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아홉 명의 어머니를 찾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와이트의 군대가 주인공을 추격하고, 돌아다니는 길 자체도 험악해서다.
그뿐인가? 사이드 퀘스트, 유적 탐험, 산적 제거, 챌린지, 지도 밝히기, 히든 보스. 어찌 됐건 할 일도 많았다. 삼천포로 빠지기 쉬운 구조인 것이다.
하물며 히든 엔딩을 찾고 있는 상황에서야 강제로라도 빠져야 했다. 지금 그러는 것처럼.
▣ 106. 무슨 생각을 하든 이기는 건
은우는 활을 들며 분지 아래의 거인을 바라보았다.
대략 5m 정도 되는 신장을 가진 그것은 시뻘건 불길을 제 옷 삼아 걸어 다니고 있었다. 유일하게 불꽃이 맺히지 않은 건 하나밖에 없는 커다란 안구─눈꺼풀이 위아래가 아닌 양옆에 있었다─였다.
“이름값 하네요.”
─ㅇㅈㅇㅈ
─완전 불덩이자너~
─저거 공격 먹히긴 하는 거임?
─아 에반데
신화에 따르면 무스펠하임Muspelheim은 세계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있던 폭염의 땅이다. 그곳의 열기는 너무나 뜨거워 처음부터 그곳에 존재했던 무스펠들과 수르트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 거인들은 몸에 불꽃을 휘감고 있노라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몬스터에게 임팩트를 줘야 하는 게임이라면 더더욱.
“약점이랄 건 별로 보이지 않는데… 역시 눈밖에 없겠죠? 속성 약점은 서리일 것 같고.”
그는 그것을 좀 더 자세히 관찰했다.
다리는 짧고 팔은 길다. 몸통은 두툼했는데 전체적으로 직사각형 체형이었다. 다만 얼굴은 거북목에 걸린 것처럼 구부정하게 내려와 있었다. 뒤에서 보면 머리통이 아예 안 보이고, 정면에서 눈높이 맞춰 보면 정수리 너머로 어깨인지 등인지가 보일 것이다.
“여기서도 잡을 수 있겠는데…….”
물리 엔진에 의해 포물선을 그리며 휘어질 테지만, 그쯤이야 조금도 문제 되지 않는다. 거리로 인해 대미지가 콩알만큼 들어가 잡는 데 오래 걸릴 뿐이지.
“그러면 재미없죠.”
─크으 이거지 이거
─이런 맛에 켄 끊을 수 없다
─나는 무서워서 한 시간동안 화살만 줄창 쏠듯
─ㅋㅋㅋㅋㅋㅋㅋㅇㅈ
물론 은우는 시청자들이 바라는 걸 정확히 꿰뚫었다. 그의 몸이 망설임 없이 분지 아래쪽으로 뛰어내렸다. 계단식으로 길이 마련되어 있어 낙하 대미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최고 난이도라 조금 오래 걸릴 겁니다. 지금 야식 시키면 딱 좋겠네요.”
그는 그나마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서리 화살을 들었다. 미지의 장소─아마 니플헤임─에서 지상으로 흘러든 돌멩이로 만들었다는 화살이다.
참고로 탄은 강화 템이 아니라 그냥 시간이 지나면 종류가 개방됐다. 서리 화살 외에는 화염 화살, 마비 화살, 부패 화살이 있다.
무기 종류도 저격용 활, 전투 활, 기본 활, 창에서 트랩, 슬링 등이 추가된 상태다.
─야식요정
─주적은 사실 거인이 아니라 켄이었누
─아;; 참고 있었는데 급 땡기잔아;;
─쟤한테 고구마 던지고 싶다
─그럼 바싹 타버릴 듯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저랑 같이 밤새시려면 배가 고프실 텐데.”
본래도 무지막지한 피통을 가진 데다가 난이도로 인해 더 높아졌을 거다. 은우는 그것을 지적하며 친히 다이어트 방해자가 돼 주었다.
사람들이 불만을 내뱉었다.
“제가 못 먹으니 여러분이라도 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분 진짜 스트레이트로 켠왕하실 셈인가ㄷㄷ
─그러다 쓰러져요ㅠ
─중간에 잠깐 쉬겠지
글쎄, 과연 쉴까?
신화의 거인 앞에 조그만 인간이 섰다.
