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안녕. 우리, 또 보네.”
주점에서 또 마주쳤다.
─는 귀족을 무시한 채 음료와 밥을 주문했다. 거의 3인분이었다. 하루에 소비하는 열량이 열량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설마 내 것까지 시켜 준 거야?”
“뭐래.”
그는 접시 하나에 그 음식을 전부 던 후 하나의 숟가락으로 꾸역꾸역 해치웠다. 소년인 걸 감안해도 작달막한 체구지만, 그 모든 음식이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걸 본 귀족은 코로 숨을 푸욱 내쉬더니 그가 앉은 테이블에 엉덩이를 붙였다.
“합석 안 받습니다.”
“에이,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구.”
안 받는다는데 기어코 앉아 버린 귀족은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보다시피 귀족 출신이야. 아, 그렇다고 귀족 대우를 바라진 않아. 자기야한테 그럴 순 없지.”
─는 그 말들을 전부 흘려들었다. 예민한 데다가 정보를 본능적으로 수집하는 기질은 그 말들을 억지로 듣고 말았지만, 적어도 맞장구 한 번 쳐 주지 않았다.
“저 건너편 빵집 알아? 걔네 아들이 내게 작업을 걸더라. 자긴 헌터가 꿈이라면서. 웃기지 않아? 내가 애인 고를 때 제일 멀리하는 게 헌터인데.”
다만 그게 일주일.
“카르카스가 죽었어. 웃기지 않아? 자기는 죽지 않을 거라며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더니. 역시 헌터랑 사귀는 게 아니었어.”
한 달.
“혼자가 되는 건 너무 싫어.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고 싶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는 몸도 아니지만.”
꼬박 세 달 동안 반복됐다.
그가 사지에서 돌아올 때마다, 죽지 못하고 철새처럼 주점에 돌아올 때마다 매번 되풀이된 것이다.
일방적으로 이야기 듣는 기분 더러운 행위가 어느덧 습관이, 버릇이, 일상이 돼 버리는 순간이었다.
“자기야. 오늘 나, 예쁘지 않아? 이 정도면 누구든 꼬실 수 있겠지?”
─는 그것이 너무 생경했다. 그의 일상에 이토록 오래 머문 자는 없었다. 그것도 나약한 일반인이.
주점이나 자주 들르는 정비소 따위라면 그래, 오랫동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교분을 쌓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서로가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존재임을 알기에 일부러 거리를 두는 탓이다.
그렇기에 ──처럼 다가오는 자는 처음이었다. 그게 호감에 머물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여튼 우리 자기는 너무 무뚝뚝해. 대답 한 번을─”
“죽지 않을 사람을 찾는 거라면 나 같은 건 버려. 난 내 목숨 같은 거 챙기지 않아.”
세 달째에 이르러서 도저히 참지 못해 말하고 말았다. ──는, 정말로, 끈질겼다.
“알아. 조금만 봐도 그게 눈에 보이는걸.”
그래서 그런 답이 돌아왔을 땐 조금 놀랐다. 누군가가 떠나가는 게 싫다면, 그에게도 다가오지 않는 게 맞지 않나? 진짜 미친놈인가?
“그걸 알면서 왜 내게 다가오는 건데.”
“으음. 우리 자기가 제일 가능성이 높아 보여서?”
──는 머리카락을 슥 뒤로 넘겼다.
“나도 사정이 있어서 말이지. 원하는 게 있는데 그걸 줄 수 있는 사람이 너어어무 적거든. 근데 자기는 그게 가능할 것 같았어.”
“별 지랄을.”
“참고로 이거, 자기한테 별 손해는 아니다? 특별히 뭘 구해 달라고 부탁 안 해. 애초에 그런 부류가 아니거든. 어차피 내가 부탁하기도 전에 자기가 나서게 될 문제이기도 하고. 음, 자기가 지금 해 줄 건 그냥 내가 붙어 있게만 해 주면 돼. 솔직히 내가 지금껏 자기한테 뭐 한 거 있어? 없잖아.”
