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유랑화가: 억울하구려. 이제 막 도착한 환쟁이가 무엇을 했다고?』
유랑화가가 화구통 안에서 돌돌 말아 둔 종이 하나를 꺼냈다. 웬만한 성인만 한 크기의 종이는 쫙 펼치면 그림이 이미 그려져 있다. 그것은 풍신과 그의 시녀들이 무언가를 바람에 가둬 두는 그림이다.
『유랑화가: 조금만 수고해 주시게.』
그림이 찢어지고 그 안에 있던 그림이 종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애니메이션 보는 기분인데.”
무의식적으로 내보낸 심정 그대로였다. 사람들이 감탄을 흘렸다.
그때, 알림 창이 떠올랐다.
『진행에 따라 터치 미니 게임이 나옵니다. 지시에 맞게 터치를 진행하면 성공합니다.』
“아, 이런 것도 있네요.”
아마 이런 걸 QTE(Quick Time Event)라고 하던가? 은우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곧, 터치하라는 듯 동그란 버튼이 차례로 떠올랐다. 빨간 원형의 선들이 그 버튼을 향해 천천히 좁아졌다.
그가 할 일은 선들이 버튼에 맞게 줄어들었을 때 누르는 것이다.
『성공!』
잠시 정지 상태였던 일러스트가 마저 진행되었다.
『영靈은 사람의 한恨에 이끌리고, 원怨을 먹어 형태를 갖추매, 그것이 괴이怪異다.』
애니메이션처럼 흘러가는 일러스트 속에서 대사 칸이 떠올랐다.
평소처럼 대사 칸 위에 캐릭터의 반신이 떠올라 있지는 않다. 애니메이션 도중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괴이 속 영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선 먼저 원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껍질을 부수고 영을 꺼낼 수 있다.』
그사이 검은 무언가는 바람 속에 가둬지는 중이었다.
『원을 알고자 한다면 그 원이 탄생한 원인을 알아야 하는 법.』
검은 무언가가 바람 감옥에 완전히 가둬지는 듯하더니 힘을 표출해 바람 감옥을 부수었다.
『유랑화가: 이것 참, 원이 깊으신가 보오.』
『???: 용서 못 해!』
화가가 새로운 그림을 들어 올렸다. 그것을 발견한 검은 형체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남겨진 화가가 혀를 찼다.
『유랑화가: 기생이 백정에게 살해당한 직후 나타났다 하니, 그들 중 하나가 원한의 원인이렸다. 어서 찾아야겠구나. 근 시일 내에 경을 쳐도 단단히 치겠어.』
그 대사를 마지막으로 화면 가운데 무언가가 떠올랐다.
『영은 사람의 한에 이끌리고 원을 그릇 삼아 괴이로 탄생합니다. 괴이를 퇴치하려면 원한의 원인을 찾아 괴이의 육신을 부수고 영을 자유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건의 전말을 조사해 원한의 원인을 알아내세요.』
“괴이를 쫓는다면서 왜 추리 게임인가 했더니 이런 설정 때문이었네요. 이제 본격적으로 수사 시작할 것 같습니다.”
─오올ㅋㅋㅋ
─설정 굳
─게임 잼써 보인다
─게임 이름 머임? 어디서 받음?
사람들이 하나둘 말하는 동안 목표가 새로 갱신되었다.
『목표: 괴이의 탄생 원인에 대해 조사하기.』
“주인공이 대놓고 기생이 백정에게 살해당한 사건이라 꼬집어 주었으니 그에 대한 전말만 알아내면 되겠네요.”
그리고 전말을 알아내기 위해선 그 일에 대해 아는 사람에게 먼저 물어봐야 하는 법이다. 하물며 일지에는 소문 칸도 따로 있지 않았나?
“소문부터 들으러 가 봅시다.”
