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은우는 형과 찍은 사진을 받아 들었다. 거실을 커다랗게 장식하는 수준은 아니나, 그의 손바닥만 한 크기는 되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거면 돼?”
형이 물었다. 그는 사진 찍는 내내 안절부절못했는데, 그 이유를 물으면 입을 꾹 다물었다. 은우가 예상할 수 있는 범주의 감정 같지는 않았다.
“응.”
나머지 필름은 사진첩에 넣어 둘 거다. 방에 들여놓은 책장에 새로이 들어갈 친구다. 만일을 대비해 배우고 있는 여러 신화 책 사이에 곱게 끼워질 거다.
“그, 몇 개 더 찍을까?”
“이미 많이 찍은 것 같은데.”
열 장이면 많이 찍은 게 아닌가. 은우는 목덜미를 쓸었다.
많이 찍었다, 적게 찍었다의 기준을 잘 모르겠다. 다만 이 열 장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 사진만 봐도 그는 오늘 일을 생생히 되새김질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고 여행 가는 걸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아무리 우애가 좋아도 어지간한 보통의 형제는 단둘이서 사진관에 오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이가 나름 만족했다.
“그런가…….”
대신 그는 조금 위축된 형을 잘 살폈다.
왜 기죽어 있는지 모르겠다. 사진 찍는 거, 사실 싫어했나? 아니면 그랑 찍기 싫었나? 만약 후자라면 그건 조금… 조금 많이 안타까울 것 같다. 슬플 것 같고.
“…다음부턴 찍지 말까.”
“어? 아니, 아니? 왜, 왜? 싫어?”
“아니, 형이 싫어하는 것 같아서.”
“절대 아니야.”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다. 그는 표정에서 확확 티 나는 형을 보며 안도했다. 아직 당신을 대하는 법을 잘 모르겠다.
그가 눈치를 보자 형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냥… 해 줘야 할 게 많은데, 해 준 게 너무 없는 것 같아서……. 잠깐 그 생각 한 거야.”
“…없진 않은데.”
당장 그가 졸려 죽을 것 같을 때 부축도 해 줬고, 죽도 챙겨 줬다. 그가 먼저 바란 적 없음에도.
거기에 사진첩도 형이 먼저 제시한 거였다. 그는 단지 사진 한 장이면 됐는데, 형은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선물했다. 해 준 게 없지 않다.
“네가, 네가 아직 몰라서 그래.”
은우는 울 것 같은, 그것보단 죄책감에 얼룩져 있는 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런가?
“그럴지도.”
그는 정상적인 가족 관계를 모른다. 형제 사이가 보통 어떤지도 모르고, 그들이 보편적으로 어떤 추억을 쌓는지, 어떤 이야깃거리를 만드는지도 모른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으니까. 달리 말하면 처음이니까.
“근데 그거랑 별로 상관없잖아.”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계속해서 알아 가고 있다. 형이란 존재가, 가족이란 게 얼마나 기댈 수 있는 존재인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얼마나 든든해지는지.
표류하는 것 같던 인생을 얼마나 단단히 잡아 주는지.
“난 지금도 마음에 드니까.”
그래서 지금 속도가 나쁘지 않다. 형 대하는 법을 완전히 알지 못해도, 가끔 대화할 거리가 없어서 어색해져도.
적어도 같이 있을 때 혼자라 생각되지 않고, 당신이 불편하지 않으니까.
“천천히 해도 늦지 않아.”
당신이 쥐어 준 온기 한 조각이 아직 따스하니까.
“…울어?”
은우는 형이 기어코 눈시울 붉히는 걸 보았다. 당황해서 다가가면 손을 휘저었다. 다른 손으론 기어 나온 눈물을 꾹 눌렀다.
“내, 내가 왜 우냐.”
울음을 참는 모양새이고 목소리도 그랬지만, 은우는 다가가길 그만두었다.
“내가 어떻게 울어.”
눈물을 삼키는 목소리는 위로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아마도 그랬다. 잘 모르겠지만.
“…마, 맞다.”
억지로 입술을 올린 채 형은 애써 화제를 돌렸다. 눈시울이 붉었지만, 눈물은 멈춘 상태다.
“너, 친구들이랑 사진 찍었댔지. 그거, 보여 줄 수 있어?”
친구는 아니고 지인이지만…….
은우는 전자 노트에 저장된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형은 손이 저릿저릿한지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그러다 마지막 장으로 넘어갔을 때, 은우는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웬 인형 사진?”