“내 귀는 망가진 것 같은데.”
“아이, 참. 그건 좀 봐주자.”
그 사람은 깔깔대며 웃곤 손바닥을 그러모았다. 구더기들이 들끓는 눈동자가 여전히 역겨웠다.
“절대 손해 보는 일 없을 거야, 정말로.”
“내가 꺼지라고 해도 안 꺼질 것 같은데.”
“하하, 들켰어?”
“마음대로 해.”
그럼에도 곁을 허락한 건 어차피 어느 순간 떠날 것임을 알아서였다. 혹은 그가 떠나 버리거나.
세상은 상실의 반복이었다.
▣ 154. 약한 자들과 같이 싸우면
“자네, 해냈군!”
병마판관 최홍정이 장군 이관진과 이운을 맞이했다. 윤관은 어디 가고 그가 반겨 주나 살펴보면 윤관은 출진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나으리께서 출진하셨다니 저는 더 이상 할 일이 없겠군요.”
최홍정이 이관진만 대우하는 걸 보다 말고 이운이 말했다. 자칫 비꼬는 말로 들릴 수 있으나, 표정이 워낙 무던해서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찬밥 대우를 받아도 신경 쓰지 않는 성격 같았다.
혹은 그런 것에 너무 익숙하거나.
“아, 이번 일은 자네 공이 정말 컸네.”
이관진이 뒤늦게 헛기침을 하며 공을 추켜세웠다.
“어떤가, 군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그대라면 천우위 소속 녹사가 되는 것쯤은 일도 아닐 걸세.”
“하하, 제가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인지라. 말씀만 받겠습니다. 그렇지만 나라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이 한 몸 바칠 터이니, 칼이 필요할 때 얼마든지 불러 주소서.”
이운은 희게 웃곤 칼자루를 툭툭 두드렸다.
“칼 위를 노니는 인생, 객사보단 나으니.”
─여윽시 소드마스터 척
─나만 방금 대사 서늘했냐?
─? 머가?
“고맙네.”
가벼운 컷신이 종료되었다. 은우는 방금 본 것을 가만히 곱씹다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무렴, 객사보다는 전사가 낫다. 누군가는 아니라 말하겠지만, 적어도 그에겐 전사가 나았다. 적어도 그가 죽을 때 누군가는 있겠거니 했으니까.
“다음 메인 퀘스트는… 바로 앞이네요.”
상념을 끊고 메인 퀘스트 위치를 찾았다. 놀랍게도 바로 앞이었다. 방금 대화를 마친 이관진과 최홍정에게 퀘스트 마크가 붙어 있는 것이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러자 컷신이 발동되며 윤관이 거느린 부하 중 일부가 다친 몸을 이끌고 달려왔다.
“여진이 대원수를 습격했습니다! 대원수께서 소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항전 중이시나,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뭣이!”
“대원수를 구해야 한다!”
최홍정과 이관진이 새파래진 안색으로 외쳤다. 그러나 윤관을 포위하고 있는 여진 병사를 압도할 수준의 병사를 준비하려면 너무 오래 걸렸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병사 10명을 내주시오. 내가 가겠소이다.”
그에 이운이 나섰다.
“자살행위다!”
최홍정이 그리 외쳤지만, 그를 말린 건 이운이 아니라 이관진이었다. 한차례 이운의 무력을 목도한 바 있는 장군은 진중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 괜찮겠나?”
“그분께 입은 은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소이까? 병사들의 가족들이나 부탁합시다.”
“…시간만 벌어 준다면, 그대의 가족 또한 부양할 걸세.”
이운이 푸하하 웃었다.
“이미 죽은 자들을 부양해서 무엇할까. 준비나 빨리하시오! 구해야 할 것이 사라져 버리기 전에!”
