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려영의 성배가 기도함으로써 하수구의 붕괴는 잠시 멈춰졌다. 그 시간 동안 구조대원들이 빠르게 내려와 쓰러진 여휘들을 구출했다.
신체 능력이 월등한 여실형들 덕에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은우는 그 과정에서 위로 올라왔다.
“조사에 응해 줄 수 있으십니까?
당연하지만 협회에선 이번 일에 대해 조사하려 들었다. 은우는 떠오른 선택지에 맞춰 대사를 골랐다. 애초에 하나밖에 주지 않았거니와, 한 줄만 말해도 상대 NPC는 다 들은 것처럼 반응해 주어서 일이 편했다.
“하얀 검을 들고 있는 자가 있었다고……? 잠깐. 그 이야기, 자세히 들려줄 수 있나?”
그때 려영이 끼어들었다. 그의 얼굴은 퍽 절박해 보였다. 표정이 크게 망가졌다기보단 크게 홉뜬 눈이 그런 느낌을 강조했다.
『1.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요.
2. 흔쾌히 들려드리죠.
3. 이유부터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유부터 물어도 되겠습니까?”
마음에 쏙 드는 선택지가 있기에 그것을 택했다. 려영의 표정이 조금 음울해졌다.
“…내, 내 누님일지도 몰라서 그러네.”
은우는 그 말을 듣고 헬멧 뒤통수를 쓸었다.
“관련 있을 건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밝혔네요.”
─ㅋㅋㅋㅋㅋ바로 밝혀버리기!
─얘네들은 의문을 남겨두질 않아ㅋㅋ
─근데 너무 뻔해서ㅋㅋㅋㅋ
─모습에서 스포하는 게임;;
누님이 악당이라는 것에 안타까움 따윈 느끼지 않았다. 아무렴 은우는 형이 나쁜 짓을 저지르겠다 하면 그를 말리거나 막을 게 아니라 도울 사람이었다. 그는 악인이 아니지만 선인도 아니었다.
『1. 그는…….』
이건 말하기가 애매했으므로 선택지를 꾹 눌러 처리했다. 려영의 눈이 커졌다가 서글프게 내려앉았다.
“그런가. 누님은… 진정 용서받을 수 없는 길을 걷고 계신가.”
려영은 흔들리는 눈을 꾹 감곤 고맙다는 한 마디와 함께 떠났다. 후드인이 려영의 누님이라는 정보밖에 얻지 못한 셈이었지만, 아직 세 번째 도시였다. 은우는 다음을 기약했다.
▣ 138. 희망은 때론 절망에 가려지는 법
은우는 복구된 협회로 돌아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쌓인 영석들을 이용해 새로운 여실형을 제작할 시간이었다.
─켄님 운 되게 좋은 것 같음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나
─나라 구한 걸론 안 됨;; 최소 신이랑 딜햇다
─신이랑 딜을 어케 해ㅋㅋㅋ
─구울왕은 가능해
“…신이랑 거래해도 운이 좋아지진 않습니다.”
그랬다면 그가 이런 삶을 얻진 않았을 거다. 물론 희수란 바꿀 수 없는 친구도 있고, 형과도 나아지고 있으니 별달리 후회스럽진 않지만…….
운 좋은 삶은 객관적으로 아니라 본다.
“그리고 저, 운 안 좋습니다.”
평상시 그 자신이 운 좋다고 생각해 본 적 또한 없다. 전생에서 살아남을 적, 재능 외에 운이 많이 작용한 건 사실이나, 마찬가지로 진정 운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혼자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모루 앞에 서서 평상시대로 작업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람들이 우려하던 대로 혹은 질시했던 대로 희귀한 이들은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1성, 2성, 가끔 3성만 튀어나온 것이다.
그렇게 그 많던 영석이 상당량 소비되었을 때, 은우는 묘한 직감을 받았다.
영석을 올려 두려던 손이 잠시 멈추더니 다른 걸 꺼내 들었다.