거인이 그를 발견하자마자 거대한 손을 들고 그대로 내려쳤다. 은우의 몸이 옆으로 빠르게 두 번 구르며 공격을 피했다. 그 잠깐 사이에 슬링 탄약(서리 속성) 하나를 바닥에 던져 거인의 팔에 타격을 준 채다.
“이런.”
다만 아슬아슬하게 피한 대가로 상태 이상, 화상에 걸렸다. 한 번 걸리면 일정 시간 동안 지속 대미지가 들어오는 상태 이상이었다.
“바로 화상이네요.”
─이건 좀 많이 에반데ㄷㄷ
─이러면 어케 잡누
─화상 도트뎀 오진다
─와, 순식간에 삼분의 일피가 깎이네
보통은 게이지가 먼저 생겨나고 그것이 다 차면 화상 상태가 된다. 다 차기 전에 근원지와 떨어질 경우엔 게이지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불의 거인은 그 게이지를 순식간에 채우고 상태 이상으로 바꿔 버렸다.
“안 팔길 잘했습니다.”
영상에선 다들 멀리서 잡았던지라 몰랐다. 은우는 떨떠름한 얼굴로 화상 포션을 마셨다. 굳이 팔지 않아도 돈이 썩어 넘치게 많아 소모품을 팔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거리를 재 봐야겠는데.”
그는 공격을 피하면서 어디까지 근접해야만 화상 상태가 되는지 확인했다. 이번 한 번뿐이라면 모를까, 앞으로도 7번이나 상대할 놈이니 알아 둬야 했다.
─공략법 개꿀
─근데 우리가 못 따라하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략은 공략인데 대상한정임ㅋㅋㅋ
이윽고 범위가 나왔다.
“그럼 이제 제대로 딜 넣겠습니다.”
─지금까지 짤짤히 넣은 딜은,,,딜 취급도 아닌가,,,ㅋㅋ
─잠깐 새에 7분에 1피 날아갔는데요ㅋㅋㅋ
─슬링탄을 그냥 손으로 잡고 던지네ㄷㄷ
마침 거인이 다시 한번 팔을 들었다. 은우는 다급히 공격에서 벗어났다.
그러곤 뜀박질로 인해 몸이 공중에 띄워졌을 때 허리를 틀었다.
구르는 동안 팽팽히 당긴 시위가 서리 화살 세 개를 발사했다. 목표는 팔로 대지를 때리느라 허리를 굽힌 녀석의 눈이다.
허리가 굽어진 탓에 맞추기 딱 좋은 높이감이 됐다. 노랗고 붉은 몸체에서 유일하게 하늘색이던 안구에 화살이 박혔다. 서리 속성답게 얼음이 쫙 피어나는 이펙트가 일며 녀석의 피통이 제법 깎여 나갔다.
그오오오오!
동시에 화살에 맞은 순간 불꽃이 모조리 눈 쪽으로 모였다. 불꽃 아래 거죽은 거뭇한 적갈색에 노인의 것처럼 주름이 자글자글 져 있다.
불꽃이 담긴 눈을 녀석의 손이 짚듯 가렸다. 그 커다란 몸뚱이는 뒤로 엎어지듯 앉아 고통스럽게 고개를 젓는 채다.
한 팔이 짜증 난다는 듯 대지를 마구잡이로 때렸다. 눈먼 공격이라 피하긴 쉬웠다. 팔이 몸통에 비하면 상당히 가늘어서 더욱 그랬다.
“이것 참, 안 이래도 되는데.”
하여 그 패턴은 아무리 봐도 지금 때리라는 의미로 밖에 안 보였다. 은우는 그 친절함에 다급히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서리 속성 트랩을 잔뜩 떨어트릴 때 거인이 긴 팔로 그가 있는 자리를 쓸었다.
은우는 옆으로 굴러 피하고 녀석의 어깨를 확인했다. 또 온다.
그의 발이 다시금 대지를 박찼다. 방금 대지를 쓴 녀석이 역으로 다시 팔을 휘둘렀다. 횡으로 쓰는 공격이라 구를 때 높이만 신경 쓰면 뛰어넘기가 가능하다.
“더 빨리 잡겠네요.”
공중에 떠 있는 팔이 시위를 매겼다. 발이 땅에 닿음과 동시에 반동으로 그그극 밀려나면 활은 팽팽하게 당겨졌던 그대로 살을 쏘아 냈다.
거인이 가린 눈 대신 넙적하게 존재하는 발바닥에 화살이 박혔다.
