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은우는 학자의 집을 나가지 않고 잠깐 숨을 골랐다.
“마저 진행하기 전에 잠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웬만하면 넘어가려고 했는데, 너무 방관하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다.
─??
─분위기 싸하다,,,,
─뭔데용
─갑자기 왜 무섭지
“제가 분명 After Daybreak 관련 주제는 자제해 달라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 계속 채팅 삭제되는 게 보여서 말입니다. 한 번 짚고 넘어가는 게 낫겠다 싶네요.”
─ㅇㄴ
─방장 화났냐?
─켄님 첫 완장질 가나요
─글게 작작 하랬잔아ㅠㅠ
은우는 잠시 콜라 잔을 들었다. 얼음이 많이 녹아서 안 그래도 약한 콜라 맛이 더욱 약해졌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전 이런 거 직접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기껏 시간 내서 저를 보러 오신 건데, 제가 이런 사소한 일에 여러분의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되잖습니까.”
평판을 신경 쓰긴 하지만, 그것에 좌지우지되진 않는다. 그러나 우습게 보는 사람이 있는 것과 모두가 우습게 보는 건 달랐다. 전자는 평범한 일이고, 후자는 평판 관리를 못한 어리석음의 결과물이다.
은우는 그렇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유리와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 혀를 적셔 넘기는 소리가 마이크를 느긋하게 훑었다.
“기사가 날 정도로 큰일이었고, 과분하게도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 주신 만큼 계속 언급될 건 각오했습니다. 또 사람 심리란 게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으니까요.”
그 내용물은 고작 콜라였지만, 캠이 없는 탓에 사람들은 액체의 정체를 제멋대로 상상했다.
심각한 와중에도 드립 욕심을 가진 자들이 ‘음주 방송?’이라는 채팅을 올렸다. 은우의 입술이 힐끗 휘었다.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있다.
“근데 그게 정도를 넘어가면 안 되지.”
단정하지만 부드럽진 않은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떨어졌다. 뱀처럼 느릿하게 기어와 차가운 비늘로 목을 휘감는 음성이었다.
사근거리는데, 목숨을 붙여 줄 것 같진 않다. 일부러 약간의 살의를 담아 속삭인 탓이었다.
“제가 분명 매니저님들 힘들다고 말했을 텐데……. 아니면 언급을 자제해 달라는 말뜻을 이해하기 힘듭니까?”
헬멧을 벗고 얼굴을 마주한 채 말했다면 효과는 배가 되었을까. 그렇지만 관심 종자나 분탕 종자 때문에 드러낼 얼굴은 아니었다.
은우는 마이크에 입술을 바짝 대었다.
“그도 아니면, 제가 우습습니까?”
귀를 녹이는 달콤함 대신 칼을 가져다 대는 살벌함이 흘러내렸다. 채팅 창이 얼어붙었다.
“그러면 상당히 불쾌한데…….”
물론 시청자들이 그를 우습게 보든 말든 은우가 실질적으로 보복하는 건 어렵다. 그러나 그에겐 거대 게임사를 출렁이게 만든 전적이 있었다. 그것도 바로 며칠 전에.
설령 ‘그럴 수 없다’는 걸 머리로 인지하고 있다 해도 침 삼키며 긴장하긴 좋은 조건이었다.
“…우리 서로 시간 낭비 하는 건 그만둡시다. 시간은 금이라고 하잖습니까.”
은우는 그것을 지켜보며 경고를 슬슬 마무리 지었다. 경고는 원래 긴 것보다 짧고 굵은 게 나은 법이다.
“그렇죠?”
환기하자는 의미로 실없이 끝을 올렸다. 좋게 마무리하자는 뜻이었으나, 듣는 입장에선 사채업자가 어깨를 두드리며 “잘하자.”라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 또한 노린 바였다.
은우의 입이 마이크에서 멀어졌다.
