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뭉게구름과 함께 폭음은 멎어 갔다. 은우는 얼굴을 보호하던 팔뚝을 내렸다.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투명한 막 같은 게 그를 보호하고 있다.
혹시 성배 효과인가? 은우는 미미한 빛을 발하는 금잔을 눈에 한 번 담고, 다음으로 려영과 려화의 안위를 확인했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려영은 머리와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려화는 먼지만 조금 뒤집어쓴 상태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겉만 보면 부상의 정도는 덜 심해 보인다. 그렇지만 알맹이까지 그럴까?
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려영의 가슴팍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숨이 멎었다.
“죽었네요.”
─ㄹㅇ?
─ㅇㅇ 죽엇음
─이걸 바로 아네
“멍청한 놈.”
려화는 평소처럼 건조한 얼굴이었다. 다만 그녀는 폭발로부터 최대한 보호하겠다는 듯 그녀를 뒤덮은 동생을 밀어내지 않았다. 까만 눈동자가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어졌다.
“폭탄은 지긋지긋해.”
그것은 눈과 옛 파트너를 잃게 만들었던 과거에 기반한 말일 것이라.
“판도라.”
“희망이 필요한가?”
다시 생겨난 파트너가 던진 질문에 그녀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곤 얕은 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내놔, 희망.”
“따르지.”
판도라의 항아리에서 흰 연무가, 그것보단 밀도가 높아서 꼭 액체처럼 보이는 것이 흘러내렸다. 려영의 몸이 녹색 빛에 휘감기며 천천히 치유되기 시작했다.
항아리에 금이 갔다.
“려영!”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간장이 황급히 뛰어 들어오고, 판도라는 액체를 막야가 부서졌던 자리에도 흘렸다. 허공에 이울었던 빛무리가 다시 모이며 막야가 재생되었다.
흰 액체는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항아리의 금이 더 심해졌다.
“재앙도, 희망도 전부 나를 떠나갔군.”
판도라의 항아리는 고뇌하는 자세를 했다가 손을 펼쳤다.
“그렇지만 인간은 그 자체로 재앙이고 희망이지.”
그것의 금이 매우 심해졌다.
“그렇기에 내가 없어도, 너흰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깨졌다.
재앙과 희망을 담았던 항아리의 끝이었다.
▣ 142. 아무리 봐도 직격타
“리하스 녀석에게 복수하고 싶지만… 이놈을 두고 갈 순 없겠지.”
려화는 동생을 바닥에 편히 눕히며 말을 걸어왔다. 치료를 받았음에도 려영은 기절 상태에서 깨어나질 못했다.
그렇지만 은우는 그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살아났다.
부활이었다.
일어날 수 없는, 진리를 거스르는 일에 은우의 손이 목 부근으로 올라갔다. 그것은 목의 뒤를 쓸다가도 그 앞으로 넘어와 조르듯 목을 매만진다.
「거래하자.」
구더기의 무덤이 설핏 망막을 스쳐 지나갔다. 다음을 속삭이던 죽음이었다.
“너, 교주에게 갈 거지?”
살얼음처럼 얇은 상념을 려화의 목소리가 깼다. 은우는 가라앉은 눈으로 주어진 선택지를 담았다.
『1. 당연한 소리를.
2. 응당 그럴 것이다.
3. 물을 필요도 없다.』
“당연한 소리를.”
낮아진 음성은 숨소리와 상당히 섞여 있다. 붓으로 손끝을 간질이는 목소리다.
그게 꼭 예술 작품의 한 장면 같아 사람들이 잠깐 여운에 잠겼다. 그런 걸 인식할 수 없는 NPC는 곧바로 대답을 내놓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성배를 꼭 가져가라. 교주를 상대하는 데 유용할 거다. 영력은 동생 놈을 통해 내가 계속 보내 주지.”