“희윤이… 아는 스트리머분 아기한테 주려고 산 건데… 형이랑 좀 닮은 것 같아서.”
“…고양이가?”
“다람쥐가.”
은우는 다람쥐가 가운데 있고 고양이가 조금 잘리도록 찍힌 사진을 형에게 내밀었다.
참고로 안 찍힌 토끼 친구만 희윤이에게 정상적으로 전달될 예정이다. 집에 인형이 하도 많아서 3개를 다 받긴 무리라고 한 탓이다.
“인형 3개를 샀는데 그중 하나만 받으신대서 이거 두 개는 환불할 거야.”
집에 둬도 되지만, 그냥 환불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장식품들은 집에 다 들어왔으니까.
그의 설명을 듣고 있는지, 듣지 않는지.
졸지에 동생에게 다람쥐 같단 소리를 들은 성인 남성(27세, 180cm)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눈물도 쏙 들어가 버렸다.
“어… 그래. 귀엽네……. 나랑은 별로 안 닮은 것 같지만.”
“그런가.”
건우의 얼굴이 조금 심각해졌다가 그 사진을 받아 갔다. 어디에 쓸진 모르겠지만, 은우는 선뜻 사진을 전송해 주었다.
“이게 진짜 닮았다고……?”
건우의 중얼거림은 못 들은 셈 쳤다.
“아, 김희수랑 찍은 건 없네.”
“김희수?”
“제일 친한 친구.”
“아… 미안, 몰랐네.”
“말 안 해 줬으니까.”
솔직히 둘이 알 필요도 없고. 알아 봤자 희수가 형 면전에 대고 경멸하는 표정 짓는 일밖에 없을 거다.
물론 그건 형이 자초한 일이고, 희수가 형을 어찌 생각하든 그녀 마음이므로 간섭할 의지는 없다.
“그, 많이 친해?”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하기도 했고… 신세도 많이 졌으니까.”
그는 최대한 여상스럽게 말했다. 신세 많이 졌다는 말에 또 아파할 사람이 형이었으니까.
“…혹시 전화번호 줄 수 있어?”
그렇지만 돌아온 반응은 조금 달랐다. 타격은 받은 듯했지만, 그것보단 다른 게 중요한 표정이었다.
“걔, 애인 있는데.”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슬픈 눈으로 형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주먹이 온전히 쥐어진 채다. 핏기가 사라질 정도로.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서.”
그래서 차마 호의적이지 않을 거라는 말로 만남을 말릴 수 없었다.
▣ 137. 절정이 지나가는 순간
여실전화의 스토리는 간단히 축약해서 은하성 교단이라는 악의 조직을 주인공이 막는 내용이었다.
하면 은하성 교단은 어떤 단체냐. 귀신을 숭배하며 귀신들이 세계를 정복해야 한다 외치고 다니는 사이비였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8개의 도시에 테러를 벌이는 미친 집단이기도 했다.
이것을 모르는 주인공은 은하성 교단이 단순한 조직폭력배인 줄 알고 덤볐다가 그것을 계기로 완전히 엮여 버린다. 본의 아니게 그들을 따라다니다 8개의 위협을 제거하고 그들 보스를 사로잡는단 얘기다.
물론 그건 최종 결말 내용이고, 은우는 아직 초반 스토리를 진행 중이었다. 세 번째 도시에 그의 발이 닿았다.
여긴 어디서 메인 퀘스트가 진행될까. 은우는 그에 대해 시청자들과 도란도란 떠들며 제한된 길을 따라 이동했다.
멀리 보이는 협회 건물이 갑자기 폭발에 휘말렸다.
“이번엔 크게 터졌네요.”
은우는 그것을 가만히 살폈다. 여실형들은 대전 때가 아니면 도시 내에서 진여화 상태로 돌아가므로 꼭 그 혼자만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사이 건물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짐을 짊어진 검은 옷의 사람들이다. 은하성 교단의 코스튬이 분명했다.
“따라가서 족쳐야 하는데…….”
그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투명한 막이 길을 막고 있어 미리 쫓아갈 수가 없다.
협회에서 뒤늦게 튀어나온 여휘들이 은하성 교단을 쫓아 내달렸다. 그제야 투명한 막이 풀렸다.
