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미운 정도 정이라고, 나름 친해졌다. 친구라고 말한다면 글쎄. 그건 절대 아닐 테지만, 적어도 ‘지인’이라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자기야… 울어?”
“안 울어.”
북부에선 구하기 힘든 꽃다발을 든 채 무덤가에서 그들은 마주쳤다. 어제부로 여기에 계속 머물렀던 그인지라, ──쪽이 찾아왔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보내는 건 익숙하니까.”
─는 영웅이 되고 싶다 말하던 이의 눈동자를 되새기다가 무덤가를 슬슬 쓸었다. 앞에 놓인 꽃다발은 그가 선물한 것이다.
“…자기는 이런 거 신경 안 쓸 거라 생각했는데.”
“네 안의 나는 철로 만들어졌냐?”
그는 평소보다 날카롭게 대답했다. 아무렴, 동요가 적을 뿐 그도 상실의 허망함은 느꼈다. 그것의 빈자리에 슬픔을, 아픔을 얻었다.
인생이 무의미해져도, 가족의 의미를 잊어도,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해도. 그럼에도 그는 결국 누군가의 온기를 찾고 마는 인간이었기에.
그는 언제나 상실 앞에서 패배했다.
그러니 그를 무감각한 사람으로 만드는 말은 불쾌했다. 차라리 그게 사실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는 아직도 그러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익숙하다고 했잖아.”
“넌 익숙해지면 상처 안 받나 보지?”
“그건 아니지만…….”
머뭇거리던 ──가 끝내 말을 이었다.
“너는… 영웅, 이잖아.”
‘제대로 된 개소리였다.’라고 ─은 생각했다. 비석의 정면에 줄곧 앉아 있던 몸이 천천히 일으켜졌다.
“전장의 망령이 영웅은 무슨.”
“그렇지만…….”
“항상 먼저 죽지 못해서 남겨지는 사람이 어떻게 영웅일 수 있어.”
그리 반문했을 때 그 사람의 표정은 어떠했는지.
그의 알 바는 아니었다.
▣ 155. 분간이 가지 않는 색으로
사각사각.
펜촉이 종이 위를 노닐었다. 금속이 종이를 긁을 때마다 새겨지는 획들은 세상이 모르는 이야기들이다. 오직 그만 알았던, 이젠 그의 친구까지 아는 누군가의 일생.
그래. 서은우는 지금 그의 과거를 한 자, 한 자 정리하고 있다.
딱히 형에게 줄 각오가 선 건 아니었다. 형에게 말할지조차 그는 결정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이러고 있는 건, 만약 말하고자 결정을 내릴 때가 오거든 그 순간을 대비한 것이었다.
설명을 못 해 쩔쩔매지 않도록, 각오가 철회되기 전에 일을 저지를 수 있도록 말이다.
사각사각.
펜촉이 선을 북북 그었다. 순서가 바뀌었단 걸 뒤늦게 기억해 낸 탓이다.
앞선 기록도 비슷한 꼴이었던지라 종이는 제법 더러운 구석이 있다. 수정이 쉬운 전자 노트도 아니고, 기억 자체도 오래되어 어쩔 수 없다.
더구나 그는 분석에 뛰어난 것이지 정보 전달에 재능 있는 게 아니었다.
참고로 전자 노트에 기록하지 않는 건 이중, 삼중으로 데이터가 백업─그는 VAV 당시 배운 지식을 잊지 않았다─되어서다.
빼돌려질 가능성도 적고, 빼돌려져 봤자 소설 취급 당하겠지만, 때론 가능성만으로 불쾌해지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차라리 보관과 처리가 쉬운 종이를 택했다. 정 알아보기 힘들다 싶으면 공책 하나 더 사서 깨끗히 옮겨 적으면 될 일이니까.
은우는 누가 보면 소설처럼 보일 이야기들을 정성 들여 이어 나갔다.
하면 놀랍게도 묵은 과거들이 종이에 스며드는 잉크를 따라 흘러 내려갔다. 해소되는 느낌에 가깝다.
참 놀라운 이야기지. 그는 그저 정리하는 것뿐인데, 그게 마음속에 남아 있던 찌꺼기들까지 가져가는 건.
그래서 의사가 말하기 싫다면 글이라도 적어 보라고 했던 건가?
