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당연하지만 단서 하나를 찾았다고 히든 엔딩이 나타나진 않았다. 그랬다면 진즉에 발각됐을 거다.
그러나 단서가 하나 발견된 시점에서 길은 적당히 드러난 셈이 되었으니. 박기철과 은우는 밤새 그것을 헤집었다. 중간에 박기철이 밤새면 약혼자에게 혼난다며 귀가했어도 마찬가지다. 박기철은 영상통화로 도왔다.
중간에 호기심으로 끼어든 오현 역시 슬쩍슬쩍 지원했다. 은우는 그게 저한테 마음의 빚을 지우려는 심산임을 알았지만, 너그럽게 넘어가 주었다.
그 결과, 파악된 고 에다의 위치는 37개였다. 또한 히든 엔딩 조건으로 추정되는 추가 조건 역시 여럿 찾아냈다. 정지 선택지나 보스, 특정 서브퀘 등등 같은 조건들이었다.
그중 어떤 것이 히든 엔딩에 관여하는지, 그들이 세운 가설이 정말 맞을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그들은 그들이 가진 시간 속에서 최선을 보였단 것이다.
별개로 그 과정을 거치며 박기철과 오현은 은우의 비인간설을 이야기했다. 앉은 자리에서 북유럽 신화를 겉핥기로나마 모조리 외워 버리고 영상 23개를 돌려 본 것도 모자라, 3시간밖에 자지 않았음에도 멀쩡한 걸 보면 누구나 의심할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은우는 비수한테서 옮았냐는 일침을 가했다. 물론 2 대 1이었으므로 은우가 한발 물러나야 했다.
[이걸 다 외우시다니 대단하시네요. 은우 씨 암기 과목 점수가 그렇게 높진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제 성적표는 언제 보셨습니까?”
[…….]
그는 박 팀장이 빙긋 웃는 걸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필요한 정보만 잘 외우는 타입이라서요.”
그렇게 치면 시험 칠 과목도 필요한 정보이나, 말뜻은 적당히 전해졌다.
[하긴, 시험은 이상하게 안 외워지죠.]
“시험은 좀 어렵지.”
오현 관장과 박 팀장이 고개를 대충 주억였다. 두 사람의 학창 시절 점수가 궁금해지는 모습이었다.
[뭐, 이제는 정말 물러날 때가 없네요. 아직도 다른 게임 하실 생각은 없으시겠죠?]
“박 팀장님은 다른 게임 했으면 하십니까?”
[소속 인플루언서가 비웃음 받는 건 달갑지 않으니까요.]
화면 속 박 팀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이를 핑계로 중간에 쪽잠을 잤음에도 그의 눈가는 퍽 거뭇하다.
[별개로 성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할 겁니다.”
은우는 그런 화면을 보며 슬슬 일어섰다. 이제 집에 가서 방송을 시작할 때다.
“안 돼도 그렇게 만들어야죠.”
그러고 보니 형에겐 미안하게 됐다. 액션 게임 말고 다른 거 하기로 해 줬는데.
그렇지만 이거 끝나고 해 줘도 형은 이해해 줄 거다.
▣ 103. 마치 라그나로크처럼
“여러분 좋은 저녁입니다.”
─구하
─오늘 채팅 완전 엄한데,,,
─켄하~~
─안녕하세요!
─매니저들 칼 갈았네
“오늘 방송은 ‘After Daybreak’ 켠왕입니다.”
논란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급하면 칼같이 삭제되는 채팅에 사람들이 술렁이는 사이, 은우는 건조하게 방송 주제를 읊었다. 시청자들의 관심이 바로 돌아갔다.
─켠왕 약속하시더니 진짜루??
─근데 왜 이겜을,,,,
─(금지된 채팅입니다)
─켠왕 미쳤다
「‘마카로프치킨’ 님이 ‘1,000원’ 투척!
숙제예요,,,?」
─치킨 시킴
“아뇨, 숙제 아닙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은우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바로 게임을 시작했다. 특별한 설명은 없었다. 히든 엔딩을 찾는 게 목표지만, 그걸 굳이 사람들이 알 필요는 없는 탓이다.
중요한 건 그를 논란거리로 만든 제작사가 그에게 히든 엔딩을 쥐어 줄 리 없다는 사람들의 확신과 그 속에서 히든 엔딩을 찾아내는 그림이다. 그 이면의 복잡한 계산과 준비 따위가 아니라.
