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네가 나를 죽인다고 해서 죽은 친지가 살아 돌아올 것 같아?”
그는 부딪친 적군을 몰살시킨 후, 혹시라도 살아 있는 자가 있을까 확인 사살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 발견한 생존자는 죽은 척 대신 그딴 말이나 지껄였다. 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막 내지르는 게 분명하다.
“너도 살인자야.”
그는 제 또래의 적을 보며 기계적으로 칼만 치켜들었다. 동정? 그런 건 사치다. 지금의 자비가 나중에 그의 목숨 줄을 죌지도 모르기에.
“내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라고.”
살점과 뼛조각이 붙은 칼날을 보곤 소녀는 더욱 악을 썼다. 무가치했다.
“너도! 결국 똑같─!”
고깃덩이 잘리는 소리와 함께 윤기나는 금발이 싹둑 잘려 나갔다. 소녀의 눈자위가 희게 풀리면, 검을 쥔 손에서 비로소 힘이 빠진다.
“나도 알아.”
복수자에서 그저 살인자로, 학살자로 추락한 소년은 소녀의 시체로부터 뒤돌았다. 무수한 핏물이 그의 발자취를 따라 자국을 남겼다.
▣ 152. 가장 먼저 성벽 위로 올라가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길을 틀어막고 있던 여진군을 해치우니 포로가 감사를 표했다. 그러면서 여진군에 점거되었다는 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소문의 장소라며 사이드 퀘스트가 추가되었다.
“최대한 현실감을 살린다더니, 사이드 퀘스트를 이런 식으로도 주네요.”
소문을 들어야만 사이드 퀘스트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닐 거다. 사이드 퀘스트 지점 자체에 다다라도 진행은 가능할 터. 이건 단지 사이드 퀘스트를 좀 더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다만 월드 전역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돌발 이벤트를 이런 식으로 써먹는 건 제법 신선하다. 현실감이 더해지는 건 당연하고.
“지도를 보니 마침 가는 길에 있네요. 깼으면 하십니까, 무시하고 갔으면 하십니까.”
─무조곤 ㄱㄱㄱㄱ
─가는 길에 있는 퀘는 못 참지
오픈 월드의 장점이라면 스토리에 얽매이지 않고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고. 오픈 월드의 단점은 스토리를 진행하려다가도 중간중간 샛길로 계속 빠진다는 점이라.
그들은 목적지 안내 표시를 사이드 퀘스트로 변경했다. 표기된 거리가 가까워졌다.
쾅!
그때, 요란한 번개 소리와 함께 갑작스레 빗줄기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날씨가 갑자기 바뀌는 건 조금 비현실적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날씨 자체는 잘 구현했다. 굵은 빗줄기 자체도 그렇지만, 그것이 몸을 적실 때의 감각, 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시각적 효과가 그럴싸하다고나 할까.
은우는 물에 젖어 축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ㅗㅜㅑ;; 올백
─남자는 올백이 진리지,,,
─마피아보스 비주얼 아니냐?
“별걸 다 좋아하십니다.”
다행히 사찰은 가까웠다. 어둑어둑한 산길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불꽃들은 여진의 것이다.
『──◈ 선향사 역참 ◈──
여진군 영역』
“후반 지역이라 그런가, 적 수가 많네요.”
길목을 틀어막은 여진군만 해도 수십에 절을 털고 있는 병사도 꽤 됐다.
그는 그것을 가만히 살펴보다가 퀘스트를 다시 확인했다. 부가 목표에 인질의 목숨이 표기되는 걸 보니 발각되면 인질이 살해될 것 같다.
“인질이 있으니 절부터 구한 후, 길목을 뚫겠습니다.”
마침 절은 언덕이라고 하기엔 조금 낮은, 그러나 가파른 고지대에 지어진 참이었다. 하나였던 길은 절벽 옆쪽에 경사진 곳에 맞춰 두 갈래로 갈라졌다.
여진군이 점거하고 있는 곳은 고지대 위의 절과 그 아래 갈림길에 있는 역이었다.
은우는 쉽게 경로를 설정한 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진군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돌아간 후 절벽에 못을 박아 이동하면 은밀 행동이야 쉽다.
비가 온다고 해서 등산에 페널티가 있는 건 아니기에, 두려움만 이겨 내면 강행할 수 있다.