─앗 야식 오기전에 잡히겠다
─ㅋㅋㅋ기어코 시킨 거냐고ㅋㅋ
─족발 못참지
─? 족발을 어따 갔다대ㅡㅡ 보쌈임
─야식은 족발이지;;
─뭐래 떡볶이임
─후,,,어리석은 양들이여 치멘이나 외쳐라
“다들 맛있게 드시는 것 같아 기쁩니다.”
은우는 녀석의 울음소리가 끊겼을 때 눈치껏 물러났다. 곧 녀석이 몸을 일으키며 몸을 다시 불로 덮었다. 피는 6분의 1칸쯤 까인 것 같다. 깔아 둔 함정을 밟고 피가 더 깎여 버렸지만 말이다.
“생각보다 잡기가 더 쉬운데.”
그는 대지를 빠르게 달려 녀석의 불꽃 팔을 피하곤 시위에 화살을 또 3개 걸었다. 이러면 대미지가 3배로 들어가는지라 맞추기만 하면 피를 빨리 깎을 수 있다.
다시 뜨인 하늘색 눈동자를 세 개의 화살이 두들겨 팼다. 체력 바가 또 한 번 깎이며 녀석이 뒤로 넘어졌다.
“덩치도 실속 있게 커야지……. 패턴이 뻔하기 그지없네요.”
─맨날 기만 당할 거 알면서도 방송 보는 내가 레전드
─켄쯤 되면 기만도 킹정이잔어~
─패턴이 뻔한 건 맞는데 체급차가...ㅗㅜㅑ
─그래도 무서운 것만 이기면 그럭저럭 해볼만 한 것 같긴 함
─고건 맞지
불의 거인은 사실 피가 절반 이상 깎였을 때가 진짜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시청자들은 그의 우스갯소리에 동의했다.
은우처럼 2페이즈에 대한 정보를 가진 자들만이 그저 웃을 뿐이다.
“이게 다면 재미가 없는데.”
거인의 체력이 절반 이하로 내려갈 즈음, 그는 부러 그런 말을 내뱉었다. 놈의 체력이 정확히 절반이 되며 2페이즈를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불의 거인을 구성하던 불꽃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뻗어 나왔다. 폭발하기 전, 구 형태로 부풀어 오르는 징조를 보였던지라 은우는 그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아니, 사실 아슬아슬하게는 아니었다. 공격 범위를 모르는 척하다 보니 되레 과하게 피하긴 했다. 다음부턴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사이 폭발했던 거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이제야 할 만하겠네요.”
모습을 바꾼 거인은 보편적인 인간의 비율을 가지고 일어섰다. 온전히 인간이라 칭할 수 없는 건, 들소처럼 머리 양옆으로 뻗은 뿔과 불꽃으로 이뤄진 날개 때문이었다.
거죽 또한 달라졌다. 불로 완전히 뒤덮였던 아까와는 달리 지금은 마치 용암이 흐르는 대지를 형상화한 느낌이었다. 돌처럼 느껴지는 표피는 쩍쩍 갈라져 있고, 그 틈새로는 불꽃이 흘러나왔다.
다만 외눈박이던 방금 전과 달리, 지금은 눈이 3개가 됐다. 미간에 눈이 하나 더 박혀 있는 거다.
─ㅇㄴㅇㄴ
─몸집 줄었는디
─호구탈출;;
─ㅈㄴ 때리기 힘들듯
“뭐 어떻습니까.”
크기가 2.5m로 줄어드는 바람에 히트 박스가 작아졌지만, 그거야 별 문제 없다. 5m 거인의 눈을 노리나 2.5m 인간의 머리를 노리나 그게 그거였다.
“맞추면 그만인데.”
─킹-만
─다른 놈이 저러면 재수없는데 켄이 그러면 넘 멋있음...
─언행일치라서 그럼
─오만함 오지죠?
─근데 뻥이 아니죠?
─거인 좋아죽을 예정이죠?
“뿔이 참 탐스러운데.”
은우는 오히려 약간의 아쉬움도 느꼈다. 게임이 부위 파괴라든가 절단 같은 걸 지원하지 않아 탐스러운 뿔을 건드려 봤자 별 소용이 없을 것 같다.
“키아아아!”
거인은 몸뚱이만 한 크기의 날개 두 짝을 무기로 사용했다. 상체만 비틀었다가 되돌리며 그대로 휘두르는 식이었다. 대체로 위에서 아래로, 좌우로 그어지는 대각선 공격이다.