▣ 113. 음모를 좋아하는 손님
불타 버린 집터에서 이동할 수 있는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덕분에 망설임 없이 다음 장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 시장통 외곽』
인접한 지역으로 이동하자 화면 중간에 글씨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덕분에 은우는 이 거리가 시장통, 그것도 외곽 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배경 퀄 ㅎㄷㄷ하다
─엔간한 3디 겜보다 더 돈 부은 느낌ㅋ
─ㅋㅋㅋㅇㅈㅋㅋㅋㅋㅋ
─크 투디감성 지린다
─(금지된 채팅입니다)
─아 말귀 못 알아듣는 놈들 왤케 많냐
“그러게요. 배경 퀄리티가 상당히 좋습니다. 와중에 고양이 진짜 많네요.”
이곳에도 고양이가 많다. 은우는 무의식적으로 고양이를 클릭하여 상호작용 하며 주변을 살폈다. 시청자들이 미래의 집사라며 깔깔 웃었다.
그렇지만 데굴 구르는 고양이는 귀엽다. 고양이가 그를 싫어해서 그렇지.
“방울은 안 울리고… 대장간이 있네요.”
외곽 지역에는 대장간으로 보이는 초가집과 그 앞에 서 있는 노인 캐릭터가 있었다. 은우는 그 캐릭터를 눌렀다.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인의 일러스트가 떠올랐다. 야장이라는 걸 온몸으로 외치는 근육이 한복 사이로도 잘 보였다.
『대장장이: 뭘 살 거요?』
『유랑화가: 아뇨, 보다시피 환쟁이인지라.』
『대장장이: 흥. 그럼 대장간 앞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가쇼.』
『유랑화가: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마시지요. 휴식 중이신 듯한데, 말동무라도 잠깐 돼 주심이 어떠신지.』
“주인공 넉살이 좋네요.”
대사 창 옆에 떠올라 있는 반신 일러스트가 조금 변화했다. 상황에 따라 표정을 바꾸거나 동작을 달리하는 게임이라서 그런 듯했다.
다만 주인공인 화가는 대체로 웃는 얼굴이고, 대장장이는 어서 꺼지란 눈빛의 굳은 표정이다.
『대장장이: 젊은 놈이 뺀질거리기는. 빨리 묻고 빨리 꺼지시오.』
『유랑화가: 하하, 그럼 사양하지 않고 질문하겠습니다.』
화가가 종이와 붓을 꺼내 들었다. 대사 창에 선택지가 떠올랐다.
『대화하기 ⋖』
물론 선택지가 하나뿐이었으므로 선택권 또한 없었다.
『대장장이: 허, 환쟁이 주제에 글도 쓸 줄 아오?』
『유랑화가: 살려면 뭔들 못 배우겠습니까? 이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배워 둔 잔재주입지요. 자자, 그래서 말인데… 얼마 전에 벌어진 사태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십니까?』
『대장장이: 기생이 죽은 것에 관심이라도 있나 보지?』
『유랑화가: 뭐… 그것도 있고.』
대장장이가 턱을 쓰다듬더니 말을 이었다.
『대장장이: 백정 놈이 요 근래 상태가 영 아니었던 것 정도밖에 모르오.』
『유랑화가: 호오. 혹시 백정이랑 아는 사이셨습니까?』
『대장장이: 대장간이란 게 워낙 시끄러운 곳이잖소. 자리를 잡고 나니 백정 놈 일터 근처더이다. 몇 년 일하다 보니 얼굴도 트고 말도 나누게 됐소.』
『유랑화가: 그렇군요. 그래서, 백정은 어떻게 안 좋았습니까?』
『대장장이: 요즘 얼이 빠져서 다니더군. 가끔 그놈과 한잔하는 게 내 낙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내 부름은 듣지도 않고 휑하니 달려가지 않소? 어이가 없어서는.』
“백정에게 확실히 뭐가 있긴 한가 봅니다.”
『유랑화가: 왜 그런지는 아십니까?』
『대장장이: 모르오. 다만 짐작 가는 구석은 있소.』
『유랑화가: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대장장이: 어려울 게 있나. 아마 화연, 그년 때문일 거요.』
『유랑화가: 화연?』
『대장장이: 죽은 기생 말이오. 그년이 얼마 전부터 기방을 벗어나 아래 거리까지 내려오곤 했거든. 눈 한 번 깜빡이면 서 있는 사내가 없다 하는 외모니, 얼빠진 백정 놈이라면 고년을 보고 헤벌레 했을지도 모르지.』
은우는 그 말을 가만히 듣고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직접 본 어투는 아니네요. 그렇다는 건 추측이라는 거고…….”