깊은 홈을 남기며 한 사람이 절벽을 타기 시작했다. 말은 아래에 가만히 남아 주인을 기다렸다.
─와;; 이거 좀 무섭다
─등반on!
─게임에서 맨손클라이밍 하는 애들 너무 신기함;;
─게임이니까 하는 거지ㅋㅋㅋ
─난 무서워서 못하겠던데ㅠ
─그치만 켄이라면?!
─현실에서 발가락으로라도 할듯
“저라도 발가락으론 못 합니다만…….”
절벽 오르기처럼 반복 행위를 할 땐 유독 채팅 창을 보게 되니. 은우는 시청자들의 반응을 살펴보다가 일부러 지반이 약한 곳에 못을 박았다.
몸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암벽이 살짝 무너지며 못을 뱉었다. 암벽에 얕게 코팅된 물은 그 미끄러짐을 실제 감각보다 더 길게 느끼도록 만든다.
─으다ㅏ다ㅡ
─아ㅓ어ㅡㅡㅏ다ㅏㅏㅏ
─뭐임 뭐임
─ㅁㅇ?? 실수함??
─뭔데 왜 갑자기 미끄러지는건데
─어호ㅓ두허더어허어ㅠㅠㅠ
─지금 울부짖는 놈들 다 일인칭ㅋㅋ
─삼인칭 의문의 1승
은우는 삐뚜름하게 웃으며 한 손으로 버텼다. 무너질 걸 알고 못을 박았던 것이라 그대로 추락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젠 안 무서울 겁니다.”
─???
─??
─롸?
─뭐라구요?
“미끄러져도 안 떨어진다는 걸 증명했잖습니까.”
─아놔ㅋㅋㅋㅋㅋ
─우리가,,,무서워하는게 좋아,,,?
─동생아 형 놀리면 안 된다;;
─저 심장 멈출 뻔했다구요ㅠㅠ
그가 뭘 했다고. 은우는 천연덕스럽게 다음 손을 뻗었다. 별로 높지 않던 절벽이라 금세 그에게 정복당했다.
처마에 맺힌 빗방울들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영롱하다.
은우는 살금살금 걸어 인질을 감시 중이던 여진군들을 하나하나 처치해 나갔다.
절들이 으레 그렇듯 가옥들이 띄엄띄엄 지어진지라, 그 사이사이를 돌고 있던 자들을 하나하나 죽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발각을 염려해 시체를 옮기는 것 또한 벼랑 아래로 떨어트리면 그만이었다.
“저건 지휘관입니까?”
그러다 말고 유난히 옷이 화려한 자를 발견했다. 절 한가운데에서 훈련을 하고 있던 자였다.
『지휘관 관찰하기 ◎』
버튼과 함께 알림 창이 떠올랐다. 은우는 원을 꾹 눌렀다. 테두리 부분이 천천히 차올랐다. 대략 7초였다.
『지휘관을 관찰했습니다.
새 스킬 개방까지 남은 지휘관 관찰 및 처치 수: 2』
은우는 목덜미를 쓸었다.
“스킬 포인트로만 찍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해금도 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오,,,,
─이건 또 새로운데
여기서 드는 호기심은 대상 하나를 두고 관찰이나 처치가 각각 한 번씩 적용되는지, 혹은 둘 중 하나만 적용이 되는지다. 스킬 개방에 욕심이 없더라도 드는 궁금증이었다.
“한 번에 죽을지 모르겠습니다.”
지휘관 하나와 저 아래에 있는 여진군 빼고는 전부 처치했다. 다만 건물 안에 적이 더 있을 경우, 소란이 일었을 때 인질을 죽이고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렇게 노력한 게 낭패로 돌아간다. 조심해야 하는 대목이었다.
“빠르게 처치하겠습니다.”
하지만 처치하지 않아도 문제가 된다. 은우는 그냥 죽이고 움직이길 택했다.
“합! 합!”
기합 소리 사이로 슬그머니 얇은 발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졌을 때, 은우는 결벽적으로 갑옷과 투구 사이에 검을 찔러 넣었다.
어디를 타격하든 대미지는 똑같이 들어가지만, 어쩔 수 없는 버릇이었다.
마커가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차기 직전, 은우는 연격을 넣었다. 빠져나온 검이 등허리를 베고 목을 또 한 번 베고, 심장을 찔렀다.