은우는 ‘의사는 의사구나.’ 하며 그 사람의 쓸모를 처음으로 인정했다. 별개로 여전히 일상을 토로할 생각은 없다. 지금까지 말 안 한 이유가 못 믿어서라면, 지금은 필요성을 못 느껴서다.
『레드바 님> 형님, 형님. 저, 강아지 입양하려구욧.』
『레드바 님> [강아지 사진 여러 장]』
『레드바 님> 넘 귀엽지 않아요?』
『레드바 님> 전 개인적으로 복서가 좋은데, 누나가 대형견은 무섭다고 생각도 말래요.』
『레드바 님> 두 번이나 파양됐엇는데도 사람한테 살갑게 굴 정도로 착한 앤데 ㅡㅡ;; 진짜 나쁘지 않아요?』
『레드바 님> 그니까 행님, 저랑 같이 누님 설득 좀.』
메시지 창이 징징징 울었다. 슬쩍 보면 참 뻔하게도 레드바임을 알 수 있다.
은우는 부쩍 친해진 레드바에게 친절히 답장을 주었다. 그의 눈은 따로 띄운 강아지들 사진으로 향해 있다.
“엄청 귀엽네요.”
『레드바 님> 그쵸?』
빈말이 아니라, 다들 진짜로 귀여웠다. 작고, 털이 복실복실하고, 혀를 내밀며 헥헥거리고, 눈이 단추처럼 동그랗고…….
과거를 정리하며 떠올린 괴수들과 비교하면 대형견조차 작고 사랑스럽다. 그런 이유 하나 때문에 키우긴 아직 부담스럽지만.
『레드바 님> 진짜 저런 애기가 뭐가 무섭다고.』
『레드바 님> 세상 저런 쫄보가 없습니다.』
레드바는 한참 제 누나에 대한 험담을 했다. 다만 그게 그다지 나빠보이지 않는 건, 진심 어린 험담이 아니라 가벼운 불만 토로에 가까워서다. 그만큼 누나랑 친하다는 게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저렇게 친해지는지 궁금하다.
『레드바 님> 아. 맞다, 행님. ㄱㅊ으심 저랑 같이 유기견 쉼터 봉사ㄱ?』
『레드바 님> 봉사 영상은 여러모로 효과가 좋거든용. 그 수익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의미로다가.』
『레드바 님> 막 어렵게 생각하실 수 있는데, 그닥 안 어려워요! 3년 차 짬이 장담함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은우는 쉽게 긍정의 뜻을 내비쳤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면 조금 불편할 수도 있으나, 동물이 상대라면 그나마 낫다.
봉사란 활동 자체도 좋은 것이니 만큼 거부할 이유가 별로 없고, 더구나 인기 스트리머가 좋은 행동을 했을 때 이는 파장은 은우도 잘 아는 바였다. 하면 정말 좋았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그래.
“그렇지만 동물들이 저를 무서워할 것 같아서.”
동물들이 그를 끔찍이 싫어할 거란 점이다.
『레드바 님> ㅋㅋㅋㅋㅋㅋ에이, 동물들은 얼굴 안 봐요.』
“얼굴 얘기 아닙니다.”
단순히 시각적인 것에 휘둘리는 인간과 달리, 예민한 동물들은 그가 품은 내밀한 피 냄새를 잘도 맡았다. 이번 생에선 특별히 죽이거나 한 게 없음에도.
어쩌면 생물을 해하는 데 거리낌 없는 기세를 읽어 내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살생의 업이 영혼에 박혀 있어 그걸 보는 것이든가.
어느 쪽이든 그가 다가가면 엄청나게 짖는단 건 달라지지 않는다. 고양이라면 하악질을 하며 꼬리를 펑 터트리고.
『레드바 님> 괜찮아요, 괜찮아요.』
은우는 목덜미를 쓸었다.
뭐, 겪어 보면 알게 될 일이다. 그 때문에 겁에 질릴 동물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동물 보호소라고 해서 동물과 같이 있는 봉사만 있는 것은 아닐 테지. 가령 사료 나르기라든가.
『레드바 님> 그럼 일정 잡아 볼게용.』
『레드바 님> 아마 이번 달 말이나 다음 달 초 사이로 갈 것 같은데, 안 되시는 날 있으심 말해 주세욥.』
“네.”
