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적막은 오랫동안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형한텐 말했냐?”
“…아니.”
“안 믿어 줄 것 같아서?”
“그것도 있고…….”
은우는 천 쪼가리 위에 얹어 둔 손등을 내렸다. 천도 같이 흘러내리며 그의 시야를 틔어 주었다.
“형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어서.”
그는 손을 들어 올렸다. 천장에 달린 전등이 눈을 부시게 만들다가도, 손에 반쯤 가려졌다. 그 대가로 손은 그늘지고 테두리만 주홍색으로 빛났다. 그건 꼭 피가 묻은 것 같다.
“…전생이라고 해도 수천 명을 죽인 손을, 어떤 순간에도 살인은 안 된다 말하는 사람이 받아 줄까.”
“아놔.”
희수가 빡친 듯 테이블을 탕 쳤다.
“듣자 하니 안 죽이면 내가 뒈지는 세계관 같은데, 그걸 가지고 뭐라 한다고?”
“아직 뭐라 하진 않았어. 그냥 내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아니, 시발. 그럴 거라고 의심 드는 것 자체가 문제잖아.”
그녀는 골 때린다는 듯 은우가 여럿 사 둔 음료들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내가 도덕 개념 말아먹어서 그런진 몰라도 난 신경 안 써. 막 재난 상황에 나 살자고 사람 버리는 거면 좀 꺼려질 수 있겠는데, 네가 살던 곳은 전쟁터잖아.”
음료를 전부 들이켠 후 쾅, 내려놓는 손은 작지만 굳건했다.
“전쟁 통에 태어나서 살기 위해 사람 죽인 게 그렇게까지 도덕적 흠이 될 일인가? 난 모르겠는데. 아니면 뭐, 민간인 건드렸냐?”
“…제국민은.”
“그리고 제국은 적대 국가지.”
희수는 얼굴을 쓸었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좀 아니긴 하다. 적대 국가건 뭐건 민간인은 민간인이니까. 근데 거기랑 이 세계랑 같냐? 보아하니까 이 시대처럼 법이나 인권이 발달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인권이란 개념 자체가 거의 없긴 했지.”
백성을 마음대로 죽이면 당연히 처벌받았다. 그렇지만 그건 인간의 개념이라기보다 왕이나 귀족의 재산을 침범해서 처벌한 쪽에 더 가깝다.
사람이 수시로 죽어 나가는 북쪽에서 인간 하나는 굉장히 귀한 자원이었으니까.
“그래, 인권 개똥망인 시대. 그런 시대에서 그렇게 자라나고 그렇게 산 걸 비난할 자격이 과연 현대인에게 있을까?”
“…글쎄.”
“과거 신분제도, 그로 인한 차별도 다 옳지 않아. 물론 옳지 않으니까 바꾼 거긴 한데,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이건 그르다!’라고 외치면 먹히겠냐고. 그 사람들에겐 그게 당연할 텐데.”
또박또박, 발음이 뚜렷한 목소리가 노래하듯 말을 이어 나갔다.
“죄도 상황을 봐 가면서 판결해야 하는 법이야.”
그건 제법 달콤한 울림을 가지고 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네 살인이 옳았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단지 참작받을 구석이 있다는 거지. 세상이 다르면 적용되는 룰도 달라야 하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죽상 피우지 말아라.”
은우는 희수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나올 건 예상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신기했다. 바로 믿어 주는 것도 그렇고 그의 과거를 받아 주는 것도 그렇고.
희수가 그럴 사람임을 아는 것과 실제로 목격하는 건 역시 감상이 다르다.
“신기하기도 하고, 너답기도 하고.”
“뭐가.”
“바로 믿어 주는 거.”
“…아직도 완전히 믿기진 않아.”
희수는 다리를 꼰 채 중얼거리듯 말을 덧붙였다.
“그렇지만 학원 한 번 안 다닌 놈이 그렇게 잘 싸우는 것도 그렇고… 네가 거짓말할 놈은 아니니까. 저런 설정을 다 짜낼 정도로 창의력 넘치는 놈도 아니고.”