은우는 그가 쥐고 있는 성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흰빛이 성배를 휘감더니 근처 땅으로 내려서며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사물로 돌아갔던 여실형도 마찬가지였다.
“머리 아파!”
“아주 불쾌한 기분이었어.”
“이 짓거리를 한 놈, 머리를 쪼개 주지.”
“으아! 열받게!”
그의 여실형들이 가장 먼저 떠들고, 눈치 보던 성배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은하성교단을 막는 데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따로 행동해도 되는 겁니까?”
─원래는 안 되는데 쟤네는 유일템이라ㅇㅇ
─6성 애들은 혼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설정임니다
─물론 인위적인 수법으로 잠깐동안 봉인하거나 할 순 잇음
은우는 유약한 얼굴의 성배를 지그시 보다가 목덜미를 쓱 쓸었다. 스토리라면 뭐 어쩌겠나. 데려가는 수밖에.
“그 전에 말풍선이 있으니 말 한 번만 걸고 가죠.”
말풍선 마크는 성배와 려화 둘에게 있었다. 그는 먼저 려화에게 말을 걸었다.
“죽는다면 내가 먼저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머저리처럼 쓰러져 있는 걸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야.”
교주에 대해 정보라도 줄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러진 않았다. 은우는 성배에게도 말을 걸어 보았다.
“정말 다행이에요. 저는 죽기 직전의 사람을 살릴 순 있어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순 없거든요. 그게 가능한 건… 가능성을 재지 않고 무언가의 기적을 바라는 힘, 희망밖에 없죠.”
거기까지 말한 성배는 씁쓸하게 웃었다.
“모두가 저를 귀히 여겨 주지만, 정작 저는 필요한 순간에 여휘님에게 도움이 되지 않네요.”
“희망은 가능성을 바라는 걸 텐데, 좀 달리 해석했나 봅니다.”
─머라고 해야하지, 판도라의 희망은 희망을 실현시켜주는 거에 가까워서ㅋㅋ
─살아있길 바란다는 희망 > 살아있다 이케 해주는 거라 그래요
─머임? 그러면 돈 많았음 조켓다 빌면 돈 생김?
─ㅇㅇ 돈생김
─근데 6성 여실형을 그딴 거에 쓰겟냐고ㅋㅋㅋ
“그렇군요.”
은우는 방안을 더 둘러보았다. 특별히 떠오르는 건 없다. 이 방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끝났다.
“이제 리하스를 족치러 가 봅시다.”
그의 발이 방 바깥, 통로로 향했다. 다행히도 리하스는 아직 바깥에 있었다. 혹시 리하스 전은 스킵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끈질긴 놈, 아직도 살아 있다니!”
“붙을 수 있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아ㅋㅋㅋㅋㅋ복수 못참지ㅋㅋㅋ
─리하스 도망쳐!
─복수좌ㅋㅋㅋㅋ
─켄이라면 도망가도 잡아서 족칠듯
─ㅋㅋㅋㅋㅋㅇㅈㅋㅋㅋㅋ
려영과 한판 붙기라도 했는지 리하스의 옷차림은 상당히 너덜너덜했다. 물론 그 오기는 꺾이지 않아 은우는 녀석을 한 번 더 상대해 줘야 했다.
려영이랑 싸웠을 텐데도 풀피 파티가 상대로 나왔다. 잠깐 새에 회복을 한 건지, 아예 새 녀석들을 꺼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든 그가 패배할 이유도 없었다.
“내가, 또다시…….”
“마지막 전이라고 다들 강하게 나오긴 하네요.”
─그 강하게 나온 리하스를 뚜드려 패신 분이 할말...?
─근접이 많으니까 리하스 쉽게 뚜까패네
─ㄲㅂ 리하스 뚝배기 깨야하는데;;
은우는 패배한 리하스를 보다가 나머지 진행이나 하려 했다. 졸졸 따라오던 성배가 퍼뜩 입을 열었다.
