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난 너 같은 동생을 둔 적 없어. 내 형제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언니밖에 없다.”
엄버의 말에 소년이 키득키득 웃었다. 시조일과 건조한 표정인 엄버와 달리, 서글서글 웃는 모양새가 영 닮지 않았다. 미소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서늘한 분위기인 것도 문제였다.
[어머니가 같잖아. 그러면 형제지, 뭐.]
“헛소리. 너를 만드는 데는 나도 참여했다. 그러면 나도 어머니인가?”
깔끔하게 소년의 말을 잘라 낸 그녀는 무기를 들었다.
“저것은 ‘선악과의 뱀’ 본체가 아니다. 본체는 따로 존재해. 데이터 덩어리라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지.”
은우의 손이 목덜미를 쓸었다. 그러면 제거가 불가능하지 않나? 시청자들도 비슷한 의견을 제출했다. 역시 사람 생각하는 건 거기서 거기다.
“다만 데이터 양이 많다 보니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어 있다. 세상이 멸망한 지금 녀석을 담을 수 있는 컴퓨터는 이곳밖에 없지.”
그때 엄버가 작게 읊조리며 정보를 건넸다. 덕분에 컴알못인 은우는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때는 컴퓨터를 부숴도 데이터가 남는 통에 기계장치가 가져가 복구할까 싶어 그러지 못했지만… 이젠 달라. 널 복구할 수 있는 기술자는 전부 죽었어.”
엄버의 눈동자가 언뜻 광기 어린 것처럼 빛났다. 아까 설명할 땐 굉장히 태연해서 몰랐는데, 유감이 상당한 모양이다.
“녀석이 도망쳐 몸을 숨길 수 있는 백업 공간 또한 없지. 인류? 통신은 끊겼어도 본진은 대비하고 있을 거다. 가자마자 삭제당할 터. 기계장치로 몸을 이동하는 것도 본체가 있다면 모를까, 본체 없이는 자아 유지가 불가능해. 그렇지?”
[…너무하네, 수백 년 만에 보는 작품한테.]
“널 만든 걸 후회해. 너만 만들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그 사지에 남을 필요가 없었는데.”
[정말 너무하다니까.]
소년의 근처로 진흙 비슷한 것이 계속 떨어져 내렸다.
“보스전 시작할 것 같습니다.”
은우가 든 무기가 희미한 광원에 의해 은은히 빛났다.
[화난 건 난데, 네가 화내면 내가 뭐가 돼?]
“인디고, 저것을 제거한다.”
무너진 소년의 몸 구성 성분까지 더해 기어코 거대한 기계장치가 만들어졌다.
[전부, 죽여 버리겠어!]
선악과의 뱀이 등장했다.
▣ 100. 그리고 컷신이 풀렸다
거대한 뱀 형태의 그 괴물은 빠른 속도로 머리를 쏘아 냈다. V들이 스칼렛을 데리고 통로 밖으로 나가고, 두 사람은 입구 쪽에서 벗어났다. 두 몸이 홀 양쪽으로 쭈욱 미끄러지며 뱀을 향해 달려들었다.
뱀이 고개를 회수했다. 가까스로 그들의 검이 뱀의 비늘을 긁었다.
“이거 단단하네요.”
─ㄷㄷ 칼이 아예 안 박히네;;
─보스 수듄
─매우 어려움은 피통 깎을 것도 없지 않나?
─ㅇㅇ 없음 그냥 대가리 잘라야함
─저걸 어케 잡아 그럼
기본 무기인 걸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상처 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은우는 고민하다가 뱀의 입안을 슬쩍 훑었다. 진짜 뱀이라면 속살이 연하겠지만, 저게 기계장치의 일종이라서 영 불안하다.
뱀이 혀를 ‘츄릅’ 하더니 입을 벌리고 다시 덤벼들었다. 타깃은 은우였다.
쾅!
거대한 뱀은 바닥을 부숴 가며 그들을 공격했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그들은 비늘을 긁어 주기만 할 뿐 타격이라 할 만한 것은 줄 수 없었다.
“이대론 녀석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없어!”
이조차도 스토리가 의도한 바인지 3번째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엄버가 외쳤다. 은우는 도끼를 든 채 목을 쓸었다.