“안 그래도 채널에서 방송 며칠 쉬는 게 어떻냐고 했는데, 여러분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온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절 실망시키지 마세요. 계속 그러시면 저 휴가 주고 싶다는 의미로 알아듣겠습니다.”
목소리가 다시 평소대로 돌아왔다. 계엄령 해제 신호였다.
─와 씨,,,,,,,,,바,,,,,,,,
─존나 쫄렸다ㅠㅠㅠ
─무릎에서 같이 방송 보던 울집냥이 켄 목소리 깔리자마자 도망감;;
─목소리로 공포영화도 찍는 켄 당신.....
─진짜 1절까지만 하자 얘들아;;
─다신 듣고 싶지 않으뮤ㅠㅠ
띄엄띄엄 올라가던 채팅이 순식간에 우르르 갱신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외려 반작용으로 분탕이 심해지는 경우도 있는데, 다행히 이 방송은 안 그럴 모양이다.
“참고로 술 아니라 콜라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난 양주인줄;;
─캠 없으니까 상상력이 막 튀잔어
─마피아 보스가 술마시는 줄
“마피아 보스는 아닙니다.”
─마피아 보스'는' 아닙니다??
─그럼 마피아는 맞단 소리임?
─존나 어울린다;;;
하여간 비수들이란 1절에서 끝내질 못하지. 은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저 진행했다.
▣ 115. 아직까진 억측
유기전으로 이동했다. 색색의 그릇들 사이의 유기전주는 어딘가 침울해 보인다. 딸랑. 방울이 울었다.
『유랑화가: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유기전주: 아, 어제 그분이시군요.』
유기전주는 목을 긁적이더니 본격적으로 한탄을 시작했다.
『유기전주: 이 마을은 이상할 정도로 고양이가 많은 편입니다. 때문에 이 시기만 되면 고양이들이 새끼를 마구마구 쳐 대죠.』
“어쩐지 배경에 고양이가 많더라니, 그냥 많은 거였군요.”
─ㅋㅋㅋㅋㅋ
─(금지된 채팅입니다)
─고먀미 커여워
─고양이는 그냥 많아도 됨
─귀여우니까 ㅇㅈ한다
『유랑화가: 고양이가 싫으십니까?』
『유기전주: 그 반대입니다! 전 고양이들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털이 복슬복슬하니 귀엽지 않습니까? 밤에 보면 눈만 형형하게 빛나는 것이 조금 섬뜩할 때도 있습니다만.』
고양이를 모시고 사는 집사들이 동의하며 시시덕거렸다. 가끔 이단자들이 나왔으나 탕 하는 소리가 들리면 없는 게 되었다.
은우는 개도 고양이도 좋아하지 않았지만─귀여워하는 것과는 별개로─현명히 입 다무는 것으로 상황을 모면했다.
『유기전주: 그런데… 요즘 새끼 고양이들이 계속 죽어 나가지 뭡니까. 성체들이 새끼들을 지키려고 무리까지 지은 모양입니다만, 대체 누가 그러는 건지……. 오늘도 새끼가 세 마리나 죽었습니다.』
『유랑화가: 그것참… 괴이한 일이로군요. 혹시 고양이의 시체를 보여 주실 수 있으신지?』
『유기전주: 벌써 땅에 묻었습니다만… 그 자리라도 알려 드릴까요?』
『유랑화가: 그래도 좋습니다. 혹은 고양이가 죽은 자리라든가.』
『유기전주: 발견한 자리 근처에 묻었으니 따로 찾진 않으셔도 됩니다. 저쪽입니다.』
아기 고양이가 죽었다는 이야기에 집사들이 열불 냈다. 그사이 화면은 일러스트로 바뀌었다. 작은 동산이 길가 한쪽에 있다.
순간 내려다보는 화가의 얼굴이 보이더니 그 문신과 눈 색이 바뀌었다.
“또 미니 게임이네요. 버튼 수가 다섯 개로 늘었네.”
─나름 괜찮은듯?
