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은우는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외국을 배경으로 해서 그런지 우리나라처럼 위로 길쭉한 백화점이 아니라 옆으로 넓은 백화점이었다.
그는 그곳에 슬그머니 들어섰다가 사람 목소리를 들었다.
“먹을 거? 줄 수 있지. 있는데…….”
껄렁껄렁한 목소리가 하나.
“다, 다시 생각해 보니 필요 없는 것 같아요…….”
조금 앳된 목소리가 하나. 이렇게 두 개였다.
─이거 구해주셔야함
─???
─머임
─ㄷㄷㄷㄷ
─?
“청불이니 이런 것도 나오는군요.”
무력으로 인한 추행 내지 폭력. 게임인 만큼 연출하는 데 쓰인 NPC들은 죄다 어른이지만, 딱 그것뿐이다.
─전쟁이 터지면 법이 침묵하니..
─빠루 준비하자
─구해주죠
─연장 챙겨라
─빠루 딱대
─주기죵
법을 따른다면 아이든 어른이든 저런 짓을 당해야 할 이유는 없고, 저런 짓을 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이유가 뭐겠나.
평상시와 달라진 건 전쟁이 벌어졌다는 사실 하나뿐이니. 결국 전쟁에서 인간은 권리를 주장할 수 없고, 정의와 선을 외칠 수 없다.
그럴 자격이 주어진 건 강자밖에 없다.
“반항하면 총을 쏴 버리겠─”
퍼억!
은우는 뒤에서 적의 대가리를 후려쳤다.
시스템적으로 바닥에 파동이 뻗어 나가듯 표기되는 소음이 작아서인지, 상황 판정으로 적의 듣기 범위가 좁아진 건지. 어쨌든 덕분에 공격을 정타로 넣었다.
적의 피가 1/10조차 남기지 못하고 쭈욱 깎였다. 그가 한 번 더 때리면 바로 사라질 수준이었다. 쇠지레 대미지가 큰 건지 에이버리(경호원)의 공격력이 월등한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전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새끼가─”
공격 쿨타임 때문에 잠깐 막힌 사이, 적이 자세를 잡고 총을 격발하려 했다. 그러나 적보다는 은우가─정확힌 에이버리가─더 빨랐다.
퍼억!
건물 문 딸 때 쓰이는 쇠지레가 적의 턱주가리를 올려 쳤다. 적의 피가 0으로 화하면 그 몸뚱이는 바닥으로 철퍼덕 쓰러진다.
“아슬아슬했네요.”
조금만 늦어졌어도 쓰러지는 건 은우였을 거다. 세세히 따진다면 그가 덧씌워진 상태의 캐릭터겠지만, 그가 손해를 본 점에서 크게 다르지도 않다.
─...?
─제가 모르는 사이 아슬아슬의 정의가 달라졌나요?
─사전 언제 개편했냐
─ㅈㄹㄴ
“일단 맞으면 죽을 확률이 높잖습니까.”
총알에 한 번도 맞아 본 적이 없어서 대미지가 어떨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근거리의 경우 칼을 피하는 것보다 총알을 피하는 게 더 힘들고, 총은 기종에 따라서 연사가 가능한 경우도 있다.
더구나 그는 방탄복조차 입지 않았다. 위험했던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 안 맞으면 되잖아요?
─님 옛날 말을 돌아보고 말하세요;;
─약한 척 ㄴㄴ
시청자들은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지만 말이다.
“가, 감사합니다…….”
저 사람들이야 맨날 저러므로, 은우는 그냥 무시했다.
대신 그는 씻은 배추 줄기처럼 허옇고 길쭉한 피해자를 보았다. 짧은 머리카락 아래 두 뺨에는 눈물이 잔뜩 묻어 있다.
그게 어찌나 서러워 보이는지, 이러쿵저러쿵 불만을 토하던 사람들마저 동정으로 태세를 전환했다. 실제 피해자를 목격한 바 있는 은우가 보기에도 썩 그럴싸했으므로, 시청자들에겐 더 와닿았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 사람은 없는 정신으로 그에게 감사 인사를 던진 후 후다닥 백화점을 나갔다.
─보상은?