“내가 생을 해치는 힘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성배는 굴욕적으로 패배한 리하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래도 저는 저 사람을 용서해야겠지요.”
그는 손을 딱 붙이더니 기도문을 외웠다. 많이 소비되었던 영력이 단번에 들어찼다. 전투에서 방어막을 단속적으로 쳐주기에 그게 다인 줄 알았더니 이런 효과도 있던 모양이다.
『1.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2. 려영과 리하스가 싸웠어?』
“려영과 리하스가 싸웠습니까.”
“…여휘님은 은하성교단을 막기 위해 협회와 함께 이곳으로 들어오셨어요. 켄 님이 진입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원하기 위해 다른 분들보다 걸음을 빨리하셨고요. 그 과정에서 리하스와 부딪쳤는데…….”
성배는 한숨을 내쉬었다.
“패배할 위기에 처하자 리하스가 외치더군요. 네놈이 날 이긴다 해도 네놈이 아끼는 남매는 못 지킬 거라고. 자신이 폭탄을 주고 왔다고.”
려영이 갑자기 끼어들어 열쇠 뭉치를 걷어찰 수 있었던 연유였다. 리하스가 멍청하게 술술 다 불었나 보다. 기실 조금만 늦었어도 다 휘말려서 죽었을 테지만.
“그래도 일이 좋게 끝나서 참 다행이지요.”
좋게 끝난 것 치고 성배의 우울함은 가시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성배의 주인도 아니거니와 시스템에게 선택지를 받지 못한 은우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전 솔직히 려영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십오세 이용간데 그럴리가 없잖아욬ㅋ!!
─실제로 한 번 죽긴 해서 할 말 없다ㅋㅋㅋ
─언제 죽었음??
─아까 폭발에 죽은 걸 판도라가 살린 거임
“여실형 피가 0되면 깨지는 시점에서 사람도 충분히 죽을 만하지 않습니까?”
─앗
─어...?
─이렇게 설득이?
─논리왕
은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음 통로로 진입했다. 대체 건물 구조가 어떻게 돼먹은 것인지 텅 빈 홀이 하나 더 나왔다. 커다란 문 앞에는 한 사람이 서 있다.
“하, 무능하기 짝이 없군요. 침입자 하나를 처리하지 못해 여기까지 보내다니.”
이번엔 스왈로센이었다.
“이게 마지막 간부전일 것 같은데, 맞습니까?”
“당신 따위가 그분께 다다르도록 만들 순 없습니다!”
─넹
─얘까지만 하면 이제 최종보스
─스왈로센: 리하스를 깨고 왓나?! 그 녀석은 우리중 최약체지!
─그리고 최강체인 려화도 잡혓다 한다
“다행이네요. 4번째까지 가면 지루할 뻔했는데.”
사천왕, 아니 삼천왕전이라고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루한 건 지루한 거니까.
은우의 손에 레더페이스의 전기톱이 들렸다.
* * *
“그분은… 대업을 이루실 분이다.”
스왈로센은 그리 말하며 주저앉았다. 여실형이 파괴된 상태임에도 그의 눈은 포기를 도통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 가득 찬 건 신앙에 가까운 충성심과 광기로 변질된 충의였다.
“모두가 기피하던 귀신마저 부릴 수 있는 위대한 분이란 말이다……!”
그래서 어쩌란 건지. 은우는 냉랭한 얼굴로 노인의 발악을 들었다.
교주가 귀신을 부릴 수 있다는 건 저들이 귀신을 다룬다는 점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다만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절대적으로 믿어야 할 존재가 되진 않는다.
─나이든 사람이 종교에 빠지면 절대 못 빠져나오지;;
─노인만 그러는 것 같음? 청년들도 똑같음
─종교 자체가 마약이라잖어~
─진짜 사이비 안 빠지게 조심해야해...
─빠지면 저꼴 날까 무서움ㄷㄷ
“대상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판단을 분리할 수 있다면 괜찮습니다.”