“이봐, 혼자서 버틸 자신 있어?”
은우는 부서지느라 경사진 돌판을 밟고 뱀의 머리를 피했다. 백 텀블링을 하듯 피한지라 한 바퀴 회전한 몸 아래엔 뱀의 검은 비늘이 있다.
“여러분들이 지루해하시지만 않는다면 비늘을 갈아 죽이는 것도 가능할 텐데요.”
─ㅋㅋㅋㅋㅋㅋㅋ
─정보)무기 내구도는 없다
「‘그것은마치’ 님이 ‘1,000원’ 투척!
산을 깎는 노인과 같았다」
─지루할 것 같긴 한데 보고는 싶다
그건 방송용 멘트였으나 시스템은 대답으로 치부했다.
“폭탄이 근처에 있어! 가져올 테니 그때까지만 버텨!”
엄버가 휙휙 뛰어 홀을 나갔다. 은우는 일어서려는 뱀의 몸을 뛰어올라 녀석의 미간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머리에서 뛰어내릴 때 단도를 던졌다. 단도는 녀석의 각막에 튕겨 나갔다.
“귀찮게 눈도 단단하네요.”
연이어 검을 들었다. 포격이 작렬했으나 결과는 비슷했다. 조금 더 충격이긴 했는지, 뱀이 고개를 휘저은 정도가 다였다.
─너무 단단한데
─약점 있긴 함?
─공략법 곧 나옴 ㄱㅊ
─(금지된 채팅입니다)
─스포 ㄲㅈ....
탁!
바닥에 착지한 은우는 빠르게 홀을 가로지르듯 내달렸다. 뱀이 포효하자마자 새로운 패턴이 나오기 시작했다.
똬리를 튼 몸에서 꼬리가 나오더니 빠른 속도로 바닥을 내려쳤다.
머리가 한 점으로 쏘아진다는 개념이라면, 꼬리는 채찍처럼 직선을 내려친다. 속도는 머리보다 느렸지만, 피할 공간이 한정된다는 점에서 좋지만도 않다.
심지어 꼬리는 연달아 내려치는 공격을 했다. 잘못 피하면 피할 공간이 없어 깔리게 되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은우는 홀을 가로질러 달리다가 벽과 가까워지는 걸 확인하곤 몸을 틀었다.
꼬리가 내려찍힐 자리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좁힌 뒤, 들어 올릴 때에 맞춰 그 자리를 통과하면 그럭저럭 다시 피할 수 있게 된다.
쿵, 쿵, 쿵. 꼬리가 그의 뒤를 따랐다.
녀석이 꼬리를 내려친 횟수는 7번. 면적으로 따지면 홀 전체를 내려친 것과 같다. 현실성을 부여한 탓에 바닥에는 금이 쩍쩍 가 있고 중간중간 무너지거나 솟은 곳도 생겼다.
오가는 게 불가능할 지경으로 굴곡이 진 것은 아니나, 평지에 비하면 험악하기 그지없다.
─저거 쉬움에선 몇 번이지?
─3번인가?
─방금 7번 때린 것 같은데,,,ㅋ
─바닥 금간 거 실화냐
─진짜 매어는 매어구나;;
악랄한 난이도에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패턴이 너무 간단하네요. 설마 이게 다는 아니겠죠.”
물론 당사자는 조금의 곤란함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늦어서 미안하다!”
해당 패턴을 두 번 정도 겪으니 엄버가 복귀했다. 그녀는 폭탄 꾸러미를 은우에게 던져 주었다.
“타이머를 설정한 후 버튼을 누르면 터져!”
“이거…….”
“시간은 음성으로도 설정할 수 있으니까 참고해!”
타이머를 설정할 수 있고, 버튼을 누르면 카운트를 시작한다라. 사용법이 바로 감 잡혔다.
“그냥 던지면 잘 안 먹힐 것 같지 않습니까?”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럴 확률이 크다. 무엇보다 통한다 한들 그건 별 타격이 없을 것 같았다. 자고로 이런 무기는 이왕 쓰는 거 약점 쪽에 쓰는 것이 제일 효율 좋지 않겠는가.
