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은우는 느긋하게 방송을 켰다. 예상대로 분노에 찬 시청자들이 우르르 입장했다. 잘 살펴보면 다들 합방 이후 벌칙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들고 있다.
방송에서 공개하려다 만 것도 있지만, 이후 회식한 스트리머들이 올린 사진 때문이기도 할 거다. 스트리머들은 얄밉게도 은우의 얼굴을 턱만 남겨 놓고 전부 가렸다. 머리카락까지 꼼꼼하게.
─얼굴까
─우리도 보여줘!
─당장 까
─스트리머들이 공인한 미남설....과연 진짜일까?
─길고 길었다,,,이제 얼공해라,,,,
그는 그 채팅들을 보며 순순히 헬멧을 잡았다. 헬멧이 수월하게 벗겨지며 밀빛 머리카락을 드러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말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
참고로 그가 있는 곳은 VR 대기실이었다. 헬멧을 벗어도 사람들이 방송에서 종종 봐 왔던 변형된 얼굴밖에 안 나왔다.
─놀리지 마셈
─현실 얼굴
─진짜 애태우지 말라고ㅡㅡ
─쉬,,,,벌,,,,얼린노무,,,쉐끼가,,,말이야!,,,! 나 때는,,,다들 공개 했다고,,~!~!!
─헬멧아웃!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그것에 넘어가지 않았다. 은우는 실소하며 헬멧을 다시 썼다.
“안 됩니다.”
─아 왜요ㅠㅠㅠㅠㅠ
─잘생겼다는 그 얼굴 좀 보자ㅠㅠㅠ
─우리도 보여줘ㅠ
─탄산님 눈 높아서 어지간한 얼굴 아님 잘생겻다 말 안하시는데,,,,
─어림도 없지!
“안 잘생겼습니다. 그분들이 빈말하신 겁니다.”
은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특혜 논란에 이어서 얼굴 논란이 채팅 창을 점령하게 생겼다.
“이 이상의 언급은 그만하겠습니다.”
그는 가볍게 제지했다. 물론 사람은 쉽게 과거를 잊는 생물이었으므로 쉽사리 통제되진 않았다. 은우는 그 위에 ‘경고는 한 번뿐이다.’라는 말을 던졌다. 채팅방이 잔잔해졌다.
가끔 잔물결이 일긴 해도 나름 평화로운 채팅에 은우는 흡족하게 웃었다. 목소리가 한결 너그러워졌다.
“오늘 할 게임은 ‘Villein and Villein’, 약칭 ‘VAV’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반 박자 뒤에야 오늘 할 게임을 깨달았다. 선악의 구분 없이 제약 없는 자유도를 구현해 내어 컬트적 인기를 끌게 된 ‘그’ VAV였다.
─바브 미쳣누;;
「‘종신형가’ 님이 ‘1,000원’ 투척!
약탈! 파괴! 학살!」
─아ㅋㅋㅋ바브는 못참지ㅋㅋㅋㅋ
─바크리트들 몰려온다 이제
오픈 월드 액션 어드벤쳐 장르 게임, VAV는 현대를 배경으로 이능력자들이 존재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다만 독특한 점은 이능력자가 나오는 주제에 몬스터나 막아야 할 재앙 따위의 일은 없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게임 제목에 나오듯 빌런이고, 빌런이라 함은 악당, 즉 범죄자를 말하니.
이 게임은 절대 정의를 표방하지 않았다. VAV의 주된 콘텐츠는 범죄 그리고 이능력자들끼리의 배틀이었다.
“이능력자 배틀과 범죄에 대한 자유도가 높기로 유명한 게임이니 다들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삼는 게임답다고 해야 할까. VAV는 범죄에 한해서는 무궁무진한 자유도를 가지고 있다. 어린이 관련 범죄, 성범죄는 불가능하나 단순한 폭행부터 방화, 테러 등 대규모 중범죄는 얼마든지 허락되는 것이다.
물론 대상 대부분이 민간인인 만큼 게임의 폭력 수위는 기타 게임들보다 더 높게 여겨지는 편이었다. 아무렴, 같은 살인도 적군에게 향한 것과 민간인을 향한 건 무게가 다른 법이다.
“참고로 최대한 온건한 전개를 지향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이 게임이 범죄의 자유도로만 유명했다면 은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천해 주신 분 말로는 히어로 전개라 한다던가요. VAV의 범죄 콘텐츠를 기대하신 분들껜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스토리상 VAV의 주인공은 빌런이지만, 히어로에게 잡혀 사법 거래를 통해 빌런 체포 일들을 맡게 된다. 히어로 입장에선 이독제독을 쓴 셈이다.
