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은우는 가장 먼저 죽일 대상으로 히어로 본부장을 뽑았다. 처리해야 할 이능력자가 많아 가장 어렵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켄님 맛있는 것부터 드시는 타입이셧구나
─하도 어려운 거 쉬운거 사기당해서 걍 어려운 것부터하시는 걸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거다!
─켄 방송 n달,,,,,이젠 다들 켄잘알들이 됐군 좋아 이제 하산해라
“글쎄요. 그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쉽다는 것들을 깨다가 실망하면, 그리고 이것과 어려운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을 듣게 되면 조금 슬플 것 같아서 그런 것뿐이다.
─앗, 하산 실패
─스승님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스승님!
「‘하산해라햇던놈’ 님이 ‘1,000원’ 투척!
역시 학문에는 끝이 없고.....자! 2학기 수업이다!」
─여기서 킹언 나오지 말라고ㅋㅋ
─켄언어학ㅋㅋㅋㅋ
은우는 사람들의 대화들을 지켜보며 엷게 웃었다.
“뭐, 쉬운데 어렵다고 사기당해서 그런 것도 맞습니다. 실망 두 번 하는 것보단 한 번이 낫잖습니까.”
─ㅋㅋㅋ아 뭐야 맞았네ㅋㅋㅋ
─ㄲㅂ 수업 환불하려 햇는데!
─실망 두번 보단 한번이 낫긴 하지ㅋㅋㅋㅋ
─기대치 낮추기 미쳤나봐ㅋㅋㅋㅋ
그는 입으론 가볍게 담소를 나누며 히어로 본부장이 사는 별장으로 차를 몰았다.
외진 곳에 위치한 그 저택은 항만이 보이는 언덕가에 지어져 있다. 경치가 얼마나 좋은지 은우도 꽤 좋은 집이라 무심코 생각할 정도였다.
은우는 그 집을 발견한 직후 차를 멈춰 세웠다. 테일러가 물어다 준 정보에 따르면 저 집에 있는 이능력자는 분신술사, 투명화, 물질 제조가, 충격파였다.
정석 공략법은 저격총으로 죽이는 거라지만, 그건 너무 재미가 없다.
“안으로 들어가 직접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캬 절대 쉬운길로 안가쥬? 이게 방송이쥬?
─근데 켄한텐 이것도 쉬운 길이쥬?
─이와중에 총구 겨누는 거ㅋㅋㅋ아무리 봐도 잡힐 때의 복수잖아ㅋㅋㅋ
─ㅇㄴㅋㅋㅋㅋ복수좌ㅋㅋㅋㅋ
─업-보
─맨날 저격으로 깨서 본부장 죽을 때 얼굴 못봤는데, 캬아 오늘 드디어 그 면상 보겟구만
─오늘밤 꿀잠 딱대
그는 잠시 헬멧을 벗고 망원경을 눈에 대었다. 암살이라면 자고로 적들의 위치부터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능력자는 반드시 위치를 파악해야 했다.
“분신술사와 투명화는 본부장과 붙어 있고, 물질 제조가와 충격파는 각각 3층, 2층에 있네요.”
참고로 건물의 구조는 언덕의 경사에 맞춰 3단계로 분할된 형태였다. 3층과 2층에 건물이, 2층의 절반과 1층에는 경치를 감상하며 피서를 즐기기 위한 수영장, 정원 따위가 있다.
“원거리가 가능한 둘을 처리한 뒤, 성가신 투명화와 분신술사를 처리해야겠습니다.”
테일러가 보내 온 정보에 따르면 물질 제조가는 총이나 폭탄, 전기 함정 같은 걸 순식간에 만들어 사람을 괴롭힌다 했다. 충격파는 입으로 충격파를 토해 내는, 심플하지만 막강한 이능력자였고.
은우는 5분 정도 더 그들의 행동거지를 지켜본 후 몸을 일으켰다. 본래라면 진득이 앉아 사나흘은 살펴봤겠지만, 이건 방송이었기에 그 정도로 시간을 소비할 순 없었다.
그는 대신 장비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권총과 서브 머신건, 나이프 여러 자루, 돌격소총까지 완벽했다.
수류탄이나 유탄 발사기 같은 고화력 무기는 챙기지 않았다. 그걸 챙길 거였다면 그냥 저격총을 쐈을 것이다.
“돌입하겠습니다.”