─?
─왜용?
─??
“그냥 저걸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뭘해도 꽝이에요ㅋㅋㅋ
─이젠 꽝도 직감하시는 건가ㅋㅋ
─탈인간;;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만…….”
은우가 다음 영석을 고르는 사이 채팅 창은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레더페이스를 뽑은 이후 그가 2성 이하만 뽑았다는 게 그들의 평온을 허락해 주었다.
「‘당신의척추요정’ 님이 ‘1,000원’ 투척!
잠깐! 스트레칭은 하셨나요? 허리와 팔을 쭉 펴줍시다!」
─앗 고마워요 척추요정!
─척추에서 지금 우득 소리 나옴;;
심지어 시청자들이 스트레칭까지 하는 사이 은우는 영석을 새로 꺼내 들었다. 그것을 소비해 제작한 여실형은 2성이었다.
그의 손이 다음 영석을 집어 들었다가 이번에도 내려놓았다. 이걸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왜요?
─이번에도 꽝을 직감하셧나
─ㅋㅋㅋ어째 나랑 똑같지ㅋㅋ 나도 맨날 내려놓고 들고 내려놓고 들고 하는데
─ㄴㄷ? ㄴㄷㄴㄷ
“아니, 안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망해요ㅋㅋㅋ
─ㄱㅊㄱㅊ 이 겜은 원래 그럿습니다
─그냥 해치워버립시다
글쎄. 망할까? 은우는 사람들의 재촉에 마지못해 해당 영석을 모루 위로 올렸다. 그의 손이 깡 소리와 함께 대성공을 띄웠다.
무지개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
─?
─??
─?
“…어쩐지 하면 안 될 것 같더라니.”
무지개색 빛은 뒤로 넘어가 하나의 신형을 만들어 냈다.
갸름한 얼굴에 얹어진 모자는 챙이 넓고 깃털 장식이 꽂혀 있다. 허리서부터 부채꼴로 퍼지는 코트는 실루엣이 유독 희었는데, 빛이 사라진 이후에도 여전히 흰색을 유지해서인지 모른다.
흰색 제복 위 레이스 재질의 크라바트가 유독 눈에 띄었다. 한쪽 앞머리─와 귀밑머리─만 모자 아래로 내리고 나머진 모자 안으로 넣은 머리칼은 금색이다.
“저의 이름은 스패드룬Spadroon. 군사용 도검으로 한때 유행했습니다. 무슨 명령을 따르면 됩니까?”
그녀는 SVD와 상당히 비슷한 타입의 여실형이었다. 다만 SVD가 정중하고 예의 바른 정도라면 스패드룬은 군인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은우만큼이나 건조한 말투가 그리 만들었다.
처연한 눈매와 달리 진정 무뚝뚝하다.
─???
─에반데
─및ㅁㅊㅁㅊㅁ
─스패드룬?
─?
─스룬 뭔데!!!!
─이런게 어딧어;;;;
─더러운 세상!
「‘상큐상큐’ 님이 ‘1,000원’ 투척!
하, 삭제하러 갑니다」
─아 갑자기 열받네ㅋㅋㅋ
─와 ㅈㄴ 빡친다....
─주작on
─운영자 뭐하냐
「‘아몬드다이’ 님이 ‘1,000원’ 투척!
이게 게임이냐?」
불공평한 행운에 시청자들이 분노로 날뛰었다.
“저는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신고합니다
─ㅗㅗㅗㅗㅗㅗㅗㅗ
─이거 녹방이죠?
─자괴감 든다
“그렇게 말하셔도…….”
은우는 일단 계약을 하며 목덜미만 매만졌다. 확률이 그런 걸 어쩌란 말인가. 그가 바라서 나온 것도 아니고.
─아까 뺀 것도 해봐요!
─당.장.해.
─저것까지 무지개면 레전드
─아, 절대 안 되지
─그럼 진짜 삭제함
─ㄹㅇ 쌉주작
“여러분이 또 화내실 일 생길 것 같은데.”
