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월요일, 이른 아침. 은우는 다이아박스 사옥까지 나와 박 팀장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설명이 끝났을 때, 그는 목덜미를 쓸었다.
“그러니까, 코니 산하의 게임 제작사가 이번 일을 더욱 크게 부풀렸단 거군요.”
“예.”
들은 걸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거대 기업인 코니사 산하의 신생 게임 제작사가 신작을 내려 했고, 그게 위얼휴먼의 발매일과 겹쳤다.
물론 코니 산하인 만큼 그들도 홍보에 주력했다. 위얼휴먼이 다른 등장인물 시점을 도입하지만 않았어도 형편없이 밀리진 않았을 거다.
그러나 현실은 위얼휴먼에게 모든 이목이 쏠려 버렸으니. 더 큰 문제는 게임의 배경도 살짝 겹친단 것이다. 비등비등할 땐 비교 대상이라도 되지, 이렇게 압도적으로 밀리면 상대가 불가능하다.
때문에 그들은 주목을 돌릴 돌파구를 찾았다. 마침 은우가 일으킨 논란거리는 그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발매일을 늦춘다는 방식을 쓰지 않은 건 글쎄. 그건 그네들 사정이 있어서가 아니겠나.
“문제가 커진 건 제작사에서만 한 발언을 코니사까지 끌어들인 기자 때문이고?”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기자들이 잘하는 게 그거잖습니까? 법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자극적인 제목을 뽑는 것. 어떻게 변하질 않죠.”
발언을 한 곳이 코니사 산하 제작사란 이유로 기자는 제목에 코니를 은근슬쩍 넣었다. 본문에선 코니사가 아니라 산하 제작사의 발언임을 언급했고.
그러나 그 꼼수 덕분에 한국에선 유독 파장이 커진 편이었다. 코니사는 이번 일에 한 마디도 하지 않았건만, 최초로 기사를 낸 기자 때문에 코니사가 시비를 건 것처럼 비쳐진 것이다.
사실 확인도 안 하고 밤새 부채질한 다른 기자들 덕에 불은 더 커졌다. 예나 지금이나 쓰레기 소리 듣는 언론다웠다.
“이번 일로 스트리머를 그만두실 필요는 없습니다. 한동안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겠지만, 은우 씨는 떳떳하니까요.”
은우는 목덜미를 쓸던 자세 그대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목을 타고 손가락의 진동이 올라왔다.
형이 놀러 온 이후 일이 터져서 그나마 다행이다. 만약 터지고 형이 놀러 왔다면…….
“그쪽 게임은 뭡니까.”
“아, 이겁니다. 어제 나왔죠.”
‘After Daybreak’. 그도 알고, 할 예정이던 게임이다. 설마 이런 깜찍한 짓을 벌여 줄진 몰랐지만.
그는 노트에 떠오른 게임 트레일러를 가만 지켜보다가 그 아래로 스크롤을 내렸다.
두 개의 엔딩과 숨겨진 엔딩 하나. 모두가 공정하게 히든 엔딩을 찾을 수 있도록. 절대 금방 밝혀지지 않을 것.
그걸 보며 은우는 생각했다.
고생해서 만든 게임이 망하는 건 싫을 테니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띄우려 한 심정은 이해한다. 그렇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넘어가 줘야 할 이유가 있을까?
누군가가 성공하면 누군가는 패배한다. 그 당연한 사실에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잠자코 패자가 되어 줄 자비심은 그에게 없다. 그는 언제나 짓밟는 사람이다.
손가락이 목덜미를 한 번 더 두드렸다.
만약 그가 해당 게임의 히든 엔딩을 처음으로 찾아낸다면, 감히 그를 엿 먹인 게임사에게 보복이 되려나.
은우는 손을 내려 영상을 검색했다. 구매 인증 절차가 잠깐 떠올랐다가 바로 통과됐다. 박기철이 미리 구매해 뒀던 모양이다.
그는 그 영상을 3배속으로 틀었다. 인간이 기계로 인해 멸망하고 원시시대로 돌아간 신인류. 위얼휴먼과 세계관이 겹친다더니 이 부분을 말하는 모양이다.
“영상은… 왜 보십니까?”
“2회 차를 봐야 한다든가, 특정 물건을 전부 수집해야 하는 식이라면 제가 히든 엔딩을 자연스럽게 못 보잖습니까.”