“뒷말이 뼈아픈데.”
“그래서 없는 말이냐?”
“아니.”
그녀는 픽 웃곤 테이블에 턱을 기댔다.
“너는 내가 믿어 줄 거라고 왜 생각했는데? 진위 여부를 떠나서 까딱하다간 미친놈 취급 받을 이야기잖아.”
그 질문은 이 방에 들어와서 받은 질문 중 가장 대답하기 쉬운 것이었다. 은우는 소파에 기댄 채 곧바로 입술을 떼었다.
“믿든 안 믿든, 너는 내 편 들어 줄 것 같아서.”
숨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천장의 하얗고 노란 전등 빛이 눈을 아리도록 찔렀다.
“별개로, 무서울 순 있겠지만…….”
“…뭐가, 네가?”
“상황이고 뭐고 간에 일단 대량 학살범이니까.”
희수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시선을 돌렸다.
“안 무서워, 새끼야. 물론 말로만 들은 거랑 직접 보는 건 다르니까, 나라도 네가 사람을 죽이는 걸 코앞에서 보면 무서워질 수도 있겠다만.”
그리고 다시 눈을 마주쳤다.
“근데 네가 나한테 해를 끼치겠냐, 뭘 하겠냐? 네가 네 무력으로 사람을 다치게 한 적이 있긴 해? 물론 고등학교 때를 거론할 수는 있겠지. 그렇지만 그건 그 새끼들이 먼저 건드린 거잖아. 우리나라 법도 정당방위라고 판결을 내놨고.”
그 까만 눈동자는 오래전 그날, 그가 구원받던 순간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결국 그 모든 게 상황이 뒷받침되면 네가 사람 죽일 성정이 아니란 걸 설명하고 있잖아. 그런데도 내가 무서워해야 할 필요가 있겠어?”
“…그런가.”
은우의 말에 희수는 콧김을 길게 내뿜었다.
“그리고 야, 형한테도 말해. 어차피 평생 거짓말할 거 아니잖아.”
“…그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해.”
“아, 징글징글한 새끼.”
그녀는 혀를 차더니 ‘네 맘대로 해라.’라며 의자 등 받침에 몸을 기댔다. 그에게 천 얹어 주느라 바꾼 자리는 아직 유지되고 있다.
“도박을 하든 말든 그건 네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지. 솔직히 뭐라 하기 어려운 문제도 맞고.”
다만 희수는 몸을 반대쪽으로 튼 채 음료를 다시금 들었다.
“대신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네 형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은우는 그런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든 유리잔에 희수의 얼굴이 슬쩍 비쳤다.
“네 말대로 나는 언제나 네 편일 거니까.”
여상스러운 얼굴로 말하는 말이 어찌나 든든한지.
“응.”
결국 웃고 말았다.
▣ 151. 일단 기마전부터
“좋은 저녁입니다. 다들 저녁은 드셨습니까.”
오랜 친구에게 토로한 과거는 꽤나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어 주었다.
형에게 말할 용기가 생겼단 건 아니었다. 다만 ‘그럴 생각이 들었을 때’라는 가정을 해 볼 여유가 생겼을 뿐이다.
─켄ㅎㅇ
─착-석
─안녕하세요!
─구울왕이시여 신민 왓습니다^^7
가정이고 뭐고 방송부터 챙겨야 하긴 하지만.
─오늘도 왔다.
─ㅎㅇㅎㅇ
─알림 울리자마자 왔는데 9백;;
방송을 켜자마자 시청자들이 우글우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별사탕에 개미가 꼬이는 것 같다.
“저도 먹었습니다. 아실 분들은 아시겠지만.”
은우는 그들이 그를 뜯어 먹게 내버려 두었다. 대신 대기실 콘크리트 의자에 느긋하게 기댔다.
협찬받은 헬멧과 옷이 기기묘묘한 정경과 어울리며 언제나처럼 비현실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그렇지만 평소보다 유독 여유란 게 묻어나는 건 한 사람에게나마 그의 모든 것을 인정받은 이후라서일 것이다. 설사 고비가 아직 남아 있다 해도.