은우는 폭탄을 입가에 가져다 댄 후 작게 중얼거렸다.
“4초.”
뜬금없는 ASMR에 사람들이 잠시 귀가 멀쩡한지 확인하는 동안 은우는 폭탄을 그가 있는 자리에 떨어트렸다. 동시에 그의 몸이 옆으로 빠졌다.
쾅!
입을 벌린 뱀이 그 자리를 물어뜯었다. 그러니까, 폭탄이 있는 자리를.
거대한 폭음이 벽 하나를 둔 것처럼 둔중하게 들려온 것은 그 직후였다. 입안에서 터진 폭탄에 뱀의 머리가 축 늘어졌다. 홍채가 멋대로 줄었다 늘었다 하는 걸 보니 잠시 기절 상태에 돌입한 모양이다.
은우는 빠르게 녀석에게 다가가 눈 쪽에 폭탄을 부착했다.
“5초.”
버튼을 꾹 누른 그는 다른 손으로 녀석의 비늘을 짚고 몸을 끌어 올렸다. 녀석의 매끄러운 정수리를 뛰어넘어 반대쪽 땅에 안착하면 폭탄이 쾅, 하고 터졌다.
쾅!
폭음 하나가 잇따랐다. 뱀의 똬리 튼 몸 쪽에서 들린 그것은 아마 엄버의 차지일 것이다.
[캬아아아악!]
눈과 몸에서 인 충격에 뱀이 다시 깨어났다. 그것은 고통에 겨워 몸부림을 쳤는데, 그때마다 홀이 진동하며 천장 일부를 떨어트렸다.
“됐어, 조금만 더 충격을 가하면 될 것 같아.”
─폭탄 2개로;;
─내가 아는 분은 2트에서 폭탄 다 쓰고 저 대사 들었는데
─그래서 어케 됨??
─폭탄 없어서 걍 긁어야 됐음ㅋ 걍 죽고 재도전ㄱㄱ
은우는 남아 있는 폭탄 3개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6초.’라는 중얼거림과 함께 버튼을 눌렀다.
─?
─설마
─여기서? 에반데
─켄 모르는 니가 더 에반데
─켄잘알은 의심 안 함
“그러니까…….”
그의 손에서 폭탄이 날아갔다. 부메랑처럼 회전하며 날아간 그것은 심지어 경로마저 곡선을 그렸다. 막 정신 차리고 포효하려던 뱀의 입에 폭탄이 꿀떡 넘어갔다.
“이걸 파이어 인 더 홀이라고 하지?”
쾅!
은우는 폭음을 기분 좋게 감상했다. 시간 끌지 않는 것도 모자라 폭탄을 단번에 던져 넣는 묘기에 시청자들이 좋아라 박수쳤다. 후원금이 톡톡 쌓였다.
[크으윽, 젠장, 젠장! 어째서! 대형 기계장치는 분명 수십의 인원을 상대할 수 있는데!]
─손님 그건 켄이 없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아 그건 켄 없을 때고~
─수십 명 <<<<<<< 켄이잔어
─모르면 죽어야지ㅋㅋ
─스트리머가 아니라 보스가 모르면 죽는 방송
뱀의 형태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다시 일어난 건 소년이었다.
소년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막을 형성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무슨 자원과 기술력으로 저런 걸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쉿!
─메타 발언은 안 돼!
─그건 어른들의 사정이라구!
[가라!]
소년을 빚고 난 후에도 남아도는 진흙 사이에서 기계장치들이 일어섰다. 소형 기계장치들의 수는 정말로 많다.
“쫄 타입은 싫은데.”
1인 디펜스라면 모를까, 보스전에서 졸병들이 나오는 것은 그다지 반갑지 않다. 은우는 아쉬움에 혀를 차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도끼였다.
“인디고, 가자!”
“제거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몸이 대지를 박찼다.
[쓰레기 같은 놈들, 전부 죽어 버려!]
바닥에서 꾸준히 솟아나는 소형 기계장치들과, 소년이 쏟아 내는 탄환이 어울리며 꽤 제한된 공간을 만들어 냈다.