그는 달력을 뒤적였다. 특별히 안 되는 날은 없었다. 대신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았지만.
“딱히 안 되는 날은 없습니다. 그보다 레드바 님, 주제가 다른 질문 하나 드려도 됩니까?”
『레드바 님> 하시졉.』
“보통 형이나 누나한테 무슨 생일 선물을 할까요.”
『레드바 님> 생선이요?』
『레드바 님> 아, 형 있으시댔죠.』
『레드바 님> 지금까진 뭐 드리셨는데요?』
은우는 피아노 건반을 치듯 손가락으로 뒷목을 톡톡 쳤다.
“이번이 처음이라.”
『레드바 님> 글쿤엽.』
거기서 답장 텀이 살짝 생겼다. 은우는 조용히 기다렸다. 긴 지연 없이 새로운 문자가 날아왔다.
『레드바 님> 가지고 싶어 하는 물건 있음 가격대 봐서 그거 선물해도 좋구… 걍 밥 한 끼 사셔도 되는데… 솔직히 형제 중에서 생일 챙기는 사람 자체가 드물듯』
『레드바 님> 참고로 저는 상품권 십만 원짜리 줬음다.』
“그렇습니까.”
『레드바 님> 도움이 안 돼서 좀 죄송하네요.』
“아뇨, 도움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상품권이라.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은우는 공책 귀퉁이에 메모해 두었다.
『레드바 님> 맞다, 켄 형님은 생일 언제세용?』
뜬금없이 물어본 생일에 그는 잠깐 망설였다. 공개하기 싫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기억이 안 났다.
희수가 아니면 생일 챙겨 줄 사람이 없던 사람이 그였으니. 희수도 그도 생일을 챙기는 부류가 아니었기에 생을 기억할 이유가 없었다.
“잠시만요. 민증 좀 보고 오겠습니다.”
『레드바 님> 엌ㅋㅋㅋㅋ』
은우는 민증을 잠깐 꺼내 살펴보았다. 330401. 4월 1일이었다.
“4월 1일이네요.”
『레드바 님> 만우절이네욥. 고생 많으셨겠다.』
만우절이 생일인 것과 고생 많은 게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은우는 질문하는 대신 그냥 얌전히 질문을 넘겼다.
『레드바 님> 쪼아용. 그럼 내년엔 꼭 선물 드리는 걸루.』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레드바 님> ㅋㅋ제가 드려야 저도 선물을 받죠! 아, 물론 켄 행님은 안 주셔도 제가 특별히 넘어가 드림.』
은우는 눈을 찡긋거리는 이모티콘을 보며 어깨만 으쓱였다. 생일 선물을 주겠다고 한 사람은 레드바가 처음이라서, 뭔가 묘한 기분이다.
“네.”
뭐, 레드바 생일은 그의 얼굴책 계정에 잘 적혀 있으니 상관없겠지.
은우는 그것으로 대화를 끝마쳤다. 형에겐 여전히 문자가 오지 않고 있다.
* * *
“이 게임 참, 주인공이 전쟁 다 하네요.”
은우는 윤관의 급보를 받은 순간 말했다. 왕원장 구원이라고 떡 적혀 있어 어쩔 수 없었다.
“고려군은 대체 뭘 하는지.”
촤르륵-
철선이 곱게 펴졌다.
─ㅋㅋㅋㅋㅋㅇㅈ
─미션 건 사람 절받으십쇼
─역시 게임은 룩빨이지
은우는 도포인지 뭔지 하는 외투 자락을 펄럭이며 흑립을 살짝 기울였다. 영락없는 선비 차림이다.
전투에는 영 안 어울리는 옷이나, 시청자가 거금을 걸고 낸 미션이라 차마 갈아입을 수 없었다. 그는 느릿하게 부채질을 하며─마찬가지로 신청받았다─말했다.
“여러분들은 가끔 보면 제게 옷 입히기 놀이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딴 스트리머들은 성능충이라섷ㅎ
─성능충이 아니라 성능이 뒷받침 안하면 깨질 못하는 거지
─우리는 아예 깨지도 못하전아
─쉿 조용히 해
잘만 하면 영화 뺨치는 VR 게임이다 보니 유독 옷차림에 목매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말대로 스트리머 중 옷차림(성능)에 연연하지 않는 건 거의 그밖에 없는 것도 한몫할 테고.