그 결과는 발각되기 전 지휘관이 사망하는 것이다. 발각 마커가 꽉 차면 소리를 지르며 적의 존재를 알려야 하는데, 연격이 너무 빨라 피통이 먼저 닳아 버린 덕이다.
『지휘관을 처치했습니다.
새 스킬 개방까지 남은 지휘관 관찰 및 처치 수: 1』
“한 개체를 대상으로 중복이 되네요.”
─개이득?
─관찰만 잘하면 개꿀이네;;
─스킬 금방금방 개방하겠다
─시스템 왤케 혜자임
“계속해서 살살 움직이겠습니다.”
은우는 온몸을 적시는 빗물 속에서 칼을 털었다. 비와 섞여 분홍빛이 된 피들이 풀숲 사이로 숨었다.
직후 하는 일은 마루 위를 살금살금 걸으며 건물 안을 확인하는 것이라. 소리를 듣고 적의 유무를 살피는 행위였다.
“총 넷이네요.”
총원을 알아낸 후 은우는 그중 하나 있던 건물 앞에 섰다. 그의 눈동자가 느긋하게 백지장 뒤 상황을 그려 보다가 한순간 호흡을 멈췄다.
얇은 문이 무너지며 은우의 몸이 안으로 돌격했다.
【무─】
적의 머리 위에 마커가 빠르게 떠오르며 게이지를 다급히 채웠다. 그러나 그것보다 은우의 행동이 더 빨랐다.
섬광처럼 휘둘러진 검이 적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갑작스러운 괴한의 침입에 놀란 건지, 피를 봐서 놀란 건지 인질들이 비명을 질렀다. 가장 확률이 높은 가설은 처음부터 그렇게 설정되었단 쪽이다.
─아놔
─미쳤누;;
시청자들이 인질들의 트롤링에 반발할 때, 은우는 역으로 벽에 달라붙었다. 소리를 듣고 경계 상태에 돌입한 적들이 건물에서 하나둘 나온 덕이다.
다행히 아래에 있는 적들은 그 소리를 못 들었다.
“셋인가.”
은우는 그가 뚫고 들어온 문 바로 옆에 달라붙었다.
【어이, 누가 도망치려 했냐?】
급하게 한 놈이 들어오고, 뒤이어 한 놈이 천천히 들어왔다. 둘 다 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한가운데 피 칠갑 된 동료가 시선을 끌어서일 것이다.
발소리로 보아 한 놈은 바깥, 그것도 조금 거리가 되는 지점에서 대기하고 있다.
【뭐야, 왜 쓰러져 있어!】
처음 입장했던 녀석이 경계도를 올리는 사이, 은우는 뒷놈의 옷깃을 잡았다. 뒷놈이 깜짝 놀라 입을 벌리려 했지만, 그의 손이 입을 틀어막는 게 더 빨랐다.
사각, 소리와 함께 핏줄기가 튀었다. 검을 막 뽑아 들며 인질을 위협하려던 첫 입장 여진군이 고개를 돌린 것도 그때였다. 노란색이던 경계 마커가 빨간색으로 변하려 했다.
“쉿.”
은우의 검이 그의 머리에 꽂혔다. 그의 말귀를 알아들은 건지─절대 그럴 AI는 없겠지만─인질들이 숨을 죽였다. 아마 제작진 쪽에서 상황에 따라 반응을 달리하도록 설계한 게 분명하다.
【어이! 뭐 해!】
바깥에 남았던 한 명이 재촉했다. 은우는 피를 몸에 묻힌 채로 아까처럼 문 옆에 기댔다. 지능이 부족한 적 NPC가 곧 고개를 돌렸다.
옥색 눈동자가 서슬 퍼런 빛을 머금은 것도 그때였다.
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걸어간 그의 몸이 적 NPC 뒤에 섰다.
“여러분은…….”
적 NPC가 은우의 목소리에 반응하기도 전에 어김없이 입이 틀어막혔다.
그 상태에서 목을 베면 피가 팍 튀었다.
“이런 순간에 절대 등을 보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 * *
“감사합니다!”
부러진 팔을 붕대로 꽁꽁 둘러매다 말고 감사 인사를 들었다. ─는 눈을 껌뻑이며 드레싱Dressing을 마저 했다.
“감사 인사 받을 일은 없던 것 같은데.”
“오늘 새벽에 저희 마을 사람들을 구해 주셨다 들었습니다.”
