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려영이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군.”
여섯 번째 도시. 그곳에서 려화는 비죽거렸다.
“차별, 박해, 가난. 확실히 지긋지긋하지. 그렇지만 그건 내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야. 누가 고아란 이유로 차별받길 바라고, 한 끼 채우기 급급한 가난을 바랄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는 적으로 등장한 게 아니었다. 전 맵 통틀어 가장 유명한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있었을 뿐.
애당초 은우가 눈썰미로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곳에 있는 줄도 몰랐을 거다. 아마 숨겨진 이벤트 같다.
“돈과 권력은 탐해도 탐해도 부족해. 려영은 내가 과거에 얽매여 이런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난 멀쩡한 집안에서 태어났어도 이 길을 걸었을 거다.”
“옳은 방향은 아니지만, 줏대 있는 사람이네요.”
“녀석이 날 붙잡았다 해도 마찬가지야. 괜한 소리 말고 그 쓰레기 같은 실력이나 키웠으면 좋겠군.”
─려영 캐해 실패
─어쭙잖은 과거로 악행을 커버치느니 이러는 게 훨 낫긴 하지
─여지주느니 이게 훨 나은듯
─쿨한 악당 좋아요호홍
려화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고르던 셔츠나 보았다. 다시 말 걸면 ‘볼일이 아직 남았나?’라며 약한 신경질을 내었다. 호위처럼 콕 붙어 있는 막야가 곁눈질을 했다.
“더 볼일은 없는 것 같네요.”
은우는 려화를 두고 백화점을 나왔다. ‘적인데 저리 내버려 둬도 되냐.’라고 물을 수도 있지만, 말 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 자체가 없었다.
아마 옷만 조용히 사고 나갈 것이며 사고 치고 싶지 않다 의견을 밝혔기에 그런 게 아닌가 싶다. 현실이었다면 어김없이 신고 감이지만.
여하튼 여섯 번째 도시 스토리도 마친 상태이므로 바로 다음 도시로 넘어가면 된다. 은우는 필드로 나갔다.
“새로운 옷, 좋아!”
“더럽히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대장, 나 힘낼게!”
여실형들이 필드 입장 대사 다음으로 새 옷 관련 대사를 조잘조잘 떠들었다. 시청자들의 닦달에 쌓인 돈으로 구매해 준 옷들이다.
그 스타일엔 전적으로 시청자들의 의견이 반영되어 있다. 은우 포함 전원이 검정 셔츠에 흰색 스리피스 정장이었다.
그는 그것을 보며 진형을 점검하고 출발했다. 전원 진여화를 풀고 있는 상태라 6명이 그를 둘러싼 채 걸었다.
“리하스는 인간 혐오로 인한 인류 멸망을 바라고, 려화는 돈과 권력. 스왈로센은 대체 뭘 바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나머지 간부 하나도 아직 안 나왔고.”
그동안 은우는 지금까지 나온 정보들을 정리했다. 다만 스왈로센이 은하성교단의 교주가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사람들의 말로는 최종 보스가 아니랬는데, 보통 교주쯤 되면 최종 보스가 아닌 게 더 이상하지 않나?
“혹시 스왈로센은 얼굴마담입니까? 뒤에 비선 실세가 따로 있고?”
─?
─뭐야 어케 아심
─이분 사실 초직감 있나요?
─예언자?
“최종 보스치고는 너무 무게감도 없고, 결정적으로 려화나 리하스 둘 다 스왈로센을 교주님이라 안 불렀잖습니까.”
보통 직위를 떼고 이름과 님만 붙여서 얘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물며 동등한 위치도 아니고 한 종교의 정점인 교주를 부를 때에야.
스왈로센 교주님이라고 했다면 이해했겠지만, 스왈로센 님은 아무리 봐도 경외의 느낌이 없다. 당신이라는 단어 선택 또한 그렇고.
상급자는 상급자이되 크게 차이 안 나는 게 분명하다.
더불어 스왈로센은 아무리 봐도 귀신을 부릴 수 있게 만들어 줄 만한 무게감이 없었다.
“차라리 스왈로센이 하나 남은 간부고 진짜 교주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쪽이 더 가능성 높아 보이는데… 맞습니까?”
─크 추리왕
─능지도 좋아,,,불공평해,,,,,
─켄님 능지겜 또 해주세요ㅠ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이게 맞는 것 같다. 은우는 목덜미를 쓸었다.
“여덟 번째 도시가 마지막일 테니 일곱 번째 도시에서 일부 밝혀지겠네요.”