한 사람이 존재하되 수만의 주시자가 있는 세계가 새로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ㅋㅋ저 애기 플레이어 설정 따라가는 거임?
─완전 인형이다
─애가 안 울고 까르르 웃네
─광장 사람들 얼굴=내얼굴
─그, 그 고전 뮤지컬 중 저거 있지 않냐?
─비수가 뮤지컬을 본다고?? 너 뭐야
─라이온킹ㅅㅂㅋㅋㅋㅋㅋㅋ
이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은우의 입술이 삐뚜름해졌다. 일종의 배수의 진을 치고 항전을 이어 나가는 이의 심정이었다. 아슬아슬한 스릴감은 때론 짜릿할 수 있다.
“너의 이름은 켄이다!”
여성이 결정한 이름을 외치자마자 기타 환경 설정을 건드릴 차례가 돌아왔다. 언제나 그렇듯 은우는 난이도를 매우 어려움으로 변경한 후 게임 시작을 눌렀다.
“금속 악마들에게 관심을 가져선 안 된다. 그것들은…….”
─머임 얘도 인류 멸망임?
─ㅇㅇ 이쪽은 원시시대로 회귀한 쪽
─위얼휴먼이랑 겹치네
─그래도 잼긴 함
질리도록 봤던 내용이나, 은우는 다시 한번 그것들을 눈여겨보았다. 세운 가설들이 확실하지 않는 이상 새로운 변수는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다. 하물며 이건 마지막 기회가 아닌가.
실패한다 해도 체면만 떨어지고 끝이겠지만, 은우는 그것마저 별로 용납할 생각 없었다. 칼을 한 번 뽑은 이상 그의 세상은 죽거나 죽이거나 뿐이다.
“어이, 이단!”
상념을 머금는 사이, 돌팔매질당할 차례가 되었다. 영상을 통해 이미 아는 사실이지만, 별개로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또 악마들에게 관심을 가지기라도 했나 보지? 성인식 전날에도 심부름이나 하고 있고 말이야!”
─저 새끼가 지금 누구한테 돌 던진거임?
「‘반밀반구’ 님이 ‘30,000원’ 투척!
X를 눌러 조의를 표해주세요」
─X
─X...
─학살좌 강림 각이다;;
─서열정리 가즈아!!
사람들이 정의 구현을 외칠 때, 역시나 정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정지 선택지는 특정 사건에 대한 결정권을 플레이어에게 제공합니다. 하나의 선택이 어떤 일을 불러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 무시
⦁ 말로 모욕
⦁ 돌멩이를 던져 위협』
─닥33333
─33333
─위협 말고 살해는 없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부족 생활 같은데 같은 부족민을 살해해서야 됩니까.”
정지 선택지에선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므로 은우는 느긋히 시청자들을 도닥였다. 밤새서 영상들을 보고 조사한지라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 톤은 더 낮아진 채다.
“일단 3번으로 가겠습니다.”
─???: 같은 부족민을 살해해서야 됩니까,,,,
─살해는 안 되고 위협은 되는 거임?ㅋㅋㅋㅋ
─아 ㄲㅂ
첫번째에 한해선 분기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므로─물론 추정이다─ 은우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세 번째를 골랐다. 창이 사라지고 세계가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재앙을 불러올 이단 놈!”
“아, 그래.”
날아온 돌을 잡아챈 캐릭터가 돌을 역으로 내던졌다. 돌팔매를 주도하던 촐싹이의 귀 옆을 돌멩이가 스쳐지나갔다. 촐싹이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가벼운 인사에 너무 겁먹지 말라고.”
걱정인 척하는 돌려 까기까지 완벽했다.
* * *
성년이 된 시어족은 부족의 정식 일원인 시어-시커가 되기 위해서 성인식을 치러야 했다. 위대한 주시자의 옷자락─능선 이름이다─을 거쳐 출입이 금기시되는 악마들의 유적지(전 인류의 유산) 앞까지 도달하면 되는 간단한 의식이었다.
그 앞에서 그들은 악마들의 사악함을 눈에 담고 다시금 그것들을 멀리하겠다 맹세하면 식은 끝난다.
그러나 그렇게 허무히 끝나면 이야기가 시작될 리 없으니.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기어코 유적지에 발을 들이게 된다. 초반에 돌 던지던 녀석이 파 놓은 함정 때문이었다.