영상을 한쪽에 띄워 두고 히든 엔딩에 대해서도 검색해 보았다. 제작사가 도발해서 그런지 히든 엔딩에 대한 탐구가 활발하다.
게임사가 바란 모습도 이것일 테다. 히든 엔딩의 난도를 떠나서 이걸 미끼 삼아 사람들이 몰리도록 한 거겠지.
보통이었다면 나중에 은근히 밝히거나 밝혀짐으로써 관심 몰이를 재차 하는 데 써먹겠지만, 그들은 지금 시작부터 망할 기색이니까. 지푸라기 잡는 심정일 거다.
어찌 됐건 은우는 그것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된 것은 개발자 하나가 파랑새에 올려 둔 글이었다.
『단순한 반복 작업으로만은 이 엔딩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주 명석하고 강인한 사람만이 이 엔딩을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편법이나 쓰는 누군가와 다르게 말이에요!』
명확한 도발이었다.
『오, 그렇다면 1회 차에 찾아내긴 어렵겠네요?』
이것 또한 그를 염두에 둔 댓글일 테다. 은우는 그 댓글의 답글을 확인했다. 개발자가 달아 둔 답글이다.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게이머들은 언제나 제작진의 예상을 뛰어넘는 존재죠. 이론적으로 가능은 하게 만들었으니 1회 차에 깨는 분이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그러려면 많은 행운이 필요하겠지만요!』
은우는 그 글을 눈여겨보았다. 가능성이 마냥 없지만은 않을 것 같다.
“설마, 하실 생각이십니까?”
“가능성이 보인다면.”
얕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원은 철저히 다지는 편이었다. 전생에선 상황이 안 받쳐 준다면 수개월, 수년을 기다리기도 했다. 가능성이 보일 때까지. 가능성을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잠시만요. 은우 씨가 그 게임을 왜 합니까?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은우 씨가 잘못한 게 없는 것과는 별개로, 욕해도 광고해 준다는 식으로.”
사색이 된 박기철이 말려 왔다. 눈동자를 잘 살펴보면 이제껏 현명하게 굴어 왔으면서 왜 그래, 따위의 말을 건네고 있다. 자칫하면 그만 망신살 뻗칠 일이니 당연하다.
“꼭 한단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죠?”
“대충 보니 해도 될 것 같지만.”
“예?”
하지만 그건 우스운 의문이었다.
그는 목숨을 대가로 걸어 가며 하나의 인생을 산 사람이니. 망신 따위가 목숨보다 무거울 수 있을까? 이제껏 목숨을 저울에 매달아 왔던 사람이 제 체면 하나 못 매달까?
확률이 0일 때 덤벼드는 어리석음은 없지만, 확률이 0 이상일 때 그것을 1로 만들 집요함은 있다.
하물며 지금의 그는 시간이 넘쳐난다. 확률을 0에서 1로 바꾸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 것쯤이야 상대에게 엿 먹일 수만 있다면 해 볼 만하다. 이 방식이 제작진의 목을 따 버리는 것보다 훨씬 온건하고 스트리머답기도 하고.
“불가능합니다. 무리수예요.”
“글쎄요.”
신에게 달려들 때도 다들 그렇게 말했다. 불가능할 거라고. 절대 안 된다고. 그러나 그 결과는 어땠지?
“만약 성공한다면?”
“네?”
“성공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건 생각해 본 적 없었는지 잠시 동안 박기철은 입만 뻐끔거렸다.
“아주 크고 아름다운 엿을 먹일 수 있겠죠.”
곧 튀어나온 답은 꽤 만족스러웠다.
“그렇지만 너무 허무맹랑하지 않습니까……?”
“저는 멍청이가 아닙니다. 가능성이 없으면 안 합니다. 된다면 한다는 거지.”
“그 말씀이 아니었으면 저는 은우 씨 바짓단을 붙잡고 있었을 겁니다.”
은우는 박기철이 내온 핫초코를 휘휘 저으며 색을 진하게 물들였다. 반면 박기철은 땀난다는 얼굴로 안경을 고쳐 썼다.
“아무리 은우 씨라도 이건 가능성이 너무 낮습니다. 가능할 리 없어요. 위얼휴먼에서 발견하셨다고 해서 다른 게임마저 그럴 거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압니다. 그래서 이렇게 조사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본 루트를 알아야 피할 수 있고, 단서를 잡아야 히든 루트를 논할 수 있으니까.”