그렇지만 스트리머가 어찌 시청자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을까? 은우는 아까 빼 두었던 영석을 꺼냈다.
깡!
이번에도 무지갯빛이 터져 나왔다.
“제가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닥치세요
─ㄷㅊ
「‘44HWEC’ 님이 ‘1,183원’ 투척!
당신을 믿었습니다.」
「‘기만자새끼’ 님이 ‘1,000원’ 투척!
구독해제한다」
뭔 말을 하든 기만이었다.
* * *
다섯 번째 도시. 그곳에서 은우는 또 한 번 후드인과 마주쳤다. 앞서 조무래기들의 대화로 알게 된 그녀의 정체는 은하성교단의 세 간부 중 한 명이었다.
은하성교단의 간부라면 앞서 리하스라는 녀석과도 마주친 바 있다. 후드인까지 포함하면 둘이니, 이제 하나만 더 마주하면 세 간부와는 면식을 다 익히게 된다.
“스왈로센 님.”
한편 후드인은 한 사람을 수행하고 있었다. 스왈로센이란 이름의 중년 사내였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트리고 턱에는 단정히 달린 수염이 있다.
“오, 여기서 형제님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군요.”
새하얀 법복이 그를 성스럽게 만들었다. 은하성교단이 일종의 종교 집단임을 아는 이상, 교주인가? 하는 생각밖에 안 든다.
“벌써 최종 보스가 모습을 드러낼 것 같진 않은데.”
─글게용
─쟤 최종보스 아님ㅋㅋ
─스포 밴
─근데 딱봐도 최종보스 아니게 생기긴 햇다
─ㅋㅋㅋ몬가 짭보스 같지ㅋㅋㅋ
은우는 목덜미를 쓸었다. 스포인 건 둘째 치고, 아닐 줄 알았다.
“형제님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습니다. 비록 저희에 대해 오해하셨는지 안타까운 이야기만 들려왔지만… 그런 건 풀어 나갈 수 있습니다.”
스왈로센은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 다가왔다. 후드인이 만류했지만, 그는 오히려 단호히 대처했다.
“잘못된 믿음을 가진 어린 양을 어찌 내버려 둘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따라 모든 이에게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네 다음 사이비
─저노무,,,쉐끼들이,,,,,으,,,딜,,,!~!!
─사이비 죽어
─아 아재요 진정하소
─켄 방송 50대도 보냐?
─본인 40대인데....40대도 빡친다;;
─그 세대들 사이비만 보면 눈돌아간다더니 진짜네
─한국인들 왜 저러는 것입니까?
─그것은,,,'그 종교' 때문이다....
─알면 다쳐!
물론 시청자들은 더 가차 없었다.
은우는 사람들이 외치는 사이비란 단어에 목덜미만 쓸었다. 그에게 사이비, 그것도 사이비 종교는 너무 멀고도 낯선 개념이었다.
아무렴 수백, 수천의 신이 존재했던 전생이었다. 종교는 제각기 특징이 있었으며, 대가로 지불하면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내주었다. 가치관에 상관없이 믿음이든 재물이든, 제물만 바치면 신의 힘을 얻을 수 있던 거다.
신격화, 금품 강요, 가치관의 강요조차 특정 신에겐 조건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분명 신의 힘을 내려 주었다. 그래도 그건 가짜 종교인가?
아마 아닐 거다. 사이비 종교란 게 생소할 수밖에 없는 경험관이었다. 성주는 잘만 사이비, 사이비거렸었지만, 어쨌든.
“형제님, 인간의 본질은 본디 영혼입니다. 그런 영혼이 육체에 갇혀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지 아십니까? 부디 시간을 내주십시오. 한 번의 대화면 분명 많은 게 달라질 겁니다.”
별개로 종교를 좋아하느냐면 그건 또 아니다.
언제나 말하지만, 그는 신을 죽인 자이고 신을 죽이기 전엔 무수히 많은 성직자를 죽인 자였다. 그가 신들에게 산 원한만 해도 어지간한 호수를 이룰 것이다.
