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종강 대학생─1학년─의 일과는 보통 둘 중 하나다. 한가롭거나 바쁘거나.
김희수는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알바를 안 하고 애인은 여행 때문에 못 만나니 시간이 넘쳐날 수밖에 없다.
공부? 방학은 놀라고 있는 거지 공부하라고 있는 게 아니다. 개강 후에 치를 대가는 개강한 후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자격증이나 토익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였다면 늘어지도록 잠을 자다가 약속 시간에 맞춰 친구들이랑 놀러 갔을 터. 그러나 그녀는 황금 같은 토요일을 짧게나마 불쾌하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친구는 잘 사귀고 봐야 한다는 진리를 새삼 깨달으며.
“그, 안녕하세요.”
희수는 다리를 꼰 채 그녀 앞에 선 남자를 흘겼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둘 다 키가 더럽게 크다.
사실 누구든 그녀 옆에 선다면 크겠지만─그녀는 147cm였다─, 그 점은 살포시 제쳐 두었다. 김희수는 저가 작은 게 아니라 ‘세상이 큰 것이다’를 신념으로 밀고 사는 사람이었다.
『감정 똘추> 지금이라도 어딘지 말해 주면 안 되냐.』
『나> ㅇ』
『감정 똘추> …….』
『감정 똘추> 제발 살살해.』
『나> ㅇㅋ』
“아, 네. 안녕하세요.”
그녀는 켜 뒀던 채팅 창을 종료하며 대답했다. 못마땅한 기색은 절대 감추지 않았다.
예절에 어긋난 사항이었지만, 알 바 아니었다. 그녀는 게임할 때 부모님 안부도 물어볼 수 있는 K국민이었다.
예의는 소중한 사람이나 중요한 순간일 때, 혹은 완전 초면일 때만 발동하면 그만이다.
앞에 있는 성가신 남자한텐 갖출 필요 없었다. 적어도 그녀의 기준에선 그랬다. 서은우조차 제 형에게 애도를 표할지언정 그녀에게 뭐라 하지 않을 거다. 이게 그녀 성격인 걸 알고 있으니까.
“…제 동생이, 신세를 많이 졌다고 들었습니다.”
“아니에요. 제 ‘친구’인데요.”
그녀는 친구란 단어에 강세를 주며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커피 잔을 잡았다. 그러자 서은우의 형이란 작자가 고개를 수그리며 머그잔을 매만졌다. 소극적인 자세다.
희수는 그걸 보며 혀를 찼다. 어째 키 빼고 닮은 게 없다. 서은우, 그 새끼면 저딴 부분에 절대 위축되지 않았을 거다.
“제가, 오늘 뵙고자 했던 건…….”
서은우의 구제할 길 없는 형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입니다. 너무 늦어졌지만…….”
저 말 할 때도 고개 내리고 있었으면 열받았을 거다.
“아, 네.”
그렇다고 지금 안 받은 건 아니지만.
김희수는 아이스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얼음 하나를 으득으득 깨물면 그나마 욱하는 성질이 덜해졌다.
서은우 그 머저리가 살살해 달랬으니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간 은우가… 집에서 많이 홀대를 받았습니다.”
“홀대요.”
근데 저걸 보고 살살이 되겠냐?
희수는 그의 단어 선택을 보며 입속 얼음을 빠득 사리물었다. 얼음이 부서져 나가며 살벌한 소리를 냈다.
“전 들으면서 학대라고 생각했는데, 저희 의견이 좀 다른가 봐요.”
상대방 얼굴이 창백해졌다. 안 그래도 유약한 상판이 희멀겋게 되자 더욱 아파 보였지만, 그녀는 별달리 양심에 찔리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혼자 밥해 먹게 만들고, 병원 다니는 것도 신경 안 써 주고, 성인이 되자마자 지원을 딱 끊어 버리고. 방치의 끝판왕을 달린 가족을 어떻게 홀대란 말로 끝낼 수 있는가?
그건 학대였다. 하물며 형제 둘 다에게 그렇게 한 거면 몰라. 한쪽에겐 사랑을 쏟아부으면서 둘째는 방관한 사실은 더욱 악질이다.
형 쪽에겐 그나마 죄가 덜했지만, 희수가 보기엔 ‘덜’한 거지 ‘없’는 게 아니었다. 무지도 때론 죄다.
“학대란 말도… 틀리진 않습니다. 아뇨, 학대가 맞습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서은우의 멍청한 형은 인정했다. 그나마 죄를 인정할 줄 아는 점에서 좁쌀만큼 평가가 나아졌다.