은우는 조심스럽게 언덕을 내려갔다. 시야가 너무 트인 곳이라 그의 접근을 사전에 알아보고 경계하면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사방에 깔린 감시 카메라는 그나마 테일러가 처리해 주고 있다.
덕분에 인 이어로 끊임없이 그녀의 수다가 흘러 들어왔지만, 참 다행이게도 제작진은 on/off 기능을 만들어 두었다. 꼭 수다를 들어 줄 필요는 없단 소리다.
─켄이 하면 겜 장르가 달라지누;;
─근데 그게 더 간지난다는 게 함정
─하는 사람이 간지가 나니까ㅋ
─ㅅㅂ 너무 논리적이라서 반박을 못하네
─됐고 하루만 켄 될 수 있게 해줘봐 뒷구르기로 켄한테 재롱 떨러감
─그 재롱을 봐야할 켄은 뭔죄냐
─ㅋㅋㅋㅋㅇㅈ켄도 뒷구르기로 도망칠듯
그녀의 수다를 듣지 않아도 시끄러운 건 매한가지지만.
그는 기어코 정문의 벽까지 접근했다. 적이 침입할 걸 상정하지 않는다는 듯 담장은 그다지 높지 않다. 은우가 손을 뻗으면 담장의 끝이 닿았다.
은우는 기척을 잰 뒤 그 담장을 잡고 몸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정원이라고 하기엔 모호한, 흙밭 같은 게 나왔다.
옥상에 텃밭 같은 걸 만들면 이런 형태일까. 은우는 흙밭을 밟은 채 몸을 낮췄다. 건너편 텃밭에 조경사인지 모를 것이 풀들을 관리하고 있다. 정원보다 1.5m 아래 위치한 길목에는 순찰을 도는 경비가 있다.
은우는 조금 고민하다가 그 순찰병이 뒤돌아 갈 때 아래 길목으로 내려갔다. 그러곤 건너편 옥상으로 올라갔다.
“누구…….”
조경사가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은우는 그의 목을 휘감았다. 그러곤 그의 저항을 무시한 채 목을 졸랐다. 풀어 준 타이밍은 그가 산소 부족으로 기절 상태에 돌입했을 때다.
─민간인 안 죽이신다니 지금...?
─Hoxy....?
─방금 우득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ㅋㅋㅋ
─불쌍한 아저씨ㅠㅠㅠ
“안 죽었습니다. 기절한 것뿐이에요.”
은우는 그리 말하며 마침 다가온 경비를 덮쳤다.
소리 없이 등 뒤로 뛰어내린 후, 뒤에서 끌어안듯 입을 손으로 틀어막는다. 다른 팔로는 목을 조르듯이 하며 머리를 꺾어 버리면 소음도, 출혈도 없이 깔끔하게 끝낼 수 있다.
─민간인이 아니라서 죽은 경비ㅠ
─네 죄는,,,,본부장의 돈을 받아먹은 것이다!
─아아....민간인에겐 상냥하지만 경비에겐 가차없는 남자 켄....
“다음 순찰이 오기 전에 처리할 거지만, 혹시 모르니 치워 두겠습니다.”
그는 그 시체를 끌고 구석에 숨겨 두었다. 이런다고 안 발견되는 건 아니지만, 이들이 만약 반복되는 평화에 나태해진 상태라면 또 안 들킬 가능성이 있었다. 시도해서 나쁠 건 없었다.
은우는 다음으로 3층 건물 옥상을 노렸다. 거기까지 가는데 거쳐야 할 경비가 3명이었으나, 그들 시선을 피하는 건 일도 아니다.
그의 몸이 매끈한 벽면을 밟고 옥상에 손을 걸었다.
─신장 사기;;
─아 키로 쉽게 올라가는 거 너무 한거 아니냐구요
─나도 키크고 싶다ㅠ
“여러분도 크시면 됩니다.”
은우는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기만인 멘트를 치며 옥상으로 몸을 끌어 올렸다. 옥상에는 총 2명의 경비가 있다. 하나는 물질 제조가, 하나는 일반인이었다.
서로 거리를 두고 있되 하나를 암살로 죽였을 때 소리를 못 들을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하나를 죽이며 다른 하나를 투척물로 죽이자니 시체가 아래로 떨어질 것 같다. 하필 두 사람은 난간에 서 있었다. 난간이라고 하긴 좀 뭐한 게, 계단 두 개쯤 되는 높이밖에 안 됐지만 말이다.