시야 한쪽에는 화상 표시 게이지가 생겨났다. 다가가기만 해도 게이지가 풀로 차던 아까와 달리, 지금은 천천히 차올랐다. 그나마 낫다.
─와 속도 미쳤냐
─방금 그 찐따랑 동일몹임?
─2페이즈 격변 오졌다
─아까 잡을 수 있겠다고 말했다 취소한다
─메다닥 도망치누ㅋㅋㅋㅋ
급변한 난이도에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아무렴 1페이즈와 2페이즈는 움직임 자체가 달랐다. 찰나만 봐도 그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속도부터가 달랐다. 거의 2배, 혹은 3배였다.
“전 이게 더 마음에 듭니다.”
은우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계속 해서 뒤로 뛰었다. 불꽃으로 이뤄진 날개깃이 칼날처럼 공기를 갈라서만은 아니었다.
날개가 지나친 궤적을 따라 잔상처럼 남는 불꽃흔 때문이다. 그것은 3초 뒤에야 사라졌고, 그 전에 닿으면 대미지를 입었다. 화상 게이지가 차는 건 덤이었다.
─난이도 돌았냐
─ㄹㅇ 호구탈출이잔어;;
─글고보니까 난이도 낮춰도 패턴은 똑같지 않냐?
─ㅇㅇ 패턴은 똑같음
─와 미쳤다 저걸 어케 죽임
그는 침착하게 반경을 확인하고 활을 들었다.
“날개도 히트 박스면 너무 쉬워질 텐데.”
세 발의 화살이 날개를 향해 날아갔다.
“테두리 부분은 안 들어가네요.”
그것은 날개의 각기 다른 위치를 저격하며 대미지가 들어가는 범위를 알려 주었다. 날개의 테두리─라고 하지만 ⅓가량이었다─는 그대로 통과하고, 나머지 부분은 맞았다.
“대미지는 제법 들어갑니다.”
저렇게 큰 게 약점일 리는 없으니, 히트 박스가 줄어든 만큼 방어력도 줄어든 모양이다.
─강화했음 더 들어갔을 듯
─ㅇㅎ 방어력 낮아졌네
─스킬 좀 찍고 템 맞춰서 가면 쉽게 잡겠다
─ㅇㅈ
“캬륵!”
거인은 날개를 펄럭이며 불꽃 깃털을 내던졌다. 은우는 앞으로 굴러 그것을 회피했다.
피하는 순간에도 쏘아 낸 살이 거인의 머리통을 맞췄다. 불의 거인이 뒤로 반발자국 물러났다. 비틀거리는 모양새였으나, 웃음소리 때문에 한 방 먹였다는 느낌은 덜했다.
“크아아아!”
거인은 그리 외치며 위로 솟구쳤다. 그러곤 냅다 그를 향해 내려 꽂혔다. 옆으로 구르면 아슬아슬하게 거인이 대지를 훑고 지나갔다.
그게 2연속이었다. 붙잡히면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다.
─저러다 먹은 흙 때문에 배가 안 고플 듯 ㅅㅂ
─ㅇㅈㅇㅈ
─와중에 슬링탄 던져서 머리 맞춘 거 실화냐
─어휴 패턴 진짜 드럽다
─켄이니까 그렇지 일반인들은 잡을 수 있는 거임?
─또 50번은 뒤지겠네
사람들은 괜스레 먼지 이펙트를 꼬집었다. 이렇게나 어려운 히든 보스가 8마리나 된다는 게 그들의 심사를 비튼 모양이다.
“무─스─펠!”
대략 2m 정도 떠오른 불의 거인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유성우 같은 것이 쏟아졌다. 낙하 위치가 랜덤이다 보니 보고 바로 피해야 했다. 조금만 늦어도 얻어맞을 정도로 불덩어리의 폭격 속도는 빨랐다.
─정신 사납다;;
─와리가리 넘심
─반사신경으로만 피해야 하네
─ㅇㅇ 보고 피하면 늦을듯,,,,
“그러게요. 좀 정신 사납긴 합니다.”
은우는 건조하게 동의하며 거인의 머리를 다시 맞췄다. 활의 대미지는 형편없는데 약점만 족족 적중시키니 체력 바가 그럭저럭 깎였다.
곧 불의 거인이 그를 향해 돌진했다. 그의 손에는 잠깐 소환해 낸 불의 검이 들려 있다.
쾅!
