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건우는 파란색 천을 가위로 싹둑싹둑 자르다 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 나이 먹고 방구석에 앉아 하는 게 바느질이라니. 바느질이 취미나 직업인 사람에겐 죄송할 말이지만, 친구 놈들이 봤다면 실컷 비웃었을 거다. 음침하게 뭐 하는 짓거리냐고.
건우 자신이야 그 정도까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안 하던 짓임 자체는 인식하고 있다. 이럴 거면 그냥 건강 챙기라고 과일청─콜라보단 나을 것 같아서─이라도 보내 줄 걸 그랬다.
그러나 이것을 집어 들게 만든 순간을 떠올리거든 나오려던 웃음은 쏙 들어가고 가슴만 서늘해진다.
바늘에 꿰뚫린 손끝이 따가웠다.
「그쪽은 가족인데도 못 들으셨나 봐요?」
아니, 그것보단 심장 어림이 좀 더 따가운지도 모르겠다. 새삼스럽게 그가 몰랐던 것들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알게 돼서. 동생 혼자서 삼켜 버린 칼날의 개수가 이제야 보일 것 같아서.
피해자에게 무지는 슬픈 이유가 되지만, 가해자에게 있어 무지란 허울좋은 변명에 불과하다.
그 사실을 알기에 건우는 음울히 그가 하던 행위나 마저 이행했다.
[여러분들의 의견도 한번 묻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다 잠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액션이 주가 되진 않지만, 그것보다 더 무거운 주제의 게임이 보였다.
[투표로 가죠.]
건우는 느릿한 손길로 투표에 동참했다. 두 사람에게 다 준다. 그가 배우고, 그가 성립한 가치관이 쉽게 답을 내렸다.
그는 다만 투표를 하면서 다른 생각에 골똘히 잠겼다.
[둘 중 한 사람에게 주는 선택지는 그다지 투표를 안 하시는군요.]
사실 당장에라도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다.
열여섯,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일이라든가. 열일곱, 유도부 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라거나. 스물, 사람들이 이건 재능의 수준이 아닌 것 같아 말하는 기술들, 그러니까 무술이라든가 기타 재능은 정말 재능에 불과한 건지라거나.
[둘 다 주는 쪽이 조금 더 우세한 듯한데, 끝까진 시간이 남았으니 좀 더 지켜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어떻게 물어볼 수 있단 말인가?
침묵은 앞으로도 무지하겠다는 선언이나, 질문은 동생이 겨우 묻었을지도 모르는 것을 파내는 행위였다. 무엇이 더 큰 상처일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도저히, 도저히…….
▣ 148. 걸리는 거 아님?
은우는 투표 결과를 확인하고 목덜미를 톡톡 두드렸다. 완전히 주거나, 주지 않거나 쪽에 의견이 몰렸다. 둘 중 한 사람에게만 준다는 의견은 노부부나 소년이나 비슷한 크기로 적게 나왔다.
하면 주거나 주지 않거나는 어떨까. 그건 10 대 7 정도의 비율로 투표수가 나왔다. 결국 주기로 결정이 된 것이다.
“목숨이 걸린 이야기라 투표가 팽팽하게 이뤄졌네요.”
그는 세계 정지를 풀었다. 은우의 앞에 있던 남매의 눈동자가 빛을 머금고 다시 절실함을 품었다. 물을 아껴야 하다 보니 제대로 씻지고 못해 두 사람 다 꼬질꼬질하기까지 하니, 그 절박함은 배가 된다.
“그럼 주는 쪽으로 가겠습니다.”
은우는 노부부에게 약을 나눠 준다를 지시하고, 남매에게 붕대를 준다 역시 수락했다. 역시나 두 쪽 다 별다른 보상을 주지 않았다.
대신 피난처 캐릭터들 머리 위로 말풍선이 떠오르며 긍정적인 의견들을 띄웠다. ‘아이가 죽게 내버려 두는 건 옳지 않아.’ 내지 ‘그들은 손녀를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어. 그들의 가족애가 따스해.’ 따위였다.