남의 추측은 믿는 게 아니다. 하물며 대장장이처럼 기술자로서 오랫동안 신념을 가져 온 자의 말은 완전히 신임해선 안 된다.
신뢰성이 떨어진다기보단 신념에 일생을 바친 이들의 고집을 경계하는 것에 가깝다. 저들은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쩔 수 없는 삶의 방식이다.
─협박 당했나?
─기생한테 백정이?
─아모른직다
“글쎄요. 일단 이야기부터 마저 듣죠.”
그는 시청자들의 추측도 수용하며 대사 창을 클릭했다. 대사가 넘어갔다.
『유랑화가: 그 기생을 죽인 게 백정이라지 않았습니까? 무섭군요.』
『대장장이: 그건 그렇긴 한데…….』
『유랑화가: 한데?』
대장장이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손짓을 했다.
“진짜 잘 만들었네요.”
3D가 아닌 2D인지라 별것 아닌 데에도 감탄이 나왔다. 3D를 쓰면 썼지 2D로 저렇게 그려 나오는 게임이 요즘은 별로 없는 탓이다. 약간 아날로그 감성이 있다.
『대장장이: 남들은 피 맛을 보고 미쳐서 인간까지 건드렸다, 그 기생이 뻥 차서 앙심을 품고 죽였다, 돈을 노린 거다 떠들지만, 내가 보기엔 절대 아니올시다. 그놈은 사랑이나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일 성정이 못 되오.』
『유랑화가: 어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대장장이: 돼지 잡는 게 일이긴 하지만, 놈은 원체 심약해서 말이오. 돼지야 어릴 적부터 잡다 보니 그럭저럭 잘 잡는데, 나머진 절대 무리요. 고기를 훔쳐 가는 고양이들마저 내쫓기만 할 뿐 손도 안 대는 놈이 차였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여? 말도 안 되지.』
『유랑화가: 하면 돈은요?』
『대장장이: 그놈은 물욕도 별로 없소. 물론 화연이 죽기 며칠 전부터 저잣거리에 자주 들르긴 했는데… 일단 그 전까진 물욕이 없었소. 덕분에 집도 휑뎅그렁했지.』
“도축 일을 하면서 다른 동물을 못 죽이는 것도 어려운 일이죠. 어지간히 마음 약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언제든 비이성적이 될 수 있는 동물이니까요. 심지어 물욕 없던 사람이 갑자기 쇼핑을 시작했다는 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단 것인데…….”
─진짜 백정이 죽인 거 아님?
─고양이 죽이는 게 인간이냐
─인간은 죽여도 냥이는 죽이면 안 됨
추측을 멋대로 내뱉으면 편견을 가지기 쉽다. 그렇지만 은우는 방송인 것을 감안해 추측을 하나둘 내뱉었다. 물론 그의 머리는 모든 단서를 잡을 때까지 쉬이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다.
『유랑화가: 흐음. 그런데 어찌 범인으로 몰리셨을까요.』
『대장장이: …기생년의 시체가 있던 곳에서 백정이 쓰는 칼이 발견되었소. 백정의 집에서는 화연의 패물 뭉치가 있다 했고.』
“물증이 확실해서 범인으로 몰렸군요.”
『대장장이: 한데 난 어찌 미심쩍단 말이오? 포졸들이 확인차 물었을 때 본 검은 아무리 보아도 새것이었단 말이지.』
『유랑화가: 새것이라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대장장이: 자랑은 아니지만, 백정 놈은 내가 만든 것만 쓴다오. 내가 만든 게 제일 잘 든다나? 그래서 놈이 가진 도구란 도구는 내가 다 꿰고 있어!』
『유랑화가: …새걸 만들어 주신 적이 없으신 게로군요.』
유랑화가가 그 대사까지 쳤을 때, 채팅 창이 바로 반응했다. ‘누명이네ㅋ’ 내지는 ‘여윽시 부정부패’ 따위의 말들이 가득하다.