“사적인 견해를 표하자면, 시간 낭비라 생각됩니다만.”
“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제가 전문적으로 히든 엔딩만 찾던 사람도 아니니.”
그렇지만 은우는 꼭 하겠다는 입장이 아니다. 단지 가능성을 확인한 후 도전하겠다는 것뿐이지.
“다만 팀장님, 제가 이걸 조사하면서 시간을 날리는 손해가 크겠습니까, 아니면 루트를 찾아냈을 때 얻는 것이 크겠습니까?”
은우는 덤덤히 화염병을 던졌다. 박 팀장이라면 마른세수를 하면서도 계산기를 두드릴 위인이었으므로.
“…밑져야 본전이라고 어느 쪽이든 손해는 없죠. 아니, 오히려 찾아낸다면…….”
역시나 박 팀장은 결론을 내렸다.
하기야 놓치기엔 퍽 구미가 당길 것이다. 은우가 하든 안 하든 이미 특혜 논란은 불거졌고, 그에 대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않나.
반면 해당 게임을 조사하는 건 해도 하루를 보내는 정도에 그치고, 성공하면 압도적인 이익을 얻는 행위다. 심지어 은우는 반드시 하겠다고 고집 부리고 있는게 아니라, 가능성을 먼저 보고 덤벼들겠다 하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만약, 정말 만약에 은우가 이번 일을 해낸다면?
여론은 뒤집어질 거다. 망신은 제작사가 다 짊어질 테고, 은우를 뒤덮었던 논란은 해결될 테지.
은우를 논란거리로 만든 제작사가 은우에게 특혜를 쥐어 줄 리 없으니 히든 엔딩을 찾은 건 오로지 실력이 될 거다. 거기에 그중 한 명이 공언하지 않았나? 아주 명석하고 강인한 사람만이 이 엔딩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순식간에 조소의 대상이 바뀔 거다. 성공만 한다면.
“그렇지만 발매된 지 벌써 사흘째입니다. 찾아낸다 해도 깨는 동안 히든 엔딩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2회 차가 아니거나 수집품을 찾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엔딩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도전하다가 실패할 거예요.”
“압니다. 아마 쉬지 않고 진행해야겠죠. 그래도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그건 밤샘도 불사하겠단 말이라. 박기철은 입술을 잠깐 씹었다.
“VR 특성상 최소 이틀은 이어 가야 할 겁니다. 자료 조사 해야 할 시간을 생각하면 사흘을 내리 쉬지 않고 달려야 할 텐데…….”
“그건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은우는 일주일을 지새워 가며 싸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말했다. 물론 아무리 운동을 취미 삼고 몸을 단련해도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일주일까진 무리일 테지. 그래도 사흘 정돈 괜찮지 않을까?
“하기야 웬만한 운동선수도 저리 가라 하는 사람이었죠, 은우 씨는…….”
박 팀장은 그걸 자신감으로 맞게 알아들었다. 그의 얼굴이 짙은 고민에 휩싸였다.
“심지어 풀 다이브 캡슐까지 있으니…….”
은우는 그게 뭔가 하다가 반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전용 용액만 주입해 두면 끼니 챙길 수고를 덜어 주는 캡슐이었다. 용변 해결이야 고위 기종에는 원래부터 탑재돼 있던 기능이고.
심지어 풀 다이브는 캡슐 내에서 잠도 잘 수 있다. 이 때문에 국내에는 아직 안 들어왔지만 말이다. 게임 관련 규제가 막았다는데… 일단 그가 알기론 그랬다. 관심 없어서 이 이상은 모른다.
“그거, 규제 풀렸습니까?”
“곧 풀릴 겁니다. 저희 측도 시범용으로 하나 받은 거고요. 안 그래도 소속 스트리머에게 사용 후기를 받기로……. 근데 알고 말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건 그렇네요.”
박 팀장은 잠깐 멍청한 반응을 보였다. 너무 어이없는 계획을 들어서 정신이 가출했던 모양이다.
“잠깐. 그럼 굶고 하실 생각이셨던 겁니까?”
“전쟁에서 끼니 챙기는 건 사치입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밥은 드셔야죠.”
“풀 다이브 캡슐이 있으면 안 먹어도 될 텐데요.”
“그건 그런데……!”