“제이콥은 슬픔이 사라졌네요.”
─약붕대와 맞바꾼 슬픔...
─대손실 아님?
─완전 손실임
─ㅋㅋㅋㅋㅋㅋ
역시나 정서 관련 문제였던 모양이다. 치유된 건 글쎄. 고달파도 타인을 도와주니 일종의 만족감이 들었나? 상황이 나아지진 않았지만, 인간은 누군가를 돕는 것에서 보람을 느끼기도 하는 법이다.
“슬픔을 깎는 대가로 치기엔 너무 크다 생각하지만… 얻는 게 아예 없진 않아 다행입니다.”
은우는 감사하다 말하며 엉엉 우는 남매를 보았다. 막막해진 피난처의 앞날은 그렇다 쳐도, 회복되는 누나 쪽 피를 보면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돌아갑시다.”
나쁜 기분만 아니었다.
은우는 어디서 약과 붕대를 충당해야 할지 고민하며 피난처로 복귀했다. 붕대가 빠진 자리엔 다음 순번으로 내려 두었던 자재 뭉치를 넣은 채다.
『아이들을 도와주고 왔어. 세상에, 어린아이들까지 생존을 위해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니……. 전쟁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OFF를 하지 않는 이상 시야 한쪽에 계속 떠 있는 삼인칭 화면에 그런 대사가 떠올랐다. 은우가 조종하고 있는 캐릭터가 띄운 대사였다.
『제이콥이 수색을 통해 획득한 물품 목록: 자재₁₄, 잡동사니₁₁…….』
은우는 제이콥을 곧바로 재워 버렸다. 그러곤 교대로 자서 멀쩡한 둘을 부려 먹었다. 자재가 충분해졌으므로 이제 다음 티어용 작업대를 만들 수 있다.
다만 고급 작업대가 만들어지는 동안 오후 8시가 가까워졌으므로, 그것에서 무언갈 만드는 건 포기해야 했다. 밤 수색을 나갈 사람과 장소를 고를 차례였다.
“약이랑 붕대가 적으니 백화점은 두고 그것들 먼저 수집하도록 하겠습니다.”
─ㅖ
─붕대는 몰라도 약은 여유분 필수긴 하지...
─저거 입 막아!
─ㄹㅇㅋㅋ만 치라니까!
─ㄹㅇ ㄷㄷ
백화점은 어차피 기계도 제거된 상태다. 낮에 가도 그다지 위험하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도 자재나 총알 몇 개 정도였고.
반면 그는 식량과 약이, 특히 후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최소 분량은 확보해야 했다.
하여 은우는 밤 탐색에서 백화점 대신 다른 맵을 살펴보기로 했다. 출발할 때 어떤 어떤 물자가 있는지 미리 알려 주므로 다량의 맵 중에서 하나 택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
“오늘은 고요한 집 가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ㄹㅇ ㅋㅋㅋ
─ㄹㅇㅋㅋㅋㅋ
─아ㅋㅋㅋㅋ
많은 음식, 많은 약, 많은 자재가 있는 주제에 위험도는 0. 어쩌다 보니 아껴 둔 곳이지만, 지금이 때인 것 같다.
은우는 사람들의 웃음 속에서 고요한 집을 택했다.
그리고 다시 시야가 밝았을 때.
“거 누구시오?”
그는 아까 약을 받으러 온 이와는 또 다른, 새로운 노부부를 발견했다. 아까 그분들보다 연세가 더 지긋한 듯한 노인들이었다. 창문은 헐겁게나마 판자로 막고 불은 작게 피워 둔 채 두분이서 도란도란 이 시기를 견디는.
─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털면 인성ㅋㅋㅋㅋ
─아 이건 못참지!ㅋㅋ
─웃음벨on!
─ㅋㅋㅋㅋㅋㅋㅋㅋ
“…돌아갈까요.”