『대장장이: 바로 그거요! 얼핏 본 거지만, 그건 만들어지고 나서 몇 번 쓰이지 않은 칼이었소. 나는 그걸 녀석에게 만들어 준 적이 없고!』
『유랑화가: 관아에 말은 하셨습니까?』
『대장장이: 당연하지 않소. 그치만 높으신 나리께서 천한 대장장이의 말을 어디 들어 주겠소? 그럼 네놈이 범인이거나 다른 야장에게 산 것 아니냐는 호통만 들었소이다. 나 원 참.』
“다른 야장에게서 산 게 맞겠죠.”
은우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느긋이 이야기했다.
“범인이.”
그는 달칵거리며 대화를 넘겼다. 몇 가지 말 뒤에 선택지가 떠올랐다.
“물론 시청자님 말씀대로 대장장이가 범인일지도 모릅니다. 가능성은 열어 둬야겠죠.”
대화하기, 종료하기. 은우는 전자를 눌렀다. 물어볼 주제가 떠올랐다.
『사건에 대해 ⋖
타인에 대해
그 외의 것
뒤로 가기 』
“이건 좀 복잡하게 되어 있네요. 일일이 물어봐야 할 걸 생각하면 조금 오래 걸리겠는데.”
─오래 걸리겠는데,,,하면서 다 물어봄
─추리게임은 원래 이런 맛이지ㅋㅋ
─ㅇㅈㅇㅈ
─귀찮아~ 하면서 다 물어보게 됨ㅋㅋ
─근데 추리는 못함ㅠ
─크읏! 울지마! 우리도 다 그래!
─뭐해! 빨리 수면침 가져와!
“난이도는 아직 초반이니 좀 더 보고 논하죠.”
은우는 목록을 차례로 눌렀다. ‘사건에 대해’를 누르면 ‘살인 사건에 대해’라는 세 분류가 나왔는데, 이건 아까 나눈 대화와 같았다.
타인에 대해는 백정과 화연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나온 게 다였다. 백정은 언어 장애인이고, 화연은 성깔 있는 기생이다.
그는 마지막 선택지를 눌렀다.
『대장장이: 아, 생각해 보니 수상한 게 더 있소. 그 연놈들이 죽기 얼마 전에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검은 게 왔다 갔다 했단 말이지. 그땐 들짐승이겠거니 했는데, 지금 와 보면 사람이었을지도 몰라.』
『유랑화가: 귀신입니까?』
『대장장이: 그건… 아닐 거요. ‘게 누구요!’라고 외쳤을 때 화들짝 도망갔거든. 심지어 그것의 가죽은 매끌매끌하니 빛났소. 들짐승의 가죽이 아니야.』
『유랑화가: 그렇군요…….』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이게 다인 것 같습니다.”
혹시 몰라 반복해서 눌러 봤지만, 대사가 달라지진 않았다. 은우는 ‘종료하기’를 눌렀다. 대화 종료 전 짤막한 마지막 말들이 오갔다.
『대장장이: 혹시 진범에 대해 알게 된다면… 꼭 좀 부탁드리오. 이제 와서 뭘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녀석이 죽인 게 아니란 걸 알고 싶거든.』
『유랑화가: 그럽지요. 아, 혹시 백정의 집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대장장이: 이 길을 따라 외곽 지역으로 더 나아가면 나오네만… 잿더미밖에 없을 거요. 포졸들이 홀랑 태워 버렸거든.』
“여기서 외곽 지역으로 더 나아가면 나오는 게 그 불탄 집이었던가요.”
─ㅇㅇ
─불탄 집이 백정 집이었네
─그럼 그 귀신이 백정임?
─말 못한다매
“불타 버린 집터는 백정의 집이었네요. 그렇다면 원한은 백정의 것이겠고. 백정은 원래 말을 못 한다던데, 괴이라서 말할 수 있게 된 거겠죠.”
피해자인 화연의 원한이라면 모를까 가해자의 원한이라. 물론 그런 뻔뻔한 파렴치한이 세상에 없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게임에서 그런 걸 에피소드의 주역으로 삼을 리가 있나.
“백정은 누명을 쓰고 죽은 모양입니다.”