검이 바닥을 내려찍고, 은우는 옆으로 두 번 뛰었다. 본래는 한 번만 움직이려던 걸 내려찍힌 지점부터 파동처럼 퍼지는 불꽃 때문에 한 번 더 피해야 했다.
─?? 광역딜까지?
─일반인도 히든엔딩 볼 수 있게 만들라고ㅋㅋㅋ
─씨게 선 넘는다
─잡으라고 있는 거 맞음?
─2회차 요소면 개쩔겠다
글쎄. 불덩이로 이뤄져 있고 화살도 튕겨 내지만, 대미지는 들어가는 점에서 못 잡을 건 없지 않을까? 은우는 파동이 사그라들자마자 앞으로 두 발짝 내디뎠다. 창이 거인의 대가리를 후려쳤다.
“크악!”
거인이 비틀거렸지만, 은우는 욕심 내지 않고 물러났다. 날개가 주변을 쓸었다.
“크아아아!”
날아오른 거인은 또 한 번 공중 공격을 감행했다.
“키아악!”
금 간 듯한 외침이 들려오면 바람 갈라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은우는 그의 직감에 따라 앞으로 또다시 굴렀다. 간발의 차로 그가 있던 자리에 거인이 내려 꽂혔다. 공중 공격과는 속도가 달랐다. 거의 폭격 수준이다.
“키아악!”
그는 그 상태에서 한 번 더 구른 후 창을 들었다. 거인의 체력 바가 깎였다.
“근접 무기가 창밖에 없는 건 좀 아쉽네요.”
창으로 적의 약점을 후벼 판다거나, 리치라는 장점을 이용해 거리를 내주지 않고 농락하는 것도 좋다. 강하게 휘두르는 것도 웬만한 둔기 이상의 파괴력을 자랑하므로 제법 재밌는 편이었다.
그러나 상대의 살갗을 가르고 도려낼 수 있는 날붙이만은 못한 것 같다. 원거리 무기로서 저격하는 게 다인 활은 말할 것도 없다. 하물며 시스템이 멋대로 보정까지 붙여 줘서야.
“활도 보정 때문에 손맛이 영. 물론 총보단 낫습니다만.”
─보통 이 난이도에선 손맛 같은 거 안 따져요;;
─켄한텐 어떤 난이도든 순한맛이라서,,
─아 근데 손맛 중요함
─벌써 삼분의 이 깎음;;
─헐 그러네
─손맛 중요하긴 한데 보통 저때 챙기진 않지
─아, 그래서 보쌈 왜 아직도 안 왔냐고!
─기계가 켄 방송 보면서 먹는걸지도
─급 위얼휴먼ㅋㅋㅋㅋ
사람들이 아웅다웅하는 동안 은우는 거인의 행동에 집중했다. 거인의 피가 착실히 깎여 나갔다.
“좀 기대했는데 어김없이 패턴이 쉽네요.”
지금까지 목격한 패턴은 총 10개. 숨 돌릴 틈만 주고 공격이 이어져서 그렇지 패턴만 나눠 놓고 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10분 안에 잡겠다는 말은 취소해야겠습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단번에 뛰어와 검을 휘두르는 거인을 보고 그는 말했다. 검로에서 벗어나 검을 휘두르던 팔을 밟고 창을 내려찍으면 대미지가 눈에 띄게 달았다.
“7분이면 되겠네요.”
마땅하게도 그 말은 이뤄졌다. 불의 거인이 곧 꼬꾸라졌다.
* * *
불의 거인을 사냥해 낸 캐릭터는 숨을 몰아 내쉬었다. 바닥에 엎어진 거인의 몸뚱이는 불꽃이 점차 사그라드는 중이다.
그리고 그 순간, 회광반조라도 되는 것처럼 녀석이 다시금 타올랐다. 폭발이 인 것은 아니지만, 화장이라도 한 것처럼 그 몸에 거센 불꽃이 인 것이다.
동시에 그 불꽃은 하나의 형태로 바뀌었다. 그것은 머리에 뿔을 달고 있는 인간이었다. 편견을 한 겹 입고 말한다면 악마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호오, 무스펠을 죽일 줄이야.”
그 존재는 불꽃으로 이뤄져 있음에도 신비롭다보단 사악하단 느낌이 강했다.
불의 음영을 이용해 2페이즈의 거인처럼 갈라진 피부의 느낌을 주어서 그런 것인가. 혹은 양쪽으로 뻗어있되 훨씬 길쭉하고 두꺼운 뿔 때문인가. 그도 아니면 날카롭게 표현된 상어 이빨 때문인가.