비록 금지에 발을 디뎌 버렸으나, 벌도 살아남아야 받을 수 있는 법. 캐릭터는 탈출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유적지를 탐색하게 된다.
그게 지금 은우가 진행하는 대목이었다.
─뭔가 많다
─그래도 수색은 좀 편한듯
─ㅇㅈㅇㅈ 잘만들었어
─일단 시스템은 괜찮은듯
사람들은 위얼휴먼에 묻혔던 게임이 생각보다 진국임을 깨닫는 중이었다. 제작사 입장에선 홍보가 제대로 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지금 은우는 평소보다 시청자수가 더 늘어난 상태였다. 게임하는 이도, 게임을 만든 쪽도 논란의 당사자이다 보니 방송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거다. 일종의 싸움 구경 하는 심리가 아닐까 싶다.
─근데 이러면 켄한테 나쁜 거 아님?
─? 왜여?
─(금지된 채팅입니다)
─ㅉㅉ 멍청이들아 그거 언급 금지임
「‘заявление об отставке’ 님이 ‘16,900원’ 투척!
방송이나 봐라.」
매니저들 덕에 방송은 그럭저럭 깔끔한 상태로 이어졌다.
“여기 기록이 하나 더 있네요.”
은우는 그런 소소한 분란을 무시하며 유적을 탐방했다.
영상을 볼 땐 미처 확인할 수 없던 것들이 그의 손에 마음껏 파헤쳐졌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을 소비한 끝에 은우는 제법 그럴듯한 수확을 얻었다. 수집품인 유산 두 개와 해당 에피소드의 목적인 ‘키Key’를 찾아낸 것이다.
[얄궂지 않습니까? 기계로 인해 멸망하고 있으면서 기계를 통해 후대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니.]
팔찌 형태의 키를 손목에 찼을 때, 해당 방의 중심에서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아직도 전력이 남아있어?
─ㅁㅇㅁㅇ?
─드뎌 본격적인 스토리?
─발전소 무슨일;;
[볼바의 말이 맞기를 기도나 합시다.]
[맞아야죠. 그래야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짓거리가 의미 있지 않겠습니까.]
홀로그램은 여러 명의 사람이었다. 은우는 그것을 적당히 지켜보며 방 안을 훑었다. 더 이상 찾아볼 건 없는 것 같다.
[자, 자. 그럼 메시지나 어서 남깁시다.]
[과연 키를 만질 사람이 올까마는.]
이래저래 떠들던 사람들이 곧 자세를 바로 했다. 그제야 신비로운 느낌이 좀 들었다.
은우는 그들 홀로그램의 정면 자리로 도로 걸어갔다.
[먼저 묻겠습니다. 당신은 시어입니까? 시어가 아니라면, 혹은 시어더라도 ‘시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시어가 분명 부족 이름이었죠.”
─ㅇㅇ네
─쟤네들 머임?
─과거 기술력 엄청 좋나보다
─볼바가 예언자였나?
아직 헬멧이 없는 탓에 은우는 맨눈으로 그 홀로그램들을 마주해야 했다. 현 인류와 옷차림만 다른 전 인류가 또박또박 이야기를 시작했다.
[볼바의 예언에 따르면 당신은 시어든 시어가 아니든 시어의 진정한 의미를 잊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이걸 당신이 듣고 있고, 우리가 걸 수 있는 희망은 당신뿐이란 거죠.]
대표로 말하는 여인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우리는 앞서 많은 것을 일구었습니다. 반신이 망가져도 되살릴 수 있다거나 한 달이면 산을 통째로 옮길 수 있는 기술들을요. 그렇지만 그것은 전부 기계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멸망한 이유는 로키란 존재가 기계들을 감염시켜 자신의 지배하에 둔 후, 인류를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미르의 지혜를 통해 그를 막으려 했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성공만을 가져왔죠.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아주 소수의 인간뿐이었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수는 다시 불어날 테고, 인류는 다시 번성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로키가 살아남은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과거를 잊어 가는 인류에게 기계 문명을 설파할 테고, 다시 만들어진 기계를 통해 인류를 멸망시키려 할 것입니다.]
로키, 미미르. 익숙한 단어에 사람들은 금방 근원지를 찾았다.
─저거 북유럽 신화 아님?
