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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158화 (158/233)

158화

건우는 가방에 든 것을 꾸욱 쥔 채로 현관 앞에 섰다. 왼손은 초인종을 울리기 위해 허공에 떠 있으나, 끝끝내 버튼을 누르진 못하고 있다.

「나랑 이거 닮았어?」

「웬 인형 사진?」

「그, 누가 닮았대서.」

「별로? 네 어릴 때 애착 인형이랑은 닮았네.」

화를 내야 했을까? 그의 부모님이 정신 차릴 때까지, 그들이 본인들의 행위가 어떠했는지 알아차릴 때까지 그는 화를 내야 했을까.

「애착 인형?」

「왜, 네가 병원에 있었을 때 항상 달고 살았잖니.」

「기억 안 나는데…….」

「은우한테 빌려줬다가 걔가 잃어버리는 바람에 이틀을 펑펑 울기까지 했는데?」

「어… 아.」

「기억 났구나?」

「…응.」

기실 화를 안 낸 건 아니었다. 그가 화낼 자격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대로 방치하는 건 더 큰 잘못이었다.

그래서 그는 애써 고른 말들로, 문장들로, 부모님에게 그들의 잘못을 일깨우려 했다. 이미 늦었더라도 사과만큼은 은우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하여간 걔도 칠칠맞지 못하다니까. 어떻게 형이 선심 써서 빌려준 걸 잃어버리니.」

그렇지만 차분하게 시작된 말이 몇 번이고 단단한 벽에 막혀 돌아왔을 때.

「안 그래도 수술을 앞둔 형, 도와주진 못할망정 미안해하는 구석도 안 보이고.」

‘그래서 그게 뭐?’, ‘그게 뭐가 힘들어?’. 은우가 지금껏 느꼈을 모든 서러움이 그 두 가지의 말에 막혀서 무너질 때.

「너는 또 동생이라고 감싸 주고. 하여튼 우리 아들, 착하기도 하지.」

‘걔는 그렇게 건강한 반면 너는 그렇게 아팠는데.’ 그의 인생 전체가 동생의 불행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이유가 될 때.

「…아빠, 아빤 은우의 애착 인형이… 좋아했던 인형이 뭔지 기억해?」

「어? 어… 글쎄다. 뭐였지?」

그는 화내는 걸 그만두었다.

「…됐어.」

저들을 깨우치는 건 불가능하다.

설사 저들이 사과한다 해도 그것은 그의 강요로 인한 떠밀림에 불과할 것이다.

“형? 왜 안 들어오고 있어.”

“…미안.”

그는 동생에게, 그 애가 최소한 받아야 했던 무언가조차 해 줄 수 없다.

▣ 158. 던져진 주사위는 아직

은우는 집 앞에 누군가가 서성거리고 있다는 알림이 뜨고 나서야 형의 방문을 눈치챘다. 슬쩍 인터폰을 보면 역시나 형이 보인다.

“형? 왜 안 들어오고 있어.”

“…미안.”

도착했으면 초인종을 누르지 왜 서 있기만 했을까. 은우는 음울한 얼굴의 형을 보며 뺨과 턱 사이를 쓸었다.

“밥은.”

“괜찮아. 너는?”

“나도 괜찮아.”

혹시 안 먹고 왔을까 봐 저녁을 안 먹긴 했지만, 대신 간식은 먹어 뒀다. 배가 부르진 않으나 굳이 뭘 먹어야 하는 건 아니다.

은우는 형을 식탁 겸 책상에 앉힌 후 마실 것을 가져왔다.

물론 콜라는 아니었다. 콜라는 그 단맛 때문에 긴장이 풀리니 이런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대신 그가 가져온 건 예전에 오현의 도장에서 먹었던 쓴 차였다.

“…….”

차를 가져오고 건드리지도 않을 다과까지 내오는 동안 그들은 목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더 필요한 건지, 아니면 막상 들이닥치니 말이 안 나오는 건지는 굳이 구별할 필요 없다.

은우는 잔을 집었다. 다구를 살 정도로 차를 즐기는 건 아니기에 그가 쓴 것은 투명한 유리잔이다.

얼음이 동동 띄워진 금황색 찻물이 각자의 입술 새로 들어갔다. 주방을 등진 은우의 얼굴에는 그늘이, 형은 주방 전등의 빛에 창백한 낯을 한다.

“물어볼 게, 있어.”

“응.”

잔 속 액체가 녹아 버린 얼음을 잘박하게 적시기만 할 즈음, 건우가 입을 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어떤 표정인지는 모르겠다.

“근데.”