동정을 할 거면 끝까지 할 것이지, 사람들은 하다 말았다. 그러나 그것들을 허망하게 외쳐도 보상 따윈 돌아오지 않는다. 애당초 바라지도 않았다.
─보상 안 주고 가네ㅠ
─보상줄 정신이 어딨겠냐
─그렇다고 말로 땡치는 건 뭐임
─주기죵
“뭐 어떻습니까.”
은우는 목덜미를 쓸었다. 그러곤 그가 죽인 이를 바라보았다.
“이런 때라도 죽이면 안 된다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의 형은 이런 사람마저 죽이면 안 된다고 말할까, 아니면 이런 건 사람도 아니라며 취급을 달리할까.
잘 모르겠다. 두 반응 다 형다울 것 같았다.
─있겠음?
─총들고 있는데 무조건 죽여야지;;
─열혈만화라면 인정
─ㅋㅋㅋ만화는 킹정이지
─안 죽이면 이쪽이 죽잖어
─저런 건 죽어도 쌈
─애 괴롭히는 새끼는 사형이 국룰
글쎄. 그도 그렇게 생각한다. 딱히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성격은 아니지만, 약자를 괴롭혀서 좋을 게 뭐가 있을까.
그다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라고 본다. 죽여도 할 말 없을 정도로.
하지만 그건 그가 사람의 목숨이 바닥의 돌멩이만 못했던 세계를 겪었기에 내리는 판단일지도 모른다. 그런 걸 겪었기에 작은 죄에도 쉬이 종결을 내리는지도.
은우는 눈을 잠시 감았다.
그러니까 그는 역시 그의 형이 전자를 택한다고 해도 뭐라 말할 수 없다.
그가 그런 세계를 겪었기에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이런 가치관을 이해할 수 없게 된 거라면, 이런 세계에서 자라 온 형 또한 이런 가치관을 가진 채 그런 가치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므로.
▣ 147. 대위기
“그래도 총은 얻겠습니다.”
은우는 짧은 두려움을 삼킨 채 방금 그가 죽인 이를 수색했다. 4초가량의 수색용 로딩이 끝나면 죽은 이가 가지고 있던 소지품이 떠오른다.
『술│소총│총알₂₁』
격자 칸에 종류별로 떠올라 있는 아이템들은 제법 좋은 것들뿐이다. 그중 가장 큰 소득은 역시 소총이었지만 말이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군인 같은데…….”
─킹화점에 잇으니 탈영병일 듯
─탈영병 맞음
─글쎄요?
─ㅋㅋㅋ여기서도 킹쎄요가
“그렇군요.”
참고로 ‘그곳에 내가 있었다’에 등장하는 적은 크게 5종류가 있다. 연합군, 기간군, 기계, 폭력 집단, 부랑자. 그 5개다.
먼저 연합군은 명목상으론 아군이다. 배경이 되는 나라의 군대 및 동맹을 맺은 국가의 군인이라고 보면 된다. 물론 작중에선 말만 아군이지 깡패랑 그다지 다를 게 없다.
다음으로 기간군. 나라를 쳐들어온 적대적 국가의 군대다. 그것으로 설명은 끝난다.
기계는 연합군이나 기간군이 설치한 것들을 말하는데 양측 모두 아군을 제외하면 전부 공격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여기서 아군은 군대 병력만 뜻하므로, 민간인은 기계의 섬멸 대상이다. 피해야 했다.
폭력 집단. 이들은 가짓수가 꽤 많다. 난민 중 강도나 폭력배들이 모여 형성해 낸 세력들을 통틀어 부르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부랑자는 적대적 NPC가 혼자 존재할 때 부르는 명칭이다. 방금 죽인 탈영병도 부랑자에 속했다.
“총과 총알은 피난처에 두고 경비한테 쥐어 주면 되겠습니다.”
─? 안 들고 다니세요?
─저거 들고 다니면 장판파 쌉가능인디
─개솔 ㄴㄴ
─아가리러들 ㄲㅈ 총든다고 장판파 안 됨;;
─그치만 켄이잖아
─켄이면,,,,그러네,,,,,,,
“저라고 총 들면 무적 되는 게 아니거니와… 들고 다녀 봐야 별로 쓸 것 같진 않네요.”