“협회에서 뽑기 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켄님도 가챠의 매력에 빠져버렸군,,,,
─가챠신님 한놈 더 갑니다
─솔직히 뽑기는 못참지;;
“생각보다 모으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가챠가 은근히 중독적이다. 중복해서 나온 여실형을 분해하여 경험치석을 얻을 수 있다 보니 레벨 신경 쓸 필요가 없어 더욱 그랬다.
“별개로 도박은 중독의 위험이 너무 큰 것 같습니다. 절제력이 없는 분들께는 추천드리기 그렇네요.”
─무료재화 아니었음 어쩔뻔;;
─무료재화여도 꼴아박는 놈들은 꼴아박드라
─재화가 무료면 뭐하냐ㅋㅋㅋ 확률이 유룐대ㅋㅋ
─켄만큼 운 좋으면 걍 질러도 될듯,,,,
“뭐, 일단 따라가겠습니다.”
은우는 목덜미를 쓸며 일단 은하성교단과 여휘들을 추적했다.
그가 특정 장소에 도착해야만 이벤트들이 진행되는 형식이라 다른 데 먼저 들러도 되긴 하지만, 이런 추적 미션은 미리 하지 않으면 귀찮아진다. 어디 갔는지 나중에 일일이 찾아야 하는 탓이다.
그 결과, 그는 열려 버린 맨홀 뚜껑을 발견했다. 주변에 있던 NPC─말풍선 마크가 떠 있는─에게 말을 걸면 은하성교단과 여휘가 이 아래로 내려갔음을 알 수 있다.
“냄새까지 구현했을까 걱정되네요.”
─갸아아아악
─왜 또 하수구임ㅠ
─경보!! 코 조심해라!
그 자신이야 상관없지만, VR 일인칭 시청자가 고생할 거다. 은우는 그들에게 미리 명복을 빌어 주며 하수구로 뛰어내렸다.
착지할 때 발목이 살짝 쑤셨지만, 이 게임은 여휘의 HP가 따로 없다. 부상도 없다. 괜찮다.
쿡쿡한 습기가 그의 코를 찔렀다.
“그럼 이제… 이곳을 수색해 볼까요.”
지금은 졸지에 여실형 보모가 된 상태지만, 본직은 헌터다. 은우는 기본 제공 아이템 중 하나인 손전등을 들고 하수구를 나아갔다.
하수구 안은 어둡고 축축했다. 오수가 지나가는 곳이라 냄새도 쿰쿰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보통 하수구와 달리 이 하수구는 오수가 흘러가는 길 따로, 사람이 다닐 만한 길 따로 만들었단 것이다.
─실제 하수구는 안 저런데,,,
─실제랑 똑같이 했어봐, 했겟냐?
─너...천재냐?
─현실처럼 오수 묻히고 걸어야했음 겜 때려쳤음;;
─절대 못하지
“여러분들을 위해 최대한 빠지지 않는 쪽으로 하겠습니다.”
─그냥 켄님이 빠지기 싫은 거 아님?
─ㅋㅋㅋ청자 핑계대고 안 빠지는 거 봐
─솔직히 오물은 ㅇㅈ이지....
“전 별로 상관없습니다.”
성 잠입 한다고 오물을 피부에 바른 적도 있었는데 이깟 오수쯤이야. 은우는 목덜미를 쓸다가 똥물 쪽으로 다가갔다.
“증명해 보입니까?”
─ㄴㄴㄴㄴㄴㄴㄴㄴㄴ
─네!
─미쳤냐ㅏㅏㅏㅏㅏㅏ
─나 일인칭이라고 이 사탄들아!!
─당장 물러서!!
VR 일인칭 시청자들의 극렬한 반대하에 더러운 물 뒤집어쓰는 꼴은 면했다. 은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에겐 참 다행스럽게도 하수구엔 쥐나 벌레조차 나오지 않았다.
크아아악!
─깜짝아!
─왜 곰보겜됏냐고ㅠㅠㅠ
─와 ㅅㅂ 진짜 놀랏네
대신 귀신이 드물게 뛰쳐나왔다. 걷어차기만 해도 피통이 바닥을 치는 약한 귀신들이었다.
“에잇,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귀신 외 나오는 걸 꼽으라 한다면 은하성교단도 있었다. 협회 소속 여휘는 대전에서 졌는지 한쪽에 쓰러져 있다.
“으, 부활의 관을 빼앗겼……. 반드시 되찾아야…….”
여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기절했다.
“도움이 안 되네요.”
“눈이 마주쳤으니 어쩔 수 없지! 승부다!”