은우는 스왈로센이 막고 있던 문을 열어젖혔다. 어두운 공간에 빛이 스며들자 양 옆쪽에서 횃대에 불이 차례로 붙었다. 온몸으로 이곳이 보스방임을 외치고 있다.
정면에는 누군가가 앉은 옥좌가, 그 옆에는 거대한 기계장치가 있다. 기계장치는 꼭 유리로 만든 알에 굵은 전선 다발을 연결한 것 같이 생겼다.
“여기까지 오다니, 재주도 좋구나.”
걸음을 안쪽으로 내디디니 교주가 일어서서 그를 반겨 주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주한 은하성교단의 진짜 교주는 여성이었다. 광조차 나지 않는 흑발을 길게 늘어트리고 새까만 무당 옷을 입고 있다.
이 와중에 려영과 함께 진입했다던 협회의 여휘들은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못하고 있다. 포탈에서 헤매고 있는 모양이다.
“너의 그 무력을 높이 사 마지막으로 제안하마. 나를 따르지 않겠느냐? 하면 네게 끝없는 부와 영광을 주마.”
그녀는 등받이가 천장에 닿을 것처럼 높은 옥좌를 뒤로한 채 말했다. 외모가 워낙 화려하고 아름다운 탓에 시청자들 중에서 배반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장난인 걸 알면서도 배신이란 점 하나에 은우의 신경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성배는 ‘그러지 않을 거죠?’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중이다.
『1. 그런 건 바라지 않아.
2. 순순히 항복하시지.
3. 정말 영양가 없는 제안이네.』
“…정말 영양가 없는 제안인데.”
그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대답했다. 워낙 키가 큰지라 계단 위 옥좌에 앉은 교주를 보는 데 고개를 조금만 들어도 되었다.
성배의 안도 어린 숨소리가 귀를 슬쩍 찔렀다.
“어리석은.”
그러자 교주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게 늘어진 옷자락이 당겨지며 계단 위로 흘러내렸다.
“관대함은 한 번뿐이다. 죽어라!”
그녀가 그리 외친 순간, 교주실의 짙은 그늘 속에서 형형한 눈들이 떠올랐다.
『교주가 승부를 걸어왔다!』
레이드 시작을 알리는 알림 창과 함께 간헐적으로 벼락이 내려꽂힌다.
“보스전이 연달아 나오긴 해도 다 패턴이 다르단 게 마음에 듭니다.”
려화는 단일 근접, 리하스는 파티, 스왈로센은 단일이되 마법 그리고 교주는.
“귀신들이여, 약속의 날이 머지않았다. 하니 그에 맞는 대가를 치러라!”
대량의 잡몹과 마법 공격이었다.
“수행하겠습니다.”
적이 많을 때는 아군을 보호하겠답시고 물러선 것보다 빠르게 적을 처치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하물며 아군이 싸울 수 있는 상태라면.
그런 의미에서 은우는 스패드룬을 잡고 적들을 베어 넘겼다. 나머지 여실형은 뭉쳐서 버티고 있으니 쉽게 죽지 않을 거다.
“뒤질 것 같은 새끼, 바짝바짝 손 들어!”
“이렇게나 멍청한 생물들이 존재할 수 있을 수가.”
“성불하십시오.”
소리만 들어도 잘 버티고 있다. 가끔 들어오는 성배의 방어 스킬과 회복 스킬이 그들의 생존률을 더욱 올려 줄 것이다.
“죽어라.”
은우는 교주가 날리는 반투명한 창을 피해 검으로 휘둘렀다. 귀신의 입을 검날이 통과하면 위에 입힌 대미지가 떠오른다. 날카로운 손톱들이 그를 노리며 쏟아졌다.
그의 허리가 비틀어진 채로 뒤로 젖혀졌다. 머리 위로 팔뚝이 지나가게 팔 위치를 잡고, 역수로 쥐어 검신이 상체 앞으로 가게 하면 앞에서 쏟아진 공격들이 검 등에 맞아 튕겨져 나간다.