“오늘 할 게임은 ‘무신: 고려 제일검의 탄생’입니다. 가상의 고려를 배경으로 이운이란 무사가 되어 여진족의 침략을 막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실제 역사에서 모티브를 가져오긴 했지만, 가상 고려인 만큼 역사와 완전히 똑같진 않답니다. 참고 바랍니다.”
시청자들과 가볍게 잡담을 나눈 그는 본격적으로 게임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상점의 게임 설명을 읽으며 구매하고 다운받는 게 그것이다.
─이거 척준경 모델로 만든 겜이잔어~
─소드마스터 척
“해 보신 분들이 꽤 많으신가 보네요.”
─꽤 재밋어요ㅋㅋ
─할 만함
─켄님이 하기엔 보스전이 그닥...?
─보스전 외 요소가 할만하지 않나
“재밌다니 다행입니다.”
다운로드가 완료되자 세계가 바뀌기 시작했다.
벌레가 종이를 갉아먹듯 덧씌워진 이미지가 사라지고 그 아래에 새로운 그림이 덧칠되는 것이다.
해당 게임은 실제 역사와 다르며 기타 단체와 관련이 없다는 메시지가 벚꽃 흩날리듯 잠시 스치고, 진정한 광경이 펼쳐졌다.
전장이었다. 철갑 기병들이 고려군을 유린하고 있는 전장.
〚때는 고려, 숙종 9년. 완안부 여진족이 전쟁의 불씨를 이끌고 왔으니. 막강한 여진의 군세에 고려군은 전면 패주의 위기에 내몰린다.〛
위급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사령관 앞까지 달려 나갔다. 하급 관리나 말단 병사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고려군의 갑옷조차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았다. 고려인이 아니라기보다는 고려군이 아닌 쪽에 가깝다.
〚그러나 모름지기 영웅은 난세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라.〛
진중한 내레이션이 이어졌다. 사령관 앞으로 달려 나간 사내가 호쾌하게 웃었다. 전형적인 한국인의, 그것도 잘생긴 한국인의 외형이었다.
“내게 말 한 필과 무기를 주시오. 그럼 내 저들을 내쫓아 드리리다.”
“네놈은 또 뭐냐!”
“한시가 급한 것 아니셨소? 자, 시간이 별로 없다오. 어찌하시겠소.”
말하는 목소리, 눈동자, 서 있는 품새. 모든 것에서 오만함이라 부르기엔 너무도 정결한 것이 흘러나왔다. 그건 주변을 향해 가시를 세우지 않았으나, 존재 자체만으로 침을 삼키게 만드는 무게가 있었다.
“고작 말 한 필과 무기요. 당신의 목숨과 비교했을 때 도박 한 번 못 해 볼 만큼 그것들이 무겁소?”
“…정말 가능한가?”
무시하기엔 그 분위기가 너무도 상서로웠다. 긴가민가한 태도로 사령관이 물었다. 그러자 사내가 싱긋 웃었다.
“가능성을 재지 말고 당신의 간절함에 기도나 드리시오.”
〚방랑 무사, 이운. 적장 3명을 죽이고 여진족 추격대를 뿌리쳐 고려군을 구하다.〛
인트로 영상이 끝났다.
“시간을 건너뛰고 시작하네요.”
시작은 절이었다.
사찰의 마루에 앉아 있는 것부터 펼쳐진 시점은 꼭 고려 시대로 타임 슬립 한 기분을 가져다준다. 역사에 관해 잘 모르다 보니 고증이 잘됐는지 안 됐는지는 모르겠다.
은우는 주변을 흥미롭게 관찰하며 캐릭터의 신체 능력을 체크했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신기함은 덤이었다.
“이건 또 새로운데. 아무래도 컷신에서만 주인공 외형이 적용되나 봅니다.”