─리듬게임 같다ㅋㅋㅋㅋ
─나중에 열개 되는 거 아님?
─킹리적갓심이다
─(금지된 채팅입니다)
물론 은우는 당연하게도 성공 판정을 받아 내었다.
『유랑화가: 이것 참… 원이 진득진득하구려.』
『유기전주: 예?』
『유랑화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붓이 종이 위를 노닐더니 새로운 단서를 잡아 내었다. 곧 그려진 그림에는 고양이를 죽이는 검은 덩어리가 있었다. 처음 봤을 때도 고양이 시체를 들고 있었는데 그게 괜히 그런 게 아닌 모양이다.
『염사(2)를 획득했습니다.』
『유랑화가: 생명을 이렇게나 마구 해치고 있으니… 오늘 안에 사람이 하나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기전주: 끔찍한 소리! 섬뜩하게 굴지 마십쇼. 무섭단 말입니다.』
“고양이를 죽이는 건 괴이였군요.”
그렇지만 이게 왜 단서일까. 은우는 고민을 해 보았다.
“사람을 죽이는 건 이해 가지만 왜 하필 고양이, 그것도 새끼를 죽였을까요.”
약해서? 무언가를 죽여야 힘이 커지나? 아니면 고양이가 백정의 원을 산 존재인가? 고양이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조사를 더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괴이 자체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 판단하기가 어렵다.
은우는 목덜미를 쓸며 자리를 옮겼다. 이제 다음으로 가야할 곳은 교서관이었다.
『교서관주: 무슨 볼일인가?』
은우는 시작부터 삐딱하게 나오는 노인네를 보며 담담히 질문했다.
『유랑화가: 기생이 죽기 전 밤마다 마실을 나갔다는 풍문이 돌던데… 혹시 맞으신지?』
『교서관주: 뭐? 누가 그런 소릴!』
대놓고 수상한 사람은 보통 범인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렇게 수상하면 아닌 것 같으면서도 혹시나 싶어진다.
“수상하죠. 범인은 아니어도 뭔가 있긴 한 것 같습니다.”
─영감탱 수상해
─범인은 아닌 것 같은데 진짜 수상해ㅋㅋ
「‘지나가던사신’ 님이 ‘1,000원’ 투척!
진시루와 히토츠!」
─사신이 나타났다!
─조심해! 누가 죽을지 몰라!
─언제나 어디다 빼먹었냐
─ㅏ; ㅈㅅ;;
은우는 교서관주를 느긋히 탈탈 털었다.
『교서관주: 누가 그런 말을 하든가? 아니, 보나마나 주막의 여편네겠지! 그런 해괴한 소리에 넘어가지 말게! 여인이 돼서 남의 이야기나 지껄이고 있어!』
『유랑화가: 짚신 파는 소년도 이야기했습니다만…….』
『교서관주: 그 비렁뱅이가 뭘 알겠소? 보나마자 짚신 사러 온 아낙네들이 떠드는 걸 주워들은 거겠지! 하여간 여자들은 입을 죄다 꿰매 놔야 해. 어딜 남자 하는 일에 토를 달아?』
『유랑화가: 그럼 기생이 밤마다 나돌아다닌 것도 모르시겠습니다.』
『교서관주: 당연히 모르지! 내가 백정의 집이나 가는 기생 년을 상대할 만큼 널널해 보이나? 난 그런 천박한 년과 어울릴 시간 없어!』
단순한 마초를 넘어서 차별적 주의가 살짝 엿보이는 말투와 노인의 옹고집으로 얼룩진 대사들은 보는 것만으로 ‘아, 미친 꼰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와중에 멍청해서 자기가 바깥에 나갔다는 걸 제 입으로 토설하고…….”
─아, 할배 틀니 압수
─켄 팩트 폭력ㅋㅋㅋㅋ
─틀니 2주 압수!