은우의 도끼날이 바닥부터 올라가 졸병들의 턱을 가르고 자루 부분의 끝으로 녀석들의 미간을 찍었다. 그러곤 부드럽게 뱅글 돌려 옆에 있던 녀석의 목을 갈랐다.
은우는 목을 쳐 낼 때의 저항감으로 회전을 거의 멈춘 창을 제대로 잡았다. 그러곤 옆으로 콱 찍었다. 도끼의 옆쪽, 뾰족하게 올라온 부분이 기계장치의 눈을 찍었다. 연이어 그 날은 녀석의 머리를 반을 쪼갰다.
“피가 안 튄다는 점은 마음에 듭니다.”
─피 안 튀면 19금딱지 덜 붙긴 하죠ㅋ
─VR에서 피 튀기는 건 좀 별로긴 해
─ㅇㅇ,,,렬루 느낌 별로 넘 잔인함
─그게 좋은 거 아닌가?
─윗놈 최소 싸패
“아뇨, 잔인해서가 아니라…….”
전생에서 귀찮은 일의 순위권을 꼽으라 하면 다섯 손가락 안에 무장 관리가 들어갈 것이니.
피에 절은 옷만큼 빨기 어려운 건 없다. 사람을 자른 무기도 날에 뼈와 살점, 굳은 피 따위가 끼면 절삭력이 떨어지기 일쑤라, 관리를 자주 해 줘야 했다. 여러모로 귀찮아지는 거다.
“옷이 안 더러워지잖습니까. 물론 게임이니까 처음부터 따로 세탁을 할 필요는 없지만.”
─귀찮음 문제였냐고ㅋㅋㅋㅋ
─이분이 제일이었네
─사스가 학살좌
─ㅋㅋㅋ피 좀 튀어봤구나 형?
─특수부대설 이쯤되면 찐 같잖어,,,
“글쎄요.”
특수부대 오해를 부정하기도 이젠 귀찮다. 은우는 도끼질로 날면서 그를 공격하던 녀석의 엔진을 잘랐다.
“제가 뭘 말하든 결국 여러분들은 멋대로 생각하실 거잖습니까.”
기계장치가 추락하자마자 부츠 굽이 녀석의 머리를 짓뭉갰다.
“드디어 날파리를 잡았네요.”
도끼는 이 순간에도 휘둘러지며 주변을 정리하고 있다.
창처럼 리치가 긴 덕에 금방 포위망을 물렸다. 은우는 도끼로 탄환을 부숴 가며 기계장치들을 정리했다. 계속해서 솟아오르던 기계장치들은 점차 종류가 다양해지고 있다.
충격파를 일으키는 것부터 소년처럼 탄환을 던지는 것, 빔을 쏘아 보내는 것. 포메라니안처럼 쪼끄만데 크기가 작고 떼거리로 덤비는 것, 팔을 쭈욱 뻗거나 몸체를 팽이처럼 돌려 가며 휩쓰는 것까지.
물론 전부 도끼질에 목이 달아나거나 사지가 찢겨 나갔다.
엄버는 메인 NPC의 특권으로 알아서 잘 버텼다. 그런고로 은우는 그녀의 안위를 신경 쓰지 않고 마구잡이로 돌아다니며 싸웠다.
스칼렛처럼 총을 쓰는 부류도 아니었기에 위치만 인식하면 별다른 방해도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잡은 걸 다 만나는 기분입니다.”
─쫄 극-혐
─쫄 너무 많은데
─이걸 깨라고 만들었냐?
─킹치만 켄이라면?
─킹갓학살좌는 지지 않아!
“심지어 셋도 있네.”
상어가 회수한 신체로 다시 만들었다는 셋마저 나타났다. 물론 이미 잡아 봤던 녀석인 만큼 은우는 어렵지 않게 녀석을 사살했다. 보스가 아닌 졸병으로 등장한 것이라 금방 부서지기도 했다.
[왜 죽지를 않는 거야!]
장판까지 깔아 주며 은우와 엄버를 죽음으로 몰고 가던 소년, 선악과의 뱀은 끝내 화를 냈다. 그와 동시에 진흙들이 전부 뭉개졌다.
[뭐, 뭐야. 안 돼, 안 돼!]
의도한 바가 아닌 듯 선악과의 뱀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젠장, 에너지가……!]