때문에 범죄가 싫은 사람들은 빌런 체포나 치안 유지를 위한 자경대 일 등만─참고로 사적 제재도 범죄다─해도 됐다.
은우가 이 게임을 고른 가장 큰 이유였다.
─바브는 그게 진린데 왜 그걸 안 함
─켄님 좋으실대루 하세용
─ㅠㅠㅠ형 테러 보고 싶었는데ㅠ
─그럴거면 바브 왜함?
─바브에서 범죄 빼면 뭐 남나...?ㅋㅋㅋㅋ
“약한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해서 재미있진 않잖습니까. 미션이라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면 모를까, 나서서 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게임이라도요.”
─게임인데 넘 예민한 거 아님??
─왜? VAV 빌런전개 모럴리스한 건 대부분 ㅇㅈ하는 부분이잖
─현실감 오져서 싫어하는 사람 많음 예민한 건 아니지
─사람들 지금까지 잘만 죽엿으면서 이제와서?
「‘заявление об отставке’ 님이 ‘15,740원’ 투척!
적들 죽이는 거랑 민간인 터는 건 다르다. 난 이 선택을 지지한다.」
─그래도 빌런 좀 기대햇는데ㅠ
“싸우지들 마시고, 시작하겠습니다.”
약간의 소란이 일긴 했지만, 그건 각오한 바였다.
사람들의 반응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걸 확인한 뒤, 은우는 게임 시작을 눌렀다.
하면 세계는 미국에 위치한 가상의 도시로 뒤바뀐다. 미국의 대도시, 시카고를 통째로 구현한, 그러나 조금은 다른 세계로.
▣ 124. 일을 하면 값을 잘 치러 줄 상
은우는 시야가 밝아짐을 느꼈다. 사실 그렇게 밝아진 느낌은 아니었다. 하나뿐인 전등은 짙은 색 벽을 밝히기엔 너무 약했다.
촤르르륵-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이려 하니 저항감이 들었다. 슬쩍 보면 수갑이 그의 손목을 옥죄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수갑의 사슬 부분은 퍽 길어서 책상 한가운데의 돌출부와 연결되었다.
그뿐인가? 목은 의자의 등받이와 연결된 고리로 인해 고정되었다. 완벽한 감금이었다.
“이런 시작은 조금 당황스러운데.”
그는 결국 그나마 자유로운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훑었다. 광택 없는 금속제 벽과 바닥, 희푸른 느낌의 약한 전등 하나, 정면 벽 좌측에 있는 문과 우측 벽의 새까만 창문.
“취조실이네요.”
─아... 잡혀있는 거보니까 뭔가 두근거린다
─수갑,,,,? ㅗㅜㅑ
─구속플 퍄퍄;;
─변태쉑 쳐내!
“요즘 변태분들이 너무 는 것 같은데, 기분 탓입니까?”
─비수들은 원래 변태였어 형
─그걸 지금 앎?
하여간 말들이라도 못하면.
은우는 손목을 한 번 더 들썩거렸다. 스토리인 건 알겠고, 답답하니까 빨리 진행됐으면 좋겠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온 건 꼿꼿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었다. 붉은 정장과 구두가 퍽 기세 좋았다.
“드디어 네 얼굴을 보게 되는군.”
그녀는 책상 건너편의 의자를 끌어당기며 책상 위에 서류철을 내려 두었다.
“이름이…….”
여성이 묻는 순간 알림 창이 삐롱 떠올랐다. 손 바로 앞에 떠올랐으므로 사슬이 허락하는 반경 내에서 충분히 자판을 칠 수 있었다. 여성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서류철을 막 넘긴 상태에서 굳어 있다.
“켄이라고?”
확인을 누르니 시간이 다시금 원래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류철을 한 손으로 든 채 다른 손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신분도 없어, 과거도 나오지 않아. 정부가 보유한 이능력자 명단에도 없는 미등록 이능력자.”
신분도 과거도 없으면 뭐,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걸까? 게임이 알아서 풀어 갈 설정이겠지만, 호기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사이 여성은 서류철 사이에서 사진 여러 장을 꺼내 그의 앞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탁 소리와 함께 사진들이 미끄러졌다.
사진이 흩어진 덕에 은우는 여러 장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훔치는 장면도 있고, 건달처럼 보이는 이들과 한 사람을 둘러싼 광경도 있다.