은우는 입안에 들어온 얼음 하나를 빠득 깨물며 차를 다시 따랐다. 건우의 것도 비어 있는 게 보여 형에게도 리필해 주었다.

아슬아슬하게 채워진 찻잔 속에 건우의 얼굴이 거꾸로 뒤집혀 보였다.

“내가 이걸 물어봐도 되는지 모르겠어.”

표면의 파문이 멈추자 꼭 굳어 버린 호박에 형이 갇힌 것처럼 보인다. 잔의 호수에 잠긴 그 얼굴은 울지도, 웃지도 않은 채 다만 처진 눈썹과 파인 미간, 헝클어진 입매를 하고 있다.

“해.”

은우는 옆에 놓인 얼음 통에서 얼음을 꺼냈다.

“대답하기 힘들지 아닐지는 듣기 전까진 나도 몰라. 그러니까 해.”

퐁당, 하고 금황색 물 사이에 잠긴 얼음이 잔을 흔드는 손목에 맞춰 빙글 돌았다. 얼음끼리 부딪칠 때마다 청아한 소리가 났다.

“…….”

허락이 내려졌음에도 건우는 쉽사리 질문하지 않았다. 은우는 구태여 질문을 종용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의 시간은 이제부터 시작이고, 밤은 길었다.

“…왜.”

차를 다시금 홀짝이고 있자니 결국 고요가 깨졌다. 은우는 눈을 감았다.

“나한테 화내지 않아?”

화내지 않는다라. 그건 그다지 이해가 가지 않는 질문이었다. 형은 그에게 미움받고 싶고, 비난받고 싶은 건가? 매번 저리 묻는 이유가 뭐지?

은우는 잔을 한 번 더 흔들었다. 적막한 거실에 얼음 우는 소리가 나지막이 퍼져 나갔다.

“내가 화내길 바라?”

“그건, 아니지만… 솔직히 그렇잖아.”

서건우란 인간은 여전히 그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그들이 주는 혜택을 누리고 있고, 서은우에게 미안한 주제에 변변한 사과조차 이끌어 내지 못했다.

건우가 보기엔 은우가 원망하고 혐오해도 할 말 없었다. 건우의 입장에선 그랬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은우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형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생각했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에도 힘이 든다. 제국군을 죽이면서 그가 얻은 배운 진리였다.

“근데 별로 화내고 싶지 않아.”

외면당했을 때 그가 서러웠단 건 이제 알았다. 그렇지만 그걸 빌미로 화를 낸다 한들 그가 얻을 게 있나?

형의 배려는 이미 충분한 데다가, 화낸다고 한들 배려심이 더 커질 것 같진 않다. 그냥 그의 눈치만 더 보면 봤지. 그런 건 별로 원치 않는다. 화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너는, 정말…….”

희수가 들으면 호구라고 말하려나. 그렇지만 화를 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걸 어쩌란 말인가.

놓아버려 무의미해진 것─부모님─에게 감정 소모하고 싶지도 않고, 형에겐 그럴 시간에 차라리 다른 걸 하고 싶다. 아직 형하고 해 보고픈 게 많으니까.

“질문 더 해. 아직 궁금한 게 많을 거 같은데.”

그는 대신 형에게 다른 질문을 유도했다. 말해 줄 각오를 다진 건 아니나, 질문이 안 들어오면 그건 그것대로 섭섭하다.

“왜 싸웠었냐고 물어봐도 돼. 시험지 백지로 낸 이유도 되고.”

그는 답답함에 대놓고 질문을 쥐어 주었다. 그렇지만 건우는 질문하지 않았다. 울음기에 젖어 뭉그러진 목소리가 희미하게 소리를 냈다.

“내가, 내가 무슨 자격으로 물을 수 있겠어…….”

허락을 받았음에도 자격을 운운하는 심리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것과 별개로 그 말을 들은 순간 그는 직감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당신은 영원히 과거를 묻어두겠구나. ‘감히’라는 단어 안에 모든 의문을 넣어 두고 혼자 삭이겠구나.

그는 눈을 가늘게 내렸다.

차라리 이게 기회일 수도 있다. 괜히 과거를 들쑤셨다가 형에게 꺼려지는 존재가 되느니,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형이 저를 혐오스럽게 보는 것보단, 또다시 버림받는 것보다는 과거를 묻은 채로 살아가는 게 훨씬 나아.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에 거느니, 노 리스크 노 리턴이 더.

정말 나을까?

은우는 희수가 그를 인정해 줬던 때를 되새김질해 보았다. 그녀가 그녀 입으로 나는 네 편이라고 말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형도 그랬으면 좋겠다. 모르고 웃는 형도 나쁘진 않지만, 듣고 나서 모든 걸 받아 주는 것을 보고 싶다. 무덤에 묻힌 옛 서은우의 자아가 위로받았듯, 그의 전생도 인정받고 싶다.

