로 손을 집어넣고 마구 헤집었다. 상황이 꼬여도 대차게 꼬였다는 걸 알아 버린 사람의 반응이었다.
뜬금없이 면역이 튀어나오질 않나, 면역 인자를 노리는 기업의 추적이 있질 않나. 거기에 지금까지 일어났던 비정상적인 감염자들의 추적은 누군가의 노림이었다니.
“후, 그래. 왜 본 적도 없는 좆 같은 새끼들이 너희랑 만난 이후에 줄줄이 나오나 했다. 그게 다 너희를 잡으려고 소라인지 파라인지 하는 새끼들 때문이었단 말이지?”
그는 화를 참으려는 건지 아니면 이 상황을 이해하려는 건지, 스스로 이야기를 정리하고 요약해서 중얼거렸다. 이해력 부족한 시청자조차 단박에 이마를 칠 요약이었다.
“왜 너희를 노리는지도 알겠군. 시발, 면역제라도 만들어서 살 기회라도 엿보려나 본데…….”
기업의 잘못으로 나라 절반이 날아갔다. 치료제라도 만들어서 거래하지 않는 한 살아날 가망은 없다. 만들더라도 가망 없을 확률이 더 높지만.
아니면 정부를 역으로 압박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변종을 다룰 수 있는 기술은 일단 입증되지 않았나. 백신과 치료제로 당근을, 변종으로 채찍을 줄지도 모른다. 미국 정부가 그거에 응할지는 잘 몰라도.
어찌 됐건 중요한 건 딱 하나다. 보스턴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파라솔의 추적을 끊임없이 받게 될 거다.
“…다음 도시에서, 저흴 두고 가세요.”
그때, 시안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노아의 시선이 백미러로 소년을 응시했다.
“저희끼리 어떻게든 갈게요.”
“시안.”
“저희 때문에, 노아가 몇 번이고 위험했던 건 사실이니까.”
사라가 시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안은 그녀의 손길을 받으며 웅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저희랑 헤어지면 노아도 안전할 거예요.”
노아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광대근이 올라가고 눈썹은 역으로 내려가는 게, 누가 보아도 심기 불편함이 느껴졌다.
“나보고 가라고?”
“…저희랑 같이 다니면 위험하니까.”
“지금까지 생고생이란 생고생은 다 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가라고?”
“그건…….”
“애초에 내가 가면 살아남을 자신은 있냐?”
“…어떻게든.”
“…저희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남매의 답에 노아는 브레이크를 콱 밟았다. 험비가 덜컹거리며 멈춰 섰다. 반동 때문에 세 사람의 몸이 흔들렸지만, 노아가 사나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지라 항의 따윈 불가능했다.
호통이 내려칠 것 같아 남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렇지만 호통은 쏟아지지 않았다. 질끈 감은 모양새가 도저히 화낼 수 있는 형상이 아니라, 노아가 이를 갈며 다시 앞을 본 탓이다.
험비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어…….”
아무리 기다려도 들려오지 않는 야단에 차가 출발하는 느낌까지 나니 두 아이는 슬금슬금 눈을 떴다. 노아가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시발, 됐어. 보스턴까지랬지?”
그는 긴 다리를 구기며 액셀을 밟았다. 차가 점차 속력을 빨리했다.
“면역이니까 앞으론 덜 신경 써도 되겠네.”
그건, 소년 소녀가 면역임을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을 보스턴까지 데려주겠다는 의사 표명이었다.
“노아!”
“고마워요!”
“시끄러워.”
아이들의 얼굴에 화색이 맴돌고, 챕터가 넘어갔다.
─진짜 ㄹㅇ 츤데레인듯...
─츤으로만 이뤄진 남자...
─츤데레의 정석
─절케 하면 여자친구 생기나?
─비수인 시점에서 안 생김 포기하셈
─개새끼야
그동안 사람들의 말에 은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아이란 이유만으로 버리지 않았을까? 그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아무렴, 애들이랑 헤어지면 당장은 살 확률이 높지만, 미래가 없지 않나. 나중을 고려하면 같이 다니며 아이들을 보스턴으로 전달하는 게 옳다. 요컨대 당장을 사느냐 미래를 사느냐의 차이였다.
어쨌든, 그의 목소리는 전달되지 못한 채 시야가 새까맣게 물들었다가 또 다른 영상으로 넘어갔다.
소음 때문에 뒤꽁무니에 감염자 무리를 매단 차가 도심을 가로질렀다. 대부분 속력을 따라잡지 못해 낙오했지만, 근방에 있는 녀석들이 몰려오며 적당히 유지되고 있던 차다.
“노아, 노아는 치료제가 개발되면 뭘 할 거예요?”
뒷좌석에 앉아 있던 시안이 재잘거리며 물었다.
은밀한 비밀까지 공유하면서 사이가 이 이상 더 좋아질 수 없는 상황까지 와서 그런가. 물어보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뭘 하긴 뭘 해.”
“왜요, 그땐 지금처럼 감염자와 싸울 필요도 없을 거잖아요. 노아는 하고 싶은 거 없어요? 저는 카페 차릴 건데.”
“몰라.”
“그러지 말고 말해 주세요오. 네?”
“저도 궁금해요.”
“맞아, 가수 하고 싶댔죠. 가수 할 거예요? 그럼 제 카페 놀러 와서 노래 불러 주면 안 돼요?”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매달렸다. 시안은 아예 차 시트까지 포함해 노아의 목을 휘감고 있다.
“노아가 그리는 노아의 미래는 어때요?”
그 물음은 비록 노아를 향한 것이나, 자극한 건 노아뿐이 아니었다. 은우의 숨이 순간 멎었다.
“젠장.”
“엥.”