비틀어 젖힌 허리는 양옆에서 아슬아슬하게 그의 몸 피해 공격들이 지나가고 있다.
칼자루를 쥔 손이 역수에서 정수로 바뀌며 옆으로 검을 휘둘렀다. 상체를 튕기듯 되돌리며 팔을 휘저으면 적들의 머리가 싸악 베였다. 수가 많은 대신 대부분 체력 바가 맞아 머리를 3대 정도 맞으면 죽어 나간다.
은우의 왼손이 스패드룬을 위로 던졌다. 그의 몸이 화악 틀어지며 정면에서 짓쳐 들던 칼날을 피했다. 뒷짐 지듯 등에 붙어 있던 오른손은 허공에 떠올랐다가 추락하는 검의 칼자루를 붙잡고 아래서 위로 그었다.
그 반동을 거스르지 않고 손이 머리까지 올라가 검신이 등을 가리도록 내려가게 만들면 뒤쪽 공격까지 막을 수 있다.
“광범위 사격.”
스킬 지시와 함께 광선이 은우 정면을 휩쓸었다. 광선의 경로에 있던 귀신 전원은 소멸한 채다.
은우의 스텝이 한 번의 발 옮김과 발목을 비틂으로써 단번에 뒤돌았다. 검로가 뒤에 있던 귀신들을 베어 넘겼다.
반 발짝 뒤로 아슬아슬하게 교주의 벼락이 꽂혔다. 때마침 성배의 방어막이 펼쳐지지 않았다면 타격을 입었을 거다. 물론 알고 피하지 않았다.
“패턴이 다 다른 건 좋은데 쫄 소환 보스는 역시 재미가 없네요.”
─아니 웨이브에서 왜 솔플을 하고 계세요;;
─진짜 미쳣다
─이게 이렇게 깨는 겜이 아닐 텐데
「‘이순간보스마음’ 님이 ‘1,000원’ 투척!
아 단계 매너요;」
슬슬 장내의 쫄들이 다 정리돼 간다. 은우는 계단 위, 교주를 보며 검을 치켜세웠다. 귀신들을 부리느라 상당히 지쳤는지 교주는 기계장치 앞에 주저앉아 있다.
뒤로 보이는 기계장치의 알 부분은 연기로 가득 차 있다. 영혼이란 것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면 저럴까 싶은 연기들의 군집체다.
─지금 저 캡슐 때리셔야함
─전선다발 자르세요
“공략법은 안 알려 주셔도 됩니다.”
어차피 이런 패턴의 보스는 뻔하다. 주기적으로 쫄을 소환하고, 쫄을 다 잡으면 공격할 타이밍을 준다. 여기서 공격 대상은 교주 아니면 교주가 아끼는 것일 테다.
모르고 시작해 봤자 교주한테 대미지가 안 들어가면 다른 걸 공격하면 되니 한 턴만 버리는 셈이다.
은우의 검이 여인과 기계장치를 궤적에 다 넣고 허공을 그었다. 여인에겐 0 대미지가 들어갔지만, 기계장치는 타격을 받았다. 전선 다발 하나가 흔들리더니 두 번 더 치자 끊겨 나갔다.
“안 돼!”
교주가 그 순간 비명을 지르며 귀신들을 더 소환했다. 역시나 생각했던 그 패턴이었다.
“음, 역시 전 근접 단일 보스가 제일 재밌는 것 같습니다.”
─보기도 그게 재밌긴 하지,,,
─마법은 접근만 성공하면 모가지 훅 딸 수 잇어서;;
─근데 그 접근이 어렵잖어
─조용히 해
「‘강남건물주’ 님이 1개월 구독했습니다!
1분 뒤에 20명 뿌릴게요^^7」
─아앗! 구독당해버렷!
─어림도 없지! 당하기 전에 자해!