예언자는 무슨.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나오는 답이다. 은우는 SVD의 소매를 잡았다. SVD가 흰빛에 감싸이며 저격 총으로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스토리를 보기 위해서라도 가장 먼저 길부터 뚫어야겠습니다.”
총알이 일직선상의 적을 저격했다.
▣ 140. 이쪽이 안 괜찮다
“하, 정말이지 짜증 나게 구시는군요. 이번에도 방해하실 참입니까?”
그럭저럭 호의적이던 스왈로센의 태도가 돌변했다. 막바지라서 그런가, 그의 표정은 퍽 초조한 상태다.
“본래라면 그 고강한 재능을 높이 사 새로운 세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했습니다만… 그분의 대업을 망치게 둘 순 없죠.”
스왈로센은 려화와 리하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연하지만 주인공(은우)을 제거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번엔 반드시 제거하겠다.”
“저번에 당한 치욕을 갚아 주지.”
스왈로센이 헬기를 타고 날아가고, 려화와 리하스가 양쪽에 서서 그를 마주했다.
려화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망토인지 뭔지 싶은 걸 뒤집어쓴 정장 핏이고, 리하스는 현대풍 옷에 중국식 전통 겉옷을 걸치고 있다.
둘의 또 다른 차이점은 건조할지언정 건강한 안색이냐, 다크서클이 퀭하게 진 얼굴이냐다. 전자가 려화, 후자가 리하스다.
“보스전인가 보네요. 이것만 하면 이번 도시도 끝날 것 같은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여기서 끊는다고?
─에반데
─조금만 더해잉
─나 밤샘인데ㅠ 같이 달려주세요ㅠ
─형 좀만 더 해줘
“새벽 1시가 다 되어 가잖습니까.”
은우는 으레 그렇듯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며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였다. 보스전 준비를 위해 한 발 내디디면 누군가가 슬쩍 끼어든다.
“치사하게 둘이서 하나를 상대하려는 건가?”
려영이었다.
“누님은 내가 맡지. 너는 리하스를 맡아라.”
려영은 이번에야말로 이겨 주겠다는 듯 단단한 얼굴로 려화 옆에 섰다. 은우로선 조금 안타까운 일이었다.
“려화가 더 재밌는데, 아쉽네요.”
방송 끄기 전 한판 제대로 붙을 수 있나 했는데, 그건 안 될 모양이다.
─보통은 여기서 가슴 쓸어내리는데ㅋㅋㅋ
─아 근데 고인물들은 려화를 더 좋아하긴함;;
─쟤도 덱 바꿔서 재밋을걸요?
─리하스도 재밌지 않음?? 여러마리 동시에 신경 써야해서;;
─남캐가 재밋어봐야 뭐함,,,여캐가 짱이지,,,,
“부대 바뀌었습니까?”
하기야 저번에 만났을 때 그가 모조리 깨 버렸으니 부대를 갈아 치우긴 했을 테다. 은우는 과연 어떻게 바뀌었을지 고민하며 리하스 앞에 섰다.
“인간은 정말 싫어. 다 죽어 버려.”
『리하스가 승부를 걸어왔다!』
리하스는 그 소유 여실형들을 다 꺼냈다. 려화가 가장 강한 하나만 꺼내 둔다면 리하스는 조금 강한 녀석들 여럿을 사용하는 유형이었다.
구성원은 바이올린, 루비, 츠바이헨더, 스쿠툼이다. 당연히 귀신화된 상태다.
정원 6명을 다 채우진 못하지만, 차례로 힐러 겸 서포터, 원딜러, 근딜러, 탱커였으므로 포지션은 완벽했다.
은우는 그걸 보며 그의 여실형들을 꺼내 들었다. 려화처럼 강한 여실형 하나만 다룬다면 혼자인 게 편하지만, 쪽수로 밀어붙이면 아무리 그라도 배길 재간이 없어서다.
지금까지 했던 도전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건 능력의 한계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것들이고, 이건 처음부터 불가능하게 설정된 거다.
이를테면 전자는 식재료는 준비해 두되 가정용 요리 도구만 가지고 레스토랑 음식을 따라 해 보란 느낌이고, 후자는 식재료도 안 준 느낌이다.
웬만하면 약한 소리 안 하나, 가능성이 작은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 은우는 그 차이점을 냉정하게 분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시원시원하게 명령을 내렸다.
“제이드 바인, 전원에게 눈물덫.”
“들어드리죠.”
그는 앞으로 뛰어나가며 적들에게 디버프를 걸 것을 명령했다. 리하스 역시 바이올린의 노래로 본인들에게 버프를 걸었다.