이건 투표하고 말 것도 없었다. 여기서 그가 저들을 터는 순간 그는 인간이 아니게 됐다.
은우는 조용히 밤 수색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 * *
『나> 형은 누군가 위험에 빠졌을 때, 그 사람을 구할 때도 사람을 안 죽일거ㅇ_』
은우는 쓰던 문장을 싹 지웠다. 그리고 침대에 누운 상태 그대로 엎어졌다.
말해 주고 싶은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차마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형이 상처받을까 싶어서 말하지 않던 때와는 달랐다.
이건 명백히 그가 다칠 것을 겁내는 것이었다.
『나> 형이 위험에 처했을 때 누군가를 다치게 만들지 않으면_』
다시 지웠다. 은우는 엎어졌던 몸을 도로 뒤집었다. 손등이 그의 이마를 꾹 눌렀다.
이해받기 어려울 거라는 것쯤은 안다. 애초에 미치광이 취급 받지 않으면 다행이고. 그렇지만 만약 형이 믿어 준다면? 믿는데, 그것이 안 좋은 쪽으로 틀어지면?
법 없이도 살 사람이 있다면 그중 형이 포함되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서 더욱 불안하다. 그가 저지른 살인과 절도, 방화, 테러는 정말 셀 수도 없이 많았으므로.
물론 그 대부분의 범죄가 적대 국가에 편향되어 있지만, 일단 죄는 죄였다. 더구나 현대법은 전쟁에 참여한… 참여한… 사람도 죄를 물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다지 좋은 시선을 줄 것 같진 않다.
그리고 그게 형이 된다면, 형이 그를 보는 시선이 된다면.
그는, 그가 가진 많은 것들을 잃게 될 것이었다. 다시 한번 줄 끊긴 풍선처럼, 그렇게.
그는 그게 무서울 뿐이었다.
은우는 한 번 더 침대의 몸을 뒤집었다. 이렇게 되니 정말 할 짓 없는 백수 같았다. 물론 방송 끝내고 하는 짓이니까 누가 보든 납득해 줄 거라 믿는다.
퇴근 후 침대에 누워서 침대보의 부드러움─그의 것은 까실했지만─을 누리는 것쯤이야.
그는 결국 오늘도 형을 떠보길 포기했다.
대신 그는 그의 든든한 아군을 불렀다.
『나> 자냐.』
『희수> 종강 대학생은 이 시간에 자지 않아.』
『희수> 그보다 찌질한 전애인의 정석 같은 그 대사는 왜 내뱉냐.』
『나> ㅗ』
은우는 친구들끼리 으레 나누는 문자를 보내며 본격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나> 만나자.』
『희수> 즈기요, 저는 지수라는 애인이 있는데요.』
『나> 듣고 싶다며.』
『희수> 임자 있는 사람 건드리지 말고 ㄲ』
『희수> ?』
『나> 괜찮다 싶음 말해 달랬잖아.』
『희수> 아니.』
『희수> 아.』
그는 이 녀석이 왜 고장났을까 잠시 고민해 보았다. 본인이 궁금하대서 기껏 말할 각오를 다졌건만, 왜 이러는지.
『희수> 한 십 년은 뒤에 말할 것처럼 굴었으면서 겨우 이틀 뒤에 말해?』
『희수> 도라이 아냐, 이거. 이럴 거면 왜 그땐 말 안 한 건데.』
『나> 말해 줘도 뭐라 하냐, 넌.』
『희수> 존나 얼척이 없으니까 그렇지. 난 또 십 년은 기다려야겠구나 했는데, ㅅㅂ. 그걸 이틀 뒤에 말해 주네.』
엄밀히 따지면 하루 하고 반나절 만에 말하겠노라 의견을 전달한 거지만, 이틀이란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날짜로 보면 2일이 지난 건 맞았다.
『희수> 내일 시간 됨』
『나> 이야기 길어질 것 같은데.』
『희수> 4 ㅗㅜ?』
『나> ㅗ』
『희수> 나 일찍 못 일어남. 내일모레.』
은우는 그 문자를 들여다보다가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방학인데 좀 일찍일찍 일어날 생각은 없는 걸까.