외치는 그의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상서롭다. 사람을 구하러 간다는 말과 다르게 다급함도, 은인이 죽게 생긴 상황에 대한 절박함도 없었다.
기이할 정도의 태연함이고 호쾌함이었다.
“바로 갑시다.”
이벤트 신이 끝나자마자 은우는 검지와 엄지를 입술로 가져다 댔다. 하면 자동으로 휘파람 모션이 나오며 말을 호출했다. 현실성과 바꿔 먹은 편의성이다.
저편에서 달려오는 말에 맞춰 뛴 손이 고삐를 잡고 안장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옷자락 팔락거리는 것까지 완-벽
─콘솔에선 자동이니까 상관없는데,,,저게 브알에서 되네,,,,
“쉬운 테크닉입니다.”
─우리한테 님 기준 갖다대지 말락우요
─우린 뭐 쉬운데 안 하는 것 같아?!
─속보) 켄의 기만질에 절여진 비수들...급발진을 시작해...
은우는 시청자들과 도란도란 말을 나누며 대로를 달렸다. 곧 윤관을 포위한 여진군 무리가 보였다.
정해진 스토리인지 말이 여진족의 화살에 맞고 쓰러졌지만, 은우는 태연히 땅을 구르며 일어섰다. 또 다른 화살들은 방패가 막고 검으로 부러트렸다.
사나운 들개처럼 두 다리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물며 그는 상점에서 탈까지 구매한 차였다.
동물을 조각한 듯한 탈과 연결된 털가죽은 그 시대 때 실제로 존재했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꽤 멋스럽다. 더군다나 어두운 밤, 풀숲을 스산하게 지나며 기습할 때는 더욱 그렇다.
【적이─!】
은우는 사이드 퀘스트를 깨면서 해금한 창을 내던졌다. 여진군 한 명이 머리가 깨져 죽었다. 다른 이들이 다급히 화살을 쏘았으나 소용없었다.
그의 다리가 땅을 이리저리 박차며 기어코 여진군 앞까지 당도했다.
“혼자 왔어도 괜찮았을 것 같습니다.”
아군이라는 놈들은 죄다 뒤처져서 달려오는 중이고, 적이란 것들은 약해 빠졌다. 은우는 맹렬하게 포위망을 뭉개며 적들을 썰어 넘겼다. 투지 게이지를 소비해 사용하는 스킬은 필요도 없었다.
한 손엔 창을, 한 손엔 환도를 들고 종횡무진 움직이면 어느새 퀘스트가 갱신되어 있다. 그가 이끌던 유격대가 윤관과 합류한 덕분이다.
“고려인 따위가 제법 싸우는구나!”
활로만 뚫으면 되는 상태가 되니 고려 말을 할 줄 아는 여진족이 나타났다. 일반적이지 않은 덩치에 부리부리한 눈 따위가 보통 놈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완안발타……! 어째서!”
─ㄴㅇㄱ
─형이 왜 거기서 나와
─누구임?
─여진족 대빵으로 기억하는디,,,
─대빵은 오아속아님?
접근이 가능한가 보면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갔을 때 투명한 막 같은 게 그를 막았다. 은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누굽니까.”
─여진족 대빵인듯?
─ㄴㄴ 대빵은 아니고 가족인듯
─빌런은 창작캐 쓰지 않냐 보통?
─창작캐인듯
시청자들의 떠드는 동안 여진족 장수, 완안발타는 무기를 들었다. 거대한 장창이었는데 날로 보아 극戟이 분명했다.
“나는 완안발타, 완안오아속의 사촌이자 추장의 명령에 따라 고려 정벌의 총사령관직을 받았다.”
“벌써 보스가 나올 리는 없는데…….”
“나는 위대한 완안부를 위해 너희에 대한 모든 것을 학습했다. 항복하라. 너희에겐 가망이 없다. 투항한다면 최소한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항복하겠는가?”