어째서 나갔는지는 모르나, 밤마다 나갔다는 건 확실하다. 또한 화연이 백정의 집에 갔다고 말하는 걸 보아 뭔가 화연과 있는 게 확실했다.
『교서관주: 그런 년에게 눈 돌아가면 인생이 망해! 밤거리를 나도는 여자가 해도 뭘 하겠나? 그걸 뻔히 알면서도 저 학자 양반은 좋다고 따라다니고……. 밤에 저만 만난다고 생각하나 보지?』
『유랑화가: 학사님이 무엇을 하셨습니까?』
『교서관주: 야밤에 그년이랑 대화를 나누더군. 보나마나 그 천박한 기생 년이 꼬셔 낸 거겠지! 앞에선 처녀인 척, 지조 있는 척 굴더니 뻔하지 뻔해. 뭐,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쯤이면 알 거 다 알고 정신 차렸을 거란 거지.』
“남 이야길 지껄이지 말라더니…….”
─원래 꼰머들은 그럼 내로남불 오짐
─할배 수준 보인다
─이쯤되면 진짜 사신이 등판해야하는데
─대신 학살좌가 있잔어
─아 ㅇㅋ
그 뒤로 교서관주는 기생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대부분 영양가 없고 정보도 없는 푸념이었다.
“교서관에는 이것밖에 정보가 없으려나.”
대화를 종료한 후, 은우는 이것저것 클릭해 보았다. 그러던 가운데 무언가가 잡혔다.
옥으로 대를 만들고 보석을 이리저리 박은 그것은 아무리 봐도 비녀다. 한가운데 작게 음각된 ㅁ자가 낯익은 게 저쪽 도자전주가 파는 물품이 분명하다.
『유랑화가: 이 비녀는 어디서 났습니까?』
『교서관주: 내, 내 손녀 좀 줄까 하고 산 거네!』
교서관주가 아이는커녕 결혼조차 못 했단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주막 주인에게 사내 구실 못한다는 소리를 듣고 인물 정보에 새로 추가되었으니 확실하다.
그는 궁색하기 그지없는 교서관주의 변명을 들으며 목덜미를 쓸었다.
“이거… 미행까지 한 게 확실하네요.”
안 그래도 교서관주에게 박했던 사람들의 반응이 단번에 싸늘해졌다.
* * *
밤이 되었다. 특별히 방울 소리가 들려온 거리가 없었기에 그는 별다른 소득 없이 주막으로 복귀했다. 소란은 그때 일었다.
주막에서 밤을 지내려는 찰나, 방울이 거세게 딸랑거리는 일러스트가 일었다. 화가는 그것을 절대 무시하지 않았다. 후다다닥 주막을 빠져나가는 모습은 흡사 바람과 같다.
『???: 꺄아아악!』
여성의 비명 소리가 얕게 퍼지고, 방울 소리가 더욱 시끄러워졌다. 두 개가 겹치니 퍽 끔찍하다.
─ㅁㅇ? ㅁㅇ???
─잠크리트 기상!
─켄 방송 보면서 자는 놈이 있다구??
─이방송엔 잠크리트 없을 것 같은데
─잔잔한 겜한 건 잠크리트 좀 있음ㅇㅇ 목소리가 워낙 좋아서
─그건 글치
─근데 그 잔잔한 겜이 몇 개 업을 뿐,,,,
─그치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귀 테러에 두런거리는 사이, 화가의 몸이 그 근원지로 달려 나갔다.
그곳에서 보인 건 식칼에 난도질당한 관리─옷이 관아의 것이다─의 시체와 괴이, 바닥을 기고 있는 여성이다.
“아, 미니 게임 나오겠네요.”
『유랑화가: 기어코 사람마저 건드렸는가!』
전투라서 그런지 새로운 미니 게임이 나왔다. 버튼 누르기는 맞는데 적의 공격을 피해 반격을 넣는 방식이다.
물론 판정 자체가 널널한 게임인지라 손만 안 꼬이면 어렵지 않게 성공할 수 있다.