수색 때 들고 다녀 봐야 소리와 가방 칸 때문에 효율이 썩 좋지 못하다. 하물며 에이버리는 콜린보다 가방 칸이 작았다. 위험 표시가 제대로 띄워진 구간이 아니고서야 굳이 들고 갈 필요는 없을 거다.
“가져는 가야 하니 지금은 들어야겠습니다만.”
은우는 일단 총과 총알을 챙긴 후 본격적으로 백화점을 탐색했다. 부랑자인 줄 알았는데 패거리가 더 있는 경우도 종종 있기에 발소리는 죽인 채다.
그리고 오랜 수색 끝에 그는 온갖 아이템과 함께 피난처로 복귀했다. 탐색을 몇 시간 하든 캐릭터가 돌아오는 시간은 아침 6시로 고정이기에 날짜는 하루 더 카운트된다.
『좋은 소식을 들고 왔는데, 너흰 어떨지 모르겠네. 별일 없었기를 바라.』
『침묵으로, 하루가 또다시 지나갑니다.
에이버리가 수색을 통해 획득한 물품 목록: 총, 총알₂₁…….』
“초반이라 그런가, 습격은 아직 별로 없네요.”
─다들 아는거지... 오면 죽는다는 걸....
─ㅋㅋㅋㅋㅋㅋㅋㅋ
─왕이 거주하는 구역에 침입한다? 황천길 편도티켓
습격이 있으면 습격이 있었다고 뜬다. 침묵으로 지나간다는 게 아니라.
“계속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은우는 정보 창을 확인한 후 일인칭을 풀고 삼인칭으로 돌아갔다. 그다음 할 일은 밤새 수색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한 에이버리를 재우는 것이다. 나머지 캐릭터들에겐 일을 시키고.
피난처의 뚫린 구멍은 전부 보수해둔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식량과 물, 비상사태에 쓸 약 정도다. 더 나아간다면 더 좋은 장비들 정도.
“슬픔은 어떻게 지우는 겁니까?”
밥을 먹이지 않으면 굶주림, 잠을 재우지 않으면 피로함 등 안 좋은 상황에선 각 캐릭터에게 상태 이상이 붙는다. 슬픔 또한 아마 그중 하나인 듯싶다.
사람을 죽여서 붙은 건가 하기엔 에이버리가 아니라 제이콥에게 붙어 있다. 은우는 혹시 몰라 캐릭터 창을 켰다.
『아이를 보호하는 건 어른의 당연한 의무야. 난 내가 한 행위를 후회하지 않아. 아이를 건드리는 쓰레기는 죽어도 싸.』
사람을 죽인 에이버리의 반응이었다.
『그놈은 죽을 만했어. 작금 상황이 아무리 최악의 최악을 달린다지만, 그런 이유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마저 어긴다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우리는 인간으로 남지 못해.』
콜린의 반응이었다.
『내가 일하던 식당엔 아이들이 자주 놀러 왔지…….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에이버리가 구해 줬다던 아이처럼 험한 꼴을 당한 건 아닐까?』
마지막으로 슬픔이 붙은 제이콥의 반응이었다.
일단 대체로 ‘잘 죽였다.’라는 의견인 걸 보니 살인이 원인은 역시 아니다. 죽인 당사자뿐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반응을 보이는 게 영 찜찜하기지만, 어쨌든.
“아이들 걱정 하다가 붙은 건가…….”
─글쎄요?
─상냥하다ㅠ
─그럴 수도 있고 안일 수도 잇읍니다
─ㅖ
딱히 물어보진 않았지만, 저러는 걸 보면 조금 얄밉다.
은우는 채팅 창을 빤히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방법을 모른다면 가설을 세워 방법을 찾아내는 수밖에 더 있나.
“아니면 슬픔이 생긴 이유를 ‘상황에 여유가 없어서’로 둘 수도 있겠죠.”
식량 부족으로 넉넉히 밥을 챙기지도 못하고, 밤에는 간헐적 습격 및 밤잠을 미룬 채 수색, 낮에는 생존을 위한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지속될 일상이나, 정작 종전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희망이 없는 셈이다.