은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왕원장을 쫓는 여진의 군대를 추적했다.
왕원장 일당은 말조차 잃어버린 채 헐레벌떡 한 마을에 틀어박혀 있었다. 마을이라고 하기엔 대단히 규모가 작고 설비가 엉성했지만, 울짱이라도 있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방비는 되었다.
“흐음.”
은우는 시청자가 제공해 준 선비 영상을 기억하며 부채를 살랑거렸다. 강화를 안 하다 보니 남아도는 돈으로 구매한 흑마가 그의 옆에서 또각또각 걸었다. 참고로 얘는 죽어도 부활된다.
“고려군이 한심해도 구원은 해야겠죠. 갑시다.”
탁.
철선이 접히고, 그는 소맷자락을 나풀거리며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접힌 철선이 가장 귀에 있던 적의 머리를 때리고 그 손목을 쳤다. 대미지는 약한 대신 상대가 무기를 떨어트리도록 하는 부가 효과 덕에 상대가 바로 칼을 떨어트렸다.
은우의 철선이 다시금 그 머리를 때렸다. 이번엔 기절 상태 이상이 부여되었다. 떠오른 타이머를 보면 12분이다. 충분하다.
【적이다!】
그의 존재를 알아챈 적 하나가 뒤돌아 창을 내질렀다. 은우의 발이 옆으로 틀어지듯 한 바퀴 회전했다.
그 가운데 철선은 촤악 펴지며 깃 부분의 날카로운 부분으로 상대의 목울대를 갈랐다.
촥!
곧바로 접힌 부채가 방금 베었던 적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역시 기절이다.
“부채도 제법 괜찮은 것 같습니다.”
─우리도 좋은 것 같음ㅎㅎ
─(대충 비주얼보고 만족한다는 채팅)
─이 게임 한정으로 피부색이랑 머리색만 어케 해봐 좀;;
─ㅋㅋㅋㅋㅋ피부색이 좀 깨긴 하지ㅋㅋ
“그건 양해 부탁드립니다.”
은우는 바로 반 바퀴를 틀어 접은 철선을 휘둘렀다. 검날이 튕겨 나가고 부채가 재빨리 그 손목을 내려쳤다. 무기가 떨어졌다.
그는 그것을 발로 차 날려 버리고 부채를 펼치며 얼굴 앞쪽으로 가져다 대었다. 칼날이 부채 면에 막혔다가 힘 싸움에 튕겨 나갔다.
접힌 부채가 그것의 상체를 위에서 아래로 가르고 귀 위쪽을 딱 때렸다.
─슬슬 켄이 못다루는 무기가 뭔가 궁금해짐
─ㅇㅈ....
─노래
─그건 무기가 아니잖앜ㅋㅋㅋㅋㅋㅋ
─ㄴㄴ 켄 노래는 무기임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션도착’ 님이 ‘10,000원’ 투척!
다른 손으로 뒷짐까지 져주세요 5만원.」
─캬,,,배운분
─고려시대로 타임슬립on!
“갈수록 여러분의 미션이 점차 색달라지는 기분이 듭니다.”
보통 해내지 못하는 걸 걸지 않나? 아니, 본인이 못하는 걸 대행시키는 거니까 미션의 틀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좀 이상하지만.
금액은 작은 편이나, 저런 게 모이면 또 무시할 수 없다. 더구나 행동의 제약이 걸리긴 하지만, 쉬운 미션이었다.
은우는 순순히 뒷짐을 져 주었다. 흑립 안쪽에 얼굴을 가리도록 덧대어 둔 천이 살랑거렸다.
─개간지 난다;;
─이제 켄 방송은 약간,,,,영화,,,드라마,,,,그런 거 보는 맛인듯
─불가능 맛집
─연출 감독은 비수들이냐?
─감독이 비수라니 망 예약;;
정작 배우는 영화랑 드라마를 안 좋아하지만, 저들이 만족한다면 됐다.
뒤에서 적이 달려들었다. 은우는 철선 손잡이 부분에 달린 끈을 잡고 뒤로 휘둘렀다. 창이 그를 스쳐 지나가고, 부채의 사정거리로부터 반 발자국 더 떨어져 있는 적의 관자놀이에 철선이 명중했다.