지금 은우가 조종하는 캐릭터는 옷만 바뀌었을 뿐, 그가 본래 설정한 값과 같았다. 인트로 영상에서 ‘이운’으로 추정되던 캐릭터의 외모값이 아니다.
은우는 익숙지 않은 한복을 매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키에 맞게 쭉 늘어난 옷은 일반인보단 무관들이 입을 법한 디자인에 가깝다. 검고 팔락거린다.
─외국인이 한복을 입고 있누;;
─ㅋㅋㅋㅋ
─귀화한 서역인이다 이거야~
─하멜표류기?
─그건 조선이잖아ㅋㅋㅋ
짙게 그을린 피부에 밀빛 머리카락이 설정값이니 어쩔 수 없다.
“머리에 쓸 것이 나올 때까지만 버텨 봅시다.”
─광-기
─헬멧집착 어디 안 가죠?
─그놈의 헬멧 좀 벗으라고ㅋㅋㅋ
─여긴 근데 헬멧 없잖아
─ㅋㅋㅋㅋ갓쓰고 다니나 이제
특별히 튜토리얼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은우는 퀘스트를 확인했다.
『◈ 짐 보따리 속 편지 확인하기』
상단에 떠올라 있는 퀘스트 바가 그의 할 일을 알려 주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짐이라고 할 만한 건 그가 앉아 있던 마루 위 보따리밖에 없었다. 더불어 검과 함께 수패, 활과 화살집도 존재했다.
“방패가 신기하게 생겼습니다.”
앞면에는 가시를 꽂은 후 깃털로 장식한, 형태가 보통 생각하는 방패의 형상은 아니었다. 공격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나무 재질 덕에 내구성이 썩 좋아 보이진 않는다.
은우는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일단 퀘스트부터 따랐다. 짐을 건드리자 가방 창이 떠올랐다. 특별히 펼치거나 할 것 없이 이걸로 꺼내고 넣는 모양이다.
가방 안에는 회복용으로 추측되는 소모품 몇 개와 편지지라는 아이템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눌렀다. 그러자 창이 닫히며 허공에 흰빛이 모여들었다. 그것은 점차 커지고 납작해지더니 이윽고 편지지로 변했다.
“나쁘지 않네요.”
─올 이펙트 제법?
─저정돈 흔하지ㅋㅋㅋ
은우는 편지지를 펼쳤다. 궁서체로 적힌 글자는 다행히 한자가 아니라 한글이었다. 이것까지 고증을 따라가진 않는 모양이다. 하기야 한자로 적어 넣어 봤자 따로 번역 창을 띄워야 할 테니 번거롭기도 번거로울 거다.
“여진족이 나타났다며 이운, 그러니까 제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네요.”
과거 누명을 쓰고 공을 빼앗길 뻔했던 것을 구해 주었으니, 괜찮다면 그 은혜를 갚아 달란 이야기가 적혀 있다. 어투가 정중해서 불쾌감이 들진 않았다.
─이거 그거네 척준경이 1차 여진전에서 망할 뻔한 판을 살려놨더니 옥에 갇혔던 거
─?? 왜 옥에 갇힘?
─이유는 아직 안 밝혀졌음
─다만 거기서 2차 여진전 총사령관(예정)이 풀어줬음
─ㅇㅎ
─여기 비수들 능지 왜 이럼;;
─이게 바로 구울단이다 (어깨 들썩)
박학다식한 시청자들이 바로 모티브 이야기를 찾아냈다. 역사를 모르는 은우나 한국 역사를 알 이유가 (대체로) 없는 외국인이 그 채팅들로 하여금 정보를 알아 갔다.
『◈ 짐 챙기기
◈ 말 오르기』
그사이 퀘스트가 갱신됐다. 은우는 짐을 어떻게 챙기는 것인지 잠깐 생각했다. 역시 착용밖에 없다.
그는 가장 먼저 화살집과 활을 매고, 방패를 들었다. 집어넣는다는 생각을 하니 자동 보정이 이뤄지며 등에 적당히 장착시켜 주었다. 정식으로 쓰겠다 생각하면 팔에 끼워졌다. 마치 거북이 등껍질을 쓴 모양새가 됐다.