다만 그 순간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후드를 눌러쓴 그가 껴 있단 점이다.
“이딴 짓거리로 네가 번 돈보다 이 자료를 찾는 데 더 많은 돈이 들었어. 돈이 없다면 차라리 히어로가 되지 그랬나? 적어도 줄 그어지는 것보단 더 많은 걸 벌었을 텐데 말이야.”
그녀는 가볍게 이죽거렸다.
“아, 생각해 보니 넌 신분이 없었지? 테러범, 타국의 스파이……. 네 배경에 대해 짐작하는 것도 어렵군. 추측할 게 너무 많아서.”
“확실히, 과거가 없는 사람을 공인으로 받진 않겠습니다. 히어로…란 직업이 공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등록만 안 된 거라면 그래도 뭐든 될 수 있을 텐데, 아쉽게 됐어.”
여성은 대신 서류 사이에서 방금 보여 준 사진보다 더 큰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 또한 사진이었다.
“아니면 이능력을 숨긴 채 잡범으로 살겠다는 원대한 야망이라도 있었나 보지? 멍청하긴. 이런 커다란 일을 벌이고서도 우리가 널 못 찾을 정도로 무능하진 않아.”
그 사진은 방금까지 봤던 것과 궤를 달리했다. 무려 칼에 찔려 죽은 사람 사진이었던 것이다.
하복부에 4번, 가슴팍에 2번, 목덜미에 3번. 제법 격렬한 싸움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상대의 말을 비추어 보면 그 상대역은 아마 은우가 플레이 중인 주인공이었을 테고.
─살인?
─깜빡이 좀 부탁드립니다
─오우쉣 깜짝아
─주인공이 죽인 거임?
살인이라는 행각에 대해 시청자들이 술렁거렸다. 여인은 의자 등받이에 천천히 제 몸을 기댔다.
그녀는 은우를 똑바로 보았다. 주름에 새겨진 완고함만큼이나 여인의 눈동자는 형형했다. 언뜻 관록이 엿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네가 죽인 이가 누군진 아나?”
단조로운 목소리로 물음이 떨어졌다. 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르는데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심지어 게임은 대사를 지정해 주는 창조차 띄우지 않았다.
“위험도 4의 빌런, 랏 터그Rot tongue다. 그놈에게 잡아먹힌 히어로만 해도 둘에 경찰은 일곱이나 되지.”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여인은 알아서 언급했다. 어디 권력가나 좀 대단한 히어로의 이름을 기대했던 사람들이 의문을 표했다.
─? 그럼 잘 한 거 아님?
─빌런 죽였는데 왜 잡힘
─죽였으니까 잡히지ㅋㅋㅋ
─정당방위일 줄 어케 암?
“앞에서 도둑질이랑 폭행한 게 걸렸잖습니까.”
더구나 랏 터그를 죽이게 된 경위도 정확하지 않다. 정당방위라면 넘어갈 테지만, 굳이 살인이라고 말한 걸 보면 정당방위 수준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 맞다
─살인에 묻힌 자잘한 범죄들ㅋㅋㅋ
─킹인은 인정이지ㅋㅋ
“…‘재생’이란 능력만 가지고 잘도 랏 터그를 죽였군. 어떻게 죽였지?”
“저도 알고 싶은 바인데, 우연이군요. 제게 재생 능력이 있습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
─기반지식 없이 시작한 게임의 폐혜;;
─어서 기억상실인 척 해 형!
─취조실에서 깨어나니 나도 모르던 능력이 나한테 있다고 하는데요?
─우욱십
“대답해!”
여인은 책상을 쾅 내려쳐 가며 채근했다. 그러나 모르는 것에 대해 대답을 어떻게 하겠나.
은우는 이것도 제작진이 의도한 것이겠거니 조용히 기다렸다. 끝내 한발 물러난 건 여인이었다.
“앞서 발각된 그리고 우리가 미처 찾지 못한 범죄들을 뒤로하고서라도 미등록 이능력자란 이유 하나만으로 네가 수감될 여지는 충분해. 혹시 들어 봤나, 캄의 악명?”
“캄은 또 뭡니까.”
─이능력자 전용 수용손데ㅋㅋㅋㅋ
─들어봤겠냐고ㅋㅋㅋ
─시작부터 개꿀잼이네ㅋㅋㅋ
─왜 개그물이 됐냐ㅋㅋㅋㅋㅋ
그녀는 겁을 주려는 의도였겠지만, 무지한 플레이어는 협박에 굴하지 않았다. 그냥 다른 사람의 욕을 듣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개개인에 따라 기분 나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보통은 ‘그렇구나’ 하는 심정이 다였다.