이 부분은 박기철이 스스로 판 무점이다. 그가 판 게 아니라.
어쨌거나 후회는 그의 몫이 아니므로 은우는 박 팀장을 빤히 보았다. 이래도 생각 없어? 정말? 그런 눈빛은 덤이었다.
“…하루 만에 찾을 자신은 있으십니까? 아니면 내일 휴방할까요?”
결국 박 팀장이 넘어왔다.
▣ 102. 발음이 같아서 곧잘 헷갈려 하는
“정보가 새어 나갈 수 있으니 사람 동원은 못 하겠군요.”
“혹시 모르니 저랑 박 팀장님만 아는 걸로 하죠.”
“그러면 저라도 돕겠습니다.”
한 번 가능성을 맛본 박 팀장은 이보다 열혈일 수 없는 태도로 협조했다. 끽해야 하루 날리는 것 정도가 손해의 전부란 점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거다.
“오늘부터 며칠간 밤새야겠군요.”
그건 어쩌면 흡사 도박 중독자의 모습이다. 따지고 보면 이 일은 도박에 더 가까웠으니까.
“사옥은 보는 눈이 많으니 이동하죠. 혹시 모르니 이동도 따로 하고. 흠… 문제는 이야기할 장소인데……. 저희 집은 은우 씨가 오셨다간 정체를 들킬 테고… 그럼 어딜 가야…….”
기철이 잠깐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오현 관장님께 가죠.”
박기철이야 평소 자주 방문하는 곳이고, 은우는 카롬사 방문 이후 몇 번 간 곳이다. 가는 것 자체는 의심받지 않을 것이다.
물론 너무 예민한 것일 수도 있으나, 은우나 박기철은 절대 제3자의 시선을 경시하지 않았다. 밝혀질 가능성이 낮고, 밝혀진다 해서 불법으로 화두에 오를 정도의 일은 아니나, 이런 건 그래도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이야, 이거 좀 두근두근하네요. 비밀 작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기왕이면 작전명도 지을까요? ‘스트리머의 방식으로 엿 먹이기’는 어떻습니까?”
“맘대로 하시죠.”
사람의 시선을 비롯해 신경 쓰는 대상에 CCTV 같은 기물이 추가됐을 뿐, 이런 비밀 작업에 익숙한 은우는 덤덤히 짐을 챙겼다. 애초에 들고 온 게 별로 없어 헬멧만 쓰면 됐다.
살짝 상기된 박기철과는 달랐다. 오늘도 그는 인텔리한 첫인상과 한 뼘 정도 더 멀어졌다.
“전 먼저 가서 영상을 분석하고 있겠습니다.”
“그럼 전 제작진들 SNS 계정을 더 털어 보죠.”
그들은 효과적으로 업무를 나눠 가진 후 헤어졌다. 본격적으로 ‘스트리머의 방식으로 엿 먹이기’ 작전이 개시되는 순간이었다.
* * *
은우는 오현의 도움을 받아 관장실에 틀어박혔다. 조사를 위해 자료들을 늘어놓을 때 드는 감정은 살짝 낯설어진 한때의 익숙함이었다.
개체의 무력을 분석하는 데는 천부적인 자질이 있을지언정, 이렇게 다양한 자료를 두고 길을 찾는 건 그의 분야가 아니지만…….
그래도 못하는 건 아니다. 소수로 뭉쳐 다니던 만큼 혼자서도 많은 걸 해낼 줄 알아야만 했으니까.
그는 발표된 컨셉 아트를 뒤져 보는 한편, 박기철의 계정으로 영상을 전부 살폈다. 그의 것으로 보면 기록이 남을 수 있다며 박기철이 노트를 넘겨 준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여 은우는 찾아낸 영상 중 다른 엔딩이라는 두 개의 영상을 전부 띄웠다. 게임 시작 타이밍을 얼추 맞춰 플레이하면 같은 장면이 곧바로 이어졌다. 인트로 영상이다.
[오늘, 새로운 시어Seer가 태어났다.]
3배속으로 돌린 영상 속에서 원시시대보단 좀 더 나아간 것처럼 보이는 광경이 비춰졌다. 그 중심의 늙은 여성은 갓난아이를 들어 올렸다.
광장처럼 보이는 공간에 많은 사람이 모인 걸 보면 아이에 관련한 의식을 치르는 모양이다.
