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다짜고짜 읽게 된 글은 누가 썼는지 모를 소설이었다. 문장은 엉망이고 수식 어구도 없는 데다가 세계관 설명도 불친절한. 그러나 전개나 짜임새는 꽤 괜찮다 싶은 판타지 소설, 혹은 일지.
꼭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기록한 것 같았다. 잘쓴 글은 아니나, 설정 하나는 기가 막혔고 현실성도 넘쳤다.
그만큼 비참했다.
혹시 은우가 이 글을 쓴 거라면 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작문에도 재능이 있구나 박수쳐야 할까? 아니면… 이렇게나 잔인하고 비정한 글을 쓰게 된 이유를 짐작해야 할까.
소설의 내용이 우울하다고 해서 작가마저 우울한 사람이란 법칙은 없지만, 사람 심리란 게 으레 그러듯 걱정이 된다.
건우는 소설의 초반부를 다시 훑었다.
역시 꿈도, 희망도 없다. 복수를 위해 사람을 죽인다거나 쌓은 원한을 이겨 내고 위험을 빠져나가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는다거나, 대의를 위해서 또다시 살인을 저지르는 건.
그의 호불호를 떠나서 너무 참혹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소설의 주인공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도 없었다. 세계관 자체가 약육강식, 적자생존을 요구하고 있었다. 전쟁터라는 특이성도 그들의 살생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하물며 그는 그제까지만 해도 전쟁터에 고립된 민간인들의 생존 게임을 보지 않았던가. 끔찍함과 별개로 주인공의 행보도 등장 인물들의 행위도 일부 이해되었다. 차마 지지할 수는 없었지만.
‘너무 많이 죽이는 거 아닌가…….’
철저함이 본인 목숨을 살린다지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건우는 죽어 나가는 엑스트라를 향해 묵념하며 장을 계속 넘겼다.
좋아하지 않는 소재고 문장의 질이 낮았지만, 동생이 부탁한 이상 끝까지 볼 생각이다. 주인공이 혼자인 모습이나 감정에 서투른 게 어쩐지 은우랑 겹쳐 보여서 안쓰럽기도 하고.
그러나 끝이 다가올수록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았다.
주인공은 배신을 직감했으나 외면했고, 주인공의 동료들은 요상한 꿍꿍이를 가진 게 보였으며, 유일하게 친구라 할 만한 존재는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마지막 존재는 여러모로 신경이 쓰였다. 주인공과 함께 줄곧 이름이 없던 것도 그렇지만, 캐릭터의 심리 변화가 유독 눈에 잘 띄었다.
등장할 때부터 주인공을 이용해 먹으려 들어 비호감이었는데, 이게 또 갈수록 주인공에게 감화되는 게 보이는 거다. 정작 주인공은 그걸 눈치채지도, 굳이 알려하지도 않았지만.
그게 안타깝다가도 나름 이해가 되는 게, 그 캐릭터는 주인공과 친해지고 싶어하면서 주인공이 바라는 걸 이해하지 않았다.
마치 자식의 행복이란 이름으로 공부를 강요하는 부모 같다고 해야 하나. 대충 그런 느낌이다. 현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인간관계였다.
“어.”
결국 주인공은 마지막 5권이 되도록 고독을 유지했고, 그렇게 다다른 결말에서 자살했다. 주인공의 걸음 하나하나를 따라가는 심정으로 읽던 건우의 혼이 쏙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죽여? 지은 업이 크긴 하다지만 이렇게까지? 아무리 혼자란 게 힘들었다 해도, 어떻게.
“다 읽었어?”
건우가 당황한 사이 동생이 물었다.
“다 읽긴 했는데… 그, 네가 쓴 거야?”
건우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가 좋아하는 인간상은 아니었으나 주인공의 죽음 앞에선 눈물이 다 나왔다. 그 선택이 원망스러우면서도 이해가 가서 더욱 그랬다.
“반쯤은 도박이었어.”
그사이 동생이 입을 열었다. 도박이었다 고백하는 표정은 평소랑 다를 게 없다.
하여 건우는 제가 여운에 빠져 있느라 대화를 놓쳤구나 했다. 그가 읽은 ‘소설’과 연관된 말인 줄은 정말 상상치도 못했다.
“이계신이 태생신에게, 물론 나는 아직 아니었지만, 어쨌든 태생신을 앞둔 존재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리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동생이 ‘나는’이라며 마치 당사자가 된 것처럼 말했을 때 그는 위화감을 느꼈다.
“내가 싸우는 걸 좋아했던 건, 그건 그 순간 느끼는 모든 감각에 내가 혼자라는 사실도, 혼자일 거라는 사실도, 또다시 나만 살아남으리란 사실도 잊을 수 있게 돼서야.”