“뒷짐 지는 것도 의외로 페널티가 되네요.”
뒷짐을 안 졌으면 상체를 굽혀 닿았을 텐데, 뒷짐을 지고 있으니 허리를 굽히기가 영 어정쩡했다. 물론 처음 미션이 들어온 시점부터 알고 있던 점이다.
─간지와 패널티를 동시에 부여한 미션 ㅆㅌㅊ
─가성비 미션이었누;;
─뒷짐지고 싸우는게 어렵긴 하구나
그래도 이리 말하면 사람들이 즐거워했다.
그의 손이 매끄럽게 철선을 살짝 띄웠다가 손잡이를 다시 잡아챈 후 펼쳤다.
펼쳐진 철선이 옆에서 들어오던 검을 쳐 냈다.
“적이 약해서 참 다행입니다.”
─뻥치지마요ㅋㅋㅋ
─본인 켄 지루하다고 말한 거 들었다
─? 언제?
─용의 귀로 들었다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
“뻥 안 쳤습니다.”
은우는 마지막 적의 관자놀이를 때려 기절시켰다. 맨 처음에 쓰러트렸던 적의 기절 타이머는 5분대다. 역시 충분하다.
“기절은 정리로 안 치나 보네요.”
부채로 사람 죽이려면 대미지가 너무 적다. 은우는 불가피하게 검을 들어 하나하나 머리를 찔러 죽였다. 약간 확인 사살 하는 느낌이었다.
“이운! 자네가 와 주었군!”
그 자리에 있던 여진군을 전부 해치우니 왕원장이 한달음에 달려와 손을 덥석 붙잡았다. 컷신인지라 은우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정보) 왕원장의 실제 이름은 왕자지다
─엌ㅋㅋㅋㅋㄹㅇ??ㅋㅋㅋㅋㅋㅋ
─왕자지ㅋㅋㅋ
─야스 잘할 것 같은 이름ㅋㅋㅋ
─이름 때문에 교과서에도 안 나오잖어~
─형 왕자지랑 같이 다녀?
일부 지식인이 왕원장의 실제 이름을 까발리며 채팅 창을 붉게 물들였다. 그렇고 그런 드립을 좋아하는 비수들답게 채팅 창이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여기엔 원장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만.”
조금 뒤에 풀린 이벤트 신 끝에서 은우는 질문했다. 그러자 지식인들이 곧바로 대답해 주었다.
─거시기한 이름이니까욬ㅋㅋ
─거시기가 참 거시기하다니까
─켄 왕자지 구함?
─이름 진짜 왜이럼ㅋㅋㅋㅋ
확실히 정식 게임에서 사용하기엔 좀 걸리는 게 많긴 하다. 한국에서 남자 성기를 달리 부르는 말이니까.
그러나 저런 이름을 보고도 다들 덤덤하게 굴면 제작사에서 굳이 바꿀 이유가 있을까.
“여러분들이 야한 생각만 하시니까 그러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뭘했다고
─(대충 억울하단 채팅)
은우는 시청자들의 변명을 들어 주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한낱 단어 따위에 흥분한 적 없었으므로.
대신 그는 퀘스트에 맞춰 여진군을 추가로 처치했다. 말 한 마리까지 노획해야 했던 탓이다.
“이쯤 되면 이운은 뒤치다꺼리의 선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ㅇㅈㅋㅋㅋㅋ
─척준경 씨....당신을 존경합네다....
─ㄹㅇ 게임은 그렇다쳐도 척준경 님,,,당신은 역사에서 대체 얼마나 부려먹히신 겁니까...
─고려 유일 소드마스터의 폐혜
고려군이 약해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이운 한 명의 무력에 의지해 헤쳐 나간다. RPG 게임 대부분이 그런 구조이지만, 이 게임은 실화를 바탕으로 짜져서 그런가. 유독 심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다.
【네 이놈!】
은우는 마지막으로 남은 지휘관의 칼을 철선으로 잡았다. 이게 철로 된 물건이다 보니 일반 부채처럼 대 사이사이에 한지를 덧바른 게 아니라 일정 굵기의 철판을 연결한 물건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철판과 철판 사이에 검날을 끼우고 그대로 부채를 접으면 의외로 단단하게 봉할 수 있다.