다행히 상대도 무한하게 소환할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후, 어떻게든 버텨 낸 것 같군.”
엄버도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슬쩍 보면 상처가 엄청 늘어 있다. 검을 지팡이 대용으로 쓰기까지 했다.
“그보다 지원이 너무 늦는군.”
“아.”
─인류 꼽주는 건가?
─근데 비번이랑 길이랑 다 알려줬으니까 꼽 줄만도;;
─그보다 켄 "아" 들었냐ㅋㅋㅋ
─솔직히 말해요, 까먹고 있었죠?
시청자들은 그를 너무 잘 알아서 탈이다.
“안 왔으면 좋겠어서.”
예상과 다르지 않은 대답에 사람들이 깔깔댔다.
“인간들을 탓하는 게 아니야. 사실 탓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기엔 휴머노이드들도 오질 않는군.”
엄버의 말에 소년이 고개를 쳐들었다. 에너지가 떨어졌다면 퍽 심각한 상황일 텐데도 이런 건 놓치지 않는 게 대단했다.
[아하하하, 지원이 오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
“…너, 설마!”
[시간이 부족해서 세뇌는 불가능했지만… 적어도 일시적 분열엔 성공했지.]
선악과의 뱀이 히죽 웃었다.
[지금쯤이면 실컷 저들끼리 싸우고 있지 않을까?]
“빌어먹을!”
엄버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휴머노이드와 인간이 따로 진입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그들끼리 싸움을 붙였을 거란 걸 알아 더욱 화가 났다.
한편 은우는 선악과의 뱀이 한 말의 다른 면을 깨달았다.
“그러면 보스를 다 잡을 때까진 지원군이 없다고 봐도 되겠네요.”
─만족해한다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지원군은 방해다 이거야!~!
─보스: 이게 아닌데
「‘ㅉㅉㅉ’ 님이 ‘10,000원’ 투척!
보스가 멍청하네 켄 아군오면 약해지는데;;」
─아 이거 맏따ㅋㅋㅋ
그렇지만 별 도움도 안 되는 지원군들이 오느니 그 혼자 싸우는 게 낫다. 그들의 공격은 괜히 은우만 몸 사리게 만드니까 말이다.
“중요한 건 이제 어떤 패턴을 내놓냐는 건데.”
은우는 엄버를 비웃는 선악과의 뱀을 보았다. 도대체 싸울 생각이 있긴 한 건지.
그는 아까 던지고 남은 폭탄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타이머를 설정해 던졌다.
정확한 시간 설정은 폭탄이 녀석에게 도달하자마자 터지도록 해 주었다.
[이 미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말은 적당히 해야한다는 교훈
─악당도 변신시간은 안 건들여욬ㅋㅋ
─오늘도 사탄 1패
엄버가 그를 돌아보고, 선악과의 뱀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숨겨진 도전 과제를 달성함! -언제까지 떠들 거야?』
완벽했다.
[아주 대범하네, 너. 그래 봤자 네 마음 깊은 곳엔 공포가 넘실거리고 있는데 말이야.]
선악과의 뱀이 혀를 놀렸다. 아마 인디고의 설정에 맞춘 대사일 것이다.
[내가 죽긴 하는지, 죽일 수 있긴 한지 불안해? 계속 부활하는 건 아닌지,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건 아닌─]
“말이 많은 건 질색인지라.”
은우는 하나 남은 폭탄을 또 던졌다. 그러자 다음 페이즈가 바로 당겨져 왔다.
[이 주제도 모르는 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라? 너 약간,,,,눈치가 없달까?
─???: 풋
─보스 선넘네
─서열정리 함 가자
소년은 드디어 본모습으로 나섰다. 비록 주변에 방어막을 두르고 진흙을 빚어 거대한 팔을 생성해 냈지만, 훨씬 나았다.
은우의 손에 쌍검이 쥐어졌다.
[더러운 인간 놈들은 다 죽어 버려야 해!]
“녀석의 에너지는 거의 다 떨어졌을 거다. 이것만 이겨 내면 돼!”
“그건 좀 아쉬운 이야기네요.”