은우는 하수구가 쓸데없이 넓은 걸 다행으로 여기며 쉬레스타를 진여화했다. 은하성교단이 내놓은 건 귀신화된 쪽가위 여실형이었다.
악당 주제에 똑같이 여실형을 다루면 이상하니, 기존 여실형에서 귀신화라는 포인트를 추가한 거다. 어떻게 귀신을 다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일대일 대전 시스템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효율적입니다.”
오히려 은우가 신경 쓰는 건 대전의 룰 부분이었다. 여휘와 여휘가 대치할 때는 필드에서 야생 귀신과 싸울 때와 다른 방식으로 싸운다.
싱글 배틀일 시 여실형 하나씩만 소환하고, 더블 배틀일 시 둘, 트리플 배틀일 때 셋이었다. 참 묘한 데서 규칙 챙기는 녀석들이 아닐 수 없다. 귀신 잡을 때처럼 숫자로 밀어붙이면 될 텐데.
─적들 중 6명을 다 챙기는 녀석들이 드물어서 그런 거 아님?
─쫍아터진 곳에서 다 부르면 대참사;;
“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덕분에 은우로선 편한 점도 있었다.
“그래도 이러면 제가 다 죽여 버리지 않습니까.”
여실형들 피 깎일 필요 없이 그가 전부 다 따 버릴 수 있었다.
은우의 손이 쿠크리를 공중에 띄웠다가 쪽가위의 할큄을 피한 후 되잡았다.
목덜미에 쿠크리가 박혔다가 그대로 쭉 그어졌다. 약점을 지른 덕에 대미지가 제대로 들어갔다. 보편적인 플레이어보다 상대적으로 레벨링을 덜했음에도 그랬다.
─선봉이 다 따네;;
─이 여휘는 여실형이 답답해서 대신 싸웁니다!
─근데 더 셉니다!
─도망쳐! 학살좌가 간다!
─5252 구울왕이 강림해버렷다고~!
시청자들은 그의 상대에게 그저 묵념을 보낼 뿐이다.
* * *
은우는 발자국을 토대로 하수구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그 결과, 이번 도시에서 사건을 벌인 여하성단과 마주칠 수 있었다.
“하나가 더 왔나.”
짐을 진 여하성단 단원과 호위하듯 근처에 서 있던 자였다. 그 앞에는 여휘들이 쓰러져있다.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면 신음 소리만 흘린다. 정말 도움이 안 된다.
“이조차도 못 막다니 한심하기 그지없군.”
그사이 호위 역의 여하성단이 이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후드를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너흰 먼저 가라.”
“네, 넵!”
짐을 진 이들이 하수구 너머로 도망치고, 후드만 남아 그와 대치했다.
“보스 몹 같네요.”
─ㅇㅇ 맞음 보스
─누나아ㅏㅏㅏ
─누나아아아 나죽어ㅓㅓㅓ
─누나충들 또 몰려왔네
─킹갓제너럴 누님 등자유ㅠㅠ
시청자들이 후드를 보며 열광했다. 은우는 그동안 후드인의 인상착의를 잘 살폈다.
일단 그 여하성단은 지금까지 봐 왔던 이들과 제법 달랐다. 복장부터가 여하성단의 기본 유니폼보다 화려했으니 당연하다. 개조된 정장 핏에 망토인지, 그저 머리부터 쓴 거적때기인지, 숄인지 알 수 없는 것을 둘렀으니.
주위에 대기시킨 여실형의 기세도 흉흉했다.
“제거해.”
여성치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지시하자 후드인의 여실형이 나섰다.
고글을 머리에 얹어 두고 입에는 방독 마스크 같은 걸 끼고 있는 소녀였다. 빨간색 포인트가 들어간 검정색 야상, 새하얀 검, 왼쪽 어깨 아래부터 묶여 휘날리는 천 쪼가리가 독특하다. 귀신화된 것 같진 않다.
“려영의 여실형과 닮았네요.”
검폭은 좁은 주제에 검신의 길이는 1m가 넘는다. 칼자루까지 포함하면 대략 150cm. 양손 검인 츠바이핸더와 맞먹는 크기이나, 손잡이는 하나뿐이었다.
저런 비실용적인 검은 이 게임 시작하고 나서 려영의 여실형밖에 못 봤다. 심지어 생김새도 닮았다.
의심스럽다.
“스토리를 진행하면 밝혀지겠죠. 스포는 마시기 바랍니다.”