“그래서 더욱…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서은우의 짜증 나는 형이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희수는 그걸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서은우, 그 자식보다 7살이나 많으면 그녀에게도 7살 많은 셈이나, 알 반가 그게?
“변명처럼 들리시겠지만, 동생이 그런 상황에 처했는지 정말 몰랐습니다. 깨달았을 땐 너무 늦었고요. 그래도… 친구분 덕분에 동생이 버틸 수 있었다고, 그러더라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동생을 그간 지탱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가 거듭 감사를 보내 왔다. 역시나 그녀에겐 별로 와닿지 않았다. 안 하는 것보단 낫긴 한데, 그래도 변명인 걸 알면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제 와서 무슨 면목으로 이런 말을 하느냐 생각하실 수 있지만, 꼭 감사드리고 싶었습니다.”
서은우의 사람 열받게 하는 형은 그것으로 말을 간단히 마무리했다. 잠깐 주어진 호흡 시간에 희수는 귀 옆머리를 쓱 밀어 넘겼다.
“잘 아시네요. 이제 와서 무슨 면목으로 이러냐 생각할 수 있다는 거.”
“…….”
저 작자가 한 말을 뒤집어 볼까. 그녀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단 건, 그녀가 없었을 때 버틸 수 없었단 소리가 된다. 그녀가 지탱하지 않았으면 무너졌을 거란 이야기로 변한다.
종합하자면 그런 거다. 지금 저, 미래가 암담했으면 하는 남자는 애 하나를 망쳐 버릴 뻔한 그 자신의 죄를 타인을 통해서 겨우 모면했다는 게 된다. 그래 놓고 말 하나로 땜빵하고 있는 거고.
“하.”
김희수는 머리카락을 다시 쓸어 넘겼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그녀는 그 말을 참 좋아했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형을 용서하기로 한 서은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전, 당사자가 마무리한 일 가지고 왈가불가할 생각 없어요.”
그렇지만 본인이 넘어가겠다는데 그녀가 어떻게 뭐라고 하겠는가? 답답하긴 하지만, 은우 그 자식이 결정한 일이다. 친구라고 해도 명백한 타인인 그녀가 뭐라 할 문제는 아니었다.
하물며 서은우는 아닌 척 외로운 걸 지독하게 싫어하는 녀석이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우군─케바케지만─인 가족을 버리긴 힘들 터였다.
“별개로 전 당신이 싫어요.”
그러나 결정에 대한 존중과 별개로 그녀까지 서은우의 고쳐 쓰는 게 아닌 형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다.
“당신이 나한테 감사하고 걔한테 미안해한다 해서 그 새… 알 같은 녀석이 아파했던 게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미래는 나아지게 할 수 있어도 과거는 바꾸지 못한다.
서은우는 앞으로의 일로 그걸 덮으려 한 모양이지만, 저딴 존재와 아무런 유대 관계도 없는─처음부터 생길 수 없게 부서져 버린─그녀는 그럴 수 없다. 그럴 생각도 없다.
빗물 속에서 우두커니 웅크리고 있던 녀석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영원히 그러지 않을 거다.
“내가 서은우, 그놈 곁에 있어 줬던 건 그 녀석이 내 친구여서지 당신네가 박대한 불쌍한 애라서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나한테 동생을 지탱해 줘서 고맙다느니 뭐라느니 하지 마세요. 가증스럽고 짜증 나요.”
“…죄송합니다.”
“미안해하지도 마세요. 당신 사과를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걔니까.”
“…….”
희수는 열불 나려는 속을 냉커피로 달랬다.
“나한테 감사할 시간에 걔한테나 잘하세요. 당신에 대한 내 호감도는 마이너스에서 평생 벗어나지 않을 텐데, 그 시간에 동생이나 한번 밥 먹이란 소립니다. 괜히 예의 지킨다, 은혜 갚는다 하면서 시간 낭비 하지 말고.”
“…네.”
“오늘 만남을 수락한 건 이 말 하려고 한 거였어요. 그러니까 다음부턴 절대 안 마주쳤으면 좋겠네요.”
솔직히 말해서 과거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꺼내, 네 동생이 겪은 고생만큼 너도 뒈지게 아파 보라는 심술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랬다간 당장 그녀가 서은우한테 탈탈 털릴 거다.
대상이 아무리 가족이라도 함부로 제 얘기 늘어놓는 걸 좋아할 성격은 아니니까. 진짜 호구 새끼다.