은우는 슬쩍 채팅 창과 현실 시각을 확인했다. 이제 9시가 다 돼 간다.
아니. 사실 9시가 되려면 2, 30분은 남았다. 보스를 잡고 엔딩까지 다 봐야 간신히 9시를 넘기지 않을까 싶다.
지금 시청하는 이들 전원 구매자라 엔딩 전체 수집에 도전해도 좋지만, 반응이 어떨지 모르겠다. 차라리 다른 콘텐츠를 마련해 두는 게 나을까. 기억하기론 증명의 탑이란 곳도 콘텐츠로 써먹을 만해 보이던데.
“오늘 방송은 일찍 끝날 것 같습니다.”
─죽음은 털끝만큼도 염두해두지 않는 클라스
─그럼 딴 겜??
「‘후,,,’ 님이 ‘1,000원’ 투척!
지금부터 네뷸라 쳐두고 존버한다」
─네뷸라무새 아직도 있누;;
─킹치만 학살이 보고 싶은 걸!
─브론즈가 마스터 즈려밟는게 보고 싶은걸!
「‘키보드에서손떼!’ 님이 ‘1,000원’ 투척!
종료즉시 엑헌 디엘씨 친다 나만 친다」
─네, 다음 개솔 잘 들었구연~
“다른 게임은 좀 그렇고, 위얼휴먼 내에서 할 수 있는 콘텐츠를 찾아볼까요.”
은우는 자리를 박차 거대한 팔을 피했다. 그리곤 연이어 그가 밟는 자리마다 솟아오르는 에너지의 창을 피해 내달렸다. 손에 쥐어진 쌍검이 허공으로 내던져졌다.
그는 그 상태에서 솟아오르는 석판을 밟고 되돌아 뛰었다. 쌍검이 그의 손에 잡히고 엄버를 노리며 내려쳐진 팔 위에 발이 안착했다.
땅땅땅땅!
안이 비었는지 철의 팔 위를 달릴 때마다 특유의 소리가 났다.
[이 자식.]
선악과의 뱀이 팔을 들어 올리며 이리저리 털었다. 은우는 흔들거리면서도 꾸역꾸역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 균형 감각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너는 날 공격하지 못해!]
뱀이 팔로 바닥을 내려찍으려는 찰나, 그는 뛰어올랐다. 은우의 몸이 소년을 감싼 방어막과 부딪쳤다. 투명한 방어막 위로 아주 약한 실금이 갔다.
─아, 그래서 방금 뭐라고?ㅋ
시청자들의 어깨가 태산처럼 솟는 순간이었다.
탁.
중력의 법칙에 따라 그는 추락했다. 그렇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방어막만 깨면 될 것 같습니다.”
은우의 몸이 옆으로 구르며 탄환을 피했다. 엄버는 팔을 공격해 팔을 구성하는 에너지를 닳게 만드는 수법을 택한 상태다.
소년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만은 못한 행위나, 나쁘진 않다. 적어도 은우가 밟고 올라갈 타이밍을 만들어 줬으므로.
그리고.
까앙─
[이, 이 무슨!]
다섯 번의 도끼질 끝에 정말로 방어막이 깨졌다. 정석 공략법은 엄버처럼 에너지를 끌어모아 만든 손을 부숴 에너지 소비량을 늘리는 것이지만, 세상사 모로 가든 도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되는 법이다.
“최종 보스치고 많이 아쉬움이 남는 녀석입니다.”
중간중간 들려온 대사를 통해 캐릭터성은 확립했지만, 난이도로 따지면 아쉬움밖에 없다. 은우의 도끼가 녀석의 목을 망나니처럼 베었다.
“…해치웠나?”
─아니, 저건 부활주문?!
─해치웠나....?!
─엄버 누님 사실 배신자였던 거임ㅋㅋ
─ㅎㅊㅇㄴ?!
소년의 몸이 진흙으로 화하는 동안 엄버가 천천히 다가왔다.
“이제 컴퓨터를 찾아서 삭제하고 부숴 버리면─”
복도에서 큰 소리가 났다. 그들이 이 홀에 들어오기 위해서 지나쳤던 그 복도다.
[위기. 위기.]
V2053이 다급하게 들어오며 음량을 키웠다.