─이거 안 될 듯?
─각이 안 나오는 것 같은데
─아 아무래도 들킬 듯
─동선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짰다;;
글쎄.
그는 조금 고민하다가 권총을 제자리에서 위로 던졌다. 그러곤 앞으로 조용히 박찼다가, 권총이 추락하기 전에 몸을 낮춰 미끄러졌다.
미끄러운 옥상 단면을 그의 몸이 훑고, 권총이 뒤에서 찰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두 경비의 몸이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는 것과 은우가 바닥에 미끄러져 난간에 등을 댄 건 거의 동시였다.
“뭐야.”
“뭔 소리야.”
일반인이 내려오고, 총이 떨어진 자리로 뚜벅뚜벅 걸었다. 불행히도 그는 넓은 어깨를 구기듯 하여 난간의 그늘에 숨은 은우를 보지 못했다. 그것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어떤 놈이 장난을…….”
일반인이 거리를 좀 둔 순간, 은우는 몸을 빛살처럼 일으켜 그 바로 위에 있던 물질 제조가의 옷을 잡았다. 바짓단도 아니었다. 그의 긴 팔은 물질 제조가가 입고 있던 상체 쪽 방탄복을 쥘 수 있게 해 주었다.
갑작스러운 힘에 물질 제조가가 균형을 잃고 아래로 끌려왔다. 그다음은 나이프에 목이 박혀 죽는 것밖에 없다.
“뭔─”
물질 제조가를 처치한 은우는 연이어 나이프를 던졌다. 옥상 중간쯤 서 있던 일반인의 미간에 나이프가 박히며 그 몸이 뒤로 넘어갔다.
은우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된 듯합니다.”
─켄쳤다 켄쳤어
─이걸 이렇게??
─ㅋㅋㅋㅋ역시 켄은,,,안된다고 말을 하면 안 되는듯
─안 되는 일 따위 없죠? 전부 해내죠?ㅋ
─이젠 놀랍지도 않고 그냥 캬아 역시 켄 이러게 됨ㅋㅋㅋ
─ㅇㅈㅋㅋㅋㅋㅋㅋ
그는 물질 제조가의 시체를 난간의 그늘에 숨겨 두고 권총을 회수했다. 이제 이 두 사람의 시야권에 있어 미처 죽이지 못한 3층의 경비 둘을 더 죽이면 3층은 클리어다.
“여러분께 죄송한 마음도 듭니다.”
─?
─뭐가용?
─??
“정면 대결을 원하셨을 것 같아서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청자들의 심정도 고려해주는 참된 스트리머...
─이 남자, 현실에선 어떨까?
─이걸 정면대결로 깨려면,,,,,유탄발사기는 가지고 와야함,,,,징글징글하게 쏟아져서,,,
─무기도 ㅈㄴ 센 것만 들고잇잖아;;
─그치만 켄 앞에선 다 평등하지!
그건 맞는 말이다. 이능력자가 없더라도 이 정도되는 인원수를 때려잡으려면 고화력기 무기는 필수였다. 숫자란 건 때론 그 자체만으로 폭력이 될 때가 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리 저라도 숫자엔 버틸 자신이 없어서.”
우드득-
그렇기에 조금 지루해도 일일이 목을 꺾을 수밖에 없다.
“3층 클리어.”
─암살 공략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데 왜 따라할 엄두고 안나냐ㅋㅋㅋㅋ
─저걸 따라할 수 있으면 방송해야지ㅋㅋ
─다구리 앞에 장사가 없긴 한데 이걸 보면 또 아닌듯
─이분 사실 정면에서도 이길 수 있는데 약한 척 하는 거 아님?
─ㅇㅈㅋㅋㅋㅋ
“할 수 있다면 했습니다.”
은우는 시체를 조용히 내려 두며 충격파를 처리하기 위해 2층으로 내려갔다.
죽음이 한 걸음, 한 걸음, 본부장의 목을 조르러 다가갔다.
▣ 132. 부동산이 최고
“날 죽이면 이제 모두가 널 쫓을 거다. 넌 영원히 쫓길 거라고! 알아들었어?”
권력자들은 어째서 죽을 때 내뱉는 말들이 거기서 거기일까.
비난, 회유, 협박. 은우는 종류가 다름에도 같게만 느껴지는 세 명을 떠올리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참고로 그가 지금 죽이는 건 마지막으로 찾아온 이능력 협회장이다.