방금까지 읽었던 소설의 주인공을 이해하는 수준도 아니고, 대변하는 것도 아닌. 그 스스로의 이야기를 토해 내는 것처럼 속삭일수록 그 위화감은 점차 커져 갔다.
“혼자 남겨지는 게 너무 싫었어. 마지막까지 혼자라는 게 싫었어. 그래서 그냥, 거짓이라도 좋다는 마음으로 내 목을 잘랐어.”
무슨,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니, 감이 잡히긴 하는데 그게 진짜일 리 없으므로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갔다.
왜, 어째서 그의 동생은 소설을 꼭 자신이 겪은 일처럼 말한단 말인가? 이입을 심하게 해서 혼동이라도 온 건가?
“안 믿길 거 알아.”
그렇지만, 저렇게 말하는 동생을 두고 어떻게 그런 말을 꺼낼 수 있을까.
“믿지 않아도 되고, 그냥 미친 소리라고 여겨도 돼. 그래도 이해할 테니까.”
건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도 동생이 어떤 의미로, 무슨 생각으로 이 글을 읽게 만들고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믿을게.”
그냥, 그냥 믿어 주기로 했다.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든.
“어떤 이야기든 믿을게.”
그는 믿는 것밖에 해 줄 수 없는 무능한 형이라서.
▣ 159. 듣고 싶었던 말
“이건… 그러니까 네… 전생인 거야?”
“…응.”
맥이 탁 풀렸다. ‘에이, 그거겠어?’ 하면서 넘어갔던 직감이 정답이어서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상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소설 소재로나 써먹을 그런 가설이.
“…억지로 믿을 필요 없어.”
“아냐, 아냐. 믿어.”
건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의 진솔한 내심을 말한다면, 동생의 이야기를 믿기 어렵긴 하다.
안 믿는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그는 정말로 은우의 말을 믿었다. 그 애는 이런 걸로 장난칠 성정이 아니었다.
물론 은우를 제대로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돼서 아직도 잘 안다 말할 순 없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단지 어려운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너무 상상도 못한 난제여서, 그가 겪어 보지 못한 불가해의 영역이어서, 실재할 거라 믿어 본 적도 없거니와, 하다못해 타인에게서 경험담이랍시고 들어 본 적도 없는 미지의 것이라서.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뿐이었다.
“정말로 믿어.”
건우는 그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외로움에 미쳐서 망상을 한 거라면 이런 식의… 상상을 하진 않았겠지.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외로움을 더하면 더했지 덜 만한 건 아니니까.
물론 외로움을 납득하기 위해서라면 또 모르겠는데…….
아니, 은우는 미치지 않았다. 그의 죄를 추가하기 싫어서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단지, 단지 그런 거다. 동생이 암에 걸렸다거나, 동생분이 사고를 당해 일부 신경에 손상이 갔습니다 등등, 그런 말을 들으면 일단 부정부터 하고 보는 심리. 그 애가 그럴 리 없다고, 그래선 안 된다고.
신이 있다면 이럴 수 없다고.
그는 입술을 억지로 끌어 올렸다. 번잡한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들었다. 그걸 믿어? 정말 믿어? 환생이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냥 생생한 꿈을 꾼 걸 착각한 게 아닐까? 동생이 병에 걸렸다고 믿고 싶지 않은 억지가 아닐까?
그리고 그 모든 의문을 하나의 다짐이 갈랐다.
그게 진짜든 병이든, 은우의 말이라면 응당 믿어 줘야 하는 거잖아.
서건우는 이걸 고백하기까지 은우가 했을 고민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에게 미친놈 소리 듣거나 몽상이라고 손가락질 당할 것쯤은 각오했을 거다. ‘미친 소리로 여겨도 돼.’라고 말한 시점에서 확실하다. 그럼에도 이걸 말한 건 결국 형인 자신을 믿어서일 테고.
그러니까, 은우가 믿어 줬으니까 그까지 이걸 부정해선 안 된다. 이게 정신병이든 뭐든 간에 그만큼은 이걸 믿어 줘야 한다.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믿어 주는 것밖에 없었으므로.
“말해 줘서, 고마워.”
건우는 그가 얼떨결에 읽어 내린 공책 표면을 매만졌다.
복수를 위해 사람을 죽이고, 살기 위해 또 죽이고, 종내엔 의미를 잃어버린 채 기계적으로 죽이다가 끝내 원하는 것 하나 얻지 못하고 져 버린, 안쓰러운 생명.
한낱 줄글로 받아들일 때마저 무거웠던 것은 이제 더더욱 큰 무게를 가지게 됐다. 그로선 온전히 공감할 수도, 깊이를 잴 수도 없는, 그러나 맹인이 코끼리의 다리를 더듬듯 일부만은 인지할 수 있는 무게다.