노아는 다행히 그 질문에서 벗어났다. 차량 한 대가 도로를 틀어막고 있던 탓이다.
“내가 차를 밀어낼 테니까 그동안 뒤따라온 감염자 좀 처리해.”
“넵!”
“저희한테 맡겨 주세요!”
컷신이 끝났다.
“이번에도 차량을 잃을 것 같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조건 부서짐
─이런건 꼭 차 터지거나 막혀서 버리잖아
덜컹.
은우는 노아처럼 질문으로부터 고개를 돌린 채 차량에서 내렸다. 이 도피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단 건 알지만, 그렇다고 당장 사색에 잠길 순 없는 노릇이잖나.
탕탕탕!
뒤쪽에선 소년 소녀가 다가오는 감염자들을 처리하고 있다. 그는 서둘러 차 앞에 섰다.
“노아! 빨리!”
덜컹.
차가 느리게 밀리기 시작했다.
“근데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는 제 머릿속의 화제를 돌렸다. 마침 상당수 풀린 설정들을 곱씹다가 얻은 의문점이 있었다. 설정을 듣고 나서 외려 아리송해진 부분이었다.
“녀석들이 감염자들을 이용해 아이들을 쫓는 것까진 이해하겠는데… 감염자들이 아이들을 너무 험하게 대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러다 애들 죽으면 말짱꽝일 텐데. 거기에 감염자 떼 대신에 이젠 P.C 사병들이 주적으로 등장하네요.”
─아;; 이걸 찾으시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너도 못 가져 심보 아님?
─(금지된 채팅입니다)
─스포 ㄲㅈ
─ㄹㅇㅋㅋ만 치라고!
은우는 모호한 사람들의 반응과 정답을 모르는 사람들의 추측, 스포로 인해 삭제된 채팅들을 보며 눈을 가늘게 접었다.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헌터, 갑자기 감염자들을 대신해 쫓는 인간들.
어쩌면 이 녀석들, 감염자들을 완전히 조종 못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아까 챕터 시작할 때 루이빌이라고 말했던가요. 얼마쯤 온 겁니까?”
안타깝게도 은우는 루이빌이란 도시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몰랐다. 그나마 시스템 덕에 보스턴이 동부에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텍사스랑 보스턴 딱 중간...?
─ㅇㅇ 거의 중간즈음임
“아직 절반밖에 안 왔습니까?”
은우는 눈을 껌뻑였다. 꽤 오래 플레이했는데도 절반이란 게 꽤 놀라웠던 것이다. 이틀째에 절반이면, 나흘까지 봐도 되는 건가? 부동을 유지하던 가슴이 살짝 설렜다.
─ㄴㄴ 거리상으로 절반이고 스토리는 삼분의 이쯤?
─형 뭘 기대했어?
─ㅋㅋㅋㅋ게임 분쇄기 on
─아ㅋㅋ 켄 울어욧!!
어림없이 이번에도 사흘인가 보다. 은우는 설렜던 가슴이 평온해짐을 느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할까요.”
─아아니 우애
─내가 잘못햇어 형ㅇ ㅣ잘못해서
─안대 끄지마!
─나 지금 왔다고!!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차 타고 다음 구간으로 넘어간 다음에 종료하겠습니다.
─안돼애애액
─안댘ㅋㅋ
─아 좀 더해잉
─ㄴㄴㄴㄴㄴㄴ
“돼.”
오늘자 방송도 슬슬 종막이었다.
* * *
캡슐 문이 열리자 무드 등만 켜 둔 방이 보였다. 은우는 돌아오는 감각을 확실히 되새긴 후, 몸을 일으켰다. 정신은 이리저리 날뛰었는데 몸은 장시간 굳어 있던 까닭에 제법 뻐근하다.
“…….”
시선이 사라져 적적하기만 한 방 안은 가끔 비현실적일 때가 있다. 아니, 비현실적인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자신이 붕 떠 있다고 해야 하나, 현실과 유리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내 세계가 아닌 곳에 내동댕이쳐졌다라는 감각보다는…….
그래. 무수한 사람들이 내는 소란 속에 파묻혀 있다가 갑자기 혼자뿐인 적막 속으로 던져지니 드는 괴리감이다. 외로워지는 감각.
서은우는 목덜미를 쓸었다. 사람은 욕심의 생물이라고, 그는 이제 집에 혼자 있는 것까지 떨떠름해진 모양이다.
은우는 그렇게 잠깐 동안 목덜미를 손톱 끝으로 살살 간질이다가, 일단 완전히 일어서기부터 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세수만 하고 바로 잘 참이다.
그는 그러면서 적막함에 어색함을 느끼지 않도록, 사고를 최대한 돌리려 노력했다. 다행스럽게도 생각할 거리는 많았다.
이거 다음 할 게임이라든가, ‘박기철의 추천이 과연 형 마음에 들까’라든가, 봉사라든가…….
내가 그리는 나의 미래 같은 것.
칫솔을 문 채 은우는 두 눈을 껌뻑거렸다. 다큐를 본 뒤로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방송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이대로 방송을 계속해도 괜찮은 걸까?
일단 방송 자체에 대해선 고마운 마음이 크다. 방송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렇게 바뀌지 못했을 거 아닌가. 박기철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희수를 친구 삼은 것만큼 운이 좋았던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대로 괜찮은 걸까?
TV에서 본 사람처럼 방송에 절실하진 않다. 하다못해 방송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간절함도 이젠 없었다.
이런 상태로 임해도 괜찮은 건가?
나는 이대로 괜찮은가?
그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미래를 고찰해 보았다. 많은 장애물에 의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했던 과거와 달리 오롯이 그의 욕망과 바람 따위에 의거한 고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