유랑화가가 소환한 호랑이가 괴이와 싸우기 시작했다. 호랑이의 앞발에 검은 덩어리가 흩어지고 이빨에 물어뜯겼다.
『유랑화가: 이쪽으로 오십시오.』
『???: 가, 감사합니다…….』
장옷을 뒤집어쓴 여성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까 엉금엉금 기던 일러스트는 밤의 영향을 받아 장옷이 검정으로 보였는데, 정식 일러스트에선 짙은 남색이다.
목소리는 더듬고 있는 것에 비해 낮고 조곤조곤하다. 그렇지만 방금 전 일에 대한 공포감 또한 미묘하게 서려 있어 성우에 대한 감탄이 절로 나왔다.
“누굴까요.”
─모르겠는데 목소리 진짜 좋다
─성우 누구임?? 개오진다
─꿀성대 둘 실화냐,,,,
─오늘 진짜 귀호강 오졌다
은우는 여인의 정체에 대해 감을 잡으려 사고 회로를 돌려 보았다. 한두 번만 언급된 게 다인 이름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유랑화가: 이 사내는… 너무 늦었군.』
시체의 일러스트는 절대 정면으로 보이지 않았다. 회까닥 풀린 눈동자나 피가 고인 바닥을 중점으로 가장자리에 몸이 보이는 식이 다다.
『유랑화가: 아, 도망치나.』
그 대사가 나온 후 호랑이를 피해 사라지는 검은 덩어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가의 말이 없더라도 도망친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이렇게 퇴장하나…….”
─이 게임은 싸움하는 게임이 아닙니다
─진정해 형 이거 추리 게임이야
─VR 아니다 동생아
“딱히 잡아 보고 싶었던 건 아닙니다. 아쉬운 거지.”
─그게 그거잖아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싸움본능 미쵸ㅋㅋㅋㅋ
은우는 사람들의 오해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싸움에 미친놈인 건 맞지만 이번에는 진짠데.
『???: 목숨을 빚졌군요. 이 일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유랑화가: 빚이랄 것까지야. 저는 오히려 이 장면을 잊어 주시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 저기다! 저기서 소란이 일었다!』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여인이 깜짝 놀라고 화가가 난처한 표정을 했다.
『유랑화가: 아직 사내의 시신에 담긴 원을 확인하지 못했거늘……. 하는 수 없군.』
화가는 딸랑거리는 방울을 짐짓 보다가 여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유랑화가: 이게 들키면 서로 곤란한 듯하니 일단 도망부터 치지 않겠습니까?』
『???: 예, 그러지요.』
발걸음 소리 두 개가 잠깐 이어지며 화면을 전환했다. 새로운 장소는 좀 떨어진 거리다.
『유랑화가: 자, 그래서 어찌 야심한 밤에 거리에 나와 계셨는지.』
『???: …그냥 보내 주실 생각은 없으시겠지요?』
『유랑화가: 빚을 받으려는 파렴치한은 아닙니다만, 아까 그 괴이를 쫓고 있는 입장인지라. 어찌 습격을 받으신 건지 알아야겠습니다. 녀석을 없애야 하는데 단서 찾기가 영 여의치 않아서 말입니다.』
『???: 그것의 정체를 알고 계십니까?』
『유랑화가: 다른 사람들보단 많이 알고 있지요. 그래서, 알려 주실는지?』
『???: …빚을 졌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겠지요. 알겠습니다.』
장옷을 뒤집어쓰고 있던 여인이 장옷을 벗었다. 고운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살짝 냉한 얼굴이었다.
─누나아ㅏㅏㅏㅏ
─밎틴,,,,,,
─당장 게임 사러 갑니다
─일러레 누구냐;; 개미쳤다
─와;;;;
“다들 너무 좋아하시는군요.”