그걸 곧이곧대로 전하니 희수가 발작하듯 문자를 보냈다.
『희수> 방학 때 12시 이전에 일어난다고? 미쳤?』
『희수> 아침엔 술집이 문을 안 연다고.』
그는 희수의 문자를 보며 이마를 짚었다. 누가 누굴보고 또라이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 * *
17일 차쯤 되니 슬슬 여유가 생겼다. 방송 첫째 날, 마지막 부분에서 붕대와 약을 뜯기긴 했었지만, 어찌어찌 잘 버텨 낸 것이다.
기실 전투에서 부상 입지 않는 한 붕대란 물건은 별로 쓸 일이 없긴 했다. 잠과 배고픔을 어느 정도 해결해 주면 병 또한 걸릴 일도 적었다. 붕대와 약의 필요성이 거두할 일 없었단 소리다.
“이제 물과 식량만 확실하게 공급처를 구하면 되겠습니다.”
물 또한 필터만 있으면 어떻게 집 안에서도 구할 수 있긴 했다. 단지 그 필터를 만들려면 자재가 필요하고, 중간쯤에 이르니 그 자재가 부족해졌을 뿐.
“거기에 온도도 점점 떨어지고 있네요.”
하루가 갈수록 온도가 1도씩 뚝뚝 떨어지고 있다. 아마 겨울이 오고 있다는 징조가 아닐까 싶다.
“난로를 만들면 그 방에서만 효과가 유지됩니까?”
─글쎄요
─집 마다 다르지 않을가요?
─그럴수도 잇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모르면 죽어야지
─아니ㅋㅋ이방은 어떻게ㅋㅋㅋ청자가 이렇게 많은데도 단합이 잘 되냐ㅋㅋㅋ
─켄이 무서워서 그럼ㅋㅋㅋ
─아 실수하면 켄이 목 따버리잖어~
─ㄹㅇㅋㅋ만 치라고
“…시청자분들 목을 제가 왜 땁니까.”
은우는 그에게 누명을 씌우는 시청자들을 보며 약간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우리 목은 안 딴대
─구울 아니면 이제 따이는 거임?
─목 따이기 싫으면 세금을 상납하라 이마리야~
─호달달
물론 그들은 절대 들어주지 않았다. 원래 비수란 존재들은 그런 법이었다.
“자재가 너무 부족한데, 어떻게든 긁어모아 와야겠습니다.”
은우는 결국 화제를 돌렸다. 실제로 자재의 부족 문제는 심각했으므로 막 선정한 주제도 아니었다.
뭘 하려고 하든 자재가 없어서 못할 판이 지금 상태이니. 어떻게든 활로를 틔워야 했다.
“거래 가능이라는 불법 호텔을 가 볼까요, 자재가 많다는 학교를 가 볼까요. 여러분은 어디가 더 나아 보이십니까.”
그는 밤 탐색을 두고 시청자들의 의견을 받았다. 아는 자들은 죄다 침묵하고, 모르는 자들만 훈수를 두었다. 특별한 정보가 없어서인지 의견은 비등비등하다.
“그렇다면 남는 약과 사치품만 들고 거래하러 가 봅시다.”
은우는 가방에 교환할 만한 아이템을 들었다. 많이 들고 가지 않는 것은, 교환이 성사되어도 가지고 올 여분의 칸이 없으면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도 잘 계산해서 들고 가야 낭패를 덜 본다. 소설가라 그런지 언변이 좋은 콜린을 택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호텔이라서 그런가, 층이 높습니다.”
다만 한국식으로 따진다면 호텔보다는 모텔에 좀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호텔이라고 하기엔 건물이 너무 낡고 기능이 떨어졌다. 포격을 당해 이리저리 부서지고 무너진 걸 포함해도 마찬가지다.