“그러고 나면 형제님도 진정한 진실을…….”
“여기 있었군!”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려영이었다. 후드인이 혀를 찼다.
“가셔야 합니다.”
“이런……. 어쩔 수 없군요. 형제님,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지요.”
스왈로센이 서둘러 비밀 통로로 물러갔다. 조무래기 은하성교단이 그를 비호했다.
─도망가는 것 보소;;
─빤스런
─켄이 잇잖아
─아 그르네;;
─켄전 치르기 전에 도망치는 게 국룰이지
“켄! 쫓아가라!”
“그렇게 내버려 둘 리가.”
“이곳은 내가 맡겠다!”
려영과 후드인이 대치하고, 은우는 스토리를 따라 스왈로센을 쫓았다. 조무래기들이 그를 막는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교주님을 지켜!”
“더는 나아갈 수 없다!
은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톤파를 단단히 쥐었다.
‘톤파’라는, 저항 무기 주제에 힐 스킬이 있는 이 이상한 녀석은 스패드룬과 같은 5성 여실형이다. 탱커로 만들어졌음에도 힐량이 무지막지해, 힐러가 파티에 없던 은우로선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너무 강해!”
“여실형을 저렇게 잘 다루다니……!”
물론 녀석이 없었더라도 이기는 건 그였을 것이다.
“대장과 함께 싸울 수 있다니 영광이야.”
레벨이 오르며 진화한 쉬레스타가 달라진 차림새로 손을 뻗어 왔다. 용병 복장은 여전하지만 좀 더 복잡해졌고 뭔가 많이 달렸다. 머리스타일도 달라졌고 키도 더 커진 상태다.
“그립감이 더 괜찮아졌네요.”
본체도 외형이 달라졌다. 검날에 이가 생기고 손잡이는 좀 더 쥐기 편해졌다. 장식도 붙었다. 나쁘지 않았다.
은우는 쉬레스타를 든 채 마지막 은하성교단 단원과 싸웠다. 방검복 여실형은 야금야금 피를 빼앗기다가 결국 패배했다.
“역시 강하시군요.”
뒤에서 지켜보던 스왈로센이 태연히 말을 꺼냈다. 비밀 통로를 통해 도시 바깥, 헬기가 있는 공터까지 도착했다는 게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지도 모른다.
“형제님, 그 고강한 무력을 좀 더 옳은 일에 쓰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1. 없어.
2. 좀 더 옳은 일?
3. 충분히 잘 쓰고 있어.』
“충분히 잘 쓰고 있다.”
스왈로센이 곧바로 측은한 얼굴을 했다.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형제님. 형제님이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설마 사이비 교주의 말을 계속 들어 줘야 하는 건가? 은우가 잠깐 고민할 때쯤,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실형 하나가 그것을 막아 냈다. 아마 스토리상 무조건 막도록 설정해 둔 게 아닌가 싶다. 방어에는 적합하지 않은 SVD가 막아 낸 걸 보면.
“전보다 더 강해졌군.”
후드인이었다.
“세계관 톱급 강자라더니, 려영도 별 쓸모가 없네요.”
─팩ㅋㅋ폭ㅋㅋㅋㅋ
─려영 애껴욧!
─무심코 던진 팩트, 누군가에겐 상처입니다
─쓸모 없는 건 맞잖아
─려영 뼈맞음ㅋㅋㅋㅋㅋ
─아, 줄건 줘
본인이 막겠다 해 놓고 이꼴이라니. 가족이라서 봐준 건지 실력이 안 되는 건지 모르겠다. 은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후드인과 스왈로센의 대화가 이어졌다.
“려화.”
“왜 당신 혼자입니까. 다 쓰러진 겁니까?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
후드인, 려화는 쓰러진 은하성교단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러곤 은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졸지에 양쪽에서 포위된 셈이지만 그는 태연했다.