─ㅠㅠㅠㅠ
─하여간 경찰이랑 검사는 믿을 게 못돼!
─유전무죄무전유죄
─에잉!! 쯔쯔
뻔한 이야기였다. 범인이 누군지는 뻔하지 않겠지만.
“그럼 화연을 죽인 후 백정에게 누명을 씌운 게 누구일지 찾아야겠네요.”
본격적으로 수사의 틀이 잡혔다. 은우는 나름 흥미진진한 전개에 즐거움을 느꼈다. 액션이 없어도 재밌는 게임은 있다. 요즘 그걸 알아 가는 기분이다.
“계속해서 마을을 돌아다녀 봅시다.”
은우는 대장장이와의 대화를 마치고 마저 이동했다. 다음 장소는 기생들이 자주 나온다는 위쪽 저잣거리였다.
저잣거리의 배경 그림에는 가게가 상당히 많았다. 그릇이나 향로, 촛대 따위를 파는 바리전부터 패물을 파는 도자전, 포목점이나 의전까지.
대부분 그저 배경에 불과했지만, 몇몇 가게에는 말 걸 수 있는 캐릭터도 있다. 은우는 고양이들을 클릭하며 저잣거리를 살폈다.
─되게 큰 마을인가 봄ㅋㅋ
─별개 다있누
─저 시대땐 수도에서밖에 없을 가게도 보임ㅋ
─고양이 많다ㅠ 귀여워ㅠ
역사 지식이 있는 시청자 몇몇이 제 머리를 뽐내는 사이 은우는 가장 먼저 보이는 캐릭터, 도자전 주인부터 잡고 물었다. 현실이었다면 물어볼 사람이 너무 많았겠지만, 게임에선 기껏해야 열 몇이 다 아니겠나.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도자전주: 어서 옵쇼!』
퉁퉁함과 탄탄함 사이의 사내가 화가를 반겼다. 그의 앞에는 공통적으로 ㅁ자가 음각, 혹은 양각되어 있는 제품들이 줄지어 있다.
“도자전주는 체격이 좋네요. 기생을 쉽게 제압하겠습니다.”
─추리게임 특: 일단 다 의심하게 됨
─근데 범인이 누군진 모름
─ㅋㅋㅋㅋㅋㅋㅋㅋ
─(금지된 채팅입니다)
“사람의 체격에 따라 살해 현장도 달라지지 않습니까. 죽은 지 꽤 되었으니 살해 현장을 보진 못하겠습니다만. 뭐, 염두해 둬서 나쁠 건 없겠죠.”
『유랑화가: 참 고운 패물이 많습니다.』
『도자전주: 아무렴! 저 콧대 높은 기생들도 껌뻑 죽는 물건들밖에 없습니다요. 마음이 가는 여인이라도 있으시면 선물해 보쇼.』
『유랑화가: 하하, 떠돌이 화공에게 어디 여인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인연이란 언제 올지 모르는 법이니 하나 마련해 두는 것도 좋겠지요.』
화가는 느물거리며 도자전주와 잡담을 나누다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선택 창이 떠올랐다.
『유랑화가: 그러고 보니 이름 높은 기생 하나가 며칠 전에 죽었다 하던데… 장사는 잘되십니까?』
『도자전주: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그것 때문에 요즘 곡소리만 나오고 있습니다. 화연, 그년이 죽은 뒤로 기생들이 기방에 콕 박혀 나오질 않아서는.』
『유랑화가: 혹시 죽은 기생에 대해서 아십니까?』
『도자전주: 알다마다요. 설마 단골을 모르겠습니까?』
“화연은 도자전의 단골이었나 봅니다. 그렇다는 건 면식이 있단 소린데.”
사건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는데 기생에 대한 정보는 나올 성싶다. 은우는 시청자들과 의견을 교류하며 대사 창을 눌렀다.