『난 이 호텔에 와 본 적 있어. 썩 시설이 좋진 않았지. 그렇지만 이곳에서 쓴 소설은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어. 그 추억의 장소가 이렇게 되버리다니, 조금 아쉽네.』
특정 장소에 특정 캐릭터가 갈 경우 이렇게 대사를 띄우곤 했다. 그건 이번처럼 과거 이야기일 수도 있고, 감상일 수도 있다. 다만 대부분 상실에 기반된 말투들이었다.
은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풀어졌다.
“일단 보초병은 없습니다.”
─완전 털어달라고 하는 수듄;;
─ㄴㄴ 저기 은근 어려움
─그치만 켄이 간다!
─아ㅋㅋ갑자기 빈집됐누ㅋㅋ
이 게임은 플레이어에 대한 배려인지, 폭력 조직이 점거한 맵의 경우 밖에서 서는 보초를 따로 구현해 두지 않았다.
연합군의 기지야 경계를 서는 자가 따로 존재했지만, 다른 곳은 건물 안에 들어서야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은우로선 편했다. 그는 아무도 없는 홀을 통과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한 사람이 보였다. 말풍선 마크가 뜨는 걸 보면 저 사람이 거래가 가능한 NPC다.
“거래를 하러 왔나?”
그 말과 함께 거래 창이 떠올랐다. 은우는 일단 그가 원하는 물건이나 귀한 물건이 있는지 확인했다. 식량과 식수는 꽤 되었지만, 자재는 없었다.
“물은 교환할 만하네요.”
─커어 약의 위엄이다
─여윽시 약
─물 되게 많이 주네
─ㄹㅇㅋㅋ
그는 약 하나를 소비해 물을 죄다 털어 왔다. 거래 손실을 피하기 위해 가장 가치가 낮은 물건도 덤으로 껴 보면 상대가 고개를 젓는다. 물까지만 가능하단 소리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은우는 다시 층을 내려왔다. 더 위로 올라가거나 방 쪽으로 진입하기엔 거래 NPC가 보고 있었다.
“밖에서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은우는 잠깐 고민하다가 한번 털어 보기로 결정했다. 나쁜 짓이란 것은 그다지 인지하지 않았다. 털지 않으면 그들이 죽을 수도 있었다. 자재를 구해야 했다.
그는 호텔 밖으로 나와 외벽을 탔다. 적막을 깨지 않도록 조용조용 움직이면 어떻게 2층 방에 발을 들이밀 수 있다.
─이게 되네
─키가 크니까...
─(대충 키크고 싶다는 채팅)
─(대충 다시 태어나라는 채팅)
─(대충 사탄 1패라는 채팅)
“한 층 더 올라가겠습니다.”
은우는 바깥 구조물들을 잡고 벽을 거슬러 올랐다. 마치 한 마리의 거미가 된 것처럼 층을 하나 더 올라가면 상호작용 마크가 몇 개 떠올라 있다.
그는 무너진 담 사이로 몸을 넘겼다. 돌가루가 파스스 떨어졌지만, 소리는 크지 않았다. 바닥에 보이는 파장이 반경 50cm를 채 넘지 못했으므로 절대 못 들었을 것이다.
“무엇을 가져다 놨는지… 한번 봅시다.”
─빈집털이on!
─아 딱대
─도둑질은 못참지
─보물 다 털어가자ㅋㅋ
은우는 조용히 더미들을 뒤졌다. 소리가 나지 않게 이것저것 살펴보고 살금살금 움직이면 방 하나가 작살 나는 건 금방이다.
끼이이이익, 덜컹!
벽 너머에서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게임 특성상 플레이어 잘 들으라고 모든 문소리를 저렇게 만들었는데, 그게 역으로 사람 가슴 졸이게 만들었다.
─아오
─와,,,개쫄리네
─문 소리기 진짜 개극혐하게 만들었네
─왜 철문에서 이딴 소리가 남ㅠ
─진짜 무서워서 못 보겠네
─살떨린다....