“어서 가십시오. 려영이 다시 쫓아오면 귀찮아집니다. 더구나 그것, 빨리 가져가야 하잖습니까.”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려화는 어서 가기나 하라는 듯 턱짓했다. 살짝 고민하던 스왈로센이 결국 먼저 도주했다. 쫓아가려고 해도 언제나처럼 투명막이 그를 막아섰다.
몸의 통제권을 잃는 것보단 나은데 이것도 꽤 짜증난다.
“이번엔 제대로 해라, 막야.”
“응.”
1차전 때처럼 려화는 막야를 내놓았다. 려영이 가진 소년 여실형 이름이 간장임을 고려하면 전설 속 검인 간장과 막야의 그 막야가 맞을 것이다.
“패턴, 똑같이 나옵니까?”
─스킬 달라염
─스킬다르니 걱정 ㄴㄴ
그렇다면 다행이다. 은우는 쉬레스타를 고쳐 잡으며 다가올 녀석을 기다렸다. 보스전이라 다른 여실형들을 꺼내도 되지만, 그건 싫었다. 이왕이면 혼자 잡는 게 좋다.
순간 훅, 하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은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까스로 막야의 검신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조금만 더 늦게 숙였다면 정타였다.
그의 발이 뒤로 물러났다.
“저번보다 더 빨라졌네요.”
─레벨 올라서 그럼ㅋㅋㅋ
─려화가 막야 얻은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성장중이라는 설정임
─최종때는 기배도 미쳐돌아가잖어ㅋㅋ
하긴 그만 레벨 올리는 건 아니니 적도 레벨을 올려야 할 테다. 조무래기들 여실형들도 레벨이 올랐고.
그러나 유독 려화만 난이도가 높다. 그야 반응하는 데 어려움이 없지만, 스탯에 맞춰 움직이는 여실형 AI나 일반인에겐 퍽 어려울 정도로.
“적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느낌입니다.”
─그건 글쵸,,,,
─최종보스랑 동렙이면 려영이 젤 어려웟을듯
─(금지된 채팅입니다)
─나 이거 삼트해서 겨우 깻는데,,,
─그래도 려영정도면 천사임 6성 레이드중에선,,,,
─걔네는 최소 4성으로 둘둘 말아야 하잔아ㅋ
은우는 두 번째 검격을 피하고 역공을 넣으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감각이 바짝 섰다.
그는 미련없이 옆으로 빠졌다. 막야에게서 1차전에선 본 적 없는 스킬이 터져 나오며 바닥을 홍해 가르듯 갈랐다.
“조금 위험했네요.”
─? 피해놓고서 약한 척을...?
─켄 혈관에는 피 대신 기만이 흐르다는 학계의 정설
“맞으면 훅 갈 것 같긴 하잖습니까.”
그는 능숙하게 쉬레스타에서 스패드룬으로 바꿔 들었다. ‘수행하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스패드룬이 손에 들렸다. 스몰 소드보다는 길고 베기가 가능한 검신이 빛을 한 겹 흘려 냈다.
채앵!
검신이 짧은 쿠크리로는 흘리기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스패드룬은 실전을 위해 검신이 꽤 길게 제작되었다. 은우는 그것을 이용해 막야의 검을 받아쳤다.
숫돌에 검이 갈리듯 서로를 스친 검날은 허공을 부드럽게 유영하다 또 한 번 각자의 몸을 쓸고 지나가니.
불똥 튀기는 이펙트와 함께 검과 검이 맞닿고 떨어지길 반복했다. 스펙은 은우가 부족하지만, 경험과 반사신경으로 그 간극을 모조리 메우니 동등한 합격이 가능했다.
아니, 동등한 합격이 아니었다. 적의 검을 그의 것에 접붙인 듯 끌어당겼다가 방향을 마구 틀어 버린 후 열려 버린 속을 일방적으로 찌르는게 어찌 동등한가.