은우는 시어란 단어를 메모하며 아기의 형태가 다른 것을 확인했다. 저게 플레이어인 모양이다.
[미미르시여, 세상 모든 것을 직시할 수 있는 눈과, 진의를 가려 들을 수 있는 귀와, 언제나 올곧게 믿음을 설파할 입술을 아이에게 내려 주시옵소서. 어떤 위험도 이겨 낼 수 있는 현명함, 삿된 지식을 멀리하고 과거에서 배움을 찾을 지혜로움을 애에게 내려 주시옵소서.]
한국어가 아닌 언어로 대사가 귀에 박혔다. 둘 다 공식 자막이 붙어 있기에 이해는 어렵지 않다. 3배속이라 자막이 빨리 사라진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혜의 샘이 네게 이름을 내리니…….]
모두가 경건히 듣는 사이 여성은 제단 위 바구니에 아이를 내려놓고 그 앞의 평평한 돌판에 물을 부었다. 그러자 잠깐 시점이 고정되었다. 돌판 위 물을 대각선으로 내려다보는 시선이다.
플레이어가 무언갈 했는지 돌판 위 물이 움직였다. 둘 다 다른 타이밍으로 이름을 지었기에 은우는 둘 다 10초씩 건너뛰었다. 다음 순간은 설정이었기에 그 부분도 건너뛰었다.
그는 동시에 메모장에 ‘미미르’란 단어도 기록했다. 시어와 연결해 둔 후 옆에 ‘신?’이라는 가설도 적어 두었다.
[금속 악마들에게 관심을 가져선 안 된다. 그것들은 과거 이 땅을 살았던 악마들이 만든 피조물이며 자신의 창조주조차 살해한 괴물들이다. 그러니…….]
어린 아이들을 두고 누군가 수업하는 모습이 가장 먼저 보였다.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공터에서 수업하는 아이들을 외면하며 교사 옆에 물건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교사와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후 공터를 떠나갔다.
이부분은 아까 첫 영상에서 확인했다. 은우는 5초씩 스킵했다.
[어이, 이단!]
돌멩이가 날아오며 캐릭터의 이마를 때리는 장면에서 그는 스킵을 그만두었다.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이마가 살짝 찢어졌다. 돌팔매질을 한 녀석이 비열하게 웃었다.
[또 악마들에게 관심을 가지기라도 했나 보지? 성인식 전날에도 심부름이나 하고 있고 말이야!]
캐릭터는 돌 던진 인물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주먹을 꽈악 쥐었다. 순간, 세계가 멈추며 선택지가 떠올랐다.
『정지 선택지는 특정 사건에 대한 결정권을 플레이어에게 제공합니다. 하나의 선택이 어떤 일을 불러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 무시
⦁ 말로 모욕
⦁ 돌멩이를 던져 위협』
은우는 창을 새로 띄워 정지 선택지에 대해 검색했다. 대충 많은 이가 엔딩 분기를 결정하는 데 쓰이지 않는가 추측하고 있다. 실제로 캐릭터 몇 명의 목숨은 이 선택으로 인해 좌지우지되는 모양이다.
그는 그것을 체크하며 메모장에 계속 가설을 추가했다. 그가 시청하는 영상의 플레이어들은 고민 끝에 각자 다른 선택을 했다. 무시와 모욕이었다.
두 선택 다 캐릭터는 다른 반응을 했지만, 공통적인 건 있었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행위를 마치고 가던 길을 가면 뒤에서 분개하는 소리만 들려올 뿐, 추가적인 공격이 없다는 것이다.
매번 당하기만 하는 주인공들만 보다가 이런 선택지가 주어지니 퍽 나쁘지 않다. 제작사가 불쾌한 짓거리를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그도 즐겁게 했을지 모른다.
은우는 약간의 안타까움을 느꼈다.
『숨길 수 없는 호기심
⦁ 집으로 돌아가기』
『“저 코너를 꺾어 언덕으로 올라가면 집이 나와. 무너진 담벼락을 얼른 고쳐야 하는데.”』
시야 한쪽에 퀘스트가 떠오르는가 하면, 확대했을 때 힌트도 주어졌다.
두 플레이어는 그걸 이용해 집을 찾았으나, 조건을 충족하는 집이 두 채였던 탓에 갈팡질팡했다. 우연하게도 한쪽은 왼쪽을, 한쪽은 오른쪽을 골랐다.