디자이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보너스를 두둑하게 받았을 것이다.
“제법이구나.”
그것은 손가락으로 턱을 쓸더니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은우만큼이나 낮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지라 시청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넌… 설마 로키인가?”
캐릭터의 물음에 그 녀석은 크게 웃었다. 불을 재질로 사람을 조각한 것 같은 입이 벌어졌다.
“그것은 짐의 검이니, 그런 것과 짐을 착각하지 마라.”
의문을 해결해 주되 질문이 이어지게 만드는 답이 내놓아졌다. 로키가 누군가의 검이라는 전승을 안다면 정답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나, 적어도 캐릭터는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머임 누구임?
─ㄴㄱ?
─로키보고 검이라고 하는 것 보면 수르트인 듯
─로키가 왜 검임
시청자들 속에서도 정답과 질문이 삼삼오오 오갔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지?”
“짐이 궁금하더냐? 참으로 쓸모없는 의문이로다. 어차피 네까짓 것이 발악한들 세상은 불태워질 것인데.”
불꽃이 아래서부터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캐릭터가 다급해졌다.
“도망가는 거냐!”
“감히 내게 그런 언사를 하다니. 짐의 영토에 들어오면 재도 안 남기도 태워 주겠노라.”
그놈은 끝까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불꽃이 결국 꺼졌다. 컷신도 끝났다.
“…정체가 짐작가긴 하는데 등장하자마자 몇 마디하고 바로 퇴장하네요. 김빠지게.”
컷신이 너무 긴 것도 열받지만, 방금처럼 진행돼도 좀 묘하긴 하다. 은우는 목덜미를 쓸며 여전히 질의가 오가는 채팅 창을 보았다.
“방금 그건 수르트입니다. 일설에선 라그나로크 당시 세상을 불태울 때 쓰인 수르트의 검이 로키가 변신했다고 말했으니까요.”
은우는 달달 외운 사항을 늘어놓으며 눈을 가늘게 접었다. 다른 무스펠들이 죽을 때─수르트가 현신해서─남기는 정보가 새록새록 짜 맞춰졌다. 비록 무지막지한 난이도로 인해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의 거인은 그가 방송 시작할 때까지 안 잡혔지만 말이다.
그래도 하나 확신하고 있는 것은 불의 거인들을 잡는 게 유리할 것이란 점이다.
“일단 수르트와 로키가 관계 있는 건 확실하네요. 나머지를 잡으면 정보를 더 줄 것 같은데…….”
불의 거인을 잡아 수르트를 만나면 로키에 대해 알 수 있다. 로키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왜 라그나로크를 일으켰는지, 왜 인간을 죽이려 하는지.
여섯 번째까지가 그랬는데,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를 잡는다면 어떻겠나. 분명 더 많은 정보가 나올 거다. 어쩌면 히든 엔딩과 관련돼 있을지도 모르는.
그는 활을 어깨에 끼며 삐뚜름하게 웃었다. 발은 저벅저벅 거인의 시체를 향해 걸었다.
“어차피 다 잡을 생각이었으니까 상관없겠네요.”
─ㅋㅋㅋㅋㅋㅋ
「‘형분명’ 님이 ‘1,000원’ 투척!
이거 켠왕이라매ㅋㅋㅋㅋ」
─아주 좋은 생각이다.
“켠왕이라고 해서 못 잡을 건 없잖습니까. 정 피곤하면 스킵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은우는 시신에서 아이템을 루팅했다. 조사 마크를 탐색하기만 하면 아이템이 수집돼서 편했다. 심지어 원하는 것만 선택하는 것도 가능했다. 어차피 가방이 꽉 차서 담을 필요도 없지만.
“그래도 잡는 게 더 재밌잖습니까.”
─아ㅋㅋㅋ참된 스트리머 인정합니다
─켠왕에서 히든보스까지 다 잡으려는 사람이 있다?! 루삥뽕삥빵
─거인이 8마리였나
─켄이면 뭐 히든보스 다 합쳐서 2시간안에 쌈싸먹을듯
그는 목덜미를 쓸며 좀 더 입술을 올렸다. 과연 이게 히든 엔딩으로 가는 길이 맞긴 한 건지, 맞다면 제작진은 지금 어떤 심정일지.
다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든 이기는 건 그일 것이다. 어떻게든 그렇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