막야의 피가 조금씩, 조금씩 깎여 나갔다. 6명이 동시에 폭딜을 해야 깰 수 있다는 보스의 위명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나는ㅋ 딜찍누 했는데ㅋㅋㅋ
─아 왜ㅋㅋㅋ켄도 딜찍누 하고 잇잖아ㅋ
─켄=딜
─공식 완-벽
─피타고라스도 인정할 듯
“육성과 수집에 집중해서 그런지 전투 부분은 쉽지 않습니까? 패턴도 정형화되어 있고.”
─그건 그런데,,,
─막야는 그게 빠르잔아요,,,,
─아! 또 놀림 당한다!
그런가? 타이밍만 외우면 쉽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뻔히 보이기도 하지만.
막야의 검이 은우의 옆구리를 찌르기 위해 뻗어졌다. 그러나 은우는 팔을 내려 옆구리에 딱 붙였다. 막야의 팔째로 가둔 셈이다.
은우의 오른손은 검의 폼멜 부분으로 막야의 뒷목을 쳤다. 그러곤 스킬이 발동되기 전에 서둘러 빠졌다.
막야가 스킬을 발동해 전방을 쓸었다. 그러나 은우는 옆으로 이미 빠져나간 상태다. 그는 왼손으로 칼자루를 쥐고, 오른손으론 왼손의 손목을 붙잡은 채 도끼질을 하듯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었다.
막야의 앞부분이 베이고, 은우가 스텝을 밟으며 빙글 돌아 소녀의 뒤로 돌아가며 그 등을 한 번 더 베었다.
피통이 쭈욱 내려갔다.
“어려운 걸로 하죠, 그럼.”
─아ㅋㅋㅋ킹받네
─인정하니까 역으로 기분 나쁜 건 뭐지?
“쉽다고 해도 기만이라 하실 거잖습니까.”
─맞말인데...맞말인데....!
─팩트 선넘네;;
─너어느은 지인짜 나빴다아....
─이게 바로 ‘진짜’다
은우는 막야의 검풍을 피해 거리를 조절했다. 주변을 난도질하고 공기를 마구 조각 내는 스킬은 무리해서 쳐 내기보단 스킬이 종료되었을 때 나는 틈을 노리는 게 좋다.
막야가 공격을 마치고 숨을 들이켠 순간, 은우의 검이 내질러졌다.
소녀가 다급히 검을 끌어 올려 방패로 삼으려 했지만, 은우는 부딪치기 직전 검을 회수하며 발로 소녀의 명치를 걷어찼다.
─스트리머 켄,,,,아동폭력을 저질러,,,
─수근수근
“그러실 겁니까?”
─ㅇㅇ 그럴거임
─님은 당해도 싸
─ㅂㄷㅂㄷ....
─하,,,,아직도 스룬이랑 제바만 보면 열받는다
은우는 시청자들의 농담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며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막야의 피통이 정확히 절반으로 변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려화가 한 발짝 나섰다.
“이번에도 제거에 실패했군.”
“아니야, 할 수 있어!”
막야의 외침에 려화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늦었다.”
“……!”
막야의 표정이 찌푸려지고, 저편에서 무언가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려화!”
려영이었다.
“이제 오네요.”
고생깨나 했는지 검댕을 얼굴에 가득 묻히고 있다. 동반한 여실형은 옷이 많이 찢어진 상태다. 부상 단계에 따라 옷이 망가지고 흐트러지는 게임 특성상 저 정도면 중상 단계였다.
“쯧.”
려화는 그걸 보며 혀를 차더니 막야의 손을 붙잡았다.
“판도라.”
“아까처럼 당할 것 같아? 성배!”
신들의 하사품에서 탄생한 여실형들이 힘을 발휘했다. 그 사이에 낀 은우만 고래 사이의 새우 심정이 되어야 했다. 투명한 막이 탈주조차 제한했다.
“이것 참.”
─나 빼고 멘션해주세요
─나 빼고 문자해주세요
─그럴거면 갠톡 가세요
“두 번 다 피를 제대로 못 깎고 가네요.”