검은 허리에 ‘띳돈 매기’ 방식으로 찼다. 색다른 패용 방식에 외국인들이 눈을 빛냈다. 은우도 이런 방식의 검 착용은 처음이었다.
“이런 방식은 처음인데…….”
은우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잠깐 보정의 방식을 살펴보았다. 왼손이 칼집을 집더니 손목에 스냅을 줘 손잡이가 겨드랑이 사이를 거쳐 가게 만들었다. 그러곤 오른손이 빠르게 뽑아냈다.
생각보다 더 편리하다.
“괜찮네요.”
뽑아 든 검은 검신이 곡선이 거의 없도록 곧았다. 다만 끝부분이 살짝 올라와 있었다. 그 또한 검의 독특함이었다.
사람들이 간지 난다며 박수를 보냈다.
그는 검을 집어넣고 마지막으로 보따리를 어깨에 멨다. ‘짐 챙기기’라는 퀘스트에 줄이 그어졌다.
은우는 ‘말 오르기’란 다음 퀘스트를 위해 주변을 살폈다.
“말은 마구간에 있겠죠.”
과연 근처에는 마구간도 있었다.
“원래도 사찰이 마구간을 겸했습니까?”
─고려땐 절이 역 역할이었으니까 모
─맞는 듯?
「‘역사충’ 님이 ‘1,000원’ 투척!
역은 숙박시설 겸 지친 말을 바꿔 탈 수 있는 장소를 말한다 고려시대때는 사찰이 역의 역할을 맡았다」
─위키 꺼라
─역이 뭔가 했네
마구간을 겸한 게 아니라 역을 겸한 거구나. 은우는 새로운 지식을 획득했다. 절은 수학여행 때 가 보고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던지라 퍽 신기한 이야기였다.
“신기하네요.”
애초에 역도 기차역이나 그런 것만 생각했는데. 은우는 그의 상식에 애도를 표하며 말을 한 마리 받았다. 퀘스트가 사라졌다.
“혹시 함주 성으로 가십니까?”
말을 돌보던 아이가 말을 내주며 슬쩍 말을 걸었다.
“만약 함주 성으로 가는 것이라면 조심하십시오, 나리. 여진군이 그곳에서 발호하고 있다 합니다.”
아이를 무시하고 말을 출발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대신 알림 창이 떠올랐다.
『▶ 걱정 마라, 얘야.
▷ 여진군이라니?』
질문은 두 개이되 마크가 달랐다. 다만 눈치로 보건대 색이 진한 마크는 대화를 종료하는 선택지이고, 색이 옅은 마크는 정보를 얻는 선택지 같다.
“여진군이라니.”
초반이니만큼 은우는 후자를 골랐다. 아이가 곧바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진군이 함주 근방을 돌아다니면서 이 마을, 저 마을 약탈하고 다닌대요. 저 높으신 곳의 어르신도 그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데……. 설마 이곳까지 들이밀고 오진 않겠지요?”
선택지가 하나만 남았다. 은우는 그것을 따라 읽었다. 살짝 변한 문장은 아까보다 좀 더 길어져 있다.
“녀석들이 이곳까지 오는 일은 없을 거다.”
“정말요?”
동그랗게 눈을 뜨는 모양새가 퍽 귀여웠기에 은우는 손을 달싹거렸다. 요즘 애들만 보면 그의 품에서 까르륵 웃던 희윤이가 생각나 괜스레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진다. 대부분은 그가 무서워서 도망가긴 하지만.
─크, 간지
─일은 켄이 하는데 생색은 왜 구울들이 내냐고ㅋㅋ
─마! 왕이 하는 일은 백성들의 자랑이다!
시청자들이 으스대고, 은우는 말을 찼다. 말이 부드럽게 땅을 박찼다.
『함주 성으로
◈ 함주성의 윤관과 대화하기』
『동북 탐험│ 지도와 일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픈 월드라더니 어김없이 지도가 있네요.”