『도자전주: 기방에서 제일 유명한 기생이라 씀씀이도 얼마나 컸는지. 죽기 며칠 전부터는 가게의 패물이란 패물을 싹 다 긁어 갈 기세였지 뭡니까. 날붙이를 무서워해 장도 빼곤 종류별로 다 사 간 것 같습니다. 덕분에 다른 기생들이 패물을 못 사 갈 정도였지요.』
거기서 도자전주는 무척이나 아쉬운 얼굴을 했다. 하기야 손이 큰손이 죽음으로써 앞으로 벌었을 돈이 얼마며, 죽음 자체가 가져온 파장 또한 크지 않았나. 주인 입장에선 아쉬울 법하다.
“동기가 있을지 모르니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일단 외적으로 보면 화연의 죽음이 전주에게 좋을 것 같진 않네요.”
『도자전주: 하여간 천한 백정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인지.』
『유랑화가: 글쎄요……. 어쩌면 백정이 죽인 게 아닐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도자전주: 하하, 음모를 좋아하는 손님이셨군요.』
『유랑화가: 워낙 별별 일을 겪어 봐서요. 방랑 생활 때문에 드러난 형태 그대로 믿기가 어려워집디다. 그래서 그런데, 그 기생이 평상시 원한 산 일은 딱히 없었습니까?』
『도자전주: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요. 기방에 갈 일이 있어야지. 그렇지만 기생들 중 화연의 미모가 제일이라, 같은 기생들끼리 질투했을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화연에게 차인 높으신 분들이라든가.』
그 뒤는 별 내용 없이 대화가 끝났다.
“아직까진 애매하네요. 좀 더 조사해 보죠.”
가게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 * *
『의전주: 지전이나 화피전 위치를 묻나 했더니 소문을 들으러 오셨나?』
『의전주: 안 그래도 그년이랑 백정 놈이 우리 집에 오긴 했소. 둘 다 답지 않은 짓거리를 한 뒤 나란히 죽어 나가서 기억하고 있지.』
『의전주: 양반댁 자제들이 갖다 바치는 비단이 몇이고 패물이 몇일 텐데, 그년이 우리 집에 와서 아낙들이 입을 만한 수수한 옷을 사 가더이다. 반대로 비천한 백정 놈은 우리 그놈이 사긴 좀 비싼 면을 사 갔고.』
『의전주: 낸들 알겠소? 손님이 달라 하니 그냥 줘야지. 뭣보다 화연 그년은 성질머리가 사나워서 물어봐도 답을 안 하오. 백정은 애초에 벙어리고.』
『의전주: 특별한 것? 글쎄… 아, 저어기 학사님이 비단옷을 사 간 것은 기억나오. 원래는 어두운 색만 옷만 입는 양반인데, 좋아하는 여자라도 생긴 모양이지.』
『교서관주: 잘 죽었지! 아주 잘 죽었어! 제 외모만 믿고 불붙은 망아지처럼 날뛰던 년이 화연 아닌가? 외모가 아름답고 사내를 녹일 줄 알면 뭐 하나? 사람이 지혜롭지 못한데.』
『교서관주: 책을 무시하니 머리에 든 게 없고, 머리에 든 게 없으니 함부로 돌아다니다간 죽는다는 걸 생각 못 하지. 하여튼 요즘 여자들은 행실이 바르질 못해!』
『교서관주: 그년은 아주 잘 죽은 거요. 천한 백정 놈이 그렇다고 잘한 건 아니지만! 끼리끼리 죽은 게지! 덕분에 거리가 좀 깨끗해지지 않았나?』
『승혜전주: 소문이요, 잘 알죠? 짚신 사러 오는 사람들이 이것저것 떠들어 주시거든요. 그래서 짚신 필요하지 않으세요?』
『승혜전주: 아하하, 감사합니다! 그래서 뭐가 궁금하시다고요?』
『승혜전주: 백정이나 죽은 기생에 대한 이야기라……. 거기에 귀신 소문까지 더하면 수지가 안 맞는데. 뭐, 잘생기셨으니까 서비스로 해 드립죠.』
『승혜전주: 백정은 잘 모르겠고, 화연 고년은 죽기 전에 좀 이상하게 굴긴 했어요. 꽃신만 사 신던 년이 제 짚신을 몇 짝 사 갔다니까요? 얼마 뒤엔 초요, 그년도 제 짚신을 사 가고.』
『승혜전주: 교서관 주인이요? 아, 그분? 화연한테 크게 망신당한 적 있어서 그래요. 멍청한 인간이죠. 기생 앞에서 문자 쓰지 말란 말도 못 들었나? 솔직히 저는 화연 고년이 죽었다 들었을 때 그 양반이 죽였을 거라 생각했다니까요. 뭐, 범인은 백정이었지만.』