패턴이라고 해야 할지, 기술을 상대할 때마다 달라질 것 같으니 여러 번 상대하는 것 자체는 불만 없다. 그렇지만 피를 깎지 못하니 허무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도 두 번이나.
은우는 목덜미를 쓸며 앞에서 펼쳐지는 남매의 대립을 지켜보았다.
“어째서 그곳에 있는 거야! 교단이라니, 귀신이라니! 누나, 미쳤어?”
“미치지 않았고, 지극히 이성적이다.”
“그곳의 목적이 뭔지, 하는 일이 뭔지는 알고 말하는 거냐고!”
려영의 외침에 려화는 한숨에 가까운 숨을 뱉었다. 귀찮음이 뚝뚝 흘러나오는 모양새였다.
─찐 남매ㅋㅋㅋㅋ
─제작사들 형제자매 잇는게 분명함ㅋㅋㅋ
─ㅇㅈㅋㅋㅋㅋ
보통 남매는 저렇구나. 은우는 사이가 안 좋아야 남매, 형제 취급 하는 사람들을 보며 조금 미묘해졌다.
시간이 지나면 형과 그도 저럴까? 허물없이 저렇게 선 넘는 발언들도 할까? 그렇지만 그건 조금 불편하지 않으려나.
“그럼 모르고 들어왔을까? 애초에 이 자리까지 오는데 그 모든 일을 ‘모르고’ 있는 게 가능할 것 같아?”
“그럼 대체 왜!”
려화는 후드를 뒤로 넘겼다. 어깨에 핀으로 고정되어 있는지라 후드를 벗어도 천이 완전히 흘러내리진 않는다.
“보이니, 이 눈?”
“……!”
그녀의 한쪽 눈은 의안이었다. 현실보다 10년 뒤처진 현대가 세계관 배경인지 의안은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돈과 권력이면 망가진 눈도 고칠 수 있어. 그 이상의 것도 살 수 있지. 난 그걸 위에 은하성 교단에 들어왔을 뿐이야.”
“그건 옳지 않아!”
“옳지 않으면?”
려화는 까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한 번뿐인 인생, 내가 왜 구질구질한 정의 따위에 몸 바쳐야 하지?”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해 가지 않는 사고방식은 아니었다. 저런 인간 군상은 생각보다 많다.
“이상한 철학보다는 확실히 납득이 됩니다.”
─ㅇㅈㅇㅈ
─악역한테 개똥철학 주는 거 좀 별로.
─이해가는 악역이 최고야~
“납득과 별개로 좋아하는 유형은 아닙니다만.”
저런 자들이 생존에 유리한 건 맞으나, 은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얄팍한 도덕심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다. 단지 귀찮을 따름이었다. 그 또한 사는 방식이니 뭐라 할 생각은 없다마는.
“스왈로센 님이 이동했으니 됐어. 더는 볼일 없다.”
“가게 둘 것 같아?”
“너는 날 못 이긴다.”
간장과 막야가 부딪쳤다. 본래 전설 속에선 한 쌍의 부부 검이었던 두 검이지만, 지금은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는 적에 불과했다.
시청자들이 그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자고로 자기 일 아니면 싸움 구경과 불구경만큼 재밌는 게 없는 법이었다.
“판도라.”
“성배!”
려화가 먼저 등을 돌렸다. 이어지는 판도라의 항아리가 손가락을 튕기는 행위다. 성배가 다급히 방어막을 펼쳤다.
“모두를 지킬 겁니다!”
“희망은 때론 절망에 가려지는 법이지.”
성배의 흰 막이 려영과 은우를 감싸고, 사방에서 귀신 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꼭 검은 파도가 몰려오는 것 같다.
“젠장, 려화!”
개천이 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를 피해 움직이듯 귀신들은 려화를 피해 달려들었다. 귀신들 사이로 멀어지던 이들의 뒷모습이 곧 그늘에 삼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