하물며 인간은 모름지기 희망이 있다면 괴수들 속에서도 생존을 다짐하고, 희망이 없다면 튼튼한 성벽 안에서도 자살을 한다.
막 살았던 전적 때문에 은우는 그다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일반인이라면 우울증 오기 충분한 조건이었다.
“여유는 보통 여가 시간을 즐길 때 나오니까 관련된 물건을 찾으면 해결될 것 같은데, 맞습니까?”
정확힌, 여유가 나서 여가 시간을 즐기는 거겠지만, 순서 바뀐다고 크게 문제 생기는 것도 없다.
─글쎄요?
─추리on
─명추리다
─캐릭터 맘이죠
─이방 왜이럼ㅋㅋㅋ
─다들 한마음 한뜻, 보기 좋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모르쇠로 일관하는 시청자들이 있는가 하면, 모르고 팩트를 흘리거나 적당히 훈수를 두는 이들이 있다.
은우는 여가 시간 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아이템 목록에서 찾았다. 크게 게임기, 담배, 술, 커피, 책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캐릭터 성향에 따라 효과도 다를 것 같네요.”
흡연가라는 성질이 붙었다면 담배를 좋아할 것이고, 애주가라는 성질이 있다면 술을 사랑할 거다. 커피나 책도 마찬가지다.
“술이랑 담배는 교환해야 하니 안 되고, 책이랑 게임기 정도만 가능하겠습니다.”
술이랑 담배, 커피는 기호품이라 꽤 비싼 값을 쳐주었다. 식량과 약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제법 짭짤하다 소리는 들을 수 있는 거다.
자재 하나하나가 아까운 초기엔 허투루 사용하기 아쉽다.
“슬픔은 일단 두고 보겠습니다.”
능력치 저하 같은 페널티가 아직까진 눈에 띄지 않으니 두고 봐도 될 것이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면 그땐 어떻게든 방도를 찾아야겠지만.
은우는 일이 끝난 캐릭터들에게 새로운 일거리를 주며 슬슬 낮 탐색을 준비했다. 자던 에이버리가 깨면 그때부터 일 시작이다.
그는 깬 이에게 새로운 일을 맡기고, 밤새 경비를 섰던 제이콥을 재웠다. 그리곤 밤새 푹 잔 콜린을 낮 탐색에 내보냈다. 밤 탐색처럼 꼭 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하면 좋은 행위였다.
“다시 일인칭 하겠습니다.”
물론 보급품을 추가로 얻을 수 있는 대가 또한 있다. 일단 캐릭터들의 피로가 더 빨리 쌓이고, 방문 이벤트를 수락하기 까다로워진다.
거기에 기본적으로 낮 탐색 자체가 위험했다. 맨 처음을 제외하곤 은우조차 낮 탐색에서 삼인칭을 써 본 적 없을 정도였다.
“3차 대전답게 기계가 참 많습니다.”
그도 그럴 게, 연합군과 기간군이 두고 간 기계가 너무 많았다. 민간인조차 섬멸 대상에 넣어 버린 망할 기계들이 말이다.
“잘 피해서 갑시다.”
삼인칭으로 하면 세세한 컨트롤이 어렵다 보니 사망 가능성이 너무 올라갔다. 일인칭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지만, 적어도 삼인칭보단 나았다.
은우는 이 순간에도 피난처 쪽 캐릭터들을 조작하며 살금살금 백화점에 진입했다. 어제 미처 다 못 가져온 물건들을 가져갈 셈이었다.
“으아아악!”
백화점 쪽에서 여성의 비명이 퍼져 나왔다. 이어지는 요란한 쇳소리는 아무리 봐도 기계의 것이다.
게임 시작한 지 열흘째도 되지 않아서 그런가, 아직도 기계에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이벤트가 벌어지곤 했다.
물론 저 이벤트의 경우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기계가 사람을 죽이는 속도가 너무 빨라 구해 주고 말고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치는 건 다치는 대로 해 줄 게 없고.
그러나 저것을 토대로 기계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것을 파괴할 수는 있었다. 도시 전체까진 아니더라도 탐색 맵의 경우 그 건물과 주변 거리 일부까진 구현해 준 덕이다.