은우는 그 상태 그대로 손목을 꺾었다. 검을 잡은 지휘관의 손목도 틀어졌다. 다만 꺾임의 정도를 대비한 은우와 달리, 지휘관의 손은 기형적으로 틀어진 채다.
그는 거기서 부채를 당기듯 위로 휘둘렀다. 적의 몸이 강제로 끌려왔다.
은우는 그 상태에서 검을 해방했다. 부채 위쪽 부분, 뚫려 있는 공간을 이용해 철선만 쑥 빼낸 거다. 방금 당겨진 여파로 한 발 내딛고 만 지휘관의 머리가 그의 앞에 딱 좋게 자리했다.
철썩!
철선이 시원하게 지휘관의 머리를 때렸다. 정예 등급 적들은 상태 이상에 잘 걸리지 않지만, 상관없다. 여러 대 때리면 걸리긴 했다.
접힌 부채가 속 뻥 뚫리도록 위와 양옆을 번갈아 타닥 쳤다. 어찌나 소리가 찰진지 사람들이 후원으로 효과음을 넣었다.
기어코 지휘관이 기절했다.
은우는 그것을 보며 검을 꺼내 들었다. 지휘관의 목을 푹 찌르면 퀘스트는 이제 ‘철갑마 노획 후 왕원장에게 가져가기’만 남는다.
“철갑마 타고 갑시다.”
그가 구매한 흑마야 어디에 있든 휘파람만 불면 잘 찾아온다. 다만 왕원장에게 이 말을 갖다주는 게 목표인 이상, 그냥 타고 가는 게 빨랐다.
─주기 아깝다ㅠ
─말 졸라 좋아보이는데;;
─퀘스트템으로 넘겨줘야한다니...
“철갑마 좋아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다음에 구매할까요?”
─옷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룩 통일은 국룰이지
─미스매치 절대 안 됨
그가 가지는 걸 바라지도 않으면서 아까워하기는.
은우는 목덜미를 쓸며 왕원장에게 노획한 철갑마를 주었다. 왕원장이 감사를 표하며 제 일당을 이끌고 사라졌다.
“다음 메인 퀘스트는 웅주네요.”
그가 있는 공험진과 거리가 꽤 된다. 은우는 지도를 펼쳤다. 빠른 이동을 위해서였다.
아무렴, 중간중간에 전투가 있다 해도 이 엄청난 거리를 말 타고 가면 지루하다. 심지어 그는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다량의 이벤트까지 처리한 상태였다. 가면서 할 게 없었다.
“이동하겠습니다.”
─빠른 이동 좋아요호호홍
─스겜스겜
이동하기를 꾹 누르자 로딩 화면이 세상을 잠깐 검게 물들였다.
「‘너희의척추요정’ 님이 ‘1,000원’ 투척!
로딩하는 동안 허리펴라!!」
「‘여러분’ 님이 ‘1,000원’ 투척!
눈깜빡거리기, 침삼키기, 숨쉬기 잊지는 않으셨습니까?」
─척추요정과 사탄이 동시에 오냐
─이 악마들...!
─(대충 엄청 신경 쓰인다는 채팅)
─허리는 펴졌는데 저 세 개도 인식하게 됨;;
─사탄 1패
은우는 채팅 창을 보며 얕게 웃었다가 밝아지는 시야를 인지했다. 펼쳐진 건 웅주 성의 정경이다. 보이는 NPC들마다 얼굴이 암울했다.
“우리 이제 다 죽는 건가?”
“예끼! 그런 소리 말게! 최홍정 장군께서 앞서 대승을 거두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들어 보게. 병사들 쪽에서 심심치 않게 소문이 돌고 있어. 포위가 너무 견고해진 나머지 굶어 죽게 생겼노라고.”
“그럴 리가. 그 유명한 영웅 나리도 이곳에 계시지 않은가? 그분이 어떻게든 해 주실 걸세.”
떠드는 소리를 잘 들어 보면 웅주 성이 여진군에게 포위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하늘은 슬슬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여긴 또 포위상태냐;;
─반 병목지형이라서 그럼
─완전 병목지형이면 괜찮은데 여진군만 아는 우회로가 있어서
─포기한 이유도 다 이것때문이잖어ㅋㅋ
─켄이 하날 처리하면 다른 한곳에서 똥을 뿌리누
그런 걸 생각해도 너무 자주 포위되는 감이 있다. 어쩌면 보스전이 없이 이런 소규모, 대규모 전투만 있어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고.