그렇기에 그녀는 성질을 눌러 죽이며 그것으로 말을 마쳤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지금 소비한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아까웠다.
“…안 가세요?”
좀 꺼져. 커피 편하게 마실 거야. 희수는 그런 심정을 담아 서은우의 뻔뻔한 형을 보았다. 그렇지만 상대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결연한 눈까지 했다.
희수가 황당함마저 느낄 무렵, 형이란 작자가 입을 열었다.
“뭘 하든 저를 싫어하실 거라면 염치 불고하고 몇 개만 더 묻고 가겠습니다.”
안 닮았기는 개뿔, 형제 그 자체였다.
희수의 얼굴이 구겨졌다.
▣ 144. 세상조차 알지 못하도록
“얼굴이 조금 창백한데.”
오현의 지적을 은우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마른세수를 했다.
오현 관장과 만나기로 한 날이 형과 희수의 만남과 겹쳤을 때부터 불안했다. 그런데 이 문자는 뭔가.
『희수> 네 형님이 예전 일들 묻는데 어디까지 발설 가능?』
예전 일이라면… 전생을 논하는 건 아닐 테다. 둘 다 모르니까.
그렇다면 역시 학창 시절인가? 그게 궁금했다면 그냥 그에게 물어도 됐을 텐데.
물론 그의 입을 통하면 ‘괜찮았다’, ‘견딜 만했다’라는 말만 나오긴 할 거다. 전생 자각 전은 기억이 아예 없고, 후는 말할 게 없으니 당연하다.
형도 그걸 알고 그와 시간을 함께했던 친구 쪽을 노린 거겠지.
그렇지만 상대는 희수였다. 팩트로 사람을 지독하게 후려 팰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다.
은우는 다시금 얼굴을 쓸었다. 그가 웬만해서 노심초사하게 되는 일이 없는데, 이상하게 가족이 관련되면 이렇게 된다. 이번엔 하나뿐인 친구도 껴 있긴 하지만.
“무슨 일 있나?”
“…아마.”
말해도 별로 상관은 없지만, 그 과정에서 형은 얼마나 상처 입을까. 그렇지만 그가 먼저 권한 것도 아니고, 형이 먼저 나서서 알아내려는 건데 그가 굳이 막아야 할까?
대상이 형이라면 과거쯤이야 얼마든지 말해 줄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알려 주는 것도 별로 상관없고.
그 일을 듣는 형 또한 그렇다. 상처 입는 걸 각오한 것도 형이고, 그 선택으로 상처 입는 것도 형이다. 그가 나서서 막을 필요는 없었다. 형은 그의 보호가 필요한 나이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마음이란 게 그런 식으로 굴러가지 않았다. 때로는 가슴이 따스해지면서도, 이럴 땐 가슴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욱신거려서.
가족이란 게 생기고 난 후 처음 겪는 현상들이 너무 많다.
은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키보드를 꾹꾹 눌렀다. 검을 내지를 때는 매 확신이 생기건만, 감정적 일에선 매번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이게 옳은 선택인지 알 수가 없다.
『나> 네 마음대로 해.』
그럼에도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남은 건 결과뿐이다.
“괜찮은 건가?”
“예,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 녀석이 최대한 부드럽게 말해 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느니 하늘이 두 쪽 나는 게 빠르겠지.
형이 그의 편이 된 것보다도 훨씬 전에 그의 편이었던 녀석이기에 절대 안 그럴 거다. 탓하기엔 형의 자업자득이니, 뭐.
『희수> 그때 얘기도 한다?』
그때 얘기라면… 아, 그때인가.
은우는 비 내리던 그날을 잠깐 떠올렸다가 마저 문자를 찍었다.
『나> 그래.』
희수가 형에게 얼마나 양아치같이 굴든, 역시 그는 그녀를 탓할 수 없다.
“다 쉰 듯하니 대련이나 마저 잇죠.”
은우는 지친 얼굴로 오현 관장에게나 집중하기로 했다. 이제 일은 그의 손을 떠났다.
* * *
“허락 왔네요.”
김희수는 ‘그래.’라는 간단한 답장을 보며 노트를 껐다. 저 답장이 오는 동안 아무 대화도 없이 음료만 마셨더니 잔의 커피는 다 떨어진 상태다.
“제가 사겠습니다.”
빈 잔에서 얼음만 아작아작 씹고 있으니 서은우의 염치없는 형이 말을 붙였다.
“저, 돈 있어요.”