어쩔 수 없이 그리고 마는 가능성이었다.

“형.”

“…어.”

은우는 결국 선택을 했다. 의자가 뒤로 밀렸다.

“오늘 늦게 가도 되는 거 맞지.”

“…창립 기념일이라서 내일 쉬어.”

이게 정말 옳은 선택인지 아닌지는 두세 시간 후의 그가 알고 있겠지.

“기다려.”

그는 밤새 정리한 후 자고 일어나 깨끗이 옮겨 적은 이야기를 꺼내 왔다. 방에서 이끌어 내진 공책 다섯 권은 하나의 인생을 명료하게 정리한 것이다.

“형, 소설 좋아하지.”

“그렇긴 한데… 그건?”

“읽어. 꼼꼼히.”

이 타이밍에 책이나 읽으라는 말이 떨떠름했던 걸까. 건우는 머뭇거리는 손으로 책을 받아 갔다. 은우는 그런 그가 책을 펼치고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하는 걸 천천히 지켜보았다.

분침과 시침이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너의 이름을 내놓고 그 목을 스스로 잘라라. 하면 다음 기회를 주마.”

─는 떨어진 괴수신의 머리가, 그와 똑같이 생긴 머리가 입술을 달싹이는 걸 보았다.

본래 에메랄드빛이었어야 할 눈동자는 어느새 구백구십만 구더기에 먹혀 무덤의 색만을 가득 내보이고 있다.

이계신들이었다.

“별로, 당기지 않는데.”

저들이 저러는 이유야 짐작할 수 있다.

태생신은 이계신들을 이 땅에서 내쫓아 버릴 수 있는 막강한 존재이니. 태생신의 조건을 갖춘 그를 죽일 기회를 놓치긴 아깝다 이거겠지.

“난 신들이 싫어.”

아무렴 협력이란 건 모를 것처럼 구는 주제에 태생신만 나타나면 협조까지 하는 게 그네들이다. ─는 그들의 의도를 이해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왜? 네게 손해는 없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신이 될 생각이 없는 이상 그는 여기서 죽을 것이니. 심장 찔러 죽나 목을 잘라 죽나, 그게 그거긴 했다.

“그래서 더욱 믿음이 가지 않아.”

그렇지만 무언가 꺼림칙하지 않은가. 이름이란 것에 어떤 힘이 있는지도 모르고, 목을 자르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하물며 저들은 태생신을 끔찍이 여기는 이계신들. 그에게 이유 없는 호의를 베풀 리 없었다.

“그리고 다음 기회를 받아서 뭐 하는데?”

더구나 이따위 세계에서 또 다른 기회를 받는다고 무어가 달라질까. 왕국도 그를 버리고, 제국은 그의 적대 세력이 됨으로써 갈 곳마저 잃었는데.

애당초 다음 기회란 것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목을 자르란 걸 보면 분명 다른 몸에서 깨어날 것 같은데, 그게 꼭 인간이란 법은 없지 않나.

애벌레가 되어 비참하게 사느니 그냥 죽는 게 낫다.

“엿이나, 처먹어.”

이젠 한계에 다다랐다. ─는 강제로 무릎을 꿇었다. 울컥하고 피가 토해지면 검을 쥔 채로 입을 막는다. 시야가 점차 가물가물해지고 있다.

“이름을 버린다는 건 그 이름으로 쌓은, 그리고 쌓을 수 있는 인연과 업을 전부 버린다는 의미야.”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검을 굳건히 쥔 손은 칼날을 들었다. 사지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걸 생생히 느끼며 뒈지느니 깔끔하게 죽을 생각이었다.

문득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다음 기회를 잡아. 절대 손해 보지 않을 거야.”

하여 그는 그것을 심장 어림까지 들었다가.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야.”

목에 대었다. 고개를 들면 상록의 색도, 무덤의 색도 아닌 적안이 그를 올곧게 응시하고 있다.

“내가, 다음 기회를 잡는다고 혼자를 벗어날 수 있을까?”

새로운 생을 얻는다 한들 그는 외로움을 떨쳐 낼 수 있을까. 그 무엇도 지키지 못하는 자가 그일진대, 또 다른 기회를 얻는다 한들 똑같은 일생만 반복하는 건 아닌가.

“어차피 다 배신하고 떠나갈 텐데.”

그럼에도 혼자 죽기가 싫어서.

누군가 곁에 있어 주길 바라서.

계속된 상실에 너무도 지쳐서.