적어도 지금까지 겪은 보스전은 특수 스킬 개방을 위한 사이드 퀘스트에서밖에 못 봤다. 그마저도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었지만.
“이번엔 어떤 식으로 구원할까요.”
은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쌍검으로
─창
─극으로요
─부채 계속 갑시다!
한 사람이 고의로, 또는 오해해서 한 말을 다른 사람들이 딱딱 받아 냈다. 덕분에 상황은 무기 선택의 장이 되었다. 은우의 입술이 미묘하게 올라갔다.
“이번엔 쌍검입니까?”
매 판마다 무기 신청을 받는 건 거의 연례 행사 취급이다. 은우는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해 쌍검을 들었다.
그가 가장 잘 다루는 무기라서 그런가, 혹은 가장 흔하지만 가장 멋이 나는 무기라서 그런가. 사람들은 의외로 쌍검 사용을 자주 요청했다. 은우로선 나쁜 일이 아니었다.
퀘스트 마크가 가까워졌다. 참담한 표정의 최홍정이 그 주인공이었다.
완전 죽을상이네. 시청자들이 팩트를 찔렀다.
“뭐, 앞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않습니까.”
한때 고립된 도시를 구출해 본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었다. 괴수들의 포위망을 뚫고 성에 입성했을 때 봤던 성주는 이것보다 더 죽상이었다.
“오오! 잘 왔소, 이운!”
말을 걸자마자 과한 환대가 돌아왔다. 하기야 지금까지 이운 혼자 해낸 일들을 생각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금 동아줄처럼 보이긴 할 터였다. 그들의 무능을 이쪽에 떠넘기는 건 퍽 귀찮지만.
“이운, 면목 없소만,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자 하오.”
─면목 없으면 하질 말든가
─아재 염치가 없네
─이쯤되면 이운 팀플 조장;;
─처음만 해도 찬밥대우하시던 인간 어디감
─광신도 한 명 생겼쥬?
─솔직히 다 죽쑤는데 혼자서만 요리하고 있잖아ㅋㅋ
─무조건 빨아야지
“부디 외부로 나가 구원군을 요청해 주시오. 간악한 여진족의 포위를 뚫을 자는 그대밖에 없소. 만일 그대가 구원군을 이끌고 오지 않는다면, 성안의 사졸들은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죽을 것이오.”
지금까지 그래 왔듯 뻔한 부탁이었다. 대답 선택지가 떠올랐다.
『▷ 나밖에 없다니, 하는 수 없군.
▷ 되는 데까지 해 보겠소.
▷ 너무 신용하시니 어깨가 무겁구려.』
─진짜 대사들이 어케 거절이란게 없어
─ㅋㅋㅋㅋㅋㅋ거절하면 진행을 못 하잖아
─근데 대사들이 죄다 꼽주는 느낌이다?
─ㅇㅈㅇㅈ 은근 대사 비꼬는 거 많음ㅋㅋㅋ
은우는 선택지를 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되는 데까지 해 보겠소.”
“고맙네!”
메인 퀘스트가 새로 새겨졌다. 웅주 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부가 목표는 아직 없었으나, 지원하는 아이템은 있었다.
“약소한 것이나, 이걸 가져가시게. 여진족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한결 쉬워질 걸세.”
새로 제공된 아이템은 은밀함을 높여 주는 위장복이었다. 말이 위장복이지, 풀잎과 비슷한 색감의 해진 천으로 만든 옷에 불과했다.
─절대 안 됨
─왕한테 비단옷을 못입힐 망정 해진 옷? 어림도 없지
─아 간지 빠지네
─ㄴㄴㄴㄴㄴㄴ
─ㅋㅋㅋㅋ다들 한마음 한뜻ㅋㅋㅋ
─마! 가오로 죽고 가오로 사는 거다ㅋ!
간지에 죽고 간지에 사는 시청자들은 그들 일 아니라고 트집부터 잡고 봤다.
은우는 목덜미를 쓸며 그들의 생떼를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때, 후원 알림음이 귀를 때렸다.
「‘미션실패시벌칙’ 님이 ‘1,000원’ 투척!