완안발타의 말에 윤관은 침을 뱉으며 격렬히 거부를 표했다.
“죽으면 죽었지, 오랑캐에게 무릎 꿇지는 않으리라!”
“유감이군.”
체력 바는 캐릭터의 머리 위가 아니라 시야 위쪽에 떠올랐다. 길이가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보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길이다.
고려 정벌 담당 사령관이라 말할 때부터 직감한 거지만, 정말 최종 보스인가?
은우는 의문을 느끼면서도 무기를 들었다. 완안발타는 시작부터 강공격을 내질렀다.
그는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공격을 회피했다. 그러곤 빠르게 파고들려다가 도로 물러났다.
“하합!”
“속도가 빠르네요.”
기이할 정도로 빨랐다. 최종 보스라고 하면 납득이 될 정도지만, 스토리 초반에 불과한 지금 맞딱뜨리긴 좀 그런 정도라고 할까.
기술이 대단한 게 아니라 신체 능력이 뛰어난 거라서─심지어 따라잡을 수 있는 범위의─상대하기 어렵진 않겠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에겐 어떨지. 물론 그가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을 테다. 그건 제작사가 도맡아야 할 밸런스 문제니까.
은우는 적 장수의 신체 능력을 쟀다. 금방 계산이 나왔다. 그의 환도가 단단히 손에 잡혔다.
“그래 봤자지만.”
─파악 끝났어
─응, 이제 너 끝
─아;; 요즘 쫌?? 심심하다...
─우리가 켄 무력에 너무 길들여진거임...
─이때 검기사 2이 나와야하는데
─킹직히 펜리르가 너무 오졌다 ㅇㅈ?
─‘그 게임’ 언급ㄴㄴ
그는 두 손으로 검을 단단히 쥔 채 내리쳐지는 극을 맞상대했다. 칼날과 극의 날이 부딪치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절묘한 힘 조절로 인해 극이 튕겨져 나갔다. 은우는 두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그 잠깐 사이에 창을 회수한 완안발타가 찌르기를 시도했다.
은우는 몸을 기울이며 칼을 옆쪽으로 기울였다. 각도를 비튼 덕에 칼등을 타고 창이 미끄러졌다. 그 상태로 걸음을 빠르게 내지르면 창과 칼등이 마찰하며 적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런 다음 거리를 완전히 좁히면 그때부턴 참으로 쉽다.
“쥐새끼처럼 잽싸구나! 어디까지 피하나 보자!”
창이 대항하기 힘들 정도로 근접하니 발타가 어깨로 밀치려 들었다. 그에 은우는 가뿐히 피했다. 잡으려 하면 바람을 타고 손을 둥글게 스치며 약 올리듯 날아가는 낙엽처럼, 그의 몸이 간발의 차로 완안발타의 몸 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동시에 그의 검이 발타의 옆구리를 갈랐다. 피 튀기는 이펙트가 퍼져 나왔다.
─엥
─대미지가 안 다는디?
─피 달았냐 방금?
유리잔 위를 미끄러지는 물방울처럼 오아삭의 뒤로 돌아가 상체를 낮췄다. 완안발타가 빠르게 뒤돌며 허리를 뒤틀 때의 반동을 이용해 창대를 횡으로 휘둘렀다.
푸욱-
상체를 낮춘 덕에 창대가 애꿎은 허공만 갈랐다. 그 상태에서 은우 역시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발타의 허벅지가 길게 베였다. 채팅 창이 또 한 번 출렁였다.
─진짜 안 단다
─? 그래요?
─3인칭은 상단에 체력바가 고정되어있으니까 확신 가능 아예 안 달음
─머여;;
완안발타가 창을 내려 꽂으려 하니 그는 뱀처럼 유연하게 휘어 발타 근처를 계속 맴돌았다. 검이 발타를 때림과 함께 슬쩍 채팅 창을 확인한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안 답니까?”