“…더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봐.”
은우의 말에 건우는 저릿저릿한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물어볼 것이라. 물어볼 만한 것이라.
그는 문득 책으로서 마주할 때 든 감상을 떠올렸다. 분명 주인공의 행보가 너무 핏물로 점철되어 있다고 생각했더랬지. 선악을 떠나서 너무 많이 죽였다고.
그렇지만 그걸 지금 떠올리는 건 과연 옳은가?
아니, 절대 아닐 거다.
건우는 볼을 꽉 깨물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걸 바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의 가치관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이야기기 때문이다.
아무렴 사상이란 건 조립식 장난감처럼 쉽게 뜯고 바꿀 수 없다. 가치관이란 그가 받아온 교육, 그것을 토대로 굳혀진 생각, 사고, 그의 일부가 된 사상이니까.
동생을 향한 믿음과 별개로 감당하기 힘들다.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어… 너무 갑작스러워서 질문이 바로 안 떠오르네. 미안.”
“형이 미안할 건 없지.”
그는 평생 유지해 온 가치관을 처음으로 외면했다. 가치관의 충돌은 그가 해결할 문제다. 은우에게 떠넘기고 싶지 않았다.
하여 건우는 최대한 그가 제기할 수 있는 모든 문제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조금이나마 질문거리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그?”
건우는 그가 가지고 있던 의문들을 더듬어 보았다. 지금 택하기 어려운 분야에서 벗어나도 질문거리는 많다. 너무 많아서 선정하기도 힘들었다.
은우의 친구는 은우가 배신을 싫어하고 혼자 죽기 싫다 말했노라 증언해 주었던가. 은우의… 이야기를 엿본 지금, 그건 아무리 봐도 막바지와 관계된 걸로 보인다. 하면 너는 왜 배신을 인지해 놓고서도 대비하지 않았을까.
또 읽을 때 은우의 전생 이름은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정말 거래로 줘 버려서 비워 둔 걸까?
친구와 지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그 사람’의 이름은 어째서 끝까지 안 나왔을까?
은우는 대체 무슨 심정으로, 얼마가 괴로웠길래 끝내 자살이라는 결말을 생각, 선택한 걸까.
“…거래를, 후회한 적 없어?”
건우는 가까스로 첫 질문을 골랐다. 하필 그 질문이었던 이유는 은우가 그 거래로서 얻은 것에 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은우의 이야기는 많은 것이 비워진 기록만으로도 곡절이 넘쳤다. 심지어 마지막은 배신으로 점철되어 있기까지 했고.
한데 그런 삶을 살아왔음에도 새로 얻은 삶은 이 따위였다. 이건, 이건 거래치고 너무 불공정하지 않은가? 만일 망상이라 해도, 거래로 얻었다 여기기엔 너무 쓰레기 같은 가족이 아닌가.
은우는 최소한 이것보단 나은 가정에서 태어났어야 했다. 적어도 네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관심을 가져 줄 이들을 가족으로 두었어야 했다. 응당 그래야 했다.
네가 겪은 고생과 절망을 생각한다면 너는 그래도 됐다…….
“해 본 적 없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분명 그래야 하는데…….
건우는 은우의 말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후회할 게 당연한데, 정말 당연한데. 그런데도 가슴 한구석이 시렸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옳지 않은 통증이었다.
“여기서 막 깨어났을 땐 후회했어. 텅 빈 집과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세계와, 내가 쌓아 왔던 업들의 상실까지.”
“…응.”
“그렇지만 희수가, 희수가 손을 뻗어 주니까.”
건우는 몸을 살짝 떨었다.
“그래도 버틸 만하더라.”
그 앙칼진 아가씨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었나 보다. 단순히 지탱한 정도가 아니라, 은우를 이 세계에 끌어 놓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건우는 감사를 그리고 송구함을 또다시 표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표한다면 질색하며 쌍욕을 내뱉을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그러고 싶었다.
“부모님이 생긴 것도 나쁘지 않았어. 읽어서 알겠지만, 난 일찍 부모님을 여의었으니까.”
건우는 동생이 일어나 냉장고 여는 걸 보았다. 그 애가 꺼내 든 건 양주 병처럼 보이는 크리스탈 병이었다. 갈색에 가까운 다홍색 액체가 찰랑거렸다.
“참고로.”
“……?”
“이거, 매실이야.”
‘설마 술 마시는 건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다급히 사실을 밝히는 동생이 웃긴 건 어쩔 수 없다.
건우는 울 듯 웃으며 ‘응.’ 하고 대답했다.