은우는 진여화한 쉬레스타를 손가락 속에서 뱅글 돌렸다.
『려화가 승부를 걸어왔다!』
『<보스전>
-보스전은 일반적인 대전과 다른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플레이어는 6명의 여실형을 전원 꺼내어 덤벼들 수 있습니다.』
일대일 금제를 풀어 주는 알림 창과 함께 적의 여실형이 덤벼들었다.
채앵!
그의 쿠크리와 적의 검이 부딪쳤다. 오목하게 파인 부분에 상대의 검신이 걸리도록 한 후 힘 싸움을 하면 그가 좀 밀린다. 스탯 차이 때문이다.
은우는 그 상태에서 상대의 검을 미끄러트린 후 녀석의 뺨을 베었다. 목을 노렸는데 반사 신경 때문에 이 정도로 그쳤다.
채앵!
검신이 기니 좀 먼 곳에서 휘둘러도 그에게 닿는다. 은우는 그것을 재차 튕겨 내며 접근할 방도를 찾았다. 속도는 이쪽이 더 높은 덕택에 금방 방법이 나왔다.
─켄님 다른 애들 꺼내셔두 되요!
─6명 다 꺼내두 됨다
─다구리로 치는 검다 행님!
“압니다. 그저…….”
그의 발이 민들레 홀씨처럼 유들유들 칼날의 바람을 피했다. 적이 그를 공격하기 위해 스킬을 준비하면 미리 눈치채고 거리를 벌리거나 뛰어올랐다.
어느새 소녀 앞에 은우의 신형이 다다랐다.
“통념상 아이를 때리는 것도 안 되는데 여섯이서 치는 건 더 이상하잖습니까.”
아동 인권이 바닥을 쳤던 세계 출신은 이 상황에 대해 아무런 감흥이 없으나,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 발언했다. 기실 여럿이서 덤비면 재미없기도 하고.
은우의 손이 소녀의 팔을 잡아챈 후 멀리 던졌다.
아이의 몸이 공중에서 회전하며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은우의 손이 쿠크리를 뒤로 던지고 SVD를 진여화한 건 그 타이밍이었다.
“무엇이든 명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진여화 전용 대사와 함께 SVD가 스킬을 담아 파란빛을 휘몰아쳤다.
“여러 번 때리기 그러니 세게 한 대로 퉁칠까요.”
광선이 뿜어졌다.
─??: 아이를 때리는 것도 안 되는데
─다구리가 나쁜가 켄이 때리는 게 나쁜가...
─아니ㅋㅋㅋㅋ이 무슨ㅋㅋㅋ
─이것도 충분히 안 되는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잖습니까.”
푸른빛의 섬광은 아이를 집어삼켰다. 곧 다시 드러난 모습은 검을 앞세워 최대한 막아 낸 자세의 꼬마다.
은우는 빠르게 진여화 대상을 교체했다.
“대장과 함께 싸울 수 있다니, 영광이야.”
가장 스피드가 빠른 여실형, 쉬레스타다. 한 대만 맞아도 피가 쭉 깎여 나갈 것 같으니 어쩔 수 없다.
“그보다, 원래 처치하는 거 맞습니까?”
─넹
─정확힌 반피만 깎아도 됨
─애초에 전설검이라;;
─6마리 다 써서 반피 깎아내는게 정석루트
“피가 0이 되면 깨지지 않습니까?”
─원래는 그런데 보스전들은 피 1남겨줘용
─대신 피1되면 전투불가 판정받음
─다 쓰러지면 도전하기 전으로 돌아간다.
─ㅈㄴ 보스전에선 자비로워서 살았지....
“그렇군요.”
은우는 폭발적으로 덤벼드는 소녀의 검을 받아 냈다. 쿠크리의 곡선형 몸체를 이용해 곱게 미끄러트리면 방향이 그대로 꺾여 버린다. 그렇게 흘려 버린 공격이 벌써 다섯 개였다.
아이를 또 날려 버린 은우의 손에서 SVD가 광선을 발사했다. 가진 여실형 중에서 공격력이 제일 높고 제일 덜 아파 보이는 공격이다.
적 여실형의 체력 게이지가 기어코 반에 도달했다.
“제법이군.”
그제야 뒤쪽에서 간간이 스킬 지시만 하던 적이 나섰다.
“돌아와라, 막야.”
“죽일 수 있어.”
“두 번 말하지 않는다.”
“…….”
