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111화 (111/233)

111화

펜리르의 위턱에 와이어가 칭칭 휘감겼다.

줄의 끝을 잡은 사내는 자신을 쫓는 늑대를 피해 바닥을 미끄러졌다. 그의 몸이 얼음 기둥 하나를 지나쳤다.

그는 얼음 기둥을 빙 돈 후 다시 늑대에게로 달려들었다. 신화 속 늑대가 제게 달려오는 먹잇감을 향해서 입을 쩌억 벌렸다. 그것의 목구멍 너머는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늪지대처럼 어둑어둑하다.

그렇지만 늪지대의 주인에게 대항하는 자에게 두려움은 없었다. 그는 펜리르의 아래턱을 짓밟았다. 펜리르가 그런 먹잇감을 찢어발기려 했지만, 절대 찢어지지 않는 신발이 그것을 방해했다. 늑대의 아래턱이 역으로 바닥에 처박혔다.

그 순간 그는 와이어를 당겼다. 기둥을 감고 있던 와이어가 팽팽해지며 펜리르의 입을 붙잡았다. 늑대가 어떻게든 입을 다물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천천히, 천천히 벌어지던 입이 기어코 쫙 찢어졌다. 꿰매 두었던 상처가 벌어지고 피 분수가 요란하게 튀었다. 하얗다 못해 파르스름한 서리 위에 흩어진 붉은색이 소복하다.

신화의 재현이었다.

“정말로 죽였구나.”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발리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윤기 나는 흰털과 매끄러운 검은 피부의 그를 흠뻑 적시는 눈물이다.

“정말로 죽였어.”

복수를 바라지 않는 복수자는 무릎을 꿇은 채 제 형제의 육신을 끌어안았다. 축 늘어진 늑대는 더 이상의 영혼도, 온기도 품고 있지 않다.

“이젠 정말 끝나 버렸어.”

발리는 서럽도록 울었다. 얼어붙은 대지 위에 반투명한 노란 잎이 흩날렸다.

「발리.」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형, 형…….”

늑대를 끌어안은 이 뒤로 아련한 형상이 덧그려졌다. 유화의 가운데를 잘라 내고 수채화를 덧붙인 듯한 어슴푸레함으로 뛰노는 존재들이었다.

거대한 늑대와, 거대한 뱀과, 얼어붙은 여인과, 사이좋은 남녀 한 쌍 그리고 쌍둥이. 서리 세상 위에 겹쳐진 꽃의 평야.

「우리, 언제 또 이렇게 모일 수 있을까요?」

「형이랑 누나들이 좋은가 보구나.」

「너무 좋아요!」

사이좋은 남녀 한 쌍이 로키와 시긴 부부임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거대한 늑대, 뱀, 얼어붙은 여인 또한 펜리르, 요르문간드, 헬임을 알 수 있다.

하면 쌍둥이는?

「너도 좋지, 발리?」

쌍둥이 중 하나가 활짝 웃었다. 손을 꼭 붙잡힌 채로 온몸을 위축시키고 있던 다른 아이가 입을 벙긋거렸다. 아마 과거의 발리일 것이다.

「형들이 너무 커서 그래.」

「너무 하네, 아버지.」

「네놈들이 큰 게 내 잘못이냐?」

로키의 타박에 늑대는 고개를 휘휘 젓곤 그대로 숙였다. 발리의 옆으로 다가간 그의 머리는 그 눈이 아이만 했다.

「무서우면 말하거라. 덩치를 줄일 재간은 없다만, 동생이 겁먹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 줄 인내심은 있으니.」

「나도 기다려 주마.」

놀랍도록 다정하고 따스한 말이었다.

어린 발리가 고개를 들었다. 늑대의 눈에 비친 소년의 눈동자는 꼭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다.

「뭐야, 형님. 울린 거야?」

「아, 아아아니,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뭐? 막내를 울려?」

로키가 펜리르를 응징하고 모녀는 까르르 웃었다. 철없는 남동생은 아버지의 응징에 부채질을, 나리는 깔깔 웃다 말고 제 쌍둥이를 돌아보았다.

「즐겁다, 그치?」

어린 발리는 그 얼굴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마지못해 답했다.

「응.」

기어코 눈물 흘리는 얼굴은 어느새 다 자란 성인의 것과 맞물린다.