“외로운 건 질색이야…….”

사실 거짓이어도 좋아. 희망을 가지고 죽는다면 웃는 채로 죽을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찰나의 고통과 시야의 점멸과 차가운 잠이 몰려왔다.

“…내가, 무려 이름까지 바쳐서 이어 준 거래니까, 잘 살아야 해.”

누군가에겐 영웅이었고, 누군가에겐 한낱 살인마였으며, 누군가에겐 신이 될 재목이었던.

그리고 끝까지 인간이었던 이의 끝이었다.

* * *

“다 읽었어?”

2시. 은우는 입에 물고 있던 과자를 빠드득 부수었다. 건우의 손이 다섯 번째 공책을 내려놓은 것도 그때였다.

“다 읽긴 했는데… 그, 네가 쓴 거야?”

반응은 특별한 감 없이 평범했다. 그게 그의 이야기라곤 감도 안 잡히는 모양이다.

하기야 게임이나 소설도 아닌 현실에 ‘환생’ 따위의 요소가 끼어들 거라곤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이 세상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신도, 뭣도 없는 세계가 있을 거라 생각해 본 적 없는 그처럼.

“반쯤은 도박이었어.”

은우는 형에게 대답을 들려주는 대신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어차피 이해하기 힘들 이야기였다. 빨리 설명을 마치고 질문을 받는 게 나았다.

더구나 형은 남을 죽인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은우의 전생을 이해하지 못해 그를 끔찍하게 여기게 된다면, 그런 점에서 같이 있을 시간을 줄여 줄 수도 있다.

그러니까 형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설명하는 게 낫다.

그는 형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싹튼 불안감이 그의 말을 빠르게 만들었다.

“이계신이 태생신에게, 물론 나는 아직 아니었지만, 어쨌든 태생신을 앞둔 존재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리 없었으니까.”

“어…….”

“참고로 내가 신이 되지 않은 건, 돼 봤자 좋을 게 없어서야. 내가 신으로 각성하는 순간 이계신들은 그들의 신도를 이용해 나를 죽이려 들 테고, 그건 세상 절반을 적으로 돌리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신이 되었다면 이계신과 계약한 인간들은 죄다 그를 죽이려 들었을 거다. 무력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 힘을 얻기 가장 쉬운 방법이 신앙을 바치는 것이니 만큼 세계 절반이 등을 진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물론 그 속에서도 그는 잘 살아남긴 했을 테다. 무력이 무력이고 재능이 재능이니만큼 혼자서 어떻게든 살아남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혼자서‘만’ 잘도 생존해 냈을 것이다.

“내가 싸우는 걸 좋아했던 건, 그건 그 순간 느끼는 모든 감각에 내가 혼자라는 사실도, 혼자일 거라는 사실도, 또다시 나만 살아남으리란 사실도 잊을 수 있게 돼서야.”

그는 모두를 지킬 수 있는 영웅이 아니었으니까. 그를 제외한 모두를 잃어버리는 패배자였으니까.

사람 한 명 곁에 두지 못한 채 홀로 싸움만을 이어 나가게 될 것이었다.

“그렇지만 도피는 영원할 수 없는 거잖아. 눈을 돌려도 다시 마주치게 되는 거잖아.”

끝이 있다면 그래도 꾸역꾸역 눈감을 수 있다. 눈이 떠지기 전 죽을 거라는 얄팍한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어.

하나 신이 되어 그 싸움에 ‘영원’이라는 띠가 붙는 순간, 그것은 의미 없는 짓거리로 변했다. 그뿐이었다.

“혼자 남겨지는 게 너무 싫었어. 마지막까지 혼자라는 게 싫었어. 그래서 그냥, 거짓이라도 좋다는 마음으로 내 목을 잘랐어.”

“잠, 잠깐……. 무슨 소린지 잘…….”

“안 믿길 거 알아.”

은우는 잔을 들었다. 말한 건 희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심장의 고동은 이때가 더 크다.

그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많은 날을 함께했던 어둠이 시야를 틀어막으면 그건 나름의 위안이 된다.

“믿지 않아도 되고, 그냥 미친 소리라고 여겨도 돼.”

그는 잠시 컵을 입술에 대었다. 입술을 적시듯 얕게 들어온 찻물은 미지근하고 썼다.

이제 당신은 나를 어떻게 여길까.

“그래도 이해할 테니까.”

은우는 끝까지 그의 형을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그가 이 이야기를 믿지 않아도 이해할 테지만, 그렇다고 정말 믿어 주지 않는다면 그건 좀 슬플 것 같았기에.

던져진 주사위는 아직 눈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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