다만 바이올린을 한때 써 본 입장으로서 말하건대, 제이드 바인의 디버프 하락 폭이 더 클 거다. 진여화한 스패드룬이 츠바이헨더와 맞닿았다.
실전이었다면 한 손 검인 스패드룬은 두 손 검인 츠바이헨더에게 형편없이 밀릴 터. 그러나 ‘절대 부서지지 않는다.’라는 게임 보정과 실력자가 만나면 도구의 종류는 그저 생김새의 차이뿐이게 된다.
은우보다 키가 좀 더 크고 근육이 더 우락부락한 츠바이헨더 여실형이 검에 힘을 더 실었다. 은우는 검을 가로에서 세로로 기울이며 상대의 검을 미끄러트렸다. 동시에 빠르게 회전한 검이 적의 목을 그었다.
“레더페이스, 스쿠툼에게 절삭. SVD, 바이올린 저격. 쉬레스타, 루비 공격.”
특별히 대상 지정, 스킬 명령이 없을 경우 여실형들은 탱커, 근접 딜러, 원거리 딜러, 서포터 순으로 처치한다. 그렇지만 상대를 지정해 주면 상황은 달라진다.
“스쿠툼, 배수진 및 도발.”
“여길─! 보아라!”
“제이드 바인, 스킬 방해.”
“저를 너무 신용하는군요. 나쁘지 않네요.”
은우는 혼자서 츠바이헨더의 긴 검신을 파고들며 역으로 붙잡았다. 소매를 끌어당겨 손을 뒤덮도록 하면 저항조차 힘들어진다.
그는 그렇게 팔을 치워 낸 후 스패드룬으로 그를 난도질했다. 그러면 자동으로 리하스의 명령은 츠바이헨더에게 집중된다. 어떻게든 은우를 떨쳐 낼 수 있게 각종 스킬을 명령하기 때문이다.
하면 나머지를 잡는 건 너무 쉽다.
은우의 발이 츠바이헨더의 칼날을 밟고 그 목을 쳐 내듯 휘둘렀다. 절단되진 않았으나 피가 반 이상 깎였다.
츠바이헨더의 옷차림이 갑작스럽게 찢어지고 해졌다. 전체 이용가라서 부분부분 길게 찢어진 자국이 나거나 불에 그을리거나 생채기가 생기는 수준이지만, 티는 확 난다.
“루비, 스패드룬에게 불꽃창.”
불꽃을 다루는 여실형, 루비로 인해 허공에서 불꽃창이 생겨났다.
“츠바이헨더, 질풍참.”
츠바이헨더는 검에 바람을 휘감은 채 돌진했다. 헬멧의 검은 유리판 위로 불꽃의 빨간색과 달려드는 잿빛 바람이 고스란히 비쳤다.
“톤파, 저항.”
“으럇샤!”
그 순간 톤파가 끼어들었다. 톤파를 단단히 쥔 녀석의 손이 교차하며 질풍참을 견뎠다. 불꽃창도 마찬가지였다. 톤파는 방어력과 커다란 체력 바로 두 스킬을 너끈히 버텨 냈다.
“SVD, 정밀 사격.”
“명령이라면.”
“쉬레스타, 난도질.”
“흔쾌히 이행하겠어!”
잠깐 사이에 적측 서포터 바이올린과 원딜러 루비가 체력 0이 되어 부서졌다. 리하스가 사리물었지만, 뒷받침해 줄 자들이 사라진 시점에서 근접 딜러, 탱커는 샌드백밖에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쪽에겐 웬만한 정통 힐러에 버금가는 탱커─톤파─가 있었다.
“이럴 수가……. 또 졌단 말이야?”
『전투 승리!』
『획득한 전리품
고급 영석×36
거짓의 가면×5
.
.』
리하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퀭한 얼굴이 더욱 퀭해졌다.
“승리했습니다.”
─켄님 그러니까 여실형 중 하나 같다;;
─헐 좋다;;
─켄 여실형은 못참지...
“저를 형상화할 수 있는 물건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아ㅋㅋㅋ이분 갈수록??
─오만좌
─ㅋㅋㅋㅋ근데 실제로 해내니까 오만한 것도 아님
─언제 한 번 대실패하는 거 보고싶다
─그거 지금도 볼 수 잇음?
─ㄹㅇ? ㅇㄷㅇㄷ?
─팀장님 추천 겜 찾으면 됨
─ㅇ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 의미보다는 그가 다루는 무기가 너무 많아 특정할 수 없다는 의미였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정정하기도 뭐하다.
「‘왜없어요’ 님이 ‘1,000원’ 투척!