기실 기계의 존재는 플레이어에게도 조심스러운 플레이를 요구하므로, 될 수 있으면 없애 두는 게 좋긴 했다.
“시간도 남으니 기계까지 제거하고 복귀하겠습니다.”
낮 수색이라고 해도 무한대까지 가능하진 않다. 캐릭터의 피로도도 감안해야 하고, 한 지역을 다녀오면 시간이 얼마 남아 있든 더 이상의 수색이 불가능해진다. 될 수 있으면 그 맵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 이익을 얻고 가는 게 맞았다.
은우는 낑낑거리며 백화점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의 본래 육체였다면 아무런 문제 없었겠지만, 캐릭터의 제한된 능력치는 이것마저 힘들게 했다. 그나마 신장이 커진 게 다행이었다.
지잉.
투두두두두두!
“이런.”
물론 체구가 커져서 기계에게 잘 들킨다는 단점도 있긴 하다. 은우는 재빨리 아래층으로 미끄러졌다.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곳은 벌집이 되어 버린 채다. 백화점 옥상에 설치된 기계가 한 짓이다.
“다들 태양광으로 움직여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3차 대전이면서 태양광 기계를 쓴다? 루삥뽕삥뽕
─게임이니까 봐주자
─밤까지 움직였음 우리 다 죽엇어;;
─우리가 해야하니까 봐주자
─ㅋㅋㅋㅋ이거다!
낮 탐색이 밤 탐색보다 위험한 이유는 태양이 떠올라 있는 낮에만 작동해서다. 과연 3차 대전에 쓰일 기술력이 이런 것에 그칠까마는, 그건 게임적 허용으로 넘어갈 수 있다.
나중에 개방되는 지역은 스나이퍼들도 있다는데, 그건 잘 모르겠다.
어찌 됐건 그가 당면한 상황은 이것이다. 은우는 기계가 머리를 돌리는 때에 맞춰 재빨리 기계에 접근했다.
그런 다음 하는 것은 4일 차에 얻었던 재머다. 4초간의 로딩 끝에 기계가 곧바로 다운되었다.
“위험성에 비하면 제거가 참 쉽다 싶습니다.”
─어려우면 우리가 죽잖아요...
─비수들은 쉬운것밖에 못함
─파밍 생존겜에서 적까지 강하며 못해먹지
“그건 그렇네요.”
걸리는 즉시 웬만하면 죽음이어서인가. 기계를 해킹하는 데 성공하면 그것을 분해해 대량의 자재를 얻을 수 있다. 작업대, 온실 등 중요한 물품들을 만들 때 필요한 재료다.
“이걸로 온실도 제작할 수 있겠습니다.”
─커어
─온실 딱 대
─킹재
─와 완전 금광산이네;;
물론 아무리 자재가 좋아도 우선순위가 더 높은 물건은 있기 마련이다. 이미 그런 것들만 골라 챙겨 온 후라, 은우는 밤을 기약했다.
“으으…….”
“누, 누나아아.”
문득 소년의 울음소리와.
『계십니까?』
그가 띄워 둔 피난처 쪽 입구의 방문객 목소리가 겹쳤다.
소년은 방금 은우가 구할 수 없었던 여인의 일행 같고, 피난처의 방문객은 나이 지긋한 노인이다.
“목소리로 보아 아주 어린 것 같진 않으니 할아버님부터 일 처리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노인공경이 우선이다 이거야
─유교국on
─노인우대
더구나 달리 도움 요청 이벤트라고도 부르는 방문 이벤트는 이미 겪어 본 적 있다.
기타 손익을 제외하고 설명한다면, 그냥 캐릭터 하나를 외근 보내는 것에 가깝다. 다만 구호물자를 발견했다며 그것을 획득하러 가자거나 도움을 대가로 무언가를 돌려주는 등 이익을 볼 때도 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그렇지만 도움을 청할 데가 달리 없었어요. 손녀가 놀러 온 채로 전쟁이 터져서……. 그런데 손녀가 많이 아파요. 어제부터 고열이 나서 떨어지질 않네요. 괜찮다면 약을 나눠 주지 않겠어요?