곧 밝혀진 결과는 오른쪽이 정답이었다. 왼쪽으로 간 쪽은 『“여긴 우리 집이 아니야.”』 소리를 듣고 되돌아서야 했다.
반면 쌍둥이 개가 있는 오른쪽의 경우, 수월하게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 집에 들어오는 거냐? 설마 또 금속 악마에게 관심을 가져 벌을 받은 건 아니겠지?]
『숨길 수 없는 호기심
⦁ 집으로 돌아가기
⦁ 방으로 돌아가기』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삿된 과거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고. 너는 시어로서 올바른 것을 직시할 의무가 있다. 금속 악마에게선 제발 관심을 떼라.]
금속 악마는 역시 기계일까. 은우는 세계관에 대해 파악하며 두 플레이어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부디 내일 성인식에서 네가 네 눈과 귀를 가리는 부정한 것을 씻어 내길 바란다. 올바른 시커가 되기 위해.]
[이봐, 나르스! 도와주지 않겠어?]
한쪽은 마을을 둘러보거나 파밍을 하느라 지체됐고, 한쪽은 거침없이 스토리를 진행하고 있다. 그로 인해 진행 속도가 달라 장면 또한 다르게 떴지만, 은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무기는 창과 활이 다인가.”
조작성 때문에 원거리 무기를 주로 잡는 게임은 VR에서 드문데, 나름 독특한 점이었다.
심지어 그것은 철제나 청동제도 아니었다. 나무를 깎고 돌을 깎아 매단 무기였다.
물론 뒤에 추가될 가능성도 있고 무슨 무기를 쓰든, 어떤 재질이든 별로 상관없긴 하다. 은우는 그들이 안내 메시지에 따라 무기 장착 하는 것을 넘겼다.
『숨길 수 없는 호기심
⦁ 울타리 고치기
└ 0/5 오리나무
⦁ 마지막 훈련
└ 0/2 사슴 사냥』
무기를 전부 장착하니 다음 퀘스트가 떠올랐다. 전부 시스템을 알려 주기 위한 튜토리얼의 일부일 것이다. 은우는 그 부분에서 배속을 더 늘렸다. 그가 바라는 건 스토리지 저들의 파밍 장면이 아니다.
영상의 재생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 * *
박기철은 오현의 도움을 받아 몰래 관장실로 들어갔다가 흠칫 놀랐다.
“…저게 다 눈에 들어오나?”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건 그의 진심이었다. 아무렴 눈앞에 영상 네 개를 동시에 보고 있는 사람이 들어오면 저런 소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을 거다. 심지어 그 사람이 필기와 검색까지 함께 하고 있다면.
“북유럽 신화는 어렵네요.”
“아, 좀 그렇죠.”
‘After Daybreak’는 북유럽 신화 요소를 써서 만들어진 게임이니. 꼭 해당 신화를 알아야만 찾을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게 히든 피스를 찾기 쉬울 거란 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북유럽 신화에 대해 조금 알긴 합니다. 뭐가 궁금하십니까?”
“그럼 이쪽 메모장에 아시는 것 좀 적어 주시겠습니까.”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서은우는 메모장을 건넸다. 박기철은 그것을 받아 빠르게 읽어 보았다. 따로 조사해 보긴 했는지 기본적인 사항이 적혀 있었다.
박기철은 그것을 보며 없는 정보를 여럿 추가했다. 해석에 따라 전승이 여러 개로 나뉘는 것이 신화다 보니, 은우의 정보는 한 부분에 불과했던 덕이다.
“히든 엔딩에 대한 단서는 어디, 보이십니까?”
“일단 히든 엔딩에 필요할 거라 추정되는 것들은 있습니다.”
영상 배속을 낮춘 서은우가 새로운 메모장을 켜 주었다. 기철은 그 속에서 서은우가 추측한 가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 조금 지저분했지만, 최소한의 분류는 되어 있어서 그럭저럭 이해가 가능했다.
“적으신 것처럼 ‘고 에다’가 확실히 가능성은 높아 보이네요.”
해당 게임에 등장하는 수집 콘텐츠에는 생물 도감과 전前 인류의 기록, 유산(보물), 고 에다가 있다고 적혀 있으니.
‘단순한 반복 작업만으로는 이 엔딩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걸 감안하면 이 전부를 채워야 히든 엔딩을 볼 수 있는 건 아닐 거다.