님은 오토바이헬멧임」
─아ㅋㅋㅋ
─이거다!
─헬멧좌ㅋㅋㅋ
─헬멧아웃!
“헬멧이 있긴 했네요.”
근데 그러면 무기를 못 들지 않나? 아무리 봐도 탱커로 쓰일 것 같은데.
은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려영 쪽은 어찌 되어 가는지 확인했다.
“한심한 녀석. 졌나?”
려영과 려화의 전투는 또다시 려화의 승리로 돌아간 모양이다. 려영은 팔이 베인 듯 그 자신의 팔을 꾹 붙잡고 있다. 두 여실형은 바닥에 쓰러져 있다.
“그런 너야말로 왜 저 귀찮은 여휘 놈을 안 죽이는 건데!”
“언제든 제압할 자신이 있으니까.”
“거짓말하는군! 동생이니까 살려 두는 거겠지!”
리하스의 말에도 려화는 꿈쩍 안 했다. 다만 구두로 그 발을 걸고 넘어트린 후, 가슴팍을 밟았다.
“그러면 어쩔 건데?”
‘내부 분열’이란 단어를 붙이기엔 너무 일방적인 형태였다. 망토 아래로 흘러내린 검정색 머리카락은 빛을 받아도 광이 나지 않았다.
“죽이긴커녕 해치우지도 못하는 너보단 죽이지 않아도 배제할 수 있는 내가 더 유능한 거 아닌가?”
개인적으론 둘 다 무능하다고 생각한다. 불씨를 남겨 두면 후일 죽는 건 본인이다.
“젠장, 그럼 이 녀석이라도 해치워!”
“싫은데. 내가 왜 네 무능을 덮어 줘야 하지?”
려화는 리하스의 부탁을 단칼에 쳐 냈다. 은우는 목덜미를 쓸었다.
“남의 무능을 덮는 게 귀찮은 일은 맞지만, 전체를 본다면 좋은 행동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불씨를 살려 두는 것도 그렇고.”
─ㅋㅋㅋㅋㅋ
─게임이니까 모,,,,,
─팀플은 이게 문제야!
─그러니까 겨슷님 팀플만은...!
─아아!!
─벌써부터 개강 해질 생각을 하는 거냐구 너희들...!
“뭐, 그건 그렇습니다.”
전체 이용가 게임에서 골육상잔을 보여 주긴 좀 그렇다. 지금도 골육상잔이 아닌 건 아니지만, 관대하게 봐 준다면 나름 스케일 큰 남매 싸움 정도니까. 적어도 서로를 격렬하게 노리는 수준은 아니잖은가?
“교주한테 잔소리 듣긴 싫으니 탈출 정돈 도와주지.”
“젠장, 저 빌어먹을 여자가!”
리하스는 욕설을 지껄이면서도 려화에게로 달려갔다. 제압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나, 어차피 투명 막이 가로막고 있을 게 뻔하다. 더구나 은우 앞엔 려화의 막야가 칼을 치켜들고 있었다. 다가오면 베겠다는 의도가 잘 보인다.
“너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기는 건 우리다.”
“잠깐, 이대로는……!”
려화는 리하스의 목덜미를 붙잡은 채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리하스가 비명을 지르고, 막야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가 다급히 건물 아래로 따라 뛰었다.
일곱 번째 도시 파트도 아무래도 이렇게 끝인 것 같다.
“슬슬 마무리할 시간이네요.”
은우는 그렇게 말했다가 문득 남겨진 려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내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채 주먹을 꽉 쥐고 있다. 도드라진 관절 뼈가 흰 손을 더욱 하얗게 만들었다.
“…또, 졌어.”
“초반엔 려영이 참 대단한 사람 같았는데 말입니다.”
매번 패배하는 건 어떤 심정일까. 노력하는데도 패배해 본 적이 없어서─초중고 시험은 별개로 친다─잘 모르겠다.
─팩트 너무하잖아ㅋㅋㅋㅋ
─ㅋㅋㅋㅋ려영팬들 운다 울어
─근데 려영 한 거 없긴 함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ㅋㅋㅋ
─팩트에 살 도려졋다...
그렇지만 진실인 걸 어찌하겠는가. 은우는 목덜미를 쓸며 려영의 중얼거림을 들어 주었다. 혹시 남은 이야기가 있나 싶어서였다.
“…난 협회로 돌아가 보겠네. 좀 더… 좀 더 강해져야겠어…….”
별 가치는 없었다.
방송 종료 시간만 다가왔다.