형제의 털가죽에 얼굴을 묻고 있던 발리는 고개를 들었다. 캐릭터와 그의 시선이 얽혔다.

“약속은 지키겠어.”

유일한 사명을 앞둔 자의 말이라기엔 너무도 서글픈 울림이었다. 컷신이 종료되었다.

“…나는 각오가 다 됐어. 마지막 싸움에서… 아버지에게 모든 진실을 고할 각오가…….”

발리는 잠깐 침묵했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너는 됐어? 혹시 아직 준비가 덜 됐다면… 마치고 와도 돼.”

그건 경고였다. 끝을 보기 전에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해결하고, 후회가 될 만한 게 있다면 먼저 처리하고 오라는.

은우의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가 오롯이 떠졌다.

“쓸데없는 걸 묻네요.”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하나였다.

▣ 111. 특혜는

─진짜 사람인가?

─켄 사실 기계 아닐까?

─ㄹㅇ 기계일지도 모름;;

─버츄버처럼?

─ㅇㅇㅇ

─그게 기계가 해낼 수 있는 것 같음?

─기계는 그렇게 못한다.

─켄이 기계면,,,자동전투 AI는 왜 그따구냐

─앗 그러네;;

─하,,,,아직도 여운 오진다,,,

─진짜 소름이 안 가심....

아직 늑대를 죽이는 장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시청자들은 조용히 채팅 창을 올렸다.

그들의 채팅은 평소보다 더 빨랐지만, 기이할 정도로 고요하게만 느껴졌다. 아마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의 마음가짐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마치 영웅의 행보를 엿보는 심정으로 숨을 죽였다. 어순으로 인해 반 박자 느린 자동 번역을 보는 외국인도, 실시간으로 이해하고 따라가는 내국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발뒤꿈치를 든 채 사뿐사뿐 걷는 사냥꾼의 이야기를 훔쳐보았다. 켄은 정해진 서사시를 따라 로키가 있는 전당으로 입장하고 있다.

말수는 극히 줄었지만, 그 피로감을 이해 못 하지 않을뿐더러 그게 더욱 몰입감을 주었다. 사람들은 준비해 둔 야식이 식는 것도 모른 채 로키와 만난 켄을 지켜보았다.

“기어코 여기까지 왔구나, 대적자야. 감히 기만과 거짓을 무너트리고자 하는가? 그렇지만 인간의 죄가 지상을 기어 다니는 이상 나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다. 하여 물으마. 감히 내게 대항하고자 하는 대적자여,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교묘하게 운명을 점쳐 보려 하시는 게 역시 언변에 능한 신답군요.”

플레이어가 어떤 이름을 가지고 덤비느냐에 따라 운명(엔딩)이 달라지기에 나온 대화였으나, 그걸 알아들은 자는 별로 없었다. 사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다.

“‘당신을 저지할 자’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정말로 중요한 건 켄이 기어코 히든 엔딩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

“…하, 깜찍한 수로구나. 감히 나를 기만하려 들다니. 고약한 것.”

“아버지, 접니다.”

“내게 아들을 지키지 못했단 사실이라도 상기시켜 주고 싶었던 것이냐? 얄팍한 수다. 나의 분노는 더욱 커지기만 할 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접니다, 발리예요.”

“…….”

그사이 거짓말쟁이 신이 그를 기만하는 현실을 맞닥뜨렸다.

발리가 옷 안쪽에 걸고 있던 펜던트를 꺼내 보였다. 아까 회상하듯 보여 준 어린 시절에서도 끼고 있던 펜던트다. 반으로 쪼개진, 짝이 있을 게 분명한 펜던트.

“기억하십니까? 생일날 저와 나리에게 반 쪽씩 주셨죠.”

“…펜리르의 이빨과 요르문간드의 비늘, 니플헤임의 서리 조각을 모아 내가 만들었지.”

시종일관 장난스럽고 여유만만하던 태도의 로키가 안색을 굳혔다. 초조하고 또 의심하는, 그러나 맞부딪친 것이 진실이기만을 바라는 표정이다.

“그렇지만, 그럴 리가 없다.”

“그간,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네가, 살아 있을 리 없다.”

“도저히 찾아뵐 용기가 없었습니다. 나리를, 나리를 죽게 만든 죄인으로서 도저히 아버지를 볼 수 없었습니다.”