─맞음
─미미르가 지혜의 거인이었나
─목만 남아서 훈수 주는 놈ㅇㅇ
─세계관 벌써 말해주네
북유럽 신화를 따로 섭렵하고 나서야 저 이름들을 알았던 은우는 바로 정답을 맞히는 비수의 지식을 보며 나름 감탄했다. 백수인 척할 뿐이지 역시 비수들은 지식인들이 많다. 아닌 이들이 더 많긴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막기 위해 인류가 기계를 개발할 수 없도록 지켜보는 ‘시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에 따르면 시어는…….]
순간 굉음과 함께 홀로그램 속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벌써 여기까지!]
한 사람이 그렇게 외치고,
[시간이 없어!]
또 다른 사람은 그렇게 말했다. 여인이 입술을 잘근 씹다가 마저 말을 이었다.
[당신 시대의 시어는 그 사실을 잊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로키는 감시자가 사라진 사이 수작을 부리고 있겠죠.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한 수작을. 우리가 이 메시지를 남기는 건 그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녀의 말소리는 방금 전보다 훨씬 빨랐다. 다급함이 여기까지 전해지는 느낌이다.
[그 팔찌는 바로 ‘키’입니다. 미미르의 지혜를 빌려 만들어 낸, 인류를 구원할 열쇠죠. 그것을 통해 아홉 명의 어머니를 깨우세요. 그들을 깨우는 데 성공하면…….]
굉음이 다시 한번 들려왔다. 비명 소리가 가까워졌다.
[기억하세요. 아홉 명의 어머니입니다. 위치는 키가 알려 줄 것입니다. 부디, 부디 인류를 구해 주세요. 제발…….]
홀로그램은 그게 끝이었다.
[제발 당신에게 인류를 동정할 수 있는 조금의 이타심이 남아 있기만을.]
어렴풋한 중얼거림이 마지막으로 남아 방 안에 은은히 퍼졌다.
“아홉 명의 어머니라면 헤임달이겠죠.”
─ㅇㅇ헤임달 맞음
─헤임달이 로키랑 떠서 동반자살하던가?
─켄님 신화도 꿰고 계심?
─동반자살하라고 깨우는 거임? 인성ㄷㄷ
“뭐, 그것밖에 방법이 없으니까 그런 거겠죠. 어쩌다 북유럽 신들이 인간과 함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거짓말이다. 은우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은 채로 거짓을 늘어놓으며 갱신된 퀘스트를 확인했다.
『숨길 수 없는 호기심
⦁ 키를 이용해 방을 스캔하기
⦁ 인터페이스 사용하기』
『“방금 그건 대체 뭐였지? 악마들? 그렇지만, 우리랑 너무 닮았는데……. 그보다 그들이 한 말은 정말 사실인가?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나는… 아니야. 일단 이곳부터 나가자.”』
설정에 따르면 그가 소유하게 된 키는 실존하는 모든 기계에 간섭할 수 있게 해 주는 일종의 마스터키다. 연구소의 문을 열 수 있는 결정적 수단이기도 했다.
“원시시대랑 과학의 조합이 좀 묘하네요.”
─인정
─여기까지 보면 살만한데,,,,
─세계관이 꽤 좋은듯
「‘박문수’ 님이 ‘1,000원’ 투척!
라그나로크는 신들의 운명이란 단어로 북유럽 신들의 몰락을 말한다 파멸의 전조는 3년동안 끝나지 않는 극심한 겨울과 지상에서 선과 질서가 전부 사라져…」
─당신의 양심, 괜찮으십니까?
─귀에서 피난다
─가성비충 ㄲㅈ
“…그럼 계속 진행할까요.”
덕분에 은우는 닫혀 있던 문을 열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전 인류가 남긴 기록들을 수집한 건 덤이었다. 기록과 고 에다의 경우 키가 있어야만 존재를 인지할 수 있기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 보기도 했다.
『고 에다(1/45)│로키의 말다툼
그대, 바위 꼭대기에
얼음처럼 차가운 아들의 창자로…….』
은우는 가장 자연스럽게 위치가 파악됐던 고 에다 하나를 획득했다. 오픈 월드인 대신 탐색 가능한 물건의 경우 마크가 떠올라서 정말 다행이다. 찾기가 쉽다.
─평소보다 파밍 더 하시네ㅋㅋ
─근데 저것도 파밍인가,,,?
─이번엔 100머 수집가실 생각이신가
─켠왕에서 하긴 어려우실 텐데
“마크가 떠서 발견하기 쉬우니까요. 너무 돌아가는 수준이 아니면 찾아볼까 합니다.”