소녀가 후드인에게로 돌아갔다. 슬쩍 다가가려 시도하면 투명한 막이 그를 원형으로 가로막고 있다. 매번 컷신으로 자유권을 뺏어 가는 것만 봤지, 이런 식은 또 처음이다.
은우는 투명막을 콩콩 두드렸다.
“못 부수겠죠.”
─당근 빳다죠ㅋㅋㅋ
─ㅋㅋㅋㅋ스토리에요
게임할 때마다 이런 좀 아쉽다. 은우는 혀를 찼다. 더구나 이번 보스는 다 잡지도 못한 채 끝났고. 이거 외에도 보스가 더 있을 테니 상관은 없다마는.
그동안 후드인은 정장 바지 주머니에 꽂고 있던 손을 빼냈다. 그러곤 그녀의 허리와 허벅지를 감싸고 있는 벨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정확힌 벨트에 부착되어 있는 주머니 속 도기였다.
“목적한 바는 이뤘으니 너 따위에게 시간 낭비 할 필요 없지. 판도라.”
도기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떨어져서, 이윽고 연기와 함께 사람으로 변했다. 오브젝트 헤드, 즉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보편적인 인간 머리가 아닌 도기를 둥둥 띄우고 있는 존재였다. 그리스 도기 중 하나인 픽시스Pyxis였다.
“무엇을 원하니?”
그것의 목소리는 여자와 남자, 아이와 노인의 것을 겹쳐서 녹음한 재질이었다. 음산하고 소름 끼친다.
사람들이 치를 떠는 사이 은우는 목덜미를 쓸었다. 신들 생각난다. 크게 다른 평가는 아니었다.
“이곳을 무너트려라.”
“후후후, 그래.”
판도라는, 정확힌 판도라의 항아리는 후드인의 명령을 이행했다. 흰 장갑의 손─자세히 살펴보면 옷과 장갑 사이에 손목이 없었다─이 자신의 머리(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새까만 연무 같은 것이 그 속에서 흘러내렸다.
“판도라라면…….”
북유럽 신화에 치중하느라 다른 신화는 아직 손 안 댔다. 애초에 신화 인물이 맞긴 한가? 은우가 머뭇거리는 동안 채팅 창에서 먼저 정답이 나왔다.
─재앙 터진다
─판도라의 상자 아닌가?
─ㄴㄴ 항아리가 원래 맞음
─재앙 굴러와유~!
─미실장캐....
─얜 가능성 자체가 없잖아ㅠ
“재앙입니까.”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주변이 우르르릉 떨리며 돌조각, 돌 파편 따위를 떨어트렸다. 은우는 그로 미루어 보아 이곳이 붕괴될 것임을 쉽게 파악했다.
“도망쳐도 못 살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확인한 출구─맨홀─는 몇 십 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은우는 지금 빠르게 달려도 그곳으로 나가는 건 무리임을 확인했다.
“잘 살아남아 보도록.”
“후후후.”
후드인이 거적때기를 펄럭이며 하수구 너머로 넘어가고, 붕괴가 더욱 빨라졌다. 후드인을 따라가던 판도라의 항아리가 문득 뒤돌아보았다.
은우는 눈이 없는 그것과 시선이 마주쳤다.
“쉿.”
그것은 닫힌 뚜껑을 두드렸고, 다른 손으론 검지를 펼쳤다. 힌트를 줄 테니 조용히 해 달라는 모양새였다. 다만 문제는 뚜껑 안을 가리키는 듯한 저 행동이 뭐냐는 것인데.
─판도라 항아리에 남은 건 희망밖에 없쥬
─희망이다 이거야!
─왤케 박식한 놈들이 많어 너희 비수 아니지
─비수고 자시고 이건 상식선이야 멍청아
“희망이라면, 누군가 구하러 오나 봅니다.”
심지어 잘 보면 투명 막이 그의 도주를 제한하고 있다. 은우는 그걸 확인하고 말풍선이 떠올라 있는 여휘들을 돌아보았다.
“으으, 도와줘.”
본래라면 확률을 재고 냉정하게 쳐 내겠지만, 여실전화는 나름 전체이용가다. 사람 죽는 걸 직접적으로 표현할 리 없다.
그는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쿠웅!
“괜찮나!”
그러자 동그랗게 땅이 무너지며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무너진 땅 위로 구원자가 왔다.
“내 손을 잡아라!”
려영의 손이 뻗어졌다. 해당 도시 스토리의 절정이 지나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