“다음엔 참신한 대사를 생각해 왔으면 좋겠습니다.”
─맨날 비슷한 대사만 치는 듯
─악당들이 다 그렇지 뭐~
─악당짓에 머리 쓰느라 맨날 창의성이 없음
─킹치만,,,,왠만한 대사는 다 나와버렸는걸!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은우의 산탄총이 협회장의 머리를 날렸다. 하도 산탄총으로 헤드샷을 많이 날려서 그런지 산산조각 난 머리를 봐도 별 감상이 안 든다. 원래도 안 들긴 했지만, 이젠 시청자들마저 익숙해진 상태다.
[드디어… 끝이네.]
해킹한 감시 카메라로 시청 중이었는지 테일러는 곧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는 감회가 새로워 보였다. 시청자가 알려 준 정보로는 히어로 본부장에게 10년 넘게 부려 먹혔다 하니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은 이제 자유였다.
[뒷일은 이제 나에게 맡겨. 그동안 너는 하고 싶은 거나 잔뜩 생각해 두라고. 아, 마지막으로 맡길 일이 있으니까 자유를 너무 만끽하다 오진 마.]
일이 하나 남았다며 당부 몇 가지를 남긴 테일러는 금방 전화를 끊었다. 아마 그것까지 하면 엔딩일 것이다.
“하고 싶은 거라.”
은우는 끊긴 전화를 보며 그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 그녀는 주인공에게 한 말이겠지만, 정작 와닿은 건 은우였다.
그의 시선이 지금 막 죽인 협회장의 별장을 살폈다.
본부장이 외진 곳에 별장을 짓고 히어라인 사장은 제 본진에 있었다면, 협회장은 최고급 호텔 최상층에 있었다. 다른 말로는 시내 경치가 한눈에 보인단 소리다.
“엔딩도 코앞이겠다, 경치 구경이나 조금 하고 갈까요.”
─좋아용
─캬,,,진짜 경치 하난 예술이다
─이정도면 비리 저지를 만 하네;;
─그치만 넌 비리를 저질러도 저길 못 사겠지
─무심코 던진 팩트, 남의 눈물을 뽑아냅니다!
은우는 협회장이 방금 전까지 헤엄치고 있던 수영장을 건너 난간에 몸을 기댔다. 난간조차 유리라서 고소공포증이 있는 시청자들은 바로 아찔함을 호소했다.
그에겐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그는 난간 밖으로 손을 뻗었다. 검지와 엄지만을 펼친 두 개의 손이 각각 맞닿으며 직사각형을 그렸다.
손 사진기였다.
“멋지네요.”
좀 탐이 났다.
─멋진 수준이 아닌데?
─발판도 투명해서 개쫄려;;
─음, 이 정도 멋있음은 켄이 반말할 때 정도?
─바브도 일케 가는구나,,,,
─ㅅㅂㅋㅋㅋㅋㅋ과몰입충ㅋㅋㅋㅋ
구름이 잡힐 것처럼 높은 빌딩에서 바람이 불지 않도록 투명한 막까지 설치했다. 덕분에 파란 창공을 아무런 방해 없이 살펴볼 수 있다.
은우는 1분여 동안 그 광경을 구경하다 빌딩을 나왔다. 아쉽지만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벌써 마지막ㅠ
─바브 미국간다...
─바브는 원래 미국배경인데요?
─바바
시청자들이 아쉬움에 발버둥 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 * *
“옜다.”
바이크를 타고 빨빨빨 테일러의 집까지 가자 무언가가 날아왔다.
은우는 그것을 검지와 중지로 낚아챘다. 그 묘기에 사람들이 소소한 탄성을 저지른 건 여담이다.
“확인해 봐.”
담배를 꼬나쥔 테일러가 킬킬 웃었다. 은우는 그제야 낚아챈 것을 확인했다.
잡아챈 순간부터 위험한 물건이 아니란 건 알았지만, 명확한 쓰임새는 그도 몰랐다. 봐야 했다.
“이건…….”
은우는 ‘켄’이라는 이름이 적힌 카드를 보고 목덜미를 쓸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신분증이었다.
주인공이 지금껏 가지지 못한, 가질 수 없었던 그것이다.
“좀 감동이냐?”
테일러는 그렇게 말하곤 담배를 문 채 불을 붙였다. 바람막이용 손이 미처 가리지 못한 불꽃은 그 작은 세계를 주홍색으로 만들었다.