“분명 오딘은 네가 죽었다고…….”

“죄송합니다…….”

로키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의 입술은 떼어졌다가 붙기를 반복했다. 신의 눈은 그가 바라건 바라지 않건 상대의 격을 파악해 진실을 끌어올리고 만다.

진짜 그가 아는 발리였다.

“정말… 정말이구나.”

“…아버지.”

“진짜 발리, 너야. 내 아들, 발리야. 하지만… 어째서?”

그 물음에는 많은 의문이 내포되어 있었다. 어째서 지금 왔느냐. 어째서 지금껏 몸을 숨기고 있었느냐. 동생을 죽인 게 네 죄가 아닐진대 어찌 내가 너를 질타할 거라 생각했느냐 등등.

“아니, 괜찮다. 네가 살아 있다면 그걸로 됐어.”

그렇지만 그 모든 걸 무릅쓰고 로키는 아들을 향해 달려오려 했다. 살아 있는 걸로 만족해서,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서. 오직 그것만이면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발리의 무릎이 먼저 꿇렸다.

로키가 무어라 할 새도 없이 그 입에서 토해지는 건 그의 탄생에 얽혀 있는 비화였다. 로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아들아.”

“믿기 힘드시겠지만… 전부 진실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하, 나를 닮아 장난과 거짓을 시도해 보려는 게냐? 그렇지만 재밌는 거짓말은 아니구나. 다른 걸로 골탕 먹여 보련. 네가 오딘의 아들이라는… 아주 배라먹을 말 말고.”

로키는 최선을 다해 부정했다. 그 스스로가 기만과 거짓에 통달한 만큼 발리의 말이 허황된 게 아님을 알 텐데도.

“아버지, 이미 아시잖습니까.”

그런 그의 고개를 현실에 맞추는 건 발리의 눈물 젖은 뺨이었다. 로키의 표정이 굳었다.

“그럴 리가 없다. 네가, 네가 오딘의 아들일 리 없어. 아무렴 네가 시긴의 뱃속에서 나오는 걸 내가, 내 아들과 딸들이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오딘의 아들이겠느냐? 오딘은 시긴이 임신했을 당시 몸보신이라며 프레이야의 약을 보낸 것 외엔 시긴과 마주친 적이… 없는…….”

로키의 말이 흐려졌다. 축하주에 뭘 탔네. 사람들은 쉽게 비화를 유추했다. 너무 뻔했다.

“없는, 없는데……. 네가, 네가… 네가 어떻게 오딘의 아들일 수가…….”

뻔하다 해도 불쌍했다.

“그럴 리가 없어…….”

머리는 이미 현실을 깨달았는데 가슴이 인정 못 해서 로키는 한참을 방황했다.

또한 그 부정은 이윽고 분노와 원망으로 변질되었다. 분노의 대상이 명확하다는 현실 역시 감정의 치환을 도왔다.

“…오딘, 오딘, 오딘! 빌어먹을 새끼가!”

피눈물이 기만의 신 위로 떨어져 내렸다.

“용서할 수 없다.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피눈물은 추락함과 동시에 불티로 화했다. 사방에 불꽃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오딘이 남긴 잔재, 오딘의 핏줄이 번영시킨 이 세계, 전부! 나는 용서하지 않으리라!”

전당에 준비된 불의 길 위로 화마가 늘어지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열기 위로 로키의 고개가 올라왔다.

“나는 내 운명을 따라 파멸을 불러올 것이니.”

“옳다. 그렇게 나와야지.”

“수르트! 당신의 검에 불꽃을 심어 주시오!”

“내게 멸망을 바쳐라, 어릿광대야.”

그 순간 수르트가 끼어들며 판도가 뒤바뀌었다. 무스펠의 불꽃으로 강화된 로키가 무기를 들었다.

* * *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라─!”

불꽃이 쏟아지는 전당에서 은우는 다시 활을 들어야 했다. 발리는 로키를 죽이는 운명이지 수르트를 압도할 운명이 아닌 탓이다.

물론 귀찮을 따름이지 어려운 건 아니었다. 강화됐을지언정 로키는 본엔딩에서도 나오는 보스이고, 조금 지켜본 바 패턴도 거의 동일했다. 불 속성 공격이 추가됐을 뿐이었다.

“최종 보스가 너무 실망스러운데.”