은우는 떨떠름해졌다. 그는 새 용의자를 발견한 것 같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초요: 초요라 하옵니다.』
『유랑화가: 밝힐 이름도 없는 보잘 것 없는 환쟁이입니다. 아무렇게나 부르시지요.』
『초요: 화공이셨군요.』
초요는 아무리 봐도 흔한 마을 아낙네 같진 않았다. 나름 수수한 옷을 갖춰 입었다곤 하나, 천의 재질부터가 다른데 어찌 평민 여성이라 오해할 수 있을까. 아마 부잣집 아가씨이거나 기생일 것이다.
『초요: 무엇을… 무엇을 여쭙고자 하십니까?』
주제가 여럿 떠올랐다. 은우는 위에서부터 하나하나 질문했다.
『유랑화가: 아까 그 남자는 누구입니까?』
『초요: 그는 형방청*에서 일하는 관원입니다.
(*형방청刑房廳: 치안 업무를 담당하던 관원들이 묵는 곳)』
낯선 단어가 나온다 싶으면 아래에 설명이 친절히 첨부되어 단어를 알려 준다. 은우는 어렵지 않게 형방청이 경찰이나 검사 같은 존재임을 알아차렸다.
“누명을 쓰고 죽은 백정의 괴이가 살해한 것이 형방청의 관원이라. 동기는 충분하네요.”
다만 문제는 초요였다. 왜 하필 괴이는 초요와 함께 있을 때를 노렸을까? 사실 초요가 노려진 것을 관원이 습격받은 것처럼 오해하도록 의도한 건 아닐까.
『유랑화가: 왜 그와 함께 계셨는지?』
『초요: 그건…….』
초요가 어두운 안색으로 머뭇거렸다.
『초요: 그와는 비밀리에 만나는 사이입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기어코 말하는 걸 택했다.
『초요: 제가 하는 일이 일인지라 함부로 정인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밤에 몰래몰래 만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오늘… 그가 죽었지만요…….』
그녀는 자기가 본 게 진짜였는지 거듭 물었다. 목숨의 위기에서 벗어나니 이제야 현실감이 들기 시작한 모양이다.
“수상하네요.”
연인을 잃은 사람이 보통 저리 구나? 케이스 바이 케이스겠지만, 어딘가 꺼림칙하다.
『초요: 이 사실은 부디 비밀로 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소문이 퍼지면 저는…….』
냉담한 얼굴로도 절박함을 표현해 낸 그림과 목소리가 초요에게 생명을 부여했다. 하여 은우의 눈동자는 더욱 건조하고 싸늘해졌다.
『유랑화가: 어려울 것 없지요. 다만 제가 아까 부린 것도 비밀로 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제 그림에 기이한 힘이 있다 이야기가 퍼지면 저도 곤란해지는지라.』
『초요: 반드시 그러지요.』
그 외에 말 걸 만한 주제는 몇 없었다. 그래도 기생이니 좀 더 알지 않을까 하여 화연에 대해 물으면 죽어서 슬프다는, 어딘가 거짓말 같은 대답이 확 돌아왔다. 그냥 의심하는 게 아니라 목소리가 상당히 건조했다.
“그러고 보니… 이분도 장신구를 들고 다니시겠네요.”
─기녀니까 글켓죠?
─저 얼굴이면 장신구 없어도 될 삘인디
─ㅇㅈㅇㅈ
“뭐, 아직까진 억측이니 두고 보겠습니다.”
확실해지기 전까지 함부로 발언해서 편견을 심어선 안 된다. 은우는 조금 더 두고 보기로 했다.
『초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유랑화가: 혼자서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초요: 지금껏 잘만 다녔는 걸요.』
“그렇지만 하나 물어보지 못하는 건 아쉽네요.”
─?
─뭐용
─머 물어봐요?
─먼데요?
“저 관원을… 초요는 언제부터 만났을까요?”
『초요: 그럼 안녕히…….』
그의 시선은 어둠 속에선 검정에 가깝되, 매끄럽게 반사광을 흘리는 옷깃에 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