낮임에도 물건이 잔뜩 쌓여 어둑어둑한 방에선 유독 눈에 띄는 빛이었다.
“이능력 협회는 상부 전면 물갈이, 본부는 본부장 일파 전원 사퇴, 히어라인은 공중분해. 그 사이에서 얻어 온 거다. 내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기도 하고, 마지막 일에 대한 대가이기도 해.”
담배에 불을 붙인 그녀는 숨을 후욱 뱉었다. 연기가 순식간에 길을 내었다. 얕게 흘러든 햇빛에 먼지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방에는 잿빛 연기마저 하얗게 보였다.
회색마저 백으로 보이는 것이다.
“나, 이 나라를 뜰 거다.”
그다지 충격적이진 않았다. 그녀가 벌인 일이 일인데 놀랄까. 생존을 위해서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선택이었다.
“아들 새끼 버릇도 고칠 겸, 새 땅에서 완전히 새 시작 해 볼 겸 나가려고.”
그녀는 연기를 연거푸 들이마시고 뱉었다.
“그 신분에 대한 작업은 다 쳐 놨어. 그러니까 사고만 안 치면 너도 평탄히 살 수 있을 거다. 아아, 참고로 넌 외국까진 못 가. 이능력자니까. 이능력자의 입출국 검사가 얼마나 살벌한지는 너도 알고 있지? 나 그것까지 해 줄 능력은 없다.”
“왜 망명 제의를 안 하나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군요.”
─이능력자란 이유 하나때문에 온갖 불이익은 다먹는;;
─근데 히어로 되면 철밥통 아니냐?
─빌런이랑 싸우느라 목숨 걸어야하는데?
─앗 전 그냥 일반인 하겟습니다ㅎㅎ
─갓반인이 최고지ㅋㅋㅋ
테일러는 담뱃재를 재떨이에 톡톡 털었다. 그러곤 품에서 또 하나의 카드를 꺼냈다. 종이 재질인 것을 보아 명함일지도 모르겠다.
“설마 그럴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만약 법으로 안 되겠다 싶으면 이 녀석한테 가.”
은우는 이번에도 검지와 중지로 그것을 잡아 냈다. 슬쩍 들여다보니 전화번호만 간결하게 적혀 있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쓸 만할 거야. 대신 성격 더러운 놈이니 조심하고.”
“엔딩 후 범죄 활동을 위한 빌드 업입니까.”
─ㅋㅋㅋㅋ네ㅋㅋㅋㅋㅋ
─성격 더러운 수준이 아니라 범죄를 권하는 친구임ㅋㅋ
─하ㅠ 테일러 정들엇는데ㅠ
─이 이후론 평판 그닥 신경 안 써도 되용
─기억시민 좀 까다롭긴 한데 그외엔 ㄱㅊ
자연스러운 연결이었다. 테일러는 악 성향을 싫어하고, 스토리를 다 본 플레이어는 온갖 것을 저지르고 싶어 할 테니.
평판을 보고 주인공을 구해 준 테일러인 만큼 후에 벌어질 일로 둘이 충돌할 여지를 내주는 것보단 새로운 캐릭터로 대체하는 게 낫다. 영리한 구조였다.
“아, 생각해 보니까 신분이 생겼으니 이제 집도 살 수 있겠습니다.”
차량은 스토리 도중에도 살 수 있지만, 집은 스토리가 끝나기 전에는 구매가 불가능했다. 그 차이가 뭔가 했더니 이 차이였던 모양이다.
─집 사면 주차제한 늘어나요!
─집들 20채까지 살 수 잇엇나?
─부동산이 최고임ㅋㅋㅋ
“그렇군요.”
은우는 시청자들의 설명을 보다 말고 테일러에게 다시 신경을 돌렸다. 중요하지 않은 잡담이 지나가고 진정한 작별 인사가 막 나왔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는 절대 놓치지 말고 꽉 잡으라고.”
그녀는 활짝 웃으며 손을 뻗었다. 별다른 알림 창은 떠오르지 않았으나, 그것을 잡으면 된다는 건 누구나 알 것이었다.
은우의 손이 테일러의 손과 맞닿았다.
“잘 있어.”
서로를 잡은 손이 흔들렸다.
슬그머니 올라오는 크레딧은 엔딩의 증명이다. 방송 종료의 때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