* * *
“응.”
은우는 형의 대답을 들으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단맛보다 시큼한 맛이 강한 매실 희석액을 한 모금 삼키면 조금 정신이 든다.
“줄까.”
“아니. 난 괜찮아.”
형은 정말로 날 믿어 주는 건가. 믿음을 넘어서 받아들여 주는 걸까. 혐오라든가, 경멸이라든가, 공포라든가. 바뀔 형의 태도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는 우물쭈물거리다가 다시 던져진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부모님이, 좋았어?”
은우는 눈을 느리게 껌뻑이곤 잔을 한 번 더 기울였다. 시큼한 맛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처음…은 아니지만, 처음과 다름없었으니까 기대했지.”
기억에는 없다. 그렇지만 개념은 알았다.
하물며 인간이란 가질 수 없을 때야 별 감흥 없어도, 그것을 가질 기회가 생기면 절로 기대하는 법이었다.
하여 당시의 그는 기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은근슬쩍 다가갔다. 익숙하지 않은 탓에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도, 그들 시야에 들기 위해서 몇 번이고, 정말 몇 번이고 그 앞을 알짱거렸다.
그들이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단 걸, 그가 이상해졌음을 눈치 못 챘단 걸 알게 될 때까지. 저들이 그에게 관심 없다는 게 증명될 때까지.
“…그게 헛된 꿈이란 건 금방 눈치챘지만.”
물론 그의 접근이 이상했음은 인정한다. 그는 가족이란 것을 몰랐고, 그만큼 그의 태도는 어리숙했다.
어쩌면 그들은 그게 그의 신호였음을 알아채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것까지 그가 일일이 고려하고 이해해 줄 정도로 여유로웠다면 애초에 그들의 관심을 구걸했을까?
실망은 거대했고, 체념과 포기를 불러왔다. 그를 구성한 전생이 그것에 힘을 실었다.
“내가 유도부에서 사건을 터트린 날, 질책도, 걱정도 보이지 않으시는 걸 보고 단념했어.”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아버지는 그를 한 번, 가해자의 부모들을 한 번 힐끗 보곤 법적 절차를 밟았다.
「타고난 건강을 아주 좋은 데 쓰는구나.」
도중에 그에게 떨어진 건 칭찬도, 비난도 아닌 비꼼이었다.
“가족이란 게 정확히 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기대가 충족되는 일은 없다는걸.”
「넌 그렇게 건강한데…….」
은우는 떠오른 아버지의 한 마디를 삼켰다.
「왜 너만…….」
칭찬도, 비난도 아닌 질시의 눈동자를 형에게 말할 순 없었다.
“…미안.”
당신 잘못도 아닌 일에 사과하는 것이 형인데, 원하지 않아도 이유가 돼 버린 일에는 얼마나 사과하겠나.
“형이 미안할 건 없지.”
은우는 생각을 돌렸다.
백지 성적표를 차마 드릴 수 없어 숨겼던 날, 아무런 채근도 하지 않았던 것에서 눈치를 챘어야 했을까.
그렇지만 당시 그는 그의 이상을 들키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었다. 날아간 기억은 이상함을 찾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러니까, 유도부 때라도 깨달은 게 다행이었다. 거짓 희망은 없는 게 낫다.
“…유도부 때는, 다치진 않았어?”
어떤 다정함은, 있는 게 너무 좋다.
“…그딴 애송이들한테 다칠 리가 없잖아.”
“그래도, 다섯이나 됐다니까…….”
다른 사람들이 걱정했다면 그를 얕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형이 저리 말하니 정말 순수한 걱정처럼 느껴졌다.
입안의 매실 주스가 갑자기 달다.
“걔네들 사지만 작살 냈으니까 걱정 마.”
은우는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그리 말했다가, 형이 입을 열기도 전에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일부러 부러트린 거 아니야. 단지 적응이 안 돼서 손이 먼저 나간 거야.”
전생을 담은 글을 보고도 그 부분에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으니 괜찮을 것 같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정말 조금의 확률이라도 당신이 불쾌함을 내비치는 건 싫다.
“나도 그렇게 약할 줄 몰랐어. 부러트릴 의도도 없었고. 그냥, 그런 위협에 너무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어서 반사적으로…….”
은우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변명을 이어 나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역시 끔찍하다고, 무섭다고 지탄받는 건 아닐까. 혐오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닐까. 불안감이 치솟았다.
“네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리고 형은 또다시 그가 걱정했던 부분과 다른 반응을 보여 주었다.
“많이 무서웠을 텐데… 잘했어.”
은우는 숨을 삼켰다. 그 자신도 인지하지 못했던 긴장이 스르륵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응.”
그건, 아주 오래전에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