시청자들이 압박감을 호소하든 말든, 그는 태연히 문 너머의 상황을 확보했다.
투시 능력이라도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에 다가가 ‘건너편 주시하기’를 택하면 대체로 전부라 해도 좋을 만큼의 시야가 트였다. 건너갈지 말지 고민할 때 쓰면 딱이었다.
“아무도 없습니다.”
은우는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끼이이이익, 덜컹!
플레이어뿐 아니라 NPC들에게도 공정한 청음의 기회를 주는 게임이 큰 소리를 내었다.
은우의 몸이 벽 쪽으로 숨어 상황을 좀 더 살폈다. 역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진행하겠습니다.”
그는 발을 살금살금 움직이며 서둘러 다음 지대에 돌입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NPC들은 청음 반경에 플레이어의 소음이 들어와야 플레이어를 감지하지만, 플레이어는 아니란 점이다. 청음 반경이 아니어도 소음이 나면 따로 표시가 되었다. 그것의 정체를 모를 뿐이지.
다만 이 점은 일인칭으로 할 경우 상당 부분 해결되었다. 진짜 소리를 듣고 상대를 분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끼이이익, 덜컹.
찌익?
소음 표시가 떴음에도 과감히 문을 열고 들어온 결과, 사람 말고 쥐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자재가 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나온 방을 제외하면 갈 수 있는 방은 4개. 그러나 하나는 잠겼고 두 개는 안에 사람이 있었다. 은우가 택할 수 있는 건 열려 있고 사람이 없는 이 방뿐이었다.
은우는 일단 그곳에서 조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조사했다. 그렇게 작은 편이 아닌 가방이 벌써부터 꽉 찼다.
그렇지만 포기하긴 좀 아쉬웠다. 여기에 또 올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가 원한 자재는 얼마 얻지도 못했다. 더구나 가방을 채운 것들 역시 종류만 많지, 채울 수 있는 최대 개수에 도달하진 않았다.
“더는 안 올 곳인데, 좀 더 탐색해 보죠.”
마침 시간도 많이 남았고, 옆쪽 방으로 뚫고 갈 수 있는 잔해 더미도 있었다. 잔해를 치우는 데는 게임 시간으로 2시간 정도 소요되겠지만, 어차피 새벽 4시까지 가능했다.
아직 자정도 채 안 됐으니 치우기만 하면 할 만할 거다. 잔해 구멍 사이로 보이는 건너편에 마침 사람이 없기도 하고.
은우는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느릿느릿한 로딩과 함께 파장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소음 반경 너무 큰데?
─걸리는 거 아님?
─소리 너무 큰데....
─심장 졸라 쫄려ㅠ
─위-험
─이걸 왜 무서워함ㅋㅋㅋ(화면 작게함)
─어우 무서워...
“안 걸립니다.”
그는 힐끗 파장을 보았다. 확실히 문밖으로 살짝 삐져 나가긴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빠져나간 건 아니었다. 원래 소음 파장이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데, 문쯤에 다다랐을 때의 굵기를 보면 끝나기 거의 직전의 굵기였다.
그렇게 타이머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잔해 흩트리기가 거의 끝났을 즈음.
끼이이이익─
덜컹.
문 열리는 소리가 서릿발처럼 귀에 꽂혔다.
─ㅇㄴ....
─개쫄려ㅠㅠㅠ
─걸린나? 걸리나?
─비수들 다 겁쟁이박에 없냐?ㅋㅋ 아, 그래서 엄마 팬티 어디다 뒀다고??
─어어어ㅓㅓㅓㅓ
─ㄷㄷㄷㄷㄷㄷ
사람들이 술렁이고, 은우는 작업을 즉각 멈췄다. 숨을 죽이며 벽 쪽을 응시하면 빨간색으로 표시되는 소음 파장이 복도를 뚜벅뚜벅 가로지른다.
은우가 보기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가 있는 방 문에 다가오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소음의 주체가 문 앞에서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