은우는 그 알림 창을 보고 지도를 켰다. 손이 자동으로 움직이며 봇짐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동북 지역을 탐험하며 지도를 밝히고 새로운 장소를 찾아보십시오.』
떠오른 지도는 그저 새하얗기만 했다. 그나마 가장 남쪽 부분이 밝혀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지금 그가 있는 시작 부분이 분명했다.
말을 타고 나아가니 지도가 점점 더 밝혀지는 게 그 증거다.
“맵이 엄청 길쭉한데…….”
─동북9성 위치 아직 안 밝혀지지 않았나
─ㅇㅇ 자료 소실돼서
─애초에 가상고려랬으니까 상관 없을듯
─3설 따라간듯?
“이것도 서브 퀘스트나 기타 콘텐츠가 어마어마하게 많을 것 같습니다.”
─‘그 게임’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에도 켠왕으로 히든엔딩 가싈?
─아 켠왕 못참지ㅋㅋ
딱히 그 게임을 노리고 말한 건 아니었으나, 사람들은 절대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만약 이게 싸움이었다면 저들은 절대 지지 않을 것이다.
은우는 사람들의 우스갯소리에 어깨만 으쓱였다. 솔직히 그땐 아무리 그라도 힘들었던지라, 다시 하라고 하면 좀 어렵지 않을까 싶다. 못 하는 건 아니겠지만.
“이틀이라면 모를까, 사흘 하고도 반나절을 눈뜨고 움직이는 건 저도 힘듭니다.”
─이틀이 되는 것도 괴물인디
─체력 ㅈㄴ 부럽다....
─기력 좀 나눠주시죠
─본받고 싶다....
─졸작할 때 저 체력만 있으면...츄릅
“느린 호흡으로 하는 게임이니 천천히 갑시다.”
은우는 그러면서도 느긋하게 덧붙였다.
“그래 봤자 며칠이나 가겠습니까.”
반은 자조적인 태도였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콘텐츠 분쇄기
─??: 아~ 할 게임 없다고~!!
─검기사 스피드런 해보싈?
─근데 이미 죄다 켄게 최고 기록이잖아ㅋㅋㅋ
─오우쉣 자기 자신과의 싸움
그가 할 게임이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물론 아무거나 마구 잡는다면 부족하진 않겠지만, 명색이 실력파 스트리머로서 그럴 수 있겠나. 간간이 다른 걸 할 수는 있어도 중심이 흔들려선 안 된다.
일단 팀장님이나 타 스트리머들의 조언은 그랬다.
은우는 길을 따라 달렸다. 말 보정이 잘 되어 있는지라 덜컥거리는 느낌이 거의 없이 편하게 달릴 수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느낌이나 풍경도 나쁘지 않았다.
“일단 말타기도 나쁘지 않네요.”
다른 시스템도 그렇고, 게임 플레이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 같은 말 이동도 탑승감이 나쁘지 않다.
은우는 제법 후한 평가를 내리며 퀘스트 옆에 표기된 거리를 확인했다. 점점 줄어든다. 다르게 말하면 가까워진다.
“이제 확인할 건…….”
여진족이 득시글거린다는 함주나 영주 성과.
“하나뿐이네요.”
【무슨 소리지?】
【뭔가가 근처에 있을지도 몰라.】
외국어가 먼저 귀에 박히고, 시야 한쪽에 자막이 띄워졌다. 보기 불편했지만, 외국어라 알아듣기 어려울 걸 감안하면 이 또한 고증일 것이다.
“전투가 어떤지 한번 봅시다.”
은우는 환도를 뽑아 들었다. 멀리서 길의 한복판에 서 있던 여진족이 발각 게이지를 띄웠다. 철갑 기병이 자랑이라는 나라답게 그들마저 철갑마들을 한둘 데리고 있다.
거기서 말을 타고 빠르게 다가가니 게이지가 빠르게 증가하며 느낌표로 변했다. 발각됐다는 의미였다.
그렇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일단 기마전부터.”
어차피 다 죽이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