펜리르처럼 최선을 다해야만 깰 수 있는 부류도 아니고 패턴이 어렵지도 않다. 사정이 안타까운 건 사실이지만, 그게 보스전의 재미를 더해 주진 않았다.

그는 나른함에 뭉개진 목소리로 불덩어리를 저격했다. 발리의 말에 따르면 로키가 수르트에게서 힘을 받아 오는 연결 고리다.

이걸 부수면 체력 바가 오분의 일씩 빠졌다. 심지어 그것의 숫자는 네 개고, 지금 부수는 건 마지막 것이었다. 정말 쉬운 공략법이 아닐 수 없다.

─진짜 패턴 지랄 맞네

─로키가 최종보스 값은 함

─나만 펜리르보다 약해보이냐?

─펜리르는,,,좀 넘사지

─방금 갠 잡지 말라고 만든 놈이잖...

지루함이 쏟아져 온다.

“정말…….”

지루함은 때때로 잠을 동반하니. 불꽃 비 하나를 피해 착지하던 발이 비틀거렸다.

─어어어ㅓㅓ

─한계신가봐ㅠㅠ

─진자 여기까지만 해도 오진 거임

─마지막인데ㅠㅠ

─켄님 힘내세요ㅠㅠㅠ

시청자들이 안타까움과 놀람의 비명으로 한차례 출렁거렸다.

“이봐, 피해!”

공격이 날아올 때마다 경고를 외치는 발리가 조금 시끄럽다면 그건 사감이 섞인 평가일까.

그는 본능적으로 창을 잡고 휘둘렀다. 그를 노리던 불덩이가 창대에 맞고 튕겨 나가며 터졌다. 그게 하나로 그치지 않고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창대가 휘어지듯 허공을 가르며 궤적을 남겼다. 불꽃이 그의 주변에 불똥을 길게 남기며 스러졌다. 그 간격이 매번 일정해서, 꼭 은우의 주변에 보이지 않는 막이 있는 것 같다.

7개의 불꽃이 전부 창에 막혀 사라졌다.

“…재미없게.”

─내 심장 멀쩡하냐,,,,

─레전드 갱신이다

─로키 눈치 안 챙겨? 빨리 퇴근해

─로키도 짠하고 불쌍한데 켄이 진짜ㄷㄷ

─이와중에 재미없대,,,당신 정체가 뭐야

─여러의미로 짠한 로키....

은우는 던질 수 없는 창을 아쉽게 매만지다가 슬링을 들었다. 날아간 서리탄이 유성 비슷한 것과 부닥치며 김을 쫘악 뿜었다.

그 순간 안개를 펑 뚫어 내며 앞으로 뛰어든 건 2m 사내의 몸이라.

화살이 전당 천장에 붙어 있는 불덩어리를 맞췄다. 순간 몸을 부풀린 불덩이는 그대로 폭발하며 자취를 감췄다.

“커억!”

로키의 체력 바가 닳으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극딜을 넣을 수 있는 그로기 상태다.

은우는 망설임 없이 창을 들었다. 그러곤 굳게 움켜쥔 채 점프했다가 내려찍는 식의 강공격을 때렸다. 대미지가 쭈욱 달았다.

─가자가자가자가자ㅏㅏ

─깨자!!!

─세계최초 히든 클 가즈아!1

─제발제발제발

─켠왕 성ㅅ공? 성공??

─제발 한방에 긑내고 자러가자!!

─아 심장 아파ㅠㅠㅠ

─히든엔딩가자아!!!!!!

─조금만 더!

─ㄹ어ㅏ마땨땨차마임ㄸ흐ㄸ<ㅉ

고지가 코앞인가. 은우는 앞으로 다섯 번만 치명타를 먹이면 죽을 것 같은 체력 바를 확인했다. 언제나처럼 그 예상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창이 막 일어서는 로키의 머리를 후려치고 뱅글 돌아 옆구리를 한 번 더 가격했다. 로키가 불꽃을 뿌리려 하면 은우의 손이 먼저 슬링탄을 흘렸다.

얼음이 쫙 퍼져 나가며 이속 디버프를 걸었다. 그사이에 딜을 더 넣는 것 정도는, 그것도 세 번 넣는 것쯤은 어렵지 않다.

“나는, 나는 너희를─!”