“아.”
그는 붕대를 꽉 묶었다. 새벽 끄트머리,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다 말고 얻은 골절 부상이다.
후유증 없는 성직 치료는 값이 너무 비싸고, 좀 싸다 싶은 성직자의 치료는 후유증들이 붙어 있어 금만 적당히 붙였다. 기로 자극까지 해 주면 대충 이틀 내에 나을 거다.
“당신은 거기에 없었는데.”
“일 때문에 이곳에 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마을이 고립됐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어찌나 놀랐는지. 덕분에 가족들을 다시 보게 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가족, 가족인가.
“가족이 살아 있어서 좋아?”
“남편과 아이가 죽었다면 저도 따라 죽었을 겁니다.”
─는 상대의 대답에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공감해 주기엔 가족의 무게를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에게 가족이란 존재는 그가 검을 잡게 만든 계기였고, 그를 두고 죽은 사람들이었다. 한때는 복수의 변명거리가 되기도 했고, 헌터들 사이의 동질감을 이끌어 내는 공통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그저 한 단어였다.
가족이란 단어에서 의미를 찾기엔 그들의 목소리도 얼굴도,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다못해 구성원조차도.
그러니 그저 단어다. 더는 감흥이 일지 않는다.
감흥이 일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니까 감사하지 마.”
별로 감사받을 짓도 아니었다. ─는 그를 보는 이의 얼굴을 외면했다. 결국 상대가 감사 전하기를 그만두었다. 대신 꺼내 든 건 다른 화제였다.
“저흰 북으로 갈 겁니다. 그곳엔 당신처럼 든든한 헌터님들이 많이 계신다 하니까요.”
그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헌터들을 믿어?”
“예. 영웅이잖습니까.”
“영웅은 개뿔. 힘을 주체 못 해서 날뛰는 개새끼들이지.”
“그런가요. 그렇지만 적어도 당신만큼은 저희 가족에게 영웅으로 기억될 겁니다.”
─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영웅이 아니다. 여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뭐, 은인의 생각이 맞으시더라도… 적어도 귀족들은 기를 못 편다 하니 분명 여기보단 살기 낫지 않겠습니까?”
“대신 괴수가 범람하는 곳이야.”
“압니다. 그렇지만 저도, 남편도 숙고 끝에 결정한 겁니다.”
그녀는 숨을 잠깐 들이쉰 후, 또렷한 목소리로 고했다.
“인간에게 능욕당하고 포로가 되느니 괴수에게 먹히는 것이 좀 더 깔끔한 죽음이지 않겠습니까?”
─는 제국군에게 겁간당했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전쟁에서 가장 고된 것은 무력한 아이들임을 증명하듯 다들 가련히 떨고 있었더랬지.
저 여자의 아이는 그것에서 비껴 나갔을까, 포함되었을까.
“이게 가족을 위한 최고의 선택이길 그저 바랄 뿐입니다.”
문득 충동이 일었다.
“나도, 그곳으로 갈까.”
영웅이 아닌 한낱 살인자라도, 사람을 죽이고 원한을 쌓는 일에는 이제 질렸다.
* * *
─스킬을 안 찍고 이걸;;
─아 이 방송에 뉴비가 있었누
─후후 켄은 스킬 같은 거 안 찍는다 이거야
─뉴비 핥-짝
─구울단 뉴비 먹으려 드는 것봐라;;
─구울이 아니라 좀비임
─어서 전염시켜버려!
시청자들이 갑작스레 떠드는 사이, 은우는 말을 탄 상태에서 표면이 하얗게 반질거리는 채집 아이템을 채취했다. 중간에 마주친 상인에게 해당 채집품의 쓰임새를 들었던 덕이다.
“무기 강화와 룩이 별개란 건 제법 괜찮은 시스템 같습니다.”
어떤 형태의 검을 착용하든 대미지는 동일했다. 대미지를 올리는 방법은 검술 스킬의 개방이나 검 업그레이드뿐으로, 후자의 경우 모든 검에 적용됐다. 새로 얻을 때마다 강화의 늪에 빠질 필요가 없단 소리다.
별개로 다양한 검을 얻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상인에게 채집품을 지불하고 구입하거나, 돌아다니면서 숨겨진 검을 얻거나.