한 시간 안에 정면돌파로 포위망 벗어나면 오만원 못 벗어나면 24시간 방송 벌칙 ㅇㅋ?」
─야 저거 날로 먹네;;
─벌칙충 ㄲㅉ...
─미션도 재밌게 걸어야지 별거지같은걸
─학생 손내려
은우는 그걸 보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풀 다이브 캡슐 덕에 스물네 시간 정도야 어렵진 않다. 다만 그동안 소모할 게임은 어떻게 충당할까.
그는 박기철에게 전수받은 거절법을 사용했다.
“제 스물네 시간이 오만 원이면 너무 싼 것 같은데.”
─팩트 묵-직
─근디 ㄹㅇ 5만원이면 최저시급도 안 되긴 하잖어;;
─ㅇㅈ
─가성비충은 나가라 이 마리야
워낙 걸린 돈이 적었던 터라 사람들은 쉽게 수긍했다. 은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정면 돌파로만 깼으니, 이번엔 가능하면 숨어서 이동하겠습니다.”
그는 도포 자락을 나풀나풀 흩날리며 마커를 따라 나아갔다.
“힘내십시오.”
“믿습니다, 나리.”
길을 걸어갈 때마다 군인들이 응원과 격려를 보내 주었다. 그의 어깨에 제 목숨들이 얹어져 있음을 잘 알고 있는 듯한 광경이다. 그 당시 졸병들이 정말 그랬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암문이네요.”
풀숲이 우거질 정도로 후미진 곳까지 오고 나서야 길 안내 마커가 갱신되었다. 은우는 그곳을 스리슬쩍 통과했다. 잘 열리지 않는 문을 겨우 열고 나가면 상황은 방금 전보다 더 심각하다.
그는 무성한 수풀을 가르고 겨우 몸을 빼내었다.
─절대 안 들킬 듯
─와 엄청 잘숨겨놨네
─괜히 암문이 아닌가벼...
“암문이란 게 본래 그래야 하니까요.”
일반인이건 적이건, 암문이 노출되면 끝이다. 그곳으로 대군이 기어 들어올지, 간자가 들어올지 모르는 일이니까.
혹은 살수가 들어올 수도 있다. 혼자서 장군과 사령관의 목을 따고 성문을 개방시켜 버릴 살수가.
참고로 세 번째는 경험담이었다.
“이 근처에도 적들이 있군요. 조용히 움직여야겠습니다.”
─여기까지 수색대를 보내네
─암문 의식해서 일부러 퍼트린듯,,,
─ㄹㅇ 전쟁같다
─근데 진짜 어둡다;;
─쫄려서 삼인칭으로 바꿈
─어두운 거 극혐
은우는 멀리 보이는 횃불을 보며 사근사근 걸었다. 그의 손은 허리춤으로 다가가는 중이다.
“아까 쌍검을 고르셨죠.”
스르릉 소리와 함께 칼집에서 검들이 뽑혔다. 울창한 나무들 덕에 달빛조차 기어들지 않는 숲에서 저 멀리 다가오는 횃불의 빛이 검신을 물들였다. 검신 위로 도깨비불 같은 주홍빛이 너울거렸다.
“미션은 받지 않았지만…….”
그는 그 도깨비불들이 사라지도록 검의 각도를 달리했다. 어둠에 잠긴 날붙이가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조용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부터 한 시간 재 주시길 바랍니다.”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으면 가뜩이나 없던 소음이 더욱 사라진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옷자락은 저승사자의 옷깃과 다름없다.
“손 남는 분들은 몇 명 죽는지 세 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어둠을 틈타 적의 발치까지 다가간 그의 손이 적의 멱을 땄다. 횃불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고, 약간의 비명 소리에 이목이 끌렸다. 경계 마커가 생겨났다.
【어이, 무슨 일 있어?】
밤이라는 점 때문에 녀석들의 탐지 반경은 줄어든 상태다. 은우는 그 점을 십분 이용해 다시 풀숲으로 녹아들었다.
적이 한 발을 내디딘 순간 그 옆에서 튀어나온 검신이 해당 적의 목을 쳤다. 횃불 하나가 또 추락했다.
“가는 길에 몇이나 죽이게 될지 저도 궁금해져서.”
추락하면서 흩어지는 주홍빛은 흑립을 쓴 이의 턱과 입술을 희미한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핏물과 분간이 가지 않는 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