로키가 울부짖는 순간 은우의 창이 그 머리에 박혔다.

체력 바가 0이 되자 이벤트 신과 채팅 창의 폭주가 펼쳐졌다.

푸욱!

발리의 칼이 로키의 가슴을 꿰뚫었다. 전승상으로는 오딘이 발리에게 복수를 위해 들려 준 칼이다. 이름도 없고 역사도 없는 칼.

“아, 아…….”

“아버지…….”

찌른 자는 울었는데 찔린 자는 울지 않았다.

“용서하지 않는다…….”

그저 비통한 표정으로 원한을 토로할 뿐.

그리고 발리가 칼을 뽑아내며 로키를 땅에 눕히려 들 때, 로키의 손이 발리의 뺨에 닿았다.

“오딘도, 신들도 전부… 용서하지 않을 거다.”

로키의 분노가 합당하다 여겼기에 발리는 그 말을 잠자코 들었다. 피 묻은 로키의 손이 발리의 눈가를 쓸었다.

“사랑한다, 아들아…….”

흔한 드라마가 그렇듯 뒤늦게 말뜻을 이해했을 땐 이미 숨이 멎은 후였다. 발리가 로키의 시신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사박사박.

돌가루가 가득한 전당을 밟고 캐릭터가 발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거리가 세 발자국 정도로 줄었을 때 발리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아버지 혼자 남게 하고 싶지 않아.”

“…….”

“아니, 내가 혼자 남고 싶지 않아.”

발리는 울음이 멎은 얼굴로, 무언가를 결심한 눈으로 캐릭터를 올려다보았다.

“부탁이야. 나를, 나를… 죽여 줘. 아버지께 그리고 형제들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게. 설사 우리의 끝이 누이가 다스리는 그곳이 아닐지라도.”

헬이 다스리는 니플헤임은 죽은 자들의 대지이나, 펜리르나 요르문간드, 또는 다른 북유럽 신들이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죄지은 자들은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된다.

먼저 피해를 입어 복수한 것조차 죄임을 생각하면 나리와 헬, 시긴을 제외한 로키 일가는 전부 그곳에 갈 것이다.

“그들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게…….”

『⦁부탁 들어주기

⦁부탁 들어주지 않기 』

정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피곤한 정신으로 은우는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시청자들에게 의견을 묻기엔 너무 귀찮았다. 오래 걸릴 것 같고.

그리고… 부탁을 들어주든 들어주지 않든 결말은 같을 것이다.

『⦁부탁 들어주기

⦁부탁 들어주지 않기』

혼자 남는다는 사실을 못 이겨 죽는 사람은 의외로 많으니까. 적어도 과거의 그는 그랬다.

“정말… 고마워.”

“…….”

은우의 선택에 따라 미미르 때와 마찬가지로 3자의 시점에서 발리의 심장에 창이 꽂혔다. 그게 종막이었다. 끝이었다.

게임의 숨겨진 엔딩이었다. 그가 찾아 헤맨, 그것.

하.

뒤늦게 몰려오는 피곤을 인지하며 은우는 마른세수를 했다. 엔딩 영상이 지나가고 있는 만큼 그의 모습은 영상에 비춰지지 않을 거다.

「불가능해. 못 할 거야. 무리야. 해낼 수 없어.」

문득 모르는 누군가가 내뱉은 말들이 어지럽게 뇌를 때렸다가 그가 일구어 낸 결과에 무너져 내렸다. 언제나처럼.

다만 과거와 달라진 건 보답을 바라지도, 받을 수도 없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톡톡한 값을 받아 낼 수 있을 거란 점이다. 그의 노력도,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한 배짱도 더 이상 헛되게 사라지지 않는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치솟는 채팅 창이 첫 번째 증거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은우는 입술을 벌렸다가 다시 오므렸다. 약에 취한 듯 몽롱해진 정신이 게임을 시작할 때만 해도 하고 싶었던 말들을 삼켰다.

정신력도 정신력 나름이지, 몸이 안 받쳐 주니 여기까지가 최선인 모양이다. 사고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결국 은우는 엔딩 소감을 최대한 짧게 줄였다. 마침 엔딩도 끝나서 마지막 싸움 전으로 로드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까지 줄이고 줄인 이 한 마디가 과연 괜찮은 것인지 검토해 보았다. 그렇지만 모르겠다.