그 기색을 느꼈는지─그렇게 설정된 거겠지만─여인이 결국 한숨과 함께 또다시 물러섰다.
“본래라면 네까짓 놈은 캄에 처박겠지만… 고등급 빌런을 처치한 것과 그로 인해 구해진 사람들의 수. 그리고 그 전까지의 전과가 자질구레한 잡범죄였음을 고려해 제안을 하나 하지.”
그녀는 다리를 반대로 꼬며 제안이란 단어를 입에 담았다.
은우의 미간이 좁아졌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건네지는 제안 중 제대로 된 걸 본 적이 없다. 지금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
“내 칼이 되라. 나는 암중에서 움직일 칼이 필요하다. 히어로가 아니면서 실력은 보증된, 소속이 따로 없는 칼이.”
“…암중에서 움직일 칼이 필요한 거라면 그게 합법적인 일은 아니겠습니다.”
─켄을 칼로 부린다고?
─저분 치트키 쓰네;;
─아 핵 벤이요
“만약 네가 이 제안에 동의한다면 너를 풀어 주지. 네 절도 전과 중 대부분이 의와 식에 관련된 걸 보면 숙식에도 문제가 있는 모양인데, 신분도 제공하고 최소한의 숙식도 제공하겠다.”
경악스러운 사실은 그녀가 내건 조건이 거기서 그치지 않는단 것이라.
“나에 대한 정보를 흘리거나 내가 지시한 임무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하든 그 또한 눈감아 주겠다.”
“눈감아 준다는 건 범죄를 용인한다는 겁니까?”
─ㅇㅇ 넹
─명목상으론 네
─근데 머,,,경찰들 무능해서
─현실모드잖 무능ㄴㄴ
“물론 대외적으로 넌 나와 관계가 없으므로 경찰과 히어로가 널 보면 쫓긴 할 거다. 그건 네가 알아서 처리해야겠지. 난 널 변호하지 않을 테니까.”
집을 제공한다는 거야 위치 파악을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으니 과하게 좋아할 것까진 없다.
그렇지만 범죄를 용인한다는 건 정말 어디까지 일을 시키려는 건지 모르겠다. 공권력일 게 분명한 자가 범죄를 묵인할 정도의 자유를 대가로 내준다면, 그것엔 분명 그만한 가치가 엮여 있을 테니.
“비리 히어로인지 부패 경찰인지…….”
─윗대가리들이 멀쩡한 걸 보질 못해
─VAV에서 멀쩡한 윗대가리 바라면 안 됨;;
─범죄겜에서 청렴한 공무원따위 없어
─현실에도 없음ㅋ
은우와 시청자들이 혀를 찼다. 그걸 모르는 여인은 손을 휘저으며 시선을 끌어모았다. 사람을 앞에 두고 한두 번 설득해 본 솜씨가 아니다.
“참고로 이 거래 외의 사법 거래는 상상도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애초에 신분 없는 미등록 이능력자는 무기징역밖에 결말이 없기도 하고.”
여인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선택해라. 어떻게 할 거지?”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는데요?
─이걸 질문이라고 하네ㅋㅋㅋ
─따르거나 뒤지거나 둘 중 하나 아님?
「‘아몰랑’ 님이 ‘1,000원’ 투척!
쥬기죵」
“선택지를 주는 척하면서 강제하는 솜씨가 괜찮네요.”
은우는 목덜미를 쓸고 싶은 걸 강제된 손에 의해 포기했다. 대신 처음으로 떠오른 알림 창을 확인했다.
『고개를 끄덕이세요.』
스토리상 이건 무조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고개를 저어도 반응이 있을까요.”
─아 왜 넘어가나 했다ㅋㅋㅋㅋㅋㅋ
─모르면 죽어야지
─거절로 받아들이면 레전드ㅋㅋㅋ
은우는 시험 삼아 고개를 저어 보았다. 반응은 없었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제야 여인이 반응했다.
“좋아.”
만족스럽다는 듯 여성은 웃음을 머금었다. 이후 그녀가 꺼내 든 건 초커 같은 물건이었다.
까만 금속제 초커는 썩 감이 좋지 않다.