『승혜전주: 그러고 보니 교서관 영감탱이가 밤늦게 어딜 후다닥 달려가는 걸 본 적이 있어요. 화연이 죽기 며칠 전 일이었는데…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저 말고도 그 양반이 밤늦게 돌아다니는 걸 본 사람이 꽤 될 거예요.』
『승혜전주: 화연이 죽은 곳이 궁금하면 의원한테 가 봐요. 그분이 첫 발견자거든요. 참참, 귀신 이야기는 저보다 유기전 주인한테 가 보는 게 좋을 거예요. 그 사람이 처음으로 귀신을 봤거든요.』
『유기전주: 제가 귀신을 봤다는 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유기전주: 처음엔 사실 귀신인지도 몰랐습니다. 어두워서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았지요. 근데 그것과 가까워지자 음산한 공기가 저를 에워싸지 않습니까? 오한이 들어 그것을 자세히 살폈더니, 시뻘건 두 눈이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유기전주: 깜짝 놀라서 다시 보니 머리는 산발이고 두 손에는 칼과 새끼 고양이 시체가 들려 있었습니다. 뚝뚝 떨어지는 핏물이 어찌나 섬뜩한지, 부리나케 달려 도망쳤지요.』
『유기전주: 아아, 들었습니다. 여인의 것인지 사내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연신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중얼거리더군요.』
『유기전주: 관아로 가는 길목입니다. 제가 다음 날 거기서 새끼 고양이 시체를 발견해서 확실히 기억합니다.』
『유기전주: 죽은 기생이요? 글쎄요. 기방에 관련될 일은 별로 없어서…….』
『의원: 기생 말입니까……? 말씀드리는 건 어렵지 않지요.』
『의원: 발견한 건 약방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와 걷던 때였습니다. 처음엔 기생인 줄도 몰랐지요. 옷이 워낙 수수하기도 했고, 애당초 기생이 아침부터 기방을 벗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의원: 그래서 어느 아녀자가 갑자기 쓰러졌나 하고 달려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니 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의원: 이미 숨은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옷은 핏물로 가득했고 흉기는 옆에 내동댕이쳐져 있었지요. 시체는 정자로 누워 있었지만, 앞에는 상처가 없었으니 뒤에서 기습을 당한 것 같았습니다.』
『의원: 그 뒤에는 헐레벌떡 관아로 달려가 신고했습니다.』
『의원: 전낭이요? 아뇨, 그런 건 딱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백정의 집에서 그 기생의 패물이 발견됐다 하니, 그놈이 훔쳐 간 게 아니겠습니까?』
『포졸: 화공 주제에 관아에는 무슨 볼일이냐. 썩 꺼져!』
『문지기: 돈 없는 놈이 어딜 기어 들어오느냐! 귀한 양반댁 도련님들 심기 거스르지 말고 물러가라!』
* * *
은우는 시청자가 질릴 정도로 진득하고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물론 추리 게임이었으므로 뭐라 하는 사람은 없다.
“둘러볼 건 다 둘러본 것 같네요. 주인공도 슬슬 주막으로 돌아가자 독백하고.”
─약간 비주얼노벨 겜 같기두 하고?
─다 둘러본 듯ㅇㅇ
─저는 교서관주가 범인인 것 같습니다
─대놓고 수상해서 범인 아닐 것 같다.
─저거 맞따 대놓고 수상한 놈은 범인 아님ㅋ
“지금까지 얻은 정보만 보면 수상한 건 교서관주인데……. 일단 주막으로 돌아가죠.”
은우는 캐릭터를 조작해 주막을 눌렀다. 뚜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지도 속 캐릭터가 움직였다.
딸랑.
캐릭터가 기생이 살해당했다는 거리를 지나칠 즈음, 일지를 켜도 사라지지 않는 좌측 하단의 방울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