“특혜는 후불입니까?”

그냥 이 피곤의 무게만큼 엿을 먹여 주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 * *

“으.”

그는 목덜미를 쓸며 캡슐에서 나왔다. 문득 느껴지는 기척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드니 불이 켜진 방에 서 있는 형이 있다. 생각지도 못한 타인의 존재에 잠이 확 달아났다.

“어…….”

‘형이 왜 여기 있어?’라고 물으려던 말은 성큼성큼 다가온 형에게 막혔다. 손이 그의 머리를 콱 누르듯 쓰다듬었다. 고개가 숙여졌지만,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쓰는 손길이 불편하진 않았다.

“진짜 할 말 많지만… 그래도 수고했다.”

그 순간 긴장이 확 풀렸다. 별것 없는 한 마디인데도 단지 말한 사람이 형이란 이유로, 가족이란 이름 하나에, 한 번도 이렇게 말해 준 사람이 없었어서.

듣고 싶었던 순간에 듣게 되어서.

“어서 자라.”

왜 여기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답해 줄 것 같지 않았다. 굳이 캐묻고 싶지도 않았다.

“형.”

그냥, 그냥 반겨 주는 것만으로 만족스럽다. 발리가 어째서 그렇게 울부짖었는지 조금 이해가 간다.

“침대 어딨냐? 저기야?”

“으응…….”

밀려오는 피로는 그의 혀와 입술을 뭉갰다. 은우는 꾸벅꾸벅 졸며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더 무리했던 것인지 형의 부축까지 받아야 했다. 그래도 웃음이 비실비실 났다.

“어휴, 진짜 대단한 새끼. 내 동생이지만 너, 진짜 대단하다.”

타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몸을 기대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건 정말 기묘하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직 잠에 들지도 않았는데 꿈속을 걷는 것 같다.

“이런 씁……. 너 왜 이렇게 무겁…….”

누군가가 낑낑대며 최선을 다한 끝에 그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울 수 있었다.

“고므…….”

목소리가 나오려다가 스러졌다. 목소리가 전해졌을까, 전해지지 않았을까. 잘 모르겠다.

“피곤할 텐데 어서 자라.”

그는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떴다. 입술은 뻐끔거렸는데 언어는 나왔을까.

“자라니까.”

가물어지는 시야의 마지막은 그에게 이불을 덮어 준 후, 뻗어진 손이었다. 눈가에 미적지근한 체온과 무게감이 얹어졌다.

그 온기가, 정말 보잘것없는 그 온기 하나가 그렇게나 따스할 수가 있나 싶어서.

무거운 평온이 그의 눈꺼풀을 내렸다. 만일 지금 죽음이 찾아온대도 그는 행복할 것이다. 정말로, 행복할 것이다.

“고므워…….”

혼자 눈을 감는 게 더 이상 무섭지 않다.

* * *

<나는 지금부터>

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

이제부터 켄과 나는 한 몸이다

켄에 대한 공격은 나를 향한 공격으로 간주하겠다

─슬레이프니르 필요하다고 초친 놈들 다 손들어

└죄송합니다!

└빠른 사과 국룰이지

─진짜,,,,우리나라에서 켄은 더이상 범접불가다,,,,,빌리 능가함

└빌리 능가한지가 언젠데;; 빌리는 이제 퇴물이지

└빌리 아직 퇴물 아니거든? 말 다했냐?

─믿습니다 켄멘,,,,

<하 진짜 미치겠네>

[클립영상]

왜 사내 새끼 목소리에 가슴이 웅장해지냐....

─아가리 피하는 것도 그렇고 자연스럽게 올라타는 것도 그렇고 말도 그렇고 정말 버릴 게 없는 부분,,,

─"숨, 쉬고 있으면 채팅쳐.”

드르륵....탁

“숨, 쉬고 있으면 채팅쳐.”

드르륵....탁

“숨, 쉬고 있으면 채팅쳐.”

드르륵....탁

─이거 아니었으면 숨 안쉬어서 죽었음

└ㅇㅈ,,,,

─진짜 딜레이 땜시 채팅창 하얘지는 건 처음 봣음...

└그거 딜레이가 아니라 너무 빨리 올라가서 그런 거임ㅋㅋ

진짜 미쳤어 그냥 제 지갑 다 가져가세요

─(빈 지갑 살랑살랑)

└개색끼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갑에 돈이 있는데 미리 안 바쳐둔 비수가 있다?!