거절│고민할 시간이 필요해│수락』
─ㅇㄴ
─아,,,,
─약은 좀 에반대
─선넘네
─근데 손녀 살리자고 여기까지 오신거임?ㅠ
─기계 피해서 여기까지ㅠㅠ
약은 귀한 물품이다. 자원이 부족한 초반에는 다량의 자재 및 기타 물품과 교환할 수 있고, 중후반에는 그 자체만으로 가치를 가지니까.
“음.”
초반 자원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위급 상황을 대비한 약을 거의 처분한 상태다. 주면 정말 약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시청자들도 이건 줘야 한다, 말아야 한다 말이 많다.
“결정하기 전에 아이도 한번 보겠습니다.”
은우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빠르게 넘어갔다. 쓰러져서 끙끙대는 여인을 두고 남자애가 울고 있었다. 키도, 덩치도 꽤 커서 아이보단 성인에 가깝지 않나 싶다.
“외국인은… 나이를 잘 모르겠네요.”
─ㅋㅋㅋㅋㅋㅇㅈ 외국인들 나이 알기 어려움
─ㅋㅋㅋㅋㅋㅋㅋ성인인줄 알앗는데 맨날 애야ㅋㅋ
─한국인들도 나이 알기 어렵다.
─가시면 안 될 텐데...
그는 일단 그들에게 다가갔다. 일부 시청자들이 말리려 했지만, 상황을 모르는 자, 알지만 ‘ㄹㅇㅋㅋ’만 치는 이들로 인해 해당 충고가 밀려났다.
“머, 먹을 걸 구하려 왔는데…….”
“호, 혹시 붕대가 있으시면 나눠 주실 수 있나요? 상처가 너무 커서…….”
그리고 이벤트가 발동됐다.
『우리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나왔어요. 위험한 건 알지만, 너무 배가 고팠어요. 밤은 강도들이 많아 일부러 낮에 나왔는데, 이런 일을 당하게 될 줄이야……. 당신에게 자비심과, 약간의 여유가 있다면 우리에게 붕대를 나눠 주지 않겠어요?
거절│고민할 시간이 필요해│수락』
약에 이어서 붕대까지 추가로 털릴 대위기였다.
“이건, 좀 선택하기 까다롭네요.”
은우는 잠시 세계를 멈추고 그가 가진 약의 수량을 떠올렸다. 역시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1개밖에 없다. 심지어 백화점 수색 여부까지 따져서 1개다.
어제 백화점의 수색 가능 지점은 다 수색했고, 우선순위를 결정해 가져갈 순번만 정해 둔 채이니. 백화점에선 약이 없었다.
그나마 붕대는 있었지만, 그건 애초부터 여유분이 없었다. 오늘 가져갈 붕대가 그의 여유분이 될 예정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여유분을 더 남길 걸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는 건 그도 알고, 시청자들도 알았다.
실제로 그는 첫 번째 트라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손실과 낭비가 최소한이 되게 굴렸다. 앞으로 뭐가 있을지 몰라 불안할 뿐이지, 썩 나쁜 플레이 같진 않았단 말이다.
“이걸 어쩐다.”
냉정히 말해서 은우는 그다지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 선의도 여유가 있을 때나 베푸는 거였다.
“다 나눠 줄 수도 있지만, 그랬다간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물론 아닌 이도 있을 것이다. 선의는 언제 어디서나 튀어나올 수 있는 것이므로.
그렇지만 그는 역시 제 안위 확보가 우선이었다. 전쟁이 끝난다는 설정조차 없는 삶을 살다 보면 성질이 그리 굳어질 수밖에 없다.
“여러분들의 의견도 한번 묻도록 하겠습니다.”
은우는 그의 도덕심을 심판하는 기로에서 한발 물러섰다. 어차피 그는 일관적으로 그의 안위를 챙긴 후 타인을 구제할 사람이니. 이미 정해지다시피 한 답보다는 다른 게 더 궁금했던 것이다.
“투표로 가죠.”
은우는 잠시 세계를 멈춰 두고 망설임 없이 투표를 열었다.
두 사람에게 다 준다, 노부부에게만 준다, 남매에게만 준다, 두 사람에게 다 주지 않는다.
4개의 선택지가 느릿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