‘당신한테 신세 지기도 싫고 내 돈 있는데 너한테 얻어먹을 이유도 없으며 네 돈으로 산 걸 입에 담기도 싫다.’라는 말을 그녀는 다섯 글자로 축약하는 데 성공했다.
서은우의 염치는 없지만 주제는 조금 아는 형이 알겠다며 수그러들었다.
희수는 음료를 새로 시키고 돌아왔다. 앉은 자리에서 시켜도 됐지만, 열불 뻗쳐서 그냥 직접 시키고 왔다. 냉침 밀크티의 향이 얕게 올라왔다.
“그래서, 뭐가 궁금하셨댔죠?”
“은우가… 학창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싶습니다.”
“진짜 대놓고 염치없게 구시네.”
“어차피 마이너스일 거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녀는 서은우의 뻔뻔한 형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은우 그 자식보다 더 철면피다. 그놈은 공과 사가 철저한데 그 사가 거의 없는 타입이면, 이 사람은 그냥 철면피다.
“허락도 받았겠다, 말씀 못 드릴 건 없죠. 근데 정확히 뭐가 궁금하신 건데요.”
다람쥐 쳇바퀴처럼 똑같이 굴러간 일상을 전부 기억하진 않는다. 특별히 기억나는 거면 몰라도.
그렇지만 그걸 그녀가 먼저 나서서 설명해 주고 싶진 않았다. 희수는 다리를 반대로 꼬며 밀크티를 호록 마셨다.
“희수 씨 말고 다른 친구는…….”
“없어요.”
초중학교 땐 그래도 좀 있었는데 중학교 말에 다 말아먹었다. 솔직히 희수도 그때 거의 떨어져 나갈 뻔했으니 말 다한 거였다.
녀석이 학교 쓰레기장에서 혼자 웅크리고 있는 걸 보지만 않았더라도. 아니, 녀석이 제발 남아 있어 달란 눈만 하지 않았어도 그들의 관계는 그때 쫑 났을 거다.
“어쩌다… 그렇게 됐습니까?”
“중학교 3학년 땐가, 걔 머리가 회까닥 돌았잖아요. 아, 형님은 모르시려나? 동생이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없으셨을 테니까.”
어차피 허락받은 거, 희수는 마음껏 상처를 후볐다.
은우 그놈은 절대 그러지 않을 테니, 그녀라도 후벼 팔 심산이었다. 친구로서 할 만한 보복이자 오롯이 그녀만의 심술이었다.
“왜…….”
“난들 알아요?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학교에선 일 없었으니까 집에서 난 걸 텐데,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절친이래 봤자 결국 친구에 불과한데.”
다만 안 그래도 예민했던 성격이 더욱 까다로워진 건 확실했다.
항상 누군가가 곁에 있어 주길 바라더니 갑자기 사람을 멀리했고, 싸움 한 번 않던 애가 얼굴에 상처를 두세 개 달고 왔다. 성적 신경 쓰던 녀석이 백지 시험지를 내 버린 시점에서 증거는 더욱 명백했다.
당시 녀석에겐 무슨 일이 있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담탱이가 캐물어도 침묵, 기껏 정병 다녀 보라고 설득했더니 의사한테도 침묵, 털어놓을 친구라도 사귀어 보라고 하면 거부. 모르죠, 아직까진.”
물어보는 걸 보면 형님한테도 말 안 한 게 분명하다. 하긴 그놈은 정작 중요한 것에서 입을 꾹 다무는 나쁜 버릇이 있으니 납득 간다.
“…희수 씨한테도 말 안 했나요?”
“그쪽은 가족인데도 못 들으셨나 봐요?”
뾰족하게 일침을 놔 주면 수그러든다. 희수는 밀크티를 쪽 빨았다.
그래도 물어봤으니 대답은 해 줘야겠지.
그녀의 머리가 옛날 일을 살짝 더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쏴아아 하고 쏟아지던 순간의 일이다.
“진짜 연 끊어야 하나.”
“누구? 아, 서은우?”
“어.”
그건 끝나지 않는 여름의 더위에 비가 오는데도 유난히 후덥지근하던 날의 일이었다.
빗물을 머금은 공기는 습습하고 하늘은 눅눅해서 기분이 더욱 저조해지는 그런 날.
“걔, 갈수록 음침해져 가더라.”
“저번에 강유리한테 하는 거 봤어? 진짜 별것도 아닌 거에…….”
“잘생기긴 했는데, 애가 너무 까칠해.”
“분위기도 좀 무섭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일단 친구였다. 그 당시 그녀는 친구들의 말에 눈매를 세모꼴로 세웠다.