└루삥뽕삥방

<몰폰으로 켄 방송보다가>

존나 오져서 소리 질렀다가 아 쒸바 몰폰이었지;; 하면서 입막았는데 옆집에서 더 큰 소리 들려와서 묻힘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올림픽이냐고ㅋㅋㅋ

└국뽕차는 건 비슷한듯

└주모오오오!!!!

─난 방 뛰쳐나갔다가 동생(남보듯 하는 사이)이랑 마주쳐서 그대로 얼싸안음...

└동생이 ㅈㄹ안함?

└개도 켄 방송 보고 우오오오 하고 뛰쳐나온 거더라

└켄이 가족 화해시켜줬누ㅋㅋㅋㅋ

.

.

.

<진짜 히든엔딩 보는 거 아냐?>

아시바류ㅠ퓨ㅠㅠㅠㅠㅠ

제발, 제발 가자 제발제발

─ㅅㅂ 이렇게까지 안 했는데 무조건 봐야함

└히든엔딩이 무슨 노력상이냐?

.

.

.

그래서 켄이 히든엔딩 탄다는 거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발제발,,,,,,

─켄 전적 생각하면 볼 듯

└하 아직 엔딩보지도 않았는데 가슴 벅차....

└ㄴㄷ? ㄴㄷㄴㄷ

<제작진 똥줄 좀 타고 있냐?>

???: 아주 명석하고 강인한 사람만이 이 엔딩을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편법이나 쓰는 누군가와 다르게 말이에요!

켄: ㅇㅋ 히든엔딩 켠왕

업-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 진짜,,,,제대로 멕인다

─외국인들 벌써 역시 한국인 소리 나옴ㅋㅋ

└아니ㅋㅋ저건 한국인이라서가 아니라 켄이라서 가능한 거잖아ㅋㅋㅋ

─크 국뽕 찬다

└주모~!!! 샷따 내려!~~!!!

└오늘 집에 안가~~!!!

<방송보려고 데이브릭 샀는데 >

환불하고 싶어짐,,,,

─? 갓겜인데 왜?

└이번 일 아니었음 켄이 억울하게 묻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매출 올려주기 싫어서,,,,

└ㅅㅂㅋㅋㅋㅋ아 근데 인정

└방송 보려면 사야하고,,,,,사면 매출 올려주는 셈이고,,,,진퇴양난;;

.

.

.

<잡았다아아아ㅏ!!!>

ㅅㅂ 인간승리인간승리!!

─허어하우허ㅓㅏ하우하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5252~!! 줸쟝~!! 믿었다구 형씨~~~!!!

<이게 한국인이다>

[클립영상]

한국인은 예로부터 독종이었다 이거야

─스앵님 덕분에 오늘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이다 오지게 들이켠 기분임

─"특혜는 후불입니까?”

드르륵....탁

“특혜는 후불입니까?”

드르륵....탁

“특혜는 후불입니까?”

드르륵....탁

└아까도 그러더니 드르륵 탁 빌런이냐고ㅋㅋㅋ

─이래놓고 헐레벌떡 특전 지급하면 레전드

└진짜 그럴 듯ㅋㅋㅋㅋ

<후,,,,,,켄, 너는>

[짤방]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이쯤되면 인간문화재 등재감 아님? 문화재원에서 연락 안 오나?

└절.대.등.재.해.

─우리 나라에 켄이 있는 게 너무 자랑스러움,,,

└(어깨 들썩)

─진짜 전설이다ㅠㅠㅠㅠㅠㅠㅠ

<내일 쉬겠지?>

킹직히 이번 건은 삼일 쉬어도 인정임...

─ㅇㅈ....

─형 밥 좀 먹고,,,,,잠좀 자고,,

─안그래도 다박 지금 휴방 공지 때림

└무조곤 올라와야지;; 안 쉬면 그게 인간이냐

└다박 일 빠릿빠릿하누

─내일 얼굴책에서 생존신고나 해주면 좋겠다

└또 먹는 거 사진 올라올 각

└켄은 방송 아니면 먹기밖에 안하는듯;;

└그 체격이면 킹정이지ㅋㅋㅋ

└그건 그래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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