─세금 대리 상납 못 참지
“강남건물주 님, 오랜만에 뵙네요. 구독 감사합니다.”
조잘거리던 시청자들이 순식간에 구독권으로 시끌벅적해졌다.
은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잡귀신의 공격을 최대한 회피했다. 그의 검은 귀신을 무시한 채 기계장치만 집요하게 노린다.
다행이랄지, 장내의 적을 전부 처치해야만 기계장치를 부술 수 있는 형식이 아니었다.
여인이 그때마다 분노해서 공격해 왔다. 그러나 전선 다발들 덕에 장소는 협소했다. 기계장치로 인해 뒤, 양옆이 거의 막혀 있다시피 한 거다.
포위해 봤자 정면에서 최대 세 명밖에 그를 공격할 수 없다. 비정기적으로 쏟아지는 마법 공격만 피하면 쪽수도 무소용이었다.
은우는 전선 다발들을 밟고 뛰어오르거나 귀신들을 짓밟으며 기계장치 곁에 머물렀다.
죄다 잡몹이라서 신체적 스펙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게, 오히려 스패드룬이 더 낫다는 게 그 광경을 만들어 냈다.
“이거 정말 최종 보스 맞습니까?”
─님이 이상한 거지 쟤 최종보스 맞아요ㅠ
─졸지에 자격의심 당하는 보스
─2페이즈 있어요~
─보스 고생한다ㅠ 켄전 치르느라ㅠ
─2페이즈는 좀 마음에 들어하시려나?
─보스에게 JOY를 표하세요...
그는 숨을 코로 내뱉었다.
“2페이즈는 근접전이라도 됩니까?”
기대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다.
─넹
기대가 생겼을 뿐.
전선 다발을 박차 번개를 피한 그는 잘린 전선을 붙잡고 잡졸들이 그를 때릴 수 없는 위치까지 올라갔다. 그러곤 그대로 기계장치의 윗부분에 매달려 칼을 박았다.
“안 돼애애애!”
찢어질 것 같은 절규와 함께 전선 다발이 전부 잘렸다. 알같이 생긴 유리에 기어코 금이 가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알에 갇혀 있던 영혼들이 바깥으로 우수수 빠져나갔다.
“아아, 불쌍한 것들.”
“안 돼, 안 돼, 안 돼! 내가 어떻게 모은 영들인데!”
성배가 안타까워하고 여인이 비탄에 젖어 비명을 지르는 사이, 영혼들이 휘감고 있던 중심부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창백한 피부의 사내였다. 병원복 사이로 드러난 몸은 앙상하기 그지없다. 뱃가죽이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죽은 게 분명하다.
교주가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약간의 추측이 가능해졌다.
“아, 아아아…….”
여인은 절망한 채로 주저앉았다. 슬픔의 흐느낌은 금세 소름 끼치는 소리로 변하며 검은 기운들을 흘리기 시작한다.
사방으로 흩어지던 영혼들이 그녀에게로 모이기 시작했다.
“감, 히. 그의 부활을, 너 따위가.”
교주 주위로 모여든 영혼은 그녀에게 무언가의 형상을 덧씌우듯 피부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눈가에서부터 비늘처럼 달라붙은 것은 뿔을, 손을 덮은 것은 매의 것처럼 날카로운 손톱 따위를.
저 정도면 려화보다 재밌지 않을까? 은우가 기대를 가질 무렵, 채팅 창이 슬그머니 하나의 진실을 보고했다.
─아 근데 성배가;;
─엌ㅋㅋㅋㅋ맞다ㅋㅋㅋㅋ
─우리한텐 캐리인데 켄넴한텐....
은우가 그것에 뭐라 물을 틈도 없었다.
“가련한 영혼들이 부디 풀려나도록.”
성배의 기도문과 함께 교주에게 새하얀 빛이 내려꽂혔다. 아무리 봐도 직격타였다.
은우의 미간이 심통으로 좁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