─Hoxy....?
─콘텐츠를 다 소비해버릴 심산이신가,,,ㅋㅋ
─(금지된 채팅입니다)
히든 엔딩을 찾겠다 말한 건 아니지만, 눈치 빠른 이들은 긴가민가한 모양이다. 터무니없어서 말로 내뱉지 못할 뿐이지.
은우는 그것에 대해 자연스럽게 무시하며 유적지를 탈출했다. 탈출하자마자 이벤트 신이 마치 라그나로크처럼 들이닥쳤다.
“…족장님!”
유적지에서 낑낑대며 기어 오자마자 캐릭터는 부족의 권위자와 마주쳤다. 최고 결정권자인 3명의 대족장까진 아니지만, 바로 그 아래 직위의 사람이었다. 심지어 캐릭터의 아버지도 있었다.
캐릭터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족장 옆에 서있던 비열한 촐싹이가 킥킥 웃었다. 물론 캐릭터의 아버지가 쳐다보는 순간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족장이 지팡이를 쿡 찍으며 앞으로 나섰다.
“네가 평소에 금속 악마들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건 익히 들었다. 그렇지만 언젠가 두 눈을 가리고 있는 부정을 씻고 올바른 시어-시커가 될 거라 믿었다. 한데 그런 믿음을 너는 오늘 깨 버리는구나.”
“오해십니다! 저는─!”
“오해? 하면 네 팔에 찬 그것은 무엇이냐?”
캐릭터가 몸을 흠칫거렸다. 팔에 찬 키는 그렇게 눈에 띄는 디자인이 아닐지언정, 악마─전 인류─의 것이라는 걸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문득 정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탈출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하기
⦁안에서 들었던 사실 전부 고백하기
⦁죄송하다고 빌기』
─죄송하다 빌어야할듯?
─변명이 좀 더 낫지 않나?
─죄송하다 빌져
─고백하는 게 제일 반응이 안 좋을 듯ㅋㅋ
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기서부터다. 여기서부터 잘 선택해야 한다.
아니면 차후 만나게 될 주요 NPC, 훌다 족장이 ‘헬 님을 마주할 자격은 당신께 없습니다.’라는 말을 지껄일지도 모른다.
“글쎄요…….”
캐릭터가 쓸데없이 한 말일 리는 없으니 은우는 그 말의 원인이 조건 불충족이라 추측했다. 그 조건이 뭔지 모르는 이상 처음부터 조심해야 하는 게 옳고 말이다.
하물며 정지 선택지 설명에는 ‘하나의 선택이 어떤 일을~’이라는 문장이 있고, 훌다 족장은 자격이 없다 말한 후 ‘저승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외국 버전의 경우 반복해서 물어볼 경우 ‘아무나Anyone’가 ‘신용할 수 없는 사람Unreliable people’로 변경되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정지 선택지 관련 단어였다.
“비는 것과 변명은 제 성격과 영 안 맞아서요. 시원하게 고백하는 쪽으로 가겠습니다.”
─상남자ㅋㅋㅋ
─근데 오히려 이게 나을지도
─뭘하든 켄이면 믿고 따라야지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들은 비굴한 자보단 올곧은 자를 좋아한다지. 은우는 그것을 감안해 3번을 골랐다. 답답하단 소리를 들을 각오까지 하고 선택한 답안이었다.
다만 지금까지 그가 비굴하게 군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까닭일까. 시청자들은 생각보다 쉽게 납득했다. 은우로선 감사한 일이었다.
“이건 세상을 구하기 위한 물건입니다.”
“뭣이?”
“믿지 않으실 걸 압니다. 하지만 저는 미미르께 맹세코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 저놈 좀 보세요! 악마들의 땅에 들어가더니 미쳐서─!”
“닥쳐라!”
촐싹이가 까불대려는 걸 족장이 분노한 얼굴로 일갈했다. 꼴은 좋았으나, 족장이 곧바로 캐릭터와 시선을 마주한 점에서 완전히 다행은 아니었다.
입이 있으면 한번 말해 보란 시선은 퍽 서늘하고 날카로웠다. 그러나 캐릭터는 그 시선에 굴하지 않고 은우의 선택에 따라 꿋꿋한 태도로 저 안에서 들었던 모든 걸 고백했다.