[스칼렛R에게 이상 현상 감지. 인디고B가 육안으로 확인할 것을 권고.]
“…진짜 부활 주문입니까?”
─??
─엥, 저게 끝일 텐데
─루트가 달라져서 뭐가 더 추가된 듯
─ㅋㅋㅋㅋ리얼 부활주문ㅋㅋㅋ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보스 몹이 부활하며 싸움 시간이 늘어진다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사실 그러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은우는 고개를 기울이며 빠르게 스칼렛에게로 향했다. 스칼렛의 V와 바닥에서 펄떡거리는 스칼렛이 보였다. 컷신이 시작되었다.
“……!”
“이건…….”
“하, 하하하!”
스칼렛은 발작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두 눈에선 피눈물이 흘렀고, 열이 어찌나 올랐는지 얼굴이 새빨갰다. 땀들이 줄줄 흘렀다.
“인, 간 주제에, 쓸모는 있네. 조, 금 부담되긴 하지만, 버텨 줄, 줄이야…….”
스칼렛, 아니 아마도 선악과의 뱀이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몸은 위험천만해 보인다. 본인은 별 생각 없어 보이지만 말이다.
피눈물이 뚝, 뚝 떨어져 내렸다. 배양액에서 만들어진 아바타의 피는 빨간색이 아니었으므로, 그 피눈물 역시 붉진 않다.
“인간이 증오스럽다더니, 잘도 그 몸에 들어갔군. 넌 자존심도 없나?”
“킥, 킥.”
선악과의 뱀이 엄버를 비웃었다.
“증오스러우니까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거라곤 생각 안 해?”
뱀은 쉭쉭 소리를 냈다.
“이 녀석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오랫동안 현장에서 일하느라 우울증에 걸려 자살까지 각오하던 차에, 내 덕분에 삶의 의미를 찾았잖아? 인류의 멸망을 위해 움직인다는 진정한 가치.”
“자기 합리화는 너 혼자서 지껄여라. 당장 그 몸에서 나가.”
“내가 왜? 너희, 이거 동료랍시고 살려 둔 거잖아? 내가 있다고 공격을 제대로 할 수는 있겠어?”
─.....^^
─^^7
─주님 한명 또 갑니다
─켄이 가차없긴 하지
─^^7
“아, 물론 공격해도 돼. 그럼 난 링크를 타고 화성에 갈 테니까. 화성 작업이 완료되기도 전에 일이 이렇게 돼서 조금 아깝긴 한데, 그래도 못 살아남을 정도는 아니거든.”
─아까비 죽이면 안 되네
─저새낀 그럼 왜 지금까지 여기에 남아있던 거임
─화성작업 완료 머시기 때문 아님?
─바이러스 삭제행 안 되려고 스칼렛으로 작업치고 있던 중인듯
─지금 본체 걍 파괴하면 안 돼? 안쪽에 본체 있담서
─스칼렛 몸 들어가서 안 되는 거 아님?
“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선악과의 뱀은 스칼렛이 절대 짓지 않을 표정으로 호기롭게 외쳤다. 은우는 그걸 보며 목덜미를 쓱 쓸었다.
그 순간에도 선악과의 뱀은 계속해서 그를 도발하는 중이다. 그것도 쓸데없이 자기가 스칼렛을 조종했던 일들을 예시로 들며.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저새끼 너무 나대네;;
─ㅉㅉ
─주제파악 시급
─아직도 눈치 못챘쥬? 끝났쥬?
─일단 때려 그리고 생각해
─때려봐! 때려보라고!!
그들의 고개가 설레설레 저어졌다. 그다음 순간 펼쳐지는 광경은 역시나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본체를 스칼렛으로 옮기긴 했지만, 그 전까진 저 안쪽 컴퓨터에 있었을 거다. 그걸 통해 녀석을 역추적하겠다.”
선악과의 뱀이 뭐라 할 틈도 없었다. 엄버의 말이 서릿발처럼 몰아쳤다.
“내가 해킹할 시간만 벌어 줘.”
퍼억!
은우의 주먹이 선악과의 뱀, 즉 스칼렛의 뺨을 후려쳤다.
“언제 저 말 하나 기다렸네요.”