그는 그가 볼 수 있는 완안발타의 체력 바도 확인했다. 확실히,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무기 차이라고 하기엔 무려 3타나 먹였다. 초반 보스라면 적어도 조금이나마 달아야 했다.
그래야 잡을 수 있지 않나.
“혹시 잡지 말라고 만든 보스인가…….”
─그런듯
─보통 이런건 잡아도 스토리 진행되게 해주던데
─김샌다ㅡㅡ
─걍 죽어야 진행인가 봄
은우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몸은 또 한 번 완안발타의 공격을 피해 그 겨드랑이를 베어 넘긴다.
“잡지 말란 보스면 지금, 얻어맞아야 합니까?”
─그렇죠,,,?
─죽으려면 맞아야지
“…자존심 상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딴 둔한 놈한테 맞아야 한다니. 시스템 제한 때문이란 건 알지만, 기분 나쁘다.
은우는 혹시 몰라 투지 게이지를 소모해 처음으로─시범 삼아 쓴 건 제외하자─스킬을 사용했다. 귀살이다.
방어를 무너트린다는 것은 패링이 상시 유지된다는 의미와 진배없으니. 검이 극을 튕겨 내며 자세가 무너진 발타의 목을 베었다. 피는 튀었지만, 대미지가 달지는 않았다. 시스템상 못 잡는 게 확실했다.
─자존심vs진행
─아ㅋㅋㅋ1번 못참지
─맞아야 끝나요ㅠ
─가오는 킹정이다 이거야ㅋㅋㅋ
“네, 저도 확신했습니다.”
은우는 또다시 창을 미끄러트리곤 그의 창을 꺼내 완안발타의 발을 찍었다.
“아는데 싫네요.”
창을 뽑고 뒷걸음질 치면 그 자리에 발타의 어깨 밀치기가 작렬한다.
그의 뒷걸음질이 정확히 어깨 밀치기의 판정 거리만 벗어난 후 공격에 들어갔다.
“다 보이는데 어떻게 안 피하고 배깁니까.”
그는 창을 고쳐 잡았다. 눈동자의 옥색은 불쾌함에 퍽 이운 채다. 퇴색된 눈동자는 꼭 질 낮은 비취처럼 탁하고 불투명하다.
창이 발타의 투구를 강타했다.
“이 녀석이 최종 보스일 텐데… 벌써부터 김빠지는 기분이네요.”
─ㅇㅈ...최종보스를 벌써부터 소모하면 어케
─벌써부터 결말 스포당한 기분
─특) 비수가 하면 순살당한다
─들켯냐?
─ㅋㅋㅋㅋㅋㅋㅋㅋ
최종 보스하면 느껴지는 최소한의 위엄이란 게 있다. 조금은 어렵겠지, 이것보단 낫겠지 하는 믿음.
물론 히든 보스가 더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그것조차 ‘히든’이라는 수식 어구가 있다. 결국 뭐가 하나씩 붙은 보스들은 최소한의 기대치를 준다 이거다.
그런데 벌써부터 최종 보스가 이 모양, 이 꼴인 걸 알려 주면 플레이하는 입장에서 기대가 사그라든다. 은우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차라리 여실전화 때처럼 진짜 최종 보스가 따로 있다고 말해 줬으면 좋겠다. ‘그 녀석은 내 대리였지!’라고 외쳐 주는 진짜 보스.
─그래도 최종때 패턴 달라짐
─ㄹㅇ?
─휴,,,,하마터면 환불하러 갈 뻔 햇잖아~
“패턴이라도 달라진다니 다행입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완안발타의 공격을 피하고 창으로 반격을 넣었다. 역시나 소용없었다. 차라리 1씩이라도 달았다면 마음 편히 깎았을 텐데.
그렇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게 정해진 시스템인 걸.
은우의 걸음이 멈추고 창을 바닥에 꽂았다. 그러곤 그의 검으로 그의 살갗을 갈라 보았다. 그의 체력 바가 줄진 않았다.