“이건 GPS 겸 도청 장치다. 이걸로 네가 내 정보를 흘리는지 감시할 거다. 만약 내가 내린 지시를 어길 경우, 위치를 그대로 바깥에 알려 버릴 거고.”
“조금 허술하다 싶었는데 이렇게 나오는군요.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진 아직 모르겠지만.”
모르지만 감은 잡힌다. 정치 싸움이거나 뭔가를 노리고 있거나겠지.
“부디 내가 이 수고를 들인 가치를 해냈으면 좋겠군.”
여성은 새로 꺼내 든 리모컨의 버튼을 꾹 눌렀다. 지금껏 목을 죄고 있던 구속구가 풀렸다.
곧바로 금속제 초커가 채워져 버리긴 했지만, 적어도 의자에 고정하는 게 아니니 나았다.
더불어 손목을 채우던 수갑도 금방 풀렸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린 쇠스랑은 손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 준다.
은우는 무의식적으로 뒷목을 쓸다가 만져지는 초커에 조금 떨떠름해졌다. 착용한 느낌은 없는데 정작 만지면 느껴지는 게 이상하다.
─나중에 가면 그거 디자인 변경 가능함다ㅋㅋ
─룩 못참지
─솔직히 기본 디자인도 나쁘진 않음
─개목걸이 같아서 난 싫던데
“그렇습니까?”
성능 우선이 아닌 이상 멋에 죽고 멋에 사는 게 게이머라지만, GPS 겸 도청 장치 디자인 변경이라니. 그건 그거대로 우습다.
“그럼 주인공은 이 사람에게 디자인 바꿔 달라 요청한 셈이네요.”
─엌ㅋㅋㅋㅋㅋㅋㅋ
─가오에 살고 가오에 죽는다 이 말이야!
─ㅋㅋㅋㅋㅋ죽어도 멋은 부려야함
“이걸 가져가라. 앞으론 이걸로 연락하지. 나가는 길도 그걸로 보면 된다.”
마지막으로 여성은 손목시계 같은 것을 주었다. 접어서 손목 밴드에 매단 전자 노트였다.
─여기다 달면 되는 거 아님?
─왜 굳이 따로주냐
─멍청인가 봄ㅋㅋㅋ
“뭐, 손목에 장치가 붙어 있으면 고장 날 확률이 높지 않습니까. 손목은 잘려도 목숨과 관계없고.”
전자 노트는 시스템이 굳이 사용법을 알려 줄 필요도 없을 만큼 익숙한 물건이었다. 은우는 쉽게 맵을 펼쳤다. 홀로그램으로 친절하게 길 안내가 시작되었다.
길 안내 위에는 그가 지금 해야 할 일도 적혀 있다. ‘히어로 본부 나가기’다.
“인트로는 이게 다인 모양입니다. 나가죠.”
은우는 히어로 본부에서 나가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끝까지 이름이나 직위 하나 알려 주지 않은 여성은 취조실 안에 남았다.
“복도에 아무도 없네요. 물려 뒀나.”
대체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 덕분에 뒷문으로 나오는 것까진 수월하게 해낼 수 있었다.
그는 히어로 본부의 뒷문으로 슬쩍 빠져나왔다. 그러자 전자 노트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히어로 본부장> 잘 탈출했나? 그러면 보내 준 위치로 이동하도록. 그곳에 집을 마련해 두었다.』
“히어로 본부장이었군요, 아까 그 사람이.”
은우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경찰청이나 검찰청 비슷하게 생긴 것 같긴 하다. 그러니까, 꼭 공권력이 일할 것 같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참고로 저거 저장명 바꿀 수 잇어요ㅋㅋㅋ
─난 직장상사라고 저장해둠
─ㅋㅋㅋㅋㅋ
─겜하면서도 상사한테 일을 받아야한다니...!
“그래도 대가 제공을 완벽히 지키잖습니까.”
─그건 그래
─이런 직장은 ㅆㅇㅈ이지;;
─근데 수당을 안 주잖아
─ㄴㄴ줌 좀 짜긴 하지만
시청자들이 ‘집을 줬으니 됐다’, ‘월급이 짜니 좋지 않은 거다’ 옥신각신하는 동안 은우는 새로운 메시지를 받았다. 이동 수단의 위치를 알려 주는 메시지였다.
아직 초반이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진 정확힌 몰라도, 일단 이거 하나만은 알겠다.
히어로 본부장은 일을 하면 값을 잘 치러 줄 상이었다. 뒤에 숨긴 꿍꿍이가 좋든 나쁘든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