“까도 내가 깐다.”
“네네.”
“서은우 누님한테 동생 험담해서 죄송합니다아.”
“뒈진다.”
다들 중학교 와서 사귄 친구지만, 서은우는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였다. 운명이 점지해 준 우정인지 초2 때 빼고는 반도 다 같았다. 중학교에 입학한 지 3년째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새끼 시절에는 그녀보다 키가 작아서 손도 잡고 다녔던 터라, 중학교 와서 갈라진 초등 친구 중 유일하게 아직 친구로 남아 있다.
아니, 기억도 안 나는 어린 날 때문은 아니다. 그냥 덩치가 커진 지금도 그녀만 보면 반색하며 따라오는 게 퍽 안타까워서일 거다.
“애정 결핍자 새끼…….”
관심이 고픈 주제에 관심을 달라고 말도 안 하는 머저리가 안쓰러워서 그냥 계속 친구로 남아 주고 있는 거다.
단 한 번도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는 게 불쌍해서, 단 한 번도 가족을 보여 줄 수 없던 게 가여워서. 그래서.
“김희수, 어디 가! 너, 오늘 당번이잖아!”
“아, 미친!”
김희수는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고성을 질렀다. 다른 학교는 다 기계가 해 주는데 이 학교만 학생들의 책임감을 기르겠답시고 옛날 방식을 채택했다. 대체로 분리수거된 쓰레기를 쓰레기장까지 옮기는 일 따위였다.
“염병! 나, 간다!”
“엉.”
“내일 봐.”
하필 비 오는 날 걸릴 게 뭐람! 그녀는 온갖 욕설로 학교를 씹으며 쓰레기봉투를 챙겼다. 분리수거는 그나마 자동이라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든 채 끙끙대며 내려왔다. 괜히 친구들을 먼저 보냈다는 후회가 들었다. 키가 작은 그녀에겐 쓰레기봉투가 너무 컸다.
“아, 이 새낀 어디 갔어.”
하다못해 연 끊을까 말까 고민 중인 서은우라도 절실했다. 맺고 끊음이 확실한 그녀지만, 아픈 손가락처럼 많이 봐주게 되는 친구 놈은 오늘도 코빼기 한 번 보이지 않았다. 분명 수업은 같이 듣는데 정작 찾으면 없다.
“진짜 버려?”
김희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쓰레기장으로 나갔다. 우산을 어깨와 목으로 붙잡고 끙끙대며 향하면 허옇고 동그란 뭔가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쓰레기 버리는 통이고, 하나는…….
“아, 시발! 깜짝아!”
사람이었다. 그것도 아는 얼굴.
“겁나 놀랐네!”
하얀 몸체는 흰 셔츠였고, 버리는 구멍이라고 생각했던 검정색 동그라미는 정수리였다. 희수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짜 쓰레기통에 쓰레기봉투를 쑤셔 박는 것으로 다독였다.
“너, 왜 이러고 있냐.”
요즘 참 개같이 구는 친구지만, 그래도 시간이 정이었다. 이번에도 외면당하면 얄짤 없이 잘라 버릴 생각으로 그녀는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아, 그래. 연 끊자 이거지?”
역시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우산을 제대로 잡았다.
“됐다.”
이젠 더 이상 신경 안 쓰리라.
희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노트를 꺼냈다. 그리곤 연락처에 들어가 서은우란 이름을 지웠다. 톡방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걸음이 쓰레기장과 천천히 멀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열이 받았다. 문자를 삭제할 때 봤던 일방적인 메시지를 곱씹다 인 화였다.
희수의 몸이 틀어졌다. 그러곤 서은우의 앞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손이 멱살을 잡았다.
“야. 내가 생각해 봤는데, 적어도 이유는 듣고 끊어야겠다. 내 밤잠은 편안해야 하지 않겠냐.”
젖은 셔츠를 붙잡고 끌어올릴 때, 서은우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니, 손목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옷깃을 잡았다. 살짝 스쳤던 피부가 시렸다.
그리고 얼굴이 드디어 들렸다. 강제로 끌어 올려진 얼굴은 빗방울에 흠뻑 젖어 꼭 오열한 사람처럼 뺨에 물길을 잔뜩 내고 있었다.
그 순간의 녀석이 정말 울고 있었는지, 혹은 빗물일 뿐인지 세상조차 알지 못하도록.
세차게 내리는 비가 그녀가 들고 있던 우산에 막혀 순간의 고요를 자아냈다. 빗소리가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