만약 자해가 가능했다면 이렇게 얻어맞아 줄 필요도 없을 텐데. 은우는 정말 쓸데없는 지점에서 혀를 차며 발타의 자세를 확인했다.
“달라질 패턴만을 믿겠습니다.”
그는 ‘무신: 고려 제일검의 탄생’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적장에게 피격의 기회를 주었다. 체력 바가 금세 내려가며 바닥을 쳤다.
최초의 빈사 판정이 떴다.
─시스템이 일궈낸 업적;;
─시스템‘만’ 일궈내는 업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람들이 웃으면서 우는 사이, 컷신이 알아서 시작됐다. 과연 그냥 맥없이 죽어야 하는 게 맞는 모양이다.
“하, 이거 놀라운데.”
이운은 턱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발타에게 검을 겨눴다.
“나를 상대하면서 이렇게까지 오래 산 놈은 네가 처음이다.”
“좁아 터진 땅덩이에서 사는 놈답게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발언이나 하는구나!”
이운은 대치 상태를 풀지 않았다. 뒤쪽에선 이운이 이끌고 온 결사대와 윤관의 부하들이 결사 항전을 벌이고 있다.
“그렇지. 나는 우물 안 개구리지.”
최대한 빨리 완안발타를 죽여야만 활로를 열 수 있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이운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한데 넌 그런 개구리에게 밀려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구나.”
“같잖은 것이 혀만 살았구나. 하지만 너도 여기까지다.”
발타의 손짓에 정예병들이 둘만의 싸움에 난입하기 시작했다. 아직 정식으로 끼어든 것은 아니나, 잠깐 대치 상태로 변했던 싸움이 다시금 혈투로 변하면 같이 공격할 터였다.
“하하. 인간은 언제나 죽지. 하니 그게 오늘이 된다고 해서 새삼스러울 건 없어. 그러나 오늘, 혼자서 상대할 자신이 없어 부하들을 끌어들이고 만 네 나약함은 영원히 남아 네놈을 따라다닐 거다. 다른 이들이 모른다 해도 너만은 영원히 기억하겠지.”
─이운 입털기 장인;;
─진짜 입 잘 턴다...
이운이 태연하게 완안발타를 도발함에 시청자들은 감탄을 토해 냈다.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비웃는 것도 아니요, 비난하듯 토해 낸 것도 아닌, 정말 여상스러운 얼굴로 말했기에 더욱 인상적인 모양이다.
“너…….”
완안발타가 그에 응답하려 하는 순간.
“돌격하라─!”
멀리서 최홍정과 이관진이 이끄는 지원군이 보이기 시작했다. 완안발타가 깜짝 놀라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녀석들을 죽여! 고려군의 사령관과 저 장수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사령관, 대피하셔야 합니다!】
【젠장! 저 두 녀석만은 반드시 죽여라!】
완안발타가 뒤로 물러나고, 퀘스트가 떠올랐다.
『◈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기 - 10:00
└ 윤관 지켜 내기(100%)
└ [보너스] 아군 지켜 내기(20/10)
└ [보너스] 적을 전부 사살하기(0/50)』
“이건 좀 흥미롭네요.”
완안발타를 지금 죽일 실력이 됨에도 시스템 때문에 죽이지 못하는 건 답답하지만, 새로운 미션은 조금 재밌어 보인다.
은우는 일단 그에게 덤벼드는 졸병의 목을 베며 아군 쪽으로 합류했다.
“저 퍼센트는 윤관의 체력 같고… 보너스 미션은 열 명 이하로 내려가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지키는 건 익숙지 않다. 하물며 약한 자들과 같이 싸우면서 그들을 지키는 것은.
은우의 입술이 삐죽 올라갔다.
그래서 흥미롭다.
“한번 지켜봅시다.”
검이 허공을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