* * *
『형> 그 인형 두 개, 환불 아직 안 했으면 내가 받아 가면 안 될까? 공짜로 받겠다는 건 아니야.』
『희수> 나 종강함』
『희수> 노실?』
방송 끝나고 전자 노트를 확인하니 그런 문자가 와 있었다.
희수는 그렇다 쳐도 형은 인형 두 개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땐 썩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는 형에겐 ‘공짜로 받아 가도 상관없다. 가지고 싶으면 가져라.’라는 답을, 희수에겐 ‘네 애인이랑 놀아라’라는 답장을 보냈다.
그 후 한 일은 팬 카페에 살짝 들어가 보는 것이다. 저번에 희수가 일침한 뒤로 종종 들어가려 노력하는 중이다.
<여실전화 삭제할까?>
여실전화 3년 동안 죽어라 한 고인물임
[UID 코드를 지운 인증샷]
그런 나도 못 얻은ㅎ 제바 나온 거 실화?
[한 자리 빈 도감 사진]
─진짜 제바;;
─제바도 제반데 스룬 미쳤냐고ㅠㅠ 나 스룬 뽑겟다고 500번 돌렷는데도 안 나왔는데ㅠㅠ
└스룬 먹겟다고 천 번 돌린 사람도 잇어,,,,
─켄 운빨 개오져ㅠㅠㅠㅠㅠ
─얼굴, 실력, 행운까지 다 가진 남자.....
└너무 과설정 아니냐고
└여기에 요리도 더해졋습니다...ㅋㅋㅋ
역시나 그의 운을 질시…라고 하긴 뭐한 태도로 말하는 자들이 있었다. 탓하기도 뭐하고 놀리긴 더더욱 뭐하다.
『희수> 가족 여행 가서 안 됨.』
그때 희수에게서 답장이 왔다. 아직 안 잔 모양이다.
그보다 가족 여행이라. 어쩐지 애인 두고 그에게 놀자고 요청하나 했다.
“그래, 그럼.”
『희수> ㅇㅋ』
저러면 알아서 약속이나 장소를 짜 올 거다. 은우는 통보에 가까운─예전부터 암묵적으로 이래 왔기에 거슬리진 않는다─답장을 기다리며, 식탁 위 헬멧을 매만졌다.
솔직히 이제 와서 헬멧을 꼭 써야 하냐면, 그건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써 온 게 있다 보니 벗기도 아까웠다. 만약 벗었다가 사람들이 그를 무서워한다면 많이 서운할 것 같기도 하고.
은우는 ‘서운하다’란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다가 문득 형이 한 부탁을 떠올렸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짙게 든다.
그러나 그걸 막자니 그를 중간 다리 삼아 이득을 취하려는 만남이 아니었다. 막을 이유가 없단 소리다.
더구나 형은 그가 주지 않아도 어떻게든 희수를 만나려 시도할 것 같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상황에서 마주치는 게 나았다.
“…형이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전화번호 받아도 되냐고 물어봤는데, 줘도 되냐.”
은우는 마른세수와 함께 발언했다.
답장은 한참 뒤에 도착했다.
『희수> 날? 왜?』
답장이 도착하기 전 고요 속에선 아마 욕설이 적혔다가 순화됐다가, 그래도 욕 같아서 지워진 문장들이 있었으리라.
길어진 침묵과 친구 타자 속도를 고려했을 때 당연한 추측이었다.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대.”
『희수> 안 만나면 안 되냐?』
“나도 그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형은 면전에서 욕설을 듣는다 해도 그 자리를 바랄 것 같았다. 그는, 뭔가 더 바라는 게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싫다면 거절할게.”
『희수> 음』
『희수> 아냐.』
『희수> 줘.』
은우는 희수의 반응을 보며 오히려 떨떠름해졌다. 차라리 희수 쪽에서 거절해 줬으면 했는데.
“꼭 안 만나도 돼.”
『희수> ㄴㄴ ㄱㅊ』
이쪽이 안 괜찮다. 그는 제 친구가 얼마나 성깔 있는 사람인지, 선 긋는 게 얼마나 철저한지 알았다. 선 밖에 있는 사람에겐 정말 싸가지 없다는 것도.
“나도 불러.”
『희수> ㄴ』
동행을 거절할 정도면 대체 뭔 소리를 하려는 걸까. 은우는 친구에 대한 굳건한 믿음하에 이마만 짚었다.
언제나 든든했던 그의 친구가 이번만큼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건 처음이다.
“…살살해라.”
『희수> ㅇ』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은우는 형에게 희수 전화번호가 적힌 문자를 예약 발송 했다.
인형 가져가도 된다는 문자 아래 찍힌 희수의 전화번호를 보자니,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가 하고 살짝 후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