반면 ‘반복 작업으로는’이 아니라 ‘반복 작업만으로는’이라고 말한 걸 보면 높은 확률로 수집 요소도 포함되긴 할 테고.
“찾아야 하는 고 에다가 45개나 되는데 괜찮은 겁니까? 심지어 이 게임, 오픈 월드인데.”
“그 부분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영상을 전부 정지한 서은우가 가볍게 눈 운동을 했다.
“9번째 메모에 고 에다 위치를 적어 놨습니다.”
박기철은 서둘러 9번째 페이지를 펼쳤다.
“스물세 개나 찾으셨군요.”
“전부 스토리를 따라가던 도중에 나왔습니다. 서브 퀘가 아니라.”
오픈 월드에서 수집품은 보통 여러 군데 퍼져 있다. 그렇지만 스토리를 따라가는데 스물세 개가 발견됐다는 건 그렇게까지 마구 숨겨 둔 건 아니란 소리가 된다.
“물론 혹시 모르니 내일 방송까지 발견 개수가 35개 이하라면 이 일은 관두죠.”
“좋은 판단이십니다.”
“여기 하나 더 나왔네요. 잠깐 메모장 좀 주시겠습니까.”
박기철은 순순히 내주었다. 점심시간 이후로 쭉 영상을 본 탓인지 눈매가 나른해진 서은우가 노트를 낚듯 채 갔다.
“문제는 고 에다만 찾는 게 다가 아닐 거란 건데…….”
“밝혀진 엔딩 두 개가 각각 희생해서 로키를 죽이는 것과 로키와 손잡고 배신하는 엔딩이니, 히든 엔딩은 아마 로키를 죽이되 주인공은 살아남는 게 아닐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흠.”
그는 서은우의 가설을 들으며 안경을 추슬렀다.
히든 엔딩 자체에 대한 추측이야 그가 감히 건드릴 수 없다. 그는 아직 한 영상도 끝까지 못 봤으니까. 그러니 그 부분은 은우에게 맡기는 게 맞다. 외려 그가 해야 하는 건 서은우가 해내지 못하는 부분이겠지.
“고 에다가 정말 히든 엔딩에 요구되는 거라면 그 내용도 히든 엔딩에 관련된 거겠죠.”
“아마도.”
“찾은 고 에다 데이터는 어떻게 나옵니까?”
서은우는 말없이 메모장을 넘겼다. 스크린샷이다.
“이 게임은 로키의 아들을 발리라고 설정했군요.”
“문제 있습니까.”
“어… 문제까진 아닙니다. 전승 차이일 뿐이지.”
“전승?”
“먼저 로키와 시긴 슬하에는 아들 두 명이 있습니다. 두 아들의 이름은 각각 발리와 나리죠. 다만 이것도 전승에 따라 이름이 바뀝니다. 나리의 경우 나르피, 나르비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가 있고, 발리가 나리라는 해석도 있죠.”
기철은 거기에 덧붙였다.
“참고로 신들이 발리를 늑대로 바꾸어 나리를 죽이게 만듭니다. 죽은 나리의 창자는 로키를 묶는 사슬이 되죠.”
사람은 자신은 자식의 지식을 뽐낼 때 어쩔 수 없이 으스대기 마련이라. 박기철은 약간 들떠서 관련 없는 부연 설명을 또 늘어놓았다.
“아, 그것도 아십니까? 발리는 북유럽 신화에서 둘 존재합니다. 철자가 Wali인 발리와 Vali를 쓰는 발리죠. 한국어로 보면 발음이 같아서 곧잘 헷갈려 하는 부분입니다.”
그렇지만 그 으스댐은 서은우에게 원활한 정보 제공으로 바뀌었다.
“설명해 주세요.”
영상 하나 찾아보는 것보다 훨씬 빠른 사전의 등장에 은우는 뽕을 뽑기로 했다.
“V자로 시작하는 발리가 로키의 아들이고, W로 시작하는 발리가 오딘의 아들입니다. 로키가 장님 호드를 꾀어 발두르를 죽게 만들었을 때, 호드를 죽이기 위해서 오딘이 낳은 아들이죠. 이때 더블유 발리는 복수의 신입니다.”
서은우의 눈을 가늘어졌다.
“그거 이상하네요. 여긴 오딘의 아들도 V로 표기되는데.”
“네?”
단서 하나가 걸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