물론 옷은 달랐다. 가면이나 투구는 마찬가지로 룩용이었으나, 옷에만큼은 각기 다른 능력치가 붙었다. 강화도 별개로 취급됐다.
다행인 건 은우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다.
“함주가 보이네요.”
─크 성 멋잇다
─하 국뽕 지리게 차네;;
─맨날 외국 성들만 보다가 한국 성 보니까 찌릿찌릿하다
─주모오!!
한참을 달린 끝에 드디어 함주에 도착했다. 게임에 맞춰 살짝 축소된 성은 그럼에도 웅장한 느낌이 있다.
“들어가시오.”
은우는 열려 있는 성문 안으로 말을 타고 입장했다. 현실이었다면 이렇게 아무런 검문 없이 들어갈 순 없을 것이나, 게임이란 점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오, 왔군!”
퀘스트 마크를 따라 주요 NPC인 윤관을 찾아내니 컷신에 돌입했다. 화려한 장군복 차림의 노인이 파안대소하며 이운을 반겼다.
직위가 없는 평민이 어딜 감히 말을 거느냐 화냈던 장군은 꿀 먹은 곰처럼 뒤로 물러났다.
참고로 주인공의 모티브인 척준경과 달리, 이운은 방랑 무사 설정이다. 역사대로 고려군 소속 무관으로 만들면 돌아다니기 어려울 걸 감안한 게 분명하다.
“반신반의하며 서간했건만, 정말 와 줄 줄이야. 오랜만일세.”
“대원수께서 곤경에 처한 저를 구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응당 올 일이었습니다.”
“요즘 은혜를 신경 쓰는 자가 얼마나 되겠나? 하물며 그것은 자네의 죄도 아니었거늘…….”
윤관은 본인의 긴 수염을 쓰다듬더니 약간의 한숨과 함께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간 있던 일들을 나누고 싶네만, 시간이 없군. 막 도착한 사람에게 부탁하기 미안한 일이지만, 내 부탁 좀 함세. 나 좀 도와주게나.”
윤관이 손을 꼭 붙잡고 이야기했다. 조금 떨어진 지점에 있는 석성의 여진족을 무찔러 달라는 이야기였다.
“추장들을 격파했으나, 그것도 잠시뿐이네. 시일이 지체될 경우 고약한 완안부 여진족들이 태세를 정비하여 입구入寇할 걸세.”
그는 이관진 장군의 지원 아래 석성을 함락시켜 달라 부탁했다. 메인 퀘스트가 갱신되었다. 퀘스트 이름은 ‘석성 전투’였다.
─한 사람한테 성 함락을 시키네;;
─근데 실제 역사에서 척준경이 그걸 해냈음
─켄도 혼자 해낼 듯
─겜 모티브가 된 사람도, 그 겜을 하는 사람도 혼자서 공성 해낸다는게 함정;;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단하네요, 혼자 성을 함락하다니.”
은우는 사람들이 떠드는 걸 보며 감탄했다. 혼자 공성이라. 그도 할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방식으로 암살을 택했을 때 한정이고. 그것마저도 기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순수 신체 능력만으로는 글쎄.
물론 이 세계의 경우 그가 기를 쓸 수 없는 만큼 상대도 마법을 부리거나 신앙을 통한 사술을 못 쓰긴 할 테다. 그걸 고려하면 완전히 불가능하지만도 않겠지만…….
─엄밀히 따지면 혼자서 한 건 아님ㅋㅋㅋ
─공성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성벽 위로 올라가 적장 목 딴 거였나?
─역사잘알들 뭐 이리 많음
─위키
─위키는 킹정이지
“그런 겁니까?”
가장 먼저 올라가 목을 따는 정도라면 그도 해낼 자신 있다. 아니, 자신 있다뿐인가? 경험도 있다.
은우는 고개를 주억였다.
“쉽네요.”
─인정하지 말라고ㅋㅋㅋ
─펜리르 잡기 vs 1인 공성
─아;; 이건 좀 어렵다
─존나센 하나냐 다구리냐...
─그치만 켄은 둘다 쌉가능이지!
─스포 불-편
그렇지만 쉽지 않은가? 혼자서 성을 몰살하는 건 어려워도, 성벽을 타고 올라 앞에 있는 적장의 목을 따는 것 정도야.
은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윤관의 앞을 벗어났다.
“사이드 퀘만 받아 두고 출발하겠습니다.”
목표는 석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