“족장님은 우리가 왜 시어라 불리는지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왜 ‘보는 자’라고 불리는지 아십니까? 기록의 수호자인 아버지를 따라 많은 기록을 살폈던 저지만, 그에 대해선 감조차 잡히지 않습니다. 족장님은 혹시 아십니까? 기록의 수호자께서는 아십니까?”
“너…….”
“전 저 안에서 그에 대해 들었습니다. 저희는 우리 인간들이 금속 악마를 개발하고 다루는 대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여 로키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막는 감시자입니다.”
“하면 너는 어째서 악마의 물건을 끼고 있느냐?”
“이건 악마의 물건이 아닙니다. 시어가 봐야 할 것을 잊었을 때, 우리의 눈이 보던 것을 놓쳤을 때를 위한 미미르 님의 선물입니다.”
“저놈이 감히 악마의 물건에 미미르 님의 이름을!”
“저, 저 불경한─!”
족장 뒤에 서 있던 또 다른 사람들이 분개했다. 그렇지만 캐릭터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불행하게도 시어는 정작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했고, 그로 인해 로키는 부활할 채비를 마쳤습니다. 그렇지만 지혜로운 미미르께선 인간을 위해 마지막 안배를 남기셨으니, 이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아홉 명의 어머니를 깨우면 로키를 막을 수 있습니다. 족장님, 믿어 주십시오. 정말입니다.”
─미친 나도 설득될 듯
─말 존나 잘한다ㅋㅋ
─선택지 엄청 잘고르셨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전개됐는지 사람들은 은우의 선택을 마음에 들어 했다. 저렇게 곧은 태도로 본인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사람이 현실에 적다는 것 또한 반영된 견해일 것이다.
“어리석은! 그것 또한 악마의 속삭임이다!”
“네,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이게 진실이라면 어떡합니까? 최소한 진의는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갈!”
그러나 그 열과 성을 다한 이야기는 통하지 않았다.
“끝까지 네 부정을 알아차리지 못하는구나. 감히 삿된 행동을 비호하기 위해 미미르 님의 이름을 된 죄, 금지에 들어간 죄보다 크다. 네 아비에겐 미안하게 된 일이지만, 더는 널 용인할 수 없구나.”
─아 모임ㅡㅡ
─-꼰-
─이게 안통하네...ㅋ
─완전 꽉막혔는데
족장은 그의 권한으로 캐릭터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캐릭터가 최소한 진의를 검증하게 해 달라고 외쳤지만, 통하지 않았다. 아버지란 존재는 침중한 눈을 할 뿐 한 마디도 내뱉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결국 캐릭터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 옥색 눈동자는 조금의 굽힘도 없었다.
유적을 탈출하며 어떤 사고를 거쳤는지는 짐작할 수 없으나, 그는 전 인류가 그에게 맡긴 것을 그의 운명이라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다. 진실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이게 진실이라면 이처럼 막대한 사명도 없으므로.
“최소한 제 짐은 챙겨 가게 해 주십시오.”
“…네 아비를 보아 그것은 허락해 주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완전 용사같다
─특) 실제로도 용사역이다
─그러네ㅋㅋㅋ
─간지난다
그 결연한 태도에 역으로 부족 일원 몇이 술렁였다. 물론 족장의 시선을 받자마자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장면이 빠르게 바뀌어 집으로 변경되었다. 짐을 챙기는 캐릭터를 아버지가 가만히 응시했다. 일단 감시역인 모양이다.
“…너는 예부터 그랬지.”
아버지의 눈이 감겼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후회하지 않습니다.”
채비를 단단히 차린 캐릭터가 그런 아버지와 시선을 마주했다. 물론 은우의 키를 따라간 덕에 캐릭터의 시선이 더 높았다.
“제가 그곳에서 본 것이 거짓이라면 거짓인 것 자체로 다행인 일이고, 진실이라면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니까요.”
“…네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게 네가 추구하기로 한 길이라면, 그래. 존중하마.”
그러나 아버지 역할의 NPC가 작아 보이지는 않았다.
“모두가 널 인정하지 않겠지만… 나만큼은 너를 축복하겠다. 시커Seeker가 된 걸 축하한다.”
작아 보일 수 없었다.
“항상… 건강하거라, 아들아.”
집 뒤뜰의 강아지 두 마리가 컹컹 울었다. 집 안으로 흘러드는 오후의 햇살은 그들의 목 아래까지만 빛을 